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 장시간 노동, 직무스트레스 그리고 건강
조성식 회원
몇 달 전 실험실에서 실험 업무를 수행하는 대학원생을 대상으로 특수검진을 한 적이 있었다. 실험실은 여러 가지 화학물질을 취급하기 때문에 이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나 대학원생은 특수검진을 해야 한다. 그런데 문진에서 한 대학원생이 화학물질로 인한 건강문제가 아닌, 극심한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것이었다. 그의 스트레스는 교수의 갑질과 장시간 노동으로 인한 것이었다. 많은 대학원생이 지도교수의 엄격한 통제 하에서 장시간 일하고 있고, 지도교수의 개인적인 잔심부름과 같은 학업과 무관한 일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으며, 실험 업무에 대한 경제적 보상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직무스트레스를 자세히 조사하지는 않았지만, 이들이 처한 상황을 생각했을 때 매우 심각한 수준이라고 생각되었다. 직무스트레스를 좀 더 학술적으로는 살펴보자. 미국의 국립산업안전보건연구소는 “직무스트레스란 업무상 요구사항이 노동자의 능력이나 자원, 바램과 일치하지 않을 때 생기는 유해한 신체적 반응”이라 정의하고 있으며, 유럽에서는 “업무 스트레스란 업무내용, 업무 조직 및 작업환경의 해롭거나 불건강한 측면에 대한 정서적 인지적 행동적 생리적 반응 패턴이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 같은 직무스트레스는 뇌심혈관 질환, 근골격계 질환, 정신건강 문제, 산업재해 발생을 증가시킨다.
직무스트레스 평가를 위한 모델에는 직무요구·통제 모델과 노력-보상 불균형 모델, 조직정의 모델 등이 있으며, 한국에는 ‘한국형 직무스트레스 측정도구’가 개발되어 있다. 조사는 주로 설문지를 통해서 하게 되는데, 직무요구·통제 모델은 직무요구도가 높으면서도 본인이 업무를 통제할 권한이 없는 노동자들이 겪는 직무스트레스를 보는 모델이고, 노력-보상 불균형 모델은 본인이 기울인 노력에 비해 그로 인한 보상(금전적 보상이외에도 심리적 만족과 승진과 같은 자기발전의 기회도 포함한다.)이 적은 경우에 겪는 스트레스를 보는 모델이다. 한국형 직무스트레스 측정도구는 물리적 환경, 직무요구, 직무자율성, 관계 만족, 직무불안정, 조직체계, 보상부적절, 직장문화에서 겪는 스트레스를 평가한다.
직무스트레스를 줄이는 방법에는 평등 사회를 만드는 것과 같은 거시적인 해결 방안부터, 회사 내의 직무스트레스를 발생시키는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중간 단계의 개입, 그리고 운동, 인지행동치료, 명상과 같은 개인적 차원에서 개입 등 다양한 수단이 있다. 최근의 경향을 보면 손쉬운 개인적인 중재 방안에 많은 관심과 노력이 치우쳐져 있는데, 직무스트레스의 근원적 해결 방안인 사회적, 구조적 문제에 대한 접근에 보다 많은 노력들을 기울여야 한다.
그런 점에서 한국사회의 직무스트레스 예방대책은 산업안전보건법(규칙)에 규정되어 있는데, 예방대책이라 하기에 한계는 명백해 보인다.
제669조 (직무스트레스에 의한 건강장해 예방 조치) 사업주는 근로자가 장시간 근로, 야간작업을 포함한 교대작업, 차량운전[전업(專業)으로 하는 경우에만 해당한다] 및 정밀기계 조작 작업 등 신체적 피로와 정신적 스트레스 등(이하 "직무스트레스"라 한다)이 높은 작업을 하는 경우에 법 제5조제1항에 따라 직무스트레스로 인한 건강장해 예방을 위하여 다음 각 호의 조치를 하여야 한다. 1. 작업환경·작업내용·근로시간 등 직무스트레스 요인에 대하여 평가하고 근로시간 단축, 장·단기 순환작업 등의 개선대책을 마련하여 시행할 것 2. 작업량·작업일정 등 작업계획 수립 시 해당 근로자의 의견을 반영할 것 3. 작업과 휴식을 적절하게 배분하는 등 근로시간과 관련된 근로조건을 개선할 것 4. 근로시간 외의 근로자 활동에 대한 복지 차원의 지원에 최선을 다할 것 5. 건강진단 결과, 상담자료 등을 참고하여 적절하게 근로자를 배치하고 직무스트레스 요인, 건강문제 발생가능성 및 대비책 등에 대하여 해당 근로자에게 충분히 설명할 것 6. 뇌혈관, 심장질환 발병위험도를 평가하여 금연, 고혈압 관리 등 건강증진프로그램을 시행할 것 |
우선, 직무스트레스의 범위를 “장시간 근로, 야간작업을 포함한 교대작업, 차량운전 및 정밀기계 조작 작업 등”으로 한정하여 지나치게 협소하게 평가하고 있다는 것이 첫 번째 문제이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직무스트레스를 어떤 노동자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하고, 직무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해 어떠한 중재를 할 것인가에 대한 규정이 없어서 실효성이 거의 없다고 판단한다. 최근 야간작업 노동자들에 대해 특수검진이 도입되었지만, 건강검진 조치 외에 야간노동을 최소화하기 위한 법적 규제는 없다는 점은 명백한 한계지점이라 말할 수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직무스트레스의 대표적 사회적 요인인 불안정 노동의 규모가 대폭 줄어야 할 것이고, 저임금/장시간 노동을 없애야할 것이며, 갑들의 횡포를 사회적으로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가장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고 있으며, 직무스트레스의 어느 모델에 기반 하더라도, 그들이 경험하는 직무스트레스 역시 가장 높을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또, 한국사회에 만연한 장시간·저임금 노동 역시 가장 중요한 직무스트레스 요인 중 하나일 것이다. 또 갑들의 부당한 횡포를 사회적으로 막을 사회적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대다수의 노동자들은 자신이 느끼는 직무 스트레스를 객관적으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이를 위한 산업안전보건법이 정비돼야 할 필요가 있다. 다수의 노동자들이 느끼는 직무스트레스의 수준을 평가하고 이를 기반으로 한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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