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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의 목소리] 낙태죄 폐지, 여성노동자의 재생산권을 위한 첫걸음 / 2020.12 [현장의 목소리] 낙태죄 폐지, 여성노동자의 재생산권을 위한 첫걸음 이나래 / 상임활동가 100년 넘게 여성의 몸과 삶, 권리를 옥죄던 법이 있다. 바로 '낙태죄'다. 일본 형법을 조선에 적용해 1912년 시행된 '조선형사령', 1953년 형법 제정, 그 뒤로도 108년 동안 유지되어 왔던 낙태죄에 대해 작년 4월 헌법재판소는 임신중지를 하는 여성과 중절 수술을 하는 의사를 처벌하는 형법 제269조 1항(낙태죄 처벌 조항), 제270조 1항(의사 임신중지 처벌 조항) 두 가지 법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결국 헌법재판소는 낙태죄가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과도하게 침해하고 있다며 대체 입법안을 올해까지 마련하라는 주문을 내렸고, 정부가 지난 10월 안을 제출했다. 입법 시한이 얼마 남지 않은 가운데 .. 더보기
월 간 「일 터」/[현장의 목소리]

[현장의 목소리] 낙태죄 폐지, 여성노동자의 재생산권을 위한 첫걸음 / 2020.12

[현장의 목소리] 

 

낙태죄 폐지, 여성노동자의 재생산권을 위한 첫걸음

 

이나래 / 상임활동가 

 

100년 넘게 여성의 몸과 삶, 권리를 옥죄던 법이 있다. 바로 '낙태죄'다. 일본 형법을 조선에 적용해 1912년 시행된 '조선형사령', 1953년 형법 제정, 그 뒤로도 108년 동안 유지되어 왔던 낙태죄에 대해 작년 4월 헌법재판소는 임신중지를 하는 여성과 중절 수술을 하는 의사를 처벌하는 형법 제269조 1항(낙태죄 처벌 조항), 제270조 1항(의사 임신중지 처벌 조항) 두 가지 법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결국 헌법재판소는 낙태죄가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과도하게 침해하고 있다며 대체 입법안을 올해까지 마련하라는 주문을 내렸고, 정부가 지난 10월 안을 제출했다. 입법 시한이 얼마 남지 않은 가운데 지난 4일 오후 서울 은평구 불광동에서 '셰어' 활동가 나영씨를 만나 낙태죄 폐지 운동의 의미, 더 나아가 여성노동과 재생산권리가 어떻게 만날 수 있을지에 대해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성의 결정권 vs 태아의 생명권, 이분법 넘자

낙태죄가 사회적 쟁점으로 부각된 것은 2010년 프로라이프 의사회에서 시작한 낙태 시술 병원 고발 운동이었다. 이 같은 움직임은 우연이 아니었다. 2009년 이명박 정부는 그 해 제1차 저출산 대응 전략회의를 개최하고,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도 "과거에 한 낙태는 책임을 물을 수 없다 해도 앞으로는 주무 부처 장관으로서 단속할 수밖에 없다"며 낙태 단속 강화 입장을 밝힌다. 결국 저출산이라는 생산가능 인구 감소에 대한 위기 인식 속에서 여성에게 '죄'를 묻는 방향이 강화된 것이다. 원치 않는 임신을 한 여성들은 목숨을 걸고 위험한 시술을 받아야만 했다. 경제적 여건이 어려운 여성들의 경우 문제는 더욱 심각했다.

2012년 헌법재판소 합헌 결정이 내려진 뒤 3개월 뒤 임신 23주 차에 병원에서 임신 중지 시술을 받던 청소년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병원은 수술비로 현금 650만 원을 요구했고, 과다출혈로 목숨이 위태로웠음에도 처벌을 두려워했던 의사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두 번 거절을 당하고 세 번째로 찾아간 병원에서 사망한 것이다. 이 사건이 나영씨에게는 마치 숙제 같았다. 사회적 주목을 받지 못했던 낙태죄 문제를 드러내기 위해 노력했을 때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결정권이라는 이분법적 구도로 놓인 상황에 문제의식을 갖고, 패러다임을 바꾸기 위해 15년 장애여성공감과 논의를 시작으로 '낙태가 죄라면 국가가 범인'이라는 구호를 갖고 나올 수 있게 되었다.

"마치 국가가 생명에 대한 판단권자인 것처럼 행사를 해왔죠. 사실은 국가가 사회적 불평등, 사회경제적 조건을 보장해야 하는 책임은 방치하고, 그 책임을 여성에게 전가했어요. 가족계획 정책에 따라 '특정한 생명'을 선별하는 역할을 했을 뿐이죠. 구도를 바꾸면서 운동을 다시 시작했어요. 낙태를 주제로 하면서 보조 생식기술에 대한 문제, 민법·헌법 모순의 문제를 갖고 연속 포럼의 입장에서, 감염인의 입장에서, 이주민의 입장에서 낙태죄 문제를 바라보는 포럼을 진행했어요. 그렇게 활동을 하다가 낙태죄 폐지 운동을 다시 하면서 여기까지 온 거죠."

여전히 여성에게 '낙태죄'를 묻는 정부의 문제적 개정안

낙태죄 개정 시한이 코앞으로 다가온 상황에서 정부 개정안을 어떻게 보냐는 질문에 나영씨는 그동안 낙태죄 폐지 운동 진영에서 문제제기 해왔던 것들을 모조리 모아놓은 것이 바로 지금의 정부 개정안이라고 지적했다. 개정안은 여성의 임신중지 결정 권리를 14주까지만 제한적으로 인정할 뿐 24주까지는 성폭행이나 유전적 질환 같은 기존의 처벌 예외조항에 '사회·경제적 이유'만 새로 추가했을 뿐이다. 여전히 낙태죄를 남겨둔 것이다.

곳곳에서 더 이상 여성을 범죄인 취급하며, 임신중지를 범죄 취급하는 행위를 사회가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그런데도 정부는 낙태죄를 폐지하라고 요구하는 현실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오히려 해외에서 여성들을 옥죄어 왔던 규제 조항을 무더기로 가지고 온 것이다. 더욱 문제인 것은 형법에 낙태죄를 그대로 존치하면서 개정을 시도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정부안이 제출되고 마치 이 안이 대세인 것처럼 언론에서 얘기하는데, 사실 정부안 말고 나머지 제출된 안들은 기본적으로 '비범죄화'해야 한다는 입장이란 거예요. 사실 올해 말 개정 자체가 불투명한 거 아닌가 추측하고 있어요. 다른 국회 사안에 밀려서 말이죠. 더 문제는 이후 현장의 변화에요. 의료 현장뿐만 아니라 교육 현장, 노동 현장에서도 임신중지가 가능해진 상황을 어떻게 보장할 거냐는 거죠. 의료현장도 회피하지 않고 직접 진료에 나서는 환경을 만들어야 하는데, 회피로 일관할 뿐이죠. 약물 도입을 시작한다고 하는데, 지금부터 도입을 검토해도 2~3년은 걸리거든요. 그런데 정부는 시작도 안 했죠. 그런 걸 준비해야 해요."
 

▲   12월 8일 정부 공청회가 열리는 국회 바깥에서 낙태죄 폐지를 요구하는 이들의 다양한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피해자가 아닌 '성적 권리'의 주체로 설 수 있어야

한국 사회는 '성'을 부끄럽고, 지극히 사적인 것으로 다룬다. 한편에선 n번방과 같은 성착취 사건, 데이트폭력, 성폭력 등 성에 대한 왜곡된 인식과 행위가 벌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이런 가운데 피해자의 경험과 목소리는 사회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순수한 피해자일 때 받아들여질 뿐 우리 사회가 함께 고민해야 할 성적 권리에 대해선 무관심하다.

"성적 권리는 다른 권리와 다르게 부차적이거나 어느 정도 사는 사람, 사생활의 문제, 이런 식으로만 상상이 돼요. 낙태죄를 매개로 보다 보니 성적 권리가 너무 중요한 기본권이고, 사회적 권리더라고요. 제대로 주거 환경이 갖춰지지 않은 곳에서 성적 권리와 재생산권을 삶의 권리로 보장받을 수 있을까요? 성적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다른 권리가 인정되지 않는 사람들이에요.

예를 들어 청소년은 콘돔을 살 수 있지만, 마치 그것이 청소년에게 위험한 물건인 것처럼 인식되죠. 임신중지를 해야 하는데 자신에게 돈이 없기 때문에, 다른 권리가 없기 때문에 수술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다거나요. 노숙인, 빈민도 자기가 통제권을 가질 수 없는 상황에 놓여요. 그래서 성적 권리가 사생활의 권리가 아니라 사회적 권리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 재생산 권리가 아니라 '정의'라는 이유도 법적으로 나열되는 권리가 아닌 이 권리가 보장될 수밖에 없는 조건, 사회정의를 만드는 게 필요하다는 측면에서 '재생산 정의'를 얘기해야 해요."

여성의 노동권과 재생산권의 접점을 만들기 위한 새로운 기획 필요

"사실 여성노동자의 노동권과 재생산권을 분리된 영역으로 보기 때문에 일·가정 양립 정책 같은 게 나온 거죠. 일은 직장에서만 하는 거고, 집에서 하는 건 가정일이기만 한 거예요. 무상으로 가정에서 여성 노동에 모든 걸 전가하고 있는데, 사실 더 근본적으로는 유산·사산휴가, 출산휴가도 일하다 가정으로 돌아간다는 게 아니라 가정에서 하는 노동이 중요하기 때문에 보장한다는 개념으로 가야 해요. 그렇게 되려면 휴가에 대한 권리, 노동시간 단축만이 아니라 모든 의제에 이 부분에 대한 인식이 포함돼야 해요.

작업대의 높이, 구조 이런 부분에서 신체적인 차이들이 어떻게 고려되고 있는지, 여러 안전장치들 임신한 여성의 몸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노동시간에서 돌봄 노동이나 재생산 노동에 대한 고려는 어떤 식으로 배치가 되는지 이런 것들이 여러 노동운동 안에서 이야기될 수 있어야겠죠. 각각의 의제 안에 재생산권에 대한 고려가 포함돼서 같이 하나씩 되어야 전반적으로 이야기가 확장될 수 있을 거예요. 유의할 점은 여성에게 유산·사산휴가를 줄 거냐, 말 거냐 식으로 얘기되어선 안 돼요. 재생산권의 문제가 마치 이 휴가를 보장하면 다 되는 걸로 생각될 수 있죠. 임신 중지를 할 때 일하는 여성이 어떤 경험을 할 것인가, 굉장히 중요하거든요. 이 사람의 노동시간 문제, 조건의 문제, 경제적 문제, 지역 의료기관의 문제 등 다양한 문제가 연결될 수밖에 없어요."

최근 사유리씨의 출산에 대해서도 의미 있게 살펴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임신중지 논의와 연결되는 일이며, 정상가족 문제, 재생산권, 섹슈얼리티 통제의 문제 등 국가가 어떤 생명을 중심으로 선별하고 자격을 부여하는지 살펴볼 수 있다고 했다.

"경제적 조건만 아니라 결혼 관계 바깥의 여성이 자기 삶을 꾸리면서 아이까지 잘 양육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지 않은 걸 제기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봐요. 그런 와중에 보육에 대한 부담은 여성에게 그대로 있죠. 계속해서 노동하면서 생계를 꾸려야 하는 여성은 이걸 다 혼자 감당해요. 일·가정 양립, 육아휴직처럼 저출산 정책이 쏟아지는데 사실 이건 굉장히 계급적 문제거든요.

정부의 개정안은 일단 상담을 받고, 상담받으러 가서 확인서를 받아 24시간 숙려 시간을 갖고 병원에 찾아가야 하는데, 의사가 거부하면 다시 상담을 받으러 가야 해요. 그런데 이걸 현실적으로 풀어보면 굉장히 심각하죠. 비정규직 여성노동자가 이 상황을 겪는다고 상상해보세요. 이런 얘기를 더 적극적으로 끌어내야 해요."

지난 12월 8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는 낙태죄 공청회를 개최했다. 낙태죄에 대한 전문가의 의견을 듣고 이를 형법 개정안 심사에 참고하는 자리라고 취지를 밝혔으나, 실제 공청회 진술인의 구성원은 낙태죄 폐지를 요구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전혀 담지 못하게 이뤄졌다. '낙태죄 비범죄화'를 제대로 진술할 수 있는 진술인이 8명 중 단 2명에 불과했다. 이마저 본회의를 단 하루 앞둔 상황에서 열리는지라 우려는 더욱 컸다.

결국 공청회 자리가 아닌 '국회 바깥'에서 낙태죄 전면 폐지를 위한 '4시간 이어말하기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108년 동안 여성을 처벌의 대상으로 삼아 왔던 국가가 여전히 여성의 몸을 얼마나 수단화하고 있는지, 인구정책의 도구로만 삼으려 하는지 명백히 보여주는 자리였다.

"올해 법 개정이 잘 되면 좋겠고, 형법이 폐지되고 그다음을 이야기할 수 있는 조건이 되면 좋겠어요. 임신·출산에 관한 문제 차원만이 아니라 어떻게 사회경제적 문제, 노동의 문제이기도 한지를 말해볼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보고 싶어요."

그간 낙태죄 폐지 운동에 담아 왔던 여성의 경험을 배제하고 열린 정부의 공청회 면면에서 여성노동자들의 노동권과 재생산권이 만나는 그 자리에 있어야 할 것은 국가, 자본의 이익이 아닌 여성노동자들의 삶의 기록과 목소리일 것이다. 또한 여성 노동자에게 안전하고 건강한 일터를 이라는 구호가 성적 권리, 재생산권과 만날 때 어떤 장면들이 펼쳐질 수 있을지 낙태죄 폐지의 운동 속에서 감히 상상해보는 게 바로 지금의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