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환의가 만난 노동자 건강 이야기] 보이지 않던 고통 / 2020.03

[직환의가 만난 노동자 건강 이야기] 

 

 

보이지 않던 고통 

 

 

 

김세은 / 선전위원 

 

 

 

3.4kg로 태어난 우리 집 어린이는 만 9개월이 됐고 체중은 조만간 두 자리수가 될 예정이다. 그동안 숱하게 아이의 통통한 두 다리를 들어올리며 기저귀를 갈았고, 품에 안아 먹이고 재웠다. 안는 횟수는 줄어들고 있지만 안아 달라고 기어올 때는 내 손목이 아프다는 건 잊게 된다.

예전부터 육아로 인한 손목 통증 이야기를 많이 들어봤지만 사실 잘 와닿지 않았다. 그랬던 이유가, 내가 유독 튼튼한 손목를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지금껏 손목에 부담 가는 일을 지속적으로 해본 적이 없어서였다는 걸 아이를 키우며 분명히 알게 됐다. 손목에 힘을 줄 때 조금씩 느껴지던 통증은 차차 심해지더니 문고리를 돌리거나 가만히 누워있을 때도 느껴지곤 했다. 아이가 크기 전엔 별 수 없다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그쯤 되니 조금 겁이 났다. 병원에 가봐야겠다고 생각만 하던 시기를 지나 다행히 통증은 그럭저럭 완화되어 가고 있다.

이런 경험을 하고 나니 만약 출근해서도 손목에 부담되는 일을 늘 해야 하면 어떡하나, 자연스레 생각이 이렇게 이어졌다. 손목뿐이랴. 친한 친구 한 명은 출산과 육아를 거치며 요통이 심해져 꽤나 고생했더랬다. 교사인 그녀는 최대 3년의 육아휴직을 택할 수 있었고 다행히 몸을 잘 추스려 출산 1년 반만에 복직했다.

그런데 주로 서서 일하는 그 친구가 90일 출산휴가를 간신히 쓰고 허리 통증이 여전한 채 복직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어땠을까. 병가를 쓰거나, 그마저 여의치 않다면 일을 그만둬야 했을지도 모른다.

몇 달 전 직업환경의학회 가을학술대회에서 어업인의 근골격계 통증에 관한 포스터 발표를 듣고 있었다. 남성 노동자에 비해 근골격계 통증을 호소하는 여성 노동자의 비율이 더 높다는 분석결과가 나왔다. 몇 가지 요인을 보정한 결과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발표가 끝나자 여성 노동자에게서 통증이 더 흔한 이유를 찾아보았는지, 예상되는 이유가 있는지 누군가 물었다. 발표자의 대답은 뾰족한 내용이 없어서였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 내가 했던 질문은 나 자신에게도 또렷이 남았다.

"여성 노동자들이 집에서 가사 노동을 더 많이 한다면 근골격계 통증을 호소하는 비율이 더 높지 않을까요? 그 점에 대해 혹시 고려해보셨나요?"

언젠가 이런 내용을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긴 하지만, 그 순간 순전히 내 경험에서 떠오른 질문이었다. 발표자가 다음 분석에는 그런 것을 고려해주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질문한 것이기도 했다.

지난달부터 주 5일 출근하는 워킹맘(물론 필자는 이 말을, 육아의 책임과 부담을 여성에게 더 지운다는 점에서 비판한다)의 삶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시어머니께서 아이를 봐주시기로 한 터라 일찌감치 한가지 걱정을 덜고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 연세에 10시간이상 아기를 돌보는 일이 무리라는 것을 가족 모두가 깨닫는 데는 며칠이 채 걸리지 않았다. 어린이집에 보낼 대기 순번이 되지 않았고, 당장 다른 방법이 없었던 터라, 시터 선생님을 찾아보기로 했다.

가족이 아닌 누군가에게 어린 아기를 맡긴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시터 선생님이 갑자기 아파서 못 오시면 어떻게 하지? 아이가 자꾸 보챈다고 티 안 나게 때리는 건 아닐까? 물론 이런 걱정을 남편도 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안다.

이제 막 워킹맘의 세계에 진입한 나는 궁금해졌다. 이 모든 걱정과 근심을 짊어지고서 내가 일도 잘하고 아이에게도 소홀하지 않을 수 있을까? 갑자기 늦게 퇴근하는 일이 생기면 아기는 어떻게 하지? 이 모든 것만큼이나 중요한 나 자신을 잘 돌볼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을 하는 사람이 나뿐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하면, 조금은 위안이 된다. 한편으로는 다른 '워킹맘'들도 이런 마음으로 위태롭게 일하고 있겠다는 데 생각이 닿으면 걱정이 된다.

지금 일하는 병원에서 검진센터 개소 준비를 하고 있다. 진료실에서 가장 많이 만나게 될 이들은 같은 병원에서 교대근무로 일하는 간호사들이다. 여성 비율이 매우 높지만 이직율이 높아 아이키우면서 간호사로 일하는 분들이 그리 많지는 않을 것 같다.

예전에도 교대근무하는 간호사들을 진료실에서 만나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듣곤 했었다. 그런데 이젠 '워킹맘'이 되고 보니 마주 앉은 사람의 고충과 힘듦을 예전보다 더욱 무겁게 받아들이게 될 것 같다. '잠을 잘 못자요', '항상 피곤해요' 혹은 '허리가 아파요'라는 호소를 들으면 병원의 교대근무 형태나 노동강도가 어떤지는 물론 그 사람이 집에서는 어떤 일을 하는지, 아이가 있다면 몇 살인지도 궁금해질 것이다.

반드시 어떤 일을 경험해야만 공감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어떤 것들은 직접 경험하고 나서야 분명 조금 다른 차원의 앎이 열리는 느낌이 든다. 나의 안녕을 챙기면서, 주어진 역할들을 조화롭게 해낼 수 있을지 여전히 걱정된다. 하지만 그 덕에 새로운 렌즈를 하나 더 장착한 것 같아 기대되기도 한다. 보이지 않던 고통이 보일지도 모른다는 기대 말이다.

[직환의가 만난 노동자 건강 이야기] 야간작업 노동자의 검진과 사후관리 / 2020.02

야간작업 노동자의 검진과 사후관리

이선웅 회원, 직업환경의학 전문의

 

필자는 직업환경의학 의사로 노동자 특수건강검진도 하고 있지만, 외래진료실에서 지역사회 환자와 노동자들에 대한 일반 진료도 하고 있다. 직업환경의학 의사임에도 막상 외래 진료를 하고 약 처방을 하게 되면, 일일이 직업을 물어 질병과 관련성을 유추하고 필요시 업무적 대책을 생각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 많다.

우리 사회에서는 특수건강검진의 다양한 항목들이 기본적으로 주의하여야 할 직업적 위험요인이지만, 일반 외래에서는 특수건강검진 프로그램과 외래 프로그램이 연동될 수 없어 이 환자가 특수건강검진을 받은 분인지 또 그 결과 판정은 어떤지를 같은 기관 안에서라도 쉽게 확인할 수가 없다.

하지만 외래 진료 시에도 말을 하다 보면, 쉽게 눈에 띄는 직업적 유해인자가 있다. 바로 야간작업이다.야간작업노동자들은 뇌심혈관 질환의 위험이 높은 것으로 익히 알려져 있다. 따라서 고혈압, 당뇨, 고지혈증과 같은 기저 위험질환을 특수건강검진으로 파악해 이를 관리하여 야간작업노동자들의 뇌심혈관 질환을 국가적으로 예방하고자 하는 것이다. 특수건강검진을 시작하고 얼마 안 있어 30대 중반의 야간작업 노동자가 특수건강검진에서 당뇨의심으로 정밀 2차 검사를 하러 왔다. 2차 검사 채혈을 하고 며칠 후 검사 결과가 나오면 판정을 해서 우편으로 결과를 보내는 것이 일반적인 검진기관의 방법이다. 하지만 의문이 들었다. 그렇게 우편으로 결과를 받으면 이분이 실제로 치료를 위해 다른 병원이라도 내원을 할지. 사업장 보건관리를 하면서 무수한 검진 유소견자분들이 치료가 방치된 채로 지내는 것을 목격했다.

다양한 이유가 섞여 있을 것이다. 검진결과에 대한 적절한 대면 설명을 듣지 못해서일 수도 있고, 야간작업과 같은 경우는 내원 시간을 내지 못한 상태로 1, 2년의 시간이 금방 지나가기도 할 것이다. 또, 일반적으로 검진의사와 처방의사가 달라서 설명을 들어도 다시 진료하는 과정이 번거롭거나 심리적 거리감이 있어 누락되는 분들도 상당할 것이다. 그래서 그 분은 2차 검진을 원내 당화혈색소로 검사하고 바로 외래로 접수해서 당일 치료를 시작했다. 당화혈색소 수치가 높아 환자도 놀라워했다. 건강검진의 판정은 우선적으로 치료 시작 후 당일의 검사 결과를 가지고 추후 판정되어 배송될 것이다.역시 야간작업으로 특수건강검진에서 고혈압 의심으로 2차 검진을 위해 내원한 30대 초반의 환자가 있었다. 2차 검진에서도 혈압이 매우 높아 야간작업을 유지하는 것이 걱정되었다. 판정을 해서 결과를 보내고 그 이후에 노동자가 알아서 치료를 하라고 하기에는, 치료가 누락되어 건강상 위험에 노출될 가능성이 있어보였고 고생을 해서 검진을 한 의미도 없다고 느꼈다.

 뇌심혈관계 질환 등 특정한 건강 상 위험이 높은 야간작업 노동자들. 출처: pixabay.

따라서 2차 검진 시 우선적으로 외래 처방을 하고 추후에 판정결과를 보냈다. 그 외에 다른 상당수의 고혈압 특수건강검진 유소견자분들도 필자의 기관에서는 2차 특수건강검진과 동시에 치료를 시작하고 있다. 특수건강검진 의사가 검진과 동시에 외래 진료가 가능하도록 원내 시스템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수건강검진의 목적에는 검진 이후 사후관리가 포함되어 있고 이의 실행이 매우 중요함을 누구나 알고 있다. 야간작업과 같은 만성질환의 사후관리에는 심각한 경우에는 업무전환이 될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치료적 관리로 업무수행이 가능하게 된다. 그리고 야간작업 만성질환의 치료적 관리는 우리의 보건의료 체계에서 매우 쉽고 간단히 수행될 수 있다.

하지만 노동자 입장에서는 특수건강검진과 치료적 사후관리의 사이에 생각보다 큰 벽이 있고, 이에 대해서는 그동안 감독기관과 일선기관 모두 무관심했었다고 생각한다. 일반건강검진과 달리, 특수건강검진은 사업장 단위의 지속적인 추적관찰 기능이 있는 검진 체계이며, 실제로 사업장보건관리 제도를 통해 사업장 검진결과를 지속관리의 방법으로 사용하고 있다. 지속적인 사업장 관리에서 검진 이후 사후관리가 없거나 내팽개쳐져 있다면, 사업장 검진 자체는 그 의미가 없을 것이다. 야간작업과 같이 치료적 관리가 가능하고 필요한 상황에서는 치료적 사후관리를 장려하고 이를 강화하도록 특수건강검진의 방향을 잡는 것이 야간작업 노동자들의 건강에 실질적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막대한 인력과 비용을 들이는 국가사업의 성과 평가에도 중요한 부분일 것으로 생각한다.

[직업환경의학 의사가 만난 노동자 건강 이야기] 노동자 건강의 현실세계(real world)와 실시간(real time) 확인 / 2020.01

[직업환경의학 의사가 만난 노동자 건강 이야기] 

 

 

 

노동자 건강의 현실세계(real world)와 실시간(real time) 확인

-과학기술이 노동자건강에 기여하도록

 

 

 

예병진 / 후원회원, 인제대 부산백병원 

 

 

 

몇 년 전부터 노동자 건강검진을 하다보면 고혈압이나 콜레스테롤 기준을 적으면서 설명해준 문진표 자체를 사진으로 찍어가는 노동자들이 일년에 꼭 한 두 명은 있다.

왜 그러시냐고 물어보면 건강검진 결과를 받았을 때 무슨 내용인지 잘 몰라서 건강검진과 관련된 내용이면 일단은 찍어간다고 한다. 스마트폰의 사진 기술이 고맙다기 보다 카메라를 적절하게 잘 사용하는 그 분들이 대단해 보였다. 하지만 이런 분들보다 검진 결과를 집으로 보내주느냐, 회사로 보내주느냐를 거듭 물어보시는 분들이 더 많은데 작년에 검진 결과를 받은 적이 없다고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노동자는 작년에 했던 건강 검진의 결과를 알지 못하고 검진결과표를 어디에 두었는지도 기억하지 못한다. 

건강검진은 병이 발생하기 전 단계에서 적절한 건강관리를 통해 질병 발생을 예방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지만, 대부분의 노동자는 건강검진 결과에 대해서 진료를 보러 가야 하는지 아닌지만을 어렴풋하게 기억하고 있는 정도이다. 건강검진의 목적이나 배경이 어찌 되었든 이런 모습이 현재 노동자 건강검진의 현실이라 생각한다.

10년 넘게 특수건강검진을 하면서 만난 노동자들에게 가장 많이 해주었던 말은 "고혈압 기준은 140/90"이라는 말이었던 것 같다. 그다음은 "이 물질은 몸의 어디에 영향을 주어서 이런 검사를한다" 정도가 아닐까 싶다. 특수건강검진을 하면서도 고혈압 기준에 대한 설명을 가장 많이 해준 이유를 생각해 보면 실시간으로 결과를 알 수 있고, 관리나 치료가 필요한 수준이면 혈압 측정의 올바른 방법이라든지 체중을 조절하는 방법이나 금연하는 방법과 같은 구체적인 관리 방법도 설명해 줄 수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결국 일반건강검진이든 특수건강검진이든 검진의 목적은 검진 자체의 시행이 아니라 검진 결과에 따른 관리일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작년에 IT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서 비록 낮은 버전이지만 노동자 일반건강검진 결과 및 사후관리용 챗봇 프로그램을 만들어 본 적이 있다. 본인의 동의하에 개인의 건강검진 결과 및 건강 상태에 따른 구체적인 관리 방법을 스마트폰에 있는 메세징앱(카카오톡)을 통해 본인이 확인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앞으로 사용자 편리성이 조금만 더 좋아지면 자신의 건강검진 결과를 보고 싶을 때나 필요할 때 확인 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지금의 노동자 건강검진의 현실은 지금 당장 맛집을 찾을 수 있고 최단 경로를 확인 할 수 있는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기억에 의존하는 일회용일 뿐인 것 같다.

최근에 한 워크숍에서 '유해물질 복합노출의 건강 영향 추정을 위한 통계분석 방법'이라는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노출 기준치 이하의 복합물질에 노출된 경우에도 노동자에게 유의한 건강 영향이 있었다는 과거 연구들이 이번 연구를 하게 된 배경이었는데 통계분석 방법의 생소함이나 어려움을 떠나서 'real world'라는 단어가 눈에 먼저 들어왔다. 현재는 특수건강검진이나 물질안전보건자료의 내용을 바탕으로 각각의 유해물질에 의한 건강 영향을 확인하고 있지만 '유해물질의 복합노출'은 말 그대로 노동자들이 현장에서 마주치고 있는 'real world'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년에 국내 건설회사 중에서 안전모 또는 이름표에 센서를 부착하고 센서에서 감지하는 유해물질의 농도를 본인의 스마트폰에 실시간으로 보내주는 시스템을 도입한 곳이 있었다. 처음에는 안전사고에 대비해서 노동자의 위치를 파악하고자 계획했던 아이디어가 과학기술이 결합하면서 유해물질의 실시간 농도를 측정하고 알람 신호를 주는 프로젝트가 추가되었다.

그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한 연구진은 많은 유해물질의 실시간 측정이 가능할 정도의 기술개발이 되어 있다고 알려주었다. 비록 과학 기술의 한계로 모든 유해물질의 농도를 실시간 측정하는 건 가능하지는 않을 수 있지만 조금 먼 미래에는 현재와 같이 6개월이나 1년마다 작업환경을 측정하는 방법보다 작업환경의 현실을 더 잘 반영할 방법이 개발되어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세상의 변화가 너무 빨라 따라가지 못할 정도의 아찔함을 느끼는 반면 생활에 유용하거나 편리한 기술들이 계속해서 개발되고 많은 사람이 사용하고 있다. 모든 기술의 발전이 인간의 행복과 존엄을 지켜주는 것은 아닐 테지만 노동자 건강권의 한 축인 작업환경측정과 특수건강검진의 영역에서 기술의 발전이 현실세계(real world)를 더 잘반영하고 현실을 극복하는 도구로 사용되기를 희망한다.

 

[직어보한경의사가 만난 노동자건강 이야기] 저녁이 없는 공공기관 노동자 / 2019.12

저녁이 없는 공공기관 노동자

 

박승권 / 후원회원, 직업환경의학과 전문의

 

세종시에 위치한 공공기관 A 기관에 출장 검진을 다녀 온 경험이다.

 

2년 전 A 기관에 처음 갔을 때 의사 상담을 기다리는 잠깐의 시간에 졸고 있던 노동자를 볼 수 있었다. 여태 오랜 기간 수많은 사업장을 다녀봤음에도, 아무리 의사 상담 대기시간이 길지라도 그 찰나의 시간 동안 졸고 있는 노동자는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 기관에서는 졸고 있는 노동자가 2명이나 보이는 것이 다소 의아했다.

 

어제 잠을 많이 못 주무셨나 봐요?”

 

.. 일이 많아서..”

 

노동자가 잠을 많이 못 잤다고 하는 경우 보통 교대근무 등으로 인한 불면증 얘기가 나오는 경우가 가장 많다. 하지만 의아하게도 두 노동자 모두 일이 많아서라고 대답했다.

 

민간 사업장 노동자의 과로 문제야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비교적 과로와는 다소 거리가 있을 거라 으레 짐작하는 공공행정기관 노동자였기에 다소 생소한 대답이었다. 다행히 수검자가 밀리지 않아 한 명, 한 명의 심도 있는 이야기를 들어 볼 수 있었다.

 

보통 밤 12시에 퇴근해요. 일요일에도 출근합니다. 누가 강요하는 건 아니죠. 하지만 일요일에 미리 일을 안 해두면 주중에 일이 너무 많아요. 안 믿어지시죠? 저도 공무원 일이 이런 줄 꿈에도 몰랐어요.”

 

하루는 밤늦게 일을 마치고 퇴근하는데 도저히 집까지 운전할 힘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대리운전 불러서 갔어요. 술도 마시지 않았는데 대리운전 불러본 적 있으세요?”

 

저랑 엇비슷하게 공부했던 친구는 의사가 되었고, 전 여기에 있어요. 다들 그 친구가 바쁠 거로 생각하지만 사실 제가 시간이 안돼서 못 만나요.”

 

여기 와서 몸무게가 20킬로 넘게 빠졌어요. 우울증 설문이 모두 제 얘기 같아요. 그런데 평일에 병원에 갈 시간이 없어요.”

내가 굳이 과로나, 장시간 노동에 대해 얘기를 먼저 꺼내지 않아도 많은 노동자가 격무에 따른 피로감과 무기력감, 일부는 우울증상까지도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내게 하소연했다.

 

공공기관은 300인 이상 사업장과 함께 지난해 7월부터 52시간 근무제가 시행되었다. 작년에도 이 기관 노동자의 하소연은 재작년과 다르지 않았는데, 그때는 계도기간이라 그러려니 싶었다. 하지만 계도기간도 올해 진작 끝났는데 왜 이곳 노동자들의 삶은 변한 것이 없을까?

 

3년 전부터 전공의 특별법으로 수련의사의 주 근무시간을 제한한 것도 환자의 건강을 지키는 의사의 건강부터 지켜져야 한다는 전제가 깔린 것이다. 이 기관도 우리의 생활과 매우 밀접한 일을 하는 기관이다. 탈진에 가까운 강도로 일하는 공공기관 노동자의 공무를 국민들은 믿을 수 있을까? 누군가를 위해 일하기 위해서는 그 구성원의 건강부터 보장되어야 한다.

 

직업환경의학을 전공하는 의사의 사회적 소임 중 하나는 끊임없이 안전보건 사각지대를 찾아 이들을 보호하는데 일조하는 것이다. 하지만 문득 사각지대나 취약계층이라는 단어가 그다지 멀리에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2017년 초 과로로 숨진 보건복지부 사무관처럼 산업보건 사각지대에 몰리면서 일하고 있을 공공기관 노동자의 규모는 어느 정도일까? 실태 파악이 미진한 거 같아 아쉽다.

 

이곳은 공공행정기관이기 때문에 적용 제외되는 산업안전보건법 규정이 많아 산업안전보건체계가 대부분 작동하지 않는 곳이다. 민간 사업장의 양호선생님 격인 보건관리자라든지, 산업보건의사, 하물며 이를 논의하는 위원회도 구성될 근거가 없다.

 

정말 등잔 밑이 더 어두운 것인지 모를 일이다. 등잔 밑에 있을지 모를 공공기관 노동자를 위한 산업보건, 건강증진 체계 정비 논의가 하루빨리 활발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직업환경의학 의사가 만난 노동자건강 이야기] 노고(勞苦)했습니다, 오늘도- 아픔을 탓하지 않으려면 / 2019.11

노고(勞苦)했습니다, 오늘도 - 아픔을 탓하지 않으려면

 

정지윤 후원회원, 직업환경의학 전공의

 

허리랑 어깨랑 목이랑 다 아파요. 발이랑 종아리랑 퉁퉁 붓구요, 압박스타킹 하고 일해도 어쩔 수 없어요. 애기들(소아과 환자) 키에 맞춰서 맨날 허리 굽히고, 쪼그리고 일하다 허리 좀 펴려고 일어나면 머리가 핑 돌아요.”

가슴이 쿵 내려앉는 것 같을 때가 근무 중에 두세 번씩 있어요. 애플워치 차고 일하는데 심박수가 110가까이 체크될 때가 근무 중에 수 십 번 있구요. 근데 그럴 수밖에 없어요. 응급실에는 계속 사람이 오는데 너무 긴장되어, 저도 제 맥박소리가 들려요

손을 자주 씻다 보니까 손에 습진이 생겨요. 이미 습진이 생겨서 손 씻을 때 쓰린데, 그렇다고 안 씻을 수도 없죠. 처치할 때마다 손세정제 쓰는데 보습한다고 핸드크림 챙겨 바를 수도 없구요.”

교육 받는 게 너무 어려워요. 잘 안 가르쳐 주는 것 같았는데 이제는 그냥 제가 멍청하고 잘 못 배우는 사람인 것 같아요.”

구내염 때문에 잇몸에서 피가 자주 나요. 일 할 때 물을 거의 한 번도 못 마셔요. 입이 바짝 마르니까 더 염증이 자주 나는 것 같아요.”

은박 포장지에 들어있는 약들을 계속 까 넣다 보니까 양쪽 엄지 관절이 항상 쑤시고 아파요. 자다가도 아파서 깹니다.”

 

야간작업이 유해인자로 알려져 있는 병원 직원들과 특수건강진단 문진실에서 나누게 되는 대화이다. 야간작업으로 발생하는 수면장애, 위장장애에 대해서 호소하는 사람도 많지만, 그 외 일하면서 발생하는 다양한 고충이 진료실을 메운다. 문진표에 제시된 여러 증상 중에 심하다라고 표시한 항목만 대화를 나누어도 시간은 모자란다. 그나마 잘 알고 있는 업무 공간인 병원에서도 어떤 의학적 조언을 해야 할지 모를 상황이 자주 찾아오고는 한다. ‘스트레칭 자주 하시고 규칙적으로 운동하셔야 합니다, 보습 잘해주세요, 물 많이 드세요, 증상이 심해지면 해당과 진료 보세요등 기운 없는 조언들을 늘어놓고 문진실을 나오면 나도 모르게 한숨이 흘러나온다. 내가 아는 직종에서 몰랐던 업무부담이 있었음을 다시 한번 배우고, 그 상황에서 그런 부담이 있을 수밖에 없음을 공감하게 된다.

문진실을 나오면 거치는 나만의 절차가 있는데, 문진 과정에서 했던 말들이 당신이 관리를 제대로 못 해서, 혹은 당신이 유별나서 그런 불편이 발생했다고 하는 뉘앙스가 있었는지 복기하는 것이다. 문진실 밖에서 만나게 되는 환자들은 자신이 앓고 있는 질환의 업무 관련성을 밝히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는 사람들인 경우가 많다. 그리고 서류에서 만나는 사측의 입장은 한결같다. ‘건강검진도 시기에 맞춰 잘 해주고, 작업환경측정도 잘 되고 있으며 사업장 보건관리자도 있는 이 좋은 시스템 안에서 질병이 발생하는 건 당신이 관리를 제대로 못해서, 혹은 당신이 유별나서 그런 불편이 발생하는 것이며 당신과 같이 일하는 사람들은 아프지 않아서다’.

그러나 아프고 싶어서 아픈 사람은 세상에 없다. 가려진 위험, 그리고 대처하지 못하고 있는 지점이 있음을 파악하고 아직은 갈 길이 멀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 노동자의 건강을 위한 한 걸음이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직업환경의학과 의사로서 내가 만나는 일하는 사람들, 일했던 사람들의 일터에는 다양한 이유로 신체적·정신적 위험요인이 도사리고 있다. 매일 자신의 일터에서 깨어있는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노동자들은 자신의 불편한 신체에 개연성 있는 이론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자신이 감지하는 불편을 최소화 할 수 있는 최선의 보호조치를 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왜냐하면 생계를 이어가는 수단이자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아프다. 아픔이 장기적으로는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질병으로 나타나건, 일시적으로 발생했다 일을 쉬면 나아지는 통증이건, 그 무게는 다를지라도 결국 매일의 삶을 파고드는 어려움으로 작동한다. 나는 그런 어려움이 우리가 같이 해결해야 할 문제로 대화에 등장하기를 바란다. 현재 가용한 대답들로는 해법이 되지 않더라도 무엇이 문제인지를 파악하고 남겨두는 일, 그리고 대답을 찾아가는 일을 함께 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문진실에서 기운 없는 조언들이 힘을 갖기 위해서는 문 밖에서 더 바쁘게 움직여야겠다고 다짐해본다.

[직업환경의사가 만난 노동자건강이야기] 선을 넘는 현장의 냄새 / 2019.10

선을 넘는 현장의 냄새

이이령 직업환경의학과 전공의, 운영집행위원

 

김기사그양반. 선을 넘을 듯, 말듯 하면서 절대 넘지 않아. 근데 냄새가 선을 넘지

영화<기생충>에서 반지하 집 특유의 냄새가 몸에 밴 운전기사 기택(송강호)의 냄새가 불쾌한 박사장(이선균)이 하는 대사다. 이 영화는 지워지지 않는 가난의냄새를 모티브로 부의 양극화에 대해 얘기한다. 뜬금없이 영화 <기생충>의 냄새 이야기를 한 이유는, 최근에 음식물 쓰레기 재활용 업체와 철강 대기업 본사를 차례로 방문한 기억 때문이다.

음식물쓰레기 재활용 업체의 악취

얼마 전 소규모 사업장 특수건강진단 사후관리 목적으로 음식물쓰레기를 퇴비로 재활용하는 업체를 방문했다. 음식물쓰레기 특유의 비리고 불쾌한 냄새가 몸에 온전히 배긴 생산직 노동자들은 특별한 증상 및 질환이 없었고, 관련 업계에서 수년간 일하며 냄새에 무뎌져 특별히 힘들지는 않다고 하였다. 작업환경측정은 지극히 정상이고 대부분 자동화된 공정이라 수리 외에는 사고의 위험도 낮았다.

건강상담 후 순회점검 차 방문한 현장의 악취는 동네 음식물쓰레기 수거통 안에 코를 박고 있는 것보다도 훨씬 심해 오래 있지는 못하고 나왔다. 잠깐 동안이었지만 내 옷과 몸에 비린내가 배겨 퇴근길 지하철에서는 왠지 모르게 위축되었는데, 하루 종일 악취 속에서 일하면서도당당했던 노동자들을 생각하니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대기업 본사 계단의 향기

며칠 후 보건관리 대행업무 수행차 철강 대기업 본사 건물에 갔다. 보통 계단에는 퀘퀘한 냄새가 나기 때문에 심호흡을 한번 한 후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문을 열었는데, 예상 외로 은은하고 기분 좋은 향기가 났다. 이후 업무는 지극히 통상적이어서 잘 기억은 안 나지만, 그 회사의 향기는 여전히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본사 건물이라 그럴 수 있겠거니 했었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 회사는 10여년 전부터 냄새에 대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공장 내 냄새 발생 저감을 위한 전담조직을 구성하고, 자체 관리기준을 수립해 휘발성 유기화합물, 황화수소, 이산화황, 암모니아 등을 실시간 모니터링하고 냄새 발생원을 차단하는 대기환경 개선을 수행하고 있었고, 지역사회를 대상으로 설명회를 진행하기도 했다.

질병의 전조일 수도, 삶의 질 자체일 수도 있는 냄새 현장에서 냄새는 노출로 인한 심각한 사고발생 전 조치를 취하는 단서가 되기도 하지만, 특별한 경우 외의 일상적인 직업보건에서는 냄새에 대해 잘 다루지 않는다. 기업에서 냄새에 적극 대응하는 경우는 보통 노동자 건강 및 삶의 질 측면보다는 지역 주민들의 민원 때문이다.

밀폐공간 중독 사망, 건설업배달업의 사고, 장시간 고강도 노동으로 인한 과로사 등이 여전히 많은 헬조선의 노동시장에서 삶의 질에 가까운 사업장의 냄새에 대한 질문은 치열한 노동 현실을 잘 모르는 의사의 배부른 소리일 수도 있다하지만, 현장의 냄새는 예민한 일부 사람들의 문제제기가 아니다. 참았던 냄새가 에탄올이 아닌 메탄올이라면 시력을 잃을 수도, 전자산업 노동자들처럼 화학물질에 의한 혈액암이나 생식독성이 생길 수도 있다. 또한 저농도 만성노출로 인해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 신경계 등의 문제가 생길수도 있으며, 질병이 생기지 않더라도 현장의 냄새로 인한 불쾌함과 작업장에 대한 불안감 자체도 노동자 개인과 회사 조직에게는 큰 문제가 된다.

악취는 존재하지만, 노동자에게 안 느껴지도록 하려면?

음식물쓰레기에서 발생하는 악취는 어쩔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냄새에 대한 대응을 고려하면, 두 회사의 사례는 구조적으로 양극화된 한국의 노동현실을 반영한다. 냄새로 대비되는 두 회사의 노동 조건, 노동 환경의 차이를 좁힐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노동자들은 악취에 적응해 살아가고 있었으며, 회사는 영세하며 제도적으로 규제했을 때 여러 한계가 있어 나 혼자서는 답을 찾지 못했다.

반지하냄새야. 이사 가야 없어져

영화<기생충>의 기정(박소담)은 반지하를 떠나야만 냄새가 없어진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노동자를 없애지 않고, 자원 재활용에 필요한 시설을 없애지 않고, 저개발 국가에 떠넘기지 않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거시적으로는 양극화된 한국의 노동현실의 격차를 줄이고, 미시적으로는 현장의 노동 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여러 주체들의 고민과 노력이 필요하다.

[직업환경의학 의사가 만난 노동자 건강 이야기] 누구를 위한 D1인가 / 2019.09

[직업환경의학 의사가 만난 노동자 건강 이야기] 

 

 

누구를 위한 D1인가

 

 

권종호 / 선전위원, 직환의 

 

*여기서 D1과 D2는 다음을 의미한다. 특수건강진단의 판정 소견으로 D1은 직업에 의한 질병이 의심되는 경우를, D2는 직업 관련성이 적은 일반적인 질환이 의심되는 경우를 의미한다. 

오후 느즈막이 진료실 안으로 노동자 두 분이 불쑥 들어왔다. 그날도 200명 가까이 진료를 본 터라 몸은 지칠 대로 지쳤고 남은 시간 버텨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최대한 사무적인 말투로 "한 분은 밖에서 기다리다 순서대로 들어오세요."라고 했다. 쭈뼛쭈뼛 서 있던 두 분 중 50대쯤 되어 보이는 분이 청력 재검 결과지를 내밀며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이 친구 청력 검사결과입니다. 잘 좀 봐주십시오." 양쪽 청력 모두 상당히 안 좋은 상태였다. "청력이 상당히 안 좋네요. 시끄러운 데서 오래 일하셨어요?"

"저랑 같은 팀에서 15년 동안 일해 온 친구입니다. 워낙 성실하고 착해서 건설현장 데리고 다니면서 용접도 가르치고 함께 먹고 자고 해왔는데 귀가 많이 안 좋다고 하네요. 이번에 들어가는 사업장에서는 D2(일반질병 유소견자) 판정 까지는 일을 할 수 있는데 D1(직업병 유소견자) 받으면 일 못한다고 합니다. 잘 좀 봐주십시오."

왼쪽 청력은 어려서부터 안 좋아서 장애 판정을 받았다고 하는데 오른쪽은 일하면서 나빠져버렸다고 했다. 안타깝게도 오른쪽은 직업력, 소음성 난청의 특성, 손상된 정도까지 D1에 부합하는 소견이었다. 왼쪽이 안 들리니 오른쪽에 귀마개를 할 엄두도 못 내었을 것이다. 성실했다니 더욱 더…. 하지만 피곤함을 핑계로 사람이 얼마나 매정해질 수 있는가. 다소 짜증 섞인 말투가 튀어나왔다.

"제가 이렇게 오시는 분들이 한 두 분도 아니고 이전에 이런 소견으로 오셨던 분들은 모두 D1을 받아가셨는데 특별히 D2를 드릴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어쨌든 결과 나오는 대로 제출하셔야겠어요."

"선생님, 이 친구 생계가 달려있어서 그렇습니다. 일하다가 좀 나빠지긴 했지만 일하는데 전혀 지장도 없고 이제 30대인 친구가 이렇게 되어버려서 앞으로 어떻게 일을 하겠습니까."

"제가 그런 사정을 다 봐드리면 한도 끝도 없습니다. 사정에 맞춰 판정이 나가면 그 판정이 뭐가 됩니까."

그날 저녁 내내, '그 판정이 뭐가 됩니까'가 아닌 '그 판정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라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소음성 난청으로 판정하는 것이 그 노동자의 건강에 있어서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일터에서 망가진 귀 때문에 다시 일터에 돌아갈 수 없는 상황. 심지어 사업장에서는 D2는 채용이 되어도 D1은 채용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이는 소리를 못 듣는 것으로 발생하는 작업의 위험과는 상관없이, 직업 관련 소음성 난청이 라는 이유만으로 사업장이 채용을 꺼리고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D1의 채용을 꺼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보건관리자에게 물어보면 백이면 백 소음에 대한 관리 감독이 들어올까봐 사업장에 D1 노동자가 아예 없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실제로 D1 노동자가 있는 사업장은 모두 강력한 소음 관리 감독을 받는 것일까? 또는 배치 전 검진에서 D1을 받은 노동자를 채용한 것만으로도 그런 관리 감독이 시작되는 것일까?

전자에서도 제한적일 것이고, 적어도 후자에 있어서는 아무런 불이익이 없는 것이 맞다. 또한, 원칙적으로는 배치 전 건강 진단이 노동자의 건강 보호 목적 이외에 (채용 상의 불이익과 같은) 다른 용도로 활용되지 못하게 되어 있다. 결국 소음성 난청이 있는 노동자들만 보건관리자 혹은 근로감독관의 잘못된 인식과 배치 전 건강 진단의 잘못된 활용으로 채용 상의 불이익을 받고 있다.

이제는 '소음성 난청을 가진 노동자를 채용'해서 불이익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채용하지 않아서' 처벌받을 수 있다는 점을 보건관리자들에게 주지시킬 수 있는 계도가 시급하다. 특수건강진단으로 발견된 직업병, D1의 97%가 소음성 난청임에도, 전혀 관리되지 않는 노동 환경의 소음으로 인해 한 번, D1 판정자라는 낙인으로 또 한 번 고통 받는 노동자를 보며 도대체 누구를 위한 D1인가 되묻고 싶다.


[직업환경의학 의사가 만난 노동자 건강 이야기] 두 명의 PTSD 환자 이야기

[직업환경의학 의사가 만난 노동자 건강 이야기]

두 명의 PTSD 환자 이야기

 

최혜란 회원, 직업환경의학 전문의

1시간 간격으로 연달아 2명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PTSD) 환자를 만나게 된 어느 날이었다. 두 환자는 모두 직장에서 불의의 사고를 당했고, 그 후에 사고와 관련된 자극을 회피하고 작은 자극에도 지나치게 불안해하는 등 전형적인 PTSD 환자였다. 그러나 본인의 이야기를 할 때의 감정 상태와 태도는 판이하게 달랐다. 재구성해보면 다음과 같다.

환자1. (흐느끼며) "저한테 왜 이런 일이 생긴 건지…. 저는 정말 멀쩡하게 회사에 다니고 있었는데. 도무지 이해가 안 됩니다. 회사는 이 사고에 대해서 책임이 없다고만 말하고,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도 어쩌면 이렇게 하나같이 제 아픔을 모르는 척할 수가 있는 건지.. 회사에서도 버림받은 것 같고 동료들도 너무나 야속합니다."

환자2. (매우 담담한 어조로) "저는 사고가 났을 때 올바르게 대응했다고 생각합니다. 다행히 사고 처리를 위해 동료와 제 직속 상사가 적극적으로 저를 도와주었습니다. 경찰에 신고 하는 일부터 산재 신청하는 것까지. 저도 이렇게 해야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정신질환 산재 진행 과정에는 주변 사람들의 지지가 매우 중요

최근 정신질환의 산재 신청 및 승인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 직장에서 사고가 난 이후에 발생한 PTSD는 인과관계가 명확하기 때문에 승인율이 높은 편이다. 그러나 직장 내 괴롭힘으로 발생한 정신질환을 산업재해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당사자가 자신이 겪은 상황을 직접 증명해야 하며, 또한 이로 인해 정신질환이 발생 또는 악화 되었다는 인과관계 역시 입증해야 하기에 그 과정이 매우 험난하다.

산재 신청에 앞서 정신질환에 대한 사회적인 편견을 감내하는 일은 온전히 피해자의 몫이 되고, 진단 및 산재 신청까지의 과정에 필요한 절차를 수행하는 것은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에게는 더 힘겨운 과정일 것이다. 더구나 지나간 일을 떠올리며 그 당시의 부정적인 감정을 다시 경험한다는 사실 만으로 산재 신청은 언감생심이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도망가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 내가 만난 두 명의 환자는 주변 사람들의 지지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알 수 있는 극단적인 예시라고 할 수 있다. 두 환자의 앞뒤 사정은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러나 한 쪽은 전혀 지지받지 못한 채로 힘겨운 발걸음을 딛고 있었고, 한쪽은 동료와 상사들의 지지에 힘입어 당당하게 자신의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을 뿐 아니라 옳은 일을 한다는 확신에 찬 태도를 엿볼 수 있었다.

▲ 정신질환 산재 인정과정 뿐만 아니라 직장 내 괴롭힘의 해결을 위해서 주변 사람들, 일터의 동료들의 지지가 필수적이다.ⓒ pixabay


직장 내 괴롭힘 피해자에게 직환의는 마지막 보루일 수도

지난 호에서 다루었던 '일터 괴롭힘 생존자 인터뷰(일터 185호 9쪽)'에서 피해자는 비록 동료들의 지지는 없었지만, 정신과와 직업환경의학과 의사들에게서 가장 크게 도움을 받았다고 말했다. 나에게는 그 말이 마음속 깊이 와 닿았다.

이를 종합하면 결국 직장 내 괴롭힘으로 고통받는 사람을 만날 때 그에게는 누구든 주변의 지지가 절실히 필요한데, "환자1"처럼 주변 사람들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직업환경의학과 의사가 자신을 지지해줄 마지막 보루일 수 있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 조항은 그 실효성을 문제 삼을 수도 있고, 가해자를 처벌할 수 있는 조항이 빠진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는 지적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법이 만들 어진 취지를 생각해본다면, 결국 '직장인의 고충'으로만 여겨졌던 일이 사실은 직장 내 괴롭힘일 수 있으므로 직장에서의 인권과 폭력에 대한 감수성을 적극적으로 키워야 한다는 의도일 것이다. 결국, 괴롭힘 피해자와 만나서 이야기를 듣는 직업환경의학과 의사들이 폭력이나 괴롭힘이 무엇인지에 대해 교육을 받고, 권력을 이용한 갑질이나 물리적/언어적 폭력 외의 비가 시적인 배제 등도 괴롭힘의 영역이라는 것을 섬세하게 파악할 수 있어야겠다.

[직업환경의사가 만난 노동자 건강 이야기] 여전히 먼 50cm / 2019.07

[직업환경의사가 만난 노동자 건강 이야기] 

 

 

여전히 먼 50cm

 

 

이정엽 / 직업환경의학과 전문의, 후원회원 

 

 

어느 무더운 여름날, 당시 전공의였던 나는 보건관리 업무를 위해 한 휴게소를 방문하게 되었다. 건강 상담이 끝난 뒤 현장 순회를 위해 휴게소 내의 여러 시설을 둘러보던 중, 손님이 아무도 없는데도 서서 대기하고 있는 편의점 여직원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 전 상담을 할 때 허리 통증을 호소했던 분이었다. 나는 가까이 다가갔다.


“계속 서 있으시면 허리가 더 아프지 않으세요? 손님이 없으실 때만이라도 좀 앉아 있으시지요.”


그러자 그 여직원이 쓴웃음을 지으며 “여기는 의자가 없어요.”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계산대 뒤 쪽으로 건너가 보니 휴지통과 몇 가지 개인 짐만 놓여있을 뿐 정말로 의자는 없었다. 비록 아무런 동작 없이 가만히 서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몸을 똑바로 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신체에 상당한 부담을 준다. 따라서 장시간 서서 근무할 경우, 하지 근육의 피로도를 증가시키며 하지 정맥류, 족저근막염, 요통의 발생 위험을 증가시킬 수 있다. 직업병을 예방하기 위해서라도 근무 중 틈틈이 의자에 앉아있을 필요가 있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위에서 가끔 감사가 내려오기 때문에 앉아 있으면 안 된대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좀 더 확인이 필요할 것 같아 담당자를 찾았다. 마침 담당자는 편의점 옆 중앙계산대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심지어 그분 또한 계속 서서 근무를 하고 있었다. 담당자의 말로는 자신이 속한 사업장은 한국도로공사로부터 용역을 받아 이곳에서 일하고 있는 상황인데 가끔 도로공사에서 운영서비스평가를 하러 내려올 때가 있기 때문에 근무 태도 등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고 했다. 판매 직원이 앉아 있으면 평가 점수가 깎이는 거냐고 되묻자, 자신도 정확하게는 잘 모르겠다고 했다.

 

 

저자 이정엽님이 직접 그린 그림. 앉을 권리는 판매노동자의 건강권이다.  

 

노동자의 앉을 권리
산업안전보건기준에 관한 규칙 80조에는 ‘사업주는 지속적으로 서서 일하는 근로자가 때때로 앉을 기회가 있으면 해당 근로자가 이용할 수 있도록 의자를 갖추어 두어야 한다.’라고 노동자의 앉을 권리를 보장하고 있다. 또한 2년 전에 우리 기관에서 이 사업장을 대상으로 실시한 근골격계유해요인조사에서도 조리, 판매, 가판 등의 부서에서 근로자들이 장시간 서서 일하고 있어 허리 및 다리의 부하를 감소시키려는 조치가 필요함을 제기한 바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용역을 받는 입장에서 이 권리를 보장해 주었을 때 불이익을 받을 위험이 있는 한, 내가 아무리 작업 환경 개선을 요구하더라도 반영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 했다.


휴게시설 운영서비스 평가 시 고려 사항이 아님
우선은 정말로 도로공사 평가 시에 직원들의 앉아있는 자세가 점수에 반영되는지를 명확하게 확인하는 것이 급선무로 보였다. 나는 한국도로공사에서 실시하는 ‘휴게시설 운영서비스평가’의 담당자에게 연락을 취하여 해당 평가 시 직원이 앉아있다면 평가에 불이익을 받을 수 있는지 직접 확인해 보았다. 담당자는 비록 평가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직원이 고객을 응대할 때의 언행을 반영하기는 하나 직원이 서거나 앉아있는 자세는 평가 항목에 없다고 했고, 내가 여러 차례 되물었지만 앉은 자세가 점수에 반영되는 것은 절대 아니라는 답변은 변함이 없었다. 그렇다면 해당 사업주는 아마 정확한 확인 없이 막연하게 직원은 항상 서서 근무하는 것이 더 친절하고 공손해 보일 것으로 생각하여 그렇게 지시한 것이 아닐까? 나는 법적 근거, 의학적 소견, 한국도로공사로부터 받은 답변 등을 첨부하며 이들에게 잠시 앉거나 기댈 수 있는 입좌식 의자의 지급을 권고함과 동시에 이들이 고객을 응대하지 않을 때에는 틈틈이 앉을 수 있도록 지도해 주기 바란다는 소견서를 작성하여 담당자를 통해 사업주에게 전달했다.


판매노동자에게 여전히 먼 50cm
노동자 뒤쪽에 의자가 놓여 있을 경우, 보통 엉덩이와 의자 간의 거리는 50cm가 채 되지 않는다. 앉을 권리를 집단으로 요구하기 시작한 지 10년이 넘었지만, 그 짧은 간극을 메우는 일은 아직도 달성하지는 못한 듯 보인다. 판매직 노동자의 의자에 앉을 권리를 찾기 위한 노력은 지난 2008년 전국적인 캠페인을 통해 사업주의 법적 의무에 의자 비치가 추가되는 등 소기의 성과가 있었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2018년 김승섭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판매노동자의 27.5%가 일하는 곳에 직원용 의자가 없다고 응답했으며 의자가 있어도 사용할 수 없다는 답변 또한 37.4%나 되어 판매노동자의 3분의 2는 온종일 서서 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로 인해 판매노동자에서는 일반 여성에 비해 무려 하지정맥류가 25.5배, 족저근막염이 15.8배, 엄지발가락이 휘는 무지외반증이 67.0배나 더 발병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직업병을 예방하기 위한 다양한 개선방안은 큰 비용이라는 현실적인 벽에 부딪혀 현장에 반영되지 못하고 흐지부지되는 경우가 많다. 그럴수록 앉을 권리 보장과 같이 비용이 거의 들지 않으면서도 장기적인 효과가 있는 개선방안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필요가 있다. 노동자들의 지속적인 권리요구 및 고용노동부의 철저한 관리 감독이 있기를 기대해본다.

[직업환경의학 의사가 만난 노동자 건강 이야기] 미운 오리도 산재가 되나요? / 2019.06

[직업환경의학 의사가 만난 노동자 건강 이야기]

 

 

미운 오리도 산재가 되나요?

 

 

박승권 / 직업환경의 

 

 

"왜 너만 난리야!?"
"옆 사람들 다 멀쩡한데 왜 너만 그래?"

나름대로 운동을 좋아하고, 또 잘한다는 착각에 빠져 사는 필자에게 지우고 싶은 기억이 있다. 그건 바로 중학교 체육 시간에 뜀틀 위에서 앞구르기 했던 기억인데, 반 친구들 전원(!)이 자연스럽게 임무를 완수했음에도, 유독 필자만 뜀틀 위에서 우스꽝스럽게 물구나무선 것 마냥 '1'자로 서버린 아픔이다. 수차례 시도를 해도 공처럼 구르지 못하고 뜀틀 위에서 1자로 섰다가 고목 쓰러지듯 고꾸라져 한동안 허리통증을 겪게 되었다.

업무상 질병(산재) 심의자료를 검토하다 보면 간혹 그 당시 선생님께 혼났던 기억이 떠오르곤 한다. 산재를 신청하는 노동자의 상대방을 자처하는 사업주 항변 중 단골로 등장하는 다음과 같은 논리 때문이다.

"여태껏 같은 부서 사람들에게는 아무 일 없었는데 이번에 홍길동씨에게만 문제가 생겼다. 그러므로 산재가 아니다."

이는 산업재해보상보험법(산재법)과 산재보험의 취지를 완전히 몰이해함으로써 나온 논리다. 산재보험의 목적은 업무와 관련한 안전, 보건상의 위험을 함께 대비하는 것이다. 산재를 판단하는 기준은 오로지 '업무와 질병 발병 간의 상당한 수준의 인과 관계'의 존재 여부지 노동자가 갖고 있던 위험요인이 아니다. 설령 노동자가 위험요인을 갖고 있었던들, 자연적인 경과를 따랐을 때 발병했을 시점보다 업무로 인해 상당한 수준으로 빨리 유발되었는지가 판단의 핵심인 것이다.

대법원에서도 업무와 질병 간의 인과관계를 따질 때는 보통의 평균인을 기준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당사자의 신체조건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방향을 취하고 있다. 필부필녀를 기준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해당 노동자 개개인의 처지에서 "신체 부담업무"에 해당하는지, 유해요인과 질병 간의 인과성을 생각해야 한다는 의미다.

앞서 뜀틀 얘기로 돌아오자면 당시 필자의 뒤통수는 다른 친구들보다 납작했다. 납작한 뒤통수를 갖고 있는데도 선생님의 지배·감독하에 실습에 임했고, 이 과정에서 부상(질병)을 얻었다는 것만 인정된다면 이후에는 둥근 뒤통수를 가진 친구들 기준이 아니라 '납작한 뒤통수'라는 위험요인을 가지고 있는 나의 상황에서 앞구르기와 허리통증의 인과관계만 판단하면 되는 일이다.

또 한 예로 내 친구는 병뚜껑이나 참치캔을 딸 때마다 피를 철철 흘려 놀림의 대상이 되곤 한다. 대다수 사람은 이 같은 동작을 할 때 다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이 친구가 참치캔 때문에 피를 안 흘린 것은 아니므로 이 동작이 업무의 일환이었다면 당연히 산재에 해당한다.

이처럼 산재보험은 쉽게 말해 '일과 관련해 병을 얻은 근로자'를 위한 사회보장제도 중 하나일 뿐, 근로자가 잘못했다거나(고의가 아닌 이상), 업무능력이 미숙하다거나, 개인적 소인의 존재 여부는 보장 여부 판단에 중요한 고려점이 아니라는 것을 사업주든 노동자든 꼭 인지해 이로 인한 사회적 오해, 갈등이 줄어들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미운 오리야말로 우리 사회가 가장 먼저 품어야 할 대상이 아닐까?

[직업환경의학 의사가 만난 노동자 건강 이야기] 업무관련성 전문조사(역학조사) 이야기 / 2019.05

[직업환경의학 의사가 만난 노동자 건강 이야기] 

 

 

업무관련성 전문조사(역학조사) 이야기 

 

 

김대호 / 근로복지공단 직업환경연구원 

 

 

필자는 업무상 질병관련 역학조사를 수행하는 기관인 직업환경연구원(구 직업성폐질환연구소)의 업무관련성평가부에서 직업환경의학 전문의로 일을 하고 있다. 이에 직업환경연구원이 수행하는 역학조사 과정과 직업병을 밝혀내기 어려웠던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직업환경연구원에는 다양한 사건들이 의뢰되는데, 불산에 노출되었다고 주장하는 7명의 건설 노동자들이 집단으로 산재신청을 한 사건이 있었다.


불산 누출 직접적인 증거 찾기 어려워

산재신청을 한 날짜가 불산에 노출되었다고 주장하는 날짜로부터 한 달 뒤였기 때문에 감기 몸살 증상이 있었다는 것 외에는 한 달 전의 불산 누출 여부를 확인할 수가 없었고, 고용노동부 담당지청에서도 이미 조사를 하였지만 최종적인 판단을 할 수 없었다.

산재요양 신청 상병을 보니 '간질성폐질환', '호흡곤란', '뇌경색증', '뇌병증', '두통', '저산소혈증', '가려움증', '불면증', '탈모성모낭염'으로 다양하게 기재되어 있었는데, 7명에서 공통적인 신청 상병은 '간질성폐질환'이었다. 이러한 상태로 사건은 필자에게 배당이 되었다.

우선 필자는 사업장 조사를 하기 전에 의무기록을 검토한 후 신청인들을 모두 불러내 면담부터 시작하였다. 이들은 모두 건설 노동자들로 여기 저기 장소를 옮겨 다니면서 철골을 설치하는 업무를 수행하였는데, 월요일인 13일에 불산을 취급하는 업체의 증축공사 현장에서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이들이 호소한 증상 중에서 감기 몸살이라고 표현되는 근육통/오한은 7명 모두에게 있었고, 그 외 기침은 2명, 열감은 3명이었으며, 두통/어지럼증이 5명, 가려움증이 6명, 귀에서 소리가 들리는 이명이 4명, 관절통이 3명이 있었는데, 첫 면담 당시에는 불산에 노출되었다고 주장하는 13일 저녁에 증상이 발생하였다고 진술하였다.

검토한 흉부 컴퓨터단층영상에서 비정상적인 소견인 간유리 음영(Ground Glass Opacities)이 관찰되는 경우가 5명이 있었는데, 이 중 3명은 경미하였고, 입원 치료까지 하였던 2명은 '간질성폐질환'을 진단받을 정도로 심하였다. 이외 2명의 흉부 영상에서는 비정상적인 소견이 없었다.

면담을 마친 후 불산을 취급하고 있는 업체를 방문하여 전체 공정과 설비 시스템에 대한 이해, 그리고 대기오염 방지설비 및 불산의 입고 및 출고되는 과정을 조사하였고, 13일 당일의 불산 입출고 내역을 확인하였지만, 우리 조사팀 모두 현장에서 불산 누출의 직접적인 증거를 찾기가 어려웠다.

불산 취급 업체 측은 화학물질 누출 흔적이 없고, 다른 직원들 중 이상 증상을 호소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며, 겨울에 노동자들이 무리하게 일을 하였다면 감기 몸살은 걸릴 수 있는 것이 아니냐며 항변하였다.


과거 구미 불산 누출 사건에서 관찰한 유형과 일치 

우리 역학조사팀은 빨리 처리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면서도 쉽게 판단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아 자료를 다시 검토하고 추가 면담 조사를 위해 지방에서 지내고 있었던 7명의 신청인들을 직업환경연구원으로 불러내었다. 집단 요양신청을 하였던 7명의 노동자들이 입을 맞추어 진술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휴대폰을 모두 압수하고, 면담 전후의 사람들을 격리시킨 상태에서 다시 자세하게 조사를 시작하였다.

7명이 모두 함께 근무한 날은 13일이 유일하였고, 13일 오전에 불산 취급 업체의 직원과 공사 현장의 다른 협력업체 직원들이 있었지만, 점심시간 이후로는 신청인 7명만 있었다고 하였다. 증상 발생 시기는 1명이 13일 저녁으로 가장 빨랐고, 2명은 다음 날인 14일 오전과 오후에 시작되었으며, 2명은 이틀 후인 15일 오전에, 나머지 2명은 15일 오후에 증상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처음 면담 당시에는 13일 퇴근 후에 모두 증상이 나타났다고 진술하였기 때문에 불산 노출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던 것이 서로 간의 대화를 차단한 후 집중 면담을 해보니 과거 구미 불산 누출 사건에서 관찰되었던 노출과 증상 발현까지의 잠복기(노출 후 1~2일)가 일치하였다.

이와 같은 면담 내용을 마무리 한 후 불산 취급 업체에서 입수한 자료들을 검토한 결과, 두 가지의 불산 노출 경로를 추정할 수 있었는데, 첫 번째는 집진시설에서 배출되는 불산에 노출될 가능성이었고, 두 번째는 원료가 입고되는 과정에서 불산이 누출됐을 가능성이었다.

우선 노동자 7명이 작업했던 위치 주변에는 대기오염 방지설비(이하 스크러버) 7기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각 스크러버의 배출물질이 한 방향으로 이동할 경우 작업위치가 밖이라고 하더라도 작업자들이 일정 농도의 불산에 노출되었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2주 전부터 작업을 시작하였는데, 왜 13일에만 불산에 노출되었으며, 7명의 흉부 영상에서 중증도가 각기 다르게 나타났는지는 설명하지 못하였다.

두 번째는 불산이 입고되는 과정에서의 누출인데, 불산 노출이 있었다고 판단되는 13일 당시 불산은 작업시간동안 총 3회 입고되었고, 원료가 출고되는 곳에는 불산 누출이 있을 경우 알람이 울리도록 되어 있었으나 입고되는 곳에는 센서가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13일 당시 알람이 울리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센서가 설치되어 있지 않은 입고 설비 쪽에서 누출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었다. 또한 폐질환 정도에 따라 불산 노출농도가 다르다고 추정되는 3개의 집단이 구분되고 이를 감안하면 누출지점으로부터 가까운 곳에서 작업하였던 노동자들은 상대적으로 고농도에 노출되었고, 먼 곳에 있었던 사람들은 거리에 따라 급격하게 불산 농도가 감소하여 저농도로 노출되었을 것이라고 판단하였는데, 이들의 흉부 영상에 나타난 중증도와 누출지점으로 추정되는 곳으로부터의 거리가 일치하였다.

결론적으로, 직업환경연구원의 업무상질병심의위원회에서는 신청인 7명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 증상과 임상경과 및 흉부 영상에서의 동일한 소견, 그리고 날짜별 작업내용과 공사현장의 작업환경 및 불산에 노출된 13일의 오전과 오후에 공사현장 인원 배치 등을 종합하여, 노동자 7명의 임상증상들은 모두 13일 월요일에 불산 취급 업체의 증축 공사현장에서 근무할 당시 오후 2시 경에 불산이 입고되는 상황에서 노출된 불산에 의한 업무상 질병으로 판단하였다.

역학조사를 실제로 수행하는 일도 복잡하고 어렵지만, 수집된 자료와 현장 조사 결과들을 종합하여 최종적인 판단에 이르는 과정도 매우 고되고 어려운 일이다. 또한 역학조사는 노동자에게 발생한 질병의 원인을 찾는 일인데 아직까지 원인조차 밝혀지지 않은 수많은 질병이 있다는 한계가 있는 상황에서, 역학조사 제도는 질병의 직업적 원인이 밝혀진 노동자들에게는 환영 받는 제도이지만, 그렇지 못한 노동자들로부터는 큰 질타를 받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지 않고, 다치지 않고, 병들지 않는 노동환경을 만들어가기 위해 역학조사는 계속되어야 하고, 이를 통해 새로운 유해물질들과 직업병을 발견하며, 기존 유해물질들의 새로운 노출 경로들도 밝혀내어야 한다. 더불어 역학조사 소요기간도 단축되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직업환경연구원의 전문 인력 확충이 필요하다.

[직업환경의학 의사가 만난 노동자 건강 이야기] 투명함을 만들어내는 노동자 / 2019.04

[직업환경의학 의사가 만난 노동자 건강 이야기] 

 

 

 

 

투명함을 만들어내는 노동자

 

 

 

 

김지원 / 후원회원, 직업환경의학 전문의

 

 

 

 

"문제 삼지 않으면 문제가 안 되는데 문제를 삼으면 문제가 된다고 했어요."
- 영화 '베테랑'에서

경인 지역의 한 중소기업은 유리제품을 만들고 있다. 화학용기, 화장품 용기, 약병, 가전제품에 들어가는 초자부품 등을 대기업의 주문에 따라 생산해내고 있다. 반세기의 오랜 역사를 지닌 이 회사는 아쉽게도 산업안전보건 관계자에게는 참으로 계륵 같은 곳이다.
2010년에는 산업재해 다발 사업장으로 블랙리스트에 오르기도 했다. 사망이나 중독 같은 심각한 재해는 아니라 할 수 있는 소음성 난청으로 유소견자가 3명 나와서 3%의 재해발생율을 기록했다. 그 때 노동자수가 100여 명이었고 지금은 50명 정도이다. 단순 계산으로는 직업병 유소견자가 두 배 가량 폭증한 것처럼 통계적 착시를 보여주게 될 것이다.

 

직업병·산업재해 유소견자가 발생하면 해당 관서에는 평소보다 귀찮은 일들이 생긴다. 현장지도를 하고 유소견자 관리를 해야 한다. 소음성 난청의 경우 청력 검사 과정이나 결과 판정에 문제가 있는 경우 병원이 행정 처분을 받기도 한다. 실제로 한 병원은 이곳의 건강검진을 맡았다가 특수건강진단 업무 2개월 금지 처분을 받은 적도 있다. 병원 평가에도 문제가 생길 수가 있기 때문에 이 회사 맡기를 꺼려 직원 건강진단 실시에 어려움을 느낀다는 현장의 이야기를 들었다. 산업보건의 요구가 더 절실한 곳이 오히려 전문가들이 기피하는 아이러니한 현실이다.

유리를 만드는 산업의 현황은 어떨까. 2019년 현재 한국유리공업협동조합의 조합원 명부를 보면 대기업과 중소기업으로 나뉘는 것을 볼 수 있다. 대기업에서는 기술력이 좀 더 필요한 판유리, 건축자재, 자동차유리, 용광로 내열소재, LCD의 기판이나 액정유리 등을 만든다. 중소기업에서는 식품용기와 그릇, 화장품 용기, 약병, 화학실험용 비커나 플라스크 일체, 음료수병 등을 만들고 있다. 전통적인 제조업에 가깝다 보니 규모를 가리지 않고 산재사고가 발생하는 편이다. 최근에는 모 대기업 공장에서 판유리에 깔려 근로자가 숨지는 안타까운 사고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중소기업에서 주로 만들어내는 유리제품들은 원료들을 혼합하여 뜨거운 열로 녹인 뒤 용해·성형하고 서서히 식혀 후처리와 가공을 하고 포장, 출하하는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다. 이 과정에서 고열·적외선에 의한 온열장애·백내장 등의 발생 가능성이 생기게 되고, 분진에 의한 호흡기 질환, 소음에 의한 난청 등이 발생할 수 있다. 이 공장에서도 수십 년간 난청이 발생하여 왔고, 최근 작업환경 측정에서는 유기화합물인 디클로로메탄이 노출기준치를 상회하여 측정되었다. 하지만 관할 관서의 지속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공정의 본질은 크게 바뀌지 못했다.

영세한 업체들은 중국과의 경쟁에 밀리거나 가파른 임금 상승의 여파로 회사 자체의 규모가 점차 줄어들고 있다. 결국 지금의 이 노동자들이 정년을 맞이하게 되면 자연스레 사라질 사양산업이라는 걸 사장과 직원들 모두 서로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산재를 추방하기 위해 우리 모두 노력하지만, 허탈하게도 글로벌한 세계 자본의 흐름에 따라 직업병을 유발하는 산업들이 구조조정의 흐름 속에 재편되거나 사라져가는 경우도 많다.

4차 산업혁명이 화두지만 우리 주변에는 아직 옛날 '공장'들이 남아있고 여전히 힘들고 위험한 일을 예전과 다름없이 묵묵히 해 나가는 노동자들이 있다는 것도 기록해본다.

[직업환경의사가 만난 노동자건강 이야기] 어느 군무원의 업무관련성 평가 이야기 / 2019.03

[직업환경의사가 만난 노동자건강 이야기]

 

 

어느 군무원의 업무관련성 평가 이야기

 

 

 

권종호 / 회원, 직업환경의학 전문의

 

 

 

직업병과 관련한 참고 자료로 사용하기 위해 직업환경의학 전문의들에게는 업무관련성 평가 의뢰가 심심치 않게 들어온다. 전공의 수련 과정 중에도 이러한 업무관련성 평가서를 작성하도록 되어 있다. 필자도 전공의 시절 20여 건의 업무관련성 평가서를 작성하였는데 그중 아직까지도 기억에 남는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업무관련성 평가서는 가끔 간단하기도 하고 가끔 아주 복잡하기도 한데, 이는 각 작업의 특성과 발생한 질환의 인과관계 수준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의뢰된 사례와 관련하여 연구된 자료가 많지 않거나 작업과의 인과관계를 추정하기 어려운 경우에 혹시 있을지 모르는 내용을 검색하느라 많은 시간이 소요되기도 하고 노동자의 작업 관련 자료를 보충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이번 글에서 이야기하려는 업무관련성 평가 사례는 36세 스프레이 도장공에서 발생한 비소세포성 폐암 사례로 직업환경의학 전문의라면 누구나 발생할 확률이 높은 직업병임을 알 수 있는 사례였다. 처음에 접했을 때는 명확한 자료들을 찾아 첨부해주면 간단하게 끝날 것으로 생각했다. 다양한 발암물질이 들어있는 도료를 칠하는 도장공은 그 업무 자체로 국제암연구소(IARC)에서 1급 발암 직업군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노동자는 군무원이었다. 공무원 신분을 가지고 군에서 종사하는 직군인 군무원은 산재나 직업병 관련하여 산재보험이 아닌 공무원 연금공단의 산재 승인을 받도록 되어있다. 그리고 작업 환경에 대한 감시나 특수건강진단 등의 과정은 산안법이 아닌 군 작업환경 및 작업자 보건관리 훈령이라는 규칙을 따른다. 그 결과 이 노동자는 스프레이 도장공으로 열악한 환경에서 작업하며 폐암에 걸렸음에도 직업병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법원을 상대로 공무상 요양불승인처분 취소 청구소송을 준비 중이었다. 오히려 몇 년 전 같은 공정에서 근무한 동료의 백혈병은 바로 승인되었다고 했다. 산재보험의 직업병 인정 과정도 여러가지 문제가 있지만 공무원 연금공단의 직업병 인정 과정은 훨씬 심각한 수준이었다.

관련 자료를 모두 검토하고 실제 사용했던 보호구와 작업 장소에 대한 자료를 보충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해당 노동자 분께 전화를 걸었다. 첨부된 의무 기록 상 폐암이 이미 뼈에 전이된 상태여서 어떤 이야기부터 꺼내야 할지, 너무 우울한 상태는 아닐지 수많은 생각이 오갔다. 하지만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걱정과 달리 다소 활기찼다. 공무원 연금공단의 불승인이 매우 억울해서 본인이 쓰던 보호구며 작업 환경이며 모두 잘 알리고 싶으니 필요한 내용은 이야기해주시라고, 그동안 제대로 된 보호구나 환기 시설도 없이 일해서 결국 이렇게 된 거라 생각한다고 했다. 덕분에 나는 궁금한 질문을 원 없이 했고 필요한 사진 자료들도 추가로 받기로 했다. 통화 말미에 그 노동자분은 조심스레 아이들 이야기를 꺼냈다. 아이가 둘이 있는데 그 아이들이 걱정이라고 소송은 꼭 이기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당시 업무관련성 평가의 자료는 소송에서 절대 지지 않을 정도로 준비해야 했다. 실제로도 근무 환경이 매우 열악했다. 넓은 창고를 그냥 정비소라고 쓰고 있었고 창문에 달린 환풍기 하나가 환기시설의 전부였다. 그곳에서 군용 대공포를 정비하고 도색하는 업무를 하는데 정비 작업은 많지 않고 노후된 장비의 도색이 주된 업무였다. 주로 스프레이 도장 작업인데 안전관리 담당자도 전문 인력이 아니고 이에 대한 외부 감사도 받지 않으니 백혈병이 발생했고 산재 승인까지 받았음에도 여전히 방진마스크만 쓰고 작업해왔다. 작업에 주로 사용된 군용 카키색은 발암물질인 크롬을 함유하고 있었고 스프레이 도장을 통해 노출되는 경우 방진마스크는 효과적으로 이를 막아줄 수 없었다. 오히려 막아줄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로 더 노출될 가능성마저 있었다.

예상보다 훨씬 길어진 업무관련성 평가서를 보내드리고 몇 해 지난 3월 어느 날, 도장 작업하던 군무원에서 발생한 폐암이 소송을 통해 승인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도장 작업 노동자 분들을 만날 때면 가끔, 예상외로 다소 활기찼던 당시 군무원 분의 목소리가 떠오르곤 한다. 울분보단 열정이 느껴지던 목소리. 다행히 2018921일 공무 상 재해 보상의 내용을 수준을 높이기 위해 공무원 재해보상보험법이 공무원연금법에서 분리돼 제정·시행되기로 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공무상 질병과 관련한 요양 승인은 만족스럽지 못한 상황이다. 지속적인 개정, 보충을 통해 불필요한 소송이 발생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직업환경의학 의사가 만난 노동자 건강 이야기] 현장 개선은 어떻게 해야 할까 / 2019.02

[직업환경의학 의사가 만난 노동자 건강 이야기]


현장 개선은 어떻게 해야 할까



이선웅 직업환경의학 전문의



필자는 보건관리전문기관에서 중소규모 사업장의 산업보건의를 맡고 있다. 산업보건의는 직업성 질환의 예방과 조치에 대한 업무를 하여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산업안전보건법 시행령 22조 산업보건의의 직무 등에 개괄적으로 명시되어 있기도 하다. 하지만 현실에서 노동자의 직업성 질환을 예방하기 위해 현장의 문제를 개선하고자 할 때는, 사업장에 어떻게 접근하여야 하며 또 어떻게 설득을 이루어 낼지 난감하게 된다.

어느 날 노동자 한 분이 상담 중 자외선을 바르는 작업을 하면 눈이 따갑다는 표현을 하셨다. 현장을 방문해 보니 새로 설치된 자외선 경화도장 공정의 문제였다. 특수 도료의 하나인 자외선 경화도료를 교반기에 넣은 후 컨베이어에서 자동 도포되면 자외선을 이용해 속성으로 경화시키는 공정이었다. 노동자분은 도료를 교반기에 투입할 때 바로 그 증상이 발생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도료의 물질안전보건자료를 확인하였고, 도료내의 성분 중 각막 자극이 강한 물질(2-hydroxypropyl acrylate)이 원인으로 생각되었다. 이 물질은 자외선 경화 도료에서 흔히 사용되는 성분이었고 공정상 도료의 변경은 힘든 것으로 보였다. 노동자분의 증상이 간헐적이라 일단 보안경과 방독마스크의 보호구 착용을 필수로 하였고, 교반기 개선과 국소 배기 설치도 권고했으나 현장 상황상 국소 배기 설치는 힘들 것 같다고 하였다. 얼마 후 노동자분의 증상은 보안경 착용과 특히 본인이 작업 시 주의하여 증상이 거의 없다고 하셨다.

하지만 얼마 후 간호사를 통해 심각한 얘기를 듣게 되었는데, 타 지역 계열사의 동일 공정 노동자 한 분이 동일 기계의 정비 작업 중 바로 그 도료가 눈에 튀어 심한 시력 손상을 입었다는 사실이었다. 현재 담당 노동자의 증상은 심하지 않지만, 전체 작업은 언제든 위험요인이 있는 작업이었고 이를 예방하기 위해 개선 조치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보였다. 현장의 문제 중 교반기 개선과 응급 세안시설 설치를 우선적으로 요구했고, 부장님과 만나 위험성을 설명했다. 하지만 그 후 몇 달째 현장의 변동은 없으며, 사업장은 수도라인 설치의 힘듦 등을 호소하고 있을 뿐이다. 꼭 필요한 개선조치일지라도 산업보건의의 개선 지도사항 이행에 대한 명확한 근거를 사업장 입장에서는 발견하기 힘든 것이 일차적 원인일 것이다. 만일 발생 할 산재신청과 그로 인한 노동부 점검 시 받을 수 있는 불이익 등의 불안감을 이용해서, 사업장 상황에 따른 임기응변으로 현장 개선을 유도하는 것이 그나마 가능한 현실인 것이다.

두 번째 사례는 건축자재용 샌드위치 판넬 생산 사업장으로, 천식 유발 물질로 매우 잘 알려진 메틸렌 디이소시아네이트(MDI)가 주성분인 접착제가 연속 자동 투하되고 있는 공장이었다. 현장 확인을 하면 직업성 천식의 위험을 느끼게 된다. 두 개의 라인에서 월 8톤의 접착제가 지속적으로 투하되고 있는데, 투하 위치 근접하여 접착제의 경화를 방지하기 위해 온풍기가 상시 가동되고 있었으며, 국소 배기는 없었고 공정은 협소하며 전체 환기는 미흡했다. 작업환경측정 결과는 정상이었지만 라인 수리/세척 또는 점검과 같이 접착제 투하 위치에 근접할 수 있는 업무 상황에 따라 노출 수준은 충분히 높을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그 공정의 천식 발생이 걱정되는 상황이었고, 환기시설 강화를 지시하였으나 역시 질환 예방에 대한 현장 개선 지도는 사업장에 적용되기 어려웠다. 그러던 어느 날 접착공정 노동자 두 명이 천식 치료를 받고 있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들에 대한 수시 건강진단을 의뢰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 결과에 따라 행정기관의 의무적인 현장 개선이 시행될 수 있게끔 된 것이다. 일종의 불행 중 다행으로, 직업병 또는 증상 발생을 통해서야 동료 노동자를 위한 예방조치와 개선이 가능한 어쩔 수 없는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산업 보건 전문가가 현장의 위험에 대해 사전 예방 개선안을 내고 그것을 현장에서 현실화시키는 일은 산업보건사업의 핵심이지만, 우리의 현실에서는 실현되기 매우 힘든 것이 사실이다. 꼭 필요한 개선조치에 대해서조차 사업주와 독립적인 사회적 권위를 인정받지 못한 채, 사업장 내부 상황에 의존한 개인의 노력과 방법에 의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현재 우리의 사업장 보건관리의 작동방식으로는 아무도 그 일을 시키지 않았으며, 아무도 그 결과를 평가하지 않는다는 것이 체감되는 현실일 수 있다. 하지만, 실제적인 현장 개선에 중점을 둔 사업장 보건관리의 방향성은 결코 모호해져서는 안 될 것이며, 2015년 국제산업보건위원회에서 제안된 직업건강 전문가를 위한 국제 윤리강령에서는 개선조치에 대한 추적조사를 의무로 규정하고 있다. 현장 개선에 중점을 둔 산업보건의의 의무와 그와 동반된 사회적 권위 그리고 업무 평가방법에 대해 앞으로 관심과 논의가 형성되기를 기대해 본다.

 

[직업환경의사가 만난 노동자 이야기] 그는 일할 수 있는 다니엘 블레이크였다 / 2019.01

그는 일할 수 있는 다니엘 블레이크였다

송윤희 (직업환경의학 전문의, 회원)


다니엘 블레이크는 심근 경색을 앓은 후 직장에 복귀하지 못했다. 노동 말고는 생계를 유지할 길이 없었던 그는 주치의에게 가서 일을 다시 할 수있게 해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그의 심초음파 결과를 본 심장 내과 의사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단호하게 말했다. “일하면 죽을 수도 있어요. 절대 일하지 마세요.”

다니엘은 심한 심부전 상태였기에 의사는 업무부적합 소견을 철회하지 않았다. 월세도 못 내고 전기세도 밀린 다니엘은 실업자 연금을 받으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그러다 전기도 끊기고 월셋집에서 쫓겨나기 바로 전 연금 혜택을 결정하는 자리에 간신히 인터뷰를 따냈다. 죽느냐 사느냐의 인터뷰였다. 그 인터뷰를 앞두고 다니엘은 화장실에서 쓰러져 죽는다. 지나친 스트레스가 그의 심장을 멈추게 한 것이다. 영국의 유명 좌파감독 켄 로치의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내용이다.

내가 만난 노동자 이 씨는 다니엘 블레이크와 유사한 상황이었다. 나는 심근 경색을 앓은 그의 작업 복귀에 대한 업무적합성 평가를 해야 했는데 다니엘과 차이가 있다면 그의 심장 상태는 노동 자체를 아예 금할 정도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래도 심초음파 결과는 좌심실 구혈률(심실이 수축하며 피를 짜내는 정도)이 정상의 반 정도로 떨어져 있었기에 그냥 일하게 내버려 두어도 불안한 상황이었다. 이 씨에게 제대로 <업무 적합성 평가>를 하려면 철저히 객관적인 자료들이 바탕이 되어야 했다. 3차 병원에서의 운동부하 검사, 주치의의 소견서, 진단서, 처방전을 토대로 환자의 현재 건강 상태를 정확하게 평가하고자했다. 또 하루 날을 잡아 그와 인터뷰를 하고 현장도 돌았다. 이 씨는 자동차 부품 제조회사의 보전반에 속해 있었다. 특정 라인에 배정되어 있는게 아니라 대기하고 있다가 고장 난 기계를 고치거나 필요한 부품들을 만들어내는 등의 불규칙적이고 일정치 않은 업무들이었다. 현장을 돌며 심장에 영향을 미칠 요인들을 살폈고, 그 시간 내내 나는 사측과 노측에 “의사로서 중립을 지킬 것이며, 모든 잣대는 ‘노동자의 건강’ 하나만으로 삼을 것”이라고 피력했다. 예상할 수 있듯이 결과는 일정 조건 하 업무 적합으로 나갔다. 그러나 내가 단 조건들은 현장 동료 노동자들의 반발을 샀다.

그런 작업 조건을 걸면 이 씨한테 시킬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이 반발의 요지였다. 이 씨는 급작스러운 상황을 대비하여 혼자 일해서도 안 됐고, 20kg 이상의 심한 하중의 일에서 배제되어야 했으며 그 외에도 페인트나 신너 등 유기용제를 사용하는 작업에서도 배제되어야 했다. (이 모두는 심장에 악영향을 미치기에 필수적인 조건들이었다) 노조가 강한 곳이었고, 비교적 노동자들의 관계도 강한 노조 덕에 팍팍하지는 않은 사업장이었다. 그러나 매번 아픈 그를 위해 더 힘들고 더 유해한 일을 누군가가 대신해준다는 것은 무리였을 것이다. 결국 회사는 그에게 갑작스러운 작업변경 발령을 내렸다. 나는 다시 사업장에 가서 그가 일할 수 있는 공정들을 살피고 그중 가장 심장에 하중이 안 가는 좌식 업무인 부품 검사직을 권했다. 나름 만족스러웠다. 플랜 A가 현실에 적용되지 못했지만 플랜 B도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제대로 업무 적합성 평가를 하고, 노동자의 건강에 가장 적합한 공정으로 작업 변경을 시켰다는 생각에 뿌듯했다.

그러나 한 달 뒤 이 씨는 회사를 그만두었다. 충격이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급여가 적었다. 비록 좌식 업무였으나 20년 넘게 해온 기존 업무를 그만두고 새 업무를 배운다는 부담감이 있었다. 검사 작업의 노동 강도는 약했지만, 대기하고 있다가 필요시 출동해서 힘 한 번 쓰고 오는 예전 업무보다, 종일 좌식으로 앉아서 쭈그린 자세로 검사를 하는 작업이 더 힘들었다고 했다.

그는 일할 수 있는 다니엘 블레이크였다. 적절히 현장에서 배려만 해준다면 업무에 적합한 노동자였다. 하지만 사측도 노측도 아파서 죽다 살아난 환자를 위해 깍듯한 배려를 지속할 수 없었다. 그러기엔 우리나라 노동 환경이 너무나 척박하다. 노동자는 격무에 시달리고 회사는 산재 하나 일어날까 벌벌 떤다. ‘노동자의 건강’ 역시 조금 더 전인적(全人的) 관점으로 살펴져야 할 것이다. 나는 이번 사례로 노동자의 건강에 영향을 주는 것 중 객관적 의학검사 수치 외에도 너무나 다양한 사회·심리·경제적 요인들이 작동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실감했다. 업무 적합성 평가는 일할 수 있는 사람을 일하게 하는 데에 쓰여야 한다. 누군가를 더 낙인찍히거나 어우러져 작업하기 어렵게 만들어서도 안 될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용은 절대 녹록치 않다. 이 과정에 더 많은 현실적/철학적 고민이 함께 진행되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