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환경의사가 만난 노동자 건강 이야기] 여전히 먼 50cm / 2019.07

[직업환경의사가 만난 노동자 건강 이야기] 

 

 

여전히 먼 50cm

 

 

이정엽 / 직업환경의학과 전문의, 후원회원 

 

 

어느 무더운 여름날, 당시 전공의였던 나는 보건관리 업무를 위해 한 휴게소를 방문하게 되었다. 건강 상담이 끝난 뒤 현장 순회를 위해 휴게소 내의 여러 시설을 둘러보던 중, 손님이 아무도 없는데도 서서 대기하고 있는 편의점 여직원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 전 상담을 할 때 허리 통증을 호소했던 분이었다. 나는 가까이 다가갔다.


“계속 서 있으시면 허리가 더 아프지 않으세요? 손님이 없으실 때만이라도 좀 앉아 있으시지요.”


그러자 그 여직원이 쓴웃음을 지으며 “여기는 의자가 없어요.”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계산대 뒤 쪽으로 건너가 보니 휴지통과 몇 가지 개인 짐만 놓여있을 뿐 정말로 의자는 없었다. 비록 아무런 동작 없이 가만히 서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몸을 똑바로 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신체에 상당한 부담을 준다. 따라서 장시간 서서 근무할 경우, 하지 근육의 피로도를 증가시키며 하지 정맥류, 족저근막염, 요통의 발생 위험을 증가시킬 수 있다. 직업병을 예방하기 위해서라도 근무 중 틈틈이 의자에 앉아있을 필요가 있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위에서 가끔 감사가 내려오기 때문에 앉아 있으면 안 된대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좀 더 확인이 필요할 것 같아 담당자를 찾았다. 마침 담당자는 편의점 옆 중앙계산대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심지어 그분 또한 계속 서서 근무를 하고 있었다. 담당자의 말로는 자신이 속한 사업장은 한국도로공사로부터 용역을 받아 이곳에서 일하고 있는 상황인데 가끔 도로공사에서 운영서비스평가를 하러 내려올 때가 있기 때문에 근무 태도 등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고 했다. 판매 직원이 앉아 있으면 평가 점수가 깎이는 거냐고 되묻자, 자신도 정확하게는 잘 모르겠다고 했다.

 

 

저자 이정엽님이 직접 그린 그림. 앉을 권리는 판매노동자의 건강권이다.  

 

노동자의 앉을 권리
산업안전보건기준에 관한 규칙 80조에는 ‘사업주는 지속적으로 서서 일하는 근로자가 때때로 앉을 기회가 있으면 해당 근로자가 이용할 수 있도록 의자를 갖추어 두어야 한다.’라고 노동자의 앉을 권리를 보장하고 있다. 또한 2년 전에 우리 기관에서 이 사업장을 대상으로 실시한 근골격계유해요인조사에서도 조리, 판매, 가판 등의 부서에서 근로자들이 장시간 서서 일하고 있어 허리 및 다리의 부하를 감소시키려는 조치가 필요함을 제기한 바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용역을 받는 입장에서 이 권리를 보장해 주었을 때 불이익을 받을 위험이 있는 한, 내가 아무리 작업 환경 개선을 요구하더라도 반영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 했다.


휴게시설 운영서비스 평가 시 고려 사항이 아님
우선은 정말로 도로공사 평가 시에 직원들의 앉아있는 자세가 점수에 반영되는지를 명확하게 확인하는 것이 급선무로 보였다. 나는 한국도로공사에서 실시하는 ‘휴게시설 운영서비스평가’의 담당자에게 연락을 취하여 해당 평가 시 직원이 앉아있다면 평가에 불이익을 받을 수 있는지 직접 확인해 보았다. 담당자는 비록 평가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직원이 고객을 응대할 때의 언행을 반영하기는 하나 직원이 서거나 앉아있는 자세는 평가 항목에 없다고 했고, 내가 여러 차례 되물었지만 앉은 자세가 점수에 반영되는 것은 절대 아니라는 답변은 변함이 없었다. 그렇다면 해당 사업주는 아마 정확한 확인 없이 막연하게 직원은 항상 서서 근무하는 것이 더 친절하고 공손해 보일 것으로 생각하여 그렇게 지시한 것이 아닐까? 나는 법적 근거, 의학적 소견, 한국도로공사로부터 받은 답변 등을 첨부하며 이들에게 잠시 앉거나 기댈 수 있는 입좌식 의자의 지급을 권고함과 동시에 이들이 고객을 응대하지 않을 때에는 틈틈이 앉을 수 있도록 지도해 주기 바란다는 소견서를 작성하여 담당자를 통해 사업주에게 전달했다.


판매노동자에게 여전히 먼 50cm
노동자 뒤쪽에 의자가 놓여 있을 경우, 보통 엉덩이와 의자 간의 거리는 50cm가 채 되지 않는다. 앉을 권리를 집단으로 요구하기 시작한 지 10년이 넘었지만, 그 짧은 간극을 메우는 일은 아직도 달성하지는 못한 듯 보인다. 판매직 노동자의 의자에 앉을 권리를 찾기 위한 노력은 지난 2008년 전국적인 캠페인을 통해 사업주의 법적 의무에 의자 비치가 추가되는 등 소기의 성과가 있었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2018년 김승섭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판매노동자의 27.5%가 일하는 곳에 직원용 의자가 없다고 응답했으며 의자가 있어도 사용할 수 없다는 답변 또한 37.4%나 되어 판매노동자의 3분의 2는 온종일 서서 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로 인해 판매노동자에서는 일반 여성에 비해 무려 하지정맥류가 25.5배, 족저근막염이 15.8배, 엄지발가락이 휘는 무지외반증이 67.0배나 더 발병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직업병을 예방하기 위한 다양한 개선방안은 큰 비용이라는 현실적인 벽에 부딪혀 현장에 반영되지 못하고 흐지부지되는 경우가 많다. 그럴수록 앉을 권리 보장과 같이 비용이 거의 들지 않으면서도 장기적인 효과가 있는 개선방안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필요가 있다. 노동자들의 지속적인 권리요구 및 고용노동부의 철저한 관리 감독이 있기를 기대해본다.

[직업환경의학 의사가 만난 노동자 건강 이야기] 미운 오리도 산재가 되나요? / 2019.06

[직업환경의학 의사가 만난 노동자 건강 이야기]

 

 

미운 오리도 산재가 되나요?

 

 

박승권 / 직업환경의 

 

 

"왜 너만 난리야!?"
"옆 사람들 다 멀쩡한데 왜 너만 그래?"

나름대로 운동을 좋아하고, 또 잘한다는 착각에 빠져 사는 필자에게 지우고 싶은 기억이 있다. 그건 바로 중학교 체육 시간에 뜀틀 위에서 앞구르기 했던 기억인데, 반 친구들 전원(!)이 자연스럽게 임무를 완수했음에도, 유독 필자만 뜀틀 위에서 우스꽝스럽게 물구나무선 것 마냥 '1'자로 서버린 아픔이다. 수차례 시도를 해도 공처럼 구르지 못하고 뜀틀 위에서 1자로 섰다가 고목 쓰러지듯 고꾸라져 한동안 허리통증을 겪게 되었다.

업무상 질병(산재) 심의자료를 검토하다 보면 간혹 그 당시 선생님께 혼났던 기억이 떠오르곤 한다. 산재를 신청하는 노동자의 상대방을 자처하는 사업주 항변 중 단골로 등장하는 다음과 같은 논리 때문이다.

"여태껏 같은 부서 사람들에게는 아무 일 없었는데 이번에 홍길동씨에게만 문제가 생겼다. 그러므로 산재가 아니다."

이는 산업재해보상보험법(산재법)과 산재보험의 취지를 완전히 몰이해함으로써 나온 논리다. 산재보험의 목적은 업무와 관련한 안전, 보건상의 위험을 함께 대비하는 것이다. 산재를 판단하는 기준은 오로지 '업무와 질병 발병 간의 상당한 수준의 인과 관계'의 존재 여부지 노동자가 갖고 있던 위험요인이 아니다. 설령 노동자가 위험요인을 갖고 있었던들, 자연적인 경과를 따랐을 때 발병했을 시점보다 업무로 인해 상당한 수준으로 빨리 유발되었는지가 판단의 핵심인 것이다.

대법원에서도 업무와 질병 간의 인과관계를 따질 때는 보통의 평균인을 기준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당사자의 신체조건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방향을 취하고 있다. 필부필녀를 기준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해당 노동자 개개인의 처지에서 "신체 부담업무"에 해당하는지, 유해요인과 질병 간의 인과성을 생각해야 한다는 의미다.

앞서 뜀틀 얘기로 돌아오자면 당시 필자의 뒤통수는 다른 친구들보다 납작했다. 납작한 뒤통수를 갖고 있는데도 선생님의 지배·감독하에 실습에 임했고, 이 과정에서 부상(질병)을 얻었다는 것만 인정된다면 이후에는 둥근 뒤통수를 가진 친구들 기준이 아니라 '납작한 뒤통수'라는 위험요인을 가지고 있는 나의 상황에서 앞구르기와 허리통증의 인과관계만 판단하면 되는 일이다.

또 한 예로 내 친구는 병뚜껑이나 참치캔을 딸 때마다 피를 철철 흘려 놀림의 대상이 되곤 한다. 대다수 사람은 이 같은 동작을 할 때 다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이 친구가 참치캔 때문에 피를 안 흘린 것은 아니므로 이 동작이 업무의 일환이었다면 당연히 산재에 해당한다.

이처럼 산재보험은 쉽게 말해 '일과 관련해 병을 얻은 근로자'를 위한 사회보장제도 중 하나일 뿐, 근로자가 잘못했다거나(고의가 아닌 이상), 업무능력이 미숙하다거나, 개인적 소인의 존재 여부는 보장 여부 판단에 중요한 고려점이 아니라는 것을 사업주든 노동자든 꼭 인지해 이로 인한 사회적 오해, 갈등이 줄어들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미운 오리야말로 우리 사회가 가장 먼저 품어야 할 대상이 아닐까?

[직업환경의학 의사가 만난 노동자 건강 이야기] 업무관련성 전문조사(역학조사) 이야기 / 2019.05

[직업환경의학 의사가 만난 노동자 건강 이야기] 

 

 

업무관련성 전문조사(역학조사) 이야기 

 

 

김대호 / 근로복지공단 직업환경연구원 

 

 

필자는 업무상 질병관련 역학조사를 수행하는 기관인 직업환경연구원(구 직업성폐질환연구소)의 업무관련성평가부에서 직업환경의학 전문의로 일을 하고 있다. 이에 직업환경연구원이 수행하는 역학조사 과정과 직업병을 밝혀내기 어려웠던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직업환경연구원에는 다양한 사건들이 의뢰되는데, 불산에 노출되었다고 주장하는 7명의 건설 노동자들이 집단으로 산재신청을 한 사건이 있었다.


불산 누출 직접적인 증거 찾기 어려워

산재신청을 한 날짜가 불산에 노출되었다고 주장하는 날짜로부터 한 달 뒤였기 때문에 감기 몸살 증상이 있었다는 것 외에는 한 달 전의 불산 누출 여부를 확인할 수가 없었고, 고용노동부 담당지청에서도 이미 조사를 하였지만 최종적인 판단을 할 수 없었다.

산재요양 신청 상병을 보니 '간질성폐질환', '호흡곤란', '뇌경색증', '뇌병증', '두통', '저산소혈증', '가려움증', '불면증', '탈모성모낭염'으로 다양하게 기재되어 있었는데, 7명에서 공통적인 신청 상병은 '간질성폐질환'이었다. 이러한 상태로 사건은 필자에게 배당이 되었다.

우선 필자는 사업장 조사를 하기 전에 의무기록을 검토한 후 신청인들을 모두 불러내 면담부터 시작하였다. 이들은 모두 건설 노동자들로 여기 저기 장소를 옮겨 다니면서 철골을 설치하는 업무를 수행하였는데, 월요일인 13일에 불산을 취급하는 업체의 증축공사 현장에서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이들이 호소한 증상 중에서 감기 몸살이라고 표현되는 근육통/오한은 7명 모두에게 있었고, 그 외 기침은 2명, 열감은 3명이었으며, 두통/어지럼증이 5명, 가려움증이 6명, 귀에서 소리가 들리는 이명이 4명, 관절통이 3명이 있었는데, 첫 면담 당시에는 불산에 노출되었다고 주장하는 13일 저녁에 증상이 발생하였다고 진술하였다.

검토한 흉부 컴퓨터단층영상에서 비정상적인 소견인 간유리 음영(Ground Glass Opacities)이 관찰되는 경우가 5명이 있었는데, 이 중 3명은 경미하였고, 입원 치료까지 하였던 2명은 '간질성폐질환'을 진단받을 정도로 심하였다. 이외 2명의 흉부 영상에서는 비정상적인 소견이 없었다.

면담을 마친 후 불산을 취급하고 있는 업체를 방문하여 전체 공정과 설비 시스템에 대한 이해, 그리고 대기오염 방지설비 및 불산의 입고 및 출고되는 과정을 조사하였고, 13일 당일의 불산 입출고 내역을 확인하였지만, 우리 조사팀 모두 현장에서 불산 누출의 직접적인 증거를 찾기가 어려웠다.

불산 취급 업체 측은 화학물질 누출 흔적이 없고, 다른 직원들 중 이상 증상을 호소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며, 겨울에 노동자들이 무리하게 일을 하였다면 감기 몸살은 걸릴 수 있는 것이 아니냐며 항변하였다.


과거 구미 불산 누출 사건에서 관찰한 유형과 일치 

우리 역학조사팀은 빨리 처리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면서도 쉽게 판단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아 자료를 다시 검토하고 추가 면담 조사를 위해 지방에서 지내고 있었던 7명의 신청인들을 직업환경연구원으로 불러내었다. 집단 요양신청을 하였던 7명의 노동자들이 입을 맞추어 진술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휴대폰을 모두 압수하고, 면담 전후의 사람들을 격리시킨 상태에서 다시 자세하게 조사를 시작하였다.

7명이 모두 함께 근무한 날은 13일이 유일하였고, 13일 오전에 불산 취급 업체의 직원과 공사 현장의 다른 협력업체 직원들이 있었지만, 점심시간 이후로는 신청인 7명만 있었다고 하였다. 증상 발생 시기는 1명이 13일 저녁으로 가장 빨랐고, 2명은 다음 날인 14일 오전과 오후에 시작되었으며, 2명은 이틀 후인 15일 오전에, 나머지 2명은 15일 오후에 증상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처음 면담 당시에는 13일 퇴근 후에 모두 증상이 나타났다고 진술하였기 때문에 불산 노출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던 것이 서로 간의 대화를 차단한 후 집중 면담을 해보니 과거 구미 불산 누출 사건에서 관찰되었던 노출과 증상 발현까지의 잠복기(노출 후 1~2일)가 일치하였다.

이와 같은 면담 내용을 마무리 한 후 불산 취급 업체에서 입수한 자료들을 검토한 결과, 두 가지의 불산 노출 경로를 추정할 수 있었는데, 첫 번째는 집진시설에서 배출되는 불산에 노출될 가능성이었고, 두 번째는 원료가 입고되는 과정에서 불산이 누출됐을 가능성이었다.

우선 노동자 7명이 작업했던 위치 주변에는 대기오염 방지설비(이하 스크러버) 7기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각 스크러버의 배출물질이 한 방향으로 이동할 경우 작업위치가 밖이라고 하더라도 작업자들이 일정 농도의 불산에 노출되었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2주 전부터 작업을 시작하였는데, 왜 13일에만 불산에 노출되었으며, 7명의 흉부 영상에서 중증도가 각기 다르게 나타났는지는 설명하지 못하였다.

두 번째는 불산이 입고되는 과정에서의 누출인데, 불산 노출이 있었다고 판단되는 13일 당시 불산은 작업시간동안 총 3회 입고되었고, 원료가 출고되는 곳에는 불산 누출이 있을 경우 알람이 울리도록 되어 있었으나 입고되는 곳에는 센서가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13일 당시 알람이 울리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센서가 설치되어 있지 않은 입고 설비 쪽에서 누출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었다. 또한 폐질환 정도에 따라 불산 노출농도가 다르다고 추정되는 3개의 집단이 구분되고 이를 감안하면 누출지점으로부터 가까운 곳에서 작업하였던 노동자들은 상대적으로 고농도에 노출되었고, 먼 곳에 있었던 사람들은 거리에 따라 급격하게 불산 농도가 감소하여 저농도로 노출되었을 것이라고 판단하였는데, 이들의 흉부 영상에 나타난 중증도와 누출지점으로 추정되는 곳으로부터의 거리가 일치하였다.

결론적으로, 직업환경연구원의 업무상질병심의위원회에서는 신청인 7명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 증상과 임상경과 및 흉부 영상에서의 동일한 소견, 그리고 날짜별 작업내용과 공사현장의 작업환경 및 불산에 노출된 13일의 오전과 오후에 공사현장 인원 배치 등을 종합하여, 노동자 7명의 임상증상들은 모두 13일 월요일에 불산 취급 업체의 증축 공사현장에서 근무할 당시 오후 2시 경에 불산이 입고되는 상황에서 노출된 불산에 의한 업무상 질병으로 판단하였다.

역학조사를 실제로 수행하는 일도 복잡하고 어렵지만, 수집된 자료와 현장 조사 결과들을 종합하여 최종적인 판단에 이르는 과정도 매우 고되고 어려운 일이다. 또한 역학조사는 노동자에게 발생한 질병의 원인을 찾는 일인데 아직까지 원인조차 밝혀지지 않은 수많은 질병이 있다는 한계가 있는 상황에서, 역학조사 제도는 질병의 직업적 원인이 밝혀진 노동자들에게는 환영 받는 제도이지만, 그렇지 못한 노동자들로부터는 큰 질타를 받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지 않고, 다치지 않고, 병들지 않는 노동환경을 만들어가기 위해 역학조사는 계속되어야 하고, 이를 통해 새로운 유해물질들과 직업병을 발견하며, 기존 유해물질들의 새로운 노출 경로들도 밝혀내어야 한다. 더불어 역학조사 소요기간도 단축되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직업환경연구원의 전문 인력 확충이 필요하다.

[직업환경의학 의사가 만난 노동자 건강 이야기] 투명함을 만들어내는 노동자 / 2019.04

[직업환경의학 의사가 만난 노동자 건강 이야기] 

 

 

 

 

투명함을 만들어내는 노동자

 

 

 

 

김지원 / 후원회원, 직업환경의학 전문의

 

 

 

 

"문제 삼지 않으면 문제가 안 되는데 문제를 삼으면 문제가 된다고 했어요."
- 영화 '베테랑'에서

경인 지역의 한 중소기업은 유리제품을 만들고 있다. 화학용기, 화장품 용기, 약병, 가전제품에 들어가는 초자부품 등을 대기업의 주문에 따라 생산해내고 있다. 반세기의 오랜 역사를 지닌 이 회사는 아쉽게도 산업안전보건 관계자에게는 참으로 계륵 같은 곳이다.
2010년에는 산업재해 다발 사업장으로 블랙리스트에 오르기도 했다. 사망이나 중독 같은 심각한 재해는 아니라 할 수 있는 소음성 난청으로 유소견자가 3명 나와서 3%의 재해발생율을 기록했다. 그 때 노동자수가 100여 명이었고 지금은 50명 정도이다. 단순 계산으로는 직업병 유소견자가 두 배 가량 폭증한 것처럼 통계적 착시를 보여주게 될 것이다.

 

직업병·산업재해 유소견자가 발생하면 해당 관서에는 평소보다 귀찮은 일들이 생긴다. 현장지도를 하고 유소견자 관리를 해야 한다. 소음성 난청의 경우 청력 검사 과정이나 결과 판정에 문제가 있는 경우 병원이 행정 처분을 받기도 한다. 실제로 한 병원은 이곳의 건강검진을 맡았다가 특수건강진단 업무 2개월 금지 처분을 받은 적도 있다. 병원 평가에도 문제가 생길 수가 있기 때문에 이 회사 맡기를 꺼려 직원 건강진단 실시에 어려움을 느낀다는 현장의 이야기를 들었다. 산업보건의 요구가 더 절실한 곳이 오히려 전문가들이 기피하는 아이러니한 현실이다.

유리를 만드는 산업의 현황은 어떨까. 2019년 현재 한국유리공업협동조합의 조합원 명부를 보면 대기업과 중소기업으로 나뉘는 것을 볼 수 있다. 대기업에서는 기술력이 좀 더 필요한 판유리, 건축자재, 자동차유리, 용광로 내열소재, LCD의 기판이나 액정유리 등을 만든다. 중소기업에서는 식품용기와 그릇, 화장품 용기, 약병, 화학실험용 비커나 플라스크 일체, 음료수병 등을 만들고 있다. 전통적인 제조업에 가깝다 보니 규모를 가리지 않고 산재사고가 발생하는 편이다. 최근에는 모 대기업 공장에서 판유리에 깔려 근로자가 숨지는 안타까운 사고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중소기업에서 주로 만들어내는 유리제품들은 원료들을 혼합하여 뜨거운 열로 녹인 뒤 용해·성형하고 서서히 식혀 후처리와 가공을 하고 포장, 출하하는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다. 이 과정에서 고열·적외선에 의한 온열장애·백내장 등의 발생 가능성이 생기게 되고, 분진에 의한 호흡기 질환, 소음에 의한 난청 등이 발생할 수 있다. 이 공장에서도 수십 년간 난청이 발생하여 왔고, 최근 작업환경 측정에서는 유기화합물인 디클로로메탄이 노출기준치를 상회하여 측정되었다. 하지만 관할 관서의 지속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공정의 본질은 크게 바뀌지 못했다.

영세한 업체들은 중국과의 경쟁에 밀리거나 가파른 임금 상승의 여파로 회사 자체의 규모가 점차 줄어들고 있다. 결국 지금의 이 노동자들이 정년을 맞이하게 되면 자연스레 사라질 사양산업이라는 걸 사장과 직원들 모두 서로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산재를 추방하기 위해 우리 모두 노력하지만, 허탈하게도 글로벌한 세계 자본의 흐름에 따라 직업병을 유발하는 산업들이 구조조정의 흐름 속에 재편되거나 사라져가는 경우도 많다.

4차 산업혁명이 화두지만 우리 주변에는 아직 옛날 '공장'들이 남아있고 여전히 힘들고 위험한 일을 예전과 다름없이 묵묵히 해 나가는 노동자들이 있다는 것도 기록해본다.

[직업환경의사가 만난 노동자건강 이야기] 어느 군무원의 업무관련성 평가 이야기 / 2019.03

[직업환경의사가 만난 노동자건강 이야기]

 

 

어느 군무원의 업무관련성 평가 이야기

 

 

 

권종호 / 회원, 직업환경의학 전문의

 

 

 

직업병과 관련한 참고 자료로 사용하기 위해 직업환경의학 전문의들에게는 업무관련성 평가 의뢰가 심심치 않게 들어온다. 전공의 수련 과정 중에도 이러한 업무관련성 평가서를 작성하도록 되어 있다. 필자도 전공의 시절 20여 건의 업무관련성 평가서를 작성하였는데 그중 아직까지도 기억에 남는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업무관련성 평가서는 가끔 간단하기도 하고 가끔 아주 복잡하기도 한데, 이는 각 작업의 특성과 발생한 질환의 인과관계 수준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의뢰된 사례와 관련하여 연구된 자료가 많지 않거나 작업과의 인과관계를 추정하기 어려운 경우에 혹시 있을지 모르는 내용을 검색하느라 많은 시간이 소요되기도 하고 노동자의 작업 관련 자료를 보충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이번 글에서 이야기하려는 업무관련성 평가 사례는 36세 스프레이 도장공에서 발생한 비소세포성 폐암 사례로 직업환경의학 전문의라면 누구나 발생할 확률이 높은 직업병임을 알 수 있는 사례였다. 처음에 접했을 때는 명확한 자료들을 찾아 첨부해주면 간단하게 끝날 것으로 생각했다. 다양한 발암물질이 들어있는 도료를 칠하는 도장공은 그 업무 자체로 국제암연구소(IARC)에서 1급 발암 직업군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노동자는 군무원이었다. 공무원 신분을 가지고 군에서 종사하는 직군인 군무원은 산재나 직업병 관련하여 산재보험이 아닌 공무원 연금공단의 산재 승인을 받도록 되어있다. 그리고 작업 환경에 대한 감시나 특수건강진단 등의 과정은 산안법이 아닌 군 작업환경 및 작업자 보건관리 훈령이라는 규칙을 따른다. 그 결과 이 노동자는 스프레이 도장공으로 열악한 환경에서 작업하며 폐암에 걸렸음에도 직업병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법원을 상대로 공무상 요양불승인처분 취소 청구소송을 준비 중이었다. 오히려 몇 년 전 같은 공정에서 근무한 동료의 백혈병은 바로 승인되었다고 했다. 산재보험의 직업병 인정 과정도 여러가지 문제가 있지만 공무원 연금공단의 직업병 인정 과정은 훨씬 심각한 수준이었다.

관련 자료를 모두 검토하고 실제 사용했던 보호구와 작업 장소에 대한 자료를 보충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해당 노동자 분께 전화를 걸었다. 첨부된 의무 기록 상 폐암이 이미 뼈에 전이된 상태여서 어떤 이야기부터 꺼내야 할지, 너무 우울한 상태는 아닐지 수많은 생각이 오갔다. 하지만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걱정과 달리 다소 활기찼다. 공무원 연금공단의 불승인이 매우 억울해서 본인이 쓰던 보호구며 작업 환경이며 모두 잘 알리고 싶으니 필요한 내용은 이야기해주시라고, 그동안 제대로 된 보호구나 환기 시설도 없이 일해서 결국 이렇게 된 거라 생각한다고 했다. 덕분에 나는 궁금한 질문을 원 없이 했고 필요한 사진 자료들도 추가로 받기로 했다. 통화 말미에 그 노동자분은 조심스레 아이들 이야기를 꺼냈다. 아이가 둘이 있는데 그 아이들이 걱정이라고 소송은 꼭 이기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당시 업무관련성 평가의 자료는 소송에서 절대 지지 않을 정도로 준비해야 했다. 실제로도 근무 환경이 매우 열악했다. 넓은 창고를 그냥 정비소라고 쓰고 있었고 창문에 달린 환풍기 하나가 환기시설의 전부였다. 그곳에서 군용 대공포를 정비하고 도색하는 업무를 하는데 정비 작업은 많지 않고 노후된 장비의 도색이 주된 업무였다. 주로 스프레이 도장 작업인데 안전관리 담당자도 전문 인력이 아니고 이에 대한 외부 감사도 받지 않으니 백혈병이 발생했고 산재 승인까지 받았음에도 여전히 방진마스크만 쓰고 작업해왔다. 작업에 주로 사용된 군용 카키색은 발암물질인 크롬을 함유하고 있었고 스프레이 도장을 통해 노출되는 경우 방진마스크는 효과적으로 이를 막아줄 수 없었다. 오히려 막아줄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로 더 노출될 가능성마저 있었다.

예상보다 훨씬 길어진 업무관련성 평가서를 보내드리고 몇 해 지난 3월 어느 날, 도장 작업하던 군무원에서 발생한 폐암이 소송을 통해 승인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도장 작업 노동자 분들을 만날 때면 가끔, 예상외로 다소 활기찼던 당시 군무원 분의 목소리가 떠오르곤 한다. 울분보단 열정이 느껴지던 목소리. 다행히 2018921일 공무 상 재해 보상의 내용을 수준을 높이기 위해 공무원 재해보상보험법이 공무원연금법에서 분리돼 제정·시행되기로 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공무상 질병과 관련한 요양 승인은 만족스럽지 못한 상황이다. 지속적인 개정, 보충을 통해 불필요한 소송이 발생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직업환경의학 의사가 만난 노동자 건강 이야기] 현장 개선은 어떻게 해야 할까 / 2019.02

[직업환경의학 의사가 만난 노동자 건강 이야기]


현장 개선은 어떻게 해야 할까



이선웅 직업환경의학 전문의



필자는 보건관리전문기관에서 중소규모 사업장의 산업보건의를 맡고 있다. 산업보건의는 직업성 질환의 예방과 조치에 대한 업무를 하여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산업안전보건법 시행령 22조 산업보건의의 직무 등에 개괄적으로 명시되어 있기도 하다. 하지만 현실에서 노동자의 직업성 질환을 예방하기 위해 현장의 문제를 개선하고자 할 때는, 사업장에 어떻게 접근하여야 하며 또 어떻게 설득을 이루어 낼지 난감하게 된다.

어느 날 노동자 한 분이 상담 중 자외선을 바르는 작업을 하면 눈이 따갑다는 표현을 하셨다. 현장을 방문해 보니 새로 설치된 자외선 경화도장 공정의 문제였다. 특수 도료의 하나인 자외선 경화도료를 교반기에 넣은 후 컨베이어에서 자동 도포되면 자외선을 이용해 속성으로 경화시키는 공정이었다. 노동자분은 도료를 교반기에 투입할 때 바로 그 증상이 발생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도료의 물질안전보건자료를 확인하였고, 도료내의 성분 중 각막 자극이 강한 물질(2-hydroxypropyl acrylate)이 원인으로 생각되었다. 이 물질은 자외선 경화 도료에서 흔히 사용되는 성분이었고 공정상 도료의 변경은 힘든 것으로 보였다. 노동자분의 증상이 간헐적이라 일단 보안경과 방독마스크의 보호구 착용을 필수로 하였고, 교반기 개선과 국소 배기 설치도 권고했으나 현장 상황상 국소 배기 설치는 힘들 것 같다고 하였다. 얼마 후 노동자분의 증상은 보안경 착용과 특히 본인이 작업 시 주의하여 증상이 거의 없다고 하셨다.

하지만 얼마 후 간호사를 통해 심각한 얘기를 듣게 되었는데, 타 지역 계열사의 동일 공정 노동자 한 분이 동일 기계의 정비 작업 중 바로 그 도료가 눈에 튀어 심한 시력 손상을 입었다는 사실이었다. 현재 담당 노동자의 증상은 심하지 않지만, 전체 작업은 언제든 위험요인이 있는 작업이었고 이를 예방하기 위해 개선 조치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보였다. 현장의 문제 중 교반기 개선과 응급 세안시설 설치를 우선적으로 요구했고, 부장님과 만나 위험성을 설명했다. 하지만 그 후 몇 달째 현장의 변동은 없으며, 사업장은 수도라인 설치의 힘듦 등을 호소하고 있을 뿐이다. 꼭 필요한 개선조치일지라도 산업보건의의 개선 지도사항 이행에 대한 명확한 근거를 사업장 입장에서는 발견하기 힘든 것이 일차적 원인일 것이다. 만일 발생 할 산재신청과 그로 인한 노동부 점검 시 받을 수 있는 불이익 등의 불안감을 이용해서, 사업장 상황에 따른 임기응변으로 현장 개선을 유도하는 것이 그나마 가능한 현실인 것이다.

두 번째 사례는 건축자재용 샌드위치 판넬 생산 사업장으로, 천식 유발 물질로 매우 잘 알려진 메틸렌 디이소시아네이트(MDI)가 주성분인 접착제가 연속 자동 투하되고 있는 공장이었다. 현장 확인을 하면 직업성 천식의 위험을 느끼게 된다. 두 개의 라인에서 월 8톤의 접착제가 지속적으로 투하되고 있는데, 투하 위치 근접하여 접착제의 경화를 방지하기 위해 온풍기가 상시 가동되고 있었으며, 국소 배기는 없었고 공정은 협소하며 전체 환기는 미흡했다. 작업환경측정 결과는 정상이었지만 라인 수리/세척 또는 점검과 같이 접착제 투하 위치에 근접할 수 있는 업무 상황에 따라 노출 수준은 충분히 높을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그 공정의 천식 발생이 걱정되는 상황이었고, 환기시설 강화를 지시하였으나 역시 질환 예방에 대한 현장 개선 지도는 사업장에 적용되기 어려웠다. 그러던 어느 날 접착공정 노동자 두 명이 천식 치료를 받고 있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들에 대한 수시 건강진단을 의뢰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 결과에 따라 행정기관의 의무적인 현장 개선이 시행될 수 있게끔 된 것이다. 일종의 불행 중 다행으로, 직업병 또는 증상 발생을 통해서야 동료 노동자를 위한 예방조치와 개선이 가능한 어쩔 수 없는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산업 보건 전문가가 현장의 위험에 대해 사전 예방 개선안을 내고 그것을 현장에서 현실화시키는 일은 산업보건사업의 핵심이지만, 우리의 현실에서는 실현되기 매우 힘든 것이 사실이다. 꼭 필요한 개선조치에 대해서조차 사업주와 독립적인 사회적 권위를 인정받지 못한 채, 사업장 내부 상황에 의존한 개인의 노력과 방법에 의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현재 우리의 사업장 보건관리의 작동방식으로는 아무도 그 일을 시키지 않았으며, 아무도 그 결과를 평가하지 않는다는 것이 체감되는 현실일 수 있다. 하지만, 실제적인 현장 개선에 중점을 둔 사업장 보건관리의 방향성은 결코 모호해져서는 안 될 것이며, 2015년 국제산업보건위원회에서 제안된 직업건강 전문가를 위한 국제 윤리강령에서는 개선조치에 대한 추적조사를 의무로 규정하고 있다. 현장 개선에 중점을 둔 산업보건의의 의무와 그와 동반된 사회적 권위 그리고 업무 평가방법에 대해 앞으로 관심과 논의가 형성되기를 기대해 본다.

 

[직업환경의사가 만난 노동자 이야기] 그는 일할 수 있는 다니엘 블레이크였다 / 2019.01

그는 일할 수 있는 다니엘 블레이크였다

송윤희 (직업환경의학 전문의, 회원)


다니엘 블레이크는 심근 경색을 앓은 후 직장에 복귀하지 못했다. 노동 말고는 생계를 유지할 길이 없었던 그는 주치의에게 가서 일을 다시 할 수있게 해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그의 심초음파 결과를 본 심장 내과 의사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단호하게 말했다. “일하면 죽을 수도 있어요. 절대 일하지 마세요.”

다니엘은 심한 심부전 상태였기에 의사는 업무부적합 소견을 철회하지 않았다. 월세도 못 내고 전기세도 밀린 다니엘은 실업자 연금을 받으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그러다 전기도 끊기고 월셋집에서 쫓겨나기 바로 전 연금 혜택을 결정하는 자리에 간신히 인터뷰를 따냈다. 죽느냐 사느냐의 인터뷰였다. 그 인터뷰를 앞두고 다니엘은 화장실에서 쓰러져 죽는다. 지나친 스트레스가 그의 심장을 멈추게 한 것이다. 영국의 유명 좌파감독 켄 로치의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내용이다.

내가 만난 노동자 이 씨는 다니엘 블레이크와 유사한 상황이었다. 나는 심근 경색을 앓은 그의 작업 복귀에 대한 업무적합성 평가를 해야 했는데 다니엘과 차이가 있다면 그의 심장 상태는 노동 자체를 아예 금할 정도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래도 심초음파 결과는 좌심실 구혈률(심실이 수축하며 피를 짜내는 정도)이 정상의 반 정도로 떨어져 있었기에 그냥 일하게 내버려 두어도 불안한 상황이었다. 이 씨에게 제대로 <업무 적합성 평가>를 하려면 철저히 객관적인 자료들이 바탕이 되어야 했다. 3차 병원에서의 운동부하 검사, 주치의의 소견서, 진단서, 처방전을 토대로 환자의 현재 건강 상태를 정확하게 평가하고자했다. 또 하루 날을 잡아 그와 인터뷰를 하고 현장도 돌았다. 이 씨는 자동차 부품 제조회사의 보전반에 속해 있었다. 특정 라인에 배정되어 있는게 아니라 대기하고 있다가 고장 난 기계를 고치거나 필요한 부품들을 만들어내는 등의 불규칙적이고 일정치 않은 업무들이었다. 현장을 돌며 심장에 영향을 미칠 요인들을 살폈고, 그 시간 내내 나는 사측과 노측에 “의사로서 중립을 지킬 것이며, 모든 잣대는 ‘노동자의 건강’ 하나만으로 삼을 것”이라고 피력했다. 예상할 수 있듯이 결과는 일정 조건 하 업무 적합으로 나갔다. 그러나 내가 단 조건들은 현장 동료 노동자들의 반발을 샀다.

그런 작업 조건을 걸면 이 씨한테 시킬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이 반발의 요지였다. 이 씨는 급작스러운 상황을 대비하여 혼자 일해서도 안 됐고, 20kg 이상의 심한 하중의 일에서 배제되어야 했으며 그 외에도 페인트나 신너 등 유기용제를 사용하는 작업에서도 배제되어야 했다. (이 모두는 심장에 악영향을 미치기에 필수적인 조건들이었다) 노조가 강한 곳이었고, 비교적 노동자들의 관계도 강한 노조 덕에 팍팍하지는 않은 사업장이었다. 그러나 매번 아픈 그를 위해 더 힘들고 더 유해한 일을 누군가가 대신해준다는 것은 무리였을 것이다. 결국 회사는 그에게 갑작스러운 작업변경 발령을 내렸다. 나는 다시 사업장에 가서 그가 일할 수 있는 공정들을 살피고 그중 가장 심장에 하중이 안 가는 좌식 업무인 부품 검사직을 권했다. 나름 만족스러웠다. 플랜 A가 현실에 적용되지 못했지만 플랜 B도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제대로 업무 적합성 평가를 하고, 노동자의 건강에 가장 적합한 공정으로 작업 변경을 시켰다는 생각에 뿌듯했다.

그러나 한 달 뒤 이 씨는 회사를 그만두었다. 충격이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급여가 적었다. 비록 좌식 업무였으나 20년 넘게 해온 기존 업무를 그만두고 새 업무를 배운다는 부담감이 있었다. 검사 작업의 노동 강도는 약했지만, 대기하고 있다가 필요시 출동해서 힘 한 번 쓰고 오는 예전 업무보다, 종일 좌식으로 앉아서 쭈그린 자세로 검사를 하는 작업이 더 힘들었다고 했다.

그는 일할 수 있는 다니엘 블레이크였다. 적절히 현장에서 배려만 해준다면 업무에 적합한 노동자였다. 하지만 사측도 노측도 아파서 죽다 살아난 환자를 위해 깍듯한 배려를 지속할 수 없었다. 그러기엔 우리나라 노동 환경이 너무나 척박하다. 노동자는 격무에 시달리고 회사는 산재 하나 일어날까 벌벌 떤다. ‘노동자의 건강’ 역시 조금 더 전인적(全人的) 관점으로 살펴져야 할 것이다. 나는 이번 사례로 노동자의 건강에 영향을 주는 것 중 객관적 의학검사 수치 외에도 너무나 다양한 사회·심리·경제적 요인들이 작동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실감했다. 업무 적합성 평가는 일할 수 있는 사람을 일하게 하는 데에 쓰여야 한다. 누군가를 더 낙인찍히거나 어우러져 작업하기 어렵게 만들어서도 안 될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용은 절대 녹록치 않다. 이 과정에 더 많은 현실적/철학적 고민이 함께 진행되어야 하는 이유다.

[직업환경의사가 들려주는 노동자 건강 이야기] 보험을 보험답게 쓰도록 알리고 장려해야 / 2018.12

보험을 보험답게 쓰도록 알리고 장려해야

권종호 (회원, 직업환경의학 전문의)

얼마 전 출장 검진에서 양손에 손목터널 증후군수술을 한 노동자를 만났다. 아직 수술 자국이 조금 빨갛게 남아있어 나는 그분의 검진 항목인 이소프로필 알코올보다 수술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올해 초에 정형외과에서 양 손목을 한꺼번에 수술하셨다는데 무릎까지 한꺼번에 해서 조금 싸게 할 수 있었다고 했다.

손 저림은 현재 공장에서 일 시작하면서 점점 안 좋아지기 시작해 올해 딱 10년째인데 더 참을 수 없어 수술했고 그동안 해온 작업이 물건을 집어 돌려보며 불량 확인하고 이물질 닦아내고 하는 일이라 손을 많이 쓰는 상황이었다. 일 때문에 생긴 질환인데 산재 신청은 안 하신 거냐고 묻자 도리어 일하다 아프면 치료받으라고 월급 받는 거 아니냐고 반문했다. 어차피 산재라고 해도 본인은 신청 방법도 모르고 복잡할 거고 회사에 싫은 소리 하기도 싫고 해서 그냥 수술받은 거에 만족한다고 했다.

매년 회사는 일정 금액의 보험금을 산재 발생에 대비해서 내고 있다. 발생할 수 있는 위험에 대한 보험료를 회사가 열심히 내고 있으니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회사가 앞장설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실제 회사는 마치 우리가 자동차 보험금 올라갈 것을 걱정해서 함부로 쓰지 못하는 것처럼 반응한다. 산재나 직업병이 많을수록 관리 감독이 심해지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다른 하나의 요인으로 산재 보험금 산정에 있어서 개별실적요율제를 적용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개별실적요율제란 간단히 말해 산재 보험금사용액 비율에 따라 개별 사업장의 보험료를 할인해주거나 할증하는 제도이다. 예를 들면 납입 한 산재 보험료의 5% 미만을 사용한 사업장은 보험료를 50%까지도 감면해주게 된다. 물론 반대의 경우 50% 할증이 되기도 하지만 실제 할증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고 대부분(개별실적요율제 해당 사업장 중 89.8%)의 사업장은 할인을 받고 있다.

원래 취지는 산재 보험금 사용을 줄이기 위해 안전 설비에 더욱 투자하고 실제 산재가 줄어 할인받는 선순환을 의도한 것일지 모르나 결과는 산재 보험료 할인을 받기 위해 산재 신청에 비협조적이거나 공상 처리를 종용하는 행태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한국의 개별실적요율제는 매우 불평등한 구조로 되어 있다. 개별실적요율제를 적용받을 수 있는 사업장은 노동자 10인 이상, 3년 이상 산재 보험 가입한 사업장으로 한정하고 있는데 이는 2015년 통계로 보면 전체 사업장의 4.45%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사업장 전체 보험료의 29.6%(1조 4,037억 원)를 감소시키고 있고 규모별로 할인율에 차등(30인 미만 사업장 ± 20% ~ 1000인 이상 사업장 ±50%)을 따로 두어 대기업일수록 더 높은 할인을 받게 만들어 놓았다. 그 결과 2017년 산재보험료 감면자료(개별실적요율 적용현황)에 따르면, 최다 감면 기업은 1위 삼성 (1031억 원)이었고 뒤를 이어 현대자동차 (836억2300만 원), LG (423억1200만 원), SK (347억5400만 원) 순이었다. 이렇게 할인된 금액은 결국 개별실적요율 적용 대상이 아니거나 할인 폭이 적은 소규모 사업장의 부담으로 돌아가게 된다.

다행히 2018년 1월부터 시행되는 산재보상보험법 등의 개정 내용에서는 개별실적요율 할인수준을 규모와 관계없이 20%로 통일하였다. 노동부 보고서인 「개별실적요율제의 산업재해 예방에 대한 효과분석 및 개선방안 연구」에 따르면 이로 인한 보험료 징수 증가분은 7,136억 원 정도로 예상되었다. 적용 시까지 시간이 걸리긴 하겠지만 불합리한 제도를 개선했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또한 같은 시기 제도 개선을 통해 출퇴근 산재 인정, 산재 신청 시 사업주 확인제도 폐지 등이 이루어졌고 올해 6월 말 기준 산재신청 건수가 전년 대비 19.4%(1만 618건) 증가했다고 한다. 그중 출퇴근 재해와 인정기준 완화로 재신청된 건수를 제외한 13.2% (7,240건) 정도는 사업주 확인제도 폐지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한다.

대기업 위주의 산재 보험료 할인 특혜, 불필요한 사업주 확인제도 등 이제 겨우 몇 가지 문제가 개선되었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한 노동자의 생각처럼 여전히 산재 신청의 과정은 복잡하고 껄끄럽고 어떤 제도인지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아 쉽게 다가가기 어렵다. 할인받기 위해 보험료를 내고도 최대한 안 쓰려는 제도로서의 산재 보험은 의미가 없다.

차라리 할인을 없애고 보험료를 낸 만큼 잘 활용할 수 있도록 가벼운 산재나 흔하게 발생하는 직업병에 대한 산재 신청 시 불이익을 없애고 보건관리자나 사업주에게 신청을 장려하여야 한다. 또한, 신청과정을 간소화하고 적극적으로 홍보해 이를 통해 은폐된 산재를 양성화하는 것이 산재 예방 관련 지표 조작보다 훨씬 중요하고 시급한 일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직업환경의학 의사가 만난 노동자 건강 이야기] 직업을 묻고 대답하는 불편함을 넘어 / 2018.10

직업을 묻고 대답하는 불편함을 넘어

강충원 일터건강을 지키는 직업환경의학과의사회 회장

의대생들에게 "일하는 사람의 건강"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직업환경의학과라는 정식 수업 이외에 의학 공부에 집중된 의대생들에게 사회의 현실을 알려주는 일종의 교양수업이라고 할 수 있다그때 의대생이나 의전원생들에게 여러분들이 노동자를 진료하는 일이 얼마나 될 것 같으냐고 물어보면 잠시 정적이 흐르고 대부분 고개를 갸우뚱한다. 학생들 머릿속에는 병원에서 보는 환자 이외에는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덧붙여 이야기하며 여러분들이 만나게 될 환자분들은 일을 하고 있거나 과거에 일을 했거나 앞으로 일을 해야 할 사람일 가능성이 높음을 상기시켜 주곤 한다. 그런데 학생들에겐 의학지식보다 어려운 것이 직업을 묻는 일인 것 같다 환자들에게 "무슨 일 하십니까?" 물어보면 대답이 쉽게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한국 사회에 흐르는 직업에 대한 편견도 작동하지만, 의사들에게 직업에 관해서 이야기한 적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의사들은 직업을 물어보지 않는다.

그것은 직업을 아는 것이 치료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거나, 직업을 물어보는 것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의사가 그것을 배운다고 가정하더라도 그 직업을 다 이해하거나 그 일이 병의 원인이나 치료, 이후 재활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쉽게 알아차릴 수 있을까오히려 노동자들이 환자가 되었을 때 자기 일이나 자신이 사용한 화학물질이나 자신이 의심가는 상황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고 업무와 관련된 것인지 의사와 상담할 시간을 충분히 주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 생각도 해본다. 둘 다 어느 한쪽의 노력만으로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직업환경의학과 의사들도 "당신은 무슨 일을 하세요?" 같은 질문을 많이 받는다. 막상 우리가 무슨 일을 하는지 질문을 받으면 그것도 쉽게 설명하기 어렵다. 왜 그럴까? 앞서와 비슷한 이유로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는 직업, 노동과 의료, 건강이 쉽게 연결되지 않는다. "건강하게 일하기"를 위해서 직업환경의학과라는 전문 과목까지 생겼음에도, 여전히 현실은 이윤을 표방하는 기업 논리 앞에 노동자의 건강권은 한없이 작아지고 만다. 

이렇게 직업, 노동과 괴리된 의료, 건강에 대한 인식 외에 또 하나의 문제가 있다. 직업을 물어보고 일하는 과정에서 노출되거나 문제가 될 수 있는 상황을 설명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생명을 다룬다는 병원에서도 시간은 돈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돈을 못 버는 과는 공간과 시간이 축소되거나 폐과되고, 돈이 안 되는 행위들은 서서히 자취를 감춘다. 그래서 사실 돈이 안되는 직업환경의학과는 사실상 늘 존재증명을 해야 하는 과이다.

현대인의 질병의 원인이 70%가 흡연이라고 하지만, 의사들이 환자의 금연에 시간을 많이 쓰지 않는 것이나, 질병에 대한 직업의 기여도가 2~10%라고 하지만 의사들이 직업에 관심을 가지지 못하는 이유는 이런 몇 가지 구조적이고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다. 불행 중 다행으로 이제는 "무슨 일을 하십니까?"라는 질문을 진료실에서 한번 더 고민할 이유가 몇가지 생겼다.

내년부터 고용노동부에서 보건관리대행이나 근로자건강진단 시에 직업환경의학과 의사들이 산재신청을 도울 수 있도록 체계를 만들기로 한 것이다. 또한 업무상 질병에 대해서는 노동자가 불필요하게 복잡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 당연 인정기준에 해당하면 이전보다 쉽고 빠르게 산재로 인정받아 조기에 치료받을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하고 있다또한 산재 인정 여부와 관계없이 근골격계 질환이나 뇌심혈관계 질환 중 고위험 직종이나 업종에서 근무하는 경우 산재 특진 과정에서 진단과 치료에 대한 비용을 공단이 부담하여, 적절한 시기에 치료적 개입을 통해 노동자 건강을 보호할 수 있는 길도 열렸다. 서울시에서는 지자체 예산으로 근골격계 다발 위험업종이나 아파도 경제적 이유로 치료를 미루던 노동자들을 위해 유급 병가제도를 내년에 시행할 계획이다. 

그동안 일하다가 병을 얻었지만, 업무상 질병인정이라는 험난한 길을 걷기 주저했던 많은 분들, 그리고 그 가치가 저평가 되었던 많은 직업환경의학과 의사들에게 좋은 소식이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제도라도 반대 세력이 있고, 좋은 무기를 가졌더라도 잘 연마하고 사용하지 않으면 쓸모가 없어지는 것이다노동자와 직업환경의학과 의사들이 "직업을 물어보고, 자신이 하는 일을 잘 설명하여" 변화하는 제도를 통해 서로를 살리는 관계가 되길 바란다. 직업환경의학과 의사도 노동자들이 건강하게 일할 수 있도록 돕는 같은 곳을 바라본다는 사실을 서로가 잊지 않는다면 앞으로의 만남이, 직업을 물어보는 일들이 조금 더 편안해질 수 있을 것 같다.


[직업환경의사가 만난 노동자 건강 이야기]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 2018.09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권종호 선전위원, 직업환경의학 전문의


요긴한 것이 없어지면 다른 것으로 대체하면 된다는 의미로 많이 쓰이고 실제로 그렇게 일이 해결된 후 자신감을 표현하면서 쓰기도 한다. 하지만 잇몸까지 쓰는 상황이 좋을 수는 없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잇몸을 써야 할 상황이 온다면 훨씬 조심해서 써야 한다. 잇몸까지 상하고 나서는 더 이상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를 외칠 수는 없으니 말이다.

얼마 전 출장을 나간 곳에서 방아쇠 수지로 고생하고 있는 노동자를 만났다. 에어건(air gun)을 온종일 쓰면서 방아쇠를 수시로 당기니 검지 쪽인대에 전형적인 방아쇠 수지가 생겨버렸다. 병원에 다니면서 주사도 맞아봤지만, 그때뿐이고 어차피 검지를 계속 쓰면 더 안 좋아진다는 이야기에 이제는 중지로 방아쇠를 당기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래서 가능하면 왼손, 오른손, 검지, 중지를 번갈아 가면서 쓰는 게 좋겠다고 이야기했더니 그럴 수 있었으면 아플 일도 없었겠다 한다.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나오는 물건을 처리하는 동안 쉴 틈 없이 방아쇠를 당겨야 하고 조금만 신경을 못 써도 하자가 생기곤 하니 손가락이든 자세든 바꿀 틈 같은 건 없다고 한다. 결국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똑같은 일에 검지 대신 중지를 쓰는 것, 이 대신 잇몸을 내어주는 것뿐이다. 식품 포장하면서 철끈을 돌려 묶느라 손목에 수근관 증후군이 생겼던 다른 노동자는 오른손을 수술받고 아껴 쓰는 동안 왼쪽 손목에 수근관 증후군이 생겨버렸다. 자동차 정비를 하던 노동자는 테니스 엘보우를 치료받는 동안 어깨의 충돌증후군이 심해졌다. 쉼 없이 공장이 돌아가는 동안 노동자는 이가 깨지고 결국 잇몸마저 내어주게 되는 것이다.

평생 흔하게 발생하는 질환이 근골격계 질환이다. 특히 오랜 시간에 걸쳐 진행된 퇴행성 근골격계 질환의 대부분은 전업주부든 사무직이든 생산직이든 자영업자든 자신의 직업과 관련성이 매우 클 수밖에 없다. 인생의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부분을 직업이라고 할 수 있고 한국과 같은 장시간 노동 사회에서는 인생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때문에 과정 상 그것이 자세와 관련된 것이든 잦은 사용과 관련된 것이든, 개인적인 특성에 의한 것이든 오랜 시간 근골격계가 변형되게 만드는 데 있어서 직업은 배제할 수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근골격계 질환은 개인이 건강보험을 통해 치료받고 있다. 예를 들어, 사무직 노동자에게 요통이 발생했다고 하자. 오래 앉아서 근무하는 환경, 의자 및 책상의 좋지 않은 구조, 활동량이 적어 생기는 복부비만, 허리를 굽히는 자세 등 수많은 직업과 관련하여 파생된 요인들이 요통의 원인이 되겠지만 결국 그 노동자는 별다른 고민 없이 자비로 병원진료를 받고 치료를 받는다. 산재는커녕 공상조차 이야기하지도 어쩌면 생각하지도 못한다. 오히려 ‘이런 경우에는 산재해줘야 하는거 아냐?’라는 전혀 진지하지 않은 농담을 상사로부터 듣기도 한다. 한편, 병원에서는 ‘너무 오래 안 좋은자세로 앉아있어서 그래요. 계속 앉아만 계시면 안 돼요. 한 시간에 10분은 일어나서 스트레칭 하세요.’라며 가장 중요한 원인을 당연히 가장 오랜시간을 들이고, 불편한 자세를 강제하는 노동자의 직업에서 찾는다.

실제로 독일에서는 이러한 직업 관련한 근골격계 질환에 의한 사회 경제적 손실을 매우 큰 것으로 나타났다. 전체 근로손실일수의 약 25%, 98억 유로의 생산 손실(2009년), 조기 은퇴하고 조기 노령 연금을 수급하는 이유 중 정신 질환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원인, 치료, 재활, 간병에 연간 250억 유로 사용 등 실제 사회가 근골격계 질환으로 입게 되는 손실은 어마어마했다. 이에 독일의 산업안전보건 종합계획에는 지속해서 근골격계 질환에 대한 예방 대책이 있고 개선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반면에 한국은 근골격계 질환에 대한 직업 관련 손실이 통계조차 잡히지 않는다. 명백한 재해로 인한 근골격계 질환조차 공상처리를 강요하여 산재를 은폐하며, 질판위에서는 아직도 퇴행성 질환은 직업 관련성이 떨어진다는 논리가 나오고있는 상황이니 앞서 사무직 노동자의 예와 같이 직업 때문이지만 건강보험으로 치료되는 많은 경우는 확인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이를 확인하려는 관심조차 없다. 이렇게 직업 관련 근골격계 질환의 크기조차 확인이 안 되고 대부분 자비로 치료하는 상황, 이가 없으면 알아서 기꺼이 잇몸을 내어주는 노동자들이 있는 현실에서 어떤 사업주가 나서서 환경을 개선하려 할 것인가.

이제는 직업성 근골격계 질환의 인정 범위를 획기적으로 넓히고 이를 신청할 방법도 매우 간소화 시켜야 한다. 다른 질환보다 특히 근골격계 질환에 대해 이러한 과정을 간소화 시켜야 하는데, 이는 감기처럼 흔하면서 간단하게 진단할 수있는 질환은 동네 병원에서 치료 받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근골격계 질환이 직업성 암이나 뇌심혈관계 질환과 같은 중증 질환과 꼭 같은 과정을 통해 확인될 필요가 있을까, 현재는 제대로 된 질환의 규모를 먼저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다. 이를 통해 직업에 기인할 수밖에 없는 근골격계 질환이 더 이상 건강보험을 잠식하지 않도록 해야 하고 그만큼의 재정 부담을 그 원인 제공자인 사업주에게 산재 보험금 인상 등으로 물어야 한다. 근골격계 사고의 예방, 작업 환경에 대한 인간공학적 개선, 작업 간 휴식 시간을 통한 근골격계 피로 회복 등의 대책은 관리 감독만으로 해결되기보다, 직업에 의한 근골격계 질환의 부담을 사업주가 제대로 지게 될 때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직업환경의사가 만난 노동자 건강 이야기] 폭염 속에 노동자들이 죽어간다 / 2018.08

폭염 속에 노동자들이 죽어간다

김정수 (직업환경의학 전문의, 공감직업환경의학센터 향남공감의원 의사)


며칠 전 오후, 진료실에 30대 중반의 한 남성이 들어왔다. 건장한 체격과 달리 얼굴은 창백하고 힘이 없어 보였다.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어요?"
"땀을 너무 많이 흘려서 그런지 몸에 힘이 하나도 없고, 머리도 아프고, 찬물을 많이 마셔서 그런지 설사를 해서요."
"무슨 일을 하세요?"
"토목 공사요."
"그럼 바깥에서 일하시는 거 아니세요?"
"네, 맞아요."
"이렇게 더울 때도 일을 하세요?"
"공사 기한 맞추려면 어쩔 수 없어요."


역대 최악이라고 불리는 폭염이 며칠째 계속되고 있을 때였다. 병원을 제 발로 찾아오셨고 이정도의 대화를 나눌 수 있으니 의식은 멀쩡해 보였고, 다행히 체온도 정상 범위 내였다. 그런데 30대 성인 남성치고는 혈압이 상당히 낮았다. 폭염 속에서 일을 하다 보니 땀을 많이 흘려 탈수증상이 나타난 것 같은데, 찬물을 너무 많이 마신 탓에 설사를 해서 수분이 충분히 흡수되지 않아 오히려 탈수 증상이 심해진 듯 했다. 

환자에게 생리 식염수에 각종 비타민과 미네랄이 포함되어 있는 수액을 처방하고, 폭염 상황에서는 작업을 중단할 것, 어쩔 수 없이 작업을 해야 할 경우 중간 중간 그늘에서 충분한 휴식을 취할 것, 얼음물보다는 적당히 시원한 물을 마실 것, 물을 마실 경우 반드시 식염을 함께 먹을 것, 물보다는 이온음료를 마실 것 등을 권고하였다.

올해 7월 말까지 온열 질환자가 2천 명이 넘고, 이미 20여 명이 숨졌다고 한다. 올 여름이 다 지나고 나면 사망자는 더 늘어나 있을 것이다. 뜨거운 환경에 노출되어 열 때문에 생기는 질환을 온열 질환이라고 하는데, 열경련(heat cramp), 열실신(heat syncope), 열피로(heat exhaustion), 열사병(heat stroke) 등이 있다. 열경련은 뜨거운 환경에서 격렬한 운동을 하고 난 이후에 근육이 수축되면서 국소적인 통증과 근육경련이 생기는 것이다. 

열실신은 말초혈관 확장 등으로 인한 일시적인 저혈압 때문에 나타나는 증상이다. 열피로는 땀을 많이 흘리는데 수분을 제대로 보충하지 못하는 경우에 생기는 피로함이나 어지러움, 두통, 구토 등의 증상을 말한다. 이런 질환들은 생명을 위협할 정도로 심각한 것은 아니어서 서늘한 환경에서 수액을 공급해주면서 전해질 균형을 맞춰주면 보통 회복이 잘된다. 며칠 전 그 환자도 열실신 혹은 열피로 정도로 진단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열사병은 체온을 유지하는 기능에 문제가 생기면서 체온이 40도 이상으로 올라가고, 의식변화가 생기며, 적절한 치료를 하지 않는 경우에는 사망에 이를 수 있다. 특히 체온 조절 기능이 떨어지는 노인들은 열사병에 취약하므로 주의를 해야 한다.

그런데 올해 7월 말까지 온열 질환으로 사망한 20여 명 중 30~40대 사망자가 6명이고, 이 중 4명이 야외 작업 중에 사망했다고 한다. 역대 최악의 폭염이라니 젊은 노동자들까지 죽음에 이르는 것이 이해가 되는 측면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그 노동자들은 이런 무더위에, 연일 폭염 특보가 발효되고 있는 이런 상황에, 뉴스에서 매일같이 폭염으로 인한 사망 소식이 들려오는 이런 상황에, 뙤약볕 아래에서 꼭 일해야만 했을까? 이 노동자들의 사망은 명백히 업무로 인한 사망이고, 그 뙤약볕 아래에서 일하지 않았다면 예방할 수 있었던 사망이다. 그것을 예방하는 것이 산업안전보건법의 취지이자 국가의 의무가 아닌가? 하지만 고용노동부의 대응은 안일하기만 하다.

고용노동부는 얼마 전 「열사병 예방 3대 기본수칙 가이드」라는 보도자료를 통해 '폭염주의보(33℃) 발령 시에는 시간당 10분씩, 폭염 경보(35℃) 발령 시에는 15분씩 휴식'하라고 안내하였다. 그러나 고용노동부의 이 지침은 습도가 높은 우리나라 여름 기후의 특성을 무시하고 단순히 기온을 기준으로 하고 있는 데다, 휴식을 제공하라는 기준 기온이 지나치게 높아 온열 질환 예방의 효과가 의심된다. 기상청은 이미 기온 외에 습도를 포함한 건구습구온도(WBGT 온도, 더위체감지수)를 제공하고 있고, 건구습구온도가 30도를 넘을 경우 옥외 작업은 모두 중단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예를 들어 7월 31일 정오 기온은 34도로 고용노동부 지침은 시간당 15분씩 휴식하는 것이면 족하지만, 건구습구온도는 33도로 기상청 권고에 따르면 실외 작업은 중단해야 한다. 이러니 고용노동부 지침의 실효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실제로 작업 현장에서 이 지침이나마 제대로 지켜질지 그 또한 심히 의문이다.

올여름은 1994년 이후 24년 만에 가장 더운 해였다. 지구 온난화로 인해 이상 기후 현상이 전 지구적으로 가속화되고 있다. 24년 만의 폭염이라는 기록은 앞으로 단축될 가능성이 높다. 이런식이라면 앞으로는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노동자가 폭염 속에서 작업하다가 죽게 될 것이다. 폭염 속 노동자들을 살리려는 조치가 시급하다.

[직업환경의사가 만난 노동자 건강 이야기] 입사 6개월 만에 폭삭 늙는 신규 간호사들에 대한 이야기 / 2018.07

입사 6개월 만에 폭삭 늙는

신규 간호사들에 대한 이야기

이이령, 운영집행위원/직업환경의학 전공의


지난 6월 월드컵 기간 동안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 신태용 감독의 수명은 모르긴 몰라도 한참 줄어들었을 겁니다. 1차전 스웨덴과의 시합 전 결의에 찬 당당한 표정은 두 경기를 내리 진 1주일 만에 폭삭 늙고 지친 표정으로 변했습니다.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의 직무스트레스는 너무 심해 감독 개인의 건강을 위해서는 아무도 안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엉뚱한 연상일 순 있지만 짧은 시간에 폭삭 늙어버린 신태용 감독을 보고 나니, 저는 특수건강진단 문진을 할때 만나는 신규 간호사들이 생각 났습니다.

신규 간호사 대상 특수건강진단

#1. 23세 여성 신규 간호사인 김신규(가명)가 ‘배치전 건강진단’을 위해 진료실에 들어온다. 아직 근무시작 전인 그녀는 학생 때 보고 들은 병원 생활에 대한 걱정이 있었지만 그래도 첫 직장에 대한 신기함과 기대감이 있는 밝은 표정이다. 어디 아픈 데 없이 튼튼하다고 한다. 나는 야간근무, 교대근무, 직무스트레스 등 간호사의 근무환경과 건강 영향에 설명한 후, 잘 지내고 6개월 후에 건강한 모습으로 보자고 하였다.

#2. 첫 번째 ‘특수건강진단’ 문진으로 만나게 되는 김신규 간호사는 진료실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6개월 전과 다르다. 얼굴의 모든 근육엔 힘이 없는 듯한 무표정으로, 졸린 듯 눈은 반쯤 감긴 상태로 돌을 얹은 듯 축처진 어깨를 겨우 끌고 터벅터벅 들어와 의자에 풀썩 앉는다. 심하다고 느끼는 신체 증상엔 피로감, 눈 충혈, 팔 · 다리 · 어깨· 허리 통증, 하지 부종, 소화불량, 불면증 및 불규칙한 생리 등이 있고, 모두 입사 후 생긴 증상이라고 한다. 이쯤 되면 증상 백화점 수준이다. 증상과 근무환경 등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니 이제야 나에 대한 신뢰가 생겼는지, 여러 어려움에 대해 얘기하며 눈시울이 붉어진다. 나는 조직적 · 개인적 해결책을 나름 얘기해주지만, 그녀의 조건에서 모두 적용할 수 있는지는 확신이 안선다. 그래도 진료실을 나가는 표정과 발걸음은 들어올 때 보다는 그나마 낫다. 내가 해결해준 건 하나도 없지만, 짧지만 얘기를 들어주고 아픔을 공감해주는 사람이 있어서였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故 박선욱 간호사도 신규 간호사였다

위의 내용은 특수건강진단 시 흔히 만나게 되는 신규 간호사의 사례입니다. 특수건강진단을 하다 보면 여러 업종의 노동자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 중 가장 많은 신체 증상을 호소하는 직군은 50대 남성 경비 노동자도 40대 여성 급식 조리 노동자도 아닌,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어린 입사 후 6개월가량의 신규 여성 간호사들입니다.

지난 2월 고 박선욱 간호사가 스스로 삶을 마감한 것도 신규 간호사로 근무한 지 약 6개월 만에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취직하기 어려운 요새 세상에 대학 병원 간호사면 안정적이며 월급도 괜찮은데, 남들 다 참으며 잘 다니는데 그걸 못 참냐며, 적응을 못 하는 개인 탓 아니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태움’, 부족한 교육, 병원의 고질적인 인력 부족, 고강도 장시간 노동, 생명을 다루는 업무 스트레스, 회사 내 지지체계의 부족 등의 여러 구조적 문제는 신규 간호사가 감내할 수 없는 수준입니다. 신규 간호사의 1년 내 이직률이 40%에 육박하는 국내 현실은 구조적 문제의 심각성을 보여줍니다. 온갖 곳이 아픈 채로 회사에 다니거나, 견디지 못한 채 퇴사하거나, 퇴사도 어려워 급기야 삶을 마감함으로써 퇴사하는 상황까지 벌어집니다. 직무스트레스, 감정노동 등으로 입사 6개월 만에 표정이 없어진 채 몸과 마음이 폭삭 늙어버리는 것은 김신규 간호사, 故 박선욱 간호사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신규 간호사들 이야기일 것입니다.


해결은 가능해야한다

이런 상황을 신규 간호사 혼자 해결하긴 어렵고, 직업환경의학과 의사가 야간노동자 특수건강진단으로 해줄 수 있는 것도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개인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누군가가 대신 해결해주는 것이 아니라, 당사자들이 주체적이며 집단적으로 고민하고 제기하고 해결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필요합니다. 최근 간호사의 임신순번제, 장기자랑, 야간근무 수당 등의 문제가 사회적 이슈화되어 간호사·간호조무사 등이 노동조합을 만들어 스스로 병원을 바꾸고 있는 대구가톨릭대병원 사례, 민주노총 의료연대를 비롯해 간호사단체 · 개별 간호사 및 노동시민사회 단체들이 공동으로 구성하여 활동하는 ‘고 박선욱 간호사 공대위’ 등이 좋은 사례일 것입니다. 

그리고 노동조합이 있다는 것에 안주하지 않고, 서울대병원 등 여러 노동조합처럼 지속해서 노력하는 것도 중요할 것입니다. 노동자들만 노력한다고 완전히 해결하긴 어려울 것입니다. 보건업은 근로기준법이 개정된 시끄러운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노동시간 특례업종입니다. 교대·야간근무를 하는 보건의료노동자는 건강 측면에서 노동시간이 오히려 더 짧아야 하며, 유럽 등 대부분의 해외에서는 보건업도 노동시간 규제의 예외가 아닌 점 등을 고려하면, 간호사의 장시간 고강도 노동·인력 부족 등을 해결하기 위한 국내 법 · 제도적 변화는 가능하며 필수적입니다. 그리고 당연히 학교와 병원도 신규 간호사 교육의 내실화, 직무스트레스 및 감정노동관리, 이직률 감소를 위한 정책 그리고 학생 때부터의 노동안전보건 교육 등 다방면으로 노력해야 합니다. 체념 · 이직 · 퇴사 그리고 죽음 이외에, 가치 있고 즐거운 병원 간호사 생활은 실현 가능한 목표이며, 같은 병원 동료로서도 꼭 그렇게 됐으면 좋겠습니다.

[직업환경의학 의사가 만난 노동자 건강 이야기] 직업환경의학과 의사가 신명나게 일할 수 있으려면 / 2018.06

직업환경의학과 의사가 신명나게 일할 수 있으려면

[직업환경의학 의사가 만난 노동자 건강 이야기]

이정엽 (직업환경의학 전문의)


전공의 3년차가 되어 처음으로 출장 검진을 시작한 지 불과 며칠 되지 않았을 때였다그 날 방문한 곳은 경북 고령에 위치한 사업장으로 불과 8명의 노동자들이 공업용 줄을 만드는 영세한 곳이었다그 곳에서 줄의 표면을 가공하기 위해 탁상 그라인더를 3년 째 다루고 있는 한 50대 노동자를 만나게 되었다. 

그라인더와 같이 진동이 발생하는 공구를 쥐고 장기간 사용할 경우에는 손에 있는 말초혈관과 말초신경 등에 손상이 생기는 수완진동 증후군이 발생할 수 있다그래서 근로자 특수건강진단에서는 착암기연마기굴착기 등 진동공구를 취급하는 작업자들이 진동과 관련된 문진 및 진찰을 받도록 되어 있다. 

손가락이 저리거나 감각이 떨어지는 증상은 없으세요?

"얼마 전부터 양쪽 손이 다 좀 저리고요특히 두 번째 손가락은 좀 얼얼한 것 같습니다." 

아 그러세요혹시 겨울철이나 추울 때 손가락 색깔이 하얗게 변하지는 않으세요?

"맞아요어떻게 아셨습니까추울 때 손가락 끝이 하얗게 변하는 걸 본 적 있습니다." 

진동공구를 다루는 직업력저리거나 감각이 떨어지는 신경 증상그리고 혈액순환 저하로 인해 추운 환경에서 악화되는 손가락 창백 현상까지수완진동 증후군의 전형적인 소견이었다손톱 압박 검사에서도 혈색이 금방 돌아오지는 않는 듯 보였다이러한 증상이 그라인더 사용에 의한 직업병일 수도 있다는 설명과다른 원인의 배제 및 정확한 진단을 위해 추후 병원 방문 및 추가 검사가 필요할 수 있다는 안내를 드렸다. 

이후 몇 명의 검진을 더 진행한 뒤 다른 어떤 직원이 씩씩거리며 내 앞에 앉았다자신은 이곳의 관리자인데 조금 전 그라인더 작업자와의 대화를 들었다며 갑자기 직업병이 대체 무슨 말이냐고 다짜고짜 따졌다. 

"그 사람보다 그라인더 작업을 오래한 사람들도 다 멀쩡한데 그게 무슨 직업병이요그리고 그런 걸 다 직업병이라고 하면 대체 그 작업을 할사람은 누가 있단 말이요?" 

예상치 못한 항의에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나는 그 사람이 직업병이라는 게 아니라 직업병의 가능성이 있으니 설명만 드린 것이고 정확한 진단은 추가 검사를 해보아야 알 수 있다는 식으로 답을 했다. 

더 큰 사건은 출장검진을 마치고 병원에 돌아온 이후 발생하였다그 관리자로부터 병원에 직접 전화가 와서 아까 그 직업병 이야기는 말도 안되는 소리고 직업병 판정이 나면 그 사람은 바로 해고시켜 버릴 거라며 아까 그 의사 전화 바꿔보라고 소리를 질렀다는 것이다. 

나는 허락도 없이 개인 검진 내용을 엿들은 것도 모자라 이미 충분히 설명을 했는데도 그렇게 협박조로 나오는 그 관리자에게 언짢은 감정이 들었다나는 우선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니 2차 검사는 시행해 보려고 했다하지만 2차 검사 비용은 사업주가 부담을 해야 하는데 사업주가 그 비용을 낼 수 없다고 버텨서 어쩔 도리가 없었다. 

매년 검진을 해오던 사업장에서 강한 불만이 나오니 병원 직원들도 부담을 느끼는 것 같았다그리고 나에게는 무엇보다 직업병 판정이 나면 그 사람을 해고시켜 버릴 거라는 그 관리자의 엄포가 가장 무겁게 다가왔다노동자 본인에 있어서 실직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는 상황은 자신의 손가락 색깔이 창백하게 변해가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재해'일 수 있었다관리자의 협박은 무섭지 않았지만 나의 결정이 그 분의 삶에 도움은커녕 도리어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가능성때문에 나는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결국 2차 검사는 시행되지 못하였고 '보호구 착용 철저추적관리'라는 다소 무책임한 조치명이 새겨진 결과지를 발송하는 것으로 이 사건은 끝이 나고 말았다. 

그날 저녁 퇴근을 하고 나서 나는 아내에게 그날 겪었던 일과 고민에 대해 털어놓았다직업병의 조기 발견을 위해 시행하는 검진이지만 직업병을 발굴해 내는 과정에서 때로는 회사병원심지어 노동자까지 그 어느 누구도 그 과정을 달가워하지 않을 수 있다는 딜레마를 겪고 난 이후의 혼란스러움과이러한 딜레마 속에서 나는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직업환경의학과 의사의 본분에 충실할 수 있는 길인지에 대한 고민에 대해 이야기를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아마도 그 즈음부터 나는 의학 서적 내용만 읽어 내려가던 우물 안 개구리에서 벗어나우리나라의 안전보건 및 산재보상 제도노동법에 명시된 노동자의 권리 등에 대해 조금씩 관심을 가지며 그러한 상황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사회적 배경을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 

직업환경의학과 의사가 그러한 모순에 빠지지 않고 노동자들의 직업병을 정확하게 진단하며 그들이 합당한 보상을 받도록 적극적으로 돕기 위해서는 어떠한 전제 조건이 필요할까나의 생각에는 '실효성 있는 제도'와 '노동자들의 적극적 참여'의 두 바퀴가 동시에 굴러가야 하며 바퀴가 도중에 멈추지 않도록 윤활유 역할을 하는 '사회적 공감대'가 뒷받침되어야 할 것이다. 

산재 은폐를 조장하는 개별실적요율제검진기관이 사업주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계약방식 등 현재의 제도에 대해서는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노사정이 함께 머리를 맞대어 노동자의 건강보호에 좀 더 기여할 수 있는 방향으로 개선을 하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또한 고용에 있어 건강상의 이유로 부당하게 가해지는 불이익은 절대 용납될 수 없다는 원칙 아래 많은 노동자들이 단결하여 목소리를 낸다면 직업환경의학과 의사들도 안심하고 자신의 본분에 충실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노동자들이 사업주의 부당한 행위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필요 시 행정절차를 밟는 것이 '불만이 많고 별난일부의 행동이 아니라 노동자라면 누구나 선택할 수 있고 주변으로부터 지지를 받는 '당연한대응 방식으로 사회적 인식이 바뀌게 된다면 노동자들도 비로소 주변의 시선을 불편해 하지 않고 자신의 건강권을 위해 행동할 수 있을 것이다그렇게 된다면 그 사업주도 더 이상 "직업병 받으면 해고시켜 버리겠다와 같이 법과 노동자의 권리는 안중에도 없는 발언을 그토록 당당하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 공동체가 그러한 사회로 한 발짝 더 내딛는 만큼 직업환경의학과 의사들은 자신들이 그동안 갈고 닦은 능력을 노동자 건강을 위해 더 신명 나게 펼쳐 보일 수 있을 것이다한편으로는 그러한 사회적 변화를 수동적으로 기다릴 것이 아니라 나 자신도 노동자들의 권리 신장을 위한 많은 이들의 노력에 항상 관심을 가지고 함께하리라 다짐해본다.

[직업환경의사가 만난 노동자 이야기] 진단보다 치료가 우선 / 2018.05

진단보다 치료가 우선

권종호 직업환경의학 전문의

서울 시내의 지하철 건설 현장으로 출장 검진을 나간 날이었다. 새벽부터 때 묻은 작업복에 안전화 차림으로 줄을 서서 기다리던 노동자들은 한창 정선에서 채광이 한창이던 때 갱도로 내려가려는 광부들의 모습처럼 보였다. 서울 한복판에서 보는 1970년대 광부들의 모습에 이질감을 느끼던 것도 잠시, 이내 정신없는 문진이 시작되었다. 문진이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아 여기저기 볼멘 목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매년 똑같은 폐기능 검사, 청력 검사를 뭐하러 하느냐." 
"검사한다고 달라질 것도 없고 나아질 것도 없는 그런 검사들을 병원이 돈 벌려고 하는 것 아니냐." 
"차라리 그 돈으로 사람을 더 써주던가, 환풍기를 좋은 걸로 바꿔주던가, 소음이나 좀 줄일 수 있게 개선해 달라."

실제로 지하철 건설 현장의 상황은 매우 열악하다. 예를 들면, 지하철 건설 현장 위의 도로를 뒤덮은 철판 소음 같은 것이 있다. 밖에서는 그 위를 차로 지나면서 잠깐 소음을 접하지만 지하의 건설 현장은 그 소음을 직접, 그것도 작업 시간 내내 접하게 된다. 그럼에도 건설 현장 특성상 산재 사고의 위험이 크고 작업자들 간 의사소통을 하며 진행해야 하는 작업이 많기 때문에 귀마개에 귀덮개 까지 할 정도로 차음 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때문에 다른 건설 현장에 비해 소음성 난청인 노동자들이 훨씬 많고 그 정도도 심각했다.

아무리 청력 검사를 하고 수십 명의 소음성 난청자가 나와도 개선되지 않는 현실에 볼멘소리가 나올만하다. 위험해서, 작업의 특성상 귀마개를 할 수 없는 상황이니 이대로 청력 손상을 두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인가. 이럴 경우 매우 큰 소리는 줄여주고 주변의 작은 소리는 반대로 적정 수준으로 증폭시켜주는 귀덮개를 적절히 사용하면 청력 손상을 다소 완화 할 수 있다. 실제로 공항에서 일부 사용하고 있고 최근에는 공군에서도 2016년부터 2022년까지 1만 개를 공급하기로 했다.

지하철 건설 현장에는 매년 반복되는 청력 검사보다 위와 같은 보호구가 더욱더 절실하다. 이러한 보호구로도 부족하다면 추가적인 시설 개선도 필요할 수 있다. 즉, 검사를 통한 진단보다 문제 되는 질환에 대한 치료가 시급한 것이다. 현재의 상황은 감기 환자가 폐렴으로 진행되는 것을 확인하고도 적절한 항생제 치료 없이 감기약만 주는 것과 같다. 좀 더 자세히 비유하자면 폐렴이 악화되는 것을 매년 강제적인 엑스레이 촬영으로 확인하면서 제대로 된 치료는 전혀 하지 않는 매우 비정상적인 상황이다. 

물론 정확한 진단과 조기 발견도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의 궁극적인 목표는 적절한 치료가 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폐렴을 다시 예로 들면, 폐렴을 치료하기 위해 사용하는 항생제는 폐렴의 원인이 되는 여러 종류 세균 중에 정확한 원인균이 세균 배양 검사를 통해 밝혀지지 않았더라도 정황상 예상되는 세균에 대해 효과가 좋을 것으로 보이는 '경험적 항생제'를 통해 치료를 먼저 시작한다. 더 큰 손상을 막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치료가 정확한 진단에 앞설 수 있다는 것이다.

특수건강진단, 근골격계 유해요인 조사, 위험성 평가, 직무스트레스 및 뇌심 발병 위험도 평가 등 노동자들은 수많은 '진단' 과정을 매번 겪고 있고 이를 통해 발견된 노동 환경 문제들에 대한 개선 '처방'까지 그 안에 포함되어있다. 하지만 정작 실제 현장을 바꾸는 '치료'는 얼마나 되고 있는가. '치료'에 해당되는 시설 및 보호구 개선, 인력 충원 등에 '진단'에 사용되는 비용만큼이라도 사용되고 있는가. '진단'으로 행해지는 항목을 일부 조정해서라도 '치료'를 위한 비용으로 사용할 수는 없을까(실제로 특수건강진단으로 청력검사를 재검까지 모두 시행하는 경우 비용은 6만 원 정도. 반면 귀덮개 정가는 18만 원 정도다).

핸드폰이 컴퓨터의 성능을 뛰어넘는 시대, 청소 로봇이 상용화된 시대이다. 그만큼 노동 환경을 개선할 수 있는 기술도 크게 발전해왔다. 하지만 노동 현장에서는 법적으로 정해진 '진단'과 '처방'에 사용될 비용이 있을 뿐 발전된 기술을 통해 '치료'하는데 쓰일 비용은 필요 없다. 누구도 강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특수건강진단을 위해 길게 줄지어선 노동자들 사이의 볼멘소리는 이와 같은 비정상적인 '진단'과 '치료' 상황에 대한 당연한 불만인 것이다.

[직업환경의학 의사가 만나 노동자 건강 이야기] 공포의 빵 공장 / 2018.03

공포의 빵 공장

권종호 직업환경의학전문의


얼마 전 제빵 공장에 특수 건강 검진 출장을 다녀왔다. 24시간 빵을 만드는 라인이 돌아가는 곳이라 대부분 직원이 주야 2교대 근무를 하고 있었고 1주일 위로 교대하는 패턴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일주일 내내 야간 근무를 하고 다음 주는 주간 근무로 돌아가는 근무 형태에서 제대로 된 잠을 자기는 매우 힘들다. 그래서안전보건공단의 ‘교대 작업자의 보건관리지침’은 ‘야간작업은 연속하여 3일을 넘기지 않도록한다.’고 권고하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지침 때문에 검진을 시작하기 전에는 감시단속 노동에도 해당하지 않는 일반 제조업이 교대 근무를 일주일 단위로 하니 수면 장애나 다른 건강문제들이 심각할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의외로 수면 장애를 호소하는 노동자가 매우 드물었다. 대부분은 잠드는데 걸리는 시간도 짧고 한번 잠들면 깨지 않고 잘 잔다고 했다. 검진이 한참 진행되고서야 10년 넘게 일하셨다는 분을 통해서 그 이유를 들을 수 있었는데 그 이야기를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24시간 내내 빵 공장이 돌아가는데 그렇게 하려고 아침 7시에 출근해서 저녁 7시까지 근무한다. 야간은 다음 한 주간 저녁 7시부터 다음 날 아침 7시까지. 일 시작 시간이 7시인 거지 옷 갈아입고 준비하는 시간 생각해서 30분에서 1시간 일찍 출근한다. 점심시간은 20분 안에 줄서기, 배식받기, 식사하기 등을 모두 마치고 제자리에 돌아가고 이외의 쉬는 시간은 거의 없다. 10년 넘게 일하는 동안 주 5일 근무는 해본 적이 없다. 찐빵이 만들어지는 가을부터 겨울까지 주 7일 근무를 하기도 한다. 업무마다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대부분 서서 몸 쓰는 일이고 쉴 시간이 거의 없이 일하는 데다 근무 시간도 길다보니 대부분 집에 들어가면 다른 생활이 없이 잠만자게 된다. 하루라도 쉬는 날이 생기면 그런 날은오히려 더 잠만 자게 된다.’

이후에 검색해보니 인터넷상에 이 공장은 이미 ‘공포의 빵 공장’으로, ‘제빵 업계의 원양어선’으로 불리고 있었다. 이 공장에서 근무했다는 사람들의 후기를 일부 인용해 보겠다.

“진짜로 힘들고 고단하면 그렇게 술 마실 기력도 없습니다. 생각도 안 듭니다. 기숙사 내에서 술 마시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전체적으로 조용하고요. TV도 잘 안보죠. 술은 최소한 인간일 때 마시는 겁니다.”

“그래도 좋은 점은 여유가 없고 너무 빡빡해서 인간관계의 스트레스는 적습니다. 애초에 영혼을 빼버린 듯한 좀비들만 일할 수 있는 곳이라서. 사람간의 갈등은 적은 편.”

“쉬는 시간이 30초 같은 느낌 느껴봤어? 월급이 200이 넘는데 200만원 보다 100만원 받고 살고 싶다는 생각해봤어? 이거 말고 뭐든지 잘할 수 있다는 생각 군대 때 말고 해본 적 있어?”

아무리 연장, 휴일, 야간 수당을 모두 받는다 하더라도 일과 잠이 생활에 전부가 되어버릴 정도의 노동 조건이 가능해서는 안 된다. 장기 매매, 매혈을 법적으로 금지한 것처럼, 경제적 이익을 선택할 자율성 이전에 인간의 존엄성과 최소한의 건강권이 지켜지도록 법적으로 강제되어야한다. 실제로 이를 위해 각국의 노동법은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마련해두고 있다. 기본적인 노동시간이 4개월 평균 주 48시간으로 정해져 있는 것은 물론이고 그에 추가로 독일, 영국은 야간작업이 포함된 노동의 경우 1일 8시간 이상 노동을 금지하고 있고 핀란드의 경우는 더 나아가 교대조가 2개뿐이라면 새벽 1시 이후 노동을 금지하고 있다.

한국은 이러한 최소한의 안전장치가 전혀 없다. 그래서 수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임금 이외의 노동 조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는 ‘공포의 빵 공장’이 버젓이 존재할 수 있었다. 지난 2월 27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서는 법정 최대 노동시간을 68시간에서 52시간으로 단계적으로 단축하겠다는 근로기준법 개정안이 합의되었다. 

법정 노동시간이 주 40시간으로 명시된 나라에서 52시간으로의 단축을, 그것도 단계적으로 시행하기로 합의했다는 점은 매우 황당한 일이다. 또한, 이러한 합의가 현실적인 변화를 얼마나 가져올지, ‘공포의 빵 공장’이라도 없앨 수 있을지는 끝까지 지켜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