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터6월호_직환의가 만난 노동자 건강이야기] 보이지 않는 노동자들

보이지 않는 노동자들

유형섭 후원회원, 직업환경의학 전문의

 

지난 5월 택배노동자의 적정노동시간 연구를 하며 면접조사를 위해 직접 노동자들과 만날 일이 있었다. 코로나 이전에도 과로에 시달렸지만 코로나 이후 물류량이 대폭 늘면서 과로사의 대명사가 된 사람들이다. 사회적 대화 이후 분류작업에 드는 시간은 줄었지만, 월 평균 7,000여개의 물건을 나르고, 조금이라도 일찍 퇴근하기 위해 쉬는 시간 없이 일을 한다. 일하는 만큼 건당 수수료를 받기 때문에, 더 많이 벌려면 더 많이 일해야 한다.

여기서 딜레마가 생긴다. 적정 노동 강도를 위해 노동 시간을 지정해도, 해야 하는 물량이 있으니 노동 강도는 더욱 집중될 것이다. 노동시간 단축을 위해 집배량을 감소시키면 그만큼 벌이가 줄어들 것이고, 과로로 인한 건강 영향에 대비해 수입을 포기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면접을 진행한 이들 중 자신의 업무량, 즉 수입에 만족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그들의 노동시간은 주 평균 60-80시간이고, 업무량이 많기 때문에 아프거나 일을 쉬어야할 때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확실한 것은 택배노동자들은 계속 죽어나가고 있다는 것이고, 그들의 업무에 조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휴가라는 개념 자체가 저희에겐 없어요. 저는 어머니한테 돌아가실 거면 주말에 돌아가시라고 이야기해요."

자신이 하는 일에서 무엇이 문제인지 제일 잘 아는 사람은 당사자인 경우가 많다. 어떤 부분이 바뀌면 나아질 것 같은지 노동자들에게 물었다. 첫 번째는 낮은 단가이다. 택배 업무를 10년간 해왔지만 택배 단가는 오히려 떨어지고 물류량은 2배 이상으로 증가했다고 한다. 택배 물량이 늘면서 택배업체간 경쟁으로 인한 것이다. 낮은 단가를 유지하는 대신 가격 경쟁력을 높여 많은 업체나 지역을 담당하게 되므로, 경쟁업체 역시 이를 따를 수밖에 없다.

이 와중에 등이 터지는 것은 택배 노동자이다. 대체 인력이 없어, 일을 쉬어야 하는 경우 동료에게 일부 나눠줄 수도 있지만, 물류량이 많으면 그것도 어렵다. 그런 경우 용달차에 배송을 맡기기도 하는데 1건당 2,000원 가량을 주어야한다. 반면 택배 단가는 점점 낮아져 1건당 700-1,000원 밖에 못 챙기는 현실에선, 아파도 일하는 것이 당연해진다.

두 번째로는 당일, 익일 배송과 같은 서비스가 점차 늘어나면서 배송 시간이 빠듯해졌다는 점을 지목하였다. 배송 시한이 정해져 있지 않다면 물류센터에 쌓여있는 물건만 배송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물건들은 항상 빠듯하게 도착하기 때문에, 아침 출근 후 1차 배송을 마친 뒤, 다시 물류 센터에 도착해 있는 물건을 싣고 2차 배송을 나가거나, 동료한테 전달 받게 된다. 결국엔 물류 배송량 자체에도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배송 업계에 해로운 경쟁을 불어넣는 업체들이 있다. 쿠팡, 마켓컬리 등을 필두로 새벽 배송이 활성화되기 시작했으며, 이젠 당일이나 익일 배송이 당연해지고 있다. 특히 쿠팡이 로켓배송이라는 이름으로 상품보관부터 배송까지 한 과정으로 수행하는 풀필먼트 시스템을 구축한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2020년 시행된 쿠팡 부천물류센터 노동자 인권실태조사 보고서와 덕평 물류센터 노동자 노동실태 기초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쿠팡은 생산량을 높이기 위해 시간당 작업 속도(UPH)를 통제하는데, UPH가 낮은 경우 모욕감을 주며 관리한다. 이렇게 생산량은 최대로 높이면서 노동자들에게 적절한 휴식을 제공하지 않았고, 결국 과로사에 집단 감염 사태까지 발생시켰다.

반면 쿠팡은 지난 3월 미국 증시에서 상장을 하며 성공가도에 오르고 있고, 여러 대기업에서는 이러한 모델을 따라가기 위한 구상을 밝히고 있다. 코로나 사태 이후, 물류업계는 나날이 성장하고 있는 반면, 비대면 배송이 늘어나면서 택배 및 배달 노동자들은 더욱더 보이지 않게 되었다.

지난 4월 22일 평택항에서 일하던 고 이선호군의 사망과 비슷한 시기 발생한 한강 의대생 실종 사건이 비교되곤 한다. 모든 죽음이 안타깝지만, 죽음의 관심에도 계급이 있는 듯하다. 산업재해로 인한 사망, 사고가 너무나 자주 일어나 그런 것일까? 이 현저한 관심의 차이는 현재 한국 사회에서의 노동자의 위치를 보여준다.

"예전에는 젊은 사람들이 배송을 하면 돈도 안 되는 일인데 왜 이런 일을 하느냐고 연민으로 바라봤다면, 이제 저희가 버는 돈의 액수를 알고는 많이 벌려고 욕심 부리다 죽는 거 아니냐고 이야기해요."

노동자는 돈 많이 벌려고 욕심 부리면 안 되는 존재인 것이다. 딱 어느 정도를 지켜야하는 사람. 아파트 단지 내에 들어오면 안 되는 사람, 내 눈에 띄면 안 되는 사람이다. 반면 기업이 돈을 벌려는 행동은 당연한 것이고 그들이 성공하면 모두 우러러보며 예전에 투자하지 않았던 자신을 책망한다. 성공한 기업의 노동자가 죽는 것에는 무뎌지고, 그들은 부품으로 취급된다. 이런 인식에 자본가뿐 아니라 이를 두둔하는 사회, 소비자, 심지어 노동자 자기 자신까지 갇히게 된다. 기업은 날이 갈수록 커져가고, 소비자는 점점 편안해지며, 노동자는 점점 더 보이지 않는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동자들이 더 보여야 한다. 제품과 서비스를 보면 그 과정이, 과정 속의 사람이 보여야 한다. 다시, 택배 노동자의 과로로 돌아가 해결책을 고민해보지만 답은 쉽지 않다. 택배 단가를 정상화하고, 근무 시간을 제한해야 한다. 그리고 택배회사는 더 많은 인력을 뽑아야하며, 고객 민원, 배송 문제에 대한 책임부터 휴가, 휴게시간, 건강검진 등 노동환경에 관여해야 한다. 시민들은 자신의 편의 속에 무엇이 감춰져 있는지 알아야한다.

 

 

 

[5월_직환의가 만난 노동자 건강이야기] 노동자에게 재해는 곧 삶의 위기

일터5월호_직환의가 만난 노동자 건강이야기

노동자에게 재해는 곧 삶의 위기

 

산업재해는 크게 사고와 질병으로 나뉜다. 사고와 질병 사이에서 두드러진 차이점 중 하나가 ‘드러남’의 정도일 것이다. 사고는 드러남의 정도가 크기 때문에 산재로 쉽게 인정되는 편이지만 질병의 경우 드러내기가 쉽지 않다. 노동자가 어렵게 산재신청을 하더라도 업무와 발병한 질병 사이의 인과관계를 입증하기가 쉽지 않을뿐더러 입증 책임이 노동자에게 있는 것 또한 큰 부담이다.

업무상 질병의 산재 인정률에 대한 최근 통계를 보면 산재 승인률이 점차 높아지고 있어 얼핏 다수의 노동자들이 산재보상시스템의 혜택을 누리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승인률이라는 것은 알다시피 신청건수에 대한 승인건수의 비율이다. 2017년부터 2019년까지 근골격계 질환에 대한 산재신청건수는 각각 5,201명, 6,375명, 9,524명으로 증가추세는 맞지만 한국에서 직업으로 인해 ‘골병’이 드는 사람이 1년에 과연 만 명도 안 될까. 승인률이 높은 것은 고무적이지만 근골격계 질환을 포함하여 다수의 직업성 질병들이 크기를 추정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노동자 건강을 보호할 책임이 있는 기관들은 여전히 제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고 보기 어려운 상황에서, 최근 근골격계 질환의 업무관련성을 평가한 두 가지 사례를 소개하고 짧게나마 의견을 나누고자 한다.

첫 번째 사례는 좌측 어깨 회전근개 파열로 산재신청을 했던 41세 여성이다. 불승인되어 소송을 진행하였으며 법원 제출 목적으로 업무관련성 평가서를 받기위해 내원하였다. 사실 내원한 노동자가 OO자동차 서비스센터의 전화교환원이어서 선입견이 있긴 했다. 이 노동자가 일한 곳에서는 원래 전화교환원이 2명이었으나 한 명이 퇴사하였고 인원 보충 없이 2016년부터 혼자서 업무를 담당했다고 한다. 그런데 2017년 특정 차종의 리콜사태가 발생하면서 문의가 쇄도하여 노동강도가 증가하였고 이 상황은 1년 넘게 지속되었다. 문제는 전화교환기 자체의 독특한 기능과 어깨를 들어 뻗어가면서까지 퇴사 직원 자리의 전화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본인 교환기에 동시 통화량이 많고 통화보류를 잡아 놓기에도 한계가 오면 옆 전화기로 보류를 넘긴다. 뿐만 아니라 현장에서도 교환기로 전화가 오는 상황인데다 현장으로 넘긴 전화가 일정 기간 응답이 없으면 다시 교환기로 연결이 된다.  

전화기의 재착신 업무와 교환기의 복잡한 기능과 동시에 걸려오는 전화를 대처하는 방식을 고려한다면 응대전화 한 건 당 어깨 사용 1회로 단순하게 계산할 수는 없다. 게다가 옆자리의 교환기는 몸을 기울여 팔을 뻗어서 받아야 해서 어깨 부담이 컸다. 최근 10년간 건강보험 요양급여내역을 봐도 노동강도가 증가한 시점 이후로만 어깨 치료 이력이 확인된다. 오른손잡이인 41세 여성에게 발생한 좌측 회전근개 파열을 자연적 퇴행의 결과로 결론짓기엔 무리가 있는데도 공단은 이러한 이유로 불승인하였다. 다행히 법원에서 업무관련성을 인정하여 1심에서 승소하였으나 공단에서 항소하여 현재 항소심 진행 중에 있다.

두 번째 사례는 요추부 추간판탈출증으로 산재신청을 했던 60세 남성으로 산재 불승인되어 재심사 청구를 위해 내원하였다. 20년을 조선소 배관공으로 일했던 분이라 질판위에서 탈출 정도를 두고 또 발목을 잡혔겠거니 생각했다. 불승인 사유는 MRI 영상에서 팽륜만 있고 신청 상병은 추간판탈출증이기에 관련성을 평가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MRI 영상을 확인해보니 요추 4-5번 사이의 추간판이 명백히 탈출되어 있고 일부는 분리되어 있었으며 치료차 다녔던 병원의 판독소견 역시 동일했다. 물론 재해자의 주치의와 질판위 의사 사이에 영상학적 소견을 두고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이 경우 있는 소견을 없다고 한 것이라 황당했다. 재해자에게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랄 뿐이다.

근로복지공단의 관치행정 혹은 관료주의가 지닌 한계라는 말로도 앞선 두 사례는 납득할 수 없다. 첫 번째 사례의 재해조사 내용은 보기 민망할 정도로 부실했다. 업무환경의 변화와 증가한 업무량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또한 좌측 어깨 사용량을 그저 기계적으로 접근해 계산하였으며 팔을 뻗어 전화를 받는 작업자세가 어깨에 부담이 되지 않는다고 결론 내린다. 부실한 재해조사 자체가 불승인에 기여도가 높아도 공단에 책임을 물을 방법이 없다. 노동자가 시도할 수 있는 것은 재심사 청구가 전부이다. 두 번째 사례의 경우 더욱 황당하다. 추간판 탈출 정도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유무가 바뀌었는데도 그것을 재평가하기 위한 내부적인 프로세스가 전혀 없다.

코로나를 맞은 지 벌써 1년이 넘었다. 노동자를 실질적으로 보호하기 위한 대책들이 나와도 벌써 나와야 했다. 노동자 보호에 더욱 힘써야 하는 상황임에도 그 책임이 있는 기관들은 산재보험이 사회보험임을 망각하고 있는 듯하다. 업무상 질병의 인정기준을 우리가 처한 상황에 맞게 완화하여 선보상하고 차후 재평가를 통해 업무관련성이 낮다고 판단되면 단계적으로 환수하는 방식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실행해야 한다. 이것이 재난지원금보다 훨씬 더 큰 효과로 나타날 수 있다. 팬데믹 이후 모든 영역에서 불평등의 크기는 점차 커지고 있다. 산업재해는 노동자에게 언제나 큰 부담이었지만 코로나 시대의 재해는 노동자에게 삶의 위기나 다름없다. 재해 당사자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위치에 있다면 그것은 개인을 넘어 가족공동체의 위기이다. 더 늦기 전에 노동자 보호에 역할을 부여받은 자들은 더 이상 직무유기를 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영일 회원, 직업환경의학과 전문의)

 

 

[직업환경의사가 만난 노동자 건강 이야기] 반증의 삶 그리고 일 / 2021. 04

[직업환경의사가 만난 노동자 건강 이야기]

반증의 삶 그리고 일 

송윤희 회원, 직업환경의학 전문의

본 글은 영화 현장 노동자의 이야기를 담았으나 비교적 꾸준한 작업이 가능했던 숙련된 경력자의 이야기로, 전체 영화 현장의 노동을 대변할 수 없음을 밝힌다. 현장 노동의 문제와 노동자의 건강을 객관적이고 포괄적으로 들여다보는 것이 〈직환의가 만난 노동자 이야기〉 이지만, 필자는 이 글에서 매우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시각으로 한 동료의 이야기를 담았다. 이는 현재 의사이면서 영화 각본, 감독의 일을 계속 추구하는 사람으로서 노동자이자 ‘친구’ 인 사람의 이야기를 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일터 독자들의 양해를 미리 구한다.

아주 오랜만에 한 ‘영화 노동자’를 만났다. 9년 전 나와 함께 영화 학교에서 졸업작품으로 단편영화를 쥐어짜 만든 촬영감독이었다. 그는 매우 건강해 보였고 잘살고 있는 듯했 다. 그와 같이 양고기를 먹으며 근황을 나눴다. 이제 40대에 들어서는 우리는 영화업에 계속 발을 담을 것인가, 아니면 다른 살 궁리도 같이 강구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나이대가 됐다. 다행히도 그는 계속 촬영을 할 생각인 듯했다. 나는 이미 생계로써 의사로 일하고 있고, 다만 언제 과연 ‘감독 입봉’을 할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다. 그 말인즉슨, 우리 둘 다 아직 꿈의 ‘감독’ 직에 입봉하지 못 했다는 뜻이다. (이 짠한 문장에 침울하지 않아도 된다. 글을 끝까지 읽으면 그 이유를 알게 될 거다.)

우리가 흔히 아는 유명한 영화감독들과 A급 촬영·미술·조명·음악감독들을 영화계에서 는 ‘오야지’라고 부르는데, 그들은 이 분야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이들이다. 오야지 밑에서 노동과 기술을 제공하는 팀원들은 ‘언제까지 영화 일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비정규 노동자들이다. 즉 아직 자기 이름(브랜드)으로 자리 잡지 못한 영화계 노동자들이다. 여전히 꿈을 꾸고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지만 불안한 청년, 아니 중년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한 번 이야기 나누고자 한다.

한참 이야기가 무르익고 배도 불러오자 나는 솔직하게 궁금한 걸 물었다.

“K야 좀 실례일 수도 있는데, 궁금하다. 너 정도 경력이면 페이가 어떻게 돼?”
“회당 45~50만 원 정도요. 드라마랑 영화랑 비슷해요.”

나쁘지 않은 페이인 것 같았다. 그는 현재 제1 카메라맨이다. ‘퍼스트’라고도 하는 이 직무는 카메라 옆에서 계속 수동으로 초점을 맞추는 일이어서, 매우 숙련된 기술과 경력을 요구하는 업무다. 즉 가장 중요한 카메라 포커스 플레이어다. 얼핏 듣기에 일당이 꽤 괜찮은 것 같지만, 촬영이 보통 아침 7시에 집합하고 밤이 되어서야 끝나는 강행군인 걸 생각하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그래도 이제 하루 촬영시간이 딱 정해져 있잖아.”
“네. 영화는 14시간이고요, 드라마는 16시 간이에요.”

나는 조금 놀랐다. 식사 시간을 빼고는 하루 12시간, 14시간의 장시간 노동이었다. 몇몇 기사를 보면 아침에 시작해서 저녁 먹을 즈음에 끝난다던데, 아마 그런 사례는 드물고 아직은 최대 허용 촬영시간을 다 써야 하는 현장이 많은 듯했다. 고(古) 이한빛 PD의 사건 이후, 지난 몇 년간 촬영 현장이 매우 좋아졌다고 해도 간신히 수면시간 정도를 확보해준 데 불과한 것이다.

“그럼 밤에 끝나면 영화사에서 택시비는 다 챙겨주는 거야?”
“아, 다 포함이에요. 식대랑 교통비 다요. 그래서 다음 날 촬영 있으면 근처에서 잠만 자고, 다음 날이 쉬는 날이면 택시 타서 집에 가고 그래요.”

예전에 다른 동료가 한 말이 기억났다. 그도 촬영팀이었는데, 촬영에 들어가면 짧게 군대 가는 느낌이라고 했다. 주변 지인들과 연락도 두절되고, 작품 촬영 말고는 모든 개인적인 일들이 멈추기 때문이라고 그랬다. 힘든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었음에도 다행히 K는 좋아 보였다. 1년에 들어가는 대략 두 개의 작품을 하 는 7~8개월이 아닌 때에는 운동과 자기계발을 한다고 했다. 작품을 할 때도 재미없다고는 했지만, 그래도 살아있는 생생함을 맛보고 있는 것 같았다. 영화 작업의 특성상 주기적으로 실직 상태가 되기 때문에 불안정할 수 있지만, K는 나름대로 그 상황에서 최선의 적응을 한 듯 했다.

요새 그는 조금 시야를 넓힌 것 같았다.

“전에는 영화에만 올인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맞다고, 그래야 한다고. 근데 세상이 넓잖아요. 영화만으로 먹고 살기는 힘든 것 같고...”

나는 그의 생각에 동의했다. 40대 초반에는 영화 현장이 괜찮을 수 있다. 어쩌면 40대 중후반까지도 버틸 수 있겠다. 그러나 50대, 60대 초반까지 현장을 지키는 기술 스태프는 매우 드물다. 아니, 거의 없다. 다들 아마도 K와 같은 나이대에서 여타의 살길을 조금씩 도모하기 시작하는 것 같다.

게다가 코로나 때문에 영화 산업이 많이 죽었다. 영화계의 앞날은 어찌 될지 걱정이 들었다.

“영화계는 어떻게 될지 몰라도, 영상 산업은 앞으로 훨씬 더 커질 것 같아요.”
“그래. 꼭 영화만 해야지, 하는 건 아닌 것 같아. 웹드라마도 할 수 있고, 뭐, 유튜브도 있고, 여러 OTT 플랫폼들이 생겨나니까 계속 버티자.”

5년 뒤 K는 어떤 일을 하고 있을까? 그가 상업 영화 촬영감독으로 입봉하게 된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 그런데 만에 하나 아쉽게도 그 피라미드 오르기에 기회나 운이 닿지 않는다면, 제2의 바람은 그가 영화 현장에서든 어느 분야에서든 충분히 품위 있게 생계를 해결하면서, 동시에 이제껏 쌓은 영화 영상의 기술을 이용해 한 분야에서 자신의 이름(브랜드)을 지니는 것이다.

나는 그의 5년 뒤가 기대된다. 물론 불안정한 영화 노동자이기에 고민도 많을 것이다. 미래에 대한 고민을 10대, 20대를 넘어 40대까지 하는 건 살짝 서글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쩌면 그건 계속 내 인생을 도전하고 노력하고 있다는, 성장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러니 아직 입봉을 못 한 40대 촬영감독과 영화 감독 지망생들의 근황에 침울하지 마라. 우리는 계속 도전한다. 실패해도 또 일어난다. 좋아하고 사랑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

[직업환경의사가 만난 노동자 건강이야기] 노동현장도, 건강검진 실시도 험난한 물류업계 / 2021. 03

[직업환경의사가 만난 노동자 건강이야기]

노동현장도, 건강검진 실시도 험난한 물류업계

김지원 후원회원, 직업환경의학 전문의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스마트폰 쇼핑앱으로 터치 몇 번이면 새벽배송으로 제품을 받아볼 수 있게 되었다. 포털 사이트나 쇼핑몰에서도 주문만 하면 늦어도 다음날이면 문 앞에 택배 상자가 놓여 있다. 코로나 덕분에 가속화된 이러한 일상은 가히 물류의 혁신이라고 부를 만하다. 편리함에 우리 모두 길들고 있다.

물론 모두가 편리해 보이는 혁신 뒤에는 많은 물류 노동자들의 피와 땀이 있다. 미국 나스닥 상장을 추진한 기업의 경우 개별주문 확인과 소포장, 분류, 배송까지 수많은 인력이 상당량 수작업으로 진행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존의 전통적인 대형마트와 백화점 등을 운영해온 대기업의 경우 좀 더 자동화와 전산화가 진행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사실 여기서 혁신이 더 지속된 미국의 아마존 같은 글로벌기업의 경우에는 로봇화, 자동화, 무인화가 이루어지면서 고용유발 증가량보다는 단순 인력 감소량이 커진다고 한다.

분류 업무를 하는 노동자들. 출처: 김지원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했다

군포 복합 물류 센터로 향한다. 최근에는 곤지암, 이천 등 타 물류단지로 물량을 다소 뺏겨 규모가 줄어들긴 했지만 주로 서울 남부의 물류가 집결하는 곳이다. 물류 노동자들은 산재 사고나 근골격계 질환 등에 취약하다고 알려져 있고 최근에는 과로사 문제 등 뇌심혈관계 질환이 대두되기도 하였다.

또한 물류의 연속 선상에서 떠맡게 되는 부수적인 업무가 많고 장시간 야간노동을 하기 때문에 보건학적 관심이 필요한 직종이다. 관련 산업보건제도에 의해서도 야간작업은 특수건강진단의 대상으로 관리되기 시작하면서 일반건강진단뿐만 아니라 특수건강진단을 통해 뇌심질환과 수면장애, 위장관계 증상 등에 대한 정기적인 조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물류센터 인력도급업체들의 건강진단 요청을 받게 되면 각오를 단단히 하게 된다. 패딩 조끼와 핫팩은 필수다. 일단 물류단지 건물들 자체가 윙바디 트레일러와 트럭 등의 박차를 위해 모두 뚫린 구조라 냉난방의 의미가 없고 건물의 안과 밖이 구별되지 않는다. 혈압과 채혈을 하는 장소는 그대로 외부환경에 노출되어 사실상 야외나 다름없고, 그나마 문진실이라고 내어주는 행정사무실이나 창고도 가건물에 가까운 판넬 구조라 전열기구의 도움을 받아 조금 나은 정도이다. 끊임없는 소음과 컨베이어 벨트의 진동은 덤이다.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는 현장 물류 노동자들은 이러한 추위와 더위에 익숙해진 터라 건강검진을 받으러 오게 되면 외려 '안 추우세요?'라고 병원 직원들에게 되묻곤 한다.

이러한 상황이니 특히 혈압측정의 신뢰성을 담보하는데 상당한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뿐만 아니라 많은 인력도급 업체들이 야간 분류작업이 시작되는 오후 5시경에 검진을 요청하는데 노동자들에 대한 체계적인 관리 시스템이 부족한 편이라 건강진단의 기본인 '공복 상태'를 고지받지 않고 오는 노동자들이 많다. 오히려, 몸 쓰는 일을 하는 사람들인데 그때까지 공복을 하라는 게 말이 되냐며 채혈하는 병리사에게 화를 내기도 한다.

의사는 노동자들의 직업력 등을 먼저 확인하기 시작한다. 도급업체들을 통한 간접 고용이 일상인 분야이기 때문에 대부분 1년 미만 근무를 하거나 매년 재계약을 통해 입사와 퇴사를 반복하는 형태로 일하고 있다. 여기에 코로나로 인해 타격이 컸던 분야인 예술계, 관광업 종사자들이 물류센터로 많이 유입되고 있다는 뉴스를 현장에서 체감하게 되었다. 고용환경 변화의 풍랑 속에서 완충 역할을 해주고 있어 다행이다.

건강검진 후 결과 판정을 하다 보면 이들에게서 고혈압, 당뇨 등 만성질환이 발견되는 빈도가 높다. 특히 기존에 일반건강진단을 전혀 강제 받지 않았던 특수고용이나 프리랜서를 전전하던 노동자들이 이러한 물류센터에 적을 두게 되면서 비로소 확진 받는 사례가 많다. 사실 성적표를 읽지 않고 서랍 속에 넣어두는 학생처럼, 본인의 건강진단 결과서도 제대로 읽지 않고 치료나 추가검사를 받지 않는 사람도 많다. 다양한 직장을 전전하다 보면 때로는 좀 더 강한 보건관리 규제의 그물망에 들어왔다 나가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재검사를 사업장에 통보하면 일단 반응은 두 가지다. '멀어서 가지 않겠다. 그날 밥을 좀 먹고 와서 당이 높게 나온 것 같다. 왜 재검이 나오는 거냐. 귀찮다' 혹은 '그분 퇴사했다'이다. 사실 후자의 경우는 추가검사를 강제할 수단이 마땅치 않다. 마침 이 글을 쓰는 중, 근로자 공복혈당 수치가 당뇨 진단수치를 상회하여 확진검사가 필요하나 알아서 판정해달라는 근로자와 사업주의 '요청'이 있다는 내용을 행정 직원에게 전해 받았다. 서두에서 말한 기업 중 한 곳이었고, 마침 해당 회사 물류 직원 과로사 문제로 최근 논란의 중심에 있는 회사였다. 이에 나는 신중하게 단어들을 가다듬어 회사 담당자에게 전달하도록 하였다.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정당한 사유 없이 이 규정을 위반하는 경우, 건강진단을 하지 아니한 사업주의 경우 1천만 원 이하의 과태료가 부과되며(산업안전보건법 제72조 제4항 제5호) 건강진단을 하지 아니한 근로자의 경우도 300만 원 이하의 과태료가 부과됩니다. (산업안전보건법 제72조 제5항 제2호). 귀사의 경우 현재 과로사 문제로 사회적 문제가 대두되고 있으며, 노동자에 대해서 특수건강진단 등의 안전보건업무를 소홀히 하게 된다면 추후 책임문제가 발생할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직환의가 만난 노동자 건강 이야기] 플랫폼 노동 건강 아이디어톤에서 만난 플랫폼 노동자 / 2021.02

[직환의가 만난 노동자 건강 이야기]

 

플랫폼 노동 건강 아이디어톤에서 만난 플랫폼 노동자

 

이진우/회원, 직업환경의학전문의

 

 

 지난 1월 20일 플랫폼 노동 건강 아이디어톤(참여형 포럼)이 열렸다. 연세대 윤진하 교수 연구팀, 사회적협동조합 빠띠와 서울대학교 연구팀이 공동주최한 이 행사는 플랫폼 노동자와 직역별 전문가(산업보건, 보건정책/형평성, 지역사회, 법률/노무)가 직접 참여하여 플랫폼 노동 건강과 관련된 주제에 대해 아이디어를 도출하는 열린 방식의 포럼이다. 이 포럼에서 플랫폼 노동자들의 건강과 휴식을 어떻게 보장할 수 있을지 논의했던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행사가 시작되고 각 팀이 준비한 플랫폼 노동자의 건강관리 방안을 발표했다. 우리 팀은 거점 기반 건강관리 프로그램 제공과 휴식시간 확보방안을 아이디어로 제시했다. 발표에 대해 플랫폼 노동자와 자문단이 각 팀에 방문하여 의견을 제시했는데, 이런 의견 수렴을 통해 각 팀의 건강관리 방안을 더욱 구체화하고, 현실성을 높일 수 있었다.
  가사노동자를 힘들게 하는 근본 지점에는 가사노동에 대한 낮은 사회적 인식이 있었다. 잠깐 앉아 쉬면 CCTV 감시로 확인되어 불만 전화를 받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한다. 가사노동 중에는 식사가 어려워 간식을 들고 다니면서 놀이터에서 끼니를 때우게 된다고 한다. 최근 활발해진 플랫폼 기반 가사노동의 이용약관에 노동자들의 휴식시간이나 권리를 명시하는 방안도 필요하고, 가사노동의 서비스를 이용하는 고객에 대한 캠페인도 중요할 것이다.
  가사노동을 하는 노동자 대부분이 중장년층 여성이고, 신체적, 정신적 질환을 호소하는 경우도 많다. 가족들에게 일한다는 사실을 알리지 못하는 경우도 상당수여서, 관련된 질병을 가족과 상의하기도 어려운 실정이다. 얼마 전 영등포구 보건소에서 50대 여성 건강 교육을 진행했는데 반응이 좋았다고 한다. 가사 노동자들은 본인이 일하는 반경에 이동노동자쉼터가 없다면 이동 중간에 이용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또한 현재의 노동자 쉼터가 대리운전노동자나 배달노동자 중심, 남성 중심으로 운영된다고 생각하는 분이 많아 가사노동자의 이용률이 높지 않다. 저녁 시간을 이용해 프로그램을 진행한다면 참여율이 높을 것이라는 의견이 나왔다. 정신적 스트레스도 높은 편이라 이에 대한 상담도 진행한다면 좋겠다는 의견을 들었다.

 

▲   지난 21년 1월 20일 플랫폼 노동 건강과 관련된 주제에 대해 아이디어를 나누는 <플랫폼 노동 건강 아이디어톤(참여형 포럼)>이 열렸다.

 

  대리운전 노동자와도 미팅이 진행되었다. 현재 이동노동자쉼터 모델은 대리운전 노동자의 휴식공간으로 마련된 측면이 크다. 앞으로는 휴식 공간으로의 활용을 넘어, 정기적인 건강 관련 프로그램을 배치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왔다.
  서울 서초의 이동노동자 쉼터에서는 근로자건강센터와 연계해 월 1회 6~8시에 운동관리사 지원 프로그램이 운영된 바가 있었고, 상당히 호응이 좋았다고 한다. 카카오대리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대리운전 노동자들은 직무교육, 기초소양교육, 자동차기능, 안전보건 관련 교육들을 온라인을 기본으로 오프라인과 병행해서 진행하고 있다.
  추가적인 대면 교육이나 건강관련 프로그램이 마련된다면 의미가 있을 것이라는 의견이 있었다. 건강관리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쉼터와 연계기관을 더욱 확대하고, 이를 널리 알릴 수 있는 채널도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왔다.
  배달노동자는 쉼터의 존재는 알지만 워낙 개수가 부족해서 이용이 활발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점심시간과 저녁시간 사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시간에 건강관리 프로그램을 배치하는 방안에 미팅에 참여한 노동자는 긍정적인 답을 선뜻하지 않았다.
  이동거리가 너무 길다는 것이다. 바우처 등을 통해 개별 배달노동자가 근골격계 치료를 받거나 건강검진을 하는 방식이 현실성 있다는 의견이 나왔다. 이들에게 건강관리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은 단순 건강관리 측면을 넘어서, 플랫폼으로 분절화된 노동을 모이는 공간으로 만드는 측면도 있다.
  우리팀은 찾아가는 플랫폼노동자 건강상담소 운영을 최종안으로 발표했다. 이동노동자쉼터와 시청과 구청 등의 시민이용공간을 활용하여, 플랫폼 노동자의 건강을 지속적으로 관리하자는 것이다. 주차별로 건강관리 운영프로그램을 기획했다. 1주는 건강진단 및 심리상담, 2주는 건강교육, 3주는 건강/심리 상담 및 운동치료, 4주는 법률지원로 구성한다. 직종별 맞춤형 프로그램을 주1회 운영하되, 배달노동자는 3~4시, 대리운전노동자는 4~5시, 가사노동자는 5~6시로 정했다.
  지원기관은 경기도 우리회사건강주치의 사업을 하는 노동자건강증진센터 및 근로자건강센터이다. 이용자가 참여하는 쉼터 운영위원회를 통해 프로그램 및 전체 운영방안을 개선하고, 지역사회 차원에서 플랫폼 노동 개선을 위한 거버넌스를 형성하고자 했다. 쉼터의 위치 정보와 운영 중인 프로그램 정보를 제공하고, 온라인 자가진단 도구를 통해 상담과 연계를 도모한다.
  휴식시간 보장 방안을 위해서 가사노동자의 경우에는 이용약관 명시 및 대시민 캠페인을 제시했다. 배달노동자는 작업건수에 비례해 휴식수당을 보장하는 방식을 제안했다. 1건에 200원의 휴식수당을 도입해 1일 20건 정도 배달 시 4천원 정도가 적립되고, 배달노동자가 휴식권을 사용하면 20분간 콜을 받지 않고 4천원을 수입으로 제공받는다. 또한, 노동자가 고객을 평가하는 상호 평가 시스템 도입도 제안했다.
  다른 팀들은 플랫폼 노동자 전용 온라인 마당으로 소통과 교육, 안전, 보건 서비스를 제공하는 방안, 플랫폼 노동자의 건강권 향상을 위한 건강증진부담금 부과 방안, 개방형(Open-API) 플랫폼 종사자 보호 앱을 기반으로 온라인 교육, 정보 전달체계구축, 과로방지(휴식계산 및 알림), 차량 정비알림, 온라인 상담체계 구축, 플랫폼 사업주 및 종사자 인센티브 방안 등 다양한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포럼 결과물들은 연구진들의 추가 연구에 디딤돌이 될 예정이다. 플랫폼 노동자가 직접 참여하는 건강관리방안이 확산되고 실질화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 사단법인전국배달라이더협회 2021.04.22 17:07 ADDR 수정/삭제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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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환경의학 의사가만난 노동자건강이야기] ‘다음 생일까지 살아있을 수 없다’는 말

[직업환경의학 의사가 만난 노동자건강이야기] ‘다음 생일까지 살아있을 수 없다’는 말

▲   원인 모를 가슴 통증에 환자가 찾아왔다.

"며칠 전부터 숨이 차고 힘들어요. 왼쪽 가슴이 너무 아파요."

진폐 진단을 받고, 우리 병원 외래로 2~3개월에 한 번씩 와서 엑스레이(X-ray) 검사를 하고, 약을 타가시는 분이었다. 굉장히 마른 몸을 가지신 분으로, 늘 볼이 움푹 파여져 있었다. 언젠가 한 번은 '식사는 제때 챙겨서 하세요?'하고 여쭤본 적이 있었는데, 영 입맛도 없고 해서 하루에 밥 한 공기를 드실까 말까 한다고 하셨다.

엑스레이를 찍어보자고 했다. 잠시 후 컴퓨터 모니터에 한쪽 폐에 액체가 가득하게 찬 사진이 떴다. 6개월 전에 외래 방문하셨을 때 흉수(흉막강, 흉벽과 폐 사이 공간 내 고인 액체로 정상적으로도 소량의 흉수는 존재하지만, 세균성 폐렴, 결핵, 악성 종양, 심부전, 신부전, 간경변증에 의해 그 양이 병적으로 증가할 수 있음) 같은 건 전혀 없던 분이었는데, 갑자기 흉강(인간 및 포유류의 가슴 안 공간으로 심장, 대혈관, 폐, 식도 등의 장기가 위치하는 곳)의 절반이 넘는 공간에 흉수가 찼던 거였다.

환자분을 입원시키고 그날 오후, 바로 흉수 천자(예리한 의료기구로 신체를 찔러 체액 또는 세포조직을 채취하는 것. 검사 또는 치료 목적으로 시행)를 시도했다. 일단 흉통이 너무 심해서 잠을 자거나 누워 있을 수도 없는 정도였기에, 물리적으로 액체를 제거해 통증을 완화해야만 했다.

나는 흉강으로 바늘을 넣었고, 액체가 졸졸 흘러나왔다. 진한 붉은 색이었다. 혈성 흉수의 가장 흔한 원인은 외상이다. 흉강 내의 동맥이 파열되었거나 하는 경우에 발생한다. 환자분께 여쭤봤다.

"최근에 어디 다치시거나, 넘어지신 적 있으세요?"
"없어요. 그냥 요즘 들어 너무 아파서 온종일 누워 있기만 했어요."

진폐증 환자에게서 다음으로 의심할 수 있는 건 폐암이나 중피종이다. 마음이 싸해졌다. 내일 오전, 모든 검사의 결과가 나왔을 때 난 이분에게 무슨 말을 하고 있어야 할까. 뽑은 흉수로 세포병리 검사를 나가고 CT를 찍었다. 진단명은 '악성 중피종'이었다.

흉수는 정말 부지런히 차올랐다.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고작 하루 동안 전날 뽑은 흉수만큼 새로운 흉수가 또 찼다. 통증이 다시 시작되었다. 일단 흉수 천자를 다시 하기로 했다. 일정량을 뽑고 나면 진단명을 알려드려야겠다고 생각하며 마음을 가다듬고 있었다.

그때, 환자분 휴대폰이 울렸다. 병실이 워낙 조용해서 통화 내용이 휴대폰 너머로 들렸다. 어린아이 목소리였다.

"할아버지! 생일 축하해! 언제 집에 와?"
"응 할아버지가 좀 아파."
"괜찮아, 빨리 나아서 내년엔 나랑 할아버지 생일날 놀러 가자."

하필 그날이 환자분 생일이었던 것이다. 흉강에 바늘 넣고 있던 손에 기운이 빠지는 것 같았다.

악성 중피종은 흉막에 발생하는 종양으로, 초기에는 증상이 거의 없다가 진단되는 시점엔 이미 질환이 상당히 진행된 상태다. 5년 생존율이라는 것이 크게 의미 있는 숫자로 기록되지 못할 정도로, 최초 진단부터 사망까지 평균 1년 정도의 생존 기간을 보인다. 이 말을 어떻게 전달해야 할까.

악성 질병으로 찾아온 노동자의 '일'

▲   노동자들이 어떤 물질에 노출된 것인지도 모른 채 노동을 한다. 최소한 분진에 노출된 바 있었던 노동자 스스로가 어떤 질병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지, 어떤 부분에 대해서 정기적으로 병원을 방문해야 하는지는 알아야 한다.

"예전에, 철거 일하신 적 있다고 하셨던가요?"
"건설 현장에서 하스리(돌 조각을 다룬다는 뜻으로, 표면이 매끄럽지 못한 경우 이를 깎아내는 일)가 제 일이긴 했어요. 손 모자라면 철거도 같이 하고, 저쪽에서 사람 없다고 하면 같이 돕고. 보수 공사한다고 하면 천장 떼고 거기에 또 시멘트 바르고 그거 갈아내고 하면 어휴, 1m 앞도 안 보여요."

환자분 말에 따르면, 현장에서 일하던 그 당시에는 보호구에 대한 개념도 희박해서 노동자들도 보호구를 딱히 요구하지 않았고, 간혹 마스크가 지급된다 해도 일하다 숨이 답답해져서 멀리 던져놓기 일쑤였다.

그렇게 몇 주 동안 하루종일 뿌연 공기 속에서 일하고 나면 며칠씩 까맣거나 붉은빛이 도는 가래가 나왔다. 유독 목이 칼칼한 날엔, 동료들과 '기름칠 좀 하자'며 돼지 껍데기를 사 먹는 게 전부였다. 그리고 다음 날 또 같은 현장에서 같은 방식으로 일했다.

어디서 얼마나 근무하셨던 건지 파악할 수는 없지만, 아무래도 석면에 노출되셨던 것 같았다. 악성 중피종의 가장 큰 위험인자는 '석면'으로 알려져 있다. 전체 악성 중피종 사례의 80%는 석면 노출력이 있을 정도로 큰 상관성을 보인다.

하루라도 기다렸다가 말씀드려야 하나 고민했지만,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분께 그것 또한 잘못된 일인 것 같아 조심스럽게 질병과 앞으로의 예후에 대해 설명드렸고, 그 원인으로 예전에 작업하실 때 석면에 노출되었던 것이 아닐까 의심된다고 말씀드렸다.

환자분이 물으셨다. "저 그럼 반년은 살아요?" 무어라 대답을 드릴 수가 없었다. 현장에 투입된 노동자들은 석면이 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거기서 생길 수 있는 질병이 얼마나 빠른 속도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지도 들어본 적이 없다.

"석면이라고 들어는 봤죠. 지하철역인가에 있다고 뉴스 나올 때나 들어봤지. 그거 말해주는 사람 아무도 없었어요."

1980년대에 이미 석면을 금지한 유럽의 국가들과는 달리, 우리나라는 1970년대 성장한 석면사업이 1990년대에 최고기를 맞았다. 우리나라에서 석면 사용이 금지된 것은 2009년으로, 고작 10년이 지났다.

석면으로 인한 중피종의 잠복기간이 30년이니, 우리나라 악성 중피종 발생률은 2040~2045년 무렵에 최고치를 보일 것이라는 보고도 있다. 본인이 위험에 노출됐던 적이 있었는지조차 모르다가 어느 날 갑자기 6개월 시한부를 선고받는 사람들이 계속 늘어날 것 같다.

지난 노출력을 바꿀 방법은 없지만, 최소한 분진에 노출된 바 있었던 노동자 스스로가 어떤 질병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지, 어떤 부분에 대해서 정기적으로 병원을 방문해야 하는지는 알아야 한다. 노출력이나 근무력이 명확하게 증명하지 않더라도 석면 노출이 의심된다면, 정기적으로 스크리닝 받을 수 있는 별도의 방법도 마련되어야 한다.

의학적으로 예방이 가능한 병은 아닐지라도, 이렇게 어느 날 갑자기 청천벽력같은 진단을 받고, 어느 날 갑자기 준비도 없이 세상을 떠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직업 환경의학 의사가 만난 노동자 건강 이야기] 한 명의 직환의가 배출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산재 피해자가 있을까? / 2020.12

[직업 환경의학 의사가 만난 노동자 건강 이야기] 

 

한 명의 직환의가 배출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산재 피해자가 있을까?

 

정지윤 / 상임활동가 

 

▲  의사에게 노동자는 치료를 받는 환자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여러 재해 사례를 제공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렇게 의사들 역시 노동자를 통해 배워간다.

 

A씨는 급성골수성백혈병 환자였다. A씨는 다른 병원에서 급성골수성백혈병을 진단받고, 치료를 위해 내가 근무하는 병원 혈액내과에 입원 중이었다. 나는 백혈병 발병의 직업관련성에 대하여 파악하기 위해 A씨를 처음 만났고, 무슨 일을 하시냐고 물었다.

A씨는 화학과를 졸업해 반도체 제조업체의 재료합성연구팀에 소속되어 일하고 있었다. 어떤 물질을 취급하셨냐는 질문에 수없이 많은 취급물질을 읊어 내렸다. A씨는 유기화합물을 다양한 유기용매를 이용해 정제하는 과정을 해 왔으며 처음 연구실이 세팅되는 단계에서 근무했기 때문에 환기시설이나 공정 격리가 잘 이루어지지 않았었다는 진술에 따라 직업관련성이 있을 것으로 보고, 산재 신청 절차에 대해 설명해드렸다. 같은 사업장에서 일하고 있는 아내가 육아휴직을 쓰지 못하게 될 것 같아 산재 신청을 고민하고 있다는 말에, 지금은 치료에 전념하시고 퇴원하신 후 천천히 결정하시고 필요하시면 혈액내과 외래 방문 때 직업환경의학과 외래에 들러 업무관련성 평가를 요청하셔도 된다고 안내해드렸다.

두 번째 A씨의 소식을 접한 것은 그해 말, 그간 보아온 급성골수성백혈병 환자들을 리뷰하면서였다. 퇴원 후 우리 과 외래에 방문해 업무관련성평가서를 받아갔고, 산재신청을 했다는 이야기가 적혀있었다. 업무상재해가 발생하면 노동자는 재해자로서 근로복지공단에 요양급여 신청서를 제출하게 된다. 근로복지공단에서는 업무관련성을 평가하기 위한 전문 조사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전문조사기관(직업환경연구원 혹은 산업안전보건연구원)에 역학조사를 의뢰한다. 역학조사가 완료되면, 전문조사기관 내부에서는 해당 역학조사가 잘 이루어졌는지 심의하는 절차를 거친다. 그리고 이렇게 검토된 역학조사보고서는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로 보내져 최종적으로 업무상 재해 여부가 결정되는 것이다.

A씨에게 우리 과 외래에서 발급한 업무관련성평가서는 A씨가 산재신청을 할 때 첨부할 수 있는 자료로서, 단지 첫 단추를 함께 꿰는 일이었다. 나는 모니터 너머에서, A씨가 앞으로 남은 지난할 지도 모르는 산재처리과정들을 지나 완치 후 다시 건강한 삶을 누리시기를 응원했다. 급성골수성백혈병환자들의 직장 복귀에 대한 논문들을 찾아보면서 다음에 만날 때는 업무적합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 좋겠다는 생각도 어렴풋이 해보았다.

세 번째 A씨의 이야기를 접하게 된 것은 역학조사 평가위원회에서였다. 평가위원회에 상정된 다른 역학조사 사례의 보조위원으로 참여하고 있어 A씨의 역학조사 보고서를 접하게 된 것이다. A씨는 역학조사 진행 도중 조혈모세포 생착에 실패해 사망하셨고 아내분이 절차를 진행하고 계셨다. 역학조사에서는 처음 혈액내과 병동에서 만나 내가 받아 적었던 물질들이 어디에서 얼마나 쓰였는지, 원료 물질을 반응시키는 동안 어떤 물질이 얼마나 발생할 수 있는지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 물질들에 A씨가 얼마나 노출되었을지에 대한 추정이 이어졌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미 알려진 급성골수성 백혈병의 위험인자에 대한 재해자의 노출 수준을 고려했을 때, 업무관련성은 높지 않은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이 결과는 업종, 담당업무 및 나이, 성별을 제외한 개인정보가 식별불가능하게 처리된 채 산업안전보건연구원 공식 홈페이지에 재해사례로 게시되며, 어떤 논리로 업무관련성을 평가했는지 간단히 기록된다. 이후 역학조사보고서원본은 질병판정위원회로 넘어가, 최종적으로 업무상질병판정여부를 판단 받는다. 그리고 그 결과는 본인, 법적 대리인이 아니라면 알 수 없고, 질병판정위원회의 업무상질병판정 사례집이나 근로복지공단 통계에 개인식별이 불가능한 형태로 게시된다.

병동에서 환자로 만난 A씨가 노동자로서 산재를 신청한 후 역학조사를 거쳐 보호자에게 승인여부가 전달되었을 과정들을 계속 따라가면서, 나는 각 과정에서 내가 직업환경의학과 의사로서 할 수 있는 일들이 무엇인지를 거듭 고민하게 되었다. 직업환경의학과 레지던트로서 내가 만나는 환자들은 일했거나, 하고 있거나, 앞으로 일할 사람들이다. 때로는 유족들이나 보호자의 서술로 간접적인 만남을 갖기도 하고, 혹은 의무기록 서류 뭉치로 돌아가시기 전의 긴박했던 기록들을 접하기도 한다. 수많은 노동자가 직업환경의학과 의사 한 명을 트레이닝 하는데 많은 노고를 나누고 있는 셈이다. 다치거나 병들지 않고, 죽지 않는 안전한 일터를 만드는 한편에는 항상 환자가 된 노동자들이 있다. 앞으로도 그분들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배우며 일하고 싶다.

[직업환경의사가 만난 노동자 건강이야기] 꿀잠 이야기 / 2020. 09

[직업환경의사가 만난 노동자 건강이야기]

꿀잠 이야기

권종호 회원, 직업환경의학과 전문의

 

이불 밖은 위험해

어느 날 저녁 여느 때처럼 7살 딸과 5살 아들이 자기들 방에서 잠자리에 들었다. 둘이 장난도 치고 수다도 떨다가 몇 번 주의를 받고서야 잠이 들곤 하는 게 일상이라 그날도 그러려니 하고 아이들 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는데 갑자기 5살 아들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나~~ 누나 때문에 나 꿀잠 못 자잖아~~”

적당히 주의를 주고 잠들게 하려던 나와 아내는 5살 인생의 뜬금없는 꿀잠 욕심에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어른들의 키득거림과는 달리 동생의 꿀잠을 위한 누나의 진지한 배려가 있었던 것인지 아이들 방은 이내 조용해졌고 누나 동생 모두 행복한 꿀잠에 빠져들었다.

아이들이 잠든 시간에도, 이불 밖 세상은 불이 꺼지지 않는다. 바로 옆에 있는 우리 아파트 경비실부터 골목 곳곳에 자리 잡은 편의점, PC방을 거쳐, 소방서, 경찰서, 병원을 넘어 밤새 돌아가는 공장들, 물류센터들, 이 많은 곳들을 사이로 부지런히 움직이는 배달 노동자까지... 밤에는 꿀잠을 자는 것이 당연한 아이들에게는 생경한 세상일 것이다. 실제로 특수건강진단을 하며 만나는 야간 작업 노동자들의 잠 이야기는 아이들의 공감 능력을 훨씬 넘어서는 힘든 이야기이다.

정상 수면 패턴과 수면 유지 장애

야간 작업 노동자들의 수면 상담을 진행하면서 자주 활용하는 그래프이다. 정상 수면 상태에서 깊은 잠 얕은 잠이 수 차례 반복되는 것을 잘 보여주는 그래프인데 이게 정상 수면이라고 하면 많이들 놀란다. 보통 깊은 잠 한 번으로 잠이 끝나는 줄 알고 있는데, 실제로는 본인도 모르게 잠에서 깨거나 꿈을 꾸거나 하는 얕은 잠과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의 깊은 잠을 반복하며 신체적 정신적 휴식을 번갈아 취하고 한 번의 수면이 끝난다.

정상 수면 패턴

이러한 수면의 과정이 잘 이루어지면 한 번의 꿀잠을 잔 것처럼 수면이 이루어지지만 그렇지 않고 과정 중 나타나는 얕은 잠이나 꿈수면 중에 자주 깨고 다시 잠들지 못하게 되면 수면의 질이 매우 떨어지게 된다. 흔히들 불면증이라고 하면 잠들기 어려운 형태(입면 장애)만 생각하기 쉬운데 실제로는 잠이 들었다가 너무 자주 깨거나 다시 잠들지 못하고 아침까지 뜬 눈으로 지새는 형태(수면 유지 장애)의 불면증이 두 배 가량 더 많고 심한 불면증의 경우 이 둘을 모두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수면 유지 장애는 일반적으로도 흔하게 경험한다. 기분 나쁜 꿈 때문에 새벽에 깨거나 어렴풋이 깨는 느낌이 들어 시계를 보니 새벽 3시이거나, 잠깐 화장실 가느라 깬 잠이 이런저런 스트레스 때문에 이어지지 않는 경우도 있고, 코골이 때문에 수면 무호흡증으로 자주 깨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 중간에 깨는 듯한 느낌이 들더라도 몇 시인지 확인하려 시계를 보거나 굳이 눈을 뜨지 말 것, 실제 불면증이 아니라 원래 정상적인 수면의 한 과정으로 얕은 잠이 반복되는 것이니 스트레스 받지 말고 편안히 자신의 호흡에 집중할 것, 높은 온도, 밝은 조명, 소음, TV, 핸드폰 같은 수면에 방해되는 요인들을 최소화할 것 등을 권고하기도 한다.

낮잠은 밤잠이 될 수 없다

야간 작업 노동자의 수면 장애에서도 이러한 정상 수면 과정에서의 얕은 잠 패턴을 잘 알고 넘어가거나 일반적인 수면 환경을 개선하는 것으로 도움이 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낮 시간의 생체 리듬은 깊은 잠을 유지할 수 없도록 프로그램되어 있기 때문에 낮잠은 근본적으로 편안한 잠이 될 수 없다. 실제로 10년 이상 고정 야간 근무를 하며 낮밤을 바꿔 생활하더라도 수면의 질이 더 나빠질 뿐 적응되지 않는다는 연구들도 있고, 특수건강진단을 통해 만나는 야간 작업 노동자들의 이야기도 별반 다르지 않다. 낮잠을 잘 수 밖에 없는 야간 근무 주간은 힘들어도 그냥 버티는 거지 편안한 잠을 기대할 수는 없다.

낮잠은 길어야 네시간, 아무리 깜깜하게 해놓고 귀마개를 해도 저절로 깨요’, ‘야간 출근 전에 한번 더 자려고 해도 잠이 안와요’, ‘심장이 요동을 치며 한번 깨버리면 다시 잘 수 없어요’, ‘야간 있는 주는 주중에 겨우 버티다 주말에 몰아서 자요’, ‘낮잠으론 제대로 못 자니 여기저기 아프고 그러니 더 못자고 악순환이에요

늘어가는 야간 노동, 잃어버린 꿀잠의 가치는?

얼마 전 한 TV 프로그램에 나온 외국인은 몇 년간의 한국 생활이 그립다고 했다. 돌아간 고국에서는 저녁만 되어도 문 여는 가게가 없다며 새벽에도 배달 음식을 시켜먹고 밤새 PC방과 노래방에서 놀 수 있는 한국은 최고의 나라라고 했다. 불과 1~2년 사이에 이제는 저녁에 인터넷 주문을 하면 새벽 배송까지 해주는 나라가 되었으니 더 좋은 나라가 되었을까?

다시 한번 이야기하지만, 낮잠은 마지못해 잠들 뿐 밤잠만큼 편할 수 없다. 늘어난 야간 노동의 양만큼, 우리가 누리는 편리만큼 누군가의 꿀잠은 사라졌다. 그런데 밤 시간을 활용하는 외연의 확장으로 일자리를 만들고 생산성을 높여준 만큼, 잃어버린 건강한 수면의 가치도 평가되었을까? 그만큼 야간 작업 노동자는 보호받고 있을까? 한국의 밤이 활기찬 것은 그만큼 야간 노동을 쉽게 생각해서는 아닐까? 늘어난 야간 노동만큼 이제는 더욱 중요해진 꿀잠의 가치를, 함께 고민할 수 있는 사회적 배려가 절실하다.

[직업환경의사가 만난 노동자 건강이야기]석면, 그 끝나지 않는 고통 / 2020. 08

[직업환경의사가 만난 노동자 건강 이야기] 

석면, 그 끝나지 않는 고통

곽경민 후원회원, 직업환경의학전문의

지난 겨울 외래 진료일에 호흡기 내과 외래에서 산재 신청 관련 문의 및 환자 의뢰가 와서 진료를 보았다. 보호자인 아들과 같이 온 환자는 80세가 넘은 분이고, 조직검사에서 흉막의 악성중피종을 진단받았다고 했다. 환자는 1980년부터 15년 동안 자동차 개스킷을 생산하는 제조업에서 프레스 업무를 했다고 하였고, 회사는 예전에 폐업했고, 석면을 사용했는지 여부를 묻는 질문에 본인도 잘 모르겠다고 했다.

악성중피종은 대부분 석면에 의해 발생하는 암이며, 잠복기가 30~40년으로 길다. 또 석면은 내구성, 내열성, 내화성이 뛰어나 과거 엔진 개스킷의 재료로 많이 사용되었기에 환자의 직업력을 근거로 하였을 때, 석면에 노출되었을 개연성과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나는 의사 소견서를 작성해 근로복지공단에 업무상질병을 신청하라고 안내해줬다. 고령으로 아들에게 부축되어 나가는 환자의 뒷모습을 보면서, 앞으로 산재를 신청한 이후 기약 없는 기다림의 시간을 보낼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좋지 않았다.

석면은 국제암연구소(IARC)에서 지정한 1군 발암성 물질로 석면폐증, 악성중피종, 폐암 등의 질병을 일으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석면은 가격이 저렴하고, 내열성, 절연성, 내마모성, 내열성 등이 뛰어나, 건축재, 마찰재, 방직재 등에 1980~1990년대 중반까지 널리 사용되었다. 한국에서는 2009년 모든 종류의 석면 제조·사용·수입이 금지되었지만, 긴 잠복기(15~40년)로 인하여 폐암, 악성중피종, 석면폐증 등의 석면 관련 질환이 계속 발생하고 있다.

이러한 석면 관련 질환 피해자 중에서 건설, 조선소, 자동차 수리 등 직업적으로 석면을 사용했던 근로자들은 산재법 등 관련법에 적용되어 산재보상을 받을 수 있다. 또 석면을 사용한 직업력은 없으나, 석면 광산이나 공장 주변에 살면서 환경성 요인으로 인해 발생한 석면질환 피해자들은 2010년 제정된 석면피해구제법에 의해 보상을 받을 수 있다. 즉, 직업적 요인에 의한 석면질환 보상은 산업재해보상법, 환경적 요인에 의한 석면질환 보상은 석면피해구제법에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보상을 받는 사람들의 수는 두 가지 제도 간의 큰 차이를 보인다. 석면피해구제법이 시행된 2011년 이후 통계를 비교하였을 때, 2011년부터 2016년까지 산재법상 업무상 질병으로 최초 요양승인이 되었던 사람의 수는 85명에 불과하지만, 석면피해구제법에 의해 보상을 받은 사람의 수는 석면피해 보상이 1697명, 특별유족 보상 637명으로 산재법으로 보상되는 경우와 비교하여 그 수가 훨씬 많다.

우리와 비슷한 환경성 석면피해를 보상하는 구제법이 시행된 일본에서는 2006년 새로운 석면피해구제법이 시행된 이후 보상을 받은 사람은 모두 3230명이었고, 2007년에는 1057명이었다. 한편 산재법 등으로 업무상질병을 인정받은 사람은 2006년 1851명, 2007년 1057명으로 환경성 석면 피해와 직업적 노출로 인한 업무상 질병으로 인정받은 수가 비슷한 수준이었다. 즉 한국의 경우 산재법으로 인정되어야 할 석면 관련 질환자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석면피해구제법에 의해 인정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유추할 수 있다. 산재법상 석면 관련 업무상 질병 인정 기준이 까다롭기 때문이다.

석면 질환의 긴 잠복기, 과거 사업장 정보의 부재로 인한 노출 정보를 확인하기 어려운 것을 고려할 때, 임상적인 석면노출의 징후가 없다면 역학조사를 통한 석면 노출의 입증이 쉽지 않다. 이러한 이유로 산업재해로 보상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석면피해구제법에 의해 보상을 받고 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실제로 석면피해 구제 신청자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직업적 석면 노출력을 가지고 있다.

한국의 산재법과 석면피해구제법의 보상액 차이는 상당히 크다. 통상 석면피해구제법은 산재보상으로 받을 수 있는 수준의 10~20% 정도로 위로금 정도에 불과하다. 석면폐증, 악성중피중, 폐암 등 석면 관련 질환들이 치료가 사실상 힘들고, 환자들이 끔찍한 고통 속에서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 직업병으로 인정을 받느냐, 환경성질환으로 인정을 받느냐는 천양지차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현재 산재보상보험법에서 석면관련질환에 대한 인정기준과 심의 절차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 적어도 대부분 석면에 의해서 발생하는 악성중피종의 경우는 과거 석면 노출력을 세세하게 따지지 않고, 조직검사에서 확진이 된다면, 역학조사 없이 신속히 심의하여 인정해야 한다. 또한 방사선학적으로 진단이 어려운 석면폐증의 경우에도 현재의 흉부촬영 소견에 의한 판정이 아닌 고해상도전산화단층촬영(HRCT)를 통한 진단과 심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석면 사용이 금지된 지 10년이 넘었지만, 긴 잠복기로 인해 석면 관련 질환은 계속 발생하고 있다. 산업적으로 석면을 다량으로 사용했던 시기를 고려했을 때, 아직 본격적으로 석면 관련질환들이 발생하는 정점에 이르지 않았고, 향후 20년은 석면 관련 질환들의 발생이 증가할 것으로 예측된다. 아직 끝나지 않은 석면 사용 노동자들의 위험과 고통을 산재법과 근로복지공단은 더이상 외면하지 않길 바란다. 

[직업환경의사가 만난 노동자 건강 이야기] 스테인리스 식기 제조 노동자에게 왜 급성 진폐가 발생했는가? / 2020.07

[직업환경의사가 만난 노동자 건강 이야기] 

 

 

스테인리스 식기 제조 노동자에게 왜 급성 진폐가 발생했는가? 

 

 

김대호 / 근로복지공단 직업환경연구원 연구위원 

 

 

오랫동안 스테인리스 그릇을 가공하는 공장에서 일하다가 돌아가신 어느 노동자의 역학조사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46세 때부터 22년 4개월간 스테인리스 그릇을 가공하는 공장에서 분말 세척 및 포장작업을 한 후 대학병원에서 '과민성 폐렴'을 진단 받고 근로복지공단에 산재신청을 한 노동자가 있었다. 신청인은 공장에서 화재가 발생하였는데, 화재 진압 후 공장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그을음에 노출되어 폐질환이 발생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산재신청 후 직업환경연구원에 업무상 질병 역학조사가 의뢰되어 자료를 검토해 보니 흉부 영상에서는 과민성 폐렴에 합당하였지만, 조직검사 결과에서는 과민성 폐렴의 증거가 없었다. 20년 이상 근무하였다는 업체는 스테인리스 식기류의 광택만 전담하는 업체로 산재 신청인(아래 신청인)은 미상의 분말로 세척하거나 포장을 하는 일을 하였는데, 면담하려고 유선 연락을 해보니 신청인은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사망원인이 과민성 폐렴?

하는 수 없이 홀로 남은 유족인 남편과 함께 신청인이 오랫동안 일을 하였던 공장을 방문하였는데, 조그만 공장에서는 산화알루미나 크림을 식기에 바른 후 나무원단에 고속으로 마찰을 시키는 방식으로 광택을 내는 작업을 여러 노동자가 하고 있었다. 신청인이 하였던 일은 광택이 마무리된 식기를 미지의 분말을 이용해 용기 내부를 닦아내는 작업이었다. 그런데 국소배기장치가 있었지만, 미지의 분말이 주변으로 날리고 있었다. 사업장 담당자에게 미지의 분말이 뭔지 물어봤지만 잘 모르고 있었고, 산화알루미늄 가루라고만 추정하고 있었다.

직업환경연구원에서 이를 채취하여 분석(X선회절분석기)을 해보니 결정형 유리규산인 석영과 크리스토발라이트가 각각 12%, 9% 함유되어 있었고, 나머지 성분은 대부분 비결정형 물질이었으며, 다른 분석(X선형광분석) 결과에서는 SiO2 78.0%, Al2O3 6.76%, Fe2O3 6.23%, K2O 3.06%, CaO 1.58%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즉, 산화알루미늄 가루는 아니었다.

대학병원에서 진단받은 질병은 '과민성 폐렴'이었지만, 사업장 조사에서는 과민성 폐렴을 일으킬 만한 물질은 없었고 임상경과도 과민성 폐렴에 잘 맞지 않았다. 노출량이 상당할 것 같은 미지의 분말은 산화알루미늄 가루가 아닌 광물 성분으로 과민성 폐렴을 일으키는 물질이 아니라 폐암 발암물질이면서 진폐의 일종인 규폐를 일으키는 석영과 크리스토발라이트가 함유되어 있었다.
 

그게 정확한 진단명이었을까?

조사는 두 가지 방향으로 진행을 하였는데, 우선 신청인의 폐 조직을 입수하여 폐 조직을 전문적으로 판독하는 병리과 전문의에게 재판독을 의뢰하였고, 최초 '과민성 폐렴'을 진단할 당시부터 사망한 날까지의 흉부 영상을 입수하여 흉부 영상을 전문으로 하는 영상의학과 전문의에게도 재판독을 의뢰하였다. 한편, 미지의 분말이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해 분말을 납품하는 업체를 방문하여 조사한 결과 분말의 성분 분석표에 시료 명칭이 '규조토 분말'로 표시되어 있었고, 원료는 포항 흥해 지역에서 생산된 규조토라는 사실을 알아내었다.

다공성(多孔性, porous) 광물인 규조토는 높은 온도로 가열하는 소성 가공 이전에는 석영이나 크리스토발라이트와 같은 결정형 유리규산의 함량이 1% 미만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우리가 입수한 시료에서는 9~12%나 함유되어 있었다. 이에 2회에 걸쳐 작업환경평가를 실시한 결과, 신청인의 작업 중 노출될 수 있는 공기 중 석영 농도는 각각 0.042 ㎎/㎥, 0.091 ㎎/㎥, 크리스토발라이트는 0.025 ㎎/㎥, 0.106 ㎎/㎥로 이 둘을 합친 결정형 유리규산의 농도는 고용노동부 노출기준(0.05 ㎎/㎥)을 초과하면서 최대 4배 가까이에 달할 정도로 고농도였다. 

의무기록을 재검토 한 결과, 다른 감염성 질환을 모두 배제할 수 있는 상태에서 흉부 영상에서는 규폐(silicosis)가 의심되는 소견이 확인되었고, 조직검사 재판독 결과에서도 결정형 및 비결정형 입자들이 확인되었으며, 퇴사한 후에 치료에 집중하면서 스테로이드를 투여하였으나 시간이 갈수록 폐 섬유화가 진행하면서 최초 영상으로부터 사망할 때까지 영상을 재판독한 결과에서는 급성 규폐(acute silicosis)에 합당한 소견이 확인되었다.

흉부 영상에서 이상 소견이 발견되기 1년 전에 공장이 이전했다는 사실을 종합하여 복잡했던 실타래들을 하나씩 풀어보면, 스테인리스 공장에서 분말 세척작업을 하면서 결정형 유리규산에 노출되었지만 규폐가 발생하지 않다가 공장을 이전한 이후부터 고농도의 결정형 유리규산에 노출되어 규폐가 발생하였는데, 일반적인 규폐의 진행 경과에 비해 매우 빠른 경과를 보이면서 사망하였던 임상경과를 감안하면 고농도의 결정형 유리규산 노출에 의한 급성 규폐로 사망하였던 것으로 최종적으로 판단하였다.

즉, 스테인리스 식기를 최종적으로 세척하는 데 사용하였던 분말이 규조토 분말이었고, 규조토 분말에는 진폐나 폐암을 일으키는 석영과 크리스토발라이트가 함유되어 있었으며, 이에 노출되어 급성 규폐가 발생하였고, 노출이 중단된 상태에서도 급성 규폐가 진행하다가 호흡부전으로 사망하게 된 것이다.

스테인리스 제조과정의 유해위험요인, 규조토 분말

규조토는 수백만 년 전에 규조라고 부르는 단세포 식물인 프랑크톤 조류가 사멸하여 축적되어 생성된 것으로 규조토의 주성분은 함수비품질 규산(SiO2)이고, 화석 규조의 크기는 매우 작아서 평균 20㎍이며, 그 구조는 다공질각벽으로 형성되어 있고, 형태는 매우 다양하며, 색깔은 백색, 회색, 황색 등이 있다. 규조토는 현재 시멘트 혼합재, 각종 흡수재, 각종 여과 보조재로 사용되는 등 광범위하게 이용되고 있다. 자연 상태의 규조토는 65~90%가 규산(SiO2)로 이루어져 있으나 대부분 비결정형이라고 알려져 있었지만, 이번 조사에서는 자연 상태에서도 결정형 유리규산이 21%나 함유되어 있었다. 

다른 스테인리스 제조업체에서도 규조토 분말을 계속 사용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이번 역학조사 결과를 안전보건공단과 고용노동부에도 알렸다. 스테인리스 세척용 분말에는 탄산칼슘(CaCO3) 분말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이번 조사에서 규조토를 사용하는 업체도 있다는 것이 밝혀졌는데, 전국적으로 얼마나 많이 사용하는지는 알 수 없다.

이번 업무상 질병 역학조사를 진행하면서 추가로 알아낸 사실이 있는데, 영국 수입 제품이면서 스테인리스 제품을 세척하는 데 사용하는 분말 제품(아스***)의 물질안전보건자료를 찾아본 결과에서도 결정형 유리규산(CAS number: 14808-60-7)이 60~100% 함유되어 있었다. 나무그릇이나 사기그릇을 많이 사용하는 중국이나 일본과는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스테인리스 그릇을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이를 생산하는 업체도 많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업체들에서 탄광이나 채석장에서나 생기는 진폐(규폐)가 얼마나 많이 발생할 것인지 걱정된다. 전국적인 실태조사를 하여 더 이상 진폐환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빠른 조치가 필요한 시점이다.

[직업환경의사가 만난 노동자 건강 이야기] 약정을 통해 배제할 수 없는 노동자 건강권 / 2020.06

[직업환경의사가 만난 노동자 건강 이야기] 

 

 

약정을 통해 배제할 수 없는 노동자 건강권

 

 

박승권 / 후원회원 

 

 

사업장 환경안전 담당자에게 작업환경이나 작업 조건에 대한 건강상 위험을 조언할 때면 '걔네 받는 돈이 얼만데요~' 식의 답변을 듣는 경우가 가끔 있다. 

이는 나름 풍족한 급여 혹은 추가적 급여로 대우받는 노동자의 건강권에 대하여는 더 관대하게 대해도 괜찮다는 것, 느슨하게 보호하는 게 타당하다는 것처럼 들리곤 한다. 

그런데 일반인이나 심지어 노동자 본인마저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렇다면 노동자의 건강권은 급여 혹은 기타 가치와 교환 가능할까?


건강을 교환할 수 있는가? 

'교환이 가능할 수 있다' 생각이 드는 것은 우리나라 민법이 계약자유의 원칙을 기초로 두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흔히 사인 간의 관계에서 '당사자 간 좋으면 그만'이라는 식의 사고에 빠지기 쉽다. 

아울러 위험, 생명 수당이라거나 최근 이슈가 되었던 폭염, 혹한 수당 등이 급여를 구성하는 항목임을 고려한다면 이러한 얘기가 더더욱 그럴듯하게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다소 잘못된 생각이다.

헌법에 모든 국민은 노동의 권리를 가지며 노동조건의 기준은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해야 한다고 정해져 있다. 헌법재판소는 '노동자의 건강권'에 대해 인간의 존엄과 가치의 기초가 되고 국가의 보호 의무가 인정되는 기본권이라고 판시했다.(2016헌바77)

많은 법학자들은 이러한 기본권을 침해하는 행위는 민법 103조(사회질서에 반하는 내용의 법률행위는 무효로 한다)의 적용을 받는다고 본다.

정리하자면, 약정한 노동조건을 통해 헌법상의 권리로 인정되는 이른바 노동자의 건강권을 침해할 정도가 사회질서를 위배할 수 있는 수준일 때 그 법률행위는 '무효'가 되는 것이다.

반사회적 행위에 대한 민법 제103조의 '무효의 예'를 다소 극단적으로 상정해보면, 드라마나 영화에서 등장하는 '신체 포기각서'를 쓰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엄연히 사회의 올바를 풍속을 해치는 행위로서 사회질서에 반하기 때문에 '무효'(처음부터 효력을 인정하지 않기에 취소와 다른)인 것이다. 

그렇다면 사후 건강권, 쉽게 말해, 업무에 기인한 건강 문제가 발생한 후에 보상을 요구할 권리는 사전 고용계약으로 배제하는 것이 가능할까?



산재보험의 목적

이에 대한 설명은 더 간단하다. 근로기준법에 따르면 노동자가 업무상 부상 또는 질병에 걸릴 경우 사용자가 요양비나 휴업급여 등을 부담해야 하는데 근로기준법은 강행법규라서 당사자 합의로 적용 배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즉, 사적자치를 기본권 보호를 위해 어느 정도 배제한다는 의미인데, 이는 퇴직금을 월급에 포함하거나 받지 않기로 맺은 약정이 무효인 이유와 비슷한 성격이다.

산재보험 목적 또한 그 맥락을 같이 한다. 흔히 산재보험의 목적을 노동력 훼손에 따른 손실 보상을 실현하는 것만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산재보험은 잘못을 따지지 않고 보장하는 사회보험이다. 

더군다나, 적용 대상 노동자 모두가 당연 가입되며 이들의 최소한의 생존권을 확보하기 위한 생활 보장적 성격이 점차 강해지는 것이 그 특징이므로 약정에 의해 배제하는 것이 당연히 불가능하다.


일할 환경에 대한 권리

헌법재판소 판결에 따른 헌법상 노동의 권리는 '일할 자리에 관한 권리'만이 아니라 '일할 환경에 관한 권리'도 함께 내포하고 있는데 이에는 건강한 작업환경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도 포함한다. 

또한 그 권리는 급여나 직급은 물론, 사업장의 규모, 업종 등에 상관없이 모두가 누려야 할 보편적이고 기본적인 권리이므로 그 수준에 차등을 둘 수 없다.

위험수당 등은 노동을 수행함에 있어 조건 자체가 일반적인 때보다 특수하다고 인정되어 관행적으로 지급되는 상여금의 한 종류일 뿐이다. 이러한 성격의 수당이 노동자의 기본권 보호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

'팍타 순트 쎄르반다(Pacta sunt servanda)'라는 매우 유명한 로마법 법언은 '맺은 약속은 지켜야 한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자의 건강권을 침해할 수 있는 약속은 서면이건, 구두건, 묵시적 합의건 그 절차를 불문하고 애초에 약속의 대상 자체가 될 수 없으므로 약속을 지킬 수 없다.

[직업환경의사가 만난 노동자건강이야기] 코로나19 대응시 근로자건강센터가노동자 건강을 지켜줄 수 있을까? / 2020.05

코로나19 대응시 근로자건강센터가 노동자 건강을 지켜줄 수 있을까?

강충원 후원회원, 서울서부근로자건강센터

 

코로나19 대응 과정은 "방역저지선이 뚫렸다", "전사, 영웅" 등의 단어부터 재난 극복을 위한 총동원 체제, 고양된 어조로 전하는 뉴스속보 등 흡사 '전쟁'을 떠올리게 한다. 전쟁과 같은 재난은 일상을 잊게 만들고, 상대적으로 익숙하지 않았던 '노동자', '노동'이라는 단어는 자취를 감춘다.

필자가 속한 서울서부근로자건강센터를 찾아오는 노동자분들의 발길 또한 끊어졌다. '사회적(물리적) 거리두기'로 인해 예정되었던 안전보건교육과 운동교실, 집단상담, 찾아가는 이동상담이 모두 취소되었다. 국가적 재난에 모든 공공기관의 의료진들과 정신보건요원, 자원봉사자 등이 함께 동원되어 코로나19의 위험에 대응하고 있지만, 내방과 출장 없이 멈춰버린 근로자건강센터(이하 근건센)는 위기에 대응하는 공공기관으로서 역할을 부여받지 못했다. 안전보건공단과 계약한 실적목표 이외에는 공공기관으로서 역할이 없는 만큼 책임도 없는 민간위탁사업이기 때문이다.

근로자건강센터가 21곳이나 있지만, 그림자처럼 멈춰 있었다. 그래도 50인 미만 사업장 중 '우리회사 주치의' 관계를 맺은 사업장, 센터와 연결된 돌봄노동자, 이동노동자, 항공 관련 업종, 문래동 철강단지의 소공인 사업장, 대중교통 운전기사, 자동차 정비업체, 분진노출 사업장 등에 산업용 마스크를 전달하고 방역수칙을 전하는 창구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손씻기는 물론 방진용 마스크 착용을 꺼려하던 분들이 이번 기회로 보호구 착용이 일상화되는 변화가 생겼다. 소규모 사업장의 보건관리를 한다는 체면은 세운 것이다.



코로나19로 돌아보게 된 일할 권리, 건강할 권리

청도대남병원 정신과 폐쇄병동과 A보험회사 콜센터에서의 코로나19 집단감염은 환자로서의 인권뿐 아니라, 노동자로서 건강하게 일할 권리와 아플 때 쉴 권리에 대해서 다시 고민하게 만든 사건이다. 2015년 우리는 메르스를 경험하면서, 서울삼성병원과 같이 큰 병원도 감염관리가 되지 않으면 더 위험한 감염의 진원지가 될 수 있다는 사실과 함께, 의료시스템을 민영화하는 것으로는 감염위기상황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회 전반의 감염위기상황에서는 반드시 공공의료가 필요하다는 교훈을 얻었다.

당시에는 병원이송노동자, 보안노동자 등 서울삼성병원이라는 대기업 원청에서 관리되지 않던 수많은 병원의 비정규직, 하청노동자들이 메르스 감염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그럼에도 근건센에서도 이전까지 3~4개의 콜센터사업장직원들의 심리상담을 지원하고 있었음에도, 조밀한 책상배치와 아플 때 쉬지 못하는 노무관리 등 열악한 노동환경이 상담사들의 감염위험을 키울 것이라는 문제의식이 없었다.

사업장의 보건관리가 기초서비스 제공에만 그쳐서는 안 되고, 노동자의 인권과 건강권 회복이 함께 고려되어야 함을 재확인했다. 정부와 지자체의 재난지원금, 고용유지지원금 등 생활유지를 위한 논의와 더불어, 아프면 쉴 수 있도록 상병수당제도에 대한 고민이 시작된 것은 참으로 다행이다.

▲   또 다른 판데믹에 맞서, 열악한 작업환경에 처한 소규모 사업장들의 안전보건을 지키기 위해서, 근로자건강센터는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 pixabay

 

건강할 권리와 함께 일할 권리도 중요하다. 코로나19 상황에서도 건강문제보다 실직문제가 더 큰 고민인 노동자들도 있다. 서울·서울서부 근건센 2곳에서 서울시교육청 산하 학교보건진흥원 소속의 학교급식종사자들의 작업환경개선과 보건관리사업을 함께 하고 있다.

그동안 학교가 교육서비스업으로 분류되어 보건관리가 이뤄지지 않다가, 2017년 학교급식소는 "기관내구내식당업"이라는 유권해석으로 현재는 산안법이 적용되어 각 학교별로 급식설비의 개선과 함께, 건강관리가 이뤄지고 있다. 조리종사자의 직위도 교육공무직으로 변경되었지만, 여전히 방학 기간에는 무급이다. 이번 코로나19로 인해 개학이 연기되며, 사실상 임금을 받는 일자리가 사라진 상황이다.

이전에는 2달 정도의 방학, 즉 실업 기간에 근건센에서 아픈 몸을 쉬면서 재활운동과 건강관리를 받는 분들도 계셨는데, 개학이 연기되면서 보건관리사업도 함께 연기되었다. 5월부터 개학하기로 된 것은 다행이지만, 교육청에서 발표한 개학 이후 학교급식 운영방안은 여전히 조리종사자들의 업무부담 증가와 감염관리, 환기관리 대책이 부족하다. 인력충원 없는 부담 증가가 미치는 정신적, 신체적 건강 영향, 급식종사자의 건강이상 발생 시 유급병가 부여와 대체인력 확보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다.



취약한 사업장들의 감염관리/산재예방체계를 갖춰야

사회적 거리두기에도 불구하고 일이 더 많아진 사업장도 있다. 52시간 근무제가 정착될 겨를도 없이 마스크 생산업체가 24시간 비상가동을 시작했다. 마스크 생산량 확보를 위해 정부는 사업체들에 추가고용지원금을 제공했고, 근건센은 생산업체의 건강관리 긴급지원을 담당하기로 했다. 기존보다 몇 배를 더 생산하게 된 노동자들은 피로누적과 과로, 수면문제, 근골격계 문제를 겪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나 근건센 지원의 문제점은 사업주 요청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정부에서는 물량확보가 중요했고, 정부의 눈치를 보는 사업주의 납기일을 맞추기 위한 노력에 노동자 건강을 관리한다는 구호가 허공으로 사라져버렸다. 일부 지역에서 마스크제조업체의 건강지원을 나갔지만, 정작 도움이 필요한 사업장과 근건센이 연결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소규모사업장, 취약작업환경사업장, 건강실태조사 고위험 사업장 등 이름도 어려운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하지만, 정작 도움이 필요한 사업장과 노동자 근처에도 다가가지 못한 것 같은 씁쓸함이 남는다.

우리는 어쩌면 더 안전하고 건강하게 일을 시작할 수 있는 중요한 전환점에 서 있다. 또 다른 판데믹에 대응하기 위해 사업장의 감염관리체계를 점검하는 게 중요하다. 고위험 사업장에 대한 실적 중심의 예방관리체계에서 벗어나 급작스런 위험상황에도 잘 대처할 수 있는 노동조건과 작업환경 조성과 공공보건 지원체계 확립의 필요하다. 이러한 사회적 전환 가운데서 공공서비스 제공기관으로서 근건센 또한 제대로 된 역할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직업환경의사가 만난 노동자 건강이야기] 코로나 음성 증명서 / 2020.04

[직업환경의사가 만난 노동자 건강이야기] 

 

 

 

코로나 음성 증명서 

 

 

 

이정엽 / 후원회원, 직환의 

 

 

 

나는 현재 한 선별진료소에서 코로나19와 관련된 진료를 하고 있다. 초기에는 특정 국가의 여행력 또는 환자와의 접촉력이 있는 자만 검사가 이루어졌으나 현재는 이러한 기준에 부합하지 않더라도 의사의 소견에 따라 의심 환자로 분류되면 해당 검사를 받을 수 있다. 의사의 판단 기준은 지역 내 전파 수준, 검사 가능 여력 등에 따라 기관별로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는데 가끔 판단을 내리기 난감한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네, 어떤 점 때문에 걱정되어 오셨나요?"

"제가 지난번에 대구를 한번 다녀와서요."

"최근에 확진자와 접촉한 적이 있다던가, 해외를 다녀왔다거나, 그 외에 다른 의심 되는 노출은 없으셨고요?" 

"네."

"최근 열이 나거나, 기침, 인후통과 같은 호흡기 증상이 있거나, 기타 불편한 증상이 있으신가요?"

"아니요, 저는 아무 증상도 없어요. 멀쩡합니다."

"그렇군요. 아무런 증상이 없는데 단순히 대구를 다녀왔다는 이유만으로 저희가 의심환자로 분류하지는 않기 때문에 검사 대상에는 해당하지 않습니다. 우선 사람 많은 곳 방문은 피하시고 손 위생을 철저히 하시기 바랍니다. 혹시 며칠 후라도 의심 증상이 발생한다면 그때는 다시 방문 해주시고요." 

"저 오늘 검사받아서 음성이라는 결과서를 회사에 제출해야 하거든요. 그렇지 않으면 회사에서 저는 일 못 시켜준다고..." 

"......."


물론 회사의 입장도 이해할 수 있다. 이 노동자가 비록 증상은 없지만, 감염자가 아니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혹시라도 이 병이 자신의 회사 내에서 퍼진다면 그로 인한 피해는 걷잡을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그 지역을 다녀온 사람들은 얼른 모두 검사받고 정상이라는 소견서를 떼어오라고, 그렇지 않으면 근무를 시킬 수 없다고 아마 이 노동자의 사업주는 지시했을 것이다. 

하지만 의사의 입장에서 이 사람을 의심 환자로 분류하기는 무리가 있다. 접촉력을 고려하기 이전에 우선 감염을 의심할 수 있는 증상이 조금이라도 있어야 의심환자로 간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검사를 받고자 하는 사람들은 많은 반면, 검사 가능 물량은 한계가 있기 마련이라 유행 지역을 방문했다는 사실만으로 모두 검사 오더를 하게 되면 정작 확인이 꼭 필요한 고위험 환자가 방문한 경우 제때 검사받지 못 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나는 단순히 유행 지역을 방문한 것만으로는 감염의 가능성이 높지 않고, 무증상기에는 타인에게 전파될 가능성이 매우 낮기 때문에, 증상이 나타나는지 주의 깊게 관찰하다가 의심 증상이 발생하는 즉시 직장 출입을 막고 검사를 진행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한다. 만에 하나 이 노동자가 최근에 감염된 무증상 환자라 해도 잠복기에 검사를 시행하게 되면 결과가 위음성(양성이어야 할 결과가 음성으로 잘못 나옴)으로 나올 수 있어 검사 자체의 신뢰도가 낮아지게 된다. 개인적인 사정에 따라 분류의 잣대를 다르게 들이밀 수도 없는 노릇이다. 

사업주와 의사 각자의 사정 못지않게 자신의 사정이 절박한 것은 그 노동자 또한 마찬가지다. 자신은 몸이 멀쩡한데 검사를 받아 오지 않으면 일을 시켜 주지 않는다니 당장 먹고 살길이 막막할 것이다. 사정을 들어보면 그나마 한 직장에 안정적으로 고용된 경우에는 2주간 휴가를 받는 정도로 정리되기도 하지만 건설업, 대리운전업 등 고용이 불안정한 업종에 종사하는 경우 아예 고용을 거부당하기도 하는 듯하다. 천안에 장례식장을 다녀왔더니 검사를 받고 오지 않으면 일을 시켜 줄 수 없다는 말에 찾아온 미장공, 고객의 요청에 따라 대구까지 운전해주고 돌아왔더니 내일부터 출근하지 말라는 말을 들은 대리운전 기사 등 안타까운 사연들을 많이 접하고 있다. 

이와 유사한 사례들이 곳곳에서 발생하자 급기야 질병관리본부에서는 학교 및 회사에서 코로나19의 음성 증명서 요구를 자제해 달라는 권고를 내리기까지 했으나 여전히 회사의 지시대로 검사를 받기 위한 노동자들의 방문은 계속되는 것으로 보인다. 아무쪼록 이 신종 전염병 사태가 이른 시일 내에 종식되어 모두가 더는 불안감에 떨거나 피해를 보지 않고 이전과 같이 각자의 생활로 돌아갈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직환의가 만난 노동자 건강 이야기] 보이지 않던 고통 / 2020.03

[직환의가 만난 노동자 건강 이야기] 

 

 

보이지 않던 고통 

 

 

 

김세은 / 선전위원 

 

 

 

3.4kg로 태어난 우리 집 어린이는 만 9개월이 됐고 체중은 조만간 두 자리수가 될 예정이다. 그동안 숱하게 아이의 통통한 두 다리를 들어올리며 기저귀를 갈았고, 품에 안아 먹이고 재웠다. 안는 횟수는 줄어들고 있지만 안아 달라고 기어올 때는 내 손목이 아프다는 건 잊게 된다.

예전부터 육아로 인한 손목 통증 이야기를 많이 들어봤지만 사실 잘 와닿지 않았다. 그랬던 이유가, 내가 유독 튼튼한 손목를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지금껏 손목에 부담 가는 일을 지속적으로 해본 적이 없어서였다는 걸 아이를 키우며 분명히 알게 됐다. 손목에 힘을 줄 때 조금씩 느껴지던 통증은 차차 심해지더니 문고리를 돌리거나 가만히 누워있을 때도 느껴지곤 했다. 아이가 크기 전엔 별 수 없다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그쯤 되니 조금 겁이 났다. 병원에 가봐야겠다고 생각만 하던 시기를 지나 다행히 통증은 그럭저럭 완화되어 가고 있다.

이런 경험을 하고 나니 만약 출근해서도 손목에 부담되는 일을 늘 해야 하면 어떡하나, 자연스레 생각이 이렇게 이어졌다. 손목뿐이랴. 친한 친구 한 명은 출산과 육아를 거치며 요통이 심해져 꽤나 고생했더랬다. 교사인 그녀는 최대 3년의 육아휴직을 택할 수 있었고 다행히 몸을 잘 추스려 출산 1년 반만에 복직했다.

그런데 주로 서서 일하는 그 친구가 90일 출산휴가를 간신히 쓰고 허리 통증이 여전한 채 복직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어땠을까. 병가를 쓰거나, 그마저 여의치 않다면 일을 그만둬야 했을지도 모른다.

몇 달 전 직업환경의학회 가을학술대회에서 어업인의 근골격계 통증에 관한 포스터 발표를 듣고 있었다. 남성 노동자에 비해 근골격계 통증을 호소하는 여성 노동자의 비율이 더 높다는 분석결과가 나왔다. 몇 가지 요인을 보정한 결과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발표가 끝나자 여성 노동자에게서 통증이 더 흔한 이유를 찾아보았는지, 예상되는 이유가 있는지 누군가 물었다. 발표자의 대답은 뾰족한 내용이 없어서였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 내가 했던 질문은 나 자신에게도 또렷이 남았다.

"여성 노동자들이 집에서 가사 노동을 더 많이 한다면 근골격계 통증을 호소하는 비율이 더 높지 않을까요? 그 점에 대해 혹시 고려해보셨나요?"

언젠가 이런 내용을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긴 하지만, 그 순간 순전히 내 경험에서 떠오른 질문이었다. 발표자가 다음 분석에는 그런 것을 고려해주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질문한 것이기도 했다.

지난달부터 주 5일 출근하는 워킹맘(물론 필자는 이 말을, 육아의 책임과 부담을 여성에게 더 지운다는 점에서 비판한다)의 삶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시어머니께서 아이를 봐주시기로 한 터라 일찌감치 한가지 걱정을 덜고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 연세에 10시간이상 아기를 돌보는 일이 무리라는 것을 가족 모두가 깨닫는 데는 며칠이 채 걸리지 않았다. 어린이집에 보낼 대기 순번이 되지 않았고, 당장 다른 방법이 없었던 터라, 시터 선생님을 찾아보기로 했다.

가족이 아닌 누군가에게 어린 아기를 맡긴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시터 선생님이 갑자기 아파서 못 오시면 어떻게 하지? 아이가 자꾸 보챈다고 티 안 나게 때리는 건 아닐까? 물론 이런 걱정을 남편도 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안다.

이제 막 워킹맘의 세계에 진입한 나는 궁금해졌다. 이 모든 걱정과 근심을 짊어지고서 내가 일도 잘하고 아이에게도 소홀하지 않을 수 있을까? 갑자기 늦게 퇴근하는 일이 생기면 아기는 어떻게 하지? 이 모든 것만큼이나 중요한 나 자신을 잘 돌볼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을 하는 사람이 나뿐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하면, 조금은 위안이 된다. 한편으로는 다른 '워킹맘'들도 이런 마음으로 위태롭게 일하고 있겠다는 데 생각이 닿으면 걱정이 된다.

지금 일하는 병원에서 검진센터 개소 준비를 하고 있다. 진료실에서 가장 많이 만나게 될 이들은 같은 병원에서 교대근무로 일하는 간호사들이다. 여성 비율이 매우 높지만 이직율이 높아 아이키우면서 간호사로 일하는 분들이 그리 많지는 않을 것 같다.

예전에도 교대근무하는 간호사들을 진료실에서 만나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듣곤 했었다. 그런데 이젠 '워킹맘'이 되고 보니 마주 앉은 사람의 고충과 힘듦을 예전보다 더욱 무겁게 받아들이게 될 것 같다. '잠을 잘 못자요', '항상 피곤해요' 혹은 '허리가 아파요'라는 호소를 들으면 병원의 교대근무 형태나 노동강도가 어떤지는 물론 그 사람이 집에서는 어떤 일을 하는지, 아이가 있다면 몇 살인지도 궁금해질 것이다.

반드시 어떤 일을 경험해야만 공감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어떤 것들은 직접 경험하고 나서야 분명 조금 다른 차원의 앎이 열리는 느낌이 든다. 나의 안녕을 챙기면서, 주어진 역할들을 조화롭게 해낼 수 있을지 여전히 걱정된다. 하지만 그 덕에 새로운 렌즈를 하나 더 장착한 것 같아 기대되기도 한다. 보이지 않던 고통이 보일지도 모른다는 기대 말이다.

[직환의가 만난 노동자 건강 이야기] 야간작업 노동자의 검진과 사후관리 / 2020.02

야간작업 노동자의 검진과 사후관리

이선웅 회원, 직업환경의학 전문의

 

필자는 직업환경의학 의사로 노동자 특수건강검진도 하고 있지만, 외래진료실에서 지역사회 환자와 노동자들에 대한 일반 진료도 하고 있다. 직업환경의학 의사임에도 막상 외래 진료를 하고 약 처방을 하게 되면, 일일이 직업을 물어 질병과 관련성을 유추하고 필요시 업무적 대책을 생각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 많다.

우리 사회에서는 특수건강검진의 다양한 항목들이 기본적으로 주의하여야 할 직업적 위험요인이지만, 일반 외래에서는 특수건강검진 프로그램과 외래 프로그램이 연동될 수 없어 이 환자가 특수건강검진을 받은 분인지 또 그 결과 판정은 어떤지를 같은 기관 안에서라도 쉽게 확인할 수가 없다.

하지만 외래 진료 시에도 말을 하다 보면, 쉽게 눈에 띄는 직업적 유해인자가 있다. 바로 야간작업이다.야간작업노동자들은 뇌심혈관 질환의 위험이 높은 것으로 익히 알려져 있다. 따라서 고혈압, 당뇨, 고지혈증과 같은 기저 위험질환을 특수건강검진으로 파악해 이를 관리하여 야간작업노동자들의 뇌심혈관 질환을 국가적으로 예방하고자 하는 것이다. 특수건강검진을 시작하고 얼마 안 있어 30대 중반의 야간작업 노동자가 특수건강검진에서 당뇨의심으로 정밀 2차 검사를 하러 왔다. 2차 검사 채혈을 하고 며칠 후 검사 결과가 나오면 판정을 해서 우편으로 결과를 보내는 것이 일반적인 검진기관의 방법이다. 하지만 의문이 들었다. 그렇게 우편으로 결과를 받으면 이분이 실제로 치료를 위해 다른 병원이라도 내원을 할지. 사업장 보건관리를 하면서 무수한 검진 유소견자분들이 치료가 방치된 채로 지내는 것을 목격했다.

다양한 이유가 섞여 있을 것이다. 검진결과에 대한 적절한 대면 설명을 듣지 못해서일 수도 있고, 야간작업과 같은 경우는 내원 시간을 내지 못한 상태로 1, 2년의 시간이 금방 지나가기도 할 것이다. 또, 일반적으로 검진의사와 처방의사가 달라서 설명을 들어도 다시 진료하는 과정이 번거롭거나 심리적 거리감이 있어 누락되는 분들도 상당할 것이다. 그래서 그 분은 2차 검진을 원내 당화혈색소로 검사하고 바로 외래로 접수해서 당일 치료를 시작했다. 당화혈색소 수치가 높아 환자도 놀라워했다. 건강검진의 판정은 우선적으로 치료 시작 후 당일의 검사 결과를 가지고 추후 판정되어 배송될 것이다.역시 야간작업으로 특수건강검진에서 고혈압 의심으로 2차 검진을 위해 내원한 30대 초반의 환자가 있었다. 2차 검진에서도 혈압이 매우 높아 야간작업을 유지하는 것이 걱정되었다. 판정을 해서 결과를 보내고 그 이후에 노동자가 알아서 치료를 하라고 하기에는, 치료가 누락되어 건강상 위험에 노출될 가능성이 있어보였고 고생을 해서 검진을 한 의미도 없다고 느꼈다.

 뇌심혈관계 질환 등 특정한 건강 상 위험이 높은 야간작업 노동자들. 출처: pixabay.

따라서 2차 검진 시 우선적으로 외래 처방을 하고 추후에 판정결과를 보냈다. 그 외에 다른 상당수의 고혈압 특수건강검진 유소견자분들도 필자의 기관에서는 2차 특수건강검진과 동시에 치료를 시작하고 있다. 특수건강검진 의사가 검진과 동시에 외래 진료가 가능하도록 원내 시스템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수건강검진의 목적에는 검진 이후 사후관리가 포함되어 있고 이의 실행이 매우 중요함을 누구나 알고 있다. 야간작업과 같은 만성질환의 사후관리에는 심각한 경우에는 업무전환이 될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치료적 관리로 업무수행이 가능하게 된다. 그리고 야간작업 만성질환의 치료적 관리는 우리의 보건의료 체계에서 매우 쉽고 간단히 수행될 수 있다.

하지만 노동자 입장에서는 특수건강검진과 치료적 사후관리의 사이에 생각보다 큰 벽이 있고, 이에 대해서는 그동안 감독기관과 일선기관 모두 무관심했었다고 생각한다. 일반건강검진과 달리, 특수건강검진은 사업장 단위의 지속적인 추적관찰 기능이 있는 검진 체계이며, 실제로 사업장보건관리 제도를 통해 사업장 검진결과를 지속관리의 방법으로 사용하고 있다. 지속적인 사업장 관리에서 검진 이후 사후관리가 없거나 내팽개쳐져 있다면, 사업장 검진 자체는 그 의미가 없을 것이다. 야간작업과 같이 치료적 관리가 가능하고 필요한 상황에서는 치료적 사후관리를 장려하고 이를 강화하도록 특수건강검진의 방향을 잡는 것이 야간작업 노동자들의 건강에 실질적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막대한 인력과 비용을 들이는 국가사업의 성과 평가에도 중요한 부분일 것으로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