[일터4월_특집3] 질병권의 관점에서 만성질환자의 노동권을 이야기하기 / 2021. 04

[만성질환 노동자의 자리]

질병권의 관점에서 만성질환자의 노동권을 이야기하기

김다연 상임활동가

작년 성공회대 시설관리 용역업체는 ‘정년을 맞은 노동자도 “건강상 업무수행“에 문제가 없으면, 1년 단위로 촉탁연장 계약을 최대 3번까지 맺을 수 있다’는 골자의 단협을 깨고, 방광암으로 수술과 요양을 위해 2개월 병가를 사용했던 한 노동자를 해고했다. “건강한 육체”를 바탕으로 청소 업무를 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노동자는 건강에 이상 없다는 의사 소견서도 제출했었다. 

질병 없는 “건강한 육체”를 도달해야 할 이상이자 노동자라면 갖춰야 할 기본값으로 여기는 사회의 노동시장에서는, 만성질환자들과 같이 회복하기 어려운 병과 함께 해야 하는 몸 혹은 아픈 적이 있는 몸(미래에 아플지도 모를 몸)은 그 자체로 결격사유다. 어릴 적 소아암 이력이 차별의 근거가 되기도 할 정도니. [각주:1] 아픈 이들은 자신의 질병, 질병 이력을 감추고 몸을 돌보기 위한 최소한의 요구도 쉬쉬한다. 설사 채용이 되어도, 건강한 육체도 병들게 할 만큼 과도한 근무 시간과 일의 양은 질병과 통증을 악화시키니 버텨내는 게 불가능하다.

이런 어려움은, 자신의 질병과 통증을 이기적인 핑계로 보는 동료들의 시선이 주는 두려움으로 배가된다. 아픈 이들은 타인의 기대에 부응해야 사정을 양해받고, 몸에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기에 자기 몸의 상태와 통증을 입증하고 설득해야 한다. 질병이 눈에 잘 띄지 않거나 질병명이 없는 경우는 더 쉽게 의심의 대상이 된다. 사회는 폭력의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듯, 아픈 사람에게도 ‘아픈 사람다움’을 강요한다. 

타인의 시선을 포함한 감당할 수 없는 노동조건은, 아픈 몸들을 노동에서 배제하고 노동권을 박탈한다. 이렇게 사회에서 몸이 오롯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험들은, 아픈 이들이 질병과 질병을 앓는 자신을 스스로도 수용하기 어렵게 만든다. 

질병권, 아픈 몸을 기본값으로 하는 노동조건을 말하다

이런 한국 사회에서, 몇 년 전부터 질병과 함께 살아가는 이들이 자신의 질병 경험과 삶을 공적으로 드러내며 ‘잘 아플 권리’를 주장하는 “질병권”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질병권이란, “(건강이 아닌) 질병을 중심에 배치하고, 아픈 몸을 사회의 기본 몸으로 설정하며, 질병을 겪는 상태도 삶의 ’정상적‘시기로 본다. 더 이상의 건강을 쟁취할 수 없는 아픈 몸을 인정하고, 모든 이가 건강을 삶의 최우선 목표로 두지 않을 수 있음을 존중” [각주:2] 받을 권리이다. 

질병권은 “아파도 충분히 회복할 수 있는 여건” 정도가 아니라, “취약하고 아픈 몸을 기본값으로 하는 사회”를 강조한다. 이런 사회의 노동권은 어떤 모습일까. 아픈 몸들도 ‘정상적으로 아프면서’ 무사히 일할 수 있게 하는 노동환경의 구성을 전제조건으로 할 것이다. [각주:3] 포인트는 건강한 몸에 기준을 둔 채 예외적으로 아픈 몸들을 특별히 배려하는 게 아니라, 애초부터 아프고 약한 몸에 맞는 노동환경을 설계를 주장한다는 점이다. 이는 ILO의 산업보건서비스의 원칙 중 노동자의 능력에 기준을 두고 노동조건과 노동환경을 맞춰야 한다는 ‘적응의 원칙’과 같은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또한, 질병권 담론에서는 한 사회의 폭력과 배제와 차별과 극심한 경쟁과 과로와 오염된 환경과 같은 요소들은 몸에 질병과 통증으로 현현하지만, 아픈 몸에 대한 책임은 오롯이 개인에게 전가되는 현실을 비판한다. 이 역시 노동자의 몸과 마음을 해치는 노동조건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노동안전보건운동의 주장과 직결된다.

질병권의 관점에서 노동권을 볼 때, 더 주목할 점은 이제까지 사회에서 제대로 고려되지 않았던 “아픈 몸이라는 정체성”이다. 질병권에서는 건강중심 사회에서 소수자가 될 수밖에 없던 아픈 몸들이 바로 여기에 존재하며, 정당한 노동조건을 이야기할 때 이 몸들의 특수성을 배제해선 안 되고, 더 나아가 바로 이 아픈 몸이 사회의 기준이 되어야 함을 주장한다. 

이제까지 아픈 몸은 비생산적인 몸, 폐를 끼치는 몸, 독립적이지 못하고 의존하는 몸, 쉽게 주류에서 밀려나는 몸이기에 배제와 혐오의 대상이었다. [각주:4] 하지만 몸은 질병과 각종 통증을 포함한 변화에 늘 열려있기에, 아픈 몸 정체성은 누구나의 것이기도 하다. 질병권의 관점은, “취약한 몸”이라는 인간생명체의 본질적인 특성을 기준으로 노동조건을 구성해야 하며, 이는 건
강한 이들에게도 훨씬 유익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넓은 스펙트럼의 아픈 몸 중, 기준이 되어야 할 ‘아픈 몸’은 무엇일까. 

“아픈 몸을 인정하는 것”(질병권 개념정의 일부)은, 몸 상태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수용 받음을 의미한다. 결국 질병권에서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노동조건이란, 그 개개인의 특수한 몸의 조건과 경험들이 모두 존중받는 환경을 말한다. 이는 “정상적인 몸, 표준의 몸의 기준에 도전함으로써 정상성에 균열을 만들고 새로운 n개의 정상을 만드는 것이다” [각주:5]

동일노동의 기준
몸의 조건에 따라 생산량을 배분하면 비교적 건강한 몸이 더 많은 생산량을 소화하게 될 텐데, 이것이 역차별로 오인될 수 있다. “동일노동”을 계산하는 방식에 대한 재고가 필요하다. 익숙한 슬로건인 “동일노동 동일임금”에서, 동일노동은 무엇을 기준으로 하는가. 신체적(정신을 포함한) 차이를 고려하지 않은 동일한 시간/작업량과 같이 완전하게 동일한 조건
의 노동은 과연 평등한가? 적어도 한국사회에서 요즘 자주 이야기되는 평등이란, 이러한 기계적 평등에 머무는 듯하다.

“크론병 환자는 과로나 스트레스로 인해 염증이 심해지고, 장에 구멍이 뚫리기도 한다. (...) 크론병을 ‘딛고’ 성공하는 이들도 존재하겠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고통을 계속 외면하고 참아야 한다. 이는 목숨을 건 싸움이 된다.” [각주:6]

누군가에게는 피로감을 주는 일이 누군가에게는 목숨을 건 사투다. 겉으로 볼 때 동등해 보이는 노동조건은, 사람의 신체 조건에 따라 천차만별의 노동강도를 유발할 수 있다. 나에게 오는 신체적 부담의 관점에서, 이는 아픈몸에 대한 차별이다. 따라서 동일노동의 기준은 동일하거나 유사한 노동강도라는 관점에서 설정해야 한다. [각주:7]

노동현장은 돌봄현장이다
노동권은 천부적으로 태어나면서 부여되는 게 아니라, 노동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제도에서 생성된다. 그러니 아픈 몸의 노동권을 보장한다는 건, 일정 선 이상으로는 노동할 수 없고 때론 통증으로만 가득 차 몸을 돌보는 일에 전념해야 하면서도, 생존을 유지하고 사회관계망에서 배제되지 않으며,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 노동을 원하거나 필요로 하는 복잡다단한 몸들의 욕망에 적극적으로 관심 갖고 여건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을 수반한다. 그렇게 세부적인 개별성을 고려할 때에서야, 아픈 몸들도 “동등한 인간”의 조건을 누리게 된다. 

아픈 몸이 가진 특수성에 주목하고, 그들에게 적합한 노동조건을 만들어내는 일은 ‘돌봄’ 그 자체이다. 노동현장은 돌봄현장이다. 하지만 법은 공식적인 강제력을 동원하여 최소한 지켜져야 할 것들이 지켜지게끔 할 뿐, 유연성을 발휘하기 어렵다. 세밀한 조정이 필요한 아픈 몸에 대한 제대로 된 노동권 보장을 위해서는, 상호 간에 ‘섬세한 눈길과 손을 가진 돌봄의 자세’로 몸을 대해주는 대인관계(방식)라는 제도가 때론 더 중요하다. 돌봄은 법이나 기타 규제로는 차마 파악할 수 없는, 상대방의 독특성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대인관계방식의 변화는 단순히 주체들의 마음
먹기에 기대어서는 안 되며, 돌봄을 가능하게 하는 덜 경쟁적인 사내 문화, 아픈 몸을 기준으로 한 넉넉한 인원 배치와 같은 조건들 역시 받쳐줘야 한다.

아픈 몸들이 함께 노동현장에 안녕히 존재할 수 있도록 돌보는 일이 곧 모두가 더 편하고 안전한 노동환경을 만드는 일이다. 우리가 아픈 이들의 각양각색의 질병 경험과 이들의 노동권에 대해 더 자주, 많이 듣고 말해야 할 이유이다.

 

  1. 조한진희, 기사 <건강 중심 세계의 질병 난민>, 비마이너, 2020.04.01 [본문으로]
  2. 조한진희(다른몸들), <우리 시대 건강권을 넘어, 질병권을 제안하다>, 2020한국문화인류학회 학술대회 자료집, 174p [본문으로]
  3. 물론, 아픈 몸들 중 전혀 일할 수 없는 몸도 있을 것이다. 질병권은 일하지 않을 권리 역시 동시에 주장한다.(조한진희(다른몸들), 2020, 175p 참고) [본문으로]
  4.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에서는, 아픈 몸에 대한 혐오는 곧 인간이라면 마땅히 피해야 할 ”추함과 역겨움“을 ”’나‘의 현실에서 지우려는 욕구“로 본다. 돌봐져야 할 아픈 몸들은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이는 내가 차마 맞이하고 싶지 않은 ”비참한 상황“에 놓이게 하기 때문이다.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인 개인”이 바람직한 모델로 제시되고, 아픈 이를 위한 제대로 된 사회적 지원체계가 없는 상황에서 의존할 곳은 가족뿐이다. 그마저도 운이 좋아야 한다. 돌봄제공자(주로 여성가족구성원)와 집에 고립되어 질병과 경제적 어려움, 불안한 미래를 감당하며 생존 이외에는 생각할 수조차 없는 협소한 삶은 취약한 인간의 몸과 타인에의 의존을 혐오하게 할만큼 충분히 좌절스럽다. [본문으로]
  5. 조한진희(다른몸들), 2020, 174p [본문으로]
  6. 안희제, 『난치의 상상력』, 동녘, 2020, 94p [본문으로]
  7. 기저질환 환자의 경우, 주 52시간 이상 노동시 기저질환이 없는 이에 비해 심뇌혈관질환 발병률이 1.58배 상승한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