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 노동안전보건운동의 발자취 ③]
이윤보다 노동자의 ‘몸과 마음’을- <일터> 200호로 살펴본 한국 사회 노동자의 정신건강 문제
최민 상임활동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는 창립 초기부터 '노동자 정신건강'이라는 주제에 주목해왔다. 도시철도 기관사 공황장애 및 자살 사건, 청구성심병원과 하이텍알씨디 집단 정신질환 산재신청, 요양 중인 산재 노동자 정신건강 문제 등으로부터 시작된 고민은, 일터괴롭힘과 가학적 노무관리, 자살 대국에서 과소평가되고 있는 노동자 자살 문제, 감정노동과 작업거부권 등으로 확장되어 왔다.
그 사이 정신건강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정신질환 산재 신청 건수와 승인율이 증가하는 등 사회적 변화도 있었다. 최근에는 직장내괴롭힘과 감정노동과 관련된 중요한 노동법상의 변화도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세계적으로 높은 수준의 노동자 자살을 반복하게 하는 구조적 요인은 변화가 없고, 치료, 심리상담, 산재신청 등 개별적인 대응만 활발해진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도 든다. 200호까지 <일터>가 다뤄왔던 노동자 주요 이슈를 훑어보면서, 노동자 정신건강을 둘러싼 사회적 논의를 돌아보고, 향후 과제를 짚어본다.
산재 요양 중인 노동자의 정신건강
노동자 정신건강과 관련한 문제의식은 '산재 요양 중인 노동자의 정신건강' 문제에서 출발해야 할 것 같다. 일터 초기에 소개된 노동자 자살은 주로 산재 요양과 관련된 것이었다. 다쳤지만 산재를 신청하지 못하거나 승인을 받아도 불충분한 요양으로 요양 중, 혹은 회복되지 못한 채 일터에 복귀한 후의 자살을 꾸준히 소개했다. 사실 <일터> 발간이 시작되기도 전인 1999년 이상관 투쟁이 있었다. 1999년 대우국민차 창원공장에서 일하다 허리를 다쳐 산재로 요양하던 20대 청년 노동자 이상관은, 제대로 걷지도 못할 정도로 몸 상태가 좋지 않았는데도 요양을 종결하라는 근로복지공단 직원의 종용을 받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IMF 사태에 따른 근로복지공단의 예산 절감 방편으로 세워진 '산재보험급여 거품 제거 대책'의 희생양 중 하나였다.
당시 근로복지공단 앞에서 155일간의 농성 투쟁이 이어졌고, 이 과정에 시민사회단체와 현장 노동자, 의사 등 다양한 사람들이 연대했다. 이 연대투쟁 과정에서 산업재해, 산업안전보건, 산재추방운동이라는 말 대신 노동재해, 노동안전보건, 노동안전보건운동이라는 말이 생겨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상관의 죽음은 끝내 산재로 인정되지 않았고, 책임자인 근로복지공단 이사장도 자리를 보전했다.
하지만 이 투쟁으로 산재 요양 중인 노동자의 정신건강 문제가 위기라는 것이 알려지게 되었고, 산재 요양 중 이와 관련하여 발생한 정신질환이나 자살의 경우 산재로 인정되는 건이 늘었다. 2005년 당시 근로복지공단은 요양 중 발생한 우울증은 업무상 재해와는 무관한 것이라는 일관된 판단을 내리고 있었는데, <일터>에서는 산재요양 과정 중 발생한 우울증이 산재라고 인정한 법원 판결을 소개하기도 했다.
최근에도 산재 요양 노동자 자살이 지속되고 있다. 얼마 전 발표된 논문에 따르면, 2003년에서 2014년 사이 업무상 사고를 당해 산업재해보상보험 요양급여를 수급한 15~79세 노동자 약 77만 명 중 2796명이 2003년에서 2015년 사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이들 산재 노동자의 자살 사망률은 전체 경제활동인구에 비해 2.21배 높게 나타났다. (Hye-Eun Lee, Inah Kim, Myoung-Hee Kim, Ichiro Kawachi. 2020."Increased risk of suicide after occupational injury in Korea." Occupational & Environmental Medicine, BMJ Journals.)
사고 당시 임시직에 종사한 노동자는 상용직보다 자살 사망률이 더 높았고, 특히 남성 산재 사고 노동자의 경우 장해가 발생하지 않은 노동자가 중증 장해를 앓는 노동자보다 자살 사망률이 더 높은 역설적인 결과가 나타났다. 장해가 없는 산재 사고 노동자는 장해등급 1~3급의 중증 장해 노동자에게 지급되는 연금을 받지 못하고 계속해서 경제적으로 불안정한 처지에 놓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산재 사고를 예방하기 위한 정책 개입뿐 아니라, 산재 사고 노동자들이 신체적, 정신적 건강을 회복하고 사회에 복귀할 수 있도록 정책 지원이 필요하다.
논문의 주저자인 이혜은 직업환경의학전문의는 이메일을 통해 "산재 요양 중 자살이 산재로 인정된 지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렇지만 정작 산재 노동자의 자살을 예방하는 노력은 부족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향후 산재노동자 자살의 구체적인 경로 파악과 예방 대책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또, "장해 수준과 상관없이, 오히려 장해가 없는 산재노동자들의 자살률이 더 유의하게 높았다는 점"이 연구의 중요 결과라며, "산재요양이 종결되어 산재보험의 경제적 지원이 끝나고 산재 이전보다 소득이 줄어든 경우에 대해 특별히 대책이 필요"하다고도 지적했다.
도시철도 기관사 이야기
일상적 노동환경의 문제로 발생한 최초의 집단적인 정신질환 직업병 사례로 <일터>가 주목한 것이 도시철도 기관사들의 공황장애와 자살이었다. 2003년 당시 서울 지하철 5~8호선을 운영하던 서울도시철도공사에서 기관사 2명이 연달아 자살했다.
당시 도시철도노동조합 승무본부 사묵국장이었던 윤성호 기관사는 "처음부터 정신건강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접근했던 건 아니었다"라고 기억한다. 처음으로 자살이 연달아 발생한 2003년은 노동조합 집행부의 대폭 물갈이가 있던 해였다. 선거운동하던 중 기관사 한 명이 자살했고, 당선되고 새로운 임기를 준비하던 중 다른 한 명이 연달아 자살했다. 두 명이 연달아 이런 일을 당하자, 뭔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1~4호선을 운영하는 1기 지하철에서는 자살하는 노동자가 없는데, 도시철도에서만 기관사가 자살한다면, 노동환경에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닐까?
당시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의 공유정옥 직업환경의학 전문의가 '정신질환도 직업병으로 발생할 수 있다'고 안내해줬다. 새로운 노동조합 집행부의 첫 활동이 되었다. 도시철도는 지하철공사에서 분사하면서 권위적이고 위계적인 조직문화가 만들어져 있었다. 거기에 혼자 전철을 운전하며, 서비스까지 담당해야 하는 기관사들은 책임감과 서비스 강요에, 자주 혼나고 억눌려 있었다. 연달아 발생한 자살이 노동환경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얘기하자 주변에서 그동안 참고 있던 울분을 터뜨렸다. 윤성호 기관사는 정신건강 문제는 조합원들에게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고 기억한다. 다들 공감하던 문제였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은 개별 사건의 산재 보상을 청구했을 뿐 아니라, 서울도시철도공사 내 모든 기관사에 대해 직무스트레스와 정신건강 실태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정신건강 상태가 매우 좋지 않은 기관사가 다수 발견되었고, 먼저 공황장애를 진단받은 기관사들이 연달아 업무 관련성을 인정받기도 했다.
정신건강과 관련이 높은 요인으로, 운전 중 사상사고 경험 여부뿐만 아니라, 도시철도에서 운영 중인 1인 승무제도와 권위적인 인사노무관리도 문제로 지적됐다. 하지만, 사상사고를 줄이기 위한 안전문 도입과 사고가 발생했을 때 기관사가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받지 않도록 하는 등의 대책에만 합의할 수 있었다. 2인 승무 제도 도입은 결국 합의되지 못했다. 사상사고와 같은 극적인 단일 사건에 의한 정신질환 발생은 산재로 인정해도, '1인 승무' 등과 같은 일상적인 스트레스 요인에 따른 정신건강 영향은 좀처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여전한 관행이다.
그래도 안전문 설치는 인명 사고 발생 가능성 때문에 운전 내내 긴장할 수밖에 없던 기관사들의 압박감을 상당히 낮춰주었고, 승객 안전 측면에서도 진일보한 정책이었다. 그 후 일상적인 개선결과 평가와 피드백이 잘 이루어지지는 않던 차에, 2011년 다시 기관사 자살 사건이 발생했다. 2013년 다시 기관사 전체를 대상으로 실태조사에서, 사상사고 이외에도 권위적 조직문화 등이 직무스트레스에 중요한 원인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고위험군 노동자들을 잘 관리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 또한 확인하였다.
이를 교훈 삼아, 작업장 기반의 노동자 정신건강 관리를 위해 '도시철도 힐링센터'가 문을 열었다. 의사, 간호사, 임상심리사 등이 상주하며 개별 노동자 혹은 노동자 가족의 심리상담과 치료 지원, 조직 차원의 정기적인 직무스트레스 검사와 작업복귀 프로그램, 정신건강 증진 프로그램 등을 시행하고 있다.
도시철도공사의 정신건강 관리 프로그램 도입 과정은 크게 두 가지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선 정신건강 관련 논의가 본격화되기 전에 일찍이 종합적 접근의 중요성을 깨닫고, 체계적으로 문제 해결을 도모하였다. 다음으로 긴 시간에 걸쳐 노동자 당사자들의 요구와 참여를 바탕으로 개선 방안 마련했다. 노동자 정신건강의 예방 및 치료에서 개별적이고 단편적 접근이 아닌 집단적이고 총체적인 접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걸 보여준 사례였다.
윤성호 기관사는 특히 "그전까지 노사는 항상 대립하는 상대였는데, 힐링센터가 세워지면서, 직무스트레스를 줄이고, 기관사를 보호해야 한다는 같은 방향의 고민을 노사가 함께 한다는 것이 신기한 경험이었다"라고 회상한다. 회사로부터 독립적이고, 단순히 심리상담뿐 아니라 전직이나 업무 복귀 상담까지 포괄하고. 직무스트레스 관리와 노동환경 평가까지 다면적으로 접근하는 힐링센터의 경험은 "웬만한 규모가 있는 회사에서는 다 했으면 좋겠다"라고 추천한다.
일터괴롭힘에서 조직은 '중재자'가 아닌 '반성의 대상'
200호까지 발간되는 동안, <일터>가 꾸준히 다뤘던 문제 중 하나가 '일터괴롭힘'이다. 2000년대 중후반부터 상사의 폭언에 의한 정신질환, 직장 내 따돌림 등 관련된 이슈가 간헐적으로 있었다. 여기에 '직장갑질', '일터괴롭힘'이라는 이름이 붙여지면서, 지난 3~4년 사이 한국 사회에서 가장 뜨거운 노동 인권 이슈가 되었다.
노동인권 의식이 매우 낮은 한국 사회 일터에서 일하는 많은 노동자가 '직장갑질'이라는 말에 열렬히 호응했고, 그동안 인식되지 않았던 다양한 인격 침해를 '일터 괴롭힘'이라고 명명함으로써 각자의 고통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억압적인 일터로부터 겪은 각자 경험이 흩어지지 않고 하나의 서사로 묶이면서, 한국의 노동현실을 드러냈다. 물론 처음에는 일부 자극적인 사건들을 중심으로만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직장갑질119 등에서 지속적으로 문제제기가 이뤄지면서 해당 사업장에서 노동조합을 결성하는 조직적 움직임이 나타났다. 그리고 각 기관에서 일터괴롭힘 예방 가이드라인을 제정했을 뿐 아니라, 근로기준법에 '직장 내 괴롭힘 금지' 조항을 도입하는 등 유의미한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이 중 특별히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가 주목해 온 부분은 조직적 괴롭힘이다. 조직적 괴롭힘은 일터괴롭힘을 실적이나 성과 향상 수단, 노무관리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을 말한다. 조직적 괴롭힘이 중요한 이유는 집단적 노사관계, 자본의 착취 구조와 형태 등이 노동자 정신건강에 매우 직접적인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가학적 노무관리'라는 말에서도 드러나듯, 회사가 최고의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 또는 자본이 이윤을 내기 위해서라면, 언제든 노동자의 인격과 정신을 파괴할 수 있다. 조직적 괴롭힘에 주목할 때, 비로소 우리는 이와 같은 사실들을 드러내보일 수 있다.
조직적 괴롭힘의 역사는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2000년대 초반부터 청구성심병원, 하이텍알씨디코리아 등에서 노동조합 활동을 억누르기 위해 일터괴롭힘이 활용된 사례들이 <일터>에 소개됐다. 2010년대 들어서는 KT와 유성기업의 노조탄압, 증권사의 저성과자 퇴출 프로그램 등의 사례가 부각되었다. 이러한 조직적 괴롭힘 또한, 한국에서 일터괴롭힘이 본격적으로 논의되는 데 있어 중요한 계기 중 하나였다.
조직적 괴롭힘은 개인 간의 괴롭힘보다 대규모로 이뤄질 뿐만 아니라, 훨씬 더 분명하고 악의적이고 체계적으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런 조직적 괴롭힘은 멀리 있는 일처럼 느껴지기 쉽다. 개인 사이에 발생한 괴롭힘에 비해 개선이 어렵고,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더욱이 문제로 인식되더라도, '노동자 정신건강 침해'라는 관점보다 '노사갈등', '공격적 경영' 등의 틀로 설명되기 쉽다.
예를 들어, 경비원에게 막말을 한 입주자는 손쉽게 가해자로 지목되지만, 은근하게 모멸감을 주면서 마치 자발적으로 퇴사하는 것처럼 노동자들을 해고하는 회사는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처럼 조직적 괴롭힘의 양상은 모호하기에, 사람들로 하여금 문제제기를 어렵게 한다. 오히려 자본과 기업은 이를 빌미삼아 피해자와 그에 연대하는 사람들의 요구를 왜곡 또는 희석시킨다.
지난 2005년 하이텍알씨디코리아 노동자들의 집단 우울증을 둘러싼 말들이 이를 잘 보여준다. 노사갈등으로 인한 것이기 때문에 업무상 질병이 아니지 않느냐는 반문과 아프다면서 어떻게 농성할 수 있냐는 비아냥거림 등등. 이러한 공격은 2016년 유성기업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한광호 조합원의 산재 승인 후 회사가 승인 취소를 요구하는 행정 소송을 거는 방식으로 되풀이되고 있다.
이에 대해, 유성기업 노동자들의 일터괴롭힘 대응과 심리상담을 오랫동안 지원해 온 충남 노동인권센터 노동자심리치유사업단 두리공감의 장경희 활동가는 "'조직'에 의한 구조적 괴롭힘은 비가시성 때문에 잘 조명되지 않는다. 사내 규칙과 규율 또는 제도, 경영자의 암묵적 메시지는 괴롭힘을 행사하는 도구이자 은폐하는 장치"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그는 '조직적' 괴롭힘과 '개인 간' 괴롭힘이 따로 있다고 얘기하는 것도 또 다른 은폐의 위험이 있다고 지적한다. 사실 노동자 개인들 사이의 폭력(괴롭힘) 역시, 그 배후에는 조직이 있다는 것이다.
피해자를 위한 연단은 확대되어야 하지만, 괴롭힘을 "개인 일탈로의 치부, 방관하면 괴롭힘은 재생산"된다는 것이 장경희 활동가의 주장이다. "조직이 더이상 중재자가 아닌 반성과 변화의 대상임을 제기"하고 조직 자체를 변화의 대상으로 삼을 때, 일터괴롭힘을 줄여나갈 수 있다.
노동자 자살, 죽음 너머 노동환경을 보라
이런 다양한 이슈들이 우리의 시야로 들어오는 과정에 대부분 '노동자 자살'이 있었다. 노동자들은 일터 괴롭힘에 시달리다가, 적대적인 노동환경에 적응하려 애쓰다가, 아픈 몸을 이끌고 일해 보려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산재 요양 중 목숨을 끊은 이상관 노동자를 통해, 경제적 동기에 따른 산재요양 관리가 산재 노동자를 얼마나 압박하는지 드러났다. 도시철도 기관사의 잇따른 자살로 과도한 책임, 억압적인 조직문화 등이 집단적인 직업적 정신질환 발병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쌍용차 정리해고 이후 스스로 세상을 등진 노동자들을 통해, 정리해고가 노동자에게 얼마나 큰 상처이며, 그 과정에서 벌어진 국가 폭력이 이 트라우마를 어떻게 확대하는지 알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일과 관련한 자살은 노동자의 정신건강을 위협하는 노동환경으로 인한 침해를 드러내는 여러 징후 중 하나로 봐야 한다. 자살이 하나의 극단적이거나 이례적인 사건이 아니라, '자살 정도는 돼야 주목하는 한국사회'가 극단적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오히려 지금까지 한국사회는 '자살'의 경우에도 죽음 너머 노동환경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했다. 한 해에 1만 3000여 명이 자살하고, 2003년부터 자살예방대책을 운영하면서도, 그동안 정부의 자살예방대책에서 노동자는 빠져있다시피 했다. 1, 2차 자살예방정책에서는 '직업'이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매년 발간하는 '자살예방백서'에서도 직업군에 대한 분석은 매우 단순하여, 직업군별 사망자수만 제시될 뿐, 사망률도 분석되지 않는다. 2019년에야 정부가 심리부검을 실시하고 경찰청 조사 기록을 확보하는 등 자살의 원인에 대해 심층적인 접근을 시작하면서, 노동환경에서의 스트레스가 자살 경로에서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중앙자살예방센터가 펴낸 '2018 심리부검 면담 결과 보고서'에 따르면, 자살사망자의 사망 전 스트레스 사건 중 정신건강 관련 문제가 84.5%로 가장 많았지만, 직업 관련 스트레스 사건이 68%로 뒤를 이었다. 직장 내 대인관계, 퇴직 및 해고, 이직 또는 업무량 변화 등이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자살 경로의 시작점인 첫 번째 위험 요인에서 가장 빈도수가 높았던 것이 업무부담이었다는 점이다. 직접적인 자살 동기는 정신적 건강 때문일지라도, 그 정신적 건강 문제가 시작되는 요인이 업무일 수 있다는 얘기다. 자살 예방 정책에서 일터와 직무스트레스를 반드시 고려해야 하는 이유다.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의 '업무상 정신질환 연구모임'에 함께 하고 있는 류한소 사회학 연구자는 그래도 노동자 자살과 관련해 한국 사회에 긍정적인 변화가 크다고 본다. "경비노동자 자살 사건을 보면서 사람들이 공분하거나 아이돌 가수가 자살로 사망했을 때 '이것도 산재'라는 기사들이 뜨는 것"을 보면서 이를 느꼈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 노동자 자살은 구체적인 규모와 원인도 공백으로 남아 있다. "일단은 노동자 자살의 규모를 파악할 수 있는 통계들이 생겨야 한다. 심리부검 수준의 세부적인 통계가 생겨서 일단 이 사람이 왜 자살을 했는지 추정이라도 해볼 수 있는 국가통계가 있어야" 예방을 위한 활동도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감정노동은 '고객'의 문제가 아니라 '사업주'의 책임
일터가 200호까지 발행되는 동안, 노동자 정신건강 분야에서 가장 극적인 변화가 있었던 주제가 감정노동이 아닐까 싶다. 2006년 3월 서비스연맹과 한국노동사회연구소가 진행한 감정노동 연구를 소개한 단신 기사로 <일터>에 처음 등장했던 감정노동은 콜센터 노동자, 판매 노동자, 교사, 금융노동자 등 다양한 노동자들의 문제제기로 이어졌고, 다양한 개선책도 제안되었다. 감정노동수당, 감정노동휴가 등의 보상 방법이 개별 사업장마다 시도되었다. 무엇보다 노동자가 고객의 과도한 요구에 시달리지 않도록 예방과 지지체계를 사업주가 만들어야 한다는 내용이 산업안전보건법에 도입되기도 했다.
감정노동을 수행하던 노동자에게서 발생한 정신질환도 산재로 보상받게 되었다. 특히 콜센터 노동자가 먼저 통화를 끊을 수 있는 권리를 얻어낸 것은 서비스 노동, 감정노동에서 작업중지권이 어떻게 노동자를 보호할 수 있는지 잘 드러내는 사례였다. 희망연대노조 다산콜센터지부 투쟁의 성과로, 2014년 2월 콜센터 상담사들의 인권실태조사 이후 원스트라이크아웃 제도가 도입됐다. 성희롱, 언어폭력, 무의미한 통화 등의 악성 민원에 대해 상담사들이 안내 후 전화를 끊을 수 있게 하고, 곧바로 법적 조치를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런 조치가 중요한 이유는 감정노동자 '보호'를 위한 정책 마련과는 달리, 노동자에게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힘과 권리를 부여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 사례를 통해 작업중지권이 반드시 재래식 사고 위험이 임박했을 때에만 활용되는 권리가 아니라는 인식이 확산되기도 했다.
물론 여전히 콜센터 노동자들의 전화 끊을 권리 보장은 쉬운 일이 아니다. 코로나 이후, 마스크공급, 방역수칙, 재난지원금 등 정부 문의가 폭주하면서, 업무량이 엄청나게 증가한 정부민원안내콜센터의 석소연 분회장은 "끊을 권리가 있다고 하지만, '차단하겠다'는 멘트를 하면서 팀장에게 허락을 받아야만 끊을 수 있다. 결국 허락받을 때까지, 욕설이나 고성을 다 들어야 한다"라고 토로했다. 감정노동자에 대한 시민들의 인식이 높아졌다고 해도, 콜센터 업무의 특성상 결국 본인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악성 민원인으로 돌변할 수 있다. 필요한 것은 이럴 때 스스로 빠르게 대처할 수 있는 노동자의 자율권이다.
또한, 감정노동에 대한 문제제기는 여성 노동자가 처한 특수한 위험 요인을 드러내는 데에도 기여했다. '타인의 감정을 맞추기 위해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통제하는 일을 일상적으로 수행'하는 역할은 꼭 임노동에서만이 아니라 많은 여성이 가족, 일터, 사회관계에서 일상적으로 수행하던 일이기도 했다. 이런 맥락에서 감정노동에서 흔히 문제가 되는 '친절과 미소' 요구는 대부분 여성 노동자에게 집중된다. 이런 요구는 업무에 성별화된 역할과 지위를 부여하고, 해당 업무를 수행하는 여성 노동자를 성적 괴롭힘에 취약하게 만든다. 특히 야간에 안내하는 여성 상담원들의 경우, 더 자주 성폭력에 노출되는 것처럼 보인다. 석소연 분회장의 동료 중에도 심한 성폭력 발언을 들은 뒤, 자살 충동을 느껴 옥상에 올라가기까지 한 사례도 있었다.
고객을 상대하는 모든 업무가 노동자를 소진시키는 것은 아니다. 감정노동은 노동자의 감정조차 자본에 의해 어떻게 이윤 추구의 도구로 활용되는지를 보여주는 개념이다. 이를 염두에 둬야만, 다음과 같은 중요한 질문을 놓치지 않을 수 있다. 회사와 자본은 노동자의 감정을 어떻게 착취하는가? 반대로 노동자의 권리와 주체성을 보장하기 위한 체계를 가지고 있는가? 고객 응대 등의 업무를 하는 노동자에게 노동과정에 내재된 감정노동이 노동자에게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가는 업무 자체에 더해, 노동시간과 노동강도, 작업환경은 어떠한가에 따라 달라진다. 감정노동과 관련된 과제가 '감정노동' 그 자체로만 국한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다.
석소연 분회장에 따르면, 코로나로 문의 전화가 폭주하고, 이 때문에 쉬는 시간을 지키지 못하고 있는데도, 여전히 매달 통화품질평가(QA)를 실시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감정노동으로 인한 스트레스는 더 높아질 수밖에 없다. 감정노동을 진상 고객과 서비스 노동자 사이의 문제가 아니라, 사업주의 관리 책임 문제로 인식해야 한다.
마음 다치지 않고 일하는 일터는 가능한가?
노동자의 정신질환과 자살은 이윤축적 과정에서 노동자를 정신적으로 건강하고 안전할 수 없는 상태에 빠뜨리는 자본주의 자체로부터 비롯된다. 어떻게 마음 다치지 않고, 인간답게 일할 수 있을 것인가. ILO 산업보건서비스의 원칙 중 '적응의 원칙'이 있다. 일터의 속도와 질서에 노동자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의 몸과 삶에 일터를 맞춰가야 한다. 예를 들어, 근골격계 부담을 줄이기 위해 중량물을 줄이고, 컨베이어 벨트의 속도를 늦추는 것이다.
정신건강 문제도 마찬가지다. 우리 각자가 더 참고 견디는 법을 익히는 것이 아니라, 유리멘탈인 사람도 일할 수 있는 일터가 되어야 한다. 이렇게 일터를 바꾸는 데 있어, 노동자 참여가 반드시 전제되어야 한다. 신체건강이나 정신건강 모두 마찬가지다. 노동자가 참여할 때에야 제대로 문제제기할 수 있으며, 실효성 있는 개선방안을 제안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노동자들 스스로도 일터를 변화시키는 주체로 설 수 있다. 이를 위해 도시철도에서 노동자, 노동조합이 시도했던 것과 같은 다양한 경험이 공유될 수 있기를 바란다.
산재보상과 관련해, 그동안 주로 정신질환 산재 승인률을 높이는 데에 관심의 초점이 맞춰져 왔다. 앞으로는 정신질환으로 인한 산재 요양의 질과 재활 과정, 노동자와 사업장 양 측면에서 업무 복귀를 위해 필요한 지원, 다른 질환 요양 중 발생하거나 악화되는 정신질환 문제 등이 폭넓게 다뤄져야 한다. 아직 연 200건이 채 되지 않는 정신질환 산재 신청 자체가 늘어나고, 치료받을 권리를 보장받는 것도 중요한 과제다.
한국 사회 전체적으로 정신건강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고 있어, 앞으로 노동자 건강 영역에서도 정신건강과 관련된 관심과 요구는 증가할 것이다. 하지만 류한소 연구자가 지적하듯이, 일과 관련된 정신질환이나 자살에 대한 관심이 "여러 방식의 심리치료, 다양한 힐링문화나 서비스 상품들, 하다 못해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충동구매를 하는 '시발비용'에 대한 유행까지 또 다른 힐링상품에 대한 소비로 끝나지 않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각자 참아내거나, 각자 다른 상품을 소비하는 방식이 아니라, 함께 일터를 바꿔내기 위한 시도를 월간 <일터>가 지속적으로 알리고 엮어나가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