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개악에 맞서자]
‘결사의 자유’에 관한 ILO 핵심협약 비준,무엇이 달라져야 하나
류미경 / 민주노총 국제국장
약속만 수십 년째 해 온 ILO 결사의 자유 협약(결사의 자유와 단결권에 관한 협약 87호, 단결권과 단체교섭권 보호에 관한 협약 98호) 비준이 눈앞에 다가왔다. 강제노동에 관한 29호 협약까지 3개 협약 비준 동의안이 국회에 제출되어 있다. 그러나 그토록 오랜 기간 동안 요구해온 협약 비준을 앞두고도 환영할 수가 없다. 노조할 권리를 더욱 후퇴시키는 법안이 먼저 통과되어야만 비준동의안을 처리할 수 있다는 것이 정부와 여당의 입장이기 때문이다. 결사의 자유에 관한 협약의 비준과 노조법 개악이 쌍을 이룰 수 있는 것인가. 지금 국회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결사의 자유 협약, 왜 중요한가
국제노동기준은 일터에서의 기본 원칙과 권리를 규정하는 법적 도구로서 각국 노사정 대표가 모이는 ILO 총회 두 번을 거쳐 만들어진다. 지난 100여 년 동안 채택된 협약은 총 190개다. 이 중에서도 결사의 자유, 강제노동 철폐, 아동노동금지, 고용 직업상 차별철폐에 관한 8개 협약, 즉 87호(결사의 자유와 단결권), 98호(단결권과 단체교섭권의 보호), 29호(강제노동), 105호(강제노동 철폐), 100호(동등보수), 111호(고용직업상 차별 철폐), 138호(취업 최저연령), 182호(가혹한 형태의 아동노동) 8개 협약은 '기본협약(Fundamental Conventions)'으로 분류된다. 모든 회원국이 비준해야 하는 협약이다. 또 모든 회원국은 해당 협약을 비준하지 않았더라도 ILO 회원국이라는 이유만으로 헌장에 따라 성실하게 기본 권리에 관한 원칙을 존중하고 촉진하고 실현해야 한다.
8개 기본협약은 각종 무역협정의 노동장 또는 지속가능발전 장, <OECD 다국적기업 가이드라인> <기업과 인권에 관한 유엔 이행 지침>에서 각국 정부의 국제적으로 보장되는 노동기본권 준수 의무를 규정하는 원천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기본협약은 다른 모든 협약을 효과적으로 적용하기 위한 필수 요소라는 의미에서 '권리 실현을 가능케 하는 권리(enabling rights)'라고도 불린다. 노동시간, 임금, 사회보장, 노동안전보건, 휴일 등을 망라한 여러 국제노동기준을 노동자들이 실질적으로 누리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이 자주적으로 단결하고 단체교섭과 단체행동을 할 권리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협약 비준의 의미
한국이 1991년 ILO에 가입한 후 역대 정부는 결사의 자유에 관한 협약을 비준하겠다고 약속해왔다. 그러나 조건을 달았다. '국제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국내 노사관계법제가 협약비준의 걸림돌이므로 법을 먼저 고친후'라야 비준할 수 있다는 입장을 취했던 것이다. 협약 비준 약속의 이행을 한없이 미루기 위한 변명이었던 이 '선입법 후비준'론은 비준 절차에 대한 큰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마치 협약비준이 국내법이 국제기준에 완벽하게 일치한다는 점을 인증하는 절차인 양 말이다.
그러나 ILO에 따르면, 협약비준은 국내법을 협약에 부합하도록 개정하겠다고 미리 약속하는 것이고, ILO 헌장이 정한 대로 협약 이행에 관한 ILO의 감시감독절차를 수락하는 것이다. 정부가 추진하는 대로 국회의 동의를 얻어 협약을 비준하게 되면, 1년 후 국내법과 동일한 효력을 지니게 된다. 다시 말해, 협약이 국내 법체계에 통합되는 것이다. 이 1년의 기간 동안 국제기준에 부합하도록 법을 개정하면 되고, 만약 1년 내에 법 개정을 완료하지 못하면 협약이 신법 우선의 원칙에 따라 개정되지 않은 법보다 우선 적용된다. 따라서 결사의 자유 협약 비준은 국제적으로 인정된 기본 인권을 국내에서도 효과적으로 적용되도록 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국내 인권법에서 통용되는 일반원칙인 '역진금지(Non-Regression)' 원칙이다. ILO 헌장 제19조 제8호는 "어떠한 경우에도, 총회에 의한 협약이나 권고의 채택 또는 회원국에 의한 협약의 비준이 협약 또는 권고에 규정된 조건보다도 관련 근로자에게 보다 유리한 조건을 보장하고 있는 법률 판정 관습 또는 협정에 영향을 주는 것으로 인정되지 아니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ILO 협약 87호 제 8조 제 2호는 "국내법은 이 협약에 규정된 보장사항을 저해하거나 저해할 목적으로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협약 비준을 위한 법개정 절차는 현행법에 보장된 권리를 확대하는 방향이어야지 축소하는 방향일 수 없다.
정부법안은 협약의 취지를 반영하고 있는가
[제2조]
노동자와 사용자는 사전인가를 받지 아니하고, 스스로 선택하는 단체를 설립할 수 있는 권리와 그 단체의 규약에 따를 것만을 조건으로 하여 그 단체에 가입할 수 있는 권리를 어떠한 차별도 없이 보장받아야 한다.
87호 협약 제2조에 따르면, 단결권은 정부 당국의 양보로 베풀어진 시혜가 아니므로 노동조합의 존립이 행정당국의 기분에 따라 좌우돼서는 안 된다. 행정당국이 설립신고를 반려할 재량권을 가져서는 안 되며, 설립신고 절차에 관한 법 조항이 노동조합 단체의 설립을 지연 또는 방해하는 방식으로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 직업, 성별, 피부색, 인종, 종교, 국적, 정치적 견해, 고용형태, 고용상 지위 등에 구애받지 않고 실업자든 해고자든 민간부문 공공부문 가리지 않고 모든 노동자가 노조를 설립하고 가입할 수 있다.
이런 원칙을 바탕으로 ILO 결사의 자유 위원회는 특수고용노동자·자영업자를 법 적용에서 배제(노조법 제2조 제1호), 근로자가 아닌 자의 가입을 허용한 경우 노동조합으로 보지 않는다(제2조 제4호 라목)고 규정하고 설립신고 과정에서 조직의 구성이나 규약('근로자'가 아닌자가 포함되어 있는지 여부) 등을 행정당국이 심사할 여지를 두고 있는 제12조가 결사의 자유 원칙을 위반한다고 보고 여러 차례 개정을 권고했다.
87호 협약 비준의 선결조건으로 협약에 부합하게 법을 정비하는 것이 정부가 제출한 법안의 취지라면 위의 사항을 개정하는 내용이 우선적으로 포함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정부가 제출한 법안에는 제2조 제1호, 제2조 제4호 라목, 제12조를 개정하는 내용이 없다. 제2조 제4호 라목에 대해서는 본문을 삭제하라는 결사의 자유 위원회의 권고와 달리 단서조항만 삭제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스스로 밝힌 입법 취지와 전혀 부합하지 않을뿐더러, 협약의 효과적 이행과 전혀 관련이 없다.
[제3조]
1. 노동자단체 및 사용자단체는 그 규약과 규칙을 작성하고, 자유로이 그 대표자를 선출하며, 자체행정 및 활동에 관하여 결정하고, 사업계획을 수립할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
2. 공공당국은 이 권리를 제한하거나 또는 이 권리의 합법적인 행사를 저해하는 어떠한 간섭도 하여서는 아니된다.
협약 3조에 따르면, 노동조합 규약은 조합원들이 스스로 논의하고 채택해야 한다. 누가 조합원이 되어야 하는지는 노조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간부의 자격요건, 임기, 선출방식은 노조 스스로 정해야 하며 정부는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 해고자나 해당 사업장 소속이 아닌 자를 법으로 간부가 될 수 없다고 규정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또한 회의를 개최하고 이를 위해 간부들이 사업장에 출입할 권리가 보장되어야 하며 조합원의 이익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경제적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정치활동과 파업권이 보장되어야 한다. 국가의 이름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공무원이거나 엄격한 의미에서 필수서비스에만 파업권을 제한할 수 있고, 비공인파업, 작업중지, 태업, 준법투쟁, 연좌파업 등 평화적이면 노동조합 단체가 사용할 수 있는 행동 수단에 본질적인 제한을 두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정부가 제출한 법안은 어떠한가. 임원의 자격 요건을 제한한 23조에 더해 대의원의 자격 요건도 제한하는 조항을 17조에 새롭게 도입했다. 실업자와 해고자의 기업단위 노조 가입을 허용하는 대신 '종사자'와 '비종사자'를 갈라 '비종사자 조합원'에 대해서는 사업장 출입을 제한하는가 하면 타임오프 산정, 교섭대표노조 결정, 쟁의행위 찬반투표 시 조합원 수에서 제외하도록 했다. 협약에 부합하도록 법을 개정한다면서 새롭게 추가한 조항이다.
뿐만 아니다. 결사의 자유 위원회는 교사와 공무원의 정치적 의사 표현과 단체행동 전면 금지, 정부의 노동 정책이나 정리해고에 저항하기 위한 파업은 쟁의행위 목적정당성에 위배되어 불법파업으로 규정하는 조항, 파업권이 제한되는 '필수 유지 업무'의 폭넓은 규정, 파업에 무분별하게 적용되는 업무방해죄와 손배가압류 등을 결사의 자유 원칙 위반으로 지적해왔다. 정부 법안은 이런 사항들을 개선하기는커녕 오히려 사업장 점거 방식의 파업을 전면 금지하는 조항을 도입했다. 역시 협약의 취지에도, 스스로 밝힌 법개정 취지에도 부합하지 않는 대목이다.
'노동기본권이 보장되지 않는 나라' 이제 그만
이렇듯 헌법이 보장한 노동3권의 행사를 촉진하기보다는 오히려 최대한 많은 제약을 가해 행사를 저해하는 노조법의 존재는 그동안 한국을 국제노총이 매년 발간하는 '글로벌 노동 권리 지수' 최하위 등급인 5등급(노동기본권이 보장되지 않는 나라)에 머물게 했다. 결사의 자유 협약 비준과 함께 이 현실은 달라져야 한다. 모든 노동자가 노조할 권리를 자유롭게 행사할 수 있는 나라로 바뀌어야 한다.
국제적으로 인정된 기본 인권으로서 결사의 자유 원칙을 사회 전반이 규범으로서 받아들여야 하고, 노조할 권리가 제한과 통제의 대상이 아니라 자유로서 보장되도록 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정부가 제출한 노조할 권리를 더욱 제약하는 내용이 가득한 법안은 협약의 효과적 이행에 걸림돌이 되므로 즉각 폐기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