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리포트] 비밀의 시대를 끝내기 위하여/ 2015.5

[연구리포트]

비밀의 시대를 끝내기 위하여

- 현대자동차 발암물질 사용 이력 조사사업


김신범(노동환경건강연구소 화학물질센터 실장)


1960년대 국가주도 경제개발이 본격화되면서 산업의 규모가 급격히 성장하였다. 국내 대표산업 중 하나인 자동차산업은 1960년대 말에 시작하였고, 1970년대부터 본격적 생산에 돌입한다. 아마 포니의 생산에 관여했던 사람들은 이제 대부분 정년이 지나 현장을 떠났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 중 일부는 자동차를 생산하면서 노출된 발암물질들 때문에 불청객을 만났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노동자들은 일했고, 그들 중 일부는 암에 걸렸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노동자가 무슨 물질 때문에 암에 걸렸는지 우리는 모른다. 그리고 이 ‘모른다’는 유산은 아직 현장을 떠나지 않은 노동자들에게 물리는 중이다. 그래서 정년을 앞둔 50대 자동차산업 노동자들은 누군가에겐 직업성 암이 올 것이라는 막연한 두려움을 공유하고 있다. 이들은 정부와 회사가 이 두려움을 없애줄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않는다. 그러면 좋겠지만, 그걸 기대할 만큼 순진하진 않다. 그래서 나는 2014년 초 현대차 지부로부터 발암물질에 관한 사업 제안을 요청받았을 때, 곧바로 이 사업을 제안하였다. 과거의 노출을 노동자 스스로 정리하여 자신의 발암물질 노출 이력을 구축하는 사업을 말이다. 제안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대의원대회에서 사업이 승인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사실, 이땐 좀 두려웠다. 좋은 사업이지만, 가능한 사업이라는 확신은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연구진을 괜찮게 구성할 수 있다는 자신은 있었다. 대구가톨릭대학교의 최상준 교수, 계명대학교의 김승원 교수, 씨젠의료재단 강충원 선생, 우리 연구소의 최영은 연구원과 함께라면 못할 게 없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이들 덕분에 과거로 향하는 문을 열 수 있었다. 다시 한 번 이 자리를 빌려 소중한 나의 친구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현대차를 넘어 자동차 산업으로

일단 우리의 상황을 좀 더 냉철하게 짚어보자. 심상정 의원으로부터 받은 2010년 이후 근로복지공단의 직업성 암 판정자료를 분석해보았다. 총 800건이 넘는 신청자 중에서 154건을 자동차산업으로 분류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들 중 약 20%인 30명 정도가 직업성 암 산재승인을 받았다. 인정된 암은 폐와 혈액의 암이 대부분이었다. 잘 알려진 암들을 중심으로 산재승인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중요한 문제이다. 다양한 암 환자들이 자신의 암을 직업성이라고 의심하지 못하고 있거나, 의심하더라도 입증할 수 있는 자료가 없어서 벌어진 일은 아닌지 의심해볼 만 하다.

암종

판정구분

승인

일부승인

불승인

폐암/중피종

환자수(명)

13

1

23

37

비율

35.1%

2.7%

62.2%

100.0%

혈액암

환자수(명)

11

0

19

30

비율

36.7%

0.0%

63.3%

100.0%

기타암

환자수(명)

4

1

82

87

비율

4.6%

1.1%

94.3%

100.0%

환자수(명)

28

2

124

154

비율

18.2%

1.3%

80.5%

100.0%


           <자동차산업 종사자의 직업성 암 판정 현황 (2010~2014)>


그런데 금속노조에서 직업성 암 환자 찾기 운동을 전개하는 동안 근로복지공단에 접수된 신청자 중 자동차산업의 비중이 높아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래 그림을 보자. 2011년 직업성 암 신청자 중에서 자동차산업의 비중이 높아졌고 이것은 2012년까지 이어진다. 이 시기는 금속노조의 직업성 암 집단산재신청과 겹쳐진다.


연도별 직업성 암 신청자 중 자동차산업 관련자 추이

그리고 이들은 대부분 자동차 완성사에 적을 둔 사람들이었다. 완성차의 노동자들이나 직업성 암에 대해 관심이 있는 상황이고, 부품사 노동자들이나 정비노동자들은 아직 직업성 암에 대한 인식도 부족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야 하는 상황이다. 왜 아니겠는가?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조차 이제야 스스로 발암물질의 사용 이력을 정리할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부품사의 노동자들은 오죽하겠는가?


자동차산업 직업성 암 산재신청자의 세부 구분


그러니 처음부터 현대자동차 노동자들만을 위한 이력 조사를 해서는 안 되었다. 현대자동차를 시작으로 다양한 정보들이 계속 모여지면서 살을 붙여갈 수 있는 자동차산업 발암물질 이력 정보의 뼈대를 구축한다는 마음으로 조사를 임해야 했다. 그래서 현대차지부 고인섭 실장과는 처음부터 조사결과가 나오면 토론회를 통해 공론화하자는 데 뜻을 모았다.


선배 조합원이 내민 자료

자, 이제 조사를 시작하였다. 회사의 도움 없이 우리가 얼마나 자료를 확보할 수 있을까? 오로지 노동자들의 기억에만 의존하여 과거의 발암물질을 찾아내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모를 일이었다. 역사는 기록하지 않는 자에게 인정을 베풀지 않을 줄 알기에, 차라리 이제라도 기록을 시작한다는 자세로 일을 해보자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해외의 자동차 산업 직업성 암 연구를 리뷰하였으나,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자욱하게 안개 낀 새벽에 길을 잃은 느낌으로 현장을 찾아갔다. 선배 조합원들이 현장연구위원으로 참여하면서 우리의 손을 잡고 현장을 안내하였다. 그러다가 의외의 기록들을 만나게 되었다. 엔진공장에서는 부서에 보관되어 있던 서류철에서 염소계 솔벤트의 사용흔적을 찾아냈다. 제품 대체를 위한 협조전이 있었다. 이를 근거로 염소계 솔벤트가 어떤 식으로 사용되었는지 추적의 실마리를 확보했다. 도장공장에서는 노동조합의 1988년 제1차년도 사업보고 책자에서 유해수당에 대한 기록을 찾아내었고, 뒤이어 1990년 노동과건강연구회의 현대차 현장 조사에 대한 신문기사를 찾아냈다. 노동과건강연구회의 자료는 서울 노동건강연대에 보관되어 있을 가능성이 컸다. 노동건강연대에 전화하였더니 조사 책자를 찾아내 인편으로 보내왔다. 드디어 안개가 걷히고 25년 전의 현대자동차 작업환경을 만날 수 있었다. 선배 조합원들로 현장연구위원을 임명한 것이 이런 성과를 가져온 것이다.

조사결과를 하나로 통합하기 위하여 중요 공정과 작업을 우선 구분하였다. 소재/주물, 프레스/차체용접, 금속가공, 세척, 도장, 방청 등. 그리고 작업별로 사용한 물질을 정리하였고, 노출 가능한 발암물질들을 찾아 넣었다. 현대차의 물질안전보건자료와 작업환경측정자료, 그리고 우리가 확보한 1988년부터 1990년까지의 자료들이 통합되었다. 그 결과, 폐암이나 혈액암 외에도 후두암과 방광암, 신장암, 그리고 식도암과 위암과 같은 소화기계 암까지 발생 가능한 것으로 정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결과는 언제든 새로운 정보가 입수되면 수정될 수 있도록 열린 체계로 구성되었다. 현대차뿐 아니라 자동차산업 전체로 확장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거 이력을 집중적으로 파악해야 할 7대 발암물질로서 ① 석면과 인조섬유, ② 염소계 솔벤트(트리클로로에틸렌, 퍼클로로에틸렌, 디클로로메탄 등), ③ 금속가공유(절삭유), ④ 발암성 중금속(니켈, 크롬), ⑤ 벤젠(신너와 노말헥산 등 벤젠이 오염된 제품을 포함), ⑥ 포름알데히드, ⑦ 유리규산(실리카 분진)을 선정하였다. 발암물질이 7종류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 물질들은 특히 많은 노동자에게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판단되므로 과거 자료 확보에 더 신경을 써달라는 것이 우리의 주문이었다.

우리는 이 조사를 통하여 자동차산업의 직업성 암 피해자들에게 입증의 책임을 부여하지 말고, 정부와 자동차산업 그리고 노동조합이 나서서 자동차산업 주요 직무별 발암물질 노출 이력에 대한 자료를 정리하라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그러므로 조사결과를 외부로 알려내는 것 자체가 중요한 문제로 부상하였다. 우리의 메시지를 정부와 자동차기업들, 안전보건전문가들, 그리고 노동자들에게 전달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구를 종료한 후 국회 환경노동위원장인 김영주 국회의원을 통하여 토론회를 개최하였고, 산업보건학회의 초청을 받아 학회에서 연제발표를 하였다. 아마도 현대자동차에서는 기분이 좀 나빴던 듯하다. 학회에서 발표할 때에 ‘현대자동차’에서 조사한 것임을 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러는 OO 사업장이라고 숨기면서 발표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번 조사는 노동조합의 연구기금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노동조합에서 굳이 숨길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였으므로 현대자동차란 이름을 그대로 노출했다. 학회에 참석한 전문가들은 연구의 내용과 결과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기 보다는 연구의 배경에 들어있는 고민에 대해 진지하게 받아들여 주는 태도를 보였다. 연구를 추진한 사람으로서 이 점은 여러 전문가에게 진심으로 감사한 부분이다. 국회에서 김영주 의원과 함께 토론회를 했을 때도 많은 사람이 참석하였다. 하지만 정작 우리의 연구에 귀를 기울여야 할 정부와 기업은 아직 반응하지 않고 있다. 아니, 애써서 반응하지 않으려 하는 것 같다.


자동차 산업 직업성 암 대책 마련 토론회(사진 출처 : 일과 건강)


비밀의 시대를 끝내자

현대자동차 조사를 하면서 다시 한 번 깨달은 것은, 회사에는 많은 자료가 숨어있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1988년 노동조합 사업보고에 인용된 유해수당 관련 자료는 당시 현대자동차에서 외부 전문가들에게 의뢰하여 수행한 조사연구 보고서였다. 이 자료는 노동조합이 가지고 있지 않았다. 노동조합의 고참 활동가들조차 그때 그런 연구가 있긴 했다는 정도의 기억만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회사는 이 보고서를 가지고 있지 않을 리 없었다. 이 보고서는 현재의 현대자동차 안전보건시스템이 구축되게 된 배경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궁금했다. 이런 자료들이 현대자동차에서 산재 신청한 암 환자들에 대한 역학조사에서 활용될까? 예측건대, 아마도 한 명도 이 자료를 이용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 이유는 노동자들이 그런 자료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고, 그 자료를 달라고 요구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우리는 비밀의 시대에 살고 있다. 삼성처럼 애써서 비밀을 만드는 사업장도 있지만, 대다수의 사업장에서 비밀도 아닌 것들이 점점 비밀이 되어왔다. 노동자들이 기록하지 않고 망각했기 때문이며, 연구에 참여한 전문가들이 그런 연구가 있었다고 말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비밀의 시대를 끝내기 위한 노동조합의 역할은 무엇이 있을까? 노동자 건강권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진지한 성찰과 협업이 요구되고 있다. 

저작자 표시
신고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