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과로사통신] 카메라 뒤에 사람이 있다 / 2021.02

[동아시아 과로사통신]

 

카메라 뒤에 사람이 있다

 

진재연/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사무국장

 

 

"하루에 20시간 넘는 노동을 부과하고 두세 시간 재운 뒤 다시 현장으로 노동자를 불러내고 우리가 원하는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이미 지쳐 있는 노동자들을 독촉하고 등 떠밀고 제가 가장 경멸했던 삶이기에 더 이어가긴 어려웠어요." - 고 이한빛 피디 유서 중


  2016년 10월 26일 tvN 드라마 <혼술남녀>의 조연출 이한빛 PD가 드라마 종영 다음 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유서에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당연하게 여겨왔던 방송 제작 환경의 문제점들이 고스란히 적혀 있었다. 20시간이 넘는 초장시간 노동, 위험한 촬영 현장, 폭언과 모욕이 떠나지 않는 군대식의 위계적인 상하 관계, 다층적인 하청 관계. 위로가 되는 드라마를 만들고 싶었던 한 젊은 PD의 죽음은 두껍고 단단한 방송산업의 문제들을 세상에 드러나게 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보다 400~500시간이나 긴 시간을 더 일하는 한국에서 방송 제작 현장의 초장시간 노동은 더욱 악명이 높다. '방송 펑크 낼 거야?' 한 마디면 뭐든 감내해야 하는 곳, 밤샘 촬영은 기본이고 적정 업무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곳, 한밤중에 촬영이 끝나면 다음 날 촬영을 위해 찜질방‧사우나에서 쪽잠을 자야 하는 곳이 방송 제작 현장이다.
  "잠을 안 재워요", "찜질방이 아닌 여관이라도 잡아주면 좋겠어요", "밥 좀 주세요", "지금 촬영 24시간 넘어가고 있어요" 이한빛 피디의 뜻을 잇고자 2018년 설립된 한빛센터 활동 초기에 들어온 상담 내용들이다. 한빛센터를 비롯한 여러 사회단체, 노동조합의 활동으로 조금씩 변화하고 있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여전히 방송산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청률, 제작비일 뿐 노동자들의 안전과 건강이 우선순위가 아니다.
  방송 현장에서 초장시간 노동이 가능했던 이유는 첫째, 방송 제작의 특수성이라는 명목으로 야간 노동, 밤샘 노동이 전혀 문제 되지 않는 문화가 지속되어 왔고, 둘째, 법 제도적으로도 장시간 노동을 규제할 만한 장치가 없었기 때문이다. 방송업은 '근로시간 특례업종'이라는 이유로 오랜 시간 무제한 노동이 가능한 영역이었다. 노동시간 규제 없는 촬영, 야간 촬영이 빈번하니 늘 수면 부족에 시달리고 어제와 오늘의 경계라 불분명한 '디졸브' 노동을 하게 된다.
  tvN 드라마 <화유기>의 미술팀 스태프 추락사고, TV조선 <미스트롯>의 프리랜서 카메라 감독 추락사고,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킹덤>에서의 교통사고, 최근 SBS 드라마 <펜트하우스>의 세트장 붕괴와 화재 사건 같은 사고들은 모두 밤샘노동, 장시간 촬영과정에서 생긴 일이다.
  늘 쫓기듯 바쁘게 촬영이 진행되다 보니 급하게 움직이다가 발생한 크고 작은 사고들, 안전장치를 준비할 시간보다 일단 찍는 게 중요하니 위험천만한 상황에서 진행되는 차량씬, 절벽씬, 수중씬들, 졸음으로 인한 빈번한 교통사고들. 방송을 위해서라면 초장시간 노동도, 각종 위험한 상황도 무릅쓰고 촬영을 강행해야 하는 현재 노동조건에는, 이러한 사고들을 당할 가능성이 늘 턱밑까지 차 있다.

예측불가능한 노동과 삶

   노동시간이 길뿐 아니라 불규칙하고 예측할 수 없다는 것도 큰 문제다. 노동자들이 자신의 일상과 삶을 계획하며 살지 못하고 늘 촬영 일정에 맞춰 대기 중이어야 한다. 기본적인 수면시간, 휴식시간, 일상의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일하면서도 비정규직 프리랜서 계약을 강요받으며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하니 근로기준법의 적용을 받지 못하는 게 대다수 방송노동자의 현실이기도 하다. 장시간 노동으로 인한 육체적 고통, 부당한 상황에서도 문제제기하기 어려운 법적 현실적 지위, 그로 인한 정신적 스트레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기 위한 다각도의 고민이 필요하다.
  2018년 근로기준법 개정으로 방송업이 특례업종에서 빠지고, '주 52시간 상한제'가 단계적으로 시행되면서 2021년부터는 방송 현장도 더이상 52시간 상한제를 우회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했다. 최근 촬영시간이 조금씩 줄어들고 있기는 하지만 방송사 제작사들은 여전히도 적정 노동시간에 대한 기준을 명확히 하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최근 JTBC와 같이 근로자 대표와의 서명 합의도 없이 자의적 '3개월 624시간' 탄력근로제를 시행하는 꼼수를 부리는 일도 벌어지고 있다.
  3개월 탄력근로제를 시행할 경우 일일 최대 노동시간은 12시간, 주간 최대 노동시간 52시간을 넘을 수 없지만, 그것은 지키지 않은 채 장시간 노동을 위한 편법으로만 근로기준법을 악용하고 있는 것이다.
  한빛센터는 영화 현장에 정착되어 있는 '12 ON 12 OFF'가 방송 현장에도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방송 현장의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12시간 이상 일하지 말고, 12시간은 꼭 쉬어야 한다는 것이다.
  작년 2월 청주방송에서 14년간 일했지만 동료들의 급여 인상을 요구했다는 이유로 청주방송의 조직적 괴롭힘에 시달리다 생을 마감한 이재학 피디, 집에 가는 날보다 사무실에서 밤샘 노동하다 잠드는 날이 더 많았던 그의 별명은 라꾸라꾸(간이침대)였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부족한 제작비로 촬영과 운전을 겸하다 교통사고로 사망한 박환성 김광일 피디, 그리고 방송 현장에서 일하다 버려지고 스러져간 수많은 노동자들.
  더이상 노동자들이 죽지 않고, 다치지 않고, 건강하고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방송 제작·편성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방송사, 제작사 마음대로 원칙과 기준도 없이 주먹구구식으로 촬영 일정과 시간이 결정되지 않아야 한다. 방송 현장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카메라 뒤의 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해 한빛센터는 오늘도 달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