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 환경의학 의사가 만난 노동자 건강 이야기] 한 명의 직환의가 배출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산재 피해자가 있을까? / 2020.12

[직업 환경의학 의사가 만난 노동자 건강 이야기] 

 

한 명의 직환의가 배출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산재 피해자가 있을까?

 

정지윤 / 상임활동가 

 

▲  의사에게 노동자는 치료를 받는 환자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여러 재해 사례를 제공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렇게 의사들 역시 노동자를 통해 배워간다.

 

A씨는 급성골수성백혈병 환자였다. A씨는 다른 병원에서 급성골수성백혈병을 진단받고, 치료를 위해 내가 근무하는 병원 혈액내과에 입원 중이었다. 나는 백혈병 발병의 직업관련성에 대하여 파악하기 위해 A씨를 처음 만났고, 무슨 일을 하시냐고 물었다.

A씨는 화학과를 졸업해 반도체 제조업체의 재료합성연구팀에 소속되어 일하고 있었다. 어떤 물질을 취급하셨냐는 질문에 수없이 많은 취급물질을 읊어 내렸다. A씨는 유기화합물을 다양한 유기용매를 이용해 정제하는 과정을 해 왔으며 처음 연구실이 세팅되는 단계에서 근무했기 때문에 환기시설이나 공정 격리가 잘 이루어지지 않았었다는 진술에 따라 직업관련성이 있을 것으로 보고, 산재 신청 절차에 대해 설명해드렸다. 같은 사업장에서 일하고 있는 아내가 육아휴직을 쓰지 못하게 될 것 같아 산재 신청을 고민하고 있다는 말에, 지금은 치료에 전념하시고 퇴원하신 후 천천히 결정하시고 필요하시면 혈액내과 외래 방문 때 직업환경의학과 외래에 들러 업무관련성 평가를 요청하셔도 된다고 안내해드렸다.

두 번째 A씨의 소식을 접한 것은 그해 말, 그간 보아온 급성골수성백혈병 환자들을 리뷰하면서였다. 퇴원 후 우리 과 외래에 방문해 업무관련성평가서를 받아갔고, 산재신청을 했다는 이야기가 적혀있었다. 업무상재해가 발생하면 노동자는 재해자로서 근로복지공단에 요양급여 신청서를 제출하게 된다. 근로복지공단에서는 업무관련성을 평가하기 위한 전문 조사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전문조사기관(직업환경연구원 혹은 산업안전보건연구원)에 역학조사를 의뢰한다. 역학조사가 완료되면, 전문조사기관 내부에서는 해당 역학조사가 잘 이루어졌는지 심의하는 절차를 거친다. 그리고 이렇게 검토된 역학조사보고서는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로 보내져 최종적으로 업무상 재해 여부가 결정되는 것이다.

A씨에게 우리 과 외래에서 발급한 업무관련성평가서는 A씨가 산재신청을 할 때 첨부할 수 있는 자료로서, 단지 첫 단추를 함께 꿰는 일이었다. 나는 모니터 너머에서, A씨가 앞으로 남은 지난할 지도 모르는 산재처리과정들을 지나 완치 후 다시 건강한 삶을 누리시기를 응원했다. 급성골수성백혈병환자들의 직장 복귀에 대한 논문들을 찾아보면서 다음에 만날 때는 업무적합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 좋겠다는 생각도 어렴풋이 해보았다.

세 번째 A씨의 이야기를 접하게 된 것은 역학조사 평가위원회에서였다. 평가위원회에 상정된 다른 역학조사 사례의 보조위원으로 참여하고 있어 A씨의 역학조사 보고서를 접하게 된 것이다. A씨는 역학조사 진행 도중 조혈모세포 생착에 실패해 사망하셨고 아내분이 절차를 진행하고 계셨다. 역학조사에서는 처음 혈액내과 병동에서 만나 내가 받아 적었던 물질들이 어디에서 얼마나 쓰였는지, 원료 물질을 반응시키는 동안 어떤 물질이 얼마나 발생할 수 있는지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 물질들에 A씨가 얼마나 노출되었을지에 대한 추정이 이어졌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미 알려진 급성골수성 백혈병의 위험인자에 대한 재해자의 노출 수준을 고려했을 때, 업무관련성은 높지 않은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이 결과는 업종, 담당업무 및 나이, 성별을 제외한 개인정보가 식별불가능하게 처리된 채 산업안전보건연구원 공식 홈페이지에 재해사례로 게시되며, 어떤 논리로 업무관련성을 평가했는지 간단히 기록된다. 이후 역학조사보고서원본은 질병판정위원회로 넘어가, 최종적으로 업무상질병판정여부를 판단 받는다. 그리고 그 결과는 본인, 법적 대리인이 아니라면 알 수 없고, 질병판정위원회의 업무상질병판정 사례집이나 근로복지공단 통계에 개인식별이 불가능한 형태로 게시된다.

병동에서 환자로 만난 A씨가 노동자로서 산재를 신청한 후 역학조사를 거쳐 보호자에게 승인여부가 전달되었을 과정들을 계속 따라가면서, 나는 각 과정에서 내가 직업환경의학과 의사로서 할 수 있는 일들이 무엇인지를 거듭 고민하게 되었다. 직업환경의학과 레지던트로서 내가 만나는 환자들은 일했거나, 하고 있거나, 앞으로 일할 사람들이다. 때로는 유족들이나 보호자의 서술로 간접적인 만남을 갖기도 하고, 혹은 의무기록 서류 뭉치로 돌아가시기 전의 긴박했던 기록들을 접하기도 한다. 수많은 노동자가 직업환경의학과 의사 한 명을 트레이닝 하는데 많은 노고를 나누고 있는 셈이다. 다치거나 병들지 않고, 죽지 않는 안전한 일터를 만드는 한편에는 항상 환자가 된 노동자들이 있다. 앞으로도 그분들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배우며 일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