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의 목소리] 기나긴 10여 년의 투쟁을 돌아보다 - 유성기업 영동지회 김성민 교육부장 인터뷰 / 2021. 04

[현장의 목소리]

기나긴 10여 년의 투쟁을 돌아보다 

- 유성기업 영동지회 김성민 교육부장 인터뷰

거니 회원, 보건의료학생 매듭

긴 시간동안 수많은 투쟁과 상처를 안고 온 유성노조 노동자들의 삶은 어땠을까. 그리고 지금의 심정과 향후 계획은 무엇일까. 지난 2월 2일, 수많은 질문의 답을 듣기 위해 유성기업 영동공장에서 금속노조 유성기업 영동지회 김성민 교육부장을 만났다.

노동과 투쟁의 하루일과
‘유성기업’하면 노조파괴부터 먼저 떠오른다. 회사와 국가는 잔인하게 노동자의 일상을 파괴해왔고, 자본은 자신이 짠 일정과 강도로 노동자를 유도하며 성과로 하루 일과를 점검했다. 이에 맞서 투쟁해온 유성노조 노동자들의 노동은 어떤 모습일까.

“주조부에서는 합금을 제작해요. 우선 쇠를 녹여서 쇳물을 만들고 니켈·망간·크롬 등을 섞어서 합금을 만드는 거죠. 금형 틀에다가 넣으면 동그랗게 나오는데, 이걸 생산부에 넘기면 가공을 시작해요. 면을 깔끔하게 만들고 피스톤을 왔다 갔다 한 뒤 검사하고 내 보내는 거죠.”

출처: 거니

현재 정비과에 소속돼 노동 중인 김성미 교육부장은 이전까지 노조간부로도 활동했다. 그 간의 투쟁이 어떤 식으로 전개됐는지 궁금했다.

“작년 12월 31일까지는 출근투쟁(이하 출투)을 했어요. 2011년 처음 투쟁할 때는 회사가 용역을 세우고, 매일 몸싸움 하는 게 일이다보니까 출투하기가 어려웠대요. 조합원들은 두려움이 없다는 건 거짓말이죠. 언제든지 해고될 수 있다는 공포가 있는 걸요. 2012년부터는 재정비하고 현장조직화를 했어요. 어용으로 넘어간 사람들을 금속으로 오게 하는 거죠. 2015년까지는 현장에서 싸우는 게 자주 있었어요. 그러다 2016년 3월에 한광호 열사가 목숨을 끊었어요. 이를 계기로 조합원들이 다시 투쟁해야 한다고 마음 먹고, 내부에서 관리자하고만 싸우는 문제를 넘어 사회화 투쟁으로 가는 것에 동의했죠. 한광호 열사가 돌아가신 날부터 서울 상경 투쟁을 시작했고, 투쟁은 시청과 양재동으로까지 이어졌어요. 2017~2019년 초까지 조를 짜서 농성한 양재동 투쟁 때는 현대차가 직접 개입한 걸 두고 볼 수 없다해서 새벽같이 출투하고, 농성장에 와서 아침 먹고 점심에는 대법원 가서 피켓 들고 그랬어요. 그러다 2016년 11월 산재인정을 받았고, 다음 해 2월에는 유시영 대표가 구속됐죠.”

심야노동 철폐와 주간연속2교대제
야간노동의 유해함은 모두 알고 있다. 다만 야간수당을 받아야만 하는 경제적 이유나 지금 당장의 즉각적인 피해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이유로, 우선순위에서 밀려났을 뿐이다. 그러나 정말 심야노동은 노동자의 몸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김성민 교육부장의 대답은 ‘아니었다’이다.

“야간작업에 들어가면서 괜찮다고 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어요. 저도 너무 힘들어서 3년 밖에 못 하겠더라고요. 야간작업에 들어 갈 때는 출근길에 누가 뒤에서 라이트를 조금만 비춰도 화가 났어요. 스트레스가 상당하니 사소한 일에도 화가 나는 거죠. 그리고 야간작업을 하면 패턴이 자주 바뀌니 만성 피로가 생겨요. 낮에 농사 일손을 돕는다거나 가족들하고 시간을 보내는 등의 다른 일 들은 아무것도 못했죠. 너무 피곤해서 퇴근하면 잠만 자게 되고 그러다 조금 있으면 출근해야 하고 그러니까요.”

유성기업에서는 야간노동으로 노동자가 사망했다. 함께하던 동료가 영영 눈을 뜨지 못하는 것을 보며, 노조는 노동시간 문제와 건강권을 연결한 투쟁을 전개했다. 그렇게 심야노동 철폐의 요구와 투쟁이 시작됐다.

“조합원 중 한 명이 야간노동을 마치고 돌아오는 버스에서 못 내렸어요. 차 안에서 돌아가신 거예요. 당시에는 산재고 뭐고 몰랐 어요. 50대였는데 죽을 수도 있구나 그런가 보다 했어요. 그러다 제가 지회장을 맡고 나서 29살짜리 조합원이 자다가 죽은 거예요. 산재 신청을 했는데 불승인 나면서 회사가 줬던 임금을 도로 뺏어갔어요. 그걸 갚기 위해서 3주 연속으로 야간에 들어갔었대요. 그렇게 들어가면 안 되거든요. 이후로 우리에게 숙제가 남았어요. 왜 사람들이 죽는 걸까, 우리는 뭘 해야 할까하는 숙제요.

심야노동이 문제라는데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죠. 저 역시도 야간노동을 안 한다는 게 상상이 안 됐거든요. 그러다 주간 연속 2교대제를 알게 되면서, 저도 공부하고 노조 사업에도 포함하기 시작했어요. 주간연속 2교대제의 핵심은 월급제와 심야노 동 철폐라고 생각해요. 2009년에 실물경제 위기가 오면서 야간 잔업도 없고 퇴근 시키더라고요. 그러면 월급이 80~100만원씩 줄어드는 거죠. 오히려 이때 주간연속 2교대제 논의가 탄력을 받았어요. 사람이 죽었을 땐 초반에 반짝하고 말다가 실질적인 임금이 줄어드니까 문제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기본급 인상과 잔업 줄이기를 동시에 진행하면서 주간연속 2교대제를 요구했어요.”

노조파괴가 끼친 영향들
노조파괴로 개별화·파편화된 노동자들은 사측의 징계를 피하고자, 생존전략의 일환으로써 본인의 노동 강도를 증가시킬 수밖에 없었다.

“2011년에 생산수량이 20~30% 정도 증가 했어요. 노조가 깨지니까 어용으로 간 사람들이 회사에 잘 보이기 위해서 생산수량을 높일 수밖에 없었던 거죠. 거부하면 징계하겠다는 식으로 나오니까요.”

사측은 CCTV 설치를 비롯해 일상적 감시· 민/형사소송·임금 삭감 등 온갖 방법으로 조합원의 일상을 파괴했다. 이렇게 자행된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탄압은 조합원들의 몸과 정신 모두에 비가역적인 악영향을 끼쳤다. 탄압의 결과는 장소를 가리지 않았고, 스트레스는 가족에게로의 폭력으로까지 나타나기도 했다.

“누구도 우리의 억울함을 해결해 줄 수 없다는 막막함이 가장 힘들었어요. 월급을 받았더니 이유도 없이 삭감돼 있는 거예요. 항의 하면 지금 일하는 시간이니까 쉬는 시간에 오라고 해요. 당연히 10분 안에 다 이야기 못하죠. 그런데도 쉬는 시간 끝나면 작업장 이탈이라고 하면서 가라 하죠. 노조파괴의 핵심은 법으로 가는 거예요. 해고자들이 대법원 판결을 받으려면 5년이 걸려요. 법으 로 해결하려면 굉장히 긴 시간이 걸려요. 그나마 버텨서 이기면 다행인데, 중간에 포기해버리면 회사가 이기는 거잖아요. 그러니 더 힘들죠.

CCTV 감시는 회사가 책임 전가를 위해서 일상적으로 하는 행동이거든요. 그래서 우리끼리 농담반 진담반으로 얘기하기도 했어요. ‘조용히 얘기해. 누가 있을지도 몰라’ 이런 식으로요. 스트레스 받으면 모든 일에 다 짜증이 나잖아요. 평소라면 안 그랬을 텐데 아 이들이 조금만 떠들어도 화내고, 가정폭력도 일어나고 그랬어요. 노조파괴가 사람도 파괴하고 가정마저 파괴했어요.”

떠난 사람들이 남긴 숙제
유성기업 노동자들은 고(古) 한광호 열사 를 비롯해 여러 동료를 떠나보냈다. 노조 대의원으로 활동했던 열사에게 회사는 수많은 소송과 징계, 폭행 등 갖은 탄압을 자행해왔다. 결국 2016년, 열사는 죽음으로 내몰렸다. 떠나간 사람을 안고 남긴 숙제를 풀어나가며, 투쟁을 지속하는 시간을 노조는 어떻게 보냈을까.

“제가 지회장을 한 번 더 맡았을 때 저희 간부가 지게차에 치여 죽었어요. 한광호 열사도 돌아가셨고요. 돌아가신 분들이 남기고 간 것들이 있었어요. 첫 번째는 심야노동이었고 두 번째는 재해에 의한 사고였죠. 누가 지게차에 치여 죽을 줄 알았겠어요. 그런 데 적재물은 2단으로 쌓았지, 사람이 지나갈 길은 없지 이런 상황이니 그렇게 된 거예요. 마지막으로는 정신적 재해였어요. 노조 파괴에 따른 스트레스 때문에 사람이 죽어 나가니까요. 그래서 해고자들 중 일부가 개별적으로 산재신청을 했어요. 문제는 굉장 히 오래 걸린다는 거예요. 그나마 한광호 열사 경우에는 빨리 나온 편이라고 하더라고요. 사람이 죽는 데에는 그 이유가 있는 거 고, 그 이유를 밝히고 해결하는 게 남아있는 사람들의 숙제죠. 이런 것들을 노동조합이 적극적으로 요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서는 죽음과 고통의 역치가 너무나도 높아졌다. 산재사망은 그동안 내재된 문제들이 곪다가 터진 가장 극단적인 형태임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단식을 하거나 죽어나가야만 겨우 이슈화 됐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산재로 사람이 하루에 7~8명 죽는 것보다, 주식이 1% 내려가고 올라가는 게 훨씬 더 큰 문제다’는 김성민 동지의 말이 이를 단적으로 반영한다. 이러한 사회에 ‘감수성’과 ‘경종’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예전에는 저 역시 이 정도 힘든 일은 좀 견뎌야지, 참고 일하면 안 되나? 이렇게 생각 하고 살았어요. 그러다 노동조합을 하면서 감수성이란 걸 배운 거 같아요. 평등 감수성, 성인지 감수성 이런 감수성을 가진 구성원을 키워내는 게 필요하다 생각해요. 누군가의 노동문제가 당장 내 문제라는 인식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LG 트윈타워에서 투쟁하는 노동자들이 얼마나 힘들까 이런 생각과 감수성이 있어야 해요. 노동조합이 할 수 있는 것도 그런 거잖아요. 양재동 투쟁 때처럼요. 저기서 힘들게 투쟁한다더라 우리가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냐 하는 생각을 자꾸 만들어주는 게 필요해요. 1등만이 옳고, 경쟁체제가 당연하다는 사회에 경종을 울릴 수 있는 것들을 계속해서 해나가는 거죠.”

투쟁의 의미와 이후의 과제
연대의 힘으로 버티고, 투쟁으로 이끈 변화들이 많다. 유성기업 노조 조합원들이 꼽는 가장 큰 변화는 무엇일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현장에서 자율적 행동이 가능하다는 거예요. 지금도 일하는 시간에 이렇게 인터뷰하고 있잖아요. 지금은 조합원들도 자율적 행동이 당연한 거라고 생각해요. 투쟁에서 졌으면 이렇게 못했을 걸요? 다음으로는 비록 조합원의 수가 절반 으로 줄어들었지만 노동조합을 끝까지 지켰다는 거죠.”

작년 연말에 이뤄졌던 합의안에는 감시카메라 철거와 부당노동행위 책임자 처벌·조합원 트라우마 심리 치유사업 지원·노조 간 차별 금지·민형사상 고소/고발 취하·주간연속 2교대제 도입을 위한 실행위원회 가동 등이 들어있다. 앞으로의 노조에게는 어떤 과제가 남아있을까.

“악은 징벌하고 선은 복을 받아야 하는데 안 되는 거잖아요. 이제 일상을 찾아가려고 하는데, 산 넘어 산이예요. 왜냐하면 어용을 극도로 싫어하는 사람도 있지만, 현장 조합원들 입장에서는 그래도 10년째 같이 일을 한 사람들이니 아예 얘기를 안 할 수는 없잖 아요. 이런 갈등을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게 가장 어려운 일이라 예상해요. 이제는 주워 담는 게 필요한 거 같아요. 서로간의 감정싸움도 추스르고, 투쟁하면서 미뤄뒀던 치유도 노조가 담아야 할 때인 거죠.”

오래된 탄압은 노동자들을 만성적 긴장상태로 내몰았다. 그간의 묵은 감정을 추스르고 상처를 치유하며, 하고 싶은 것을 찾을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그들이 앞으로 꿈꾸는 소망이나 계획이 궁금했다.

“10년이나 지났잖아요. 항상 불안하게 살다 보니 아이들이 어떻게 컸는지도 잘 몰라요. 아직은 조합원들도 자기가 뭘 하고 싶은지 잘 모르죠. 그냥 얼마 안 있으면 정년퇴직인데 돈 벌어야지 그런 말들을 나누곤 해요. 지금 조합원들 평균 연령이 10년 뒤면 정년 퇴직을 할 때니까요. 아무래도 제일 하고 싶은 건 쉬는 거죠. 앞으로는 충분히 휴식도 취하고, 가족들하고 놀러 가고 그러고 싶어 요. 개인적으로는 지금 현장에 돌아온 지 1년 됐거든요. 1년 새에 조합원들하고 많이 친해졌어요. 임원하다보면 아무래도 그러기 힘드니까 지금의 일상이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