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시간 읽어주는 사람] 초장시간 노동이 만연하는 방송 영역, 더욱 심각한 아동-청소년 연기자의 노동 / 2020.02

초장시간 노동이 만연하는 방송 영역, 더욱 심각한 아동-청소년 연기자의 노동

 

성상민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활동가, 문화평론가

 

"12시간 일하고 12시간 쉬자!" 독자들에게는 이 말이 무척이나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다. 하루 12시간 일하는 것도 엄연히 노동법에 위배되는 상황인데 왜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일까. 그러나 드라마 촬영을 비롯한 방송 노동에서는 12시간 쉬는 것도 무척이나 감지덕지한 상황이 오랜 시간 이어졌다.

본래 이 구호는 2005년 결성한 전국영화산업노조에서 사용하던 문구였다. 문화예술과 관련된 업계 중에서는 가장 빠르게 노조가 생긴 편이었던 영화 영역은 다른 문화 영역의 노동과 다를 바 없이 매우 열악한 노동환경에 놓여 있었다. 노동인권을 고려하지 않는 무리한 야간 촬영, 장시간 촬영도 척박한 노동조건의 일부였다. 다행히도 영화노동은 10년 이상 지속된 영화산업노조의 투쟁과 활동의 결실로 표준 근로계약서를 정착시키는 것은 물론 열악했던 노동 환경이 차근차근 개선되고 있는 상황이다. 물론 주52시간 연장 제한 준수를 위한 움직임도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이렇게 영화 노동의 상황이 변화하고 있는 것과 달리 방송 노동은 201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야 열악한 상황이 주목을 받게 되었다. 오랜 시간관행으로 정착된 '쪽대본 문화'는 방송 촬영에 충분한 여유를 들일 수 없게 만들었고, 2000년 대 이후 방송업계에서 가속화된 프로그램 제작 외주화 는 '방송 산업 전문화'와 '방송 프로그램 다양성 추구'라는 명분과 달리 전형적인 하도급 노동의 체제를 방송업에 그대로 정착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방송국이 충분한 제작비를 지급하지 않은 상황에서 외주 제작사조차도 자기들이 살기에만 바빠 방송 노동의 문제는 등한시했다. 여기에 한국의 경우, 방송을 비롯한 문화예술 영역의 노동이 전반적으로 시장 규모에 비해 제대로 된 노동자 보호 제도가 정착 되지 못한 것은 물론 노동자들의 조직화도 충분치 않다는 제반 조건의 문제까지 존재한다. 

방송국이 자신이 만드는 프로그램에 제대로 된 책임 의식을 지니지 않는 사이 방송국은 방송노동자들을 쉽게 쓰다 버리는 휴지처럼 취급하는 일이 만연했다. 근로계약서를 쓰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방송노동자들을 노동자로 인식하지 않은 사례는 무척이나 허다했다. 방송 노동에 대한 감수성이 미비한 상황에서 '쪽대본 문화'가 겹친 결과는 초장시간 노동이다.  

20년 1월 14일 화요일 오후 <아동 청소년 대충문화예술인 노동인권 개선 토론회>가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렸다. 출처: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극히 일부의 프로그램을 제외하면 대다수의 방송 프로그램은 방송 예정 시간 하루 전, 심하면 몇 시간 전까지도 촬영이 계속된다. 또한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방송국 사이의 경쟁 속에서 한국 드라마의 평균 방송 시간은 세계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길어졌다. 방송 시간은 세계에서 제일 긴데, 준비 하는 시간은 세계에서 제일 짧은 기형적인 환경 에서 여유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빡빡한 스케줄 속에서 촬영시간은 하염없이 길어졌다. 시간이 없으면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야간 촬영 장면이 있으면 최대한 밤 시간대를 활용해야 한다는 이유로. 여기에 아무리 노동시간을 길고 길게 만들어도 제동을 걸 존재나 제도도 없었다. 

제대로 된 수면이나 휴식을 취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산재 사고는 끊이지 않고 발생했다. 업무 특성상 준비 작업과 철수 작업으로 다른 직군보다 더욱 길게 일하는 세트나 소품, 분장 등의 미술 분야 팀은 출퇴근 과정에서 크고 작은 교통사고를 당하기 일쑤였다. 폭염이나 한파가 찾아와도 노동시간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2018년 SBS에서 방송한 드라마 <서른이지만 열일곱입니다>에 참여한 방송노동자 한 명이 그해 7월, 사상 유래 없던 폭염 속에서도 76시간 촬영을 하다 집에서 잠시 수면을 취하던 중 과로사로 의심되는 돌연사로 세상을 떠난 사건이 대표적이다. 

'하루 12시간 노동'은커녕 주 70시간, 주 80시간 노동이 만연한 상황 속에서 방송노동자 대다 수가 힘겨운 상황에서, 더욱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분야가 있다. 소위 '아역배우'라는 호칭으로 익숙한 아동·청소년 연기자들이다. 많은 이들이 알다시피 아동과 청소년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 으로 성숙하는 단계에 놓여있기 때문에 세심하게 접근해야 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이 상식은 최소한 방송 노동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방송 노동에 만연한 초장시간 노동환경이 그대로 아동·청소년 연기자들에게도 적용된다. 설사 등장하는 장면이 단 몇 장면에 불과 할지라도, 그 몇 장면을 찍는 시간까지 하염없이 기다리는 일이 다반사이다. 장시간 촬영, 장시간 대기가 고착화된 상황에서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하는 것은 물론 학교에 다니는 아동·청소년 연기자는 학습권을 침해받기까지 한다. 

지난 1월 14일,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를 비롯해 문화연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언론개혁시민연대 등 인권·노동·언론 영역의 단체들이 모여서 결성한 '아동청소년 대중문화예술인 노동인권 개선을 위한 팝업(Pop-Up)'이 국회 토론회에서 발표한 아동·청소년 연기자 실태조사에 의하면 이 실태는 더욱 명확해진다. 조사에 참여 한 총 103명의 아동·청소년 연기자들 중 1일 최 장 12시간 촬영을 경험한 이들은 63명으로 60%에 육박했다.

심지어 이들 중 3명은 24시간 이상 촬영을 경험한 적이 있다고 대답하여 충격을 주었다. 이러한 초장시간 노동에 아동·청소년 연기자나 보호자의 동의를 받는 경우는 무척이나 드물었다. 단 18명의 응답자만 야간 촬영를 진행할 때마다 제작사가 동의를 구했다고 답변했다. 자연스레 이는 학습권에도 영향을 미쳤다. 단 2명의 아동·청소년 연기자만이 드라마 촬영 기간 중에 결석이나 조퇴를 한 적이 없다고 대답했다. 

성인들도 제대로 쉬지 않고 일하면 피로를 느끼는 상황에서, 한창 성장기에 놓인 아동·청소년 연기자들에게 초장시간 촬영은 더더욱 큰 피해를 줄 것은 명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도 아동·청소년 연기자들의 노동환경은 여전히 열악한 환경에 그대로 놓여 있는 것이 현실이다. 여기엔 방송노동환경이 전반적으로 열악한 것이 그대로 아동·청소년 연기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문제도 크지만, 한국 사회가 아동·청소년 연기자를 바라보는 시선도 함께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어린 나이부터 연기자 활동을 하는 아동·청소년들은 일찌감치 자신의 진로를 방송 영역의 노동으로 정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아직도 방송노동자들을 위한 의무적인 노동 교육도, 강고한 힘을 지닌 방송사나 제작사에 맞서 노동자의 권리를 보호할 수 있는 제도나 단체 의 힘도 미비하다. 게다가 현장에서는 PD의 힘이 지배적으로 작용하는 상황에서 자연스레 아동·청소년 연기자 상당수는 연기 활동을 안정적으로 지속하기 위해 아무리 부당한 일을 겪어도 참는 것이 당연하게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9살 때부터 연기 활동을 시작해 어느덧 배우로는 물론 가수로도 이름을 알린 양동근이 2015년이 되어서야 드라마 PD에게 정신적인 폭력을 받은 것을 고백한 것이 대표적이다. 청소년 시기를 지나 성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렸을 때부터 심어진 침묵의 기제가 아동·청소년 연기자들에게 강력하게 작동한다는 사실이 어렴풋이 드러난 사건이었다. 

여기에 아동·청소년 인권에 대한 인식과 감수성이 낮은 환경이 함께 영향을 미친다. 아동·청소년을 동등한 존재로서 대우하고 존중하기 보다는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차별하거나 무시하는 것이 2020년 현재에도 한국에서는 만연 한 것이 현실이다. 이렇게 방송 노동의 열악한 현실은 방송 노동 현장의 억압적인 문화와 열악한 인권 감수성이 결합하며 오랜 시간 동안 문제가 있어도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아동·청소년 연기자의 초장시간 노동환경은 연기자가 되기 위한, 또는 방송 환경에서 버티기 위한 당연한 '통과의례'로 여기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그 통과의례는 과연 누구를 위한 통과 의례인가. 그저 시청률과 광고료에만 신경 쓸 뿐, 제대로 된 휴식이나 수면은 물론 학습권조차도 보장받지 못하는 무법천지의 방송노동환경은 얼마나 아동·청소년 연기자가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돕고 있는가. 방송사나 제작사의 이권만을 신경 쓰는 방송 산업에서 한국의 아동·청소년 연기자는 열악한 방송 환경과 억압적인 방송 문화, 척박한 아동·청소년 인권의 '삼중고'에 오늘도 시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