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과 배움의 경계에 선 학생연구노동자의 초상
나는 박사과정 학생이면서, 프로젝트 연구에 참여 중인 연구자이자, 병원에서 근무하는 노동자다. 정체성을 표현할 수 있는 다양한 특성들이 있지만, 지금의 나를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어쩌면 ‘학생연구노동자’라고 할 수 있다. 임금을 받으며 일을 시작한 지 4년 차가 되었고 스스로도 노동자에 더 가깝다고 생각했지만, “학생이니까 많이 배우고 고생 좀 할 수 있지.”라는 이야기를 아직도 종종 듣는다.
노동과 배움의 경계에 있는 사람들을 자주 만난다. 대학 학부를 화학과를 나왔기 때문에 의약학계열로 나가지 않은 친구들은 대부분 대학원을 진학했고, 프로젝트 연구나 조교로 일을 하면서 전공 공부와 실험을 병행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매주 연구 진척 사항을 발표하는 컨퍼런스를 준비하기 위해 밤을 새거나 주말에도 출근하기 일쑤였고, 장려금이라는 이름의 용돈을 받으며 생활하기도 했다. 한 친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이공계 대학 석박통합과정에 들어갔는데, 지도에 무관심한 지도 교수님을 만나 혼자 연구 주제를 정하고, 혼자 실험하고, 혼자 논문을 썼다고 했다. 그 와중에 온갖 연구실 행정과 살림 업무를 대가 없이 처리해야만 했다.
대학원생들은 다양한 형태의 노동을 하고 있다. 연구조교, 수업조교, 행정조교와 같이 전통적인 대학원 사회에서 존재하던 노동 형태인 조교 업무가 대표적이다. 최근 20년 동안은 연구중심 대학 체제가 형성되면서 연구개발과 산학 협력의 강화가 이루어졌고, 특히 이공계열의 프로젝트 기반 연구 수주가 꾸준히 늘어났다. 프로젝트에 투입된 대학원생들에게는 업무 성격의 일이 상당히 늘어나게 되었다. 이외에도 학회 운영의 실무를 수행하는 학회 간사를 담당하거나 군복무 대체 연구원 신분으로 일을 하기도 한다.
2015년 발표된 대학원생의 연구 환경에 관한 실태 조사 에 따르면, 대학원생들의 자기 신분에 대한 인식 조사 결과 학생이라기보다 근로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8.3%, 학생근로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57.8%로 스스로 근로자성을 부여하고 있는 사람이 총 66.1%로 나타났다. 이들 가운데 활동 역할이 있는 사람만을 따로 분석하면, 스스로 근로자성이 있음을 응답한 사람이 행정조교 89.7%, 연구조교 71%, 수업조교 72.8%로 모두 높게 나타났다. 더욱이 활동 역할이 없는 대학원생에서도 45.3%가 자신을 근로자거나 혹은 학생근로자로 인식하여 근로자성이 있다고 응답했다.
대학원생의 열악한 노동환경을 현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웹툰 <슬픈 대학원생들의 초상>은 고려대 대학원 총학생회에서 전국 대학원생들이 실제 경험한 사건을 제보받아 재구성하여 만들어졌다. 웹툰에서는 교수로부터의 갑질과 폭력, 성희롱, 노동력과 인건비 착취, 장시간 노동, 논문 도둑질 등의 비윤리적이고 불법적인 행위들이 만화 속 허구가 아닌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말한다. 실제 연구환경 실태조사 결과, 교수에게서 폭언이나 욕설 등 인격적 모욕(10%), 사생활 침해(6.2%), 성적 차별 언행(5.7%) 등을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프로젝트를 수행한 뒤 정당한 보수를 받지 못한 경우도 4명 중 1명(25.8%) 인 것으로 조사되었다.
열악한 노동환경은 정신적·신체적 건강에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 김**넷 등 대학원생 커뮤니티에서 고통을 호소하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실험이 한번 시작되면 결과가 나올 때까지 데이터를 뽑아내느라 간이침대에서 쪽잠을 자며 밤을 새고, 연구보고 시 교수님과 대면하는 자리를 앞두고 속쓰림과 소화불량을 호소하기도 한다. 경미한 우울감은 누구나 가지고 있고, 살이 빠지거나 찌는 등 식이장애를 호소하는 사람도 있었다. 미국 에모리 대학에서 시행한 대학원생 대상 설문조사에서는 조사 당시 자살을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7.3%, 최근 2주간 자살을 시도한 사람이 1.7%로 나타났다. PHQ-9 결과에서 약 70%가 경도 우울 이상의 점수를 보였고, 불안, 식이장애 등도 다수의 대학원생이 호소하고 있었다.
대학원생의 노동가치는 근로계약으로 체결된 노동보다 저평가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학생이라는 신분을 가지고 학위 취득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열악한 노동환경도 감내해야 한다는 사회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실제 대학들에서는 대학원생의 노동을 ‘노동’으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인건비를 절감하는 비용 절감 전략으로 활용하고 있다. 대학원생들의 심각한 정신건강 상태를 염려해 최근 여러 대학에서는 자체적으로 개입을 위한 상담센터를 운영하고 있지만, 한 개인에 발생한 건강 문제를 해결하는 접근 방법만 이루어질 뿐 조직 전반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문제를 찾거나 구조를 바꾸는 개입의 노력은 부족하다. 노동을 감내하는 대학원생들을 대상으로 한 정신건강을 비롯한 건강영향 연구는 거의 수행된 적 없다. 이는 직업환경의학과를 전공하는 레지던트로서 앞으로 수행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한다.
(박민영 직업환경의학전공의, 후원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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