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_문화로읽는노동] “이렇게도 노동재해를 이야기할 수 있구나”- 판 드라마 <야드> 관람기

이렇게도 노동재해를 이야기할 수 있구나

- 판 드라마 <야드> 관람기

 

올해 통영국제음악제에서는 야드라는 공연이 무대에 올랐다. 조선소 노동자의 산재 사고를 소재로 한 임채묵 작가의 단편소설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었다. 출연진은 단 한 명, 판소리꾼이자 이날치 밴드의 보컬 안이호 씨였다. 안이호 씨는 소설 속 이야기 위에 소설을 읽은 자신의 감상과 해설을 덧붙여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냈다. 연기도 하고, 소리도 하고, 춤 혹은 몸동작도 한다. 연극, 뮤지컬, 판소리, 뭐라고 불러야 적당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제작진도 판소리와 드라마를 합쳐서 판 드라마라는 이름을 붙인 모양이다.

남의 눈으로 본 내 노동은 어떨까

시작을 알리는 공이 울리고 공연장이 칠흑처럼 어두워졌다. 무대 저 멀리 커다란 화물용 엘리베이터 출입문이 덜커덩 열렸다. 거기 한 사람이 서 있었다. 그이는 제 머리통에 알루미늄 호일을 둘러 감았다가, 벗겨내어 바닥에 내려놓고, 다른 호일을 집어 들어 다시 머리통에 감고 벗겨서 내려놓았다. 하나, , , 쉬지도 않고 열 개인가 스무 개인가 호일로 만든 머리통 모양의 구체를 벗어 던질 때마다 가볍고 차가운 금속성 잡음이 무대에 번졌다.

뭘 하는 거지? 저게 뭐지? 객석에 앉은 사람들은 모두들 눈에 힘을 잔뜩 주고 배우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환하게 불이 켜져 있는 엘리베이터에서 조금 걸어 나와 어두운 무대에 한걸음 다가섰다. 이제 엘리베이터 안을 비추던 환한 조명이 그의 등 뒤로 감춰졌다. 무대가 조금 더 밝았으면 좋겠는데. 배우가 우리 쪽으로 조금 더 가까이 오면 좋겠는데. 그는 그저 한 발짝만 나왔을 뿐이고, 이제 우리 눈에는 조명을 등지고 선 그의 실루엣만 보일 뿐이었다.

그는 거기 서서 알루미늄 호일을 머리에 감고, 벗겨내어 바닥에 내려놓고, 다른 호일을 머리에 감는 일을 계속 했다. 검은 실루엣을 한참 지켜보노라니 눈의 초점이 차차 흐려졌다. 어느 순간, 그가 끝없이 자라나는 자기 머리통을 떼어 던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혹은 인간의 속성 따위는 전혀 들어있지 않은, 텅 빈 가짜 머리통을 계속 찍어내고 있는 것도 같았다. 혹은 그저 기계처럼 아무 의미 없는 움직임을 반복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궁금하고, 섬뜩하고, 처연하고, 답답해졌다. 내 일상의 노동도 멀리서 남의 눈으로 보면 그렇지 않을까.

 

나는 내 노동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공연의 뼈대는 원작 소설의 이야기에 있다. 조선소에서 일하는 사람들, 그 중에서도 선박에 케이블을 까는 노동자들의 이야기다.

제일 처음 나오는 목소리는 야드에 대해 이야기한다. 거대한 선박, 거대한 장비들, 그것들을 담고 있기에 더욱 거대한, 너무 거대해서 사람 따위는 보이지도 않는 야드의 장대함을 열정적으로 설명한다. 흡사 자기가 일하는 곳의 위대함에 가슴이 벅찬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다만, 옷섶마다 솔기마다 어찌나 쇳가루가 많은지 모르겠노라 한다. 털어도 털어도, 씻어도 씻어도, 귀신에 홀린 듯 어디선가 쇳가루가 계속 나온다. 끝도 없이 나오는 쇳가루는 과연 그이의 작업복에서 나오는 게 맞을까. 혹시 그이의 몸속 가득 쇳가루가 쌓인 건 아닐까. 피부의 주름과 땀구멍, 털 사이사이에, 온통 쇳가루가 들어찬 것은 아닐까. 세월이 더 흐르면 쇳가루 눈물, 쇳가루 땀을 흘리고 쇳가루 오줌, 똥을 싸게 되지는 않을까. 지금 그이의 몸은 본래 타고난 모습의 몇 퍼센트나 남아있는 걸까. 쇳가루가 들어차는 대신, 그이의 몸에서 사라진 것은 무엇일까.

생각을 더 이어갈 새 없이 이야기는 선박에 케이블을 까는 작업 설명으로 이어졌다. 아무리 장대한 선박도 동력과 신호를 전달하는 케이블이 구석구석 깔리기 전까지는 쓸모없는 쇳덩어리일 뿐이다. 그렇게 중요한 작업이건만 정작 케이블을 설치하는 일은 아주 간단하다’. 안이호 배우는 어느 새 고참 노동자가 되어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작업 방법을 가르쳐준다. ‘“하면 잡고 하면 당겨’. 이렇게 말하며 그는 라고 외칠 때 케이블을 움켜잡고, ‘라고 외칠 때 케이블을 당기는 시범을 보인다. 배우가 홀로 무대에 쭈그리고 앉아서 ’, ‘’, ‘’, ‘를 반복하는 동안, 관객의 머릿속에는 선박의 온갖 구멍이며 코너마다 몸을 구겨 접고 들어가 손바닥이 쓸리고 어깨와 허리를 삐어가며 케이블을 잡아당기는 노동자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 노동은 그저, ‘하면 잡고 하면 당기는 일일 뿐일까.

 

가련할 손 백만 군병은 허망히 죽고

무대 위의 는 낯설고 거대한 야드에 처음 들어와 케이블을 당기는 일을 배우는 신참이다. 이런 나에게 먼저 다가와 악수를 청하며 인사를 건넨 사람이 태식이다. 나보다 몇 살 적어 싹싹하게 굴면서도 경력으로는 선배랍시고 가르쳐주는 시늉도 제법 할 줄 아는, 밉지 않은 동료. 태식이는 아침마다 야드에 울려 퍼지는 신나는 안전송뒷이야기 따위도 슬며시 귀띔해주었다. 사람이 죽은 다음 날엔 안전송을 틀지 않는다나.

어느 날, 둘이 함께 야드를 걸어가던 중 지게차가 태식이를 덮쳤다. 태식이는 내 눈 앞에서 허리부터 다리까지깔려 즉사했다. 누군가는 탄식했다. 안전통로가 아닌 곳으로 걸어 다니면 안 된다는 걸 왜 누구도 이야기해주지 않았느냐고. 또 누군가는 담담하게 말했다. 매년 열 명이 따박따박 죽어나가는 조선소에서 늘 일어나던 일이 일어났을 뿐이라고. 그런데 담담하건 탄식하건 다들 손바닥을 털며 일어나 하는 말은 같았다. 결국 배는 나가야 되니까(가서 일이나 하자).

결국 배는 나가야 되니까, 결국 일은 해야 되니까, 태식이가 죽은 자리는 말끔히 치워지고 야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 딱 하나 달라진 것이 있긴 했다. 사고 다음 날 아침에 안전송이 나오지 않았다.

객석에 낮은 탄식이 흘렀다. 분노인지 슬픔인지 정의하기 힘든 감정이 밀려와 나도 모르게 어금니를 깨물었다. 그런데 갑자기 안이호 배우가 무대 앞으로 성큼 나오더니 판소리 적벽가한 대목을 부르기 시작했다.

가련할 손 백만 군병은앉어 죽고 서서 죽고 웃다 울다 죽고 밟혀 죽고 맞어 죽고 애타 죽고 성내 죽고 덜렁거리다 죽고 복장 덜컥 살에 맞어 물에거 풍 빠져 죽고 바사져 죽고 찢어져 죽고 흉하게 죽고 우습게 죽고무단히 죽고 함부로 덤부로 죽고 땍때그르르 궁굴다 아뿔사 낙상하야 가슴 쾅쾅 뚜다리며 죽고 실없이 죽고 가이없이 죽고 어이없이 죽고 허망히 죽고 재담으로 죽고 꿈꾸다가 죽고대해수중 깊은 물에 사람을 모두 국수 풀 듯 더럭더럭 풀며적벽 풍파에 떠나갈 제 일등명장이 쓸 디가 없고 날랜 장수가 무용이로구나

소리를 듣노라니 꽉 깨물고 있던 어금니에서 스르르 힘이 풀렸다. 앉아 죽은 이, 서서 죽은 이, 부서져 죽은 이, 실없이 죽은 이, 어이없이 죽은 이, 허망이 죽은 이들을 떠올리며 나도 모르게 아이고’, ‘저런탄식이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가련할 손 노동자여. 전쟁 같은 일터에서 전쟁처럼 더럭더럭 죽어간 사람들이여.

 

공연보다 더 긴 여운

이 작품의 뼈대는 원작 소설 속 이야기지만, 그 뼈대 위에 이야기가 불러일으킨 감정이나 심상, 생각 따위의 근육과 피부를 덧붙여 완성된 것 같다. 이야기는 말만으로도 충분히 전할 수 있지만, 이야기가 불러일으킨 감정과 심상은 말로 다 전하기 어렵다. 그래서 음악으로, 미술로, 혹은 어떤 맛이나 촉감에 빗대어 설명해야 한다.

이 공연 말미에도 소리, , 모양, 동작, 그리고 사람의 눈빛과 표정 등 비언어적 방식으로 이야기 위에 덧붙여질 감정과 마음을 보여주는 부분이 있다. 배우의 몸짓, 무대에 준비된 장치들과 조명 같은 것들이 관객들의 눈과 귀를 통해 이성과 감정의 모든 창문을 두드린다고나 할까. 그게 바로 공연 예술의 힘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이런 공연이라면, 살면서 단 한 번도 산업재해 통계를 들여다보거나 중대재해 사례를 자세히 들어본 적 없던 사람들의 가슴 속 창문도 노크할 수 있지 않을까.

(공유정옥 회원, 직업환경의학 전문의)

[일터6월호_문화로 읽는 노동] 텅 비고 지옥처럼 추운 저 땅으로 노동자들은 모두 함께 간다 - 〈체르노빌〉, 노동계급의 자부심이 세상을 바꿀 때

텅 비고 지옥처럼 추운 저 땅으로 노동자들은 모두 함께 간다 

- 〈체르노빌〉, 노동계급의 자부심이 세상을 바꿀 때

강남규 문화사회연구소 운영위원

 

 

▲ 머뭇거리며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사고현장에 투입을 요청하는 당간부와 아무 말 없이 이에 응하며 그의 어깨를 탄가루 묻은 손으로 툭 만져주고 가는 탄광노동자들.

 

재난이 드러낸 사회의 한 단면

어떤 점에서 재난은 한 사회의 총체다. 그 사회의 민낯이 낱낱이 쌓여 하나의 재난을 이룬다. 그래서 하나의 재난을 자세히 해부하는 일은 곧 한 사회를 들여다보는 일과 같다. 그런 의미에서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사고를 다룬 미국 드라마 체르노빌(2019)을 본다는 것은 당대 1980년대 후반 소련의 실상을 들여다보는 일인 셈이다. 원전 폭발이라는 (당시로서는) 전대미문의 재난은 소련 사회의 모순과 허술함을 빈틈없이 폭로했고, 체르노빌은 그것들을 천천히 그리고 깊게 조명한다.

그러나 재난은 또한 동시에 한 사회의 선한 면을 드러내기도 한다. 레베카 솔닛의 말을 빌리자면, 재난은 "천국으로 들어가는 뒷문"도 함께 연다. 체르노빌의 한 장면이 그 '뒷문'이다. 툴라 광산의 쉼터에서 광부들이 휴식하며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받는다. 그때 파란색 양복을 입고 머리를 잘 빗어 넘긴 한 남자가 찾아온다. 그의 양옆으로는 총을 든 군인 두 사람이 있다. 그의 등장을 알아차린 광부들이 밖으로 나와 앞에 도열한다. 찾아온 남자는 소련 석탄산업부 장관 샤도프, 석탄산업을 관장하는 최고 공무원이다.

 

그가 간단한 자기소개를 마친 뒤 광부들에게 다짜고짜 지시한다. "장비를 들고, 트럭에 타라." 작업반장이 대표로 대답한다. "왜요? 어디로 가는데요?" 기밀이라 말할 수 없다는 장관. 그러자 작업반장은 호기롭게 대답한다. "그럼 우릴 다 쏴죽이쇼. 여긴 툴라고, 이곳은 우리 광산이에요. 이유를 알기 전엔 안 움직입니다." 당황한 장관이 솔직하게 말한다. 체르노빌로 간다고. 격앙됐던 광부들의 표정이 굳는다. 장관이 덧붙인다. 원자로 원료가 가라앉고 있다고, 그걸 못 막으면 모두가 위험해질 거라고. “당은 동무들이 그걸 막아줬으면 좋겠어.” 이제 광부들은 더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석탄에 뒤덮인 몸 그대로 트럭으로 향해 간다.

드라마 전체를 통틀어 비중이 큰 장면은 아니지만, 노동계급 특유의 '스웨그'가 강렬한 인상을 남겨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장면이다. 노동계급의 자부심이랄까. 광부들은 장관이라는 '권위'에 굴복하지 않았다. 군인이라는 '폭력'에도 굴복하지 않았다. 그들은 스스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선택'했다. 그들 자신의 기술과 존엄이 저들의 권위에 앞선다는 데에, 그리고 동료들도 같은 결정을 내릴 것이라는 데에 본능적인 확신이 없었다면 이 장면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 〈미안해요, 리키〉의 한 장면

 

세계를 진일보시키는 힘, 노동계급의 자부심

특히 서구사회에서 ‘노동계급의 자부심’이라는 주제는 흥미롭다. 그것은 생각지도 못한 장면에서 불쑥 튀어나와 이야기의 개연성을 무너뜨린다. 어떤 노동자가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결정을 내릴 때, 그 배경에는 종종 계급적 자부심이 있다. 물론 자부심이 늘 좋은 방향으로 표현되지는 않는다. 예컨대, <미안해요, 리키>(2019)의 초반부, 일자리를 잃은 리키가 택배기사 면접을 보러 간 자리에서 면접관이 이렇게 묻는 장면이 있다. “실업급여 받은 적은?” 리키는 고민도 없이 답한다. “없어요, 자존심이 있지. 차라리 굶는 게 낫죠.” 아아, 이토록 당당하면서도 갑갑한 자부심이라니.

하지만 많은 경우 노동자들의 자부심은 그 자체로 노동자들의 세계를 한 단계 진보시키는 열쇠가 되기도 한다. 남성 동료들에게 일상적으로 성폭력에 시달리는 여성 광부가 광산을 대상으로 소송을 제기한 실화를 다룬 <노스 컨츄리>(2005)에는 주인공은 조시가 노동조합 집회에 조합원으로서 참석해 성차별에 대해 발언하려는 장면이 나온다. 이때 남성 조합원들은 야유하고 성희롱적인 발언을 쏟아내는데, 조시는 굴하지 않고 차분하게 노동조합 내규를 읽는다. “내규에는 남성이나 여성(her)이나 모두 발언권을 가질 수 있다고 되어 있어요.” 이제 남성 조합원들은 더이상 발언을 막지 못한다. 노동조합이 민주적으로 만들었으며 조합원이라면 그에 따르기로 약속한 내규이므로. 내규를 부정하는 일은 곧 계급을 부정하는 일이므로. 이렇게 조직은 개인을 앞서가기도 한다.

마거릿 대처 시절 광부파업에 나선 노동자의 아들인 빌리 엘리어트가 발레를 배워가는 이야기를 그린 〈빌리 엘리어트(2000)에서 계급적 자부심은 좀 더 양면적으로 그려진다. 노동자들에게 발레는 '저쪽 세계'의 문화이고, '여성적'인 취향으로 분류된다. 그런데 노동자의 아들이, 발레를 배우겠다고? 용납할 수 없는 일이지만, 빌리는 계속 발레를 배운다. 그리고 도시의 발레 학교로 진학할 수 있는 기회까지 얻는다. 하지만 돈이 없다. 파업 중이기에 버는 것도 없는 마당에 아이의 비싼 등록금을 내줄 돈이 있을 턱이 없다. 그때 광부들이 나선다. 어쨌거나 저 아이는 '우리의 마을'에서 자란 '우리의 아이'다, 우리의 아이가 좌절하는 꼴은 볼 수 없다는 듯이.이야기는 빌리가 발레 학교에 진학하면서 마무리된다. 영화판에서는 그려지지 않는데, 2005년에 초연된 뮤지컬에서는 광부들이 빌리를 떠나보내고 다시 광산으로 내려가는 장면이 나온다. 광산으로 내려가면서 노동자들은 당당하게 정면을 바라보며 이렇게 노래한다. "저 땅은 텅 비고 지옥처럼 춥지만, 갈 때는 우리 모두 함께 간다." 그게 바로 노동계급의 문화이고 자부심이다.

 

다시 만난 노동의 세계

'노동계급의 자부심'을 얘기하자고 체르노빌〈미안해요, 리키, 그리고 〈노스 컨츄리〈빌리 엘리어트까지 경유하는 건, 그것이 한국 사회에서는 워낙 낯선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자부심의 작동방식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노동자를 다룬 여러 콘텐츠를 경유하면서 감정의 편린들을 수집해야 한다. 한국사회에선 노동계급이 하나의 유의미한 정체성으로 자리 잡지 못했고, 노동자는 '불쌍한 사람'으로, 노동조합은 '조직이기주의'로 여겨진다. 노동계급의 자부심이라는 주제를 들여다보고 싶어지는 것은 그래서다. 그 자부심은 리키가 그랬던 것처럼 정당한 혜택조차 스스로 거부하게 만들고, 조시가 그랬던 것처럼 여성을 차별하게 만들고, 빌리가 그랬던 것처럼 소중한 꿈을 모욕하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또한 조시가 발언할 수 있게 만들고, 빌리가 꿈을 찾아 떠나갈 수 있도록 만들기도 한다. 개인들이 어떠한 동질성도 없이 파편적으로 흩어져 각자도생하는 사회보다는 이처럼 노동자들이 자부심으로 연결되어 있는 사회가 좀 더 건강한 사회 아닐까. 노동자들이 공유하는 것이 서로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뿐이라면 우리 사회에서 노동은 언제나 오해받고 소외된 개념으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렇듯 노동계급의 자부심이라는 문제를 경유하면, 오늘날 'MZ세대 노동담론'에 새로운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다시 말해, "주는 만큼만 일한다"라는 말로 요약되는 담론에 대한 질문이다. 일은 일일 뿐이고 자아실현은 퇴근 이후에 한다든지, 회사의 성장이 곧 나의 성장인 시대는 끝났다든지. 이런 주장들은 물론 대체로 옳은 말이지만, 이런 말들이 노동자라는 정체성을 해체하고 각각의 개인으로 원자화되는 현상을 가속하고 있는 것 같다는 근심을 지우기가 어렵다.

적어도 오늘날 한국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나의 관심사는 '노동의 대가를 정당하게 받아내는 방법'보다는 '더 좋은 사회를 향해가는 방법'에 기울어져 있다. 노동계급의 자부심이 표현되는 장면들에 시선을 주게 되는 이유다.

[일터5월_문화로읽는노동] 스폰지밥은 내 친구일까

[일터 5월호_문화로 읽는 노동]

스폰지밥은 내 친구일까

스폰지밥 (출처:위키피디아)

시간이 흐를수록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린 것또는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것이 생긴다. 과거에는 이상하다고 여겨진 것들이 지금 와서 다시 보면 지극히 정상적인 것으로 판명되기도 하고, 현재 옳다고 받아들여지는 가치들이 과거에는 잘못된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것의 대표적인 예는 아기공룡 둘리의 고길동이다. 만화 속 고길동은 보고픈 엄마를 찾아 헤매는 가엾은 둘리를 타박하고 괴롭히는 악역으로 묘사된다. 그렇다면 고길동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악역일까.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둘리의 만행을 정리한 밈(meme, SNS 등에서 유행해 다양한 모습으로 복제되는 패러디물을 이르는 말)들이 심심치 않게 발견되며, 둘리를 보고 자란 어른들에게 고길동은 둘리를 견뎌낸 성인군자로 재평가된다. 이렇듯 현재 자신이 서 있는 상황에 따라 맞았던 것이 틀린 것으로, 틀렸던 것이 맞는 것으로 변한다. 직장생활 N년차인 내 또래 친구들에게도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것이 고길동 말고도 있다. 바로 어렸을 적 즐겨봤던 만화 네모바지 스폰지밥이 그중 하나다.

집게리아 일등 종업원 스폰지밥

깊은 저 바닷속 비키니 시티에는 파인애플 모양을 한 집이 있다. 그곳에는 만화주제곡이 말해주듯이 네모난 얼굴동그란 눈을 가진 네모바지 스폰지밥이 살고 있다. 그는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긍정적인 태도를 잃지 않는다. 덕분에 문어인어할 것 없이 비키니 시티의 모두와 친근한 관계를 맺고 있다. 말 그대로 모두의 친구인 셈이다.

불평불만 없이 밝은 스폰지밥의 성격은 특히 직장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스폰지밥은 관내 최고 햄버거 맛집인 집게리아에서 주방장으로 근무하는데, 그에게 있어 집게리아는 직장 그 이상의 의미다. 근무시간 물론 퇴근 이후에도 집게리아가 번창할 방법을 고민한다. 썰매 대회에 참가하면서, 상금을 받으면 집게리아의 리모델링을 하겠다고 다짐할 정도다. 이러니 스폰지밥은 사장이 벌여놓은 일로 휴게시간이나 휴일 없이 근무해도 힘든 기색은커녕 그저 행복할 뿐이다.

스폰지밥의 유일한 직장동료인 징징이의 모습은 사뭇 대조적이다. 근면 성실하다 못해, 사장보다 더 회사를 아끼는 스폰지밥과 달리 징징이는 직장생활보다 직장 밖에서의 삶이 더 중요하다. 그에게는 계산과 주문 수수, 홀서빙 등의 업무를 할 때보다 그림을 그리거나 클라리넷을 연주하는 등 자신이 좋아하는 취미생활을 할 때 더욱 행복하다. 징징이는 열심히 일하는 스폰지밥을 괴롭히거나 그의 적극적인 업무 수행을 비난하기 일쑤다. 또한 징징이는 최대한 일을 편하게 하고자 요령을 부리기도 하고, 스폰지밥에 비하면 고객을 응대하는 태도도 딱딱하며 친절하지 않다.

두 인물의 대비는 만화 속 그들의 삶으로도 계속해서 이어진다. 집게리아의 일등 종업원인 스폰지밥은 악당으로부터 마을을 구하는 영웅이 되기도 하고, 여러 부분에 있어 많은 성취를 이뤄내기도 한다. 반면 근면한 노동자가 되지 못한 징징이는 스폰지밥보다 열등한 존재로 묘사되며, 무엇을 도전하든 매번 실패한다. 심지어 징징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취미활동은 주변인들에게 하찮은 것으로 치부되거나 민폐가 되는 행동으로 여겨져 비난받는다. 우리 모두 스폰지밥의 친구였던 그때 그 시절, 우리에게 스폰지밥의 성공과 징징이의 실패는 맞는 것이었다.

집게리아 그리고 스폰지밥

그때 맞는 것의 유효성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스폰지밥과 징징이가 함께 노동을 하며, 생활의 일부를 공유하는 공간인 집게리아와 그곳의 대표인 집게사장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집게사장은 무일푼에서 자수성가한 서민 갑부로, 도시에서 가장 유명한 햄버거 전문점을 운영한다. 그는 한때 넝마를 주워입어야 할 정도로 가난했지만, 게살버거를 개발해 순식간에 부자가 됐다. 집의 벽지를 돈으로 쓸 만큼 이미 어마한 부를 축적했지만, 여전히 집게사장은 돈 버는 일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특히 이윤 추구를 위해서라면 주저 없이 노동자 착취를 일삼는다. 손님이 메뉴에 없는 음식을 주문하더라도 직원들은 무조건 그 주문을 받아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 또한 100명이든 200명이든 몰아치는 손님을 감당하는 것도 스폰지밥과 징징이, 단 두 명의 직원이 알아서 해내야 할 일이다. 전달 대비 매출이 3천 원 하락한 것을 이유로 노동자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며, “일할 때는 숨도 쉬지 마. 숨 쉬라고 돈 주는 거 아니야라며 폭언을 일삼기도 한다. 이외에도 집게사장이 행한 만행이 너무나도 많아,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 지경이다.

이 같은 극악의 노동환경 속에서도 스폰지밥의 행복회로는 멈추지 않는다. ‘매장에서 수다 떤 것’ ‘근무 중 농담한 것’ ‘껌 씹은 것등 근무에 온전히 집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해당 행위에 대한 벌금을 청구해도, 임금이 3개월째 체불돼도 말이다. 그저 스폰지밥은 이 일은 내가 좋아하는 거니까요라는 이유로 자신의 권리를 기꺼이 포기한다. 노동 착취가 숨 쉬듯 일어나는 노동환경에서도 긍정을 잃지 않는 스폰지밥을 지금도 맞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을까. 여전히 스폰지밥이 맞는 것이라면 스폰지밥처럼 노동하지 않는, 할 수 없는 나는 틀린 것일까?

우리는 스폰지밥을 거부한다

자본은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는 직원을 계발하기 위해 힘쓴다. 경영학에서는 일하는 사람을 인적자원(Human resources)으로 일컬으며, 기업 목표 달성을 위해 활용되는 여느 자원 중 하나로 대상화한다. 나아가 사회는 일하는 사람 모두가 누군가의 인적자원이 될 수 있도록 학습시키고, 경쟁을 부추긴다. 인적자원이 된 우리의 노동은 작아지고 또 작아져 결국 근로만 남는다. 자본은 근로시키기 위한 방법을 찾는 데에 시간과 비용을 아끼지 않는다. 자본은 그들의 이상적인 인적자원 그 자체인 스폰지밥을 갈망하며, 스폰지밥이 되는 것에 대한 달콤한 보상을 제시하며 우리를 유혹한다.

피로사회의 저자 한병철은 자기 착취는 타인에 의해 착취되는 것보다 자유롭다는 느낌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사람들은 완전히 자신이 망가질 때까지 자기 자신을 자발적으로 착취하게 된다고 한다. 스폰지밥이 되기로 자처한 누군가는 자유롭다는 착각 또는 내가 좋아하는 일이라는 집착에 사로잡혀 누구보다 열심히 근로하게 된다. 이처럼 우리 중의 누군가는 노동자에서 근로자가 되고, 근로는 맞는 것’, 근로가 아닌 노동은 틀린 것이 된다. 근로가 노동을 대체한 자리에 그냥 노동은 성립하지도 존재하지도 않는다. 긍정의 조건이 붙지 않은 노동은 게으름, 무능함으로 받아들여질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스폰지밥이 되는 것을 거부해야 한다. 근로라는 조건부 노동만이 덕목인 세상에게 그냥 노동자로 바라봐 줄 것을 요구해야 한다. “일하는 게 힘들다”, “일 때문에 아프다라는 노동자의 목소리가 근로라는 조건 앞에 작아지지 않도록, 있는 그대로의 노동을 존중해야 한다. 각자의 노동이 그 몸과 마음까지 태워버릴 정도로 지나치지 않도록 이만큼 했으면 되었다”, “적당히 해도 괜찮다라고 서로를 보듬어 주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노동으로 인한 피해자가 되지 않도록, 나의 노동에게 안부를 묻고 귀를 기울여야 한다.

51, 새로운 한 해의 노동절이 돌아왔다. 그 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우리의 친구 스폰지밥에게 영원한 작별을 고한다. 그리고 새해가 되면 소원을 빌듯이 노동절의 소망을 빌어본다. 남은 한 해 동안에는 근로자가 아닌 노동자로 불리는 이가 더 많아지길, 열심히 노동하지 않아도 괜찮은 날들이 되길 기원해본다. 한 때는 스폰지밥이 되려고 애썼던 나의 몸과 마음에게도 일하느라 고생이 많다고, 힘들면 쉬엄쉬엄해도 괜찮다고 안부의 말을 건네 본다.

(임혜인 회원, 노무사)

[문화로 읽는 노동] 세상의 해고에 맞서는 불굴의 투쟁: -영화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가 보여주는 노동의 모든 문제들 / 2021. 04

[문화로 읽는 노동]

세상의 해고에 맞서는 불굴의 투쟁: 

-영화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가 보여주는 노동의 모든 문제들

김상민 문화사회연구소 소장

누군가 늦은 밤 지방 소도시로 장시간 자동차를 운전해간다. 새벽녘 임시 숙소에서 전형적인 사무직 노동자 복장 한 여성이 빨대 꽂은 팩소주를 마시면서 절망인지 분노인지 알 수 없는 어떤 감정에 가득 차있다. 주인공인 그녀는 무슨 이유인지 지방 하청업체에서의 1년간의 시한부 파견 근무를 명령받았다. 

이 장면에서 나는 언젠가 사무직 여성 노동자가 오지에 있는 현장으로 파견 발령이 났으나 개의치 않고 그 상황을 극복해 최고의 현장 노동자가 되었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는 것이 떠올랐다. 아니나 다를까 영화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의 이태겸 감독이 이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한 것도 바로 그 뉴스 때문이라고 한다.

“당신 자리 여기 없습니다”
동기들 중에서도 제일 잘나가고 사내 모든 일에 일등이던 박정은 대리는 무슨 일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권고사직을 종용받다가 타협으로 1년만 하청업체에서 일하고 돌아오라는 파견 명령을 받는다. 하지만 모든 걸 포기하듯 내려온 낙후된 지방 소도시의 송전탑 관리하청업체는 소장 포함 직원이 고작 네 명뿐이고, 그녀는 무엇을 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다. 원청에서 좌천되어 온 사무직 직원을 반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무직이던 정은은 작업관리대장을 만드는 등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보려고 하지만 돌아오는 동료들의 말과 시선은 차갑다. 

게다가 하청에서는 파견 노동자의 인건비까지 부담해야 하는 상황이 닥친다. 원청의 인원감축 방침은 원래 일하던 직원들의 일자리까지 위협한다. 파견 내려온 정은을 잘라내려는 목적이지만 근무평가 결과에 따라 누가 해고될지 모를 일이다. 급기야 원청은 평가관을 내려 보내 하청업체 평가를 실시한다. 

한편, 정은은 꿋꿋하게 자신도 현장 일을 하겠다고 결심하고 밤늦게까지 무거운 전기 작업 도구들과 혼자 씨름해가며 스스로 일을 배운다. 그러던 어느 날 함께 작업을 나가려고 하는 순간 자신이 입을만한 작업복도 없으며 심지어 현장 노동자들에게 특수 방전 작업복이 지급되기는커녕 그것을 자비로 구입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원청의 갑질과도 같은 평가과정, 노동자의 안전을 개인의 책임으로 전가하는 행태는 공공기관의 민영화와 다단계 하청구조나 노동자를 어떤 식으로 쥐어짜고 위험으로 내모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출처: 영화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여자가 일을 잘하고 못하고가 중요한 게 아냐, 아직도 모르겠어?”

정은이 자신의 일을 혹은 ‘자리’를 찾지 못하던 처음 며칠, 남성 동료들은 작업장 구석 칸막이 옆에 조그만 책상을 배치해둔다. 이미 원청에서도 자신의 자리를 뺏기고 사무실 바깥 복도 어딘가에 놓인 좁은 책상에 앉아서 일하던 그녀에게는 파견 명령을 받던 그 시간이 소환된다. 사무직 여성에게 현장직 남성들의 일이 주어질 리는 만무하고, 남성 동료는 자신들이 식사하고 난 자리를 치우는 것이 그녀의 일이라고 여긴다. 정은은 더욱 오기가 난다. 일을 주지 않는다고 지방노동위에 신고할 생각까지 한다. 

성별에 따라 해야 할 일의 종류를 구분하려던 남성 동료들의 잘못된 인식만큼이나 견고하게 여성을 노동 현장에서 차별하는 것은 바로 노동의 환경 자체다. 여성 노동자의 신체 사이즈에 적합하지 않게 만들어진 작업복, 작업 도구, 송전탑에 오르는 발판 사이의 폭조차도 남성 노동자의 신체에 맞추어져 있다. 모든 것이 여성 노동자를 작업의 환경으로부터 
배제하도록 만들어져 있다. 그래도 여성이 한 걸음도 그 안으로 들어설 수 없도록 만들어진 강고한 남성 중심의 노동 환경은 정은의 끈질긴 노력과 동료들의 수긍으로 조금씩 열리기 시작한다. 

“사는 게 그냥 알바에요”
동료 중 ‘막내’씨는 낮 시간에는 송전탑 관리 일을 하고 저녁에는 편의점에서 알바를 한다. 편의점이 끝나면 밤늦게 또 대리운전까지 한다. 아내 없이 딸 셋을 키우는 그는 적어도 쓰리잡 이상을 뛰고, 그러다보니 직장에 출근해서도 늘 피곤해 시간이 날 때마다 쪽잠을 잔다. 그런 것이 또 그의 근무평점을 낮추는 요인이 된다. 잠이 부족할 정도로 닥치는 대로 일을 하는데도 삶은 풍요해지지 않는다. 아니, 이미 불안정한 삶 자체는 끊임없이 알바와 부수입을 강제한다. 사는 게 알바와 다름없다.

그런 막내씨가 두려운 것은 일하다가 죽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무서운 거는 해고예요. 해고되면 알바만 해야 되니까.” 죽음보다도 직장 없이 불안한 삶이 지속되는 것이 더 공포스럽다는 것은 그것을 겪어 본 이들, 그것을 겪고 있는 이들, 혹은 그것을 곧 겪게 될 이들이기에 알 수 있는 것이다. 해고는 죽음이라는 것을, 죽음보다 더한 고통과 두려움이 
따르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해고든 사망이든 그게 뭐가 달라요.”

“송전탑 위에서는 동료밖에 없어요, 동료를 믿어야지”
퇴근 후 편의점에서 늘 정은과 마주치던 막내씨는 원청의 실태 점검 평가 기간에 정은이 겪는 어려움을 알고 알바로 그녀에게 일을 가르친다. 평가에서 자신이 낮은 점수를 받고 해고될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동료를 위해 시간을 내고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고소공포증을 약까지 먹어가며 극복해보려는 정은은 처음엔 송전탑을 올려다보는 것만으로 숨이 막
힌다. 처음엔 동료의 작업이 다 끝날 때까지 1미터도 올라가지 못했지만, 막내씨 덕분에 고소공포증도 극복하고 일도 배우면서 삶의 활기를 조금씩 찾아간다. 

파견을 내려온 지 90일째 되는 날, 전기 작업을 하기 좋지 않은 흐린 날씨지만 응급상황이라 작업팀은 송전탑 작업에 나선다. 하지만 송전탑에 오른 막내씨는 그만 사고를 당해 사망하고 만다. 장례식장으로 걸려온 원청 동료의 전화는 근무평가가 낮은 막내씨만 제치면 정은이 직장에 남아있을 수 있다고 전한다. 하지만 정은에게 그의 죽음은 경쟁자가 
아니라 동료의 죽음이다. 동료의 죽음이자 나의 죽음. “우리가 제발 살 수 있게만 해달라”고 원청 관리자들에게 외치는 정은에게 파견이든 하청이든 구분은 의미가 없다. 오직 동료밖에 없다.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정전 때문에 장례식장에서 부패해가는 동료의 시신, 섬마을이라 가볍게 무시되는 전기의 혜택을 정은은 이제 두고 볼 수 없다. 그녀가 이미 해고되었다는 원청 관리자의 말은 이제 중요하지 않다. 해고 통보, 만류하는 소장, 흐린 날씨, 바람에 흔들리는 송전선, 이 모든 악조건을 뚫고 혼자의 힘으로 송전탑에 올라 기어코 전선을 연결해낸다. 그들이 나를 해고하
더라도, 자신은 결코 스스로를 해고하지 않을 것이라는 저 굳은 결심. 

통쾌한 복수나 반전을 보여주는 결말은 없다. 현실은 그렇지 않으니까. 이 영화에는 정말 노동의 현장에서 발생 가능한 다양한 종류의 문제들이 종합선물세트처럼 들어있다. 민영화, 권고사직, 하도급 파견노동의 차별, 노동자와 
노동자 사이의 무한 경쟁, 관리감독이라는 명분으로 이루어지는 본사의 갑질, 여성 노동(자)에 대한 왜곡된 인식, 불안정 노동으로 인한 불안정한 삶. 

정말 당장 포기하고 싶을 만큼 노동을 둘러싼 모든 문제들이 나를 둘러싸고 옥죌 때에도 나는 나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정은에게서 강철처럼 단련되는 삶의 의지, 노동의 의지를 읽는다. 그리고 매일 아침 그들이 외치던 
“우리는 생명, 우리는 빛”이라는 현장 구호는 노동과 삶의 가치를 스스로 드높이고 긍지를 갖게 만드는 주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노동과 삶의 가치를 무너뜨리고 손쉬운 해고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들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
지는 동료들과의 뜨거운 연대처럼 송전탑을 통해 저 멀리까지 이어진다.

[문화로 읽는 노동] 이 치열한 무기력을 / 2021. 03

[문화로 읽는 노동]

이 치열한 무기력을 - 제니퍼 M. 실바의 책 <커밍 업 쇼트>

채은 선전위원

세대를 구분하는 단어들이 있다. 그 시절을 특징짓는 '공통적인 것'들을 추상화시켜 만들고는 입으로 전하고 온갖 얘기에 널리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X세대, IMF세대 뭐 이런 것들 아니던가. 참 명쾌하다. 단어 하나로 상당히 많은 것들을 이야기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 단어만 떠올려도, 그 시절의 정치, 사회, 문화, 경제를 한 순간에 군더더기 없이 느끼게 된다. 나도 이젠 옛날 사람이 되어서 내 시절을 구분 짓는 그 단어를 들을 때마다 '아~ 나 때는 말이지~'가 저절로 나오려고 한다. 아! 당연히 '라떼'를 시전하지는 않는다. 볼품없어 보여서 말이다.

'라떼'는 그래도 괜찮았던 걸까?

나는 IMF 사태 때 학창 시절을 보냈고, Y2K가 세상을 다 혼란스럽게 만들 것이라는 공포 속에서 '대학을 어디로 가느니, 마느니' 고민했었다. 97년 외환위기가 터졌을 때는 어느 날 같은 반 친구가 더이상 학교에 나오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꽤 있었다. 아버지의 사업이 부도가 나서 몰래 다른 곳으로 도망을 가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생기곤 했다.

우리집은 불행인지 다행인지 IMF 사태가 오기 전, 이미 어른들의 사업 실패로 가세가 기울었던 터라 마땅히 더 망해서 도망갈 곳도 없었다. 뭔가 실패에 있어서, 좀 더 앞선 일종의 선배가 된 것 같았다. "그래, 그래도 어쨌든 살아남기를..." 어제는 친구의 자리였지만 오늘은 주인을 잃은 그곳을 향해 마음속으로 말했을 뿐이었다. 그렇게 담담히 받아들였던 듯하다.

당시 함께 떠오로는 기억은 교대의 입시 점수 상향이었다. 그 당시 각광받는 직업은 '안정'을 담보하는 선생님이었다. 그래서 그 당시에 갑자기! 교대와 사범대의 인기가 하늘로 치솟았었다. 학생들 반 이상이 선생님이 되는 게 '꿈'이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돌이켜보면, 그래도 나름 치열하게 열심히 하면, '살 수는' 있었던 시절 같았다. 그러니까 그때는 어떻게든 대학을 가면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고 - 물론 내 앞 세대(90년대 초중반 학번인 이들)보다 취업은 녹록지 않았고 대학 생활의 낭만, 소위 운동이니, 사랑이니, 이런 것보다 조금은 더 취업 걱정을 하던 시대였지만 - 그래도 꿈은 가져 볼 수는 있었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대학을 나름의 낭만을 간직하고서 다녔던 것 같다. 학점 따윈 상관없고, 고시라는 것도 준비해보고, 하고 싶은 활동도 하고. 그렇게 좌충우돌하는 가운데, '취업'의 초조함이라는 것은 없었던 것 같다.

불확실한 시대, 부유하는 노동자들

다시 돌아와 현재를 바라보자니 답답함부터 몰려온다. 자신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온갖 노력에 비해 돌아오는 결과는 참담하다. 안정적 일자리라고 불리는 것들에는 더는 여유가 없다. 거기에 가기 위한 경쟁은 날이 갈수록 치열해진다. 우리 사회의 중심에 닿지 못한 사람들이 주변부를 채운다.

불안정한 주변부에 놓인 사람들에겐 온전한 자리를 찾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항상 들뜬 상태로 존재하는 화학원소의 전자들처럼 말이다. 둥둥 떠다니는 전자들이 다른 것과 결합하여 안정적 상태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은 오직 화학물질의 세계에서나 가능한 일일뿐. 우리가 사는 세계에선 끊임없이 주변으로 밀려나며, 언제나 부유하는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은 갈수록 점점 늘어만 간다.

<커밍업 쇼트 : 불확실한 시대 성인이 되지 못하는 청년들 이야기>라는 책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이 사회에서 살아갈 자리를 찾지 못해 부유하는 청년들의 모습을 연구 대상자들의 삶을 때론 멀리 때론 곁에서 조명하는 여러 인터뷰를 통해 치밀하고 꼼꼼하게 보여주고 있다.

부제처럼 불확실성이 날로 증대하는 시대에서 우리가 '어른'이라고 부르는 사회적 지위를 성취하지 못하는 실태를 담아낸다. 나아가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문제의 원인을 들춰내고 대안의 방향을 모색해보려 한다.

각자도생, 이 치열한 무기력을

작가는 이 책에 담긴 인터뷰 내용은 '평생 일터', 즉 생활 임금을 지급하고 차로 출퇴근 할 수 있으며 일상적 삶에 의미를 부여해주는 안정되고 예측 가능한 일자리를 찾고 유지하는 수많은 노력들로 가득 차 있다고 이야기한다. 노동계급 청년들은 증대하는 불확실성 앞에서 막중한 리스크를 감내하길 요구받는다.

하지만 노동계급 청년들은 무기력 상태에 직면한다. 질병, 가족 해체, 장애, 부상 등 예기치 못한 사회경제적 충격을 겪으며, 그때마다 휘청거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회의 안전망은 무너졌고, 연대의 끈은 사라졌다. 지금 여기서 살아남기 위한 해결책들은 각자의 몫으로 남겨질 뿐이다.

각자도생의 시대랄까. 물론 동시에 그 외 대부분의 경우엔 '정당한' 리스크만 감수하면, - 등록금을 마련하고 대출을 받거나 투자 목적으로 집을 사는 등의 - 안정된 삶을 누릴 수 있다고, 그렇게 계층 상승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가 치르고자 하는 '정당한 리스크'는 분명 존재한다. 비록 각자마다 다르게 정의되고 경험될지라도 말이다. 내 미래를 위해 당연히 투자되어야 하는 비용이라고 '여겨야 마땅한 어떤 것'을 공정하게 지출했을 때, 충분한 대가나 보상이 돌아올 것이라는 기대가 우리 모두에게 있다.

그런데 바로 그 공정함이 무너지는 순간, 균열이 생긴다. 더 놀라운 것은 그럴 때 각자도생의 사회를 떠받치는 공정함이 흔들리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역설적이게도 균열은 '너와 나의 편가르기'로 형상화된다.

"내가 너보다 더 많이 노력하고 더 많은 비용을 지출했는데. 너는 그렇게 안 하지 않았느냐.", "운이 좋아서냐. 아니면, 인맥, 혈연, 학력 덕분 아니냐. 여자라서 더 혜택받는 거 아니냐.", "시험을 보든 면접을 보든 경쟁을 치르고 거기서 승리해 자격을 획득하지도 않은 사람들에게 우리와 동등한 보상과 자격을 주는 게 말이 되냐." 등등. 자신이 들인 노력과 비용이 부정당했다며 화를 낸다.

물론 이런 반응이 이해가 안 될 일은 아니다. 여기서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지 말고 사회구조적 문제로 해결해야 하니 서로 싸우지 말자는 식의 윤리적 수사는 잠시 접어두자. 오히려 직시해야 할 것은 억울하다 못해 치밀어 오르는 이 분노가 어디로, 어떻게, 왜 향하는가 하는 문제다. 우리의 감정은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는 곳이 아니라, 바로 눈에 들어오고 손아귀로 움켜쥘 수 있는 사람을 향해 움직이는 경향이 있다.

곁에 있는 이들에게 손쉽게 온갖 공격과 비난을 가하게 되는 게 사람의 인지구조가 아닌가. 결국, 우리는 리스크 그 자체뿐만 아니라, 리스크를 감당할 때 겪는 박탈감과도 싸워야 하는 세대다. 성실하게 하루를 보내면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시대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며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친다.

진창에 내팽겨쳐진 '공정'

"노동계급 청년들은 고등 교육 기관 같은 조직이 사회 통합과 계층 상승에 이바지하리라 기대하지만, 상호작용 실패를 연달아 경험하고는 자신의 미래를 빚는 바로 그 제도들을 불신하고 경계하게 된다. 일자리를 구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고 가족 관계는 깨지기 쉬우며 사회 안전망이 축소되고 미래가 불확실한 시대에 성인이 되는 것은 선택지가 없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사회가 요구하는 정상적인 어른의 모습이 있다. 이쯤 되면 취업해야 하고, 다음에는 결혼해야 하고, 집을 마련하고 아이를 낳고 기르고, 노후를 챙기는 등등. 인생의 정답이랄까. 그게 정말 이 사회에서 어른이 되기 위한 조건이라면, 그걸 차근히 밟아갈 수 있게 도와주는 것도 사회의 공적 책임이 아니던가.

이토록 심각한 취업난을 야기한 것, 결혼·출산·육아를 꿈꿀 수 없게 하는 가장 큰 걸림돌이 바로 우리 사회의 불평등, 불확실성이 아니던가. 이곳에서 성인이 되는 순간은 끝이 언제인지 모른 채 끊임없이 지연될 뿐이다. 청년에 멈춰버린 사람들을 외면하고 있는 건 누구인가.

[문화로 읽는 노동] 영화 <이리나 팜>, 성노동과 사회적 낙인에 대한 우회적 질문 / 2021.02

[문화로 읽는 노동]

 

영화 이리나 팜, 성노동과 사회적 낙인에 대한 우회적 질문

 

윤성호/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

 

  난치병에 걸린 손자, 병원에서 희소식을 알려준다. 호주의 병원에서 치료해주겠다는 것. 그러나 영국에서 호주까지 항공권, 숙박, 입원비 등의 경비가 없다. 이미 손자의 병원비를 위해 집도 팔고 많은 부채에 아들과 며느리도 변변찮은 수입으로 벅차다. 집도 수입도 저축도 없어 거부당하고 기술경력도 자격도 없어 일자리를 구할 수도 없다. 그렇게 낙심하며 길을 걷다가 '호스티스 구함'이라는 손으로 쓴 전단지를 보고 매기는 구멍이 뚫린 벽에 들어온 남성의 성기를 자위시켜주는 윤락업소에서 자발적으로 성노동자가 된다.
  매춘 혹은 성노동은 늘 사회적 빈곤의 서사와 함께한다. 가용할 자원이라곤 육체밖에 없는 사람들이 이르게 되는 막다른 곳에서 수행된다. 아마도 수많은 노동 중 유일하게 이 노동만이 매우 강력한 도덕적 잣대로 평가받는 게 아닐까 싶다. 더럽고 추하고 부끄러운 노동, 능력 없고 게으른 자들의 노동 말이다. 다른 한편에선 성노동을 가부장적 자본주의 체제가 만든 여성 착취로 사회에서 사라져야 할 것으로 바라본다. 이 관점에서 성산업 종사자는 남성과 사회구조의 폭력과 착취의 피해자로 인식된다. 이러한 두 시선은 동전의 앞뒷면처럼 성산업에 대한 인식을 대표해왔다. 그러나 둘 다 성노동이 생존을 위한 '노동'이라는 관점을 놓치고 있으며, 이 노동에 대한 경멸적 낙인이 가져오는 문제는 제대로 다뤄지지 않고 있다.
  영화 <이리나 팜>은 가족과 주변 사람의 인식속에서 성노동자가 된 주인공 매기의 불안과 갈등을 다룬다. 윤락 업소가 등장한다고 해서 영화의 내용이 더럽거나 추하거나 부끄럽진 않다. 손자를 살리기 위한 소명이나 휴머니즘으로 성노동을 덧칠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주인공 매기의 자기인식의 변화를 지켜보면서, 영화는 우회적으로 성노동에 겨누어진 도덕적 잣대의 정당성에 대해 생각해보게끔 한다.

 

▲   영화 <이리나 팜>의 한국 포스터.

 

성노동에 대한 사회적 낙인이라는 문제

  본격적으로 영화에 대해 얘기하기에 앞서, '성노동'이란 단어에 대해 간략히 언급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성노동은 페미니즘 진영에서 가장 첨예하게 대립되는 쟁점이다. 하나는 매춘과 같은 성산업이 여성을 성적, 사회경제적으로 종속하고 있기에 완전히 사라져야 한다는 근절주의의 입장이다. 박혜정은 성노동 운동을 성착취 근절 운동이 확산되자, 위기를 느낀 남성지배체제가 종속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발동시킨 것, 즉 페미니즘 운동에 대한 반동이라고 주장한다.1) 다른 하나는 자발성을 중심에 두고서 매춘을 성노동으로 개념화하고 성노동권과 노동조합운동을 강조하는 입장이다. 박이은실은 성거래를 여성에 대한 남성의 억압으로만 보는 전통적 성별억압구조에서 벗어나, 성노동자의 노동자성을 인정받아 스스로 노동환경과 노동조건을 향상시키는 것을 강조한다.2)
  근절주의의 경우, 성산업이 가진 폭력성과 착취의 문제를 제기해 페미니즘의 문제를 확대해왔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성노동으로 개념화하는 입장이 섹슈얼리티의 위계를 고려하고 여러 성적 소수자 운동과의 연대를 지향하는 데 있어, 현재 성노동 운동의 방향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평가할 수 있다. 영화와 관련해서도 주인공 매기의 자기인식의 변화와 갈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매춘 혹은 성노동을 소재로 다룬 이른바 상 좀 받았다 하는 영화들을 보면 주인공을 모순적인 거대한 사회의 희생양으로 다루는 경향이 있다. <부르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가 트랄랄라를 내세워 1950년대 한국전쟁과 파업으로 인한 미국사회의 하층민의 삶을 그려냈다면 <노는 계집 창>은 영은을 통해 70년대 말에서 90년대에 이르는 왜곡된 한국의 성산업을 보여준 바 있다. 이와 같은 영화들은 남성중심의 불평등한 사회가 여성에 행사하는 부당한 폭력성을 드러낸다는 측면에서 근절주의의 입장에서의 접근이 용이하다.
  그러나 <이리나 팜>은 많은 성노동 관련 영화에서 자주 차용하는 가난과 빈곤의 배경이 등장하긴 하지만, 암울한 사회상을 영화의 중심에 배치하진 않는다. 돈이 필요해 애나가 성산업에 종사하기로 결단한 이후 주변 사람과 가족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들을 통해, 성산업의 폭력성이 아닌 성노동에 대한 도덕적 잣대, 사회적 낙인의 문제를 엿볼 수 있다. 장소와 직업의 특수성으로 인해 몇몇 노출 장면이 등장하지만, 인신매매나 강간 등의 폭력성을 배제하고서, 영화는 인물들 간의 관계에 주목한다.

불안과 공포, 경멸과 조롱을 불러내는 낙인찍기

  성산업 종사자들은 자신들에 대한 사회와 타인들의 부정적인 사회적 낙인을 피할 수 없다. 이는 영화에서 발생하는 갈등의 한 축을 이룬다. 일하게 되면서 애나는 주변의 지인들과의 모임에 소홀해지게 되고, 우연히 지하철 승강장에서 만나 어디 가느냐고 묻는 지인을 무시하고 서둘러 지하철에 오른다. 손자의 치료비 마련을 위해 자발적으로 선택한 직업이지만, 성노동에 종사하는 것을 가족과 주변 사람이 알게 될까봐 매기는 늘 불안해한다.
  근절주의는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점에서 몸을 파는 사람은 피해자로 보호해야 하지만, 사는 사람과 알선하는 사람은 범죄자로 취급해야 한다는 입장이다.3) 즉 낙인은 성노동이 아니라 구매하고 알선하는 범죄자에게 내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접근은 왜 성노동에 대한 강력한 낙인찍기가 일어나는지 설명하지 못하며, 낙인으로부터 비롯되는 불안과 공포에 대해서도 침묵하고 있다.
  박이은실은 이러한 낙인찍기를 섹슈얼리티의 위계로 설명한다. 성노동자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낙인은 이성애 남성중심적 질서에 의해 위계화된 구조 안에서 발생하며, 성노동자 여성은 이성애 이외의 다양한 성정체성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위계의 하부에 위치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 위계의 상부는 남성과 '처'로서의 여성이 위치하는데, '처'의 위치가 보장되고 사회적 자원을 분배받을 수 있는 이유는 처의 '성'을 남편만이 독점함으로써 생식과 관련되어 높은 위계 속에서 보호받고 통제받음으로써 가부장제를 유지4)할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용인된 이성애와 결혼제도 안의 성만을 가부장적 자본주의 체제가 공식적으로 용인하면서 성적 소수자나 성노동자는 금지 또는 범죄의 영역으로 내몰린다. 바로 여기서 낙인이 작동하는 것이다. 애나가 죽어가는 손자를 살리기 위한 노동을 꽁꽁 숨겨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다.
  영화에서 어머니의 직업을 알게 된 아들은 매기에게 창녀라 비난하며 모든 돈을 돌려주고 하던 짓을 씻을 수 있게 하겠다고 소리친다. 집에서 나온 매기는 친목 모임을 함께하는 지인들과 만나게 되고 지인의 집에 차를 마시며 자신의 직업을 말하게 된다. 그리고 집을 나가는 매기를 따라온 한 여성이 조롱하며 묻는다. "당신의 남편이 살아있었다면 이야기하지 않았겠지?" 이후 상점에서 마주친 매기에게 "너의 새 직업을 고려할 때, 나는 더 적절한 친구를 원해"라며 여러 사람 앞에서 망신을 주려 한다. 이러한 장면은 정상가족으로 표상되는 이성애 중심의 가부장사회가 축조한 비정상성, 부도덕성이라는 성노동에 대한 사회적 낙인을 드러낸다.

 

▲   영화 <이리나 팜>의 한 장면.

 

사회적 낙인을 해체하는 것은 가능할까?

  창녀, 성매매 종사자라는 아들의 비난에 매기는 자신은 창녀가 아니라고 말한다. 자신이 한 일에 대해 후회하지 않으며 다시는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당부한다. 사회적 낙인은 성산업 내의 다양한 모습들이 존재함에도, 성산업 노동자들을 모두 창녀로 호명한다. 이러한 호명에서 매기 역시 완전히 벗어났다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매기가 집에서 가져간 그림과 작은 꽃으로 자신이 일하는 공간을 장식하는 장면은 자기 일에 대한 긍정적 인식으로의 전환을 보여준다. 이 인식의 전환은 친구의 조롱과 멸시에 당당히 맞서는 힘으로 드러난다.
  그렇다면, 창녀, 매춘부, 갈보에서 성노동자라는 인식 전환, 이른바 새로운 호명은 사회적 낙인을 무화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가부장적 위계 속에서 배제되고 주변화되었던 자신들을 '노동자성'을 통해 새롭게 호명하고, 그럼으로써 범죄와 부도덕이라는 낙인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나아가 성산업에 내재한 착취구조를 스스로의 힘으로 무너뜨리는 미래에 대한 상상도 실현가능한 것이 되지 않을까?


[각주]
1) 박혜정(2020), <성노동, 성매매가 아니라 성착취>, 열다, p.111
2) 박이은실(2007), <섹슈얼리티의 위계와 낙인의 문제> <성노동>, 여이연, p. 88
3) 박혜정(2020), 위의 글, p. 142
4) 박이은실(2007), 위의 글, p. 69 

 

[문화로 읽는 노동] 예술하라, 노동이 아닌 것처럼- 웹툰 <정년이>가 보여주는 예술노동의 명암

[문화로 읽는 노동]

예술하라, 노동이 아닌 것처럼- 웹툰 <정년이>가 보여주는 예술노동의 명암

박범기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도 벌 수 있다면, 그것만큼 좋은 게 또 있을까? 하지만 그렇게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을 버는 이들이 얼마나 있을까? 노동이란, 자신을 상품으로 환원하면서 자신을 파는 일에 다름 아니다. 예술은 자신을 표현함으로써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지만, 이러한 예술 행위 역시 스스로의 생계를 위해서 돈을 번다는 점에서 노동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다. 동시에 예술은 자기표현이라는 점에서 노동으로서 쉽게 인정되지 않는다.

웹툰 <정년이>는 주인공 정년이가 국극배우가 되기 위해서 노력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국극은 1950년대 크게 인기를 끌었던 대중문화 장르이다. 모든 배우가 여성으로 구성되어 있는 국극은, 국악을 바탕으로 한 국악 뮤지컬로서 당대에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웹툰 <정년이>는 가상의 국극단인 매란국극단을 배경으로, 매란국극단에 소속되어 있는 배우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이 웹툰이 다루고 있는 이야기는 많지만, 이 글에서 초점을 맞추고 싶은 것은 웹툰 <정년이>가 그리고 있는 국극단의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예술노동의 형태에 대한 것이다.

임금으로 환산되지 않는 예술노동

정년이에게 있어 노래를 부르는 것은 무엇보다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다. 국극단에 들어가기 전, 정년이는 시장에서 장사를 하면서 물건을 팔기 위해 노래를 불렀다. 정년이에게 있어 노래를 부르는 행위는 자기표현의 수단이기에 앞서,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정년이가 서울의 국극단으로 가게 된 이유 역시, 국극단에 들어가면 "돈을 가마니로 번당께"(3)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주연배우가 되고, 인기를 모으면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점에서 정년이는 국극단에 매력을 느낀다.

돈을 벌기 위해 국극단에 들어왔다는 점에서, 국극단 단원들은 정년이를 못마땅하게 여긴다. 그들에게 있어 국극은 예술 장르이고, 정년이는 그런 국극을 단순히 돈을 많이 벌기 위한 수단으로 여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단장은 정년이에게 "예술이 무언지 소리가 무언지 고민해본 적도 없는 놈이 돈을 벌겠다고 감히 매란국극단에 달려들어?"(3)라고 면박을 주기도 한다. 모두가 자신에게 부정적이고, 배역을 받기 어려운 상황인데도 정년이는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국극단에 남는다. 정년이는 국극단 단원들과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서 노력하면서 조금씩 자신의 자리를 찾아간다.

처음 국극단에 입단하는 정년의 마음을 보여주는 장면. 출처: 웹툰 <정년이>  

하지만 국극배우 지망생인 정년이가 당장에 부자가 될 수는 없었다. 돈을 벌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도리어 돈을 써야 하는 상황에 닥치기도 한다. 연습복은 물론이고, 공연에서 쓰는 분장용 화장품, 붓 등도 개인의 돈으로 구입해야 했기 때문이다. 연구생들에게 '야참비'가 지급되긴 하지만, 그 돈으로는 화장붓 하나도 사지 못했다.

정년이는 필요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다시 노래를 불렀다. 다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다방 아르바이트는 오래 가지 못했다. 다방에서 아르바이트 한다는 사실이 단장에게 발각되었기 때문이다. 단장은 "극단의 예인"이 다방에서 노래를 한다는 것에 반발한다. 단장은 예인이 되기 위해 국극단에 온 지망생들이 현재의 위치를 지켜야 한다고 강요하지만, 실상은 이들 대부분은 자신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서 다른 노동을 병행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예술노동은 일정한 수준 이상의 성취가 담보되기 이전에는 노동에 대한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다. 지망생들은 자신의 꿈을 위해 보상이 없음을 감내해야만 한다. 단원들에게 야참비 외에 다른 보상이 더 필요하다는 말에 단장은 "극단이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가르치는데 무엇이 아쉬워! 출연료라도 줘라, 그 말이냐?"(34)라고 되묻는다. 주연 배우가 되어 무대에서 빛나고 싶다는 꿈을 위해, 대부분의 지망생들은 현재의 보상 없음을 감내하면서, 자신의 생계유지를 위해 다른 노동을 병행할 수밖에 없다.

예술노동은 재능 있는 이들에게만 허락된 것인가?

창작극 <자명고> 에피소드는 이 웹툰의 주된 축 중에 하나이다. 이 극을 쓴 극작가는 극의 배우들을 오디션을 통해서 뽑았다. 오디션은 누구에게나 기회가 균등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기회는 균등하지 않다. 다만, 균등하게 보일 뿐이다. 매란국극단의 오디션 역시 마찬가지이다. 오디션을 통해 실제로 뽑힌 배역들은 기존의 매란 국극단 주연의 라인업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이 점에서 정년이의 짝선배이자, 정년이에게 조언을 해주며 정년이의 성장을 돕는 인물인 백도앵의 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도앵은 국극단의 주연이 고정되는 문제에 대해서 "재능은 본래 불평등한 법이야. 주연은 재능 있는 사람의 것이고."(31)라고 말하면서, 주연이 고정되는 문제가 정당하다고 말한다.

촛불이 빛나기 위해서는 촛대가 필요하다. 출처: 웹툰 <정년이>  

사실 이 웹툰의 주인공인 정년이 역시 애초에 탁월한 재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국극단의 일원으로서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것이다. 정년이의 어머니는 '하늘이 울린 소리꾼'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는 채공선이고, 정년이는 어머니의 재능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이 재능 때문에 정년이는 국극단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정년이는 애초부터 재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국극단 안에서도 나름 입지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매란국극단 안에는 애초부터 재능이 있는 이보다, 재능이 없지만, 자신의 꿈을 위해 국극단에 들어온 이들이 더 많다.

재능 있는 개인을 떠받치고 있는 수많은 촛대들

국극단의 세계는 수많은 지망생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은 '촛대'라고 불린다. 재능 있는 개인이 자신의 재능을 드러낼 수 있는 것 역시, 재능 있는 이들을 떠받쳐주는 이들의 기반 아래에서만 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이 웹툰에서는 무엇보다 엑스트라 혹은 조연들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촛대들의 떠받침 아래에서 주연들의 재능이 부각될 수 있기 때문이다.

출처: 웹툰 <정년이>

촛불이 빛나기 위해서는 촛대가 필요하다. 이는 웹툰 <정년이>가 그리고 있는 국극단의 세계 뿐 아니라, 오늘날의 세계에도 해당되는 말이다. 빛나는 소수의 아래에는 빛나지 않는 수많은 촛대들이 있다. 촛대는 쉽게 눈에 띄지 않지만, 자신의 자리를 묵묵히 지킨다. 수많은 예술 노동자들, 예술노동 지망생들의 노동은, 몇 몇 빛나는 스타들의 뒤에 자리 잡고 있다. 이들의 노동은 대부분 노동으로서 셈해지지도 못하고, 보이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이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자신의 자리를 지킨다. 빛나지 않는 오늘날의 촛대들의 예술노동을 응원하는 바이다.

[문화로 읽는 노동] 로봇이 간병을 한다면?! - 시네마틱드라마 <간호중>이 던지는 돌봄 노동의 미래 이미지 / 2020. 09

[문화로 읽는 노동]

로봇이 간병을 한다면?! - 시네마틱드라마 <간호중>이 던지는 돌봄 노동의 미래 이미지

김성윤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

출처: MBC 시네마틱드라마 SF8 - 간호중 스틸컷

근미래의 대한민국. 오늘날 누구나 예상하고 있는 것처럼 그곳에서는 로봇이 인간의 노동을 대신하고 있다. 그것도 돌봄 노동을 말이다. 로봇이 만족할 만한 수준의 돌봄 노동을 할 수 있는가에 관한 문제는 여전히 논쟁적이긴 하지만, 1999년작 <바이센테니얼 맨>으로부터 시작해서 원제 <Her>로 더 잘 알려진 최근의 <그녀>(2013)에 이르기까지 로봇이 인간의 신체를 어르고 감정을 매만질 수 있다는 상상력은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영상 콘텐츠 플랫폼 웨이브에서 스트리밍하고 MBC를 통해 방영되기도 한 <에스에프 에잇>(SF8, 2020)의 첫 번째 이야기, <간호중>도 바로 이런 맥락을 담고 있다. 이 시네마틱 드라마의 기저에 깔린 질문은 매우 극단적이고 그런 점에서 또한 급진적이다. 식물인간 환자의 보호자가 생활고에 지쳐 극단적 선택을 하려 할 때 돌봄 로봇은 선택의 기로 위에 놓인다. 환자를 살릴 것인가, 보호자를 살릴 것인가. 이 질문을 짧게 번역하자면 이런 것이다. 생명의 존엄을 지킬 것인가, 차안의 고통으로부터 해방할 것인가.

돌봄노동의 디스토피아

돌봄이라는 사회적 행위는 우리 인간을 끝없이 시험 들게 한다. 사실 돌봄이 노동이 됐다는 것은 극적인 측면이 없지 않다. 가사 및 육아와 더불어 친밀성의 행위가 임금노동이 된다는 것은 보기에 따라 거부감이 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자본주의적 관계 바깥에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행위가 자본주의의 대표적 상품인 노동으로 변환된다는 것은 서글픈 일처럼 보이기도 한다(또 하나의 상투어가 되고 있는 예술 노동이란 말에서도 마찬가지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돌봄과 노동의 연결을 마냥 거부하기도 어렵다. 돌봄의 수행은 오랫동안 불평등의 지표로 자리를 잡아왔었다. 특히나 누군가는 공적 세계에서 노동의 사회적 가치를 인정받으며 자아실현과 임금노동의 아슬아슬한 평형감각을 발휘할 기회를 얻고 있는 동안, 다른 누군가는 현모와 양처라는 상징적 보상 외에는 아무런 대가 없이 돌봄의 독박을 쓰면서 자기 자신을 희생해야 했다. 더군다나 오늘날처럼 성차에 관계없이 누구나가 평등한 개인이라는 이상이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통용되는 세상에서, 현대인의 적정한 사회적 삶의 유지를 위해 돌봄이라는 행위는 개인 또는 가족의 구매력 수준에 따라 얼마든지 외주화가 가능한 세상이 되기도 했다.

<간호중>은 돌봄 노동에 대한 미래 이미지를 구현하는 것임과 동시에 현재적 상황에 대한 철저한 은유이기까지 하다. 도시 곳곳에 요양 병원이 줄 서 있는 풍경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적 상태에 대한 초점화인 셈이다. 우리는 이렇게 미래를 보는 구슬로부터 현재와 맞닥뜨린다. 섬뜩한 감정까지 자아내는 이 장면은 현실의 현재와 영화의 미래를 이어주는 가장 중요한 영상적 장치이기도 하다. 이미 우리는 노부모에 대한 가족 간병이 사실상 불가능한 세계에 살고 있지 않은가. 효심이라는 오랜 가치를 통해 어떻게든 버티며 스스로를 돌봄의 주체로 갈아넣을 수도 있지만, 이런 선택은 부득불 불만족스러울 수밖에 없다. 누군가는 요양 보호에 대한 자신의 전문성 부족에 가슴 아플 것이고, 누군가는 다른 삶에 대한 기회를 버리고 있는 것에 아파할 것이며, 또 누군가는 환자와의 소통불가능성 때문에 지쳐 감정 조절조차 불가능한 상황에 빠질 수도 있다. 우리가 맞이할 디스토피아는 이와 같은 불행들이 켜켜이 쌓인 풍경과 다를 바 없다.

위주화되는 돌봄노동

간병을 비롯한 돌봄 노동이 외주화되는 것은 현대인들이 자신의 정상적 삶을 유지하기 위한 거의 유일한 출구일 수밖에 없다. 가족을 돌보는 것과 나의 삶을 유지하는 것 그리고 어쩌면은 상해의 충동에 빠지지 않는 것. 이런저런 조건들을 충족하기 위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합리적인 선택은 지극히 제한적이기 마련이다. 돌봄의 외주화. 그런데 이렇게 하면 환자가 느낄 불안감과 고립감은 또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물론 기술이 발전한다면 내가 아닌 남이 가족을 돌보더라도 가족적 친밀성의 유지 강화는 보충될 수 있을지 모른다. <간호중>은 간병 로봇이 보호자 얼굴의 외피를 씀으로써 보호자로부터 버림받을 수 있다는 환자의 공포, 나아가서는 환자 가족에 대한 보호자의 도덕적 죄책감이 유예될 수도 있다는 흥미로운 상상력을 제시한다.

하지만 이런 문제해결 방식을 극단으로 밀어붙인다 한들 끝내 회피할 수 없는 문제가 다가오게 된다. 간병노동자를 통해서든 또는 가장 완벽한 로봇을 통해서든 돌봄의 외주화가 근본적인 해법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간호중>은 어쩌면 가장 우울한 시나리오를 제시하는 셈인데, 근미래의 대한민국에서 어떤 보호자들은 뛰어나고 사려깊은 고급형로봇을 구매할 수 있지만 다른 보호자들은 어쩔 수 없이 기본 기능만 갖춘 보급형로봇밖에는 구매할 수가 없다. 별다른 이유는 없다. 보호자의 금전 능력이 그 차이를 가져올 뿐이다. 우리는 환자 가족이 느낄, 또는 보호자 당사자가 느낄 서비스 편차와 상대적 박탈감을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증발된 돌봄 노동의 온기

다른 하나의 문제는, 이것은 좀 더 근본적이기까지 한데, 아무리 그럴 듯하게 돌봄을 외주화하더라도 보호자 자신은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효심은 물론이거니와 가족적 우애를 성취할 수 없다는 데 있다. 환자와 가장 밀접한 이는 어차피 간병 로봇이 아니겠는가. 혈연 가족에 관한 신화가 유지되는 한 돌봄을 독박 쓰거나 외주화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상적 가족 상황이라는 것은 궁극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게다가 그런 상황에서 주인공 연정인처럼 생활고까지 겹쳐 더 이상 고급형 로봇을 사용할 수 없고 봉양의 의무를 충실히 수행할 수 없게 된다면? 답은 뻔하다. 우리 인간은 더 이상 온전한 의미에서 사회적 존재로서의 삶을 유지할 수가 없다.

여기서 극단적 선택을 고민하는 연정인을 보면서 간병 로봇 간호중은 또 다른 고민에 빠지게 된다. 사실 합리적 선택이라는 기준에서 본다면, 즉 환자와 보호자 사이에서 최대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면 사실 살려야 하는 존재는 환자가 아니라 보호자가 아닐까라고 말이다. 이 지점에 이르게 되면 <간호중>은 단순한 SF를 넘어 한편의 사이코 드라마로 읽히기까지 한다. 실제로 감독 민규영이 로봇 간호중과 보호자 연정인을 배우 이유영의 12역으로 연출한 것도 바로 이런 측면을 내포한다. 극단적 선택과 합리적 선택이라는 두 가지 내적 고민이 일종의 거울 이미지처럼 외화되어 나타나는 장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수녀 사비나가 생명 존엄성에 위협이 되는 간호중을 처단하고자 할 때면 마치 초자아가 작동해서 패륜에 가까워가는 우리의 행위를 차단하고 심판하려는 것 같기도 하다. 물론 그것이 패륜일지 아니면 합리적 선택일지는 불분명하다. 수녀에게 결박되어 포효하는 간호중의 외침은 어떤 식의 판단도 최선일 수 없다는 현재의 상황을 떠올리게끔 하기 때문이다. 간호중은 내지른다. “위선자, 알량한 자기 양심의 무게를 덜기 위해서 도움을 거부해?”

돌봄노동의 미래가 제기하는 질문

여느 로봇물처럼 이 작품 역시 인간성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과 관계되어 있다. 흔한 말처럼 우리는 인간은 가축화되고 동물이나 사물은 인간처럼 취급되는 세상, 나아가 인간이야말로 비인간적이고 로봇이 오히려 인간적일 수 있는 세상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 같다. 인간다운 삶이란 대체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한 답을 구한다는 것은 늘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간호중>이 이와 같은 내면적 갈등에 대한 형상적 외화이자, 우리가 현재 직면하는 곤란들에 대한 일종의 은유적 시도라는 점이다.

이렇게 불행이 다가오는 순간들에 맞서, 우리들 중 대다수는 알량한자기기만으로 내면의 목소리 중 몇몇을 억압하면서 위태위태하게 현재와 미래를 버텨나갈지도 모른다. ‘나는 효부, 효자, 효녀니까 버틸 수 있어!’라든가, ‘나의 행복이 부모의 행복이니까 날 이해해주실 수 있을 거야!’라든가, 그것도 아니면 긴 병에 효자 없으니 어쩔 수 없는 거야라든가. 물론 콘텐츠 바깥의 실제 세계에서는 전혀 다른 선택지가 있을 수도 있긴 하다(가령 사회적으로 여전히 논의가 부족한 돌봄의 사회화 같은 것들). 그렇지만 작품은 돌봄 노동의 독박과 외주화라는 양자택일적 선택지를 통해 이야기의 산만함을 줄이고 인간적 삶의 아이러니를 조명하는 데 집중했다.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할지 모른다. 어떤 선택의 정당성도 부정하는 <간호중>은 진정으로 취해야 할 선택은 선택지 바깥에 있다는 점을 역설하는 작품으로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문화로 읽는 노동] 흰둥이가 또 다른 흰둥이에게 건네는 위안-만화 『흰둥이 1』. 윤필. 창비. 2016. / 2020. 08

[문화로 읽는 노동]  

흰둥이가 또 다른 흰둥이에게 건네는 위안-만화 『흰둥이 1』. 윤필. 창비. 2016.

박채은 선전위원

너나 할 것 없이 우울한 시절이다.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신종 바이러스의 출현이 가져다준 우울이랄까. 세상은 마치 망가진 세탁기처럼 기이익 힘겨운 소리를 내며, 겨우 돌아가는 것 같다. 반복되는 낮은 소음이 그다지 불청객만은 아닌 듯 온통 차분해지고 가라앉아버린 모종의 분위기 속에 그동안 켜켜이 쌓여 있던 거짓의 환호와 행복들이 하나둘씩 벗겨져 가고, 애써 감춰왔던 그러나 마주해야만 했던 진실들이 드러났다. 어쩜 이렇게나! 불평등하기 짝이 없을까.

흰둥이의 시선이 머무는 자리

코로나19 이후 더욱 극명히 드러난 우리 사회의 민낯을 마주했다. 매체의 지면 곳곳을 온통 불평등과 관련한 단어들이 장식하고 있다. 노동의 취약지대가 드러났고, 권리의 사각지대를 조성하는 약한 고리가 어디인지 나타났다고. 어떤 현상이 특정한 단어로 정의되고 나면, 그 현장과 관련한 새로운 집단이 우리 시야에 들어오기 마련이다. 그러면 우린 과연 자신이 해당 범주에 드는지 아닌지를 주의 깊게 살펴보게 된다. 이를 쓸데없는 고민으로 치부하기엔, 인간은 언제나 어디서든 자신이 누구인지를 정의하고 싶어 하며, 사회적으로 인정받기를 찾아 헤매는 존재가 아니던가. 그래서 생각해본다. '과연 나는 사회적 약자에 속하는가?', '사회적 약자의 범주에 들지 않아서, 조금은 안도가 되는가?'

윤필 작가의 만화 <흰둥이>의 주인공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취약한 노동자의 모습을 대변한다. 소위 사회적 약자의 범주에 포함되는 존재이다. 흰둥이의 눈을 따라가면서 더욱 그 존재의 모습은 구체화한다. 흰둥이는 주인에게 버림받은 강아지다. 성대 수술이 되어 있어서 말(?)을 할 수 없다. 기쁨이나 슬픔, 아픔마저도 쉽게 표현할 수 없는 모습이 애잔하다. 흰둥이는 묵묵히 일하며 하루하루 버틴다. 

그러던 어느 날, 폐지를 줍는 할머니와 할머니의 어린 손녀를 만나게 되어 가족이 된다. 할머니는 생계를 위해 매일 고물과 폐지를 줍다가 다치게 되고, 흰둥이는 좀 더 돈을 벌기 위해 직업소개소에 가게 된다. 거기서 일용직 일자리를 얻어 성실히 일하던 도중, 동료 아저씨가 공사 중인 건물에서 떨어져 죽는 모습을 보게 되고, 동료를 잃는 상실감을 알게 된다. 이후, 흰둥이는 다행히도 좀 더 나은 일자리를 얻게 되었고, 사립대학교에서 청소노동자로 일하게 된다.

이렇게 윤필 작가는 흰둥이가 거쳐 가는 일터와 그곳에서 일하고 생활하는 이들의 면면을 그려낸다. 폐지를 주어야만 겨우 하루를 유지할 수 있는 사람들. 특히, 사회에서 더 노동을 팔 수 있는 매력을 갖추지 못한 존재로 판정되어 '정상 노동'에서 배제된 고령 노동자. 추운 겨울 새벽같이 나가 일하다 위험한 노동환경에서 산재를 당해 죽음을 맞이한 건설노동자. 일하다 다치거나 아파도 다음날 일자리를 구할 수 없을까 봐 병원에도 가지 않고 하루를 버텨내야 하는 일용직 노동자. 학교 건물 곳곳에 아무 생각 없이 버려놓은 쓰레기들을 묵묵히 치우고 혹여나 학생들 눈에 띄면 불편할까 봐 건물 후미진 구석에서 휴식을 취하고 끼니를 해결하는 청소노동자. 흰둥이의 눈을 쫓아감으로써 보이는, 우리 사회에 감춰진 노동의 모습들이다.

점점 드러나는 노동권 사각지대

점점 불평등이 심화되던 와중에 마침내 코로나19를 계기로, 우리에게도 애써 숨겨져 있던 이런 노동의 모습이 극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외부 활동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나니, 집에서 대부분을 해결하기 시작한다. 우선, 택배, 배달 관련만 해도 그렇다. 물량은 살인적으로 늘어났다. 급격히 증가한 물량에 택배 노동자은 더욱 쉴 수 있는 시간이 없어졌다. 잠도 못 자고 배달을 하다 돌아가신 택배 노동자의 이야기는 듣는 사람을 숨 막히게 한다.

엄청난 폭우가 쏟아지던 날, 새벽에 음식을 배달해야만 했던 배달 노동자의 사진을 기억하는가. 몸이 반 이상 잠겨버린 물속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일을 해야만 했다. 운이 좋은 사람은 재택근무를 통해 외부와 접촉을 줄이고 일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무실이 있는 건물의 청결을 늘 유지해야 하는 청소노동자들은 매일 출근해야만 했다. 돌봄노동을 해야 하는 사람들은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는 사람들처럼 살 수 없었고, 콜센터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은 바이러스에 취약한 환경에서도 위험을 감수하며 일을 했다.

이런 사회적 현상들을 보며 너나 할 것 없이 노동의 약한 고리가 드러났고, 그래서 우리가 고쳐나가야 할 것이 무엇이고 바꿔나가야 한다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그 목소리 안에서 언뜻 내가 그 주인공은 아닐 거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건 왜일까. 이 모든 모습이 나의 모습이 아니던가. 흰둥이를 보면서 가슴 한구석이 아릿하게 저렸던 것은 사실 나의 노동에 대한 연민과 아픔 때문이 아니었는지.


손을 번쩍 들고, 환대의 몸짓으로

만화의 마지막 장면에 이르고서, 우리 모두 흰둥이처럼 살 수 있다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게 되었다. 만화 속 흰둥이는 '흰둥이 같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위로받고 위로한다. 취업의 문턱에서 계속 실패를 거듭하다 자살을 하려는 학생의 마음을 돌려놓는다. 묵묵히 곁에서 그저 함께 있어줌으로써 말이다. 흰둥이가 불어주는 하모니카 소리에 지친 마음을 달래고 살아갈 힘을 얻기도 한다. 반대로 대학에서 청소하고 있는 흰둥이에게 어느 교수가 늘 지나가며 인사를 건넨다. "안녕하세요. 고마워요. 고생이 많아요." 짧은 한마디지만, 흰둥이에게 긴 여운을 남기기도 한다. 갈 곳 없는 어미 길고양이는 흰둥이가 나눠주는 콩 반쪽으로 하루를 버틸 수 있었고, 그 보답으로 건넨 어미 고양이의 꾹꾹이로 흰둥이는 하루의 피로를 녹인다.

우리 모두 흰둥이가 아닌가. 누구는 약자이고 누구는 강자인지를 끊임없이 재고 삶의 승자와 패자를 가르며, 차별할 필요가 있는가? 불평등의 범주로 사회를 나누는 것이 과연 온당한가? 그저 이 사회를 살아가는, 고약한 이 시기를 견뎌내는 다 같은 노동자/사람이 아니던가. 예민함을 넘어 울분이 가득 찬 오늘날. 너나 할 것 없이 경쟁에 목을 매며 공정이라는 거짓 이름으로 경쟁의 우위를 탐하는 지금. 서로가 서로를 몰아내고 밀어내는 이때. 흰둥이가 건네는 메시지는 소박하지만 묵직하다.

만화 속 흰둥이는 기쁠 때, 나아가 '그래 나를, 그리고 우리를 응원해!'라고 말을 하고 싶을 때, 양손을 높게 번쩍 들고 얼굴엔 큰 웃음을 짓는다. '번쩍', 그렇게 우리 모두 두 손을 높게 들어, 환대의 몸짓을 건네보자. '번쩍!' 우리의 노동을 위해. 우리의 이 지난한 삶을 함께하기 위해.

[문화로 읽는 노동] 그 노동자는 왜 복직투쟁에 나섰나 다큐영화 <그림자들의 섬> / 2020.07

[문화로 읽는 노동] 

 

 

그 노동자는 왜 복직투쟁에 나섰나 다큐영화 <그림자들의 섬> 

 

 

강남규 / 문화사회연구소 운영위원 

 

 

시간은 기억을 남기고, 기억은 감정을 만든다. 더 많은 시간은 더 많은 기억을, 더 많은 기억은 더 많은 감정을 남긴다. 이 감정이라는 것이 복잡미묘하다. 소위 '합리적 이성'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도 어떤 감정적 상황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는' 무엇이 되곤 한다. 이해하기 어려운 얘기는 아니다. 사소하게는 헤어진 애인과의 기억이 남아있다는 이유로 특정한 음식을 먹지 않는다든지, 뭐 그런 것들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런 얘기가 남의 얘기가 되면 어쩐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된다. 별다른 동질성이 없어서 감정이입 할 구석조차 없는 남의 얘기라면 더욱 그렇다. 노동자가 그렇다. 국민 대다수가 노동자이지만, 스스로 '노동자'라는 정체성을 갖고 사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노동조합을 하는 노동자는 더욱 그렇다. 노동조합 조직률이 10% 남짓밖에 되지 않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이 대체 왜 대화보다 투쟁을 선택하는지, 왜 일해서 돈을 벌기보다 자꾸만 파업을 벌이며 손해를 보는지, 그냥 다른 직장 알아보면 될 텐데 왜 그렇게 고집스럽게 수십 년간 '복직투쟁'에 매달리는지. 그들이 그럴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어떤 감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끝까지 모른다. 

<그림자들의 섬>이 보여주는 30년의 감정들

이런 사회에서 노동조합 운동을 하는 노동자들의 어떤 감정을 이해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그들의 이야기를 직접 듣는 것이다. 책을 읽거나, 인터뷰 기사를 읽거나, 영화를 보는 것이다. 누군가의 이름과 얼굴과 목소리를 알고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의 입장을 이해하는 공감의 범위가 넓어진다.

그것 역시 감정의 효과다. 무정형의 추상화된 어떤 낯선 타자가 아니라 이름과 얼굴이 있고 목소리를 알고 있는 특정한 누군가를 마주한 '기억'이 만들어낸 '감정'.

<그림자들의 섬>(2013)이 바로 그런 다큐멘터리 영화다.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30년사를 다뤘다. 이야기는 노동조합이 어용이었던 시절부터 시작된다. 질 떨어지는 도시락을 거부하는 투쟁을 조직해 회사가 식당을 만들도록 한 '도시락 거부 투쟁'부터 전환의 단초가 마련되고, 1987년 7‧8‧9월 노동자 대투쟁을 거치며 조합원 직접 선거로 민주노조 전환을 완성한다.

이어 박창수‧김주익‧곽재규 세 명의 열사에 대한 회상, 노동조합의 조직력이 가장 강했던 시기에 비정규직을 외면했다는 뼈아픈 반성, 정리해고와 희망버스 운동, 복수노조의 탄생과 최강서 열사까지, 끊임없이 투쟁하고 사람이 죽고 실패하거나 성공하고 반목하는 이야기가 반복된다.

그렇게 30년이다. <그림자들의 섬>은 이 30년에 걸친 이야기를 한진중공업 노동자들(김진숙‧윤국성‧박성호‧박희찬 등)의 목소리로 풀어낸다. 그들이 가진 '기억'이란 이런 것들이다. 그들은 어용노조를 민주노조로 바꿔내 인간다운 공장을 만들어냈다. 그럼에도 여전히 공장에서의 일은 그 자체로 얼마나 위험한지, 하루가 멀다하고 산재로 죽는 사람들을 목격해 왔다.

그들은 1991년 박창수, 2003년 김주익‧곽재규, 2012년 최강서까지 한 사람의 의문사(박창수)와 세 사람의 자살을 목격했다. 그들은 연대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무사안일주의가 어떤 결과로 돌아오는지, 노동조합의 힘이 약할 때 회사가 얼마나 쉽게 말을 뒤집을 수 있는지를 수십 년간 경험해 왔다.

그들의 '감정'은 바로 이러한 30년간의 기억들 속에서 형성된 것이다. 쌓이기만 하고 제대로 해소되어 본 적은 없는 감정들이다. 이러한 감정들이 만들어내는 복잡미묘한 장면들이 이 다큐멘터리에는 자주 나온다.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기억을 공유해야만 이해할 수 있는 장면들이다. 

'또 한 명 깨졌네', 그 말에 담긴 감정

그들은 어째서 그렇게 노동조합을 지키는 일에 매달리는가. 1986년 노동조합 대의원에 출마해 당선됐다가 해고된 뒤 지금까지 복직하지 못한 김진숙씨가 이런 말을 한다. "술 먹으면 세상을 뒤집을 것처럼 떠들면서도 그 다음날 출근하면 그렇게 순한 양이 될 수가 없는 사람들. 그 아저씨들이 변하는 것을 봤잖아요."

어용노조 시절에는 순한 양처럼 다니며 소모품 취급을 당했지만, 민주노조 건설과 함께 투사가 되어 숱한 권리를 쟁취해온 노동자들은 '민주노조'의 귀중함을 DNA에 새겼다. 김진숙씨 역시 그 노동자들이 변하는 과정을 함께했기에, 숱한 당근과 채찍에도 노동조합 깃발을 버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어째서 현장에서 떨어져 죽은 사람을 내려다보면서 "또 한 명 깨졌네…" 하고 비인간적으로 중얼거리는가. 그러지 않으면 도무지 그다음 날의 업무를 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저 사람의 죽음을 자신의 일처럼 슬퍼하면, 자신도 당할 수 있는 일이라고 여기면, 저 사람이 떨어진 그곳으로 누가 다시 올라갈 수 있겠냐는 얘기다. 

김주익씨는 어째서 타워크레인에 홀로 올라갔고, 또 거기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나. 그의 죽음을 알게 된 곽재규씨는 왜 스스로 몸을 던졌나. 시간이 한참 흐른 뒤, 김진숙씨는 왜 김주익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그 타워크레인에 올라갔나. 왜 그는 "129일(김주익씨가 타워크레인에 머문 시간)만 넘기자"고 생각했나.

최강서씨는 왜 박근혜 후보의 당선 직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나. 복수노조(한진중공업 노동조합)가 설립되고 민주노조(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 조합원이 대거 이탈하는 상황을 지켜보면서도 왜 노동자들은 그들을 원망하면 안 된다고 말하는가.

<그림자들의 섬>은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30년사를 그들이 직접 구술하게 함으로써 그들에게 이름과 얼굴, 그리고 목소리를 부여한다. 그들은 더 이상 낯선 타자가 아니게 되고, 우리는 그들의 감정을 비로소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언뜻 비합리적인 것처럼 보였던 그들의 말과 행동에 모두 맥락이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 노동자가 복직투쟁에 나서는 이유

그리고 여기, 새로운 싸움을 준비하는 60세 여성이 있다.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용접공. 수많은 남성이 민주노조 하기를 두려워하던 1986년, 겁도 없이 스물다섯의 나이로 노동조합 대의원에 출마하고 심지어 당선된 노동자. 바로 그 때문에 해고된 뒤로도 35년을 끊임없이 싸워온 운동가.

47미터 높이의 타워크레인에 올라가 309일을 농성해 정리해고를 철회시킨 사람. 고공농성 하는 친구를 위해 항암 투병 중인 몸으로 부산에서 대구까지 걸어간 동지, 김진숙. 해고되지 않았다면 올해로 정년인 나이지만 그는 6월 23일 '복직투쟁'을 선언했다.

누군가는 물을 것이다. "왜 굳이?" 그의 싸움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욕망을 투사한 말로 김진숙씨를 조롱하지만, 이제 우리는 안다. 그가 한진중공업으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 '돈' 때문은 아닐 것임을. 그의 복직은 35년 전 민주노조를 건설하려던 그의 투쟁이 해고사유가 될 수 없음을 회사로부터 확인받겠다는 것이며, 다시 말해 그의 삶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하겠다는 것이다.

또한 비록 '지연된 정의'일지라도, 부당하게 해고당한 사람은 반드시 직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수많은 해고노동자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의지다. 그것이 항암 투병하는 몸을 이끌고 기어이 싸움에 나서는 이유임을 우리는 이제 안다. 

동료 노동자들은 그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다. "이번 복직 투쟁은 시대를 개척해 온 한 인간에 대한 예의이며 동지에 대한 의리를 지키는 투쟁입니다."(김재하 민주노총 부산본부장) 그리고 무엇보다 김진숙씨 본인의 말이, 이것이 지난 35년의 맥락 위에 있는 투쟁임을 분명히 한다. 우리는 그의 말에 서린 감정을 이해해야만 하고,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35년 동안 단 한 번도 포기하지 않았던 복직의 꿈. 그 꿈을 이룰 마지막 시간 앞에 섰습니다. 나는 다시 전선으로 갑니다. 내가 돌아갈 곳. 박창수 위원장이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조합원들의 곁으로 가기 위해. 김주익 지회장이 그토록 내려오고 싶어 했던 현장으로 가기 위해."

 

[문화로 읽는 노동] 자본주의 발전 시기 여성노동의 면면을 드러내다: 영화 「영자의 전성시대」/ 2020.06

 

[문화로 읽는 노동] 

 

 

자본주의 발전 시기 여성노동의 면면을 드러내다: 영화 「영자의 전성시대」

 

 

김대호 / 회원 

 

30~40대의 경우 제목은 들어봤지만 못 본 사람들이 많을 것이고, 20대의 경우 제목도 들어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혹여 제목을 들어본 사람은 1990년대 SBS에서 방송했던 예능 프로그램의 한 코너에서 개그맨 이영자와 홍진경이 버스 안내양으로 나와 그 시절 잘나간다는 연예인들을 버스 승객(게스트)으로 맞아 웃음을 주는 프로그램으로 알고 있는데, 이 프로그램의 기원은 소설이 원작인 영화 <영자의 전성시대>이다.


영자의 수난시대
      

영화 <영자의 전성시대>에서는 그 시대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청춘남녀가 주인공이다. 동생들의 학비와 가족의 생활비를 벌기 위해 시골에서 상경하여 청계천 철공소 사장의 집에서 가사도우미로 일을 하는 영자(배우 염복순)와 청계천 철공소에서 견습공으로 일을 시작한 창수(배우 송재호)가 어떻게 만났는지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두 사람은 창수가 철공소 사장의 심부름으로 사장의 부인에게 돈 봉투를 전달하기 위해 집에 들르게 됐다가, 거기서 가사도우미로 일하는 영자를 처음 만나면서 사랑이 시작된다.
      
제목은 <영자의 전성시대>지만, 첫 장면을 제외하고 영화는 끝날 때까지 제목과는 반대로 '영자의 수난시대'가 시작된다. 교제를 시작하자마자 창수는 군에 입대하고, 홀로 남은 영자는 철공소 사장의 아들에게 성폭행을 당하지만, 오히려 영자는 사장 부인이 준 얇은 돈 봉투를 받고 쫓겨난다.

그 뒤로 영자는 여인숙에서 살면서 봉제공장에서 힘들게 일을 하는데, 적은 월급으로는 생활비가 감당이 되지 않아 룸메이트 언니의 추천으로 술집에서 접대 일을 시작한다. 접대 일 역시 쉽게 적응되지 않아 당시 '버스 안내양'으로 불렀던 버스 차장 일을 시작하지만, 많은 승객을 태운 버스 출입문에 매달린 채로 달리다가 떨어져 오른팔이 잘리는 산재사고를 당한다.
   
사고성 재해라 산재승인 절차가 간단했는지 산재보상금 30만 원을 받는데, 미장원을 차리자는 룸메이트 언니의 이야기를 뿌리치고 동생들의 학비와 가족의 생활비로 30만 원 전액을 엄마에게 보낸다. 더는 희망이 없다고 느끼면서 자살을 시도하다가 마지막으로 영자의 눈에 들어온 것이 성매매였고, 오른쪽 팔이 없는 상태에서 다른 일을 할 수도 없어 성매매 여성으로 살아가게 된다.

군 복무를 하던 중 영자와 연락이 끊긴 상태로 제대를 한 창수는 목욕탕 보일러실을 거처로 삼아 목욕탕 세신사로 일을 하는데, 영자가 성매매한다는 소식을 듣고 영자를 찾아간다. 양복점을 차리는 게 꿈이었던 창수는 목욕탕에서 일하면서 틈틈이 영자를 도와주게 되고, 영자의 몸에 꼭 맞는 의수까지 만들어준다.

성매매 일을 힘들어하던 영자를 설득해 일을 그만두게 하고 목욕탕 보일러실에서 같이 살아가다가 꼰대 목욕탕 보일러공(배우 최불암)의 간섭에 낙심하여 영자는 다시 창수 곁을 떠난다.

몇 년이 흘러 창수는 양복점이 아닌 세탁소를 운영하면서 살다가 영자를 봤다는 친구 말에 영자를 찾아가는데, 영자는 어느 도시 변두리에서 불편한 다리로 오토바이로 짐을 나르던 남편(배우 이순재)과 함께 아이를 키우면서 행복하게 살고 있었고, 창수는 그런 모습을 보고 영자를 다시 떠난다.

여기까지가 <영자의 전성시대>의 줄거리다. 영화의 결말은 영자의 남편과 전 남친이었던 창수가 넓은 도로에서 같이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는 희망적인 장면이다. 하지만 원작 소설에서는 영자가 성매매했던 곳에서 화재가 발생하고, 시체로 발견되는 영자를 보면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고 한다. 원작 소설은 그 시절 배우지 못했던 여성 노동자의 가장 끔찍한 결말을 보여주고 있다.
        

영화 < 영자의 전성시대 > 포스터

<영자의 전성시대>는 1975년 개봉 당시 서울에서만 36만 명이 관람하였던 최고의 흥행영화였다. 1970년대는 우리나라가 본격적으로 산업화를 진행하던 시기로 지방의 많은 젊은이가 서울로 상경하여 노동자로 살아가는데, 자본주의적 모순 역시 급격하게 나타났던 시기이다. 특히 일할 기회가 상대적으로 많았던 남성 노동자인 창수에 비해 여성이었던 영자는 가사도우미, 봉제공장 노동자, 버스 차장 외에 더 이상의 기회가 없었다.

이러한 여성 노동자들에 대한 사회 폭력이, 그리고 남성 노동자들의 폭력이 영자의 삶을 어떻게 나락으로 떨어지게 만들고 있었는지 영화는 리얼하게 보여준다. 45년 전의 영화이고, 시대가 많이 변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여성 노동자들에 대한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폭력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영화다.

<영자의 전성시대>는 영자와 창수의 이야기가 빠르게 전개되기 때문에 지루하지 않다. 노동보건을 전공으로 하는 필자로서는 그 당시 철공소의 작업환경과 창수가 살았던 목욕탕 보일러실의 노동환경을 볼 수 있는 것이 흥미로웠고, 아직까지 현역으로 활동하는 배우 최불암과 이순재의 40대 모습을 볼 수 있는 것도 쏠쏠한 재미다.

물론 몇 가지 불편한 장면들도 있다. 창수가 영자를 처음 봤을 때 폭력적으로 들이대는 장면, 영자에게 꼰대처럼 훈계하는 장면, 성매매를 하던 영자를 때리는 장면, 성폭행 가해자인 철공소 사장과 영자가 성폭행 사건 이후 교제하는 장면 등은 꽤 불편하다.

하지만 <영자의 전성시대>는 자본주의 발전 단계에서 여성 노동자가 어떻게 희생되는지 그 과정을 리얼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여성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 이주 노동자 등 취약 노동자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이 시대에 다시 볼 가치가 있는 영화이다.

특히 소설 <영자의 전성시대> 결말은 주인공 딸의 비극적인 결말로 끝을 맺는 박경리의 소설인 <김약국의 딸들> 못지않게 리얼하다는 점에서 명작의 반열에 올릴 수 있는 작품이 아닐까? <영자의 전성시대>는 한국영상자료원 유튜브 채널에서 무료로 공개하고 있다.

[문화로 읽는 노동] 상공인들의 노동을 찾아서 : 청계천 사람들의 노동을 기록한 작가들의 사진 / 2020.05

상공인들의 노동을 찾아서 : 청계천 사람들의 노동을 기록한 작가들의 사진

최혁규 문화사회연구소

 

노동자라고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우리는 노동자를 어떻게 상상하는가? 지금까지 우리 사회는 노동자를 어떤 방식으로 재현해왔는가? 노동자를 기록한 대부분의 사진은 노동 현장을 포착하거나 노동자들이 연대하여 투쟁하고 있는 모습을 담았다. 전자든 후자든 포토제닉한 순간을 담아내기 위해 노동자의 손과 표정 그리고 땀을 사진적 표현의 중심에 놓곤 한다. 이를 통해 투박하고 강인한 노동자의 모습을 담아내면서 일종의 숭고미를 그려낸다. 이는 비단 노동자라는 대상을 다룰 때만이 아니라, 노동이라는 행위를 사진 이미지로 기록해 보여주고자 할 때 흔히 취하게 되는 전략이다.
 

▲   그림 1. 『사진과 함께 보는 노동자역사 알기』(노동자역사 한내, 2015, 한내), 『연장전: 우리 시대 노동의 풍경』(노순택·박점규, 2017, 한겨레출판), 『어제와 오늘 2』(20세기민중생활사연구단, 2007, 눈빛). ⓒ 알라딘

 


노동자에 대한 지배적인 재현과 상상

노동자의 모습을 담은 사진들을 르포르타주의 목적으로 찍은 사진부터 예술 작품으로서 촬영된 사진까지, 일상적인 삶을 포착한 사진부터 투쟁의 모습을 담은 사진까지 다양하다. 대표적으로는 '노동자역사 한내'에서 출간한 <사진과 함께 보는 노동자역사 알기>에 수록된 사진들이 있다. 이 사진집은 노동자들의 투쟁을 기록한 사진들을 집대성한 자료로써, 노동운동에 참여한 노동자들의 모습을 통시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노순택이나 정택용 같은 작가들의 사진은 노동자들의 일상과 노동자들의 투쟁 현장에 밀착해 예외적인 일상 속에서 발생하는 사건과 그들의 희비를 포착한다. 또한 20세기민중생활사연구단과 눈빛출판사가 출간한 사진집은 일반적인 민중들의 생활을 담았다.

그러나 이러한 이미지들로 노동의 풍경을 살펴보기에 충분하지 않다. 자본주의적 생산은 공장 자동화를 도입하면서 다품종 소량생산을 지향하는 포스트포드주의로 전환되었고, 노동력에 이어 인간의 생각과 감정도 교환될 수 있는 상품으로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노동은 육체노동과 지적노동 그리고 감정노동 등 다양한 방식으로 세분되었고, 노동을 구획하는 시공간적 경계도 유동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면, 노동자에 대한 상상과 재현은 기존의 공장 노동자의 형상에서 그 이상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렇기에 지금의 노동 현실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는 언어를 발명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처한 상황을 제대로 포착할 수 있는 이미지들을 기록하거나 우리가 놓쳤던 노동의 역사적 이미지를 발견할 필요가 있다.
    

▲  그림 2. 『다시 보는 청계천 1965-1968』(구와바라 시세이, 2017, 청계천박물관), 『노무라 리포트: 청계천변 판자촌 사람들 1973-1976』(노무라 모토유키, 2013, 눈빛), 『청계천 사람들: 삶의 투쟁의 공간으로서 청계천』(최인기, 2017, 리슨투더시티). ⓒ 알라딘

 

 
어디에도 있지만 동시에 어디에도 없는 소상공인의 노동

소상공인 집단의 계급적 위치가 모호하기 때문일까? 소상공인 혹은 소상공업 노동은 제대로 다뤄진 적이 없는 것 같다. 대개 소상공인은 혼자서 일하거나 한두 명의 직원들을 둔 채 일하고, 한 사업체의 경영자이지만 동시에 노동자로서 쉬는 날 없이 일한다. 그리고 업체에 고용된 임노동자들은 때로는 사장 이상으로 업체 경영에 신경 써야 하는 위치에 처하기도 한다. 일종의 소규모 업체가 가진 운명공동체적 성격 때문이다. 이러한 소상공인들은 우리의 일상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식당과 카페 같은 곳에서부터 시장의 상점이나 공방과 공업소 같은 곳들까지 다양하다.

하지만 정부의 경제정책이나 주요 담론에서 소상공인들의 문제는 중요한 쟁점이 되지 않는다. 물론 정부는 필요시 소상공인들을 항상 국가의 중요한 경제적 주체로 호명하지만, 정작 이들이 처한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해줄 정책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다른 한편으로 노동자 운동은 소상공인의 애매한 계급적 위치 때문인지, 아니면 노동조합법 바깥에 있기 때문인지, 이들을 노동운동의 주체 혹은 노동운동에 연대하는 주체로 인식하지 않는다.

임금 문제만을 두고 본다면, 소상공업 사장과 노동자는 대립각을 세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한국 경제가 대기업 중심으로 구조화되어 있다는 점에서 소상공인들은 착취와 수탈에 노출되어 있다. 그런데도 우리가 노동을 다룰 때 이들의 노동은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한 점에서 보자면, 이들은 노동문제에 있어서 어디에도 있지만 동시에 어디에도 없는 자들이다.



청계천 일대 상공업, 그곳에서 포착한 삶으로서의 노동
 

이들의 모습과 역사를 볼 수 있는 대표적인 공간은 서울의 주요 상공업 지역인 청계천 일대이다. 청계천 일대는 서울 도심 한복판에 위치한 중심업무지구이면서 역사적으로 오래된 상공업 지역이다. 이 지역의 근현대적 형성은 전후 도시 빈민들의 역사와 함께한다. 6.25 전쟁 이후 피난민들이 청계천변에 판자촌을 형성해 살기 시작했고, 이들은 넝마 줍는 일을 하거나 매각된 식민지기 물품이나 미군 부대에서 나온 군수품 등을 변형하거나 분해해 파는 일로 생계를 유지했다. 이들에게 노동은 생존과 직결된 삶 그 자체였다. 1960년대 중후반부터 시작된 판자촌 강제 철거에도 불구하고, 노점에서 시작된 상공업 행위는 점차 주변 주거 지역으로 확산되어 지금과 같은 광범위한 상공업 상권을 만들었다. 이 상권은 청계천을 따라 신설동과 황학동 일대에서 동대문을 지나 을지로 입구까지 길게 이어진다.
   
일찍이 청계천 일대의 도시빈민과 상공인에 주목한 사람들이 있었고, 이들은 청계천 주변에서 사는 사람들의 삶에 관심을 가졌다. 1960년대 중순의 청계천 일대의 모습에 주목했던 일본의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구와바라 시세이, 1970년대부터 청계천 일대에서 사역하면서 도시 빈민들의 삶을 기록한 목사 노무라 모토유키, 그리고 그와 함께했던 정치인이자 빈민운동가였던 의원 고 제정구, 1980년대 말부터 청계천을 따라 걸으며 이 일대의 상공인들을 기록한 사진작가 이한구1), 청계천 일대 상공인들의 노동과 투쟁을 기록한 빈민운동가이자 사진작가인 최인기2) 등이 있다.

어떤 이는 청계천 도시 빈민들의 삶을 개선하고자 노력했고, 어떤 이는 개발이라는 명목하에 강제 퇴거의 위기에 놓인 청계천 상공인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활동을 하기도 했다. 이렇게 담아낸 사진은 그 누구도 기록하지 않았던 청계천 사람들의 노동을 찍은 역사적 증거물이자, 도시빈민과 상공인의 삶을 증명하는 투쟁의 무기였다. 이는 현재 청계천·을지로 일대 재개발 반대 투쟁에서도 마찬가지다.



과거의 기록이자 다가올 미래를 향해 있는 이미지

노동의 형태는 매우 다양하지만, 우리가 노동을 기록하고 표현하고 상상하는 방식은 꽤 단순하다. 청계천 사람들을 찍은 사진들은 우리가 주목하지 않았던 노동의 모습을 담고 있다. 이 사진들은 그동안 우리가 노동을 이야기할 때 잘 떠올리지 않았던 소상공인들의 노동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계기이다. 또한 플랫폼 노동자, 긱 노동자(gig worker) 등 노동의 형태가 점차 파면화되고 다양해지면서 노동자를 상상하는 다양한 방식을 고안해내야 한다. 그러한 점에서 청계천 사람들의 노동을 기록한 작가들의 사진은 과거의 기록이지만 다가올 미래를 향해 있는 이미지이다. 어쩌면 이 사진들은 청계천 사람들의 현실을 기록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 찍혔는지도 모른다.

참고자료.
1) 이한구의 청계천, PROLOGUE
http://www.artkoreatv.com/news/articleView.html?idxno=12884

2) 청계천·을지로 개발에 저항하는 사람들(최인기)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_w.aspx?CNTN_CD=A0002597402

[문화로 읽는 노동]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기 – SBS 드라마 <스토브리그> / 2020.04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기 SBS 드라마 <스토브리그>

 

채은 선전위원

 

스토브리그는 프로야구에서 한 시즌이 끝난 뒤 다음 시즌이 시작되기 전까지 계약 갱신, 트레이드 등이 이루어지는 시기를 가리킨다. 난롯가에 둘러앉아 여러 가지 정보와 소문이 오가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명쾌하고 정확한 몸값

필자는 꽤나 야구광이다. 한동안은 야구 경기 일정에 맞춰 삶을 계획하기도 했을 정도였고, 특히 우승팀을 가리는 진승부가 벌어지는 일명 가을야구 시즌에는 거의 야구에만 빠져있을 정도였다. 야구는 모든 것을 숫자로 표현하는데, 예를 들면, 타율, 타석, 타수, 득점,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볼넷 등을 통해 각 선수의 능력치를 숫자로 표현하고 이는 명쾌하고, 정확하고, 객관적이다. 이러한 야구의 특징은 다음과 같은 대사에서도 드러난다.

“90만 달러까지 된다고 했잖아요. 근데 50만 달러만 써서 허접한 애를 데리고 온 거예요?”

그래도 메이저리그에서 뛰던 애라서요.”

그러게 잘난 놈이면 50만 달러에 왔겠어요? 자기 몸값이 자기 능력이잖아요.”

대화 속 야구선수는 몸값50만 달러밖에 안 되는 허접한 선수. 부상도 있고, 소위 잘 나갈 수 있는 기간이 지난 상태에 있는 그냥 그런 선수. 만년 꼴찌팀 드림즈는 50만 달러에 선수를 기용하고 비용 절감의 이득을 얻는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생긴 잉여비용은 새로운 선수를 사는 데 사용된다. 적은 금액에 굉장히 효과적인 쇼핑을 마친 셈인데 마음 한편에서 불편함이 느껴진다.

어디 야구팀뿐이겠는가? 우리가 몸 담고 있는 일터도 마찬가지이다. 할당된 업무에 대한 평가는 매년 이루어진다. 기업들은 S, A, B, C, D의 등급으로 개인과 팀의 성과를 정량화하고 이에 따라 그 해의 성과급과 다음 해의 연봉, 즉 몸값이 정해진다. 최고의 등급을 받으려면 단순히 일만 잘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남들보다 앞서 나가야 한다. 따라서 경쟁이 시작되고, 경쟁은 과한 노동을 가져와 연장근로, 야간근로는 늘 있는 일이 된다. 게다가 옆 동료는 더이상 동료가 아니고 내가 이겨야 할 대상이 된다. 최하위 등급은 반드시 누군가가 채울 것이고, 나는 최하위 등급을 받아서는 안 되니까. 능력 있는 자는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고, 능력 없는 자는 손가락질의 대상이 된다. 경쟁으로 인해 켜켜이 쌓여있는 스트레스와 긴장감은 타인에 대한 몰이해와 배제의 도화선이 되고, 이는 일터괴롭힘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명쾌하고 정확한 숫자로 인한 서열화는 인간의 본질과 가치를 몰살시키는 도구로 작용한다. 어떤 사람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짜리 사람인지가 우선되는 것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는 받는 연봉이 깎이게 되는데, 당신의 지금 성능으론 그 가격을 주지 못하니 좀 더 일하고 싶으면 떨어진 성능만큼 하향된 가격대를 받아들이기를 권유받기도 한다. 여기에 인격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일터를 구성하고 있는 기계이거나 인적 자원’, 물건만이 남는다.

우린 가끔 나는 어떠한 것을 좋아하고, 어떤 성격을 가졌으며, 어떤 신념을 가지고 살아! 난 이런 사람이야라고 이야기하지만, ‘나는 얼마짜리야라고 이야기를 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는 각자의 본질에 관심이 없다. 대학 입학 성적, 학점, 시험 점수 등 온갖 테스트를 통한 수치, 월급, 연봉 등 각자가 얻어 낸 숫자에만 신경을 쓸 뿐이다. 그렇기에 진짜 가치를 알아봐 주는 작은 행동이 필요하다. 비록 그것이 정치적 올바름이 강한 것일지라도 의식적 노력이 필요하다. 사회 속에서 우리가 숫자로 남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몰인격을 인정하는 애석한 일이기 때문이다.

진짜 가치를 알아준다는 것은 뭘까?

이와 관련해, 드라마 속 한 장면 중, 포수 서영주에 대한 서사는 꽤 인상적이다. 야구 포지션 중, 포수는 가장 중요하지만 투수의 빛에 가려진 안타까운 자리이다. 사실 포수는 야구 경기 전체를 읽어내는 포지션이기에 그라운드 안의 감독이라고도 불리는데 말이다.

극 중 서영주는 만년 꼴찌팀 드림즈의 포수다. 현재 야구에 대한 열정보다는, 개인의 능력치를 높이는 것과 몸값을 높이는 것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는다. 모든 선수의 연봉 삭감의 위기 상황에서도 본인의 입장만을 고수한다. 그도 그럴 것이 포수 서영주는 온갖 고질병에 시달린다. 포수는 경기 내내 쪼그려 앉는 자세를 취해야한다. 투수가 던지는 공의 방향에 쉽게 따라가려면, 혹은 도루하는 선수들을 즉각 방어하려면, 순간적인 자세 변환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로 인해 땅바닥에 편하게 엉덩이를 대고 앉지 못하고, 엉덩이를 공중에 띄워 앉은 것도 아니고 서 있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자세여야만 한다. 이를 보여주듯 극 중 포수 서영주의 무릎은 물로 가득 채워져 있고(그래서 늘 물을 빼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치질 등 항문 관련 질환 등으로 고생하고 있으며, 허리 또한 망가진 상태이다. 이렇게 몸이 망가졌으니 그만큼 보상받아야겠다는 독한 맘으로 연봉 협상 과정에서 거칠게 행동한다. 그렇게 고집을 꺾지 않고 사납기만 하던 포수 서영주는 단장 백승수의 한 마디에 이 마음이 누그러진다.

 

다치지 말고 뛰세요.”

그라운드에서 자신의 포지션을 지키는 단순한 말이나 운동하는 기계가 아닌, 사람으로서의 대접을 받았다고 느낀 것일까. “지금 저 걱정해 주시냐고요.”라는 포수 서영주의 대사는 그가 진정 원했던 대접이 무엇인지를 말해준다. 우승을 위해 몸을 망가뜨려야만 하는 야구선수에게 당신의 건강이 진심으로 걱정된다는 말 한마디, 나는 당신이 다치지 않고 오래 선수 생활을 하기 바란다는 내심의 의사가 닿는 순간 그 선수는 인적 자원이 아니라 인간이 된 것이다.

일터에서든 어느 곳에서든 숫자에 따라 매겨지는 거짓된 가치를 벗어나고 싶은 것. 그건 알고 보면 우리 모두의 바람이 아닌가 생각된다. 단순히 조직 내 부품이 되어, 그리고 항상 평가의 대상이 되어, 앞으로 계속 사용될지 혹은 폐기되어 버려질지 모르는 처지에서 벗어나, ‘진정한 인격체가 되는 그 순간. 우리는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마주하려는 것. 사실, 그게 서영주와 우리 모두의 바람이 아닐까.

[문화로 읽는 노동] 플랫폼 속 밀레니얼 리얼리즘 / 2020.03

[문화로 읽는 노동] 

 

 

플랫폼 속 밀레니얼 리얼리즘-장류진 소설집 <일의 기쁨과 슬픔> 

 

 

 

김상민 / 문화사회연구소 소장 

 

 

 

'일의 기쁨과 슬픔이라… 일에는 당연하게도 슬픔도 기쁨도 있는 법이지' 하면서 책을 넘기다 보면 어느새 작가가 만들어 놓은 가공의 이야기와 실재하는 사물들 사이에 걸쳐진 묘한 덫에 걸려들어 소설의 기쁨과 슬픔을 맛보고 있음을 깨닫는다.

아니, 다 읽고 책을 접을 때까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그렇다고 환상적 리얼리즘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환상적이라기에는 너무나 현실적이고, 리얼리즘이지만 웃음을 잃지 않는다. 이 소설(집)을 밀레니얼 세대, 페미니즘 리부트, 소확행, 워라밸, 플랫폼의 시대에 길어 올려진 (이렇게 이름 붙일 수 있다면) '밀레니얼 리얼리즘'의 전형이라고 한다면, 작가가 슬퍼할까?

 



밀레니얼 세대의 노동 이야기

'우리 동네 중고 마켓'의 준말인 '우동마켓'이라는 중고거래 앱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이 스타트업에서 "사실상 막내"인 나는 서비스 기획자다. 앱 개발자들이 서비스를 런칭하거나 수정하면 제대로 작동하는지, 사용상 문제는 없는지를 테스트하고 피드백하는 역할도 한다.

나는 앱 사용자들의 편의를 위해 어떤 기능을 개선해야 하는지, 어떤 과정에서 버그가 생기는지에 무척 관심이 많다. 아니나 다를까 소규모 스타트업에서 유행하는 '스크럼 시간'에 나는 '거북이알'이라는 특이한 우동마켓 사용자를 만나서 조사해보라는 대표의 지시를 받는다. '거북이알'은 "하루에 거의 백 개씩 글을 올리고 ... 가격은 늘 인터넷 최저가보다 조금씩 싸게 책정"하는 데다가 "파는 물건에도 일관성이 없"어서 혹시 어뷰저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사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결국 우동마켓 직원임을 숨기고 의심스러운 사용자 '거북이알'과 직거래함으로써 그의 실체를 알게 된다. 우동마켓은 플랫폼이다. 플랫폼은 사용자(소비자)와 생산자(판매자), 나아가 광고주까지 포함하여 모두가 하나의 앱 안에서 나름의 독자적 생태계를 유지하고 확장할 수 있어야 성립되는 기술적, 경제적, 문화적 토대다.

그런데 여기에 앱 개발자, 즉 마치 사용자나 생산자와는 달리 객관적 관점을 가져야 할 플랫폼의 직원이 상품을 매개로 생산자와 접촉한다. 그야말로 이 플랫폼은 플랫폼 개발자로 하여금 플랫폼을 통해 (혹은 플랫폼의 방식으로) 노동하게 만든다. 그런데 그 만남(혹은 노동)을 통해 '거북이알'이 들려준 이야기는 소설 밖에서 듣고 있던 이의 무릎을 털썩 꺾이게 만든다.

이웃 건물에 입주해 있는 카드사의 사원증을 걸고 나타난 '거북이알'과 물건을 거래한 뒤 우연히 점심을 같이 먹게 된 나는 "포인트로 사는 거니까 부담 갖지 말아요. 나 포인트 엄청 많아요. 아마 우리나라에서 제일 많을걸?"이라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듣는다.

이 포인트라는 것은 말하자면 신용카드로 물건을 구매하면 구매액수에 따라 부여하는 숫자인데, 소비자가 이것을 (아주 많이) 모아 사은품을 받거나 현금화할 수 있는 가상의 화폐(아직 블록체인을 떠올리진 말자) 비슷한 것이다. 클래식 마니아이자 인스타그램 셀럽인 회장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죄로 월급을 카드 포인트로 받게 된 슬픈 사연.

노동의 대가가 화폐가 아니라 소비의 보상으로 주어지는 포인트라니. 물론 포인트도 화폐의 기능을 하기는 하지만, "회사 생활 십오 년 하면서 한 번도 운 적이 없었"던 그녀는 그 포인트를 보고는 결국 눈물을 흘리고 만다. 이유는 "포인트가 너무 많아서." 마치 수십만 SNS 팔로워를 거느린 현실의 그 유명한 회장님인 것만 같은 그분은 자신이 '짠~' 하며 SNS에 올렸어야 할 깜짝 뉴스를 '거북이알'이 그만 미리 누설하는 바람에 김이샜고 찌질하게 월급-포인트 갑질로 응대한 것이다.

인스타그램에서 카드 적립 포인트로 이어지는, 소셜미디어 플랫폼과 가상 화폐 사이의 매끄러운 전환을 그려내는 소설적 묘사는 아마도 우리 시대의 노동과 자본의 본질을 보여주는 모범적인 사례라고 칭하고 싶다. 소셜미디어를 통한 회장님의 사회적 자본의 축적과 개인적 유명세를 위한 허세가 어떻게 한 노동자 개인의 노동과 소비의 대가인 포인트로 귀결되는지는 깊이 연구해볼 가치가 있을 정도다.

일은 일일 뿐…

이 심각한 사태는 '거북이알' 특유의 긍정적인마인드와 밀레니얼다운 생존 방식으로 극복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는 "포인트를 돈으로 전환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중고거래를 선택한다. 포인트를 써서 "잘 팔릴 법한 물건들"을 직원 할인가에 "근무시간에" 구매해 우동마켓에 올리고, "점심시간이나 외근 나갈 때 직거래"하면서 "나름대로 손해를 최소화"하는 방법을 터득한다.

자신의 개인 시간은 쓰지 않으면서도 근무시간에 틈틈이 (어쩔 수 없는) 제2의 밥벌이를 해나가는 그녀의 지극히 생존주의적 워라밸은 존경스럽지 않을 수 없다. 포인트로 월급을 주는 회사를 위해 어떻게 나의 소중한 시간을 1분이라도 더 쓸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이들이 자기 일을 증오하거나 두려워하는 것은 아니다. 일은 일일 뿐이다. 거의 유일하게 실명으로 등장하는 회사인 '엔씨소프트' 사옥을 바라보며, 두 사람은 이런 대화를 나눈다.

"저희 대표나 이사는 매일매일 그런 생각을 하겠죠? 어떻게 돈 끌어오고, 어떻게 돈 벌고, 어떻게 3퍼센트의 성공한 스타트업이 될지 잠들기 직전까지 고민하느라 걱정이 많을 거예요. 전 퇴근하고 나면 회사 생각을 안 하게 되더라고요."

"나도 그래요. 사무실을 나서는 순간부터는 회사 일은 머릿속에서 딱 코드 뽑아두고 아름다운 생각만 하고 아름다운 것만 봐요."

대표가 편애하는 남성 동료 개발자에게 치이고, 유명인사인 갑질 회장님에게 무시당하는 이 밀레니얼 여성 노동자들은 너무나 적절하고 우아한 자신들만의 노동윤리를 통해 거대한 시스템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균열을 만들어 낸다. 언제나 마치 자연스럽게 강요되는 퇴근 후 업무, 잔업, 야근, 특근, 회식은 임금노동자를 회사의 노예로 만들고 만다는 것을 사무치게 잘 알기라도 한 듯, 칼퇴와 퇴근 후 회사잊기를 실천하고 있다.

밀레니얼 세대의 노동관, 이해가 아닌 윤리와 실천의 문제

그런데 회사는 끈질기기 때문에 퇴근 후에도 우리를 계속해서 호출한다. 회사를 생각하고 염려하게 만든다. 그것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아름다운 생각"과 "아름다운 것"이 필요하다. 거북이라든가 "루보프 스미르노바"라든가. 반려동물에 대한 사랑이든 아티스트에 대한 덕질이든, 임금 노예가 아닌 자유로운 존재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뭔가 다른 것들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들은 거창하거나 대단할 필요가 없다. 금요일 저녁 사무실에 혼자 남아 있는데 퇴근한 줄 알았던 대표가 들어온다. 하지만 "사실 야근하려고 남아있던 것은 아니었다." 저녁 아홉 시에 시작하는 루보프 스미르노바 리사이틀 온라인 예매를 위해 회사에서 시간을 때우고 있을 뿐이었다.

기다리는 동안 "고독한 조성진" 채팅방에서 그의 카네기홀 연주사진을 업로드하고 홍콩행 항공권을 예매하면서. 조성진은 들어봤지만 루보프 스미르노바가 궁금하여 굳이 검색해보지 않기를 권한다. 누구에게나 덕질은 숨기고 싶은 것일 테니까.

다만 일의 슬픔이 있지만 기쁨 또한 있어서 우리를 살게 하고 우리 삶을 아름답게 한다는 것은 언제까지나 진리일 것이다. 밀레니얼 세대의 이해 못 할 노동관은 장류진의 소설이 그려내듯 지금의 기술적, 경제적, 문화적 상황에서 기쁨을 찾아내어야만 (그래서 생존해야) 하는 특별한 조건으로부터 온다. 따라서 그것은 이해의 문제가 아니다. 노동의 새로운 윤리와 실천의 문제다.

"사시는 동안 적게 일하시고 많이 버세요." 

 

[노동시간 읽어주는 사람] 초장시간 노동이 만연하는 방송 영역, 더욱 심각한 아동-청소년 연기자의 노동 / 2020.02

초장시간 노동이 만연하는 방송 영역, 더욱 심각한 아동-청소년 연기자의 노동

 

성상민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활동가, 문화평론가

 

"12시간 일하고 12시간 쉬자!" 독자들에게는 이 말이 무척이나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다. 하루 12시간 일하는 것도 엄연히 노동법에 위배되는 상황인데 왜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일까. 그러나 드라마 촬영을 비롯한 방송 노동에서는 12시간 쉬는 것도 무척이나 감지덕지한 상황이 오랜 시간 이어졌다.

본래 이 구호는 2005년 결성한 전국영화산업노조에서 사용하던 문구였다. 문화예술과 관련된 업계 중에서는 가장 빠르게 노조가 생긴 편이었던 영화 영역은 다른 문화 영역의 노동과 다를 바 없이 매우 열악한 노동환경에 놓여 있었다. 노동인권을 고려하지 않는 무리한 야간 촬영, 장시간 촬영도 척박한 노동조건의 일부였다. 다행히도 영화노동은 10년 이상 지속된 영화산업노조의 투쟁과 활동의 결실로 표준 근로계약서를 정착시키는 것은 물론 열악했던 노동 환경이 차근차근 개선되고 있는 상황이다. 물론 주52시간 연장 제한 준수를 위한 움직임도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이렇게 영화 노동의 상황이 변화하고 있는 것과 달리 방송 노동은 201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야 열악한 상황이 주목을 받게 되었다. 오랜 시간관행으로 정착된 '쪽대본 문화'는 방송 촬영에 충분한 여유를 들일 수 없게 만들었고, 2000년 대 이후 방송업계에서 가속화된 프로그램 제작 외주화 는 '방송 산업 전문화'와 '방송 프로그램 다양성 추구'라는 명분과 달리 전형적인 하도급 노동의 체제를 방송업에 그대로 정착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방송국이 충분한 제작비를 지급하지 않은 상황에서 외주 제작사조차도 자기들이 살기에만 바빠 방송 노동의 문제는 등한시했다. 여기에 한국의 경우, 방송을 비롯한 문화예술 영역의 노동이 전반적으로 시장 규모에 비해 제대로 된 노동자 보호 제도가 정착 되지 못한 것은 물론 노동자들의 조직화도 충분치 않다는 제반 조건의 문제까지 존재한다. 

방송국이 자신이 만드는 프로그램에 제대로 된 책임 의식을 지니지 않는 사이 방송국은 방송노동자들을 쉽게 쓰다 버리는 휴지처럼 취급하는 일이 만연했다. 근로계약서를 쓰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방송노동자들을 노동자로 인식하지 않은 사례는 무척이나 허다했다. 방송 노동에 대한 감수성이 미비한 상황에서 '쪽대본 문화'가 겹친 결과는 초장시간 노동이다.  

20년 1월 14일 화요일 오후 <아동 청소년 대충문화예술인 노동인권 개선 토론회>가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렸다. 출처: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극히 일부의 프로그램을 제외하면 대다수의 방송 프로그램은 방송 예정 시간 하루 전, 심하면 몇 시간 전까지도 촬영이 계속된다. 또한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방송국 사이의 경쟁 속에서 한국 드라마의 평균 방송 시간은 세계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길어졌다. 방송 시간은 세계에서 제일 긴데, 준비 하는 시간은 세계에서 제일 짧은 기형적인 환경 에서 여유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빡빡한 스케줄 속에서 촬영시간은 하염없이 길어졌다. 시간이 없으면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야간 촬영 장면이 있으면 최대한 밤 시간대를 활용해야 한다는 이유로. 여기에 아무리 노동시간을 길고 길게 만들어도 제동을 걸 존재나 제도도 없었다. 

제대로 된 수면이나 휴식을 취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산재 사고는 끊이지 않고 발생했다. 업무 특성상 준비 작업과 철수 작업으로 다른 직군보다 더욱 길게 일하는 세트나 소품, 분장 등의 미술 분야 팀은 출퇴근 과정에서 크고 작은 교통사고를 당하기 일쑤였다. 폭염이나 한파가 찾아와도 노동시간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2018년 SBS에서 방송한 드라마 <서른이지만 열일곱입니다>에 참여한 방송노동자 한 명이 그해 7월, 사상 유래 없던 폭염 속에서도 76시간 촬영을 하다 집에서 잠시 수면을 취하던 중 과로사로 의심되는 돌연사로 세상을 떠난 사건이 대표적이다. 

'하루 12시간 노동'은커녕 주 70시간, 주 80시간 노동이 만연한 상황 속에서 방송노동자 대다 수가 힘겨운 상황에서, 더욱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분야가 있다. 소위 '아역배우'라는 호칭으로 익숙한 아동·청소년 연기자들이다. 많은 이들이 알다시피 아동과 청소년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 으로 성숙하는 단계에 놓여있기 때문에 세심하게 접근해야 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이 상식은 최소한 방송 노동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방송 노동에 만연한 초장시간 노동환경이 그대로 아동·청소년 연기자들에게도 적용된다. 설사 등장하는 장면이 단 몇 장면에 불과 할지라도, 그 몇 장면을 찍는 시간까지 하염없이 기다리는 일이 다반사이다. 장시간 촬영, 장시간 대기가 고착화된 상황에서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하는 것은 물론 학교에 다니는 아동·청소년 연기자는 학습권을 침해받기까지 한다. 

지난 1월 14일,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를 비롯해 문화연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언론개혁시민연대 등 인권·노동·언론 영역의 단체들이 모여서 결성한 '아동청소년 대중문화예술인 노동인권 개선을 위한 팝업(Pop-Up)'이 국회 토론회에서 발표한 아동·청소년 연기자 실태조사에 의하면 이 실태는 더욱 명확해진다. 조사에 참여 한 총 103명의 아동·청소년 연기자들 중 1일 최 장 12시간 촬영을 경험한 이들은 63명으로 60%에 육박했다.

심지어 이들 중 3명은 24시간 이상 촬영을 경험한 적이 있다고 대답하여 충격을 주었다. 이러한 초장시간 노동에 아동·청소년 연기자나 보호자의 동의를 받는 경우는 무척이나 드물었다. 단 18명의 응답자만 야간 촬영를 진행할 때마다 제작사가 동의를 구했다고 답변했다. 자연스레 이는 학습권에도 영향을 미쳤다. 단 2명의 아동·청소년 연기자만이 드라마 촬영 기간 중에 결석이나 조퇴를 한 적이 없다고 대답했다. 

성인들도 제대로 쉬지 않고 일하면 피로를 느끼는 상황에서, 한창 성장기에 놓인 아동·청소년 연기자들에게 초장시간 촬영은 더더욱 큰 피해를 줄 것은 명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도 아동·청소년 연기자들의 노동환경은 여전히 열악한 환경에 그대로 놓여 있는 것이 현실이다. 여기엔 방송노동환경이 전반적으로 열악한 것이 그대로 아동·청소년 연기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문제도 크지만, 한국 사회가 아동·청소년 연기자를 바라보는 시선도 함께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어린 나이부터 연기자 활동을 하는 아동·청소년들은 일찌감치 자신의 진로를 방송 영역의 노동으로 정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아직도 방송노동자들을 위한 의무적인 노동 교육도, 강고한 힘을 지닌 방송사나 제작사에 맞서 노동자의 권리를 보호할 수 있는 제도나 단체 의 힘도 미비하다. 게다가 현장에서는 PD의 힘이 지배적으로 작용하는 상황에서 자연스레 아동·청소년 연기자 상당수는 연기 활동을 안정적으로 지속하기 위해 아무리 부당한 일을 겪어도 참는 것이 당연하게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9살 때부터 연기 활동을 시작해 어느덧 배우로는 물론 가수로도 이름을 알린 양동근이 2015년이 되어서야 드라마 PD에게 정신적인 폭력을 받은 것을 고백한 것이 대표적이다. 청소년 시기를 지나 성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렸을 때부터 심어진 침묵의 기제가 아동·청소년 연기자들에게 강력하게 작동한다는 사실이 어렴풋이 드러난 사건이었다. 

여기에 아동·청소년 인권에 대한 인식과 감수성이 낮은 환경이 함께 영향을 미친다. 아동·청소년을 동등한 존재로서 대우하고 존중하기 보다는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차별하거나 무시하는 것이 2020년 현재에도 한국에서는 만연 한 것이 현실이다. 이렇게 방송 노동의 열악한 현실은 방송 노동 현장의 억압적인 문화와 열악한 인권 감수성이 결합하며 오랜 시간 동안 문제가 있어도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아동·청소년 연기자의 초장시간 노동환경은 연기자가 되기 위한, 또는 방송 환경에서 버티기 위한 당연한 '통과의례'로 여기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그 통과의례는 과연 누구를 위한 통과 의례인가. 그저 시청률과 광고료에만 신경 쓸 뿐, 제대로 된 휴식이나 수면은 물론 학습권조차도 보장받지 못하는 무법천지의 방송노동환경은 얼마나 아동·청소년 연기자가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돕고 있는가. 방송사나 제작사의 이권만을 신경 쓰는 방송 산업에서 한국의 아동·청소년 연기자는 열악한 방송 환경과 억압적인 방송 문화, 척박한 아동·청소년 인권의 '삼중고'에 오늘도 시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