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호_특집3] 노동자 참여, ‘제대로 된’ 위험성평가의 시작

노동자 참여, ‘제대로 된위험성평가의 시작

 

김다연 상임활동가

 

본 인터뷰는, 노동자들이 직접 참여한 위험성평가를 진행한 경험이 있는 KB오토텍과 신한발브의 이야기를 담았다. 두 사업장은 위험성평가를 1년에 한 번 해야 하는 형식적인 책무가 아니라, 일상적인 노동안전(이하 노안)활동에 위험성평가를 녹여내 운영하고 있었다. 이들이 위험성평가를 지회의 노안사업으로 정착시키기 위해 해 온 노력과 운영방식, 개선점에 대한 고민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 금속노조 충남지부 KB오토텍지회 박종국 명예산업안전감독관 인터뷰

 

위험성평가는 언제부터 진행하셨나요?

2016년에 위험성평가를 노조에서 직접 해보려고 했고, 현장의 위험요인 조사와 위험성 평가까지 마쳤으나 사측의 노조파괴 시도로 중간에 무산됐습니다. 그러다 2018, 2019년에 걸쳐 노조에서 처음으로 개선과정까지 포함한 위험성 평가 전체 절차를 진행했어요.

물론 이보다 먼저, 사업장 내에서 활동하는 안전보건지킴이를 구성했어요. 산업안전보건공단에서 운영하는 안전보건지킴이 사업을 차용한 건데요. 20188월 산업안전보건위원회(이하 산보위)에서 안전보건지킴이를 공식적으로 운영할 것을 사측과 합의하고, 30명 정도를 뽑았어요. 6시간의 활동 시간을 확보해서 2시간은 구성원 전체 회의 및 교육을 진행하고, 나머지 4시간은 사업장 안전보건과 관련한 현장의 의견들을 수렴하고 개선하는 데 활용했습니다.

이렇게 했던 이유는, 1년에 1회 하는 위험성평가만으로 사업장의 안전보건에 관한 실질적인 문제들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아서예요. 사업장의 유해위험요인을 발견하고 개선하는 일을 일상적으로 해보려고 안전보건지킴이 제도를 도입한 거죠. 위험성평가도 일상적 활동 중 하나예요. 또 이렇게 조합원들이 활동해야, 노안위원들도 지치지 않고 오래 갈 수 있기도 하고요.

이렇게 노안활동을 전개할 수 있었던 데에는 노안부의 노고가 커요. 조합원의 산재 대부분을 승인받기도 했고, 그 과정에서 우리가 아프거나 사고를 당하는 건 개인의 부주의 문제가 아니라 노동환경의 문제라는 이야기도 나누고요. 그러면서 노안부에 대한 조합원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고, 이후 위험성평가를 포함한 일상적 노안활동도 조합원의 지지를 받으며 시행할 수 있었죠.

 

위험성평가 절차는 어떻게 되나요?

절차상으로는, 우선 위험성평가를 하면 위험성평가의 목표와 절차·수행 시기·협력 기관 등 관련한 모든 사항을 조합원과 공유합니다. 그리곤 부서마다 조사 날짜를 정한 뒤, 조사를 시행하죠. 이때 안전보건지킴이 위원들이 조사 과정을 이끌어가는 역할을 맡아요. 필요하면 노안위원과 협력 기관의 노안활동가가 참여해서 돕기도 해요. 하지만 위험유해요인을 찾고, 위험성 크기를 판단하고, 개선안을 도출하는 건 현장 노동자들입니다. 해당 공정을 가장 잘 아는 전문가는 현장 노동자이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효과적인 개선을 도출할 수 있으니까요.

 

조사 과정에서 의견이 엇갈릴 경우, 어떻게 문제를 해결하나요?

처음엔 노안문제에 있어 더욱 민감한 노안위원 없이 조합원과 실행위원에게만 위험성평가를 맡길 경우, 사업장의 위험이 혹시나 축소되는 건 아닐까 염려가 되기도 했어요. 그래도 일단 1차 조사는 전적으로 맡기고, 자율적으로 진행하도록 했습니다. 만약 보충할 부분이 있다면, 노안위원이 의견을 내고 설득하거나 실행위원이 질문을 던지기도 했어요. 이를 통해 현장의 위험을 새롭게 확인할 수 있도록요.

부서별 논의를 할 때도, 서로 의견이 엇갈릴 때가 있어요. 누군 괜찮다 하고, 누군 위험하다고 하는 거죠. 이럴 땐 논의를 거친 뒤, 어떻게든 합의안을 도출해요. 서로 자기 의견을 조금씩 조정하고, 함께 만든 방안이어야 모두가 개선에 참여하거든요. 만약 누군가의 의견을 배제해버린다면, 그 사람은 해당 개선안에 동의할 수가 없겠죠. 그러면 개선과정이나 다음 위험성 평가에 참여하지 않을 테고요. 무엇보다도 위험성평가에 참여하는 이들이 자율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그들의 의견을 존중해야 합니다. 그게 아니라면, 그냥 옛날처럼 전문가에게 맡기는 거나 다를 바 없죠.

 

위험성평가는 불이행 시 처벌 수위가 크지 않아, 실효성이 없는 제도란 평가도 있는데요.

물론 위험성평가를 안 할 때 받는 처벌 수위가 너무 낮긴 하죠. 하지만 위험성평가를 이행하도록 하는 다른 방안을 모색할 수도 있어요. 예를 들어 산보위에서 위험성평가 진행하기로 합의한 뒤, 불이행하면 산안법상 위반사항 해당해요. 이처럼 현장에서의 산안법상 위반사항을 근거로, 사측을 고소·고발할 수도 있죠. 저희의 경우엔 위험성평가를 단협의 조항으로 넣기도 했습니다. 위험성평가를 실시하지 않으면, 단협안 위반이 되도록요. 이외에도 가능한 여러 방법을 동원해 압박을 넣어, 위험성평가를 실시하도록 강제해야 합니다.

문제는 이것도 KB오토텍 노조가 힘이 있으니 가능하단 거죠. 또 저희는 그간 노안활동을 전개하면서 조합원과 소통을 해왔잖아요. 그 결과, 현장의 위험에 대한 노동자들의 전반적인 인식이 높아졌어요. 회사가 이걸 깨고 위험성평가를 하지 않거나, 제대로 시행하지 않는 것도 쉽지 않아진 거죠. 저희가 이렇게 되기까지 10년이나 걸렸어요. 사측의 노조파괴도 겪으면서요. 상황이 이러니 노조에 힘이 없거나 미조직 사업장 경우에는 위험성평가 진행 자체가 쉽지 않죠. 무엇보다도 위험성평가를 실시하지 않을 경우, 그 처벌 수위가 높아져야 할 필요성이 여기에 있습니다.

 

2. 금속노조 경기지부 화성지역지회 신한발브분회 김현호 사무장 인터뷰

 

위험성평가는 어떻게 시작됐나요?

당시 현장엔 절삭유가 여기저기 흐르고, 금속분진이나 오일 미스트, 소음, 안전조치 없는 중량물 취급공정 등 다양한 문제가 산재해있었습니다. 13~14년도 현장엔 연간 발생하는 재해만 50건이 넘었고, 그중에선 1~3달씩 요양해야 하는 사고나 질병을 경험하는 사례가 많았어요. 현장의 문제를 의식하던 중, 노안활동이 활발한 금속 경기지부로 넘어오게 되면서 본격적인 노안활동을 해야겠단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후 노안부장과 임원, 분회의 대의원으로 구성된 노안보건팀을 구성하면서 활동을 시작했죠.

노안보건팀은 생애전환기 검진과 격년 위암 검진을 위한 추가 휴가와 비용 지급을 단협안에 추가하고, 내실 있는 정기안전교육 실시, 안전 보호구 지급 요구 등 여러 사업을 진행했어요. 그중 하나가 공정별 현장 환경문제 및 위험도에 대한 체크리스트작성입니다. 위험성평가 제도를 활용한 건 아니었으나 위험성평가에서 주요하게 다루는 현장의 근골격계 유해요인, 사고성 재해 유발요인, 소음, 화학물질 등을 관리하는 활동을 시작한 거죠. 이를 바탕으로 2015년부턴 조합에서 기존에 노사협의회로 대체되던 산보위를 운영키로 사측과 합의했어요. 다음 해, 산보위는 일상적 노안활동을 위한 공식제도인 위험성평가를 실시하기로 했고, 그해 3분기 신한발브에서 위험성평가를 처음 실행하게 됐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위험성평가를 구성했나요?

일단 구성원 내부적으로 위험성평가가 뭔지, 어떻게 진행되고 왜 필요한지를 잘 모르는 상태였어요. 위험성평가와 관련된 전반적인 교육이 필수적인 상황이었죠. 그래서 조합의 상집간부와 실행위원, 전체 조합원을 대상으로 해서 3번의 교육을 진행하게 됐습니다.

교육 이후, 노동자 의견이 반영된 위험성평가를 실시했어요. 조사는 두 가지 단계로 구성했고, 시트는 금속노조에서 만든 위험성평가 시트를 사용했습니다. 우선 실행위원과 작업자들이 함께 현장 라인을 돌며, 직접 사진과 영상을 찍어요. 그리곤 해당 공정의 위험유해요소나 개선안에 대해 여러 의견을 나누고, 시트를 작성하는 방식으로 진행했어요. 이때 위험성평가 진행에 필요한 실행위원은 사측에서 3, 노안보건팀에서 5인 해서 총 8명으로 구성했고요. 실행위원은 자신이 맡은 공정의 위험성평가를 진행하고, 서로 주마다 1회씩 만나서 함께 토의하곤 했습니다.

신한발브가 고안한 위험성평가의 구성은 해당 공정을 가장 잘 아는 작업자의 시선에서 유해위험요소를 찾아내는 동시에 실행위원이라는 제삼자의 눈을 통해, 교차관찰이 가능하다는 점이예요. 오래 일한 작업자는 그 공정의 전문가가 되기도 하지만, 자칫하면 작업 공정에 내재한 유해위험요소에 익숙해질 수도 있거든요.

위험성평가를 통해 실행위원과 작업자인 조합원이 서로 눈높이를 맞춰나가며 현장의 다양한 유해위험요소를 발견하고, 이들의 개선점을 찾고, 앞으로의 노안활동에서 염두에 둘 만한 지점을 파악할 수 있게 됐어요. 사측의 실행위원 역시 위험성평가를 통해 도출된 위험은 물론 현장의 개선이 필요하단 것을 인정하게 됐고요. 평가가 끝난 이후에는 정기안전 교육시간을 활용해, 조합원을 대상으로 결과 보고와 교육을 진행했습니다.

 

이후의 개선은 어떻게 이뤄졌나요?

단기간 내로 현장에 정말 많은 개선이 필요하단 사실을 사측과 공유하고, 설득하기 위해선 보고서 작성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어요. 일단 해당 공정의 유해위험요소와 위험성평가를 작성한 시트는 각 공정에 비치해뒀어요. 그리곤 노안보건팀에서 위험성평가를 토대로 한 별도의 보고서를 작성하고, 이를 설득의 근거자료로 활용했습니다.

현장의 모든 개선안이 한 번에 적용된다면 좋겠지만, 회사의 예산 사정상 그럴 순 없었어요. 개선이 필요한 여러 문제를 투자가 많이 필요한데 현재 예산에서 당장 가능하지 않아, 장기적으로 진행해야 할 문제 회사의 설비팀이나 법무팀을 통해 해결할 수 있는 문제 재료를 구매해 현장의 관리자나 작업자가 직접 개선할 수 있는 문제, 이렇게 세 단계의 범주로 나눴어요. 이를 바탕으로 개선 계획을 세운 뒤, 조금씩 개선해 왔죠. 이후 2018년 위험성평가 때는 산보위에서 조합 측 실행위원의 활동 시간을 보장받고, 회사의 예산안에서 별도의 현장 개선 사업 예산 항목을 편성하기도 했습니다.

 

제대로 된 위험성평가를 진행하려면요?

아무래도 개선안 실행을 위한 재원 확보가 어려우면, 위험성평가의 실효성이 떨어지는 게 가장 큰 문제 중 하나죠. 자원이 적거나 재정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놓인 사업장은, 현장의 위험을 안다고 해도 실제 개선으로까지 이어지기가 어렵습니다. 지자체나 정부의 대출이 있긴 하지만, 대출요건 중 하나가 현재의 재정 상태여서 사실상 대출을 승인받기가 어려운 실정이에요. 업종에서의 경력이나 회사가 가진 영업력 등 다양한 요소를 자산으로 보고, 대출 여부 평가를 한다면 좋을 텐데 말이죠. 앞으로는 어려운 상황에 놓인 현장에서도 노안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필요한 재원의 여러 지원책이 마련되면 좋겠습니다.

다른 하나는 저희가 위험성평가를 진행한 지 6년 정도가 됐는데요. 매년 실시하는 조사다 보니 공정에 큰 변화가 없는 이상, 사실상 내용에 큰 차이가 없는 경우도 많습니다. 조합원도 매년 똑같은 거 진행하는구나, 큰 변화 없는데 기존의 개선점을 추진하면 되는 거 아니냐는 반응을 보이기도 하고요. 현장의 위험을 발견하고 사고나 질병을 예방하기 위한 새로운 방법이 있을지, 더 해볼 수 있을 만한 것은 없을지 새로운 고민이 듭니다.

 

[9월_특집2] “노동자가 참여하는 위험성평가, 무엇이 어려운가요?”

노동자가 참여하는 위험성평가, 무엇이 어려운가요?”

 

최진일 회원, 충남노동인권센터 새움터 대표

 

최근 필자가 속한 금속노조 충남지부 노안위원회 자문단은 소속 지회들을 대상으로 노동안전보건활동 실태조사를 진행 중이다. 현장마다 진행되는 노동안전부장 및 담당 임원들과의 인터뷰에서는 성토대회라고 할 만큼 노안활동가들의 구구절절한 고충들을 확인하고 있다. 그리고 이번 인터뷰의 핵심적인 주제 중 하나가 바로 위험성평가. 특히, 금속노조는 올해 노동자가 참여하는 위험성평가를 핵심과제로 추진하면서 지속적으로 현장별 진행상황을 점검하고 있다. 금속노조가 추진하는 위험성평가의 프로세스를 요약하자면 1) 노동자참여방안을 포함한 위험성평가 실행안을 산업안전보건위원회(이하 산보위’)에서 합의하고 2) 현장노동자가 참여하는 실행위원회가 직접 위험성평가를 진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막상 금속노조가 추구하는 방식의 위험성평가가 진행되는 현장은 그리 많지 않다. 현장의 노안담당간부들은 위험성평가의 어려움을 어떻게 토로하고 있을까?

아직 인터뷰가 진행 중이기 때문에 통계화된 것은 아니지만, 가장 많은 대답은 교육의 부족이었다. 교육의 문제는 두 가지 측면에서 볼 수 있는데, 하나는 각 지회 노안담당자들에 대한 교육의 문제다. 노조 차원에서 위험성평가 교육을 심도있게 진행했지만 경험이 전무한 담당자들에게는 사업을 기획하고 집행하는 것부터 막막한 상황이라는 것이다. 또 하나는 간부나 담당자들만이 아니라 직접 위험성평가에 참여해야하는 노동자들에 대한 교육이다. 이는 또 다른 어려움으로 꼽힌 활동시간의 문제와 결합되어 있다. 조합원 모두에게 위험성평가의 취지와 참여방법을 알리는 교육시간, 주도적으로 위험성평가에 참여해야 하는 실행위원들에게 조사방법과 실행방법을 교육할 시간, 그리고 그들이 활동할 시간을 보장받는 것은 이를 처음 시도하는 현장에서는 높은 벽일 수밖에 없다. 이외에도 실제 변하는 것은 없이 매년 반복되는 평가 때문에 현장의 관심이 낮고 참여가 조직되지 않는다는 고민도 있었고, 몇몇 현장에서는 관리감독자 지위에 있는 조합원들과의 갈등 문제를 토로하기도 했다. 상당수 현장에서 조반장들이 조합원 범위에 포함되어 있는데 이들이 위험성평가에 대해 반대하거나 노동조합에 불만을 제기하는 일도 있다는 것이다.

 

위험성평가 설계도의 필수요소

이처럼 쉽지 않은 제대로 된 위험성평가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완성된 모델을 제시하는 것 이상의 현실적인 고민들이 필요하다. 수 많은 실천과제들이 있겠지만 위험성평가에서 노동자가 주체가 되기 위한 기반을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지, 위험성평가를 설계함에 있어 고려해야 할 지점이 무엇인지, 나아가 현실적인 대안들은 없는지 간략히 정리해보고자 한다.

 

교육+α

금속노조 충남지부의 인터뷰에서도 드러나듯 충분한 교육을 보장받는 것은 가장 기본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여기에는 전체 조합원에 대한 교육, 담당 간부들에 대한 교육, 현장실행위원들에 대한 교육 등이 다층적으로 배치되고 실행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처럼 교육을 배치하고 현장노동자들의 참여를 조직하는 것부터가 이미 사업의 일부이자 기획의 일부다. 경험이 없는 담당자들로서는 여기서부터 막히기 마련이다. 그들이 노동자가 참여하는 위험성평가의 전체적인 흐름과 핵심적인 차별점들을 체득하기 전까지는 이런 부분을 보완해 줄 장치가 필요하다. 방식은 여러 가지일 수 있다. 사업의 기획단계에서 상급단체 또는 지역의 노안활동가들의 지원이나 자문을 받을 수도 있고, 지역 내에서 경험이 많은 사업장 활동가들의 도움을 받거나, 그런 사업장에서 위험성평가가 진행되는 동안 견학과 체험을 통해 제대로 된 실전교육을 제공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이다.

 

활동시간의 확보

교육시간의 확보와 비슷한 맥락이지만 제대로 된 위험성평가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교육시간 이외에 위험성평가를 위한 활동시간이 보장되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임원이나 노안간부들은 전임자로서 혹은 기타 노사합의를 통해 위험성평가 기간 동안 활동시간을 보장받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현장의 노동자들까지 포함하여 실행위원회을 구성하고 이들의 활동시간을 일정하게 보장하는 사업장은 손에 꼽을 정도다. 위험성평가의 주체가 노동자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의견을 제시한다는 것을 넘어 평가의 주체가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제대로 된 위험성평가는 현장의 노동자들이 직접 위험성을 발견하고 평가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그들이 현장을 조사할 시간, 동료 노동자들과 토론할 시간, 평가시트를 작성하고 개선안을 고민할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물론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산보위를 통해 이러한 시간보장까지 포함하는 위험성평가계획을 합의하는 것이겠지만 현실적으로 이를 관철시키기 어려운 경우도 많을 것이다. 그렇다면 최대한 취지를 살려 부서별 실행위원을 선임하고 안전교육시간, 노동조합 교육시간 등을 최대한 활용하는 방법, 혹은 대의원 제도가 보장하는 활동시간이 있다면 대의원을 실행위원으로 선임하여 이를 활용하는 방안 등도 고민해 볼 수 있다.

 

노동자들을 위한 평가도구

대부분의 사업장에서는 안전보건공단의 표준을 따르거나 일부 변형하여 4M기법에 기반한 양식을 사용하여 위험성평가를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4M기법은 사고원인분석을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재해예방을 위한 위험성평가와는 어울리지 않는 측면이 있다. 또한 기법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이를 활용한 위험성평가가 지나치게 안전사고를 중심으로 진행되어 근골격계부담작업, 화학물질, 소음 등의 작업환경에 대해 다루지 못하는 경향이 크다는 점, 개선안을 결정하는데 있어 인적 요인이나 관리적 요인에만 집중하여 근본적인 개선이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점 역시 위험성평가의 실효성을 떨어트리고 있다. 무엇보다 이로 인한 현실적인 문제는 4M기법에 기반한 위험성평가도구가 현장의 노동자들이 다루기에는 직관성이 매우 떨어져 노동자참여를 가로막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고민은 오래전부터 진행되어 왔고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금속노조 등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사업장에 어울리면서도 현장노동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방식의 평가시트를 개발하고 활용하고 있다. 이러한 사례를 바탕으로 산업별, 직군별로 효과적이고 접근성 높은 평가도구들이 개발되고 보급되는 것 역시 중요하다.

한편, 노동자들을 위한 평가도구의 도입은 위험성을 추정하는 단계만이 아니라 위험성을 발견하는 단계에서도 충분히 제공되어야 한다. 현장의 위험은 현장의 노동자가 가장 잘 알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때로는 그 익숙함으로 인해 알고 있는 위험요소라도 누락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과거 산재기록, 작업환경측정결과 등을 사전조사함으로서 노동자들에게 충분한 정보가 제공되어야 하며, 현장에 맞는 체크리스트 등을 통해 꼼꼼히 현장의 위험요소를 발굴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독립성 보장과 개선안에 대한 검토

실태조사에서 언급되었던 관리감독자 조합원과 평조합원의 갈등은 위험성평가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흔하게 발생할 수 있는 문제다. 비단 관리감독자 지위에 있는 조합원들과의 문제만이 아니라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이견이 발생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현장에서 지위, 나이, 성별에 의한 권력은 모든 곳에 존재하며 위험성평가도 예외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가작업에 있어서는 실행위원들이 객관적이고 독립적인 판단을 보장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전체 조합원에 대한 교육을 통해 위험성평가의 취지를 정확히 이해하도록 하고 현장에서 평등한 토론을 통해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주어야 한다.

한편, 위험성평가를 둘러싼 현장에서의 갈등은 개선방안의 선정과정에서 발생하기 쉬운데, 이는 대부분 근본적인 개선방안에 접근하지 못하고 차선, 차악을 선택함으로서 발생한다. 유해화학물질을 근본적으로 제거하는 대신 폭염속의 노동자들에게 방독마스크 착용을 강조하면 반발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당연하며, 유해위험설비를 개선하지 않고 점검항목과 서류작업만 잔뜩 늘어나면 관리감독자는 위험성평가를 저주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대안, 공학적인 대안을 우선시하는 위험성평가의 원칙을 충분히 교육하고 공유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또한 난해한 문제들에 대해서 충분한 시간을 두고 협의하는 과정을 거치며 필요하다면 전문적이고 기술적인 지원도 받을 수 있는 인프라가 구축되어야 한다.

 

다양한 시도와 실험의 공유가 필요

법이 보장하는 것은 고작 위험성평가에 노동자의견을 반영해야 한다는 선언적인 문구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단순한 의견의 반영을 넘어 노동자가 주체가 되고 주도하는 위험성평가를 현장에 뿌리내리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진행되는 위험성평가야말로 현장의 위험을 실효적으로 제거하고 재해를 방지하는 제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동자가 주도하는 위험성평가의 모범적인 모델을 실현할 수 있는 현장의 수는 지극히 제한적이다. 오히려 위험성평가 자체를 진행하지 않거나 회사의 안전관리자가 전담하는 현장, 혹은 외부 기관에 위탁하여 노동자들이 들러리에 지나지 않는 현장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을 감안하면 모범답안을 일률적으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각 현장의 현실에 맞는 다양한 방식의 접근이 더 많이 시도되어야 하고 그 결과들이 노동안전보건운동의 장 안에서 공유되어야 한다. 물론, 이 과정에서 노동자가 주도하는 위험성평가를 노동안전부서만의 사업이 아니라 집행부 전체의 과제로 공유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 없는 대전제이다.

 

[9월_특집1] 위험성 평가 제도의 문제점과 개선 방안은?

위험성 평가 제도의 문제점과 개선 방안은?

_위험성 평가 실태 조사 및 활성화 방안 연구를 중심으로

 

재현 운영위원, 민주노총 노동안전보건국장

 

위험성 평가 제도의 의미와 실태

위험성 평가는 일터에 있는 모든 유해·위험요인을 파악하여 발생 가능성과 중대성을 추정하여 평가하고, 감소 대책을 마련하고 개선하는 일련의 과정이다. 위험성 평가는 사후적 대책이 아닌 사전예방 조치로써 매년 모든 사업장에서 실시해야 하고 법에서 노동자의 참여를 보장한다는 특징이 있다.

위험성 평가를 포괄하는 현대적 의미의 안전보건 관리체계는 로벤스 위원회의 보고서에서 태동한다. 1970년대 초반 영국 정부 의뢰로 안전보건 문제를 조사했던 로벤스 위원회는, 위험은 이를 생산하는 조직이 가장 잘 알기에 스스로 위험을 관리하고, 책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에 근거해 안전 조직 시스템 개선, 경영진의 주도적 책임성 강화, 노동자 참여 강화를 안전보건 관리의 핵심 원칙으로 제시하였다. 더불어 국가는 기업이 준수해야 할 지침을 만드는 것이 아닌, 기업의 자율 규제를 위한 여건 조성을 맡아야 한다고 권고한다. 로벤스 보고서 이후 국가에 의한 지시적 위험 관리로부터 조직 스스로 위험을 통제하는 자율 규제적 관리로 안전보건의 패러다임이 전환되었다. 이러한 패러다임을 바탕에 둔 위험성평가는 영국을 시작으로 유럽 국가들에서 법으로 제도화 되었다.

반면, 한국은 2013년 로벤스 위원회가 주목했던 위험을 생산하는 기업과 그 일을 하는 노동자의 참여 강화를 통한 안전보건관리 체계 확립이라는 패러다임과 원칙은 배제하고, 국가의 일방적 규제가 아닌 노사 자율 관리차원으로 위험성 평가를 제도화했다. 제도 도입 당시부터 유럽 국가들과 달리 노사 힘 관계가 일방적으로 기울어진 상황에서 위험성평가가 취지에 맞게 운영 될 수 있을지 우려하는 전문가들, 현장 활동가들의 목소리가 높았고,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현장에서는 위험성평가를 왜 해야 하는지 의미도 목적도 방향도 잃어가고 있다.

어려운 조건이지만 분명 유의미한 성과도 있었다. 금속노조는 위험성 평가의 목적과 취지를 현장에서 구현하기 위해 제도 도입 초기부터 현재까지 전 조직적 차원으로 대응하고 있다. 사측 주도로 진행되었던 위험성 평가 내용 검토를 시작으로 노조 차원의 현장 참여 방안을 내고 평가 도구와 기준을 만들었다. 이런 식으로 산별 교섭과 지침을 통해 현장에 강제하도록 하고 간부 및 조합원 대상 역량 강화 교육을 통해 위험성평가 기본 취지를 실현하기 위해 힘쓰고 있다. 민주노총은 이러한 현장 투쟁을 바탕으로 2018년 고 김용균 노동자의 죽음 이후 진행되었던 산업안전보건법 전부 개정 과정에서 위험성평가에 노동자 참여를 법적으로 명시하도록 하는 성과를 남겼다.

산업안전보건법
[시행 2020. 5. 26.] [법률 제17326, 2020. 5. 26., 타법개정]
36(위험성평가의 실시)
사업주는 건설물, 기계ㆍ기구ㆍ설비, 원재료, 가스, 증기, 분진, 근로자의 작업행동 또는 그 밖의 업무로 인한 유해ㆍ위험 요인을 찾아내어 부상 및 질병으로 이어질 수 있는 위험성의 크기가 허용 가능한 범위인지를 평가하여야 하고, 그 결과에 따라 이 법과 이 법에 따른 명령에 따른 조치를 하여야 하며, 근로자에 대한 위험 또는 건강장해를 방지하기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는 추가적인 조치를 하여야 한다.
사업주는 제1항에 따른 평가 시 고용노동부장관이 정하여 고시하는 바에 따라 해당 작업장의 근로자를 참여시켜야 한다.

 

위험성 평가 관련 현장 실태 연구 결과

민주노총 부설 민주노동연구원은 위험성 평가와 관련해 현장 실태 조사를 하고 활성화 방안을 마련하기 위한 연구를 진행하였다. 연구에는 민주노총 산하 5개의 산별연맹(공공·금속·보건·서비스·화섬)이 참여하였다. 연구는 사업장 대상 설문 조사와 심층 면접 방식으로 진행하였다.

연구 개요
- 참여 대상 : 민주노총 산하 5개 산별연맹(공공·금속·보건·서비스·화섬)
- 참여 사업장 : 공공(24), 금속(67), 보건(27), 서비스(32), 화섬(41)
- 심층 면접 대상
: 금속노조 다스지회, 자동차부품사비정규직지회
: 공공운수노조 전국철도노도조합, 서울교통공사 노동조합
: 화학섬유연맹 엘지화학 대산 노동조합
: 보건의료노조 한림대의료원 지부

지금까지 위험성 평가를 실시한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56%만이 매년 정기적으로 하고 있다고 응답하였다. 29.8%한 번도 안 했거나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실시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 48.1%가 위험성 평가 제도를 몰라서라고 응답했고 24.1%가 노사 모두 위험성평가를 꼭 시행해야 하는지 몰라서라고 답했다. 노사 모두 위험성평가 필요에 대한 인식이 매우 낮다는 점이 확인된 것이다.

위험성평가 사전준비 단계(안전보건 정보수집, 교육, 일정/방법 수립 등 사전준비)부터 사업 결과 공유(조합원 설명회)까지 단계별로 노동조합 참여 수준을 묻는 질문에는 전체적으로 절반 정도가 노동조합과 합의 없이 일방적으로 사측에 의해 진행되었다고 답했다. 가장 높게 현장 조합원과 노동조합 참여로 노사가 공동으로 시행했다고 응답한 단계는 위험성 추정/결정이었다. 반대로 가장 낮은 응답을 보인 영역은 위험성평가 결과 공유였다. 위험성을 추정하고 결정하는 과정에서는 형식적으로나마 해당 작업자의 의견을 청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평가 이후 개선 과정에서는 작업자 의견이 배제되거나 충분히 반영되기 어려운 조건으로 확인되었다.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으로 2020년부터 노동자 참여가 보장되고 난 뒤 이전과 달라진 점이 있는지도 물어보았다. 그 결과 대체로 5개 산별연맹에서 2019년 이전보다 높은 참여 수준을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노동자 참여 수준이 높다고 볼 수 있는 노조와 합의 후 현장 작업자를 참여시켜 노사 공동으로 개선을 시행하고 있다는 응답은 보건의료노조를 제외한 4개 산별연맹에서 이전 연도 보다 5%~10% 이상 비율이 높아졌다.

가장 최근에 진행한 위험성 평가는 어떤 방식으로 되었는지 묻는 질문에 노조 참여 없이 사측 자체적으로 진행했다(26.3%), 사측이 결정한 외부기관에서 전체 진행을 알아서 했다(21.1%)는 답변이 있었다. 전체 비율을 합치면 47%로 노동조합의 참여가 매우 제한적인 것으로 확인된다. 현장 간부와 조합원 대상으로 위험성평가에 교육하고 단위사업장까지 활동 지침을 내리는 금속노조의 경우 노사 자체적으로 진행했다는 비율이 46%로 다른 산별보다 큰 차이를 나타냈는데 노동조합이 긴 시간 책임감을 가지고 조직적으로 대응했을 때 현장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응답이었다.

위험성 평가는 장시간 노동과 교대제, 휴식시간과 휴게시설 등 근로조건, 화학물질, 사고, 근골격계질환, 직장 내 괴롭힘, 직무스트레스, 감정노동, 성희롱 등 성평등, 모성보호까지 현장의 모든 유해·위험요인을 파악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사고, 근골, 화학물질 중심으로 평가된 것으로 나타났다. 여성 노동자의 감정노동, 정신건강 문제 등 사업장 특성에 맞게 평가가 되지 않고 있다는 점은 이후 노동조합 차원의 내용 마련과 대응이 중요하다는 점을 다시금 확인하게 한다.

위험성 평가 후 마련된 위험 개선 대책이 적절했느냐는 질문에 아니다에 가까운 응답이 나타났다. 위험 개선 대책이 적절하게 마련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가를 묻는 질문(복수 응답)64%의 응답자는 사측의 의지부족을 꼽았다. 위험성 평가 후 마련된 위험 개선 대책이 잘 이행되는지를 묻는 질문에 절반은 제대로 안 되고 답하고 또 다른 절반은 제대로 되고 있다고 응답했다. 사업주의 책임성을 높이기 위해 위험성평가 관련 법칙을 강화해야 한다는 응답에 90%가 그렇다고 답한 부분은 사업주의 책임성을 명확하게 부여하는 방식으로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점을 확인시켰다.

위험성 평가가 재해예방에 도움이 되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80%가 그렇다고 응답했으며, 조합원들이 안전보건활동에 더 많이 참여할 것 같은지 묻는 질문에도 77%가 그렇다고 답했다. 법적으로 작업자 참여가 보장된 위험성평가 제도를 내실 있게 운영할 경우 사전 예방 안전 조치로써 위험성 평가가 의미 있게 활용될 수 있겠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답변이었다.

 

위험성 평가 활성화 방안

위험성 평가의 내실화를 위해 현재 유명무실한 의무 조항과 별도로 위험성 평가를 이행하지 않았을 때, 위험성평가를 토대로 도출한 위험 감소대책을 이행하지 않았을 때 사업주 징벌과 같은 법적인 제재 조치를 명문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사업주와 노동조합 모두 목적의식적으로 위험성평가를 책임 있게 수행할 수 있다.

위험성평가의 핵심 조항이라 할 수 있는 노동자 참여 조항을 보다 구체화하고 강화해야 한다. 현재 법 조항과 노동부 고시는 사측이 위험성 평가를 진행하고 개선하는 과정에서 의견을 개진하는 수준으로 참여가 보장되어 있다. 참여 주체, 실제 참여 방식과 권한 등을 구체적으로 강화하고 명시하는 것으로 개선되어야 노동자의 형식적 참여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

현장에서도 사전 예방적 안전관리체계를 구축하는 차원으로 위험성평가를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 방향을 세우고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지금까지 사업장에서 진행되었던 위험성 평가에 대한 평가를 시작으로 산별연맹 현장에 맞는 평가 내용과 기준을 마련하고 조합원 참여 방안을 구체화해야 한다.

최근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시행령 입법예고로 안전보건관리체계 구축 및 이행에 관한 조치의 구체적 내용 중 2호 유해·위험요인 확인점검 및 개선절차 마련과 이행상황 점검 관련 부분을 위험성 평가 실시로 갈음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 발표되었다. 지금의 위험성 평가제도는 노동자 참여가 법제화 되어 있으나 서류상의 형식적 운영이 만연해있어 보완 규정 없어 이 제도로 갈음 할 경우 경영책임자에 대한 면죄부로 전락할 것이다. 어느 때보다 위험성 평가의 중요도가 높아지는 만큼보다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겠다.

[8월_특집3] 태아 산재의 인정과 실질적인 보상 법령 마련을 위한 검토

태아 산재의 인정과 실질적인 보상 법령 마련을 위한 검토

 

천지선 회원, 변호사

 

2020429일 대법원은 업무로 인해 태아의 건강이 손상되는 상황이라는 업무상 재해가 발생했다는 것이 본질이며, ‘누구의 명의로 요양급여를 신청할지는 법기술적인 제도 운용의 문제일 뿐이라는 취지로 아래와 같이 명시했다. (대법원 2020. 4. 29. 선고 201641071 판결).

임신한 여성 근로자에게 그 업무에 기인하여 모체의 일부인 태아의 건강이 손상되는 업무상 재해가 발생하여 산재보험법에 따른 요양급여 수급관계가 성립하게 되었다면 (중략) 요양급여를 제공받기 위하여 출산 이후에 요양급여 청구서를 모()인 여성 근로자 명의로 작성하여 제출하도록 할 것인지, 아니면 자녀인 출산아 명의로 작성하여 제출하도록 할 것인지는 (중략) 법기술적인 제도 운용의 문제일 뿐이다. 임신한 여성 근로자에게 그 업무에 기인하여 태아의 건강손상이라는 업무상 재해가 발생한 것이 맞다면, 출산 이후에 요양급여 청구서를 누구 명의로 작성하여 제출하였는지가 출산아의 선천성 질병 등에 관하여 요양급여 제공을 거부할 정당한 사유는 될 수 없다.
업무에 기인한 사정으로 임신한 여성근로자와 한 몸인 태아의 건강이 손상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면 그로써 이미 산재보험법상 업무상재해가 있었다고 평가함이 정당하다. 그런데 재해를 입은 생명이 태어났다고 하여 업무상 재해의 발생이라는 종전의 정당한 평가를 거두어야 하는가? 요양급여 수급권자는 근로자이어야 한다는 산업재해법의 규정이 이미 정당하게 평가된 근로자인 원고들에게 발생한 업무상 재해라는 본질을 무력화할 정도의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고도 볼 수 있는가? 그렇게 볼 수 없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이하 산재보험법)의 목적·취지·구조를 종합적으로 판단하면, 2세 건강손상도 현행 산재보험법의 업무상 재해에 해당한다. 하지만 대법원 선고 이후에도 비본질적인 법기술적 문제 때문에 2세 산재는 여전히 보상받지 못하고 있다. 실제 보상을 위해선 법기술적 측면에서 불비(不備)돼 있는 부분을 보완할 필요가 있다.

 

현행 박주민 이영 강은미 송옥주
5(정의) 1. “업무상의 재해란 업무상의 사유에 따른 근로자 또는 근로자가 출산한 친생자 부상·질병·장해 또는 사망을 말한다. 다만, 태아의 부상이나 사망은 제외한다. <단서 신설>
1. “업무상의 재해란 업무상의 사유에 따른 다음 각 목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것을 말한다.
. 근로자의 부상·질병·장해 또는 사망
. 126조의3에 따른 장해나 질병(신설)

36(보험급여의 종류와 산정 기준 등)


37(업무상의 재해의 인정 기준)
근로자가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사유로 부상·질병 또는 장해가 발생하거나 사망하면 업무상의 재해로 본다. 다만, 업무와 재해 사이에 상당인과관계(相當因果關係)가 없는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2. 업무상 질병
. 근로자의 업무 환경이나 업무상 질병으로 인하여 친생자에게 발생한 질병(신설)
91조의12(태아의 건강손상에 대한 업무상의 재해의 인정기준) 임신 중인 여성 근로자가 업무수행 과정에서 물리적 인자, 화학물질, 분진, 병원체 등 건강에 장해를 일으킬 수 있는 요인을 취급하거나 그에 노출되어 출산한 자녀가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경우(이하 태아의 건강손상이라 한다)에는 업무상의 재해로 본다. 다만, 업무와 재해 사이에 상당인과관계가 없는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1. 모자보건법2조제5호에 따른 미숙아인 경우
2. 모자보건법2조제6호에 따른 선천성이상아인 경우
3. 그 밖에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장애 또는 질병이 있는 경우
근로자가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사유로 부상·질병 또는 장해가 발생하거나 사망하는 경우 또는 제126조의3의 선천성 질환아를 출산하면 업무상의 재해로 본다. 다만, 업무와 재해 사이에 상당인과관계(相當因果關係)가 없는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2. 업무상 질병
. 업무수행 과정에서 물리적 인자(因子), 화학물질, 분진, 병원체, 신체에 부담을 주는 업무 등 근로자의 건강에 장해를 일으킬 수 있는 요인을 취급하거나 그에 노출되어 발생한 질병 또는 제126조의3의 선천성 질환아의 출산


126조의3(업무상 재해로 인한 선천성 질환아에 대한 보험급여 지급에 관한 특례) 근로자가 업무수행 과정에서 물리적 인자(因子), 화학물질, 분진, 병원체와 신체에 부담을 주는 업무 등 근로자의 건강에 장해를 일으킬 수 있는 요인을 취급하거나 그에 노출됨으로써 모자보건법2조에 따른 미숙아 및 선천성이상아, 그 밖에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선천적 장애 또는 질병이 있는 자녀(이하 선천성 질환아라 한다)를 출산한 경우 그 선천성 질환아에게 제40, 57, 60, 61, 62조 및 제71조를 적용한다. 이 경우 근로자선천성 질환아로 본다.
선천성 질환아에게 지급하는 보험급여의 신청 방법과 절차 등에 필요한 사항은 고용노동부령으로 정한다.
----하고, 91조의12에 따른 건강손상자녀에 대한 보험급여의 종류는 제1호의 요양급여, 3호의 장해급여, 4호의 간병급여, 7호의 장례비, 8호의 직업재활급여로 한다.
91조의12(건강손상자녀에 대한 업무상의 재해의 인정기준) 임신 중인 근로자가 업무수행 과정에서 제37조제1항제1호ㆍ제3호 또는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유해인자의 취급이나 노출로 인하여 출산한 자녀가 부상, 질병 또는 장해가 발생하거나 사망한 경우 업무상의 재해로 본다. 이 경우 그 출산한 자녀(이하 건강손상자녀라 한다)는 제5조제2호에도 불구하고 이 법을 적용할 때 그 모()가 속한 사업의 근로자로 본다.
40(요양급여) 요양급여는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경우 그 근로자에게 지급한다.
1. 근로자가 업무상의 사유로 부상을 당한 경우
2. 근로자와 그가 출생한 친생자가 질병에 걸린 경우(신설)
91조의13(보험급여의 종류) 태아의 건강손상에 따른 보험급여의 종류는 제36조제1항에 따른다. 다만, 같은 항 제5호에 따른 유족급여, 6호에 따른 상병보상연금, 7호에 따른 장의비 및 제8호에 따른 직업재활급여는 제외한다.
1항에 따른 보험급여는 제91조의14부터 제91조의17까지의 규정에 따른 보험급여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의 청구에 따라 지급한다.
91조의14(요양급여) 요양급여는 태아의 건강손상으로 인하여 그 자녀가 요양할 필요가 있는 근로자에게 지급한다.
1항에 따른 요양급여의 범위나 비용 등 요양급여의 산정 기준은 고용노동부령으로 정한다.
근로자의 자녀를 진료한 제43조제1항에 따른 산재보험 의료기관은 태아의 건강손상이 업무상의 재해로 판단되면 그 근로자의 동의를 받아 요양급여의 신청을 대행할 수 있다.
91조의15(휴업급여) 휴업급여는 태아의 건강손상이 발생한 근로자에게 그 자녀의 간병으로 취업하지 못한 기간에 대하여 지급하되, 1일당 지급액은 평균임금의 100분의 70에 상당하는 금액으로 한다. 다만, 취업하지 못한 기간이 3일 이내이면 지급하지 아니한다.
91조의16(장해급여)
91조의17(간병급여)

57(장해급여) 장해급여는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경우에 그 근로자에게 지급한다.
1. 근로자가 업무상의 사유로 부상을 당한 경우
2. 근로자나 그가 출생한 친생자가 질병에 걸려 치유된 후 신체 등에 장해가 있는 경우(신설)
91조의13(장해등급의 판정시기) 건강손상자녀에 대한 장해등급 판정은 18세 이후에 한다.
91조의14(건강손상자녀의 장해급여장례비 산정기준) 건강손상자녀에게 지급하는 보험급여 중 장해급여 및 장례비의 산정기준이 되는 금액은 각각 제57조제2항 및 제71조에도 불구하고 다음 각 호와 같다.
1. 장해급여: 36조제7항에 따른 최저보상기준금액
2. 장례비: 71조제2항에 따른 장례비 최저금액

63(유족보상연금 수급자격자의 범위) 유족보상연금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자(이하 유족보상연금 수급자격자라 한다)는 근로자가 사망할 당시 그 근로자나 친생자와 생계를 같이 하고 있던 유족(그 근로자가 사망할 당시 대한민국 국민이 아닌 자로서 외국에서 거주하고 있던 유족은 제외한다) 중 배우자와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자로 한다. 이 경우 근로자나 친생자와 생계를 같이 하고 있던 유족의 판단 기준은 대통령령으로 정한다.

1. 산재보험법 및 발의된 개정법률안

 

각 개정법률안의 태아 업무상 재해의 인정 범위를 보면, ()은 태아의 부상과 사망은 명시적으로 제외하고 있다. 통상 업무상 재해에 부상과 사망이 포함돼 있고, 유산의 경우 근로복지공단이 이를 업무상 재해로 인정함이 해당 사건에서도 명시돼 있음을 고려할 때 합리적이라거나 공평하다고 보기 어렵다.

()임신 중인 여성 근로자의 경우로 한정해 남성 근로자의 경우를 제외하고 있는데, 반도체 산업종사 남성 근로자의 배우자에게서 자연유산 등의 증가가 관찰된다는 논문이 이미 존재한다. 업무상 재해의 원인 중 신체에 부담을 주는 업무를 제외하고 있는데 현행 산재보험법에도 포함된 업무상 재해 원인이며, 해당 사건에서도 업무상 과로·스트레스·주야간 교대근무 등 신체에 부담을 주는 업무 역시 업무상 재해 원인으로 보고 있음을 고려할 때 합리적이라거나 공평하다고 보기 어렵다. 또한 재해의 결과도 모자보건법상 사유로만 한정하고 있는데 모자보건법과 산재보험법의 목적·취지가 다르고, 그 범위 역시 과도하게 협소해 합리성과 구체적 타당성 모두 결여돼 있다.

보험급여의 경우, 근로자의 2세가 최소한의 치료라도 받고 생활할 수 있는 요양급여·장해급여·간병급여·직업재활급여 등을 지급해야 한다. 또한 가족이 아이의 돌봄 등을 위해 휴가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하고, 기간 동안 휴업급여가 지급돼야 한다. 휴직 등을 허용하지 않거나 이를 이유로 불이익한 처분을 내릴 경우에 대한 처벌 역시 마련돼야 한다.

대법원 판례는 업무로 인해 재해가 발생한 것이 본질이며, 다른 사유는 이를 전복할 만큼 중요하지 않다고 봤다. ()의 경우처럼 그 인정 범위가 과도하게 협소해 대법원 판례의 취지를 몰각할 정도에 이르지 않았다면, 조속히 법령을 개정해 2세의 건강손상이 하루라도 빨리 산재보험법의 적용을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이야말로 대법원 판례의 취지에 부합한다.

 

[8월_특집2] 여성노동자 재생산권 침해와 인정투쟁의 역사

여성노동자 재생산권 침해와 인정투쟁의 역사

 

유청희 상임활동가

 

2020, 제주의료원 간호사들의 2세들이 앓고 있는 선천성 심장 질환을 대법원에서 산업재해로 인정했다. 근로복지공단의 산업재해 불승인 이후 소송으로 승인 받기까지 걸린 시간이 무려 10년이다. 대법원은 산재보험법의 해석상 모체와 태아는 단일체로 취급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고, “태아는 모체의 일부로 모()와 함께 근로현장에 있기 때문에 언제라도 사고와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고 판단해, 여성 노동자들이 업무로 입은 재해를 2세 질환의 원인으로 인정했다. 여성 노동자의 안전하고 건강하게 일할 권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이 확인된 판결이다. 이 대법원 판결로 2세 산재가 산업재해보상법 적용 대상임이 확인되었다. 이 판결 이후, 현재는 개정법 시행 이전에 발생한 2세 질환에 대한 산재 소급 적용 여부나 보험 급여 지급 범위 등 많은 쟁점들을 두고 법 개정 논의가 진행중이다.

 

일반적으로 재생산 권리란 차별, 폭력 없이 원하는 시기에 임신을, 또 자녀의 수와 자녀를 가질 시기를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국제적으로 이 개념이 통용되고 있고, 최근 한국에서는 낙태죄 폐지와 함께 성·재생산 건강 및 권리(Sexual and Reproductive Health and Rights, SRHR)가 활발히 논의되고 정리되었다.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에서 제시한 성·재생산권리 보장 기본법()에 따르면, 일터에서의 성·재생산권리의 보장(46)에서 모든 근로자에 대한 성적 권리와 재생산 권리가 보장될 것, 그리고 성적 건강과 재생산 건강을 침해받지 않을 것을 규정하고 있다.

 

근로기준법에서도 여성 노동자의 재생산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임신한 여성에게 야간 노동을 금지하고, 노동자가 유산할 경우 유산 휴가를 제공하도록 하고 있다. 임신 중 특정 시기에는 근로시간 단축을 허용할 수 있게 한다. 또 노동자가 청구하면 생리휴가를 부여하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업무로 인해 재생산권이 침해되고, 건강상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개인의 문제로 취급되어 드러내지 못했다. 또 드러내더라도 그 문제가 업무상 상관관계가 있음을 인정 받기 어려웠던 오랜 역사가 있다.

 

화학약품 때문에 무월경, 엘지전자 노동자들

 

1995년 경남 양산의 엘지전자부품() 여성 노동자 전체 20명 중 18명이 무월경 진단을 받았다. 노동자들은 전자제품 택트(TACT) 스위치를 조립하는 곳에서 일을 했고, 이 조립 과정에서 솔벤트 5200을 사용해 불순물을 제거했다. 노동부는 즉각 역학조사에 들어갔는데, 솔벤트 5200에 쓰인 2-브로모프로판이라는 물질이 무월경 증상의 원인인 것으로 밝혀졌다. 그런 유해 화학물질을 아무런 보호장치도 없이 노동자들이 사용할 수 있었던 건, 당시 규제하고 있던 697종의 유해 화학물질에 2-브로모프로판은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같은 솔벤트 5200을 사용했지만, 취급 시 필요한 철저한 환기, 방독면과 보안경 같은 보호장치를 해 두었던 일본에서는 동일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휴일에도 환기장치를 가동했어야 했지만 한국에서는 그런 수칙을 지키지 않는 등 관리에 상당한 차이가 있었던 것이 밝혀졌다.

여성노동자들은 불임 판정을 받았고, 남성 노동자들 또한 무정자증 판정을 받는 등 피해가 심각했다. 노동부 역학조사 이후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은 해당 피해 노동자들의 질병을 직업병으로 인정했다.

 

유해 노동환경이 원인이 된 제주의료원 노동자의 유산

 

앞서 언급한 제주의료원 산업재해(이하 산재) 승인건에서는, 여성이 임신 중 업무상 유해요소에 노출되었다가 출산 이후 여성과 2세가 분리된 상황에서 2세의 질환을 모체의 산업재해로 인정할 수 있는지가 쟁점이었으나 결국 산재 승인을 받았다. 그렇다면 유산은 어떨까. 노동자 당사자에게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비교적 명확해 보이는데, 실상은 어떨까?

 

2020년 대법원에서 2세 질환을 산업재해로 인정받은 제주도의료원 노동자들의 동료들 중 같은 시기 유산을 겪은 이들이 있었다. 2009년에서 2010년 사이 제주의료원 간호사 노동자들은 불규칙한 교대 근무, 타 병원 대비 2~3배가 넘는 1인당 환자 수, 약제 조제 시 화학물질 노출 등으로 유산하거나 선천성 심장 질환을 겪는 아이를 출산했다. 이때 유산을 겪은 여성 노동자들은 산재 승인을 받았다. 하지만 이 건 전후로 국내에서 유산으로 산재신청 및 승인된 경우는 극소수로, 2010년도-2019년도 사이 모성보호 관련으로 승인된 산재는 7(유산 6, 불임 1)에 불과하다.

 

반도체 노동자 산재, 태아 산재로까지

 

반올림은 지난 520<반도체 노동자의 2세 직업병 피해자 3명 집단 산재신청 기자회견>을 열고, 삼성반도체 노동자 3명의 2세가 입은 재해에 대한 산재를 신청했다. 제주의료원 이후, 한국의 두 번째 태아 산재 신청 사례였다. 이날 산재보상 신청에 나선 세 여성 노동자들은 1990년대 초중반에 삼성 반도체에 입사해 10년 가까이, 혹은 10년 이상 일 했고 재직 기간 중 임신을 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반도체 공정에서 이들은 지속적으로 유독물질을 취급했고, 이 중 한 명은 생식독성 물질을 포함한 유해화학물질에 노출되기도 했다. 이들이 출산한 2세 중 한 명은 선천성 거대결장증으로 태어나자마자 수술을 받았다. 다른 두 명의 2세들은 공통적으로 신장을 한쪽만 가지고 태어났다. 이들은 이 외에도 여러 가지 질환을 겪으며 지속적으로 치료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근로복지공단은 반올림의 산재 신청 건을 검토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제주의료원 간호사 2세들의 선천성 심장 질환에 대한 산재 승인 대법원 판결 이후 법 개정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고, 또 논의 중인 개정법안에서 소급 적용을 포함할 것인지도 쟁점으로 남아있는 상황이다.

대법원 판결 이후 산재보상보험법 개정 논의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2세 질환에 대해 요양급여 외에 휴업급여, 유족급여, 부모돌봄 휴업급여 등을 포함할지 여부와, 법 시행 전 소급 적용이 이루어질 것인지 귀추가 주목된다.

 

재생산권은 노동권이다

 

월경은 여성의 재생산권과 연결되는 것으로, 임신을 원하건 원하지 않건 건강한 상태로 유지되어야 하고 일터는 그 권리을 보장하기 위한 조건들을 마련해야 한다. 하지만 엘지전자부품()와 정부는 책임지고 점검했어야 할 유해화학물질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여성 노동자들이 겪어야 했던 집단적 무월경 증상은 사회적 이슈가 되었다. 여성 노동자 건강권이 침해되고 있는 현실에 경종을 울리는 사건이었다. 제주의료원 노동자들의 유산과 2세 산재 사례 역시 과로와 더불어 유해 물질 취급 때문에 생긴 노동자 건강권 및 재생산권 침해 사례다. 노동자는 안전한 노동환경에서 일하면서, 임신을 할지 여부와 그 시기를 결정할 권리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제주의료원의 노동자들은 그 권리를 박탈당했다. 세 명의 삼성 반도체 여성 노동자들의 경우는, 안전하지 않은 노동환경에서 일하는 와중에 임신을 했다는 점에서 위의 두 사례와 같다. 그러나 유해 환경이 태아의 질환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여성 노동자들이 무월경을 겪고, 유산하며, 선천성 질환을 가진 2세를 출산하는 일은 모두 유해 물질에 노출되었거나 야간 노동, 과로로 인한 것이었다. 이 사례들은 일터에서의 여성 노동자 재생산권이 침해된 사례의 극히 일부일 것이다. 여성 노동자들이 겪는 유산과 같은 문제는 업무상 재해이고 노동권 침해의 결과이지만, 여전히 노동의 문제로 인식조차 안 되는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배후에는 그러한 재해가 개인이 감당해야 할 일로 치부되고, 공적인 일로 거의 드러나지 못한 뼈아픈 역사가 있다.

여성 노동자들의 재생산권 침해는 안전하지 않은 노동환경에서 발생한다.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 문제다. 재생산권 역시 노동자가 반드시 보장받아야 할 권리임을 사업주와 정부가 인식해야 한다.

 

 

[8월_특집1] 안전한 노동환경을 보장받을 권리, 성과 재생산 권리로 이야기하자

안전한 노동환경을 보장받을 권리, 성과 재생산 권리로 이야기하자

 

나영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SHARE

 

2020429일 대법원은 제주의료원 간호사들이 제기한 요양급여 신청 반려 처분 취소 사건에 대하여 원심을 파기하고 산업재해로 인한 자녀의 수급권을 인정했다. 이 사건은 항암약을 조제하는 업무를 하던 제주의료원 간호사들이 제기한 것으로, 당시 2009년에 임신하여 2010년에 출산한 간호사 15명 중 4명이 선천성 심장질환을 지닌 자녀를 출산하였고, 5명은 유산을 했다. 자녀의 수급권을 부정한 2심 재판부와 달리 대법원은 임신 중 태아는 모체의 일부이므로 유해한 노동환경으로 인해 임신 중 태아에게 질병이나 장애 등이 발생하였다면 유해 환경의 영향을 받은 자녀 역시도 수급 자격을 지닌 당사자가 될 수 있다고 판결한 것이다. 그리고 산재보험법 제88조 제1근로자의 보험급여를 받을 권리는 퇴직하여도 소멸되지 아니한다를 인용하여, 임신 중 태아에게 영향을 미치는 재해가 발생하여 수급 관계가 성립되었다면 이후 근로자의 지위를 상실하거나 출산한 이후라고 하더라도 수급권을 상실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의 이와 같은 판결은 그동안 업무상 재해로 자녀에게 발생한 질병이나 장애로 인해 직접 민사상 손해배상 소송을 해야 했던 고통을 해소하고, 업무상의 유해 노동환경을 여성노동자와 자녀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는 문제로서 판단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남겼다. 하지만 앞으로 산재보상보험법의 개정과 산재 인정에 대한 판단 기준 등에 있어서는 더 중요하게 논의해가야 할 내용이 아직 많다. 성별에 따른 업무 환경상의 특성과 차이는 고려되지 않고, ‘모성보호라는 틀에 한정된 관점에서 권리와 자격을 논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임신과 출산을 전제로 하지 않더라도 다른 생식 건강에 관한 문제를 어떻게 다룰지, 남성 노동자의 생식 건강 피해로 인한 자녀의 건강손상 문제는 인정될 수 있을지는 포함하지 못 한다. 나아가, 자녀의 건강손상에 대한 보상의 의미를 넘어 당사자의 삶에 관한 권리로서 그 의미를 더 확장해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아래에서 산업재해에 대한 관점의 전환, 안전한 노동환경 보장의 중요성과 그 의미를 ·재생산 건강과 권리’, ‘재생산정의의 관점에서 풀어보고자 한다.

 

모든 노동자는 성적권리와 재생산권리를 가진다

 

·재생산 건강과 권리(Sexual and Reproductive Health and Rights, SRHR)는 성 건강, 성적권리, 재생산건강, 재생산권리를 통합적으로 다루는 개념으로, ‘모든 개인이 전 생애에 걸쳐서 폭력, 강압, 차별, 낙인 없이 자신의 몸과 성, 재생산에 관련하여 건강과 자율성을 보장받고 존중받을 권리, 성적 즐거움을 향유할 권리, 관련 시설, 재화, 정보 일체에 대해 방해받지 않고 접근할 권리, 이에 대해 자유롭고 책임 있는 결정과 선택을 할 권리를 의미한다고 정의해볼 수 있다. 여기서 재생산이란 단지 임신과 출산 등 생식에 관한 차원만이 아니라 개인과 공동체에 상호영향을 미치는 삶의 전 과정을 지속가능하게 유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유엔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위원회는 2016년 성과 재생산 건강과 권리에 관한 일반논평 제22호에서 성과 재생산 권리는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 규약 제12조에 명시된 건강에 대한 권리의 필수 불가결한 요소라고 명시하고 있다. 성 건강·성적권리·재생산건강·재생산건강이 권리로서 보장되어야 할 내용이라면, 이 권리를 실질적으로 보장할 수 있도록 차별과 불평등, 착취에 대응하며 정치·경제·사회·문화적 조건에서의 사회정의를 만들어나가는 일이 바로 재생산정의 Reproductive Justice’ 운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안전한 노동환경에서 일할 권리는 지금까지 주로 노동권의 관점에서 이야기 되어 왔지만 모든 노동자가 성 건강과 재생산건강을 포괄하는 성과 재생산에 관한 권리를 지닌다면 제대로 된 노동조건과 안전한 노동환경을 보장받을 권리 역시 성·재생산 권리의 내용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불안정하거나 착취적인 노동조건과 건강을 악화시키는 노동환경에서 일한다면 삶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성적 즐거움을 향유하고, 원하는 사람과 파트너십을 유지하거나 가족을 구성하는 일, 생식 건강을 유지하는 일이나, 안전한 피임·임신·출산·임신중지를 보장받는 일, 양육과 돌봄에 필요한 여건들을 감당하는 일 또한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한국 사회는 이러한 일들을 권리의 내용으로 고려하지 않은 채, 오로지 국가가 목표로 하는 생산력만을 채우고자 했고 그 생산력을 유지하기 위한 인구조절의 수단으로서만 노동자의 몸을 다루어 왔다. 그 결과 7, 80년대의 가족계획 시대에는 남성 노동자에게 생계부양자로서의 역할을 부여했고, 여성 노동자는 저임금의 노동력으로 국가 경제와 가족 경제에 기여하면서도 자녀를 적게 낳아 검소한 가정경제를 꾸려나가는 이중의 역할을 부여했다. 그러다 2000년대에 본격적인 저출산·고령사회 대책을 시작하면서부터는 남녀 노동자 모두에게 불안정 노동과 하청에 재하청으로 이어지는 열악한 노동환경을 감당하게 하면서 여성 노동자들에게 출산과 돌봄의 부담을 더욱 강화하게 된 것이다. 제대로 된 노동조건과 안전한 노동환경을 보장받을 권리를 성과 재생산 권리로서 말한다는 것은 이처럼 오로지 국가의 경제 성장과 인구관리를 위한 목적으로서만 다루어져 온 노동자의 몸과 삶을 지속가능한 삶을 위한 권리, 평등하고 자율적인 파트너십과 가족구성에 관한 권리, 돌봄에 관한 권리, 자신의 신체에 대한 건강과 자율성을 보장받을 권리의 내용으로 채워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셰어에서는 지난해 낙태죄 폐지 이후의 대안 입법으로 ·재생산 권리 보장 기본법안을 만들면서 13장에 일터에서의 성재생산 권리 보장에 관한 내용을 담았다. 그 중 46조는 이런 내용을 담고 있다. 모든 근로자는 성적 권리와 재생산 권리를 가지며, 근로자라는 이유로 이를 침해받지 아니한다. 모든 근로자는 업무상의 사유로 성적 건강과 재생산 건강을 침해받지 아니한다. 모든 근로자는 성적 건강과 재생산 건강을 보장한다는 명목으로 업무배제 또는 고용상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법이 보장하는 권리의 주체는 모든 사람이며, 노동 현장에서의 안전과 건강권 보장은 당연히 모든 사람에게 보장되어야 하는 것이고, 따라서 성 건강, 재생산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유해 노동환경 또한 모성보호라는 명분으로 여성 노동자에게만 보장되어야 하는 권리가 아니라 모든 노동자에게 보장되어야 하는 권리가 된다. 또한 모성보호 등의 명분으로 여성 노동자를 특정한 업무에서 아예 배제하거나 취업에서 차별하는 근거로 사용해서도 안 된다. 또한 안전한 노동환경은 노동자에게 유해한 노동환경 자체를 제거해나가는 적극적인 조치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국가와 지자체, 모든 기업은 이를 보장하고 지원하며, 권리에 대한 교육을 이행할 책임을 져야 한다.

 

성과 재생산 권리를 통해 안전한 노동의 권리를 요구하자

 

제주의료원 사건에 대한 대법원의 판결 이후 1년이 훨씬 지난 지금, 그 내용을 실질적으로 적용할 산재보상보험법의 개정안은 국회에 계류 중이다. 이에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에서는 지난 520, 세 명의 반도체 노동자와 함께 자녀의 건강 손상에 대한 산재 인정 신청을 접수했다. 제주의료원 투쟁 덕분에 이번에는 판단 절차가 빠르게 시작되었지만 노동부는 법률이 개정되더라도 소급적용은 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보여 개정안을 둘러싼 싸움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물론 어떻게든 법 개정은 여러 한계를 지니겠지만 앞으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이 투쟁의 요구를 더 크게 확장해 나가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유해 노동환경으로 인한 노동자의 생식 건강 문제는 임신, 출산의 시기에만 한정되지 않아야 한다. 제주의료원 사건 이후 자녀의 산재 보상에 대한 문제는 주로 임신 중인 여성 노동자의 모성보호에 중점을 두어 논의되고 있다. 그러나 유해 노동환경의 영향은 임신·출산의 시기뿐만 아니라 일상의 노동환경 전반을 통해 확인되어야 한다. 따라서 일반적인 성 건강, 월경, 임신중지, 개인의 성정체성에 따른 건강 보장에 관한 문제도 고려되어야 하며, 이를 보장하기 위한 노동환경이 통합적인 권리로서 인식되어야 한다.

 

둘째, 유해 노동환경에 대한 판단은 성차별적 노동구조와 노동 공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해야 하며 더 다양하고 포괄적으로 인정되어야 한다. 앞서 언급한 성 건강, 월경, 임신중지, 임신·출산 등에 영향을 미치는 유해 노동환경은 단지 특정 유해 물질이나 유해 요인으로만 한정되어서는 안 된다. 작업장 환경, 고용 상태, 휴게 공간, 화장실, 휴게 시간과 휴가의 보장 정도, 과로와 스트레스 등이 모두 노동자의 성과 재생산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특히 여성 노동자들의 경우 대부분의 작업장이 남성 노동자를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기 때문에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작업환경 변화 역시 반영해야 한다. 또한 청소, 요리 등 일반적으로 여성 노동자들이 많이 종사하는 노동에 있어서는, 지금까지 노동으로 인식하지 않았던 태도를 산업에서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전반적인 문제들이 제대로 인식되어야 하며 포괄적으로 인정되어야 할 것이다.

 

셋째, 여성 노동자뿐만 아니라 남성 노동자의 생식 건강도 자녀 건강에 관한 산재 인정의 판단 근거로서 고려되어야 하며 비혼, 비출산 노동자와 성소수자 노동자의 생식 건강 또한 성과 재생산 건강에 관한 권리로서 중요하게 다뤄져야 한다. 남성 노동자에게도 당연히 유해 노동환경으로 인한 생식 건강의 문제가 발생한다. 또한 남성 노동자의 생식 건강도 자녀 건강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남성 노동자의 생식 건강 역시도 자녀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산재인정의 판단 근거로서 고려되어야 한다. 한편, 임신·출산의 여부와 상관없이 모든 노동자에게 중요한 권리로서 보장되어야 하며 산재 인정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고용 여건이나 노동환경에 있어서 비혼, 비출산 노동자, 성소수자 노동자의 성·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은 별도의 고려가 필요한 부분도 있으므로 앞으로 이에 대한 연구와 권리 보장 요구도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유해 노동환경으로 인한 자녀의 건강 문제는 당사자 자녀의 권리로서 고려되어야 한다는 점을 짚고자 한다. 지금까지는 여성 노동자의 임신 중 영향으로 인한 문제로 부각되다 보니 많은 여성 노동자들이 산재 인정 투쟁을 하면서 자녀에 대한 미안함을 가지고 투쟁하게 되고, 선천성 장애나 질병을 가지고 태어난 자녀들은 권리를 요구하는 당사자의 위치를 가지지 못했다. 그러나 태어난 이후의 자녀는 한 사람의 독립된 주체로서의 권리를 지니며 성장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권리를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재생산 권리의 관점에서 보면 성과 재생산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유해 노동환경의 문제는 자녀의 성과 재생산 건강과 권리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앞으로 이 투쟁의 의미가 산재로 인한 생식건강 피해 노동자의 부모로서의 호소로만 남지 않고, 자녀들 또한 직접 권리의 주체로 설 수 있는 운동으로 더 확장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와 함께 노동자의 권리로서 성과 재생산 권리가 어디서든 당연하게 이야기되는 날이 오도록, 더 많은 동지들이 함께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일터7월_특집3] 현장에서 느끼는 중대재해 보고서 공개의 필요성

현장에서 느끼는 중대재해 보고서 공개의 필요성

 

우리나라에서 발생되는 중대재해는 추락, 협착 등 재래형 사고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동일하거나 유사한 원인으로 중대재해가 반복되고 있다는 것은 더 심각한 문제다.

현대중공업, 현대제철과 같은 대기업에서 끊임없이 발생하는 노동자의 죽음, 중대재해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50인 미만 사업장에서의 노동자들의 죽음, 또 중대재해가 빈번하게 발생하는 건설현장에서의 죽음. 이들 죽음에 대한 사고원인과 예방대책이 중대재해보고서에 담겨 있다. 현 법과 제도 하에서 사업장 재해에 대한 사고원인 조사는 사망사고에 따른 중대재해에 대해 노동부와 산업안전보건공단이 실시하는 조사와 그 후 작성하는 중대재해 보고서가 유일하다. 그럼에도 중대재해가 끊이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중대재해보고서가 공개가 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중대재해 조사의 실태

중대재해가 발생하면 고용노동부는 산업안전감독관집무규정에 따라 해당 사업장에 감독반을 편성해서 작업중지 조치명령을 하고 중대재해 발생원인 등을 조사한다. 산업안전보건법 제56(중대재해 원인조사) 규정은 중대재해 원인조사의 근거를 규정하고, 동시에 산업재해 예방대책 수립을 그 목적으로 명백히 밝히고 있다. 그러나 실제 조사는 범죄 혐의에 대한 수사와 동시에 이뤄지면서 피의자인 회사의 권리만을 온전히 보장할 뿐이다.

작업중지명령 과정에서도 회사에는 자세한 설명을 하면서, 해당 노동자들과 노동조합에는 제대로 된 설명조차 하지 않는다. 중대재해에 대한 사고조사를 수사라는 미명 하에 회사의 안내와 설명을 들으면서 진행하지만, 노동자와 노동조합 및 유족의 참여를 철저히 배제시키고 있다.

중대재해조사의 목적은 사고의 직접적 원인이 사업주의 산업안전보건법 등 위반인지를 조사하고 처벌하는 데 있지만 예방대책 수립역시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예방대책이 실효성을 갖기 위해서는 조사의 객관성과 공정성이 담보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라도 다양한 당사자들의 의견을 취합하고 검토해야 한다. 더불어서 예방대책이 문서로만 남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정착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따라서 해당 기업뿐만 아니라 노동자와 노동조합이 주체로서 대책 실행여부를 점검하고 확인할 수 있도록 중대재해보고서는 공개되어야 한다.

노동부와 안전보건공단의 조사 과정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것을 떠올려보면, 협착사고로 노동자가 사망한 사업장에서 회사가 개선계획으로 가져온 것은 사망설비에 추가로 센서를 설치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조사를 마치고 작업중지를 해제한 경우가 있어 황당해한 적이 있었다.

해당 사고의 직접적 원인은 센서가 작동되지 않아서 설비가 멈추지 않은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심각한 문제는 대부분의 공정에서 트러블 조치, 설비점검 작업 중 안전작업수칙이 지켜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사업장에서 단위 시간당 생산량을 맞추기 위해서 설비를 중지시킬 수 없었거나 작동이 되는 상태에서 작업을 해야 하는 구조에 대해서 간과하거나 조사조차 하지 않은 것이 근본적인 문제다. 이러한 조사와 대책만으로는 구조적으로 개선되지 않은 사업장에서 하루도 지나지 않아 다시 안전센서가 작동되지 않게 될 것은 눈에 뻔히 보인다.

삼성중공업 크레인사고, 구의역 사고, 태안화력 사고처럼 해당 중대재해가 사회적으로 알려지고 공론화 되어 시민대책위 및 진상조사단이 구성되는 경우에는 사고의 직접적 원인, 구조적 원인을 비롯해서 실체적 진실을 밝히기 위한 활동을 통해서 사고의 근본적 대책까지 마련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의 중대재해보고서는 3일 이내 조사만으로 작성되다 보니 근본적인 접근까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예방 및 대책활동

현재 중대재해를 제외한 사고와 질병이 발생하면 노동부는 사업장에서 작성한 산업재해조사표를 받는다. 산업재해조사표에는 사업장 정보 및 고용형태, 재해자 정보 등의 기본정보와 더불어 재해발생 당시 상황, 재해발생 원인, 재발방지계획도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해당 조사표는 조사와 보고의 주체가 사업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사업장에서 노동조합이 노동안전보건활동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사업주의 관점만 반영된 조사보고서가 될 수밖에 없다. 더구나 해당 산업재해조사표에 대해서 노동부가 통계를 내거나 분석을 하거나 데이터베이스화하지 않고 있는 상태이다. ‘1:29:300 하인리히의 법칙300번의 아차사고가 발생하면 신체손상을 일으키는 29번의 경미한 사고가 발생하고, 1번의 중대재해가 발생한다는 이론으로써 사고예방에 있어서 대표적인 이론이다. 그러나 노동부가 산재사망을 감소시키기 위한 정책을 만들고 집행하는 데 있어 이런 사고발생에 대한 실태분석이 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충청지역에서 중대재해가 발생했을 때 해당 사업장 노동조합, 민주노총을 비롯한 지역단체 및 노동안전보건활동가들이 공동대응을 하기 위해 2~3년 전부터 논의를 해오고 있다. 그 과정에서 난관에 봉착하는 경우 중 하나는 노동조합 내 노동안전보건활동에 대한 역량이 축적되지 않는 것을 확인하는 때다. 보고서가 공개된다면 다양한 사례 검토를 통해서 산업재해 예방활동 및 대응활동에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중대재해보고서 공개운동으로 나가자

중대재해보고서 공개가 필요한 이유는 사고와 관련해 노동부가 유일하게 생산하는 공식적 문서이며 사고조사의 방법과 기술 등의 노하우가 축적된 문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보고서 공개가 보고서의 장단점을 파악하고 문제점을 개선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사고의 직접요인 및 기술적 요인, 그리고 구조적인 원인을 조사해 근본적인 대책을 수립할 수 있어야 한다. 더불어 이행여부에 대한 확인이 이루어지고 강제되어야 보고서의 궁극적인 목적이 달성될 수 있다.

어느 누구도 소중하지 않은 목숨은 없다. 사업장에서 발생한 중대재해 중 사회적 관심을 받았거나, 노동조합 및 지역차원에서 대응했던 사건들에 대해서는 최소한 억울한 죽음을 밝힐 수 있었다. 그러나 노동조합이 없는 사업장, 중소 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이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죽음은 신문 단신 하나로 끝나게 된다. 지역차원에서 대응을 해보려 해도 사업장 정보나 사실을 파악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개입조차 차단되는 경우가 있었다. 따라서 중대재해보고서를 공개해 지역사회에서 해당 죽음의 실태라도 파악할 수 있도록 하고, 개입을 모색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이태진 회원, 금속노조 대전충북지부 노동안전보건부장)

 

 

[일터7월_특집2] 중대재해조사보고서 공개의 필요성에 관하여- 무엇을 바탕으로 예방하고, 무엇을 근거로 처벌할 것인가?

중대재해조사보고서 공개의 필요성에 관하여- 무엇을 바탕으로 예방하고, 무엇을 근거로 처벌할 것인가?

 

중대재해 원인조사와 중대재해조사보고서

우선 개념과 명칭을 명확히 정리해보자. 현재 중대재해(조사)보고서라는 문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산업안전보건법(이하 산안법이라 한다)은 중대재해 발생시 고용노동부장관이 그 원인을 규명하고 산업재해 예방대책을 수립할 수 있도록 중대재해 원인조사에 대한 근거를 두고 있다(56). 산업재해 중 사망 등 재해 정도가 심하거나 다수의 재해자가 발생한 경우로서 산안법상 중대재해’(법 제2조 제2, 시행규칙 제3)가 발생했을 때 정부가 취할 수 있는 법상 조치 중 하나다. ‘중대재해 원인조사시에는 현장을 방문하여 조사하고 재해조사에 필요한 안전보건 관련 서류 및 목격자의 진술 등을 확보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등의 조사 내용에 관한 근거도 있다(시행규칙 제71). 고용노동부는 이와 같은 중대재해 원인조사의 일환으로 관련 조사 업무를 안전보건공단에 요청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고, 안전보건공단은 그 조사의 결과물을 재해조사 의견서라는 명칭의 문서로 작성하여 고용노동부에 제출하고 있다.

그런데 고용노동부의 요청에 따라 안전보건공단이 수행한 중대재해 원인조사의 결과를 담은 재해조사 의견서, 이상하게도 중대재해 발생으로 인한 고용노동부의 산업안전보건범죄 수사 과정에서의 자료로만 활용될 뿐 위 조사의 구체적 내용은 어디에도 공개되지 않고 있다. 수사자료이기 때문에 공개할 수 없다는 논리이다. 극히 일부의 내용이 지극히 일반적인 수준으로 재가공되어 재해사례별 또는 유형별 미디어 자료로 공개되고 있으나, 중대재해 원인 규명 및 산업재해 예방대책 수립을 위한 진정한 의미의 중대재해 원인조사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정리하면, 산안법상 중대재해 원인조사는 법문 그대로 중대재해 원인 규명 및 산업재해 예방대책 수립을 위한 제도이기에, 형사처벌을 위한 수사 절차로서의 조사로 한정 해석될 이유가 전혀 없고 그 조사를 거쳐 작성된 문서 역시 수사자료로서의 의미만을 가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고용노동부는 중대재해 원인조사를 근로감독관의 수사에 참고하기 위한 과정으로 축소한 채 이를 비공개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공개를 요구하는 중대재해조사보고서는, 첫 번째 기고글에서 담고 있는 바와 같이 근본적인 사고 원인을 포함한 진정한 의미의 중대재해 원인조사의 결과물이고, 제도의 목적에 맞게 그 내용을 공개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점을 우선 밝혀둔다.

중대재해조사보고서 공개의 의의 및 활용 지점

그동안에도 중대재해 원인조사를 충실히 진행하고 그 결과를 공개할 필요성에 대한 현장과 전문가들의 요구는 있었지만, 작년에 제정 된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이하 중대재해처벌법이라 한다)을 고려하면 그 필요성은 보다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 법의 제정이유, 기업의 조직문화 또는 안전관리 시스템 미비로 인해 일어나는 중대재해사고를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서는 사고의 원인에 대한 근본적이고 구체적인 파악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중대재해조사보고서 공개의 문제는 어떻게 하면 중대재해처벌법이 실제 현장에서 작동되고(위하력/예방), 적용될 수 있을까(처벌)에 대한 문제와 이어질 수 밖에 없다.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


2(정의) 이 법에서 사용하는 용어의 뜻은 다음과 같다.
2. “중대산업재해산업안전보건법2조제1호에 따른 산업재해 중 다음 각 목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결과를 야기한 재해를 말한다.
. 사망자가 1명 이상 발생
. 동일한 사고로 6개월 이상 치료가 필요한 부상자가 2명 이상 발생
. 동일한 유해요인으로 급성중독 등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직업성 질병자가 1년 이내에 3명 이상 발생


4(사업주와 경영책임자등의 안전 및 보건 확보의무) 사업주 또는 경영책임자등은 사업주나 법인 또는 기관이 실질적으로 지배ㆍ운영ㆍ관리하는 사업 또는 사업장에서 종사자의 안전ㆍ보건상 유해 또는 위험을 방지하기 위하여 그 사업 또는 사업장의 특성 및 규모 등을 고려하여 다음 각 호에 따른 조치를 하여야 한다.
1. 재해예방에 필요한 인력 및 예산 등 안전보건관리체계의 구축 및 그 이행에 관한 조치
2. 재해 발생 시 재발방지 대책의 수립 및 그 이행에 관한 조치
3. 중앙행정기관ㆍ지방자치단체가 관계 법령에 따라 개선, 시정 등을 명한 사항의 이행에 관한 조치
4. 안전ㆍ보건 관계 법령에 따른 의무이행에 필요한 관리상의 조치
1항제1호ㆍ제4호의 조치에 관한 구체적인 사항은 대통령령으로 정한다.


6(중대산업재해 사업주와 경영책임자등의 처벌) 4조 또는 제5조를 위반하여 2조제2호가목의 중대산업재해에 이르게 한 사업주 또는 경영책임자등은 1년 이상의 징역 또는 10억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이 경우 징역과 벌금을 병과할 수 있다.
4조 또는 제5조를 위반하여 제2조제2호나목 또는 다목의 중대산업재해에 이르게 한 사업주 또는 경영책임자등은 7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억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1항 또는 제2항의 죄로 형을 선고받고 그 형이 확정된 후 5년 이내에 다시 제1항 또는 제2항의 죄를 저지른 자는 각 항에서 정한 형의 2분의 1까지 가중한다.

중대재해처벌법위반죄의 구성요건은, 사업주 또는 경영책임자등이 중대재해처벌법 제4조 또는 제5조에서 정한 안전·보건 확보의무를 위반할 것, 동법상 중대산업재해가 발생할 것, 의무 위반행위와 중대산업재해 발생 간의 인과관계가 존재할 것 등이다. 특히 경영계는 위 의 구성요건과 관련하여 명확성의 원칙 및 포괄위임입법 금지원칙 위반 등을 들고 나오고 있어 향후 해석 다툼이 예상되는 상황이다.

의 구성요건, 즉 동법 제4조의 안전·보건 확보의무의 내용과 범위를 해석하는데 있어, 재해가 발생한 사업장에서의 해당 중대재해 조사 결과는 물론이고 동일 사업장에서 이전에 일어난 사건의 조사 결과 및 동종 업종의 중대재해 조사 결과 등이 기준이 될 수 있다. 이와 같은 중대재해 발생원인 조사 결과들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법원과 수사기관에서 해당 사업장이 제4조 제1항 각호에 따른 조치들을 얼마나 타당하게 했는지 평가하고 법 위반 여부를 판단하거나, 사업장에서 각호의 예방조치들을 현장에 적용하고 조치의 적절성을 스스로 피드백하는 과정이 얼마나 가능할지 의구심이 든다.

물론 제1호와 제4호에 대해 시행령으로 구체적인 사항을 정하겠지만, 여전히 중대재해조사보고서 등 중대재해 조사 결과의 구체적인 내용을 바탕으로 사업주 또는 경영책임자 등이 위 각호에 따른 조치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였는지, 설령 이행하였다고 하더라도 구체적인 이행의 내용이 적절하고 타당한지를 판단해야 한다. 그래야 조치가 내실 없이 형식적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가령 단순히 사업주 또는 경영책임자등이 재해예방에 필요한 인력 및 예산 등 안전보건관리체계의 형식을 갖추고 이에 관한 이행조치를 재량껏 했다는 것만으로(1), 또는 재해 발생 시 재발방지 대책 수립의 형식을 갖추고 이에 관한 이행조치를 어느 정도 하기만 한다면(2), 안전ㆍ보건 관계 법령에 따른 의무이행에 필요한 관리상의 조치를 형식상 내지 임의로 이행하였다고 해서(4) 중대재해처벌법에 따른 안전·보건확보의무를 다했다고 평가하는 것은 이 법의 입법취지에도 부합된다고 볼 수 없다.

중대재해조사의 구체적 내용을 공개하는 것은 중대재해처벌법위반죄 구성요건의 명확성을 확보하기 위한 해석 전략으로서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대법원은 죄형법정주의의 원칙에서 파생되는 명확성의 원칙은 법률이 처벌하고자 하는 행위가 무엇이며 그에 대한 형벌이 어떠한 것인지를 누구나 예견할 수 있고, 그에 따라 자신의 행위를 결정할 수 있도록 구성요건을 명확하게 규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처벌법규의 구성요건이 명확하여야 한다고 하여 모든 구성요건을 단순한 서술적 개념으로 규정하여야 하는 것은 아니고, 다소 광범위하여 법관의 보충적인 해석을 필요로 하는 개념을 사용하였다고 하더라도 통상의 해석방법에 의하여 건전한 상식과 통상적인 법감정을 가진 사람이면 당해 처벌법규의 보호법익과 금지된 행위 및 처벌의 종류와 정도를 알 수 있도록 규정하였다면 처벌법규의 명확성에 배치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어떠한 법규범이 명확한지 여부는 그 법규범이 수범자에게 법규의 의미내용을 알 수 있도록 공정한 고지를 하여 예측가능성을 주고 있는지 여부 및 그 법규범이 법을 해석·집행하는 기관에게 충분한 의미내용을 규율하여 자의적인 법해석이나 법집행이 배제되는지 여부, 다시 말하면 예측가능성 및 자의적 법집행 배제가 확보되는지 여부에 따라 이를 판단할 수 있다. 그런데 법규범의 의미내용은 그 문언뿐만 아니라 입법 목적이나 입법 취지, 입법 연혁, 그리고 법규범의 체계적 구조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는 해석방법에 의하여 구체화하게 되므로, 결국 법규범이 명확성 원칙에 위반되는지 여부는 위와 같은 해석방법에 의하여 그 의미내용을 합리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해석기준을 얻을 수 있는지 여부에 달려 있다.”(대법원 2014. 1. 29. 선고 201312939 판결 등)고 판시하고 있다.

수사기록에 편철되어 해당 사건 수사를 담당한 검사와 근로감독관만 참고하고 사라지는 깜깜이조사가 아니라, 기업과 노동자가 무엇이 중대재해의 원인인지 인지하도록 하여 관련 법령상 무엇이 금지되고 무엇이 필요한지 충분히 예측가능케 하는 토대로 기능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중대재해처벌법이 기업 내에서 위하력을 가지고 재해예방의 기제로 작동하고 중대재해 발생시 처벌을 위한 근거로서 적용되기 위해서는, 근본적이고 구체적인 사고의 원인이 규명되고 현장에서 그 내용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중대재해 원인조사 완료 후 개인정보만을 삭제한 채 즉시 일반에 공개하여 현장에서 가급적 빨리 원인을 파악하고 재발방지 대책을 수립하도록 해야 한다. 또한 고용노동부는 재해조사 결과에 기반해 도출한 재해예방 대책 등의 내용을 해당 사업장과 동종 업종 사업장들에 고지하고, 행정지도 등을 통해 그 이행을 점검하도록 하는 것도 시급히 고려해야 한다.

또한, 기존 산업안전보건법 체계 내에서도 공개된 중대재해조사 내용을 활용하여 재해예방을 위한 안전보건관리체제의 실효성을 확보하고 위험에 대한 사업장 내 통제력을 높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으로 노사 동수로 구성된 산업안전보건위원회는 사업주의 중대재해 원인조사 및 재발방지 대책 수립에 관한 사항을 심의·의결해야 하는데, 이 때 고용노동부의 중대재해조사보고서의 내용은 중요하게 고려될 수 있을 것이다.

(박다혜 회원, 금속노조 법률원 변호사)

[일터7월_특집1] 중대재해 조사 보고서, 지금 이대로 충분한가?

중대재해 조사 보고서란?

중대재해가 발생하면 근로감독관은 현장에 방문해 재해발생 원인조사와 재발방지 대책수립에 관한 조사를 진행한다. 이때 전문적·기술적 자문을 위해 재해조사에 참여하는 안전보건공단(이하 공단)의 해당 분야 전문가가 작성한 보고서(재해조사 의견서)를 참고한다. 이를 가리켜 중대재해 조사 보고서(이하 중대재해 보고서)’라 한다. 즉 중대재해 발생의 원인 규명 및 동종·유사 사고 방지를 위해 고용노동부에서 실시한 공공·행정 조사의 결과물이 중대재해 보고서다.

사고예방은 재해로부터 배운다라는 말이 있다. 안전보건활동의 상식이자, 중대재해 보고서 작성의 이유다. 하지만 오늘날의 중대재해 보고서는 세상에 온전히 드러나지 않는다. 결국 우리는 재해예방에 가장 기초가 되는 자료를 제대로 활용하고 있지 못하는 셈이다. 그나마 다행인 부분은 고용노동부에서도 중대재해 보고서가 공개되지 않는 현재의 심각성을 일부나마 자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고용노동부 산하의 공단에서 2020년 실시한 연구에서 기존 중대재해 보고서의 질적 측면의 한계와 함께 제한적인 수준이나마 재해조사 보고서 공개 필요성을 언급하고 있다.

일터7월호의 특집을 통해 중대재해 보고서 공개의 필요성은 충분히 다뤄질 것이므로 본 고에서는 관행적으로 행해지는 현재의 중대재해 조사 및 중대재해 보고서의 문제를 짚고자 한다.

도대체 중대재해 보고서는 작성하는 것일까?

앞서 언급했듯이 중대재해 보고서는 중대재해에 대한 공공·행정 조사의 결과물이다. 즉 중대재해라는 막중한 결과의 근본적인 원인을 밝히고, 해당 현장뿐만 아니라 수많은 일터의 재해예방 자료로 활용하기 위해서다. 다시 한번 중대재해 보고서를 작성하는 이유를 되짚는 이유는 중대재해 보고서가 자료로 활용되기는커녕 조사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중대재해를 대하는 고용노동부의 태도부터 살펴보자. 우선 일반재해 경우 사업주가 재해발생 신고서를 고용노동부에 제출하는 것으로 모든 처리 절차가 끝난다. 사망사고가 아니라면, 민원이 접수되지 않는 한 고용노동부에선 별도의 현장조사를 실시하지 않아도 된다. 이러다 보니 사업주가 재해발생 신고서에 재해 원인을 노동자의 과실이나 부주의 등으로 작성해, 피해자에게 재해의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일이 발생하곤 한다.

그러나 중대재해는 다르다. 중대재해가 발생하면 산업안전보건법(이하 산안법) 56조 제1항에 따라 고용노동부에서 직접 원인조사에 나서고, 동종·유사 사고의 재발을 방지하고자 한다. 즉 일반재해와 달리 중대재해만큼은 산안법과 그 시행규칙에 조사 필요성과 처리 근거가 마련돼 있다.

어째서 중대재해는 고용노동부 차원의 별도 규정이 마련돼 있는 걸까? 그 이유는 무척이나 자명하다. 인간의 생명은 다른 어떤 가치보다 소중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 한 명이라도 일터에서 죽음에 이르러서는 안 되고, 2명 이상의 노동자가 3개월 이상의 치료를 받을 정도로 심각한 부상을 발생시킨 사고에 대해서도 간과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한 사업장에서 10명 이상 동시에 다치거나 질병에 노출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면, 이 또한 우리 사회가 모른 척 지나칠 수 없다.

중대재해는 결코 운이 없거나 불가피한 상황에 의해 발생하는 게 아니다. 흔히 호도하듯이 노동자의 실수나 부주의로 발생한 게 아니라 안전보건 관리의 총체적 부실로 인한 결과가 드러난 것이다. 그렇기에 해당 사업장의 안전관리를 전적으로 자율성의 영역에 맡겨서는 문제해결이 쉽지 않다. 이 같은 문제의식하에 근로감독관의 직접조사와 공단의 자문이라는 행정력을 동원해, 재해발생의 원인을 철저히 규정하고 동종·유사 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재발 방지 대책을 수립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통상적으로 고용노동부가 실시하는 중대재해 조사는 산안법 시행규직 제3에 명시된 경우로만 국한된다. 직업병이나 직업성 질환과 관련한 조사는 보상을 위한 공단의 재해조사와 역학조사로만 갈음되고 있다. 또한 중대성이 심한 부상자가 다수 발생하더라도 의료기관에서는 최초 진단 시 3개월 이상의 요양이 필요하다는 진단을 쉽게 내리지 않는다. 결국 대부분의 중대재해 보고서가 사고사망에 한정돼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한계를 참작할 경우, 사고사망에 대한 고용노동부의 중대재해 조사는 제대로 이뤄지고 있을까? 여기에는 그렇다, 아니다로 답하기 곤란하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답하자면, 중대재해 보고서가 세상에 온전한 형태로 드러나지 않아 그 여부를 따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다만 앞서 제시한 재해조사 보고서의 질적 제고를 위한 연구에서 일부나마 그 실태를 엿볼 수 있다. 중요한 지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현행 중대재해 조사 보고서의 한계

공단의 연구보고서를 살펴보기에 앞서, 중대재해 조사는 조사인가 아니면 수사인지 여부를 점검할 필요가 있다. 중대재해 보고서와 재해조사 의견서를 작성하는 근로감독관과 공단 전문가는 보고서 공개에 우려를 표한다. 중대재해 보고서는 수사자료이고, 재판에 영향을 미친다는 이유에서다. 이처럼 재판 등 송사에 대한 부담은 조사내용의 손질로까지 이어진다. 즉 검찰의 기소 자료로 활용되는 산안법 법령 위반 자료 이외에 조사내용은 근로감독관에 의해 수정되거나 의견 조율이라는 형태로 수정을 요구받고 있었다. 이는 보고서를 작성하는 담당자의 의견이 충분히 반영되지 못한 채, 산업안전보건규칙 조항을 중심으로만 작성되는 한계로 작용한다.

5년간의 재해조사 의견서를 검토하고 분석한 연구에서는 재해조사 의견서의 내용상 문제를 언급한다. 재해 발생 과정이나 조사 및 확인 내용은 비교적 상세히 기술되지만, 재해 원인과 대책은 매우 단순명료하게 작성된다. 또한 작성 방법이나 재해조사 규정이 표준화돼 있지 않은 탓에 중대재해 보고서의 질이 들쑥날쑥하다. 특히 공단의 중대재해조사 실무 핸드북(2019)에서는 중대재해 보고서의 현장 확인 내용 및 분석항목에 총 12가지 요소에 관한 기술을 권하지만, 이조차 충실히 진행되지 않았다. 이는 7일로 한정된 재해조사 기간이라는 또 다른 문제와 연결되는 문제이다.

이외에도 고용노동부에서 재해조사에 한 명도 참여하지 않는 경우가 7.6%(56)에 이르는 것 조사 기간이 90.2%(668)3일 이내로 단순 현장 조사만 이뤄지는 것 중대재해 발생의 원인 수도 1~2개의 원인으로 작성된 게 63.8%(473)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 산안법 위반 법 조항 없이 원인만 (추락방지망 설치 미비, 방호물 설치 불량 등) 기술한 게 83.8%(621)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 단순한 기술적 관리 원인을 지적한 보고서가 98.4%(611)인 것 재해예방대책 제시에서도 1~2개로 작성된 게 56.7%(420)건에 달하고, 이조차 없는 보고서도 0.8%(6)나 되는 것 재해발생 대책에 교육적 대책의 필요성을 언급한 보고서는 1~2건을 포함한 게 9.3%(64)에 그치는 것 등이 문제임을 언급한다.

어떻게 보강할 것인가?

공단의 자체 용역연구 결과를 통해 제한적이지만, 그동안 중대재해 조사가 얼마나 허술하게 진행됐는지가 여실히 드러났다. 지금껏 관행적으로 이뤄졌지만 중대재해 조사와 중대재해 보고서는 재해감소와 동종·유사 사고의 재발 예방에 있어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다. 재해조사의 보강과 중대재해 보고서 작성의 본래 목적 달성을 위해 몇 가지 방안을 제안하고자 한다.

첫째, 노동자 참여 보장이다. 예방을 위해서는 실제 사고를 유발한 현장의 실태가 가감 없이 고스란히 드러나야 한다. 이러한 실체적 기반 위에서 예방대책이 마련될 수 있다. 이를 위해 재해조사 과정에서 해당 사업장의 노동자 참여가 제도적으로 보장돼야 한다. 현재의 참고인 조사만으로는 불충분하다. 또한 안전보건활동 경험이 풍부한 지역 및 인근 사업장의 명예산업안전감독관이 재해조사와 예방대책 수립에 참여할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

둘째, 재해조사의 표준화다. 지금의 조사는 사고의 직접적인 원인조사, 사고를 유발한 기인물 조사로 한정된다. 하지만 안전대책은 노동자의 실수가 사고로 이어지지 않기 위한 것이며, 노동자의 불안전한 행동과 관리적 대책이나 조직문화 등 간접적 원인 등을 전제로 이뤄지는 조치여야 한다. 따라서 조사의 내용을 확대하고 표준화해야 한다.

셋째, 재해조사 결과의 전면 공개를 전제로 중대재해 조사가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 전면 공개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현재의 상태처럼 관행적인 조사가 지속될 가능성이 있다. 과연 우리 사회에 전면적으로 공개되는 재해조사라면, 이렇게 한정적으로 조사를 할 것인지를 되물어야 한다. 이를 통해 재해조사 과정에서 누락하거나, 미처 조사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 보완하도록 해야, 재해조사가 내실화를 기할 수 있을 것이다.

(손진우 상임활동가)

[일터6월_특집3] 연대의 정치로 기후정의 실현하기 - 기후정의활동가 김선철 님 인터뷰

연대의 정치로 기후정의 실현하기

- 기후정의활동가 김선철님 인터뷰

박기형 상임활동가

 

기후위기는 세계 전체의 문제다. 최근 한국정부도 그린뉴딜이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정책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정부정책에 대한 비판이 곳곳에서 제기되고 있다. 지난 5월 18일 저녁 김선철 활동가를 만나, 현재 한국에서 기후위기와 관련한 정부정책의 한계와 앞으로 기후위기운동을 어떻게 만들어가야 하는지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말뿐인 한국의 그린뉴딜

김선철 활동가는 기후정의 원칙에 입각한 비폭력 시민불복종 운동을 추구하는 멸종저항서울과 멸종반란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는 가장 먼저, 한국에서 얘기되고 있는 정부정책으로서의 그린뉴딜에는 기후정의운동이 제기한 문제의식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고 비판했다. 알맹이는 쏙 빠진 허울뿐인 그린뉴딜로 둔갑해버린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미국에서 활발히 이뤄졌던 ‘그린뉴딜’은 정책 이전에 운동이었다는 점이 강조될 필요가 있습니다. 기후정의 원칙에 입각해, 기후위기 대응만이 아니라 사회 불평등 해소를 위한 사회체제의 변화를 목표로 삼은 운동이었죠. 이에 반해, 한국에서는 정부가 그린뉴딜이라는 껍데기만 가져와 기존의 친기업 성장 정책에 녹색칠을 한 것입니다. 한국 정부의 그린뉴딜과 2050 탄소중립 계획은 기후위기로 인해 변하고 있는 세계경제질서에 대응하려고 하는 경제정책의 성격이 강합니다. 더욱이 정부뿐만 아니라 정당 등 여러 단위에서 제출한 그린뉴딜 정책들 모두 아래로부터의 목소리와는 분리된 채 위로부터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폭염과 폭한, 이상기후로 인한 재앙, 일자리, 돌봄, 먹거리, 지역 공동체, 에너지 불평등 등 기후위기는 노동자, 저소득층, 여성, 청년, 장애인 등을 포함한 사회 전반에 걸쳐 영향을 미칩니다. 하지만 그에 대한 해결책은 한줌도 안되는 관료와 소위 전문가들이 떠맡고 있죠. 이런 경향이야말로 한국 기후운동의 가장 큰 문제점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 보니 정부는 마음대로 정책을 만들고 밀어붙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구요. 이렇게 된 데에는 정부나 전문가집단만이 아니라 시민사회와 노동조합의 책임도 크다고 생각합니다."

 

▲ 멸종반란 런던의 기후위기 대응 시위 모습

 

기후정의라는 대안 프레임

김선철 활동가는 '프레임 투쟁'으로 기후위기 대응의 지형을 분석하였는데, 특정한 사회세력의 프레임에 갇혀서 기후위기와 연관된 다양한 사회문제들, 여러 사회집단의 목소리가 제약되거나 무시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흔히 프레임이라 하면, 어떤 사건이나 경험, 혹은 세상을 특정한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렌즈를 말합니다. 사회운동론에서 프레임은 운동의 활성화를 목적으로 사회운동 주체가 자신의 이념적 지향과 일치하는 방식으로 고안해내는 인식틀을 의미합니다. 정치적 갈등 상황에서 갈등의 주체들은 언제나 자기주장의 정당성과 대중들의 지지를 획득하기 위해 노력하는데, 이때 자기에게 유리한 프레임을 만들고자 경쟁을 벌입니다. 이를 프레임 투쟁이라 합니다."

"지금까지 한국의 기후운동은 몇몇 기후환경단체들이 중심이 되어 이끌어왔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대체로 오랜 시간 각종 환경 거버넌스에 참여해오며 현 정부와 친화적인 관계를 맺어왔습니다. 이들 단체 출신들은 정부위원회 위원은 물론 정부기관과 국회, 심지어 환경부 장관에 이르기까지 권력의 자리에 포진해 있습니다. 이러다 보니 아래로부터의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사회운동이 강화되기보다는 소수의 활동가와 전문가에 의존하거나 정부 내 담당 부서와의 협의나 여러 형태의 로비를 통한 입법 또는 정책입안에 몰두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기층 풀뿌리 조직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아래로부터의 압력이 없으니, 현 상황에 대해서도 문제의식을 갖기 어려운 것으로 보입니다."

김선철 활동가는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가장 절실한 것으로 대안 프레임의 제시를 꼽았다. 정부가 내걸고 있는 그린뉴딜이나 탄소중립에 맞선 새로운 프레임을 내걸고 이에 동의하는 사회세력을 구축해가야 한다는 것이다. 프레임 간의 경쟁을 만들어내고 논쟁의 구도를 전환시키기 위한 싸움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미국의 경우, '그린뉴딜'하면 사람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일자리'와 인종, 젠더, 노동, 지역, 세대 등 다양한 영역에 걸친 '사회정의' 실현입니다. 미국만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금요일(Fridays for Future)'이나 '멸종반란(Extinction Rebellion)' 등 세계적으로 영향력 있는 진보적 기후운동에서도 정의의 문제를 강조하면서 스스로를 기후운동이 아닌 기후정의운동으로 호명하고 있습니다. '기후변화 말고 체제변화'라는 구호도 이런 문제의식을 담고 있습니다. 자연환경과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을 이윤을 위한 도구로 삼았던 자본주의가 기후위기의 원인이라면, 이 자본주의를 넘어서지 않고서는 기후위기 극복도 불가능하다는 기후정의의 문제의식에 기반해 정부나 기업의 가짜 기후정책에 맞서 제대로 된 기후위기 대응책을 마련을 위한 진보적 시민사회의 연대와 확장이 무엇보다 필요해 보입니다."

기후정의운동을 만들어 가려면?

기후정의운동을 만들어가기 위한 원칙이자 방법으로 김선철 활동가는 ‘교차성’을 강조했다. 교차성에 입각한 기후정의운동을 만들어가는 건 도대체 어떤 것일까?

"다시 한번 미국 사례를 살펴보면, '그린뉴딜 네트워크'가 현재 주도하고 있는 THRIVE 캠페인을 참고할 수 있어요. 변혁(Transform), 치유(Heal), 새롭게 하기(Renew), 투자(Invest), 활력(Vibrant), 그리고 경제(Economy)의 앞 글자를 따서 '사회를 바꾸고 치유하고 새롭게 만들기 위해 활력있는 경제에 투자하라'라는 요구를 걸고 있어요. 여기에는 노동조합과 기후정의운동단체는 물론 원주민, 여성, 정치개혁, 인종정의, 청(소)년 등 280여 개 단체가 함께 참여하고 있습니다. 임금과 일자리 보장, 인종 간 평등 구현, 원주민 권리 쟁취, 모두의 건강을 보장하는 환경정의, 기후재앙 방지, 정의로운 전환, 그리고 민중의 안녕을 위한 공적 투자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 캠페인이 내걸고 있는 세 개의 전략이 있습니다. 첫 번째가 아래로부터의 창조적이고 파열적인 운동을 통해 사회구성원들의 상식과 사회문제를 이해하는 내러티브를 바꿔내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강력한 풀뿌리 연대를 강화하는 것과 선거에 직접 참여함을 통해 영향력을 확장하는 것이 두번째고요. 이 캠페인은 ‘많은 이슈, 하나의 투쟁’이라는 구호 아래 기후변화, 인종 부정의, 공공 보건의료, 경제적 불평등 등 오늘날 미국인들이 경험하고 있는 위기들이 다 같은 뿌리를 가진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분절된 이슈 영역들을 관통하는 공통의 문제의식에 기반한 연대를 만들고자 해요. 이것이 교차성의 원칙입니다."

김선철 활동가는 한국의 역사적 경험에선 '민중연대'를 떠올릴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IMF 경제위기 이후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 특히 시장경쟁논리가 확산되면서 사회구성원 간의 연대가 약화되었고, 이는 문재인 정부와 같이 '착한 얼굴을 한' 자본주의에서 더 심화되는 경향을 보인다고 지적했다. 신자유주의 체제가 약화시킨 '민중연대'를 어떻게 복원할 것인가가 노동운동, 노동안전보건운동을 비롯한 한국 사회운동의 핵심 과제라고 보았다.

"한국인들이 기후변화에 대한 위기감의 정도가 다른 나라에 비해 약하다는 평가가 있어요. 그런데 이건 착각이에요. 국가 간 비교를 보면, 한국인들의 기후위기 인지도는 세계 어떤 나라에 비해 높아요. 정말 '위기'로 인식하고 있어요. 실천도 잘하고 있고요. 문제는 그 실천이 쓰레기 분리배출 엄격히 하거나 텀블러 들고 다니는 것과 같은 소비의 차원으로만 제한되는 것이죠. 정부의 프레임에 철저히 갇혀 있는 셈이지요. 그렇게 대안적 프레임에 기반한 아래로부터의 사회운동 활성화, 다양한 사회문제의 공통 지반으로 기후위기를 인식하는 프레임 구축이 무엇보다 중요하죠. 정의로운 사회로의 전환은 자동적으로 오지 않아요. 자극이 필요합니다. 그 자극을 만들어내는 게 사회운동의 임무라고 생각합니다."

 

 

[일터6월_특집2] 기후위기와 노동, 노동조합(*): 〈국가책임 기후일자리〉와 〈민주적 공공소유〉, 그리고 〈기후적록동맹〉

기후위기와 노동, 노동조합(*): 〈국가책임 기후일자리〉와 〈민주적 공공소유〉, 그리고 〈기후적록동맹〉

이승철 공공운수노조 정책기획국장

 

초록은 동색이 아닌 시대

이 정도면 그야말로 메가트렌드라고 부를 만하다. ‘기후’와 ‘전환’ 이야기를 하지 않는 정치세력이 없다. 기후 뉴스도 하루를 거르지 않는다. 문재인 정부는 12개국 정상과 주요 글로벌 그룹이 참여하는 <P4G 서울정상회의>를 참으로 성대하게 개최했다. ‘기후’를 붙인 시민단체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난다. 심지어 현대자동차 부사장과 포스코 회장, SK발전 대표이사는 <탄소중립위원회>에 이름 석 자를 올렸다. 어제까지도 ‘주요 탄소 배출원’이었던 자동차-철강-발전회사의 사장님들이, 왜 갑자기 탄소중립에 환호하며 나서고 있을까. 그들의 ‘녹색’과 우리의 ‘녹색’이 다르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초록은 동색이 아닌 시절이 왔다.

에너지 산업 전환, 정부의 언행불일치

정의로운 전환의 첫 단계는 탈석탄-탈핵에 기초한 재생에너지 체계로의 이행이다. 실제 우리나라 2018년 온실가스 총배출량 727.6백만톤 CO₂eq 중에서 에너지부문의 배출량은 632.4백만톤 CO₂eq으로 87%를 차지한다. 정부 대책 중 가장 먼저 화력발전소 폐쇄가 언급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석탄화력발전을 중단해야 한다는 데에 이견이 없다. 정부도, 발전노동자들도 같은 의견이다. 문제는 이를 어떻게 실현하느냐의 경로와 방안인데, 정부의 언행을 보면 한심하기 그지없다. 정부는 10개 노후발전소를 폐쇄하는 조치를 취한 것과 동시에, 7개의 신규화력발전소를 건설하는 이율배반을 보이고 있다. 7개 신규발전소 중 무려 6개가 SK-삼성-포스코-두산중공업 등 재벌대기업에 의해 지어지고 있다. 이렇게 스멀스멀 커진 민간발전 비율은 이제 30%대에 이른다. 여기에 더해 전력산업 민영화의 일환인 전력판매시장 개방 움직임도 쉼 없이 등장하고 있으며, 발전 부문의 경쟁을 부추기는 전력거래를 허용하는 법안도 ‘녹색에너지’를 명분으로 슬그머니 비집고 들어왔다. 발전대기업의 이윤보장 수단이 된 천연가스 직수입 비율도 매년 올라 지난해에는 22%를 기록했다. 한국전력과 발전공기업, 가스공사 등 에너지 공기업들은 지속적인 경쟁압력과 수익성 추구 압박 속에 운영되고 있다.

이처럼 경쟁을 토대로 시장화 된 에너지 체제는 철저하게 이윤 논리에 따라 작동하게 된다. 싼 값에 많은 전기를 생산하기 위해 ‘대량생산-대량소비’를 가능하게 하는 발전사업에 몰두한다. 화석연료에 대한 미련을 버리기 어렵다. 계획적이고 구조적인 에너지 전환은 ‘배부른 소리’로 치부된다. 이런 상황에서 빠르고 효과적이며 정의로운 전환을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녹색자본'이 온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들어 등장하고 있는 것이 바로 ‘녹색자본’이다. 한화와 SK, 현대기아차, 포스코 등은 지난 5월말 개최된 P4G 서울정상회의에서 ‘탄소중립 세일즈’에 열을 올렸다. 대기업뿐만이 아니다. 태양열 등 신재생에너지 산업에서는 크고 작은 기업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기후-환경 단체를 구성하거나 개입하는 방식으로 ‘탈탄소를 위한 재생에너지 자본 육성’을 요구하기도 한다. 탈석탄만 된다면 농지를 덮고 산을 깎아 태양열 발전판을 세워도 된다는 위험한 시각까지 등장한다. 이들에게는 기후위기마저도 ‘새로운 시장’이다.

하지만 시장과 기업에 맡겨두는 에너지 전환이 성공할 수 없다는 사례는 이미 증명됐다. 2007년 독일 정부는 2020년까지 1990년 대비 온실가스 배출을 40% 줄이는 것을 골자로 한 <2020 기후변화 행동 프로그램>을 발족했다. 이는 대부분 시장 기반의 정책을 사용하는 포괄적인 국가 계획이었다. 그러나 2017년 독일의 온실가스 감축은 30%를 밑돌았고, 결국 독일 정부는 감축 목표를 낮추었다.1)

유럽에서 최근 재생에너지에 대한 신규 투자가 줄고 있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FIT 제도(발전차액지원제도)가 축소되자, 쏟아져 들어오던 민간 자본이 철수하기 시작하며 태양광 붐도 사라졌다. 즉 시장에 맡겨둔 에너지 전환은 속도와 규모의 면에서 기후위기의 긴급함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2)

 

▲ 지난 3월 31일 국회 앞에서 국제운수노련과 공공운수노조, 철도지하철노조협의회가 공동으로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에 "철도지하철에 재정 지원과 친환경, 정의로운 복구를 위한 국제적 흐름"에 나설 것을 요구했다.

 

정의로운 에너지 전환 방안은 '민주적 공공소유'

해법은 시장의 손으로 넘어가고 있는 에너지 산업을 ‘민주적 공공소유’ 형태로 전환해 바로 잡는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발전 6개사의 수평적 통합>과 <민영 발전소의 공영화>다. 통합발전공기업 설립을 통해 현재와 같은 경쟁체제에서 발생하는 비용을 예방하고, 이를 ①원자력과 석탄 발전의 점진적 중단과 ②재생 가능 에너지에 대한 전폭적 투자 수행으로 돌릴 수 있다.

또 통합발전공기업은 내부적 인력 재배치를 통해서 탈원전-탈석탄 과정에서 발생할 고용 문제를 예방할 수 있으며, 신규 복합화력 발전소 건설과 적극적인 재생에너지 사업을 통해 재생에너지 부문에서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할 수도 있다. 이 과정을 통해서 외주하청업체나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공공적 고용 전환 전략 내부로 포함시키는 것도 가능하다. 통합발전공기업△발전공기업의 녹색화(재생에너지의 획기적 확대 여건 마련)와 △발전공기업의 민주화(이사회와 사업구조 개혁을 통한 운영구조 민주화 및 노조-지역사회의 참여 보장)로 나아가야 한다.

 

[표1] 공공적 에너지 전환을 위한 6대 과제

 

'기후고용 창출'과 '대규모 고용불안'의 갈림길

탈석탄 에너지 전환 과정에서 가장 먼저 고용불안의 영향을 받는 곳은 에너지 산업이다. 그 중에서도 석탄발전소 노동자들이며, 그 가운데 발전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불안감은 가장 크다. 정부는 2034년까지 석탄화력발전소 30기를 폐쇄한다는 계획인데, 이는 다시 말해 2021년 현재 석탄화력발전소에서 일하고 있는 25,112명의 고용이 백척간두에 놓인다는 뜻과 같다. 전체 석탄화력발전소 노동자 중 정규직은 13,846명이며, 비정규직 노동자(청소·경비·시설 자회사, 경상정비, 연료·환경설비 운전 등) 규모는 11,286명으로 집계된다. 정부가 발표한대로 LNG발전소 전환배치 등이 이뤄진다고 하더라도, 발전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업무특성상 이들 모두를 포괄하기 어려울 수 있다. 이대로 석탄화력발전소가 폐쇄될 경우, 최소 8천여명의 발전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을 것으로 전망한다.

물론 기후위기와 산업전환 과정에서 일자리의 위협이 나타나는 영역이 화력발전 뿐만은 아니다. 약 36만명의 고용규모를 나타내고 있는 자동차 및 부품산업의 경우 내연기관에서 전기자동차로의 전환에 따라 커다란 고용위협이 나타나고 있다. 탈원전 과정에서 1만여명 규모의 원자력 산업 일자리도 사라진다. 국내 자동차 산업의 직간접 고용인원이 190만명에 이른다는 점을 보면, 단지 몇몇 업종의 현안을 넘어 노동자 전반의 문제가 된다. 하지만 정부가 내놓고 있는 고용대책은 여전히 ‘맞춤형 직업훈련과 재취업 지원’ 정도에 머물러 있다. 정부지원책의 대부분이 오히려 기업에 쏠려있다. 문재인 정부는 에너지 전환 정책을 수립하는 과정에서부터 철저히 노동자를 배제해 왔다. 한국발전산업노동조합은 정권 초기인 2017년 5월 문재인 정부의 에너지 전환 정책을 지지하며, 고용 보장 방안을 논의해달라고 요청했으나, 정부는 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무런 응답을 보내지 않고 있다. 이미 폐쇄된 보령화력 1-2호기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의 고용전환 관련해서도, 정부는 노조와 아무런 협의 없이 밀어붙였다.

국가책임 기후일자리가 필요하다

기후위기는 몇몇 산업의 일자리를 위협하기도 하지만, 역으로 대규모 기후일자리의 수요를 만들기도 한다. 예컨대 △화석에너지를 대체할 재생에너지 제조-설치-유지관리 △자동차 중심의 사적 교통체계를 대체할 공공교통 확충에 따른 일자리 △에너지 효율과 단열 보강에 필요한 건물 리모델링 일자리 △생태적 농축어업 일자리 등이 대표적이다.

이 과정에서 <국가책임 기후일자리>가 등장한다. 이를 위해선 △탈탄소 전환 과정에서 일자리를 잃거나 잃을 위험에 처한 모든 노동자에게 일자리가 제공되고 △이 일자리는 국가 또는 공공부문의 책임 하에 만들어져야 하며 △적절한 임금과 양질의 노동조건이 보장돼야 하는 3대 원칙이 철저하게 지켜져야 한다. 아울러 이와 같은 정의로운 전환을 논의하기 위해서는, 산업-고용정책 수립-집행의 책임자이자, 에너지-공공부문 노동자들의 실질적 사용자인 중앙정부 차원의 노정교섭이 반드시 필요하다.

기후적록동맹을 만들자

공공운수노조는 2021년 핵심 사업의제 중 하나로 <기후위기 대응과 정의로운 전환>을 설정하고, △발전 △가스 △철도 △버스 △화물 등 유관 업종 사업장을 중심으로 대응기구를 구성해 사업을 펼치기로 했다. 하지만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투쟁이 벌어질 곳은 비단 공공부문 사업장만은 아니다. 금속노조와 건설산업연맹 등 여러 산별 노동자들 역시 정의로운 전환과 직결되는 요구를 가지고 있다. 민주노총은 이를 모아내기 위해 <특별위원회> 구성도 고민하고 있으나, 이 경우 민주노총 강규에 따라 ‘총연맹 가맹산하조직이 참여하는 내부 기구’가 된다는 한계도 없지 않다. 그러나 정의로운 전환을 위한 대응은 △민주노조(총연맹, 공공운수, 금속, 건설 등) △탈시장주의 환경운동 △체제변혁적 진보정당(정치조직)의 동맹 속에서 가능하다. 따라서 이 세 단위가 공동으로 <기후정의 실현을 위한 노동-환경 동맹(기후적록동맹)> 구성을 추진하는 것도 고민해볼 필요가 높다. 이런 속에서 민주노총 내부의 특별위원회 구성도 힘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 이 문서는 주로 공공운수노조와 관련 있는 에너지 산업의 대응을 중심으로 작성하며, 일부의 경우 사업 담당자의 의견입니다.

1) William Wilkes&Hayley Warren&Brian Parkin(2018), Germany’s Failed Climate Goals.

https://www.bloomberg.com/graphics/2018-germany-emissions/

2) <시장주의적 에너지 전환을 넘어 변혁적 정의로운 전환으로> 구준모, 2021.

[일터6월_특집1] 기후위기와 노동운동: 기후운동과 노동운동의 과제는 다르지 않다

기후위기와 노동운동: 기후운동과 노동운동의 과제는 다르지 않다

구준모 에너지노동사회노트워크 기획실장

 

 

▲ 석탄을 넘어서, 경남환경운동연합, 경남기후위기비상행동은 5월 17일 경남도청 정문 앞에서 "신규 화력발전소 가동 중단"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연 뒤 거리행진했다.

 

기후 정책에 대한 노동운동의 대응: 반대, 위험관리, 지지?

기후위기가 심각하게 진행되면서 더 이상 기후위기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사람들은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그러나 기후위기의 원인이 무엇이고, 어떤 방법으로 이에 맞서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유럽의 노동운동에 대한 한 연구에 따르면 기후위기에 대한 노동운동의 대응 방식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1)

첫 번째는 온실가스 감축 정책에 반대하는 경우이다. 폴란드의 석탄산업노조가 이런 태도를 보이는데, 일자리 상실과 에너지 주권의 침해를 우려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극단적인 입장은 노동운동 내에서도 매우 드문 경우이다. 두 번째는 위험관리 차원에서 기후 정책을 마련하는 방식이다. 온실가스 감축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규제를 최소화하고 점진적인 정책을 펴면서 환경과 고용을 조화시켜야 한다는 입장이다. 철강산업이나 자동차산업의 노조들이 주로 이런 입장을 가지고 있다. 세 번째는 적극적인 기후위기 대응과 온실가스 감축 정책을 지지하는 입장으로 유럽공공서비스노조연맹(EPSU)이나 유럽제조산별노조(IndustriAll Europe) 등 노조연맹체에서 이런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평면적이다. 신자유주의적인 정치경제 체제를 인정하고 이를 녹색화하자는 입장과 현존 자본주의 자체의 구조적인 개혁이나 변혁을 통해서 생태사회로 전환하자는 입장 사이의 차이를 잘 포착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 두 입장 간의 차이를 역사적으로 잘 살펴보기 위해서 정의로운 전환이라는 개념의 등장과 확산 과정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정의로운 전환: 산업재해와 일자리 위협에 맞선 전략2)

정의로운 전환은 국가 정책으로 제안된 것도 이론적인 탐구의 산물도 아니다. 정의로운 전환은 1970~80년대 미국에서 발생한 일자리 위협에 대한 노동운동의 대응으로 탄생했다. 미국의 석유·화학·원자력노조(OCAW)의 지도자였던 토니 마조치는 정의로운 전환이라는 아이디어를 첫 번째로 고안한 활동가였다. 그는 일자리 문제와 환경 문제가 대립한다는 통념을 거부했고, 이 프레임을 변화시킬 전략으로 정의로운 전환을 고민했다. 노동자 산업재해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마조치는 1973년 환경운동가들과 함께 셸(Shell)사의 석유정제공장에서 노동자의 건강과 안전에 관한 최초의 환경파업을 벌이기도 했다.

마조치는 공해 산업이 노동자에게 일자리를 제공하지만 동시에 환경 문제와 보건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공해 산업이 야기한 환경 파괴와 건강 악화는 노동자와 지역주민들 모두에게 피해를 주었다. 따라서 노동자와 지역주민들이 협력해서 해당 산업을 전환시킨다면 건강한 일자리와 환경, 삶을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 그 결과 1990년대 초반에 ‘노동자를 위한 슈퍼펀드’가 제안되었고, 이것이 정의로운 전환이 정교화된 첫 번째 결과물이었다. 당시 미국의 보수파는 일자리와 환경을 대립시키면서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환경 규제를 약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동자를 위한 슈퍼펀드는 일자리 대 환경이라는 부당한 대립을 해체하고, 공공적인 개입을 촉구하는 프로그램이었다.

1995년 마조치의 동지였던 레스 리오폴드와 브라이언 콜러는 5대호 수질에 관한 국제 컨퍼런스에서 처음으로 정의로운 전환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우리는 특별 펀드를 제안한다. 정의로운 전환 펀드는 과거에 노동자를 위한 슈퍼펀드라고 불리던 것이다. 정의로운 전환 펀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제공해야 한다. 노동자가 은퇴하거나 다른 직업을 구할 때까지 임금 전액과 수당, 직업학교나 대학에 다니는 4년 동안의 등록금과 임금 전액, 졸업 후 구한 일자리의 임금이 이전보다 적을 경우 보조금 지급, 재정착 지원."

한편 이러한 노력으로 1997년 정의로운 전환 동맹(Just Transition Alliance: JTA)이 결성되었다. JTA에는 환경정의 단체와 사회정의 단체들이 함께했으며 이들은 미국에서 가장 취약한 계층을 대표하는 곳들이었다. 또한 JTA에 참가한 단체들은 노동조합 조직화에도 열정적이었으며 노동자들과 지역주민들이 함께하는 지역 투쟁을 이끌기도 했다. 노동운동 내에서 환경운동을 강화하고, 환경운동 내에서 노동운동을 강화하기 위한 노력이 이어졌다. 그 결과 1990년대에는 정의로운 전환이 정부를 대상으로 하는 정책을 넘어서는 의미를 갖게 되었다. 정의로운 전환은 노동운동, 환경운동, 지역운동 사이를 엮어주는 끈이 되었고, 노동자와 지역주민들이 만들어 낸 대안적인 사회·환경적 정치의 장이 될 수 있었다.

즉 초기에 고안되고 발전한 정의로운 전환은 매우 급진적인 노동자 정치의 가능성을 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영향을 받는 노동자와 지역사회에 초점을 맞췄으며, 노동자와 지역주민을 조직하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녹색 산업 정책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강조하고 그 과정에서 노동조합이 핵심적 역할을 해야 함을 역설했다. 1991년 석유·화학·원자력노조의 결의안은 정의로운 전환을 미국의 정치경제를 뒤바꾸는 야심찬 정책들로 구성했다. 그들은 성장 자체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지는 않았지만, 노동자와 사회와 환경을 파괴하는 기존의 성장 방식을 문제 삼았다.

생태사회주의적 정의로운 전환의 필요성

그러나 2000년대 이후 국제기구와 국제노총, 각국 정부를 통해서 정의로운 전환이 확산되면서 급진적인 노동-환경 정치의 가능성을 내포했던 정의로운 전환의 의미가 퇴색하기 시작했다. 각국 정부와 국제기구들을 통해서 최근 주류화된 정의로운 전환은 탈탄소 경제 전환 과정에서 피해를 입은 노동자에 대한 보상과 직업재교육의 의미로 축소되었다. 그 과정은 노사정 협상과 같은 사회적 대화로 달성될 수 있다고 봤다.

이렇게 상이한 정의로운 전환의 전략을 두 가지 기준에 따라 다음과 같이 정리해볼 수 있다. 먼저 전환을 통해 달성하고자 하는 대안 사회의 성격을 기준으로 <기존 체제의 개혁을 통한 녹색화>와 <정치경제적 변혁>으로 구분한다. 다음으로 전환을 위한 접근법이자 방법론을 기준으로 <사회적 대화>와 <사회적 권력>을 구분한다. 그렇다면 사회적 대화를 통한 옅은 녹색 사회로의 전환을 생태적 현대화로 파악할 수 있다(3사분면).

 

▲ 정의로운 전환의 이념형

 

반면 사회적 권력을 통한 짙은 녹색 사회로의 전환 모델은 생태 사회주의로 간주할 수 있다(1사분면).

생태적 현대화와 생태 사회주의라는 구분법은 오늘날 제기되는 다양한 정의로운 전환을 분류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이를 구조개혁과 변혁을 지향하는 <생태 사회주의>와, 신자유주의와 녹색 케인스주의를 지향하는 <생태적 현대화>로 정리할 수 있다.

이런 구분을 통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정의로운 전환을 식별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사회적 대화 접근법의 한계를 인식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국가와 국제기구들은 의사결정 과정에서 노동조합이나 노동자의 참여를 제도적으로 배제하고 있고, 포함하는 경우에도 하위 파트너로 동원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다양성을 고려하더라도, 고도의 코포라티즘(corporatism) 체제를 구축한 북유럽마저도 노사정 합의 모델이 형해화되어 이에 대한 노동조합의 권한은 약화되고 있다. 따라서 낡은 방식의 사회적 대화에 의존한 채 정의로운 전환을 추진한다면, 실질적인 변화를 만들 수는 없어 보인다.

또한 오늘날 기후위기와 사회경제적 위기가 말해주는 바는 이윤과 성장에 목을 매는 자본주의를 표면적으로만 가다듬는 옅은 전환으로는 문제의 해결이 요원하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오늘날 자본주의 심층의 권력 구조까지 변화시키는 정치경제적 변혁 모델의 전환이 필요하다. 요컨대, 생태 사회주의형의 정의로운 전환이 지금 필요한 시급하고 구조적인 변화의 측면에서, 또한 운동 전략의 측면에서 바람직하다.

노동운동과 기후운동의 접점: 체제 전환과 생산의 재조직화

 

▲ 기후위기의 근본적 원인이 현 체제에 있음을 외치는 시위대의 모습

 

오늘날 거세지고 있는 기후위기와 자본주의 경제의 구조적 위기는 체제 전환을 지향하는 노동운동과 기후운동이 만날 수 있는 접점을 제공해준다. 기후변화가 국제 정치의 주요 이슈가 된 지 30년이 지났지만, 온실가스 배출이 지속적으로 늘어나기만 한 것은 신자유주의적 정치경제 질서를 그대로 두고 그 속에서 미시적인 정책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탄소시장을 육성하고 활용하는 방식의 그릇된 시장주의 해결책과 기술주의 해결책만이 활용되었다. 지금 부상하고 있는 새로운 기후운동은 이러한 낡은 대책으로는 기후위기에 맞설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급진적인 체제 전환을 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노동운동도 마찬가지이다. 2000년대 이후 불안정노동의 확산에 대해서 국제노총이나 국제노동기구는 괜찮은 일자리(Decent Job) 캠페인으로 대응했지만, 실제로는 불안정노동의 확산을 막을 수 없었다. 신자유주의적인 정치경제 질서를 바꿀 사회적 권력을 형성하지 못한 채, 국제 회의장과 각국의 사회적 대화 과정에서 동원되는 좋은 말 잔치로 끝나는 캠페인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오늘날 노동운동은 사회적 권력 관계의 변화를 통한 불평등 해소와 노동자계급의 실질적 권리 확대라는 과제와 맞닥뜨리고 있다.

또한 생태사회로의 전환을 위해서는 생산의 재조직화라는 보다 근원적인 과제에 다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를 ‘생산적 정의’의 문제라고 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현대기아차 재벌이 자동차를 생산하는 지금까지의 방식을 그대로 두고 만들어내는 생산물만 내연기관차에서 전기차로 바꾼다고 해서 생태사회로 전환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자동차가 생산되는 과정에서의 착취와 산업재해 및 노동자 건강권 문제, 생산 전후방으로 연관된 하청 문제, 자동차 생산량 및 수출주도 산업 전략의 문제 등도 함께 문제시되고 재조정되어야 한다. 이런 면에서 기후위기와 생태사회로의 전환은 마르크스가 제기한 소유 및 생산의 문제와 이의 재조직화를 다시 중요한 과제로 만든다.

따라서 기후운동이 제기하는 근원적인 과제는 노동운동이 원래 꿈꿨던 근원적인 변화의 과제와 동떨어져 있지 않다. 자본주의 체제의 전환과 생산의 재조직화라는 점에서 두 운동은 만나고 함께할 수 있다.


1) A. Thomas, N. Dörflinger(2020), Trade union strategies on climate change mitigation: Between opposition, hedging and support, European Journal of Industrial Relations Volume: 26 issue: 4.

2) 이 부분은 다음을 참고하여 요약 정리한 내용입니다. Edouard Morena&Dunja Krause&Dimitris Stevis(2020), Introduction: The genealogy and contemporary politics of just transitions, Just Transitions: Social Justice in the Shift Towards a Low-Carbon World, Pluto Press.

[일터5월_특집1] 가사노동, 착취에서 벗어나 노동권 쟁취의 길로!

일터5월호_특집1

가사노동, 착취에서 벗어나 노동권 쟁취의 길로!

당신이 가정에서 일상을 보내는 동안 스스로 하지 않았지만 거슬림이나 불편함이 없도록 많은 것들이 갖추어져 있다면 필요한 여러 가지 일을 다른 누군가가 해놓았다는 말이 된다. 당신이 쓴 수건을 빨아서 건조시키기, 설거지하기, 쌀 구입하기, 돌봄이 필요한 가족 구성원의 일상을 케어하는 일까지. 여기 보이지 않는 가사노동이 있다.

오랫동안 가사노동은 무급노동 영역에 있었고 노동으로 인식되지도 않았다. 그 노동 대부분은 여성들이 맡아왔고 지금도 그렇다. 가부장제 하에서 남성은 사회로 나간 반면, 여성은 가정에 머물며 가사노동을 담당하게 되었고 여성의 가사노동은 오랜 세월 가치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가사노동이라는 노동

여성들의 가사노동은 애정이나 여성의 본성으로 오래 인식되었고 노동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이에 대해 70년대 페미니스트들은 가사노동에 임금을 지급하라는 투쟁(Wages for Housework)을 시작했다. 자본주의와 가부장제 하에서의 착취를 이제 끝내겠다는 선언을 한 것이다. 70년대 영국과 이탈리아, 그리고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지에서 가사노동에 임금을 지급하라는 요구가 이어졌다. 이 투쟁은 단순히 가사노동에 임금을 지급하라는 요구가 아니라, 드러나지 않던 가사노동이 노동임을 선포하는 강력한 싸움이었다. 여성들이 가사노동을 거부할 때 남성과 사회의 일상이 어떻게 흔들릴지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70년대 가사노동 임금 투쟁을 이끌었던 실비아 페데리치는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을 투쟁할 때는 우리의 사회적 역할을 직접적으로 분명하게 거역하면서 투쟁한다고 밝혔다.

여성들의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 투쟁은 가사노동뿐 아니라 모든 무급 노동에 대한 싸움이기도 했다. 이런 싸움은 확장하면서, 또 다른 방향으로 갈라지기도 하면서 이어졌다. 2018년 스페인에서는 여성들이 전국적 파업을 선언하고, 2시간 동안 부분파업에 돌입해 530만 명이 동참했다. 그 결과 열차 300편이 운행을 취소했다. 또한 여성단체들은 가사를 내려놓으라고 선언하였고, 여성들이 아파트 발코니에 앞치마를 내걸기도 했다. 모든 차별과 착취를 끝내기 위해 노동조합과 여성단체가 함께 했고, 일하는 여성과 전업주부가 함께 행동에 참여했다. 이 행동은 가사노동을 하는 무급 여성 노동자들과 유급 여성 노동자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한쪽이 착취된다면 다른 한쪽 역시 착취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신호를 보여주었다.

이와 같은 투쟁이 있었지만, 여성의 노동이, 여성의 무급 가사노동이 제대로 인정받는 시대가 오지는 않았다. 다만, 여성들은 공고한 가부장제 하에서 여성들은 모든 차별과 착취에 대해 계속해서 싸울 뿐이다. 한편, 여성들이 사회 진출을 시작하면서 집 밖에서 유급 노동을 하게 되었으므로 가사노동을 대신 할 사람이 필요해졌고 그 결과 하나의 유급 가사노동 시장이 생겼다. 남성의 노동에는 큰 변화가 없었고 여성의 노동에 변화가 생기면서 새로운 가사노동 시장이 생겼다는 것은 씁쓸하면서도 흥미롭다. 가사노동 시장에 진입한 노동자들 역시 여성이기 때문이다. 여성들이 가사노동 임금 투쟁을 하면서 가사노동의 사회적 역할을 외쳤지만, 가사노동 시장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이런 가치는 반영되지 않았다. 반대로 낮게 평가된 무급 가사노동의 가치가 그대로 시장에도 반영되어 가사노동자들을 불안정한 고용과 저임금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가사노동 시장 형성과 노동권 배제

시장화된 가사노동을 법제도는 어떻게 정의할까? 근로기준법은 제2조에서 근로자를 직업의 종류와 관계없이 임금을 목적으로 사업이나 사업장에 근로를 제공하는 사람으로 정의하고 있다. 한편, 동법 제11조 제1항 단서에서는 가사사용인에 대해 근로기준법을 적용하지 않는다고 정해두었다. 가사노동을 비공식 노동으로 보는 관점이 법제도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역시 시행령 제2조 제4호에서 가구내 고용활동에 대해 법 적용을 제외하고 있어 가사노동자들은 법으로 보호받지 못한다. 때문에, 가사노동자들은 엄연히 노동하고 있지만, 일하다가 다치거나 질병을 얻었을 때 업무상 재해로 인정받을 수 없고 개인이 감당해야 할 몫으로 남고 만다. 이렇게 가사노동자들이 법 적용에서 배제되고, 가사노동의 여러 문제가 개별화된 영역에 남아 있을수록 이 노동자들의 고용 불안정, 인권 침해 문제가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

가사노동자의 법 적용 제외 이유는 무엇일까. 가정은 상호의존과 애정에 바탕한 공간으로 상상되기 때문에, 시장의 가치와는 상충될 수밖에 없고 기존의 노동법상 권리는 가정에서는 부적합한 것으로 인식되는 것을 하나의 이유로 들 수 있다. “가사서비스는 전형적인 여성의 일로 인식됐기 때문에 그에 대한 지위 및 대우가 정당화되었다는 점은 또 다른 근거가 된다. 누군가의 가정은 다른 이의 직장이 될 수 없으며, 하필 그 일이 여성의 일이라는 것이다.

가사노동이 본업임에도 노동자들은 업무를 하기로 한 당일 아침에도 이용자에게 나오지 말라는 통보를 받기도 하는 등 고용이 매우 불안정하다. 다른 직종에서는 보기 힘든 일이 가사노동에서는 이렇게 생기기도 한다.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발표한 2015<비공식부문 가사노동자 인권상황 보고서>에 따르면 중개업체를 통해 이용자의 집에 노동을 제공하는 가사노동자들이 겪는 심각한 고충 중 하나는 이용자들의 하녀처럼 대하는 원시적인 태도였다. 가사노동자들을 동등한 노동자로 보지 않는 것이다. 또한 타인의 집안이라는 매우 폐쇄된 공간에서 이용자에게 인권이 침해되는 경험을 할 가능성이 있고, 일터에서 성폭력이나 육체적 폭력이 발생할 경우, 이용자와 단둘이 있어 대처하기가 다른 직장에 비해 훨씬 어렵다. 가사노동이 남성들이 하는 노동과 종류가 다른 노동이지만, 동등한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점이 시장이 형성된 이후에도 동일하게 유지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하는 노동자들은 문제 발생 시 법 적용을 받는 노동자에 비해 해결, 보상을 요구하기보다 참고 넘어가는 일이 빈번할 수밖에 없다.

가사노동자법 제정 시도 및 쟁점 검토

오랫동안 비공식 노동으로 인식되었던 가사노동은 ILO의 협약 이후 제도화 논의가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ILO2011년 제100회 총회에서 가사노동자의 인간다운 노동에 대한 협약(Convention Concerning Decent Work for Domestic Workers)을 채택했다. ILO 협약의 주요 내용을 보면, 가사노동자들에게 결사의 자유 및 단체교섭권 인정, 모든 종류의 강제노동 금지, 아동노동 금지, 차별 금지 등을 명시하고(3), 모든 종류의 학대, 추행, 폭력으로부터 가사노동자를 보호하도록 하며(5), 가사노동자들에게 고용 관련 조건을 명시하고 근로계약서를 작성하고(7), 노동시간, 연장노동수당, 휴게시간, 주휴, 유급연차휴가에 대해 일반 노동자와 동등하게 대우해야 한다고(10) 명시하는 등 가사노동자와 가사노동자의 노동권을 보호하도록 했다.

ILO 협약 채택 이후 2012년부터 국내에서 가사노동자 관련 법안은 국회에서 수차례 발의되었지만, 지금까지 제정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거의 매년 법안이 발의되었는데, 2020<가사근로자의 고용개선 등에 관한 법률안>이라는 동일한 이름으로 정부안, 이수진 의원 안, 강은미 의원 안이 발의되고, 213월 임이자 의원 안이 국회에 발의되었다. 발의된 법안들을 보면 정부에서 인증받은 제공기관과 가사노동자가 근로계약을 맺고 사용관계를 명확히 하게 된다. 또한 주당 근로시간을 15시간 이상으로 정하고 노동자들이 초단시간 근로에서 벗어나게 해 주휴 수당과 연차유급휴가를 받게 한다. 발의된 네 개의 법안대로라면 제공기관와 계약한 가사노동자들은 근로기준법과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역시 적용받게 된다. ILO 협약과 국가인권위원회 권고대로 상당 부분 가고 있는 것이다. 위와 같은 법안이 마련되면 안정적 노동이 마련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가사노동자를 직접 고용하는 기관은 가사노동자 법안을 추진해온 가사노동자 협회, 여성단체에서 꾸준히 요구해온 것이기도 하다.

가사노동자들은 비공식 노동에서 벗어나 다른 노동과 업무가 다를 뿐 같은 노동을 제공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아직 이뤄지지 않고 있지만, 해외에서는 이미 가사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해 사용자 단체와 단체교섭을 진행하고 있다. 우루과이의 경우, 가사노동자들이 전국가사노동자연맹에 소속되어 이용자 단체인 가정주부연맹과 교섭한다. 이들의 단체교섭의 결과는 교섭 당사자뿐만 아니라 우루과이의 모든 가사노동자에게 전국적으로 확장되어 효력을 미친다. 미국에서는 개별 이용자들이 자발적으로 교섭 단체를 꾸려 가사노동자들과 교섭을 진행하기도 한다. 아직 해보지 않았을 뿐 이를 위한 투쟁이 있다면 한국에서도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가사노동자들의 온전한 노동권 보장의 길

10여 년간 가사노동자들의 법제화가 시도되었으나 한 번도 제정으로 이어지지 못한 가운데 어떤 법제화인가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가사노동자 고용개선을 위해 현재 논의되는 법안들은 제도 안에 포함되지 않았던 가사노동자들을 임금, 근로계약, 노동시간, 고용안정의 측면에서 보호하기 때문에 분명 진일보한 면이 있다. 여성의 가사노동이 오랫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상황을 타파하고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방향이라고 할 수 있는 법안이다. 그러나 현재의 가사노동자법 제정 움직임은 근로기준법 개정을 통해서 가사노동자 적용 제외 조항을 삭제하려는 것은 아니다. 때문에, 정부가 인증하는 제공기관과 계약을 맺지 않은 가사노동자는 여전히 법 적용을 받지 못하게 되고 사각지대에 머물게 된다는 한계가 있다. 여전히 여성이 하는 가사노동이 비공식적 노동으로 남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법안을 통해 가사노동에 대한 오랜 차별이 사라질 수 있을지 의문이 남는 부분이다.

가사노동자들에게 온전히 노동권을 보장해 노동에 대한 대가를 충분히 지급해야 하고, 쉴 권리, 건강하게 일할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 또한, 집단적으로 노동조합을 조직해 사용자 단체와 교섭을 진행하고 행동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이것이 비가시화되고 비공식 노동 영역에 있는 가사노동자들이 드러내고 목소리 내게 하는 길이다. 가사노동이 멈추면 모두의 생활이 멈추고 사회가 멈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유청희 상임활동가)

[일터5월_특집2] 가사노동자의 몸을 노동자의 몸으로 인정하라

일터 5월_특집 2

가사노동자의 몸을 노동자의 몸으로 인정하라

 

62세 재가요양보호사 이씨는 하루 동안 네 집을 방문한다. 치매환자 홀로 사는 집, 거동이 불편한 80대 노인 부부의 집, 70대 여성 노인의 집 두 군데를 차례로 돌고 퇴근을 한다. 어느 날 70대 여성 노인 집을 방문했을 때 장 봐온 것들을 옮기다가 어깨에서 뚝 하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통증으로 며칠을 앓다가 정형외과를 방문해 우측 회전근개 완전 파열을 진단받았다. 결국 그녀는 수술을 했다. 비슷한 일을 겪은 동료 재가요양보호사의 소식을 듣고 자신도 산재를 신청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수술 후 한 달 반, 보호대를 풀고 재활치료 중인 그를 진료실에서 만난 근로복지공단 의사는 그간 어떤 일을 해왔는지 묻는다.

재가요양보호사 한 지는 이제 1년 반 정도 되었고, 이전에는 10년 정도 남의 집 집안일 도와주는 일을 하다가 그만뒀어요. 그 전에는 남편 사업이 괜찮아서 집안일만 했고요. 그 때 일하면서도 이렇게 저렇게 다치고 아플 때 있었는데 우리 집에서 일 할 때도 그 정도는 힘드니까 그냥 참고 지냈어요.”

가사서비스노동자로서 지내온 시간들을 노동자 스스로가 도와주는 일로 표현하는 것은 그의 노동자성을 인정받지 못한 역사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그때나 지금이나 돌봄이 필요한 사람에게 돌봄을 제공하고 가사서비스를 제공하는 노동자로 어깨 부담작업을 수행해왔지만 산재보험에서 인정하는 어깨 부담 작업 경력은 18개월인 셈이다.

또 다른 60대 여성 정씨는 재작년, 고객의 집 화장실을 청소하다 미끄러져 손목 뼈가 골절되었다. 고객에게 치료비를 요청해보았지만 어떤 의무조항도 없었기에 400만원 가량의 치료비를 스스로 떠안았다. 손목뼈 고정 수술을 2번 받는 동안 그는 이른바 생산활동을 할 수 없었는데, 노동자 신분이 아니었기 때문에 실업급여도 없었고 은행 대출도 불가능 했다. 노동자인적은 단 한 번도 없었던 그는 다시 비공식부문 가사노동자로 돌아갔고, 일하다 손목이 또 부러지지는 않을까 두렵다.

드러나지 않는 가사노동자의 아픈 몸

2017년 고용노동부는 국내 가사노동자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의 규모를 25만명으로 집계했고 2020년 한국가사노동자협회는 30만명에서 50만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가사도우미, 산후관리사, 베이비 시터, 그리고 펫 시터까지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이들의 몸은 한 번도 노동자의 몸으로 지칭된 적이 없었으며 제대로 된 숫자조차 파악된 적이 없었다.

국내 가사노동자의 건강권에 대하여 다룬 연구 중 2015년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진행한 비공식부문 가사노동자 인권상황 실태조사는 가사도우미, 간병인, 육아도우미 507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하였다. 연구 결과 가사도우미, 간병인, 육아도우미 각 집단에서 최근 1년간 경험한 건강문제 중 가장 높은 빈도를 보인 것은 근골격계 증상’(간병노동자 77.6%)아픈데도 일함’(가사도우미 74.3%, 육아도우미 57.2%)이었다. 근골격계 증상은 가사도움, 간병인, 육아도우미 모두에서 빈도가 가장 많이 또는 2번째로 많이(육아도우미) 경험했다고 보고되었다. 앞서 만나본 이씨와 정씨 역시 가사노동자로서 경험하는 근골격계 위험을 잘 보여준다. 반복적인 근골격계 부담작업으로 인한 건강상의 불편이 있음에도 계속해서 일해야만 하는 아픈 몸들의 이야기는 이미 낯선 것이 아니다.

그런데 가사노동자가 겪는 건강의 위험은 그 뿐만이 아니다. 같은 연구에서 가사도우미의 경우 독한 세제로 인한 각종 건강문제를 다수가 경험했다고 보고하고 있으며 간병인은 정신적 스트레스 관련 높은 경험률을 보고하였다. 간병인의 경우 무시당한 경험, 과도하게 감시당한 경험을 가장 많이 했다고 응답했다. 가사도우미와 간병인은 물품 분실 관련하여 부당하게 의심 받은 경험은 11%, 업무 수행 과정에서 과도하게 감시당했다는 응답도 가사 28.2%, 간병 31.4%, 육아 17.9%로 높게 드러났다. 과도한 감시와 관련하여 CCTV가 설치돼 있음을 인식하는 경우가 16~32%에 달했는데, 가사노동자에게 사전 동의를 받은 경우는 26%에 불과했다. 고용노동부에서 발간한 직장내 괴롭힘의 판단 및 예방·대응 매뉴얼에서 ‘CCTV를 통한 지나친 감시가 명시되어있는 것을 고려하면 노동자로서 가사노동자의 일터는 그 기준 밖에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렇게 감시당하고 있음에도 성희롱, 성폭력에의 노출 역시 크다는 점 역시 아이러니하다. 간병인의 경우 성희롱을 경험했다는 답변은 전체의 30.8%에 달했다.

2015년 한국여성정책연구원에서는 가사서비스 노동자의 노동환경과 건강실태 연구를 발표하며 근로환경조사 내 가사서비스 노동자라는 범주와 돌봄노동 노동자(보육교사, 간병인, 육아도우미)’를 나누어 돌봄노동자와 다른 가사노동자들만의 특성을 확인하고자 돌봄노동자 780, 가사노동자 165명의 자료를 인용해 가사노동자들의 특성을 살펴보았다. 해당 연구에서는 중고령자가 많은 가사노동자의 특성을 고려하여 분석대상자인 전체노동자·돌봄노동자·가사노동자의 연령대를 동일하게 하였으나 본인 스스로 평가하는 건강수준은 가사노동자가 가장 낮았고, 실제 직무(가사노동 등)로 인해 발생된 질환들도 가사노동자에게서 많이 보고되었다. 신체적 질환 이외 우울과 불안장애 등의 심리정서적 건강문제도 가사노동자가 상대적으로 많았고, 이 또한 가사노동자로서 업무를 시작한 이후에 경험한 사례들로 확인되었다.

가사노동자들이 경험하는 열악한 노동조건(아플 때 일해야 했던 경험, 원할 때 휴식이 불가능했음, 건강·안전에 대한 정보를 제공받지 못함)과 노동환경(근로환경 만족도, 고용 안정성, 보상의 적절성, 일의 가치성)이 건강(주관적 건강, 직업성 근골격계 질환, 정신건강 지표)과 연관성이 있는지도 분석을 수행하였다. 그 결과 거의 모든 영역에서 이러한 부정적 노동조건, 노동환경의 세부 항목들이 건강의 세부항목과 연관성이 있었다. 이 연구에서는 실태조사를 위해 총 800명의 가사서비스노동자를 대상으로 직접 개발한 설문 역시 진행하였는데, 고객으로부터 위험한 작업을 요구 받은 경험자는 무경험자에 비해 주관적 불건강은 1.92, 근골격계질환 경험은 1.99, 안전사고 경험은 7.11배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아플 때 일한 경험자는 무경험자 보다 주관적 불건강은 3.21, 우울감은 3.52, 근골격계 질환 경험은 2.63, 그리고 안전사고 경험은 3.49배 더 많았다. 특히, 물건 파손/도난 오해 경험자와 부당한 대우 경험자는 각각 무경험자 보다 우울감 경험 확률이 2배 이상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연구 밖에서, 표집되지 않은 근로자 모수에서 얼마나 많은 가사노동자들이 일하다 다쳐 일을 못하게 되었는지, 혹은 아픈 몸을 견디며 일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안에 가사노동자들은 포함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일하고 있는 가사노동자의 수는 물론이거니와 일하다 다친 가사노동자의 수는 아무도 모른다.

가사노동자의 몸을 노동자의 몸으로 인정하라

가사노동이 사회의 근간을 유지하는 필수 노동임에도 가사노동자는 노동자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으며 코로나 시대를 겪으며 취약한 일자리로 다시 한 번 자리매김 하고 있다. 20206월 한국여성정책연구원과 여성가족부는 가사노동자 290명을 상대로 코로나 19가 가사노동자들의 일자리에 미친 영향에 대해 조사했다. 응답자 10명 중 7명 이상은 코로나19 전후 방문가정 수가 줄어들었다고 응답했다. 연구에 참여한 가사노동자의 월 평균 수입은 112만원으로 코로나 19 이후 월 평균 수입은 63.9만원이었으며 코로나19 이전보다 48.4만원이 감소하였다. 코로나19로 인한 어려움에 대해 가사노동자 10명 중 8명은 수입 감소를 꼽았고 7명은 일방적 방문취소로 인한 어려움을 꼽았다. ‘코로나 감염위험5.6명이었다. 코로나 시대에 가사노동자들이 감염보다 더 절실하게 느낀 위협은 수입 감소와 일방적 방문취소였던 것이다.

타인의 가정 내에서 업무를 수행해야 하는 것은 이전과는 또 다른 어려움을 야기한다. 2015년에도 가사노동자들은 휴게시간 없이 개별 고객 집에서 일만 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있었다. 4시간 시간제로 일할 경우 10분에서 20분가량만이라도 쉬고 싶다는 것이 그들의 요구였으나 고객의 요구에 맞춰 일을 다 끝내려면 쉬지 않고 일할 수밖에 없었다. 어린이집과 학교가 돌봄노동을 가정으로 이행시키며 업무 요구도는 더 가중되었지만 그 자리마저 놓칠세라 두려운 시대가 된 것이다.

노동관계법이 가사노동자의 보호에 적용되지 않기 때문에 근로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아도, 일을 하다 다쳐도 고용주는 이를 부담할 법적 책임이 없다. 가사노동자를 노동관계법의 보호가 미치는 곳으로 포섭하려는 노력은 18대 국회로부터 현재까지 결실을 맺지 못하고 있다. 실질적인 근로계약과 그에 따른 노동자 보호의 책임을 누구에게 물을 것인가를 정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가사노동자의 사용인을 명확히 하는 일 역시 중요하다. 원칙적으로는 그 노동자의 서비스를 받는 가정이 사용자처럼 보이나 실상은 가사노동을 둘러싼 다양한 이해당사자들(직업소개소, 알선업체, 간병업무를 지시하는 병원 등)이 있기 때문인데, 결국 가사노동자의 사용인, 가사노동자의 노동권과 건강권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는 실질적인 업무의 지휘, 감독을 누가 하고 있는가를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다변화하는 노동시장 형태와 고용관계 때문에 보편적인 노동관계법에서 보호받지 못 하는 노동자들의 얼굴은 이미 낯설지 않다. 중요한 것은 평가 절하된 가사노동자의 노동을 다시 수면위로 올려 필수영역에서 일하는 여성의 몸을 일하는 몸으로 다루지 않는다면 여성노동의 문제는 답보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여성 노동자이자 비전형, 비공식영역의 노동자로서 가사노동자는 가장 취약한 일하는 몸인 셈이다.

1953년 근로기준법 제 111항의 가사사용인에 대하여는 적용하지 아니한다는 문구에 근거해 가사노동자들은 노동자성을 인정받지 못한 채 60여년을 보내왔다. 2011ILO 가사노동자 협약 채택을 계기로 정부에 가사노동자들의 노동자성 인정을 강력히 요구하기 시작했으나 그 후로 다시 10년이 흐른 현재까지도 가사노동자의 몸은 노동자의 몸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코로나19로 노동자의 아프면 쉴 권리가 화두에 오른 가운데 일하는 몸으로서 인정받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제는 부디, 가사노동자의 노동권을, 건강하게 일할 권리를 보장하라.

(정지윤 회원, 직업환경의학과 전문의)

[일터5월_특집3] 가사노동자법안은 노동권을 보장하는 법이 될 수 있나?

일터5월호_특집3

가사노동자법안은 노동권을 보장하는 법이 될 수 있나?

 

가사근로자의 고용개선 등에 관한 법률안’(이하 가사노동자법’)이 국회 통과를 눈앞에 두고 있다. 그간 정부 발의안 및 이수진 의원 대표발의안, 강은미 의원 대표발의안이 논의되어 왔다. 근로기준법 제정 당시부터 그 적용을 제외되어 수십 년간 노동자로서의 기본권이 보장되지 못했던 노동자들에게 드디어 노동관계법령이 적용될 것인지에 대해 주목하는 시선이 많다. 가사노동자들의 일을 중개하는 기관들에서 특히 법안 통과의 요구가 높다.

그러나 우려의 목소리도 동시에 존재한다. 첫번째 이유는 노동관계법의 적용을 확대하여 포괄적인 노동권을 보장하는 방식이 아닌 별도 법안의 형태로 발의되었다는 점, 두번째는 해당 법안의 내용이 노동력의 중개를 중심으로 가사노동의 공식화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두번째 이유는 최근 정부에서 추진하고 있는 플랫폼 종사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제정안직업안정법 개정안과 함께 노동력 중개 시장을 확산하기 위한 정책의 추진과 연관되어 더 우려를 낳는 지점이기도 하다. 이 글에서는 특히 후자를 중심으로 법안의 문제점을 검토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그러한 방식이 각 법안이 내세우고 있는 목적인 노동자 보호에 과연 실효성이 있는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인증절차 도입의 효과는 불분명

현재 발의된 법안에서 제시되는 제정의 취지 및 목적 사항은 가사서비스의 질 개선의 필요와 고용·노동환경·처우 등의 개선을 통한 노동권 보호로 축약해 볼 수 있다. 가사노동자 고용이 노동관계법 적용이 배제되는 비공식 영역에 존재하기에 이를 공식화하여 서비스 공급체계 및 질을 개선하고 노동권 보장을 획득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가사노동을 비공식에서 공식 영역으로 끌어내기 위한 방안은 노동관계를 공식화하는 것이 아니라 가사노동의 중개를 공식화하는 방안을 취하고 있다. 이 공식화는 제공기관의 인증, 그리고 제공기관을 사용자로 하여 근로계약(노동자성)을 공인하는 것을 그 요소로 한다. 즉 이용자에 대해서는 기관 인증을 통해 서비스를 보증하고, 노동자에 대해서는 최소한의 노동조건 보장이라는 양면을 충족해 수요와 공급의 각 측면을 확대함을 통해 가사 노동 시장을 확장하려는 방안이다.

그런데 정작 정부가 의도하는 인증 절차를 통한 시장 정비와 확장이라는 효과는 불분명한 측면이 있다. 세 법안은 모두 가사노동자의 대다수가 중개업체 등을 통해 구직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으나 가사노동자의 구직 경로는 다양하다. 중개업체를 통한 구직이 오히려 비율이 낮은 것으로 나타나는 연구도 있는데, 이남신 외(2010)에서는 사회단체 및 여성인력개발센터, 가정관리사 협회 등을 통한 구직이 36%로 나타났고, 박지순 외(2015)에서는 중개업체의 이용이 불과 3.1%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또한 이에 플랫폼을 통한 공급 혹은 매칭을 고려하면 가사노동자의 취업 경로는 더욱 다양화될 것으로 예측되는데, 조현경 외(2019)에서는 수도권의 경우 30% 가량의 서비스 거래가 플랫폼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즉 법안의 의도와 같이 인증된 제공기관을 통한 공급체계의 안착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수요와 공급이 모두 인증 기관으로 수렴될 수 있어야 할텐데, 이의 효과성은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공식과 비공식, 노동시장의 양분화 우려

오히려 공식 노동 시장의 확대나 정비가 아니라 시장의 양분이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 시장의 양분은 인증된 기관이 체결하는 근로계약에 의해 노동자성을 공인하는 구조에서 기인한다. 인증 제공기관을 통해 일하는 노동자들과 그렇지 않은 근로기준법상의 가사근로자를 구분하고, 근로기준법상의 가사근로자에 대한 적용 배제를 그대로 둠으로써 두 노동자 군 사이의 법 적용에서의 차별을 만든다. 인증 제공기관과 근로계약을 맺는 방식으로 노동자성을 부여하면서 일부 노동관계법상의 보호를 적용하는 구조에서 인증이라는 요건이 법 적용 여부를 나누는 기준이 되어 버리는 불합리한 결과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러한 구분은 여전히 비공식 영역에 노동자들을 남기고, 남겨진 노동자들의 노동권을 방치해 버린다.

게다가 노동의 특성상 제공기관을 통한 노동에 근로계약이라는 공식성을 부여한다고 하더라도 이를 회피할 수 있는 경로가 다양하게 존재한다. 가사노동 중개는 일회성을 띤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일시 파견, 호출노동화의 우려는 여전히 크다. 법안은 근로계약을 체결하도록 하고 있지만, 계약기간에 대한 제한은 없으므로 일용직 고용이 배제되지도 않기에 인증을 받은 중개업체가 모든 노동자와 기간의 정함이 없는 계약을 할 것이라는 것도 보장되지 않는다. 일용직 고용은 법안의 취지와 분명 상충되지만 현재 발의된 법안에서 배제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이는 분명 법안 제정 이후에 발생할 수 있는 양상의 하나로 가정될 필요가 있다. 유사한 예로 (재가)요양보호사에 대해 장기요양제도에서는 기관 직접고용을 규정하고 있으나, 해당 노동은 끊임없이 특수고용, 파견 등의 형태로 이탈한다. 해당 시장이 다른 불안정 고용이 충분히 가능한 형태로 열려있고, 노동관계법령의 적용 범위가 매우 협소한 탓이다.

노무중개 플랫폼의 확대에 따른 한계

플랫폼 확대를 고려하면, 해당 법안의 한계는 더욱 분명해진다. 인증기관을 통한 가사서비스 제공 역시 인력공급의 구조 측면에서 바라보고 해당 법안의 제정이 미치게 될 효과를 가늠할 필요가 있는데, 현재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플랫폼 종사자 관련 법안은 플랫폼 기업에 사용자로서의 의무를 지우지 않는 것으로 자유로운 활동을 도모하고 그로써 노무중개이라는 새로운 노동력 거래를 만들어내는 것을 시도한다. 직업안정법상 파견을 제외하고는 노동관계에 제3자가 개입하는 것이 금지되지만, 플랫폼을 통한 노무중개는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도 아니고 그 일자리에 노동자를 안착시키지도 않는다. 파견과 유사하게 노동력을 보유한 노동자를 공급하는 것임에도, ‘노무중개로 개념화하여 또 다른 노동력 거래 시장을 열고 그 노동에 대해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구조를 만든다. 그 과정에서 플랫폼기업에 대한 신고와 같은 관리 구조의 마련은 노동관계 자체를 은폐하고 노동자의 권리를 박탈한다.

가사노동자법이 의도하는 노동시장의 공식화 과정은 이러한 흐름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중개기관의 공식화라는 과정을 공유하면서 법의 범위 밖에 놓이는 더 많은 노동자를 권리의 보유 주체 목록에서 지워버린다. 그리고 가사노동자를 보호한다는 명분은 이러한 사실을 은폐하는 것조차 덮어 버린다. 인증 여부에 따라 노동관계는 공식과 비공식의 영역으로 양분되고, 비공식의 영역, 사적 영역으로 남겨지는 일자리에서는 여전히 알선, 중개, 파견 등의 불안정한 고용이 노동관계를 은폐한 채 확산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노동관계법 적용이라는 원칙을 세워야

제대로 된 가사노동자 권리 보장을 위해서는 가사 노동 시장을 공식화하는 방안이 아니라 가사노동자에 대한 노동관계법의 적용을 통해 노동관계 자체를 공식화하고, 그에 따른 사용자, 노동자의 권리 · 의무를 규정해야 한다. 가장 먼저 근로기준법의 가사노동자 적용 배제에 대한 제11조 제1항 단서 조항 가사사용인에 대하여는 적용하지 아니한다를 삭제하는 개정이 이루어져야 하며, 가사노동자의 노동 특성에 따른 근로기준법의 유연한 적용은 그다음에 뒤따르면 될 문제이다. 별도 법안을 제정하는 방식에 대한 우려에 대해 글 앞머리에 언급한 바 있다. 별도 법안의 제정 방식에 반대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필자가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노동권의 확장이 아닌 갈라치기 방식이라는 점이다. 노동자와 아닌 자, 노동자와 아닌 자 사이에 노동자와 유사한 자 등을 계속해 구분짓는 방식으로 인해 노동권은 일부의 권리인 양 여겨지게 되고 보편적인 권리로 나아가는 길은 계속해 가로막힌다. 노동자들은 노동관계법의 확장을 통해 권리의 보편화로 나아가려 하지만 노동권의 반대 편에 사용자의 의무를 두고 그 의무의 경중을 고심하는 정부는 늘 보편이 아닌 예외를 만들고 그 예외를 허용하기 위한 절차를 짜맞춘다.

정부의 본의는 노동자성의 부여 혹은 노동권의 보장이 아니라 새롭게 시장화되는 영역에 대한 제도적 규율의 필요와 함께 더 자유롭게 유연한 노동을 사용할 수 있는 길도 열어두는 것에 있다. 노동권의 보장을 이야기하고자 한다면 노동법의 영역에서 권리 보장을 위한 논의를 형성해야 한다. 하지만 노동관계를 노동관계법령으로 규율하는 시도는 약하고 정부 주도의 시장 규율을 위한 제도 추진의 힘은 강한 것이 현실이다. 새롭게 등장하는 노동, 혹은 공식화를 통한 시장 형성을 필요로 하는 직종에 대한 노동권 보호 전반을 어렵게 만드는 흐름이 계속해 이어질 것을 우려할 수밖에 없다. 그럴수록 정부의 의도에 편승하면서 노동권 보장 조항을 끼워 넣는 것이 아니라, 노동법의 원리에 따라 노동권 보호를 위한 전략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보다 보편적 노동권의 보장을 위해 한번 더 고심해야 할 때다.

(엄진령,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