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총 혁신의 사례로서 노동시간 단축투쟁
<2015년 민주노조운동혁신전략 1차 보고서> 중
한노보연 민주노조운동전략위원회 자문단팀
민주노총은 2015년 설립 20주년을 맞아 지난 과거 활동을 평가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민주노조운동혁신전략’을 수립하고자 했다. 그러나 급변하는 정세로 인해 전 조직적으로 힘 있게 전략을 마련하지 못했다. 그 결과 민주노조운동전략위원회(이하 전략위)에서 집행한 설문조사, 산하조직 현황, 전략위의 자문단 보고서를 총괄하여 2015년 민주노조운동혁신전략 1차 보고서를 발간했다. 한편, 연구소는 전략위 자문단에 유일하게 팀으로 결합하면서 민주노총의 혁신을 위해 ‘노동자의 몸과 삶을 근거로 하는 노동시간 단축투쟁’의 필요성을 제출하였다. 그 의미를 <연구소 리포트>를 통해 일터 독자들과도 함께 나누고자 한다.
민주노총의 노동시간 단축투쟁
민주노총은 1995년 창립부터 2003년까지 지속해서 ‘주 40시간제’ 도입 투쟁을 전개했다. 이 투쟁은 민주노총이 노동시간과 관련해서 총연맹의 지위를 가지고 전개한 유일한 투쟁이라고도 평가할 수 있다.
1997년 IMF 외환위기를 겪은 이후 민주노총은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를 요구했다. 1998년엔 법정 노동시간 단축 문제가 노사정이 해결해야 하는 문제로 주목받기도 했다. 이때 당시 정리해고를 필두로 한 노동악법을 수용하면서 노동자 민중로부터 질타를 면하기 어려웠던 민주노총은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를 부여잡을 수밖에 없었다.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최우선 과제로 삼았던 자본과 정권의 이해관계에서 노동시간 단축 문제는 풀어야 할 숙제였기에 노사정 위원회 산하에 근로시간위원회를 구성하였으나 노자 간 극명한 의견 차이로 지지부진하였다.
그러나 2000년 5월 민주노총은 ‘주40시간 노동’을 ‘주5일제’ 프레임으로 전환하여 사회적 논의를 선도했다. 언론들 또한 많은 관심을 보이며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확대 담론을 주5일제를 통한 삶의 질 문제로 바꿔놓았다.
그 결과 2002년 3월 행정기관의 주5일제 시범시행을 시작으로 4월에는 금융노조 (은행)에서 주5일제를 합의하면서 노동시간 단축 여론 및 요구가 확대 되었다. 민주노총은 5월 파업의 주요 요구로 주5일 제 시행을 내결었고 금융, 공기업 등으로 주5일제가 확대되었다. 제조업의 주요 사업장은 단협을 통해 주5일 혹은 주40시간을 도입했다. 2011년 5인 이상 사업장의 주 40시간 적용을 끝으로 주40시간 노동 은 안착하였다.
문제는 그런데도 현재 여전히 한국의 연평균 노동시간은 2,000시간 이내로 좀처럼 들어서지 못하고 있다. 민주노총은 2011년 이후 산별노조의 형식적 완성과 독자화, 단시간 노동자 확대 정책, 고용불안과 비정규직 문제 등으로 인해 노동시간에 대해 사회적 의제를 제기하고 투쟁을 전개하지 못했다.
일각에선 이전에도 민주노총이 노동시간 단축을 투쟁으로 돌파했다기보다 정리해고 등 노동 유연화를 내주고 얻었다거나, 자본의 필요 때문에 노동시간이 단축되었다는 비판과 평가가 있기도 하다. 그러나 민주노총이 1995년 출범부터 끊임없이 노동시간 단축을 사회적으로 제기하고 현장에선 투쟁을 통한 단체협약으로 확대하려고 했던 점 역시 주목해야한다. 그래서 현재에도 노동시간 단축 의제는 민주노조운동진영의 숙명적인 과제임은 분명하다.
건강권을 중심으로 본 주간연속 2교대제 평가
1998년 IMF 경제위기 이후 정리해고를 경험한 한국의 노동자들은 고용불안위기로 인해 저임금과 높은 노동강도를 감내하며 일했다. 그러다 2003년 골병으로 신음하던 노동자들은 더해진 노동강도 때문에, 장시간 노동으로 인해 골병으로 아프다는 점을 깨닫고 근골격계 집단요양투쟁을 통해 노동자가 건강하게 일할 권리가 있다고 목소리 높였다. 근골격계 집단요양투쟁은 노동자 건강권 투쟁이 노동 운동의 중심과제로써 위치 지워졌고, 노동자들의 건강문제와 노동 강도를 연결하여 노동과 자본의 생산지점의 문제로 인식하게 했다.
2005년엔 H자동차에서 주간연속 2교대제 실시에합의하고, 2013년 본격적으로 시행하면서 장시간 심야노동의 벽이 허물어졌다. 심야노동은 노동자들의 몸에 호르몬 교란을 일으키고 그로 인해 심혈관계질환, 수면장애, 우울증 등 노동자의 건강을 위협했다.
2015년 7월 현재 30여 곳의 자동차 부품사에서 주간연속 2교대제를 실시하고 있는데 문제는 심야노동 철폐, 주간연속 2교대제 전환이 노동자 건강권을 확보하기 위해 세웠던 3무원칙(노동강도 강화 없는, 임금삭감 없는, 고용불안 없는)의 가치를 지켜내면서 진행하지 못했다. 오히려 노동시간 단축분의 임금을 보전하기 위한 연장, 특근 근무 비중을 높이고 자본의 생산량을 맞추기 위해 노동 강도를 높이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완성차에서부터 기형적인 주간연속 2교대제를 막아내지 못하면서 부품사로 내려가면 갈수록 노동자들은 높은 노동강도를 견디며 일하게 되었고, 이제 부품사 노동자들에게는 자본에 더 양보할 노동강도가 남아있지 않다.
현장 투쟁의 바람직한 사례 D사업장을 중심으로
자본의 끊임없는 구조조정, 직장폐쇄 위협에도 불구하고 근골격계 집단요양 투쟁을 비롯해 노동자 건강권 쟁취 투쟁으로 노동조합의 현장 통제력을 강화해왔던 경기도 안성에 소재한 자동차 부품사 D사업장은 주간연속 2교대제로 가는 과정에서 3무원칙의 가치를 올곧게 실현했다. D사업장 또한 처음 교대제 변경을 논의했을 당시엔 지긋지긋한 야간노동을 끝내고 싶은 조합원들의 요구는 있지만, 노동시간 단축에 따른 임금 삭감을 받아들이는 것을 감내하는 것까지는 쉽지 않았다. 그러나 노동조합은 과거 근골격계 집단요양 투쟁부터 이어져왔던 조합원이 주체가 되는 투쟁의 기풍과 원칙을 구현하기 위해 조합원들과 끊임없이 소통하고 토론하면서 주간연속 2교대제가 노동조합 집행부의 사업이 아니라 전체 조합원의 필요와 요구를 담는 현장 투쟁 의제가 되었다.
2010년 주간연속 2교대제 도입 이후 D사업장 조합원들은 근골, 직무스트레스, 수면 등 건강상태 전반이 좋아졌으며, 이전 심야교대 노동시절엔 엄두도 못했던 운동 동호회 활동을 물론 가사 노동에도 참여하고 가족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이러한 사례는 2014년 충남의 자동차 부품사 K사업장으로 확산되었다.
K사업장은 D사업장 사례를 벤치마킹하여 3무원칙을 실현하면서 주간연속 2교대제로 전환했다. 두 사업장의 변화에서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 바로 노동자 건강권, 노동시간 단축을 의제로 조합원을 주체로 세우는 현장 투쟁을 통해 현장의 권력이 만들어졌고, 이러한 힘이 2014년 D자본의 직장폐쇄, 2015년 K자본의 노조파괴를 막아내면서 노동자들이 인간다운 삶을 되찾아가는 과정에 있다는 점이다.
주간연속2교대제 이후 오후 4시에 퇴근하는 D사업장 노동자들 (출처 : 미디어충청)
노동시간 투쟁의 중요성과 가능성
오늘날 모두가 민주노조 운동 위기를 말한다. 그런데 각자가 생각하는 위기의 핵심은 다르므로 이에 따라 노동운동의 혁신 방향이 달라진다. 우리는 참여의 감소를 노동운동 위기의 핵심으로 인지했다. 활동가와 조합원 양자 모두의 활발한 참여를 자랑했던 한국의 노동운동은 언젠가부터 주체들의 참여가 없는 노동운동으로 변화했다. 물론, 세계 경제 불황과 한국 민주주의의 후퇴 등 외부 요인과 어찌되었건 민주노총 조합원 수가 점차 증가하고 있는 상황에서 참여의 감소가 민주노조 운동의 위기라는 진단에 대해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조합원의 수 증가가 곧 노동운동의 참여 증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IMF 구조조정과 노동운동의 노선 변화 등으로 인해 어느 순간부터 조합원들은 노동운동의 주체가 아니라 구경꾼이 되어버렸다. 조합원과 활동가의 경계는 더욱 세워지고 활동가는 서비스를 제공하는자, 조합원은 서비스를 선택하는 소비자가 되고 있다.
또한, 노동자들의 의식과 행동 변화를 위한 노동조합 차원의 노력이 없었던 것은 결코 아니나, 그러한 노력이 교육과 선전에 대한 강조로 국한되었다. 조합원들의 직접 행동과 일상적 실천을 동기 부여하며 그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보다 지도부의 정책에 대한 동의와 승인을 구하는 것에 그친 한계를 봐야 한다. 그래서 민주노총 혁신의 핵심은, 더 많은 노동 운동의 주체를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보다 더 많은 조합원이 노동조합의 실천에 주체적으로 결합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조직할 활동가가 양성되어야 하고 지속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결론
우리는 현장 투쟁과 노동시간 투쟁의 결합, 즉 노동자들이 직접적인 참여와 실천을 통해 노동운동 위기 극복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그렇다고 해서 현장투쟁과 노동시간 투쟁이 노동운동이 직면한 문제의 만병통치약이거나 조합원들이 노동시간을 의제로 노동조합 활동에 참여하기만 하면 위기가 극복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한국에서처럼 노동과 자본의 권력 격차가 극심하고 신자유주의 논리가 공고하게 구축되어 있고 영향력을 얻는 지금 ‘임금’ ‘고용’을 우회하여 상대적으로 가능성이 열려 있는 의제인 노동시간에 주목 하자는 것이다. 노동시간 투쟁이 그 자체로 더 중요하다거나 더 근본적이고 급진적이라 주장할 수는 없지만, 지금의 국면을 돌파하는 데 유리하다고 판단한다.
무엇보다 민주노총이 조직/미조직 노동자 모두를 포괄하고 각 산별 사안을 관통하는 의제를 만들어 냄으로써 ‘총 노동’이 존재하는 ‘전선’을 만들어냄으로써 노동자들의 투쟁이 세상을 바꾸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노동자가 행동하면 세상이 진보한다는 것을 다시 보여주는 것 이것이 민주노총 혁신의 목표일 것이다. 그리하여 노동시간 투쟁이 민주노총 혁신에 도움이 되기를, 나아가 한국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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