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성질환 노동자의 자리]
아픈 몸들은 외친다. 산재보험과 건강보험은 ‘잘 아플 권리’ 보장하라.
이종란 회원, 반올림 상임활동가
그동안 우리 사회에는 아픈 몸에 대한 고려가 없었다. 아파도 학교에 가야 했고, 아파도 일터에 나갔다. 그런데 코로나19 감염병 시대를 관통하면서 우리는 ‘아프면 쉴 권리’가 있다는 것을 배우고 있다. 처음엔 단지 감염병 전파로 인한 위험성을 차단해야 한다는 필요에서 시작된 의미겠지만, 점점 ‘아프면 쉴 권리’에 대한 사회적 필요성과 공감대는 커지고 있다.
‘아프면 쉴 권리’에서 좀 더 나아가 ‘잘 아플 권리’에 대한 주장도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건강권’이라는 개념 대신에, ‘질병권’이라는 개념으로, ‘잘 아플 권리’를 주장하고 있는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의 저자 조한진희 님은, 아픈 몸으로 여러 해를 살다 보니 우리 사회의 제도가 ‘건강한 사람’을 기준으로 설계되어 있고, ‘아픈 몸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는 문제의식이 생겼다고 한다. 매우 공감 가는 말이다. 반올림에서 암이나 난치성 질환 피해자분들을 만나오면서도 ‘잘 아플 권리’가 얼마나 부족한지 느낄 수 있다.
아픈 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아픈 이는 질병 자체가 주는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것 외에도 힘든 점이 많다. 아프면 일을 못 하니 치료비, 생계비 부담이 크다. 오랜 투병으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 돌봄의 문제는 본인을 넘어 가족 전체의 문제가 된다. 아픈 게 미안할 일이 아닌데도 가족에 대한 미안함에 눈물을 보인다. 혼자 살다가 아프면 요양병원에라 도 의지해야 한다. 오랫동안 투병생활을 하다가 기초생활 수급권자가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수급권자가 되면 의료보호 대상이 되므로 치료비 걱정은 줄지만, 빈곤으로 인한 은근한 차별을 당하며, 작은 일자리도 얻을 수 없다.
이처럼 아픈 몸으로 살아가다 보면 빈곤과 소외가 현실이 된다. 오로지 노동으로만 먹고 살게 설계되어 있는 현대사회 구조에서 장애인이나 아픈 몸들은 쓸모없는 사람 취급을 당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그나마 존재하는 사회보장제도는 부족하고 허술하다. 차별당하지 않은 사람이 차별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 하듯이, 건강보험이나 산재보험이 아픈 사람이 겪는 어려움을 바탕으로 설계된 것이 아니면 제도는 겉 돌고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
암이나 난치성 질환 등에 대해 산재 인정이 시작된 지 수년이 흘렀으나, 산재보험은 이들의 현실적 필요를 잘 흡수·포괄하지 못하고 있다. 이에 반올림에서 경험한 몇 사례를 공유하면서 개선의 필요성을 이야기해보겠다. 또한 암이나 만성질환의 경우 건강보험 영역에서의 보호가 중요하다. 따라서 최근 논의되는 건강보험 상병수당에 거는 기대로 글을 마무리해 보겠다.
난치성 질환, 암 피해자의 휴업급여 부지급 사례
은희씨(가명)는 루푸스 환자이다. 25년 전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일할 때 이 병이 발병했 다. 치료제가 없어 25년째 이 병과 함께 살아간다. 2019년 근로복지공단에서 산재 인정을 받았다. 루푸스는 신체 장기 침범이 주요 증상이다. 어느 날 갑자기 신체 장기 어디에서든 이상이 나타날 수 있다. 갑자기 중환자실에 실려 가기도 했고, 뇌경색이 와서 현재까지 후유증이 있다. 합병증으로 생긴 쇼그렌(건조증후군) 때문에 치아의 80%에 손상이 오고, 한쪽 눈은 궤 양이 생겨 각막 이식까지 받았다. 그나마 수급권자가 되어 병원비 부담은 덜었으나 생계의 어려움을 겪는다.
이런 은희씨에게 산재 인정은 큰 희망을 주었다. 시효가 남아있는 2011년부터 2019년까지 우선 8년 치의 휴업급여를 신청했다. 그런데 믿을 수 없게도 고작 76일 치의 휴업급여만 지급이 되었다. 류마티스 내과 통원치료 일만 지급된 것이다. 몸이 아파 집 밖에 나가지 못했던 시간들을 보냈음에도, 휴업급여가 거절된 이유는 무엇일까.
‘휴업급여’란 업무상 사유로 부상을 당하거나 질병에 걸린 노동자가 요양으로 취업하지 못한 기간에 대해 지급하는 보험급여를 말한다. 평균임금의 70%를 휴업급여로 지급한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 52조) 여기서 ‘요양으로 취업하지 못했다’는 것을 ‘어떤 기준으로 판단할 것인가’의 문제가 남는다.
근로복지공단은 ‘요양급여 신청소견서’ 서식란에 주치의에게 통원치료 기간 중 환자의 취업이 가능한지 또는 불가능한지에 대한 의학적 소견을 묻는 체크박스를 만들었다. 어떤 설명도 없이 그 서식을 맞닥뜨린 주치의는 어떤 생각을 할까. 주치의는 산재보험 휴업급여 제도가 무엇인지 모른다. 그러니 자신의 소견으로 취업 불가능하다고 하면 환자가 노동시장에서 배제당해 생계의 위협을 받을까봐 우려한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주치의는 근전도 검사결과 떨림은 있지만 그래도 움직임이 양호하니 취업 가능에 체크했다고 한다. 그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는 잘 몰랐다는 것이다.
휴업급여 지급 기준이 바뀌어야 한다
이렇게 아픈 노동자의 절박한 생존권이나 다름없는 휴업급여 문제를 결정하는 데에 있어, 주치의에게 아무런 설명도 없이 간편한 체크리스트 하나로 휴업급여 지급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부당하다. 또한, ‘취업할 수 없는 상태’를 ‘의학적 소견’으로만 판단하는 것도 재고되어야 한다. 의학적으로는 심각한 상태에 이르지 않으면 취업 가능하다고 판단할지 모른다. 그런데 현실적인 노동시장은 어떤가. 노동자들은 장시간 노동을 하고, 밤낮이 뒤바뀌는 힘든 교대근무를 견딘다. 아주 튼튼한 몸으로도 버티기가 힘들어 과로가 일으키는 여러 질병으로 고통 받는 것이 만연한 게 현실이다. 그럼에도 아픈 환자가 억지로 취업시장에 내몰리는 것은 부당하다.
은희 씨의 경우, 다행히 재심사 결정으로 8년 치의 휴업급여를 지급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은희 씨만의 문제는 아니다. 반올림의 최근 사례만 해도 두 사례가 더 있다. 암이 재발한 림프종 피해자의 경우, 주치의는 요양급여신청서 소견서 란에 취업이 가능하다고 체크하였다. 암에 대한 두려움, 약해진 면역력으로 취업은 고사하고 어떤 일도 할 수 없는 상황임에도 주치의의 소견 때문에 휴업급여는 부지급 되었다. 마찬가지로 뼈로 전이가 된 폐암 피해자에게도 같은 이유로 휴업급여가 부지급 되었다.
암 만성질환자를 보호하는 보험급여가 마련되어야
건강보험은 암 환자에 대해 요양비 산정 특례를 두고, 총액의 5%만 부담하게 한다. 5년 동안은 적어도 이 특례가 적용된다. 그러나 산재보험은 직업성 암 환자에 대해 별다른 대책 같은 것이 없다. 암이나 만성질환에 맞는 보험 급여가 필요하다.
산재 보험급여 중에 상병보상연금 제도가 있긴 하다. 요양급여를 받는 노동자가 요양을 시작한 지 2년이 지났음에도 치유되지 않고 ‘중증’요양 상태인 경우에 상병보상연금을 지급한다(산재법 66조). 그러나 그야말로 중증의 경우만 지급하는 것으로는 보호가 미흡하다. 이 상태에까지 이르는 정도가 아닌 만성질환자들은 현실적으로 취업을 할 수 없는데도, 상병 보상연금을 지급 받을 수 없다. 휴업급여의 경우 요양을 시작한 지 2년이 지나면 계속 심사 대상에 오른다. 제도가 불안정한 것이다. 만성 질환자들을 폭넓게 보호하도록 휴업급여 및 상병보상연금 지급기준에 대한 재고가 필요하다.
산재 비지정 병원의 문제, 건강보험 요양비 부당 환수의 문제
산재 비지정 병원의 문제, 건강보험 요양비 부당 환수의 문제도 심각하다. 난소암을 진단 받은 장00님은 생사를 오가는 투병 과정에서 부득이 요양병원에 입원했고, 어렵게 산재가 인정되었다. 그런데 근로복지공단에서는 해당 요양병원이 산재 비지정 병원이므로 산재 요양급여 적용이 되지 않는다는 안내를 하지 않았다. 나중에서야 산재가 적용되지 않는다는 걸 알았지만 건강보험이 있으니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2년 뒤 갑자기 건강보험공단에서 청천벽력 같은 통보를 해왔다. 산재 노동자인데 건강보험이 적용된 것은 ‘부정수급’이니 이달 안으로 요양병원 치료비 1400만원을 반환하라는 것이다. 산재로도 처리가 안 되었는데, 건강보험 요양비마저 환수하겠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을까.
산재노동자는 산재의료기관(지정병원)에서 요양하는 경우만 산재보험이 적용된다. 부득이 한 경우에 한해서만 사후 요양비 처리를 할 수 있다(산재법 제40조). 이러한 적용방식은 의료 기관 선택권에 대한 심각한 제약이자 기본권 침해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장00 님의 사례처럼 돌봄이 꼭 필요한 환자가 요양병원을 이용하려 해도, 가까운 곳에 산재 지정병원이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심지어 국림암센터나 원자력병원도 지정병원이 아니다.
근로복지공단은 비지정병원의 요양에 대해서도 산재보험을 적용해야 한다. 부득이한 경우에만 예외를 허용하는 부당한 법조항도 개정되어야 한다. 건강보험공단도 문제가 크다. 아픈 노동자는 단지 몰랐을 뿐이다. 이러한 사정을 건강보험공단에 수차 이야기해도 자신들이 고려할 사항이 아니란다. 건강보험공단은 이제라도 산재 노동자를 부정수급자 취급하며 1400만원을 반환하라는 독촉과 협박을 멈추길 바란다.
2007년 국민고충처리위원회(현 국민권익위)는 ‘산재환자의 요양급여 지급제도 개선 권고안’을 냈다. 요지는 “산재보험법의 적용대상 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국민건강보험법을 적용하지 않는 것은 사회보험이익을 과도하게 제한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사회보장제도의 본질에도 반하는 것이므로 산재보험급여 대상이 되지 않는 요양은 건강보험법을 적용하도록 함이 타당하다”는 것이다. 또 ‘산재노동자가 건강 보험료를 납부하고 있는데 건강보험을 적용하지 않는 것은 국민의 기본권을 과도하게 제한하고 있는 것이니 국민건강보험법이 개정될 때까지 지침을 마련하거나 관련 지침을 개정하라’고 권고했다.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이 이를 수용한다고 밝혔다.
권고안이 나온 지 14년이 흘렀다. 이제라도 법이 바뀌어야 한다. 법이 바뀌기 전이라도 건강보험공단은 부당한 환수조치를 멈춰야 한다. 두 보험 간의 연계성이 떨어지고 보장성이 떨어지는 문제를 재해노동자에게 전가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금지시켜야 한다.
아프면 쉴 권리, 건강보험 ‘상병수당’ 도입에 거는 기대
코로나19 감염병 시대에 아프면 쉴 권리를 제도상 정착하기 위한 논의가 한참이다. ‘업무 외 질병’에 있어서도 아프면 쉴 권리를 구현하기 위해 건강보험에 상병수당 도입을 추진하려는 것이다. 구체적인 내용은 이제 논의 중이라는데, 부디 단기적 대안으로 그치지 않길 기대해본다.
아프면 쉴 권리가 제대로 구현되기 위해서는 지급 기간과 보장수준에서 충분한 수당이 되어야 한다. 휴업급여처럼 지급에 있어 까다로운 조건을 걸지 말아야 한다. 또한 직장에 복귀하는데 있어 어떠한 불이익도 없어야 권리가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건강보험의 상병수당 논의는 모든 노동자들의 문제이자 보편적 복지의 문제이다. 사실, 아픈 이유가 일 때문인지, 또 다른 이유 때문인지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이유가 혼재되어 있기도 하고 이유를 밝히기 어려운 경우가 태반이다. 산재라 하더라도 규명이 어렵기도 하고, 산재가 아니면 휴업급여 같은 것이 필요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병의 원인과 무관하게 아프면 치료비와 생계비 걱정 없이 잘 치료받고 다시 복귀할 수 있도록 상병수당이 제대로 설계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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