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로 읽는 노동] 그 노동자는 왜 복직투쟁에 나섰나 다큐영화 <그림자들의 섬> / 2020.07

[문화로 읽는 노동] 

 

 

그 노동자는 왜 복직투쟁에 나섰나 다큐영화 <그림자들의 섬> 

 

 

강남규 / 문화사회연구소 운영위원 

 

 

시간은 기억을 남기고, 기억은 감정을 만든다. 더 많은 시간은 더 많은 기억을, 더 많은 기억은 더 많은 감정을 남긴다. 이 감정이라는 것이 복잡미묘하다. 소위 '합리적 이성'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도 어떤 감정적 상황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는' 무엇이 되곤 한다. 이해하기 어려운 얘기는 아니다. 사소하게는 헤어진 애인과의 기억이 남아있다는 이유로 특정한 음식을 먹지 않는다든지, 뭐 그런 것들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런 얘기가 남의 얘기가 되면 어쩐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된다. 별다른 동질성이 없어서 감정이입 할 구석조차 없는 남의 얘기라면 더욱 그렇다. 노동자가 그렇다. 국민 대다수가 노동자이지만, 스스로 '노동자'라는 정체성을 갖고 사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노동조합을 하는 노동자는 더욱 그렇다. 노동조합 조직률이 10% 남짓밖에 되지 않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이 대체 왜 대화보다 투쟁을 선택하는지, 왜 일해서 돈을 벌기보다 자꾸만 파업을 벌이며 손해를 보는지, 그냥 다른 직장 알아보면 될 텐데 왜 그렇게 고집스럽게 수십 년간 '복직투쟁'에 매달리는지. 그들이 그럴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어떤 감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끝까지 모른다. 

<그림자들의 섬>이 보여주는 30년의 감정들

이런 사회에서 노동조합 운동을 하는 노동자들의 어떤 감정을 이해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그들의 이야기를 직접 듣는 것이다. 책을 읽거나, 인터뷰 기사를 읽거나, 영화를 보는 것이다. 누군가의 이름과 얼굴과 목소리를 알고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의 입장을 이해하는 공감의 범위가 넓어진다.

그것 역시 감정의 효과다. 무정형의 추상화된 어떤 낯선 타자가 아니라 이름과 얼굴이 있고 목소리를 알고 있는 특정한 누군가를 마주한 '기억'이 만들어낸 '감정'.

<그림자들의 섬>(2013)이 바로 그런 다큐멘터리 영화다.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30년사를 다뤘다. 이야기는 노동조합이 어용이었던 시절부터 시작된다. 질 떨어지는 도시락을 거부하는 투쟁을 조직해 회사가 식당을 만들도록 한 '도시락 거부 투쟁'부터 전환의 단초가 마련되고, 1987년 7‧8‧9월 노동자 대투쟁을 거치며 조합원 직접 선거로 민주노조 전환을 완성한다.

이어 박창수‧김주익‧곽재규 세 명의 열사에 대한 회상, 노동조합의 조직력이 가장 강했던 시기에 비정규직을 외면했다는 뼈아픈 반성, 정리해고와 희망버스 운동, 복수노조의 탄생과 최강서 열사까지, 끊임없이 투쟁하고 사람이 죽고 실패하거나 성공하고 반목하는 이야기가 반복된다.

그렇게 30년이다. <그림자들의 섬>은 이 30년에 걸친 이야기를 한진중공업 노동자들(김진숙‧윤국성‧박성호‧박희찬 등)의 목소리로 풀어낸다. 그들이 가진 '기억'이란 이런 것들이다. 그들은 어용노조를 민주노조로 바꿔내 인간다운 공장을 만들어냈다. 그럼에도 여전히 공장에서의 일은 그 자체로 얼마나 위험한지, 하루가 멀다하고 산재로 죽는 사람들을 목격해 왔다.

그들은 1991년 박창수, 2003년 김주익‧곽재규, 2012년 최강서까지 한 사람의 의문사(박창수)와 세 사람의 자살을 목격했다. 그들은 연대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무사안일주의가 어떤 결과로 돌아오는지, 노동조합의 힘이 약할 때 회사가 얼마나 쉽게 말을 뒤집을 수 있는지를 수십 년간 경험해 왔다.

그들의 '감정'은 바로 이러한 30년간의 기억들 속에서 형성된 것이다. 쌓이기만 하고 제대로 해소되어 본 적은 없는 감정들이다. 이러한 감정들이 만들어내는 복잡미묘한 장면들이 이 다큐멘터리에는 자주 나온다.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기억을 공유해야만 이해할 수 있는 장면들이다. 

'또 한 명 깨졌네', 그 말에 담긴 감정

그들은 어째서 그렇게 노동조합을 지키는 일에 매달리는가. 1986년 노동조합 대의원에 출마해 당선됐다가 해고된 뒤 지금까지 복직하지 못한 김진숙씨가 이런 말을 한다. "술 먹으면 세상을 뒤집을 것처럼 떠들면서도 그 다음날 출근하면 그렇게 순한 양이 될 수가 없는 사람들. 그 아저씨들이 변하는 것을 봤잖아요."

어용노조 시절에는 순한 양처럼 다니며 소모품 취급을 당했지만, 민주노조 건설과 함께 투사가 되어 숱한 권리를 쟁취해온 노동자들은 '민주노조'의 귀중함을 DNA에 새겼다. 김진숙씨 역시 그 노동자들이 변하는 과정을 함께했기에, 숱한 당근과 채찍에도 노동조합 깃발을 버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어째서 현장에서 떨어져 죽은 사람을 내려다보면서 "또 한 명 깨졌네…" 하고 비인간적으로 중얼거리는가. 그러지 않으면 도무지 그다음 날의 업무를 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저 사람의 죽음을 자신의 일처럼 슬퍼하면, 자신도 당할 수 있는 일이라고 여기면, 저 사람이 떨어진 그곳으로 누가 다시 올라갈 수 있겠냐는 얘기다. 

김주익씨는 어째서 타워크레인에 홀로 올라갔고, 또 거기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나. 그의 죽음을 알게 된 곽재규씨는 왜 스스로 몸을 던졌나. 시간이 한참 흐른 뒤, 김진숙씨는 왜 김주익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그 타워크레인에 올라갔나. 왜 그는 "129일(김주익씨가 타워크레인에 머문 시간)만 넘기자"고 생각했나.

최강서씨는 왜 박근혜 후보의 당선 직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나. 복수노조(한진중공업 노동조합)가 설립되고 민주노조(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 조합원이 대거 이탈하는 상황을 지켜보면서도 왜 노동자들은 그들을 원망하면 안 된다고 말하는가.

<그림자들의 섬>은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30년사를 그들이 직접 구술하게 함으로써 그들에게 이름과 얼굴, 그리고 목소리를 부여한다. 그들은 더 이상 낯선 타자가 아니게 되고, 우리는 그들의 감정을 비로소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언뜻 비합리적인 것처럼 보였던 그들의 말과 행동에 모두 맥락이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 노동자가 복직투쟁에 나서는 이유

그리고 여기, 새로운 싸움을 준비하는 60세 여성이 있다.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용접공. 수많은 남성이 민주노조 하기를 두려워하던 1986년, 겁도 없이 스물다섯의 나이로 노동조합 대의원에 출마하고 심지어 당선된 노동자. 바로 그 때문에 해고된 뒤로도 35년을 끊임없이 싸워온 운동가.

47미터 높이의 타워크레인에 올라가 309일을 농성해 정리해고를 철회시킨 사람. 고공농성 하는 친구를 위해 항암 투병 중인 몸으로 부산에서 대구까지 걸어간 동지, 김진숙. 해고되지 않았다면 올해로 정년인 나이지만 그는 6월 23일 '복직투쟁'을 선언했다.

누군가는 물을 것이다. "왜 굳이?" 그의 싸움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욕망을 투사한 말로 김진숙씨를 조롱하지만, 이제 우리는 안다. 그가 한진중공업으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 '돈' 때문은 아닐 것임을. 그의 복직은 35년 전 민주노조를 건설하려던 그의 투쟁이 해고사유가 될 수 없음을 회사로부터 확인받겠다는 것이며, 다시 말해 그의 삶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하겠다는 것이다.

또한 비록 '지연된 정의'일지라도, 부당하게 해고당한 사람은 반드시 직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수많은 해고노동자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의지다. 그것이 항암 투병하는 몸을 이끌고 기어이 싸움에 나서는 이유임을 우리는 이제 안다. 

동료 노동자들은 그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다. "이번 복직 투쟁은 시대를 개척해 온 한 인간에 대한 예의이며 동지에 대한 의리를 지키는 투쟁입니다."(김재하 민주노총 부산본부장) 그리고 무엇보다 김진숙씨 본인의 말이, 이것이 지난 35년의 맥락 위에 있는 투쟁임을 분명히 한다. 우리는 그의 말에 서린 감정을 이해해야만 하고,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35년 동안 단 한 번도 포기하지 않았던 복직의 꿈. 그 꿈을 이룰 마지막 시간 앞에 섰습니다. 나는 다시 전선으로 갑니다. 내가 돌아갈 곳. 박창수 위원장이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조합원들의 곁으로 가기 위해. 김주익 지회장이 그토록 내려오고 싶어 했던 현장으로 가기 위해."

 

[문화로 읽는 노동] 자본주의 발전 시기 여성노동의 면면을 드러내다: 영화 「영자의 전성시대」/ 2020.06

 

[문화로 읽는 노동] 

 

 

자본주의 발전 시기 여성노동의 면면을 드러내다: 영화 「영자의 전성시대」

 

 

김대호 / 회원 

 

30~40대의 경우 제목은 들어봤지만 못 본 사람들이 많을 것이고, 20대의 경우 제목도 들어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혹여 제목을 들어본 사람은 1990년대 SBS에서 방송했던 예능 프로그램의 한 코너에서 개그맨 이영자와 홍진경이 버스 안내양으로 나와 그 시절 잘나간다는 연예인들을 버스 승객(게스트)으로 맞아 웃음을 주는 프로그램으로 알고 있는데, 이 프로그램의 기원은 소설이 원작인 영화 <영자의 전성시대>이다.


영자의 수난시대
      

영화 <영자의 전성시대>에서는 그 시대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청춘남녀가 주인공이다. 동생들의 학비와 가족의 생활비를 벌기 위해 시골에서 상경하여 청계천 철공소 사장의 집에서 가사도우미로 일을 하는 영자(배우 염복순)와 청계천 철공소에서 견습공으로 일을 시작한 창수(배우 송재호)가 어떻게 만났는지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두 사람은 창수가 철공소 사장의 심부름으로 사장의 부인에게 돈 봉투를 전달하기 위해 집에 들르게 됐다가, 거기서 가사도우미로 일하는 영자를 처음 만나면서 사랑이 시작된다.
      
제목은 <영자의 전성시대>지만, 첫 장면을 제외하고 영화는 끝날 때까지 제목과는 반대로 '영자의 수난시대'가 시작된다. 교제를 시작하자마자 창수는 군에 입대하고, 홀로 남은 영자는 철공소 사장의 아들에게 성폭행을 당하지만, 오히려 영자는 사장 부인이 준 얇은 돈 봉투를 받고 쫓겨난다.

그 뒤로 영자는 여인숙에서 살면서 봉제공장에서 힘들게 일을 하는데, 적은 월급으로는 생활비가 감당이 되지 않아 룸메이트 언니의 추천으로 술집에서 접대 일을 시작한다. 접대 일 역시 쉽게 적응되지 않아 당시 '버스 안내양'으로 불렀던 버스 차장 일을 시작하지만, 많은 승객을 태운 버스 출입문에 매달린 채로 달리다가 떨어져 오른팔이 잘리는 산재사고를 당한다.
   
사고성 재해라 산재승인 절차가 간단했는지 산재보상금 30만 원을 받는데, 미장원을 차리자는 룸메이트 언니의 이야기를 뿌리치고 동생들의 학비와 가족의 생활비로 30만 원 전액을 엄마에게 보낸다. 더는 희망이 없다고 느끼면서 자살을 시도하다가 마지막으로 영자의 눈에 들어온 것이 성매매였고, 오른쪽 팔이 없는 상태에서 다른 일을 할 수도 없어 성매매 여성으로 살아가게 된다.

군 복무를 하던 중 영자와 연락이 끊긴 상태로 제대를 한 창수는 목욕탕 보일러실을 거처로 삼아 목욕탕 세신사로 일을 하는데, 영자가 성매매한다는 소식을 듣고 영자를 찾아간다. 양복점을 차리는 게 꿈이었던 창수는 목욕탕에서 일하면서 틈틈이 영자를 도와주게 되고, 영자의 몸에 꼭 맞는 의수까지 만들어준다.

성매매 일을 힘들어하던 영자를 설득해 일을 그만두게 하고 목욕탕 보일러실에서 같이 살아가다가 꼰대 목욕탕 보일러공(배우 최불암)의 간섭에 낙심하여 영자는 다시 창수 곁을 떠난다.

몇 년이 흘러 창수는 양복점이 아닌 세탁소를 운영하면서 살다가 영자를 봤다는 친구 말에 영자를 찾아가는데, 영자는 어느 도시 변두리에서 불편한 다리로 오토바이로 짐을 나르던 남편(배우 이순재)과 함께 아이를 키우면서 행복하게 살고 있었고, 창수는 그런 모습을 보고 영자를 다시 떠난다.

여기까지가 <영자의 전성시대>의 줄거리다. 영화의 결말은 영자의 남편과 전 남친이었던 창수가 넓은 도로에서 같이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는 희망적인 장면이다. 하지만 원작 소설에서는 영자가 성매매했던 곳에서 화재가 발생하고, 시체로 발견되는 영자를 보면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고 한다. 원작 소설은 그 시절 배우지 못했던 여성 노동자의 가장 끔찍한 결말을 보여주고 있다.
        

영화 < 영자의 전성시대 > 포스터

<영자의 전성시대>는 1975년 개봉 당시 서울에서만 36만 명이 관람하였던 최고의 흥행영화였다. 1970년대는 우리나라가 본격적으로 산업화를 진행하던 시기로 지방의 많은 젊은이가 서울로 상경하여 노동자로 살아가는데, 자본주의적 모순 역시 급격하게 나타났던 시기이다. 특히 일할 기회가 상대적으로 많았던 남성 노동자인 창수에 비해 여성이었던 영자는 가사도우미, 봉제공장 노동자, 버스 차장 외에 더 이상의 기회가 없었다.

이러한 여성 노동자들에 대한 사회 폭력이, 그리고 남성 노동자들의 폭력이 영자의 삶을 어떻게 나락으로 떨어지게 만들고 있었는지 영화는 리얼하게 보여준다. 45년 전의 영화이고, 시대가 많이 변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여성 노동자들에 대한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폭력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영화다.

<영자의 전성시대>는 영자와 창수의 이야기가 빠르게 전개되기 때문에 지루하지 않다. 노동보건을 전공으로 하는 필자로서는 그 당시 철공소의 작업환경과 창수가 살았던 목욕탕 보일러실의 노동환경을 볼 수 있는 것이 흥미로웠고, 아직까지 현역으로 활동하는 배우 최불암과 이순재의 40대 모습을 볼 수 있는 것도 쏠쏠한 재미다.

물론 몇 가지 불편한 장면들도 있다. 창수가 영자를 처음 봤을 때 폭력적으로 들이대는 장면, 영자에게 꼰대처럼 훈계하는 장면, 성매매를 하던 영자를 때리는 장면, 성폭행 가해자인 철공소 사장과 영자가 성폭행 사건 이후 교제하는 장면 등은 꽤 불편하다.

하지만 <영자의 전성시대>는 자본주의 발전 단계에서 여성 노동자가 어떻게 희생되는지 그 과정을 리얼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여성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 이주 노동자 등 취약 노동자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이 시대에 다시 볼 가치가 있는 영화이다.

특히 소설 <영자의 전성시대> 결말은 주인공 딸의 비극적인 결말로 끝을 맺는 박경리의 소설인 <김약국의 딸들> 못지않게 리얼하다는 점에서 명작의 반열에 올릴 수 있는 작품이 아닐까? <영자의 전성시대>는 한국영상자료원 유튜브 채널에서 무료로 공개하고 있다.

[문화로 읽는 노동] 상공인들의 노동을 찾아서 : 청계천 사람들의 노동을 기록한 작가들의 사진 / 2020.05

상공인들의 노동을 찾아서 : 청계천 사람들의 노동을 기록한 작가들의 사진

최혁규 문화사회연구소

 

노동자라고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우리는 노동자를 어떻게 상상하는가? 지금까지 우리 사회는 노동자를 어떤 방식으로 재현해왔는가? 노동자를 기록한 대부분의 사진은 노동 현장을 포착하거나 노동자들이 연대하여 투쟁하고 있는 모습을 담았다. 전자든 후자든 포토제닉한 순간을 담아내기 위해 노동자의 손과 표정 그리고 땀을 사진적 표현의 중심에 놓곤 한다. 이를 통해 투박하고 강인한 노동자의 모습을 담아내면서 일종의 숭고미를 그려낸다. 이는 비단 노동자라는 대상을 다룰 때만이 아니라, 노동이라는 행위를 사진 이미지로 기록해 보여주고자 할 때 흔히 취하게 되는 전략이다.
 

▲   그림 1. 『사진과 함께 보는 노동자역사 알기』(노동자역사 한내, 2015, 한내), 『연장전: 우리 시대 노동의 풍경』(노순택·박점규, 2017, 한겨레출판), 『어제와 오늘 2』(20세기민중생활사연구단, 2007, 눈빛). ⓒ 알라딘

 


노동자에 대한 지배적인 재현과 상상

노동자의 모습을 담은 사진들을 르포르타주의 목적으로 찍은 사진부터 예술 작품으로서 촬영된 사진까지, 일상적인 삶을 포착한 사진부터 투쟁의 모습을 담은 사진까지 다양하다. 대표적으로는 '노동자역사 한내'에서 출간한 <사진과 함께 보는 노동자역사 알기>에 수록된 사진들이 있다. 이 사진집은 노동자들의 투쟁을 기록한 사진들을 집대성한 자료로써, 노동운동에 참여한 노동자들의 모습을 통시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노순택이나 정택용 같은 작가들의 사진은 노동자들의 일상과 노동자들의 투쟁 현장에 밀착해 예외적인 일상 속에서 발생하는 사건과 그들의 희비를 포착한다. 또한 20세기민중생활사연구단과 눈빛출판사가 출간한 사진집은 일반적인 민중들의 생활을 담았다.

그러나 이러한 이미지들로 노동의 풍경을 살펴보기에 충분하지 않다. 자본주의적 생산은 공장 자동화를 도입하면서 다품종 소량생산을 지향하는 포스트포드주의로 전환되었고, 노동력에 이어 인간의 생각과 감정도 교환될 수 있는 상품으로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노동은 육체노동과 지적노동 그리고 감정노동 등 다양한 방식으로 세분되었고, 노동을 구획하는 시공간적 경계도 유동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면, 노동자에 대한 상상과 재현은 기존의 공장 노동자의 형상에서 그 이상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렇기에 지금의 노동 현실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는 언어를 발명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처한 상황을 제대로 포착할 수 있는 이미지들을 기록하거나 우리가 놓쳤던 노동의 역사적 이미지를 발견할 필요가 있다.
    

▲  그림 2. 『다시 보는 청계천 1965-1968』(구와바라 시세이, 2017, 청계천박물관), 『노무라 리포트: 청계천변 판자촌 사람들 1973-1976』(노무라 모토유키, 2013, 눈빛), 『청계천 사람들: 삶의 투쟁의 공간으로서 청계천』(최인기, 2017, 리슨투더시티). ⓒ 알라딘

 

 
어디에도 있지만 동시에 어디에도 없는 소상공인의 노동

소상공인 집단의 계급적 위치가 모호하기 때문일까? 소상공인 혹은 소상공업 노동은 제대로 다뤄진 적이 없는 것 같다. 대개 소상공인은 혼자서 일하거나 한두 명의 직원들을 둔 채 일하고, 한 사업체의 경영자이지만 동시에 노동자로서 쉬는 날 없이 일한다. 그리고 업체에 고용된 임노동자들은 때로는 사장 이상으로 업체 경영에 신경 써야 하는 위치에 처하기도 한다. 일종의 소규모 업체가 가진 운명공동체적 성격 때문이다. 이러한 소상공인들은 우리의 일상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식당과 카페 같은 곳에서부터 시장의 상점이나 공방과 공업소 같은 곳들까지 다양하다.

하지만 정부의 경제정책이나 주요 담론에서 소상공인들의 문제는 중요한 쟁점이 되지 않는다. 물론 정부는 필요시 소상공인들을 항상 국가의 중요한 경제적 주체로 호명하지만, 정작 이들이 처한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해줄 정책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다른 한편으로 노동자 운동은 소상공인의 애매한 계급적 위치 때문인지, 아니면 노동조합법 바깥에 있기 때문인지, 이들을 노동운동의 주체 혹은 노동운동에 연대하는 주체로 인식하지 않는다.

임금 문제만을 두고 본다면, 소상공업 사장과 노동자는 대립각을 세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한국 경제가 대기업 중심으로 구조화되어 있다는 점에서 소상공인들은 착취와 수탈에 노출되어 있다. 그런데도 우리가 노동을 다룰 때 이들의 노동은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한 점에서 보자면, 이들은 노동문제에 있어서 어디에도 있지만 동시에 어디에도 없는 자들이다.



청계천 일대 상공업, 그곳에서 포착한 삶으로서의 노동
 

이들의 모습과 역사를 볼 수 있는 대표적인 공간은 서울의 주요 상공업 지역인 청계천 일대이다. 청계천 일대는 서울 도심 한복판에 위치한 중심업무지구이면서 역사적으로 오래된 상공업 지역이다. 이 지역의 근현대적 형성은 전후 도시 빈민들의 역사와 함께한다. 6.25 전쟁 이후 피난민들이 청계천변에 판자촌을 형성해 살기 시작했고, 이들은 넝마 줍는 일을 하거나 매각된 식민지기 물품이나 미군 부대에서 나온 군수품 등을 변형하거나 분해해 파는 일로 생계를 유지했다. 이들에게 노동은 생존과 직결된 삶 그 자체였다. 1960년대 중후반부터 시작된 판자촌 강제 철거에도 불구하고, 노점에서 시작된 상공업 행위는 점차 주변 주거 지역으로 확산되어 지금과 같은 광범위한 상공업 상권을 만들었다. 이 상권은 청계천을 따라 신설동과 황학동 일대에서 동대문을 지나 을지로 입구까지 길게 이어진다.
   
일찍이 청계천 일대의 도시빈민과 상공인에 주목한 사람들이 있었고, 이들은 청계천 주변에서 사는 사람들의 삶에 관심을 가졌다. 1960년대 중순의 청계천 일대의 모습에 주목했던 일본의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구와바라 시세이, 1970년대부터 청계천 일대에서 사역하면서 도시 빈민들의 삶을 기록한 목사 노무라 모토유키, 그리고 그와 함께했던 정치인이자 빈민운동가였던 의원 고 제정구, 1980년대 말부터 청계천을 따라 걸으며 이 일대의 상공인들을 기록한 사진작가 이한구1), 청계천 일대 상공인들의 노동과 투쟁을 기록한 빈민운동가이자 사진작가인 최인기2) 등이 있다.

어떤 이는 청계천 도시 빈민들의 삶을 개선하고자 노력했고, 어떤 이는 개발이라는 명목하에 강제 퇴거의 위기에 놓인 청계천 상공인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활동을 하기도 했다. 이렇게 담아낸 사진은 그 누구도 기록하지 않았던 청계천 사람들의 노동을 찍은 역사적 증거물이자, 도시빈민과 상공인의 삶을 증명하는 투쟁의 무기였다. 이는 현재 청계천·을지로 일대 재개발 반대 투쟁에서도 마찬가지다.



과거의 기록이자 다가올 미래를 향해 있는 이미지

노동의 형태는 매우 다양하지만, 우리가 노동을 기록하고 표현하고 상상하는 방식은 꽤 단순하다. 청계천 사람들을 찍은 사진들은 우리가 주목하지 않았던 노동의 모습을 담고 있다. 이 사진들은 그동안 우리가 노동을 이야기할 때 잘 떠올리지 않았던 소상공인들의 노동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계기이다. 또한 플랫폼 노동자, 긱 노동자(gig worker) 등 노동의 형태가 점차 파면화되고 다양해지면서 노동자를 상상하는 다양한 방식을 고안해내야 한다. 그러한 점에서 청계천 사람들의 노동을 기록한 작가들의 사진은 과거의 기록이지만 다가올 미래를 향해 있는 이미지이다. 어쩌면 이 사진들은 청계천 사람들의 현실을 기록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 찍혔는지도 모른다.

참고자료.
1) 이한구의 청계천, PROLOGUE
http://www.artkoreatv.com/news/articleView.html?idxno=12884

2) 청계천·을지로 개발에 저항하는 사람들(최인기)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_w.aspx?CNTN_CD=A0002597402

[문화로 읽는 노동]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기 – SBS 드라마 <스토브리그> / 2020.04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기 SBS 드라마 <스토브리그>

 

채은 선전위원

 

스토브리그는 프로야구에서 한 시즌이 끝난 뒤 다음 시즌이 시작되기 전까지 계약 갱신, 트레이드 등이 이루어지는 시기를 가리킨다. 난롯가에 둘러앉아 여러 가지 정보와 소문이 오가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명쾌하고 정확한 몸값

필자는 꽤나 야구광이다. 한동안은 야구 경기 일정에 맞춰 삶을 계획하기도 했을 정도였고, 특히 우승팀을 가리는 진승부가 벌어지는 일명 가을야구 시즌에는 거의 야구에만 빠져있을 정도였다. 야구는 모든 것을 숫자로 표현하는데, 예를 들면, 타율, 타석, 타수, 득점,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볼넷 등을 통해 각 선수의 능력치를 숫자로 표현하고 이는 명쾌하고, 정확하고, 객관적이다. 이러한 야구의 특징은 다음과 같은 대사에서도 드러난다.

“90만 달러까지 된다고 했잖아요. 근데 50만 달러만 써서 허접한 애를 데리고 온 거예요?”

그래도 메이저리그에서 뛰던 애라서요.”

그러게 잘난 놈이면 50만 달러에 왔겠어요? 자기 몸값이 자기 능력이잖아요.”

대화 속 야구선수는 몸값50만 달러밖에 안 되는 허접한 선수. 부상도 있고, 소위 잘 나갈 수 있는 기간이 지난 상태에 있는 그냥 그런 선수. 만년 꼴찌팀 드림즈는 50만 달러에 선수를 기용하고 비용 절감의 이득을 얻는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생긴 잉여비용은 새로운 선수를 사는 데 사용된다. 적은 금액에 굉장히 효과적인 쇼핑을 마친 셈인데 마음 한편에서 불편함이 느껴진다.

어디 야구팀뿐이겠는가? 우리가 몸 담고 있는 일터도 마찬가지이다. 할당된 업무에 대한 평가는 매년 이루어진다. 기업들은 S, A, B, C, D의 등급으로 개인과 팀의 성과를 정량화하고 이에 따라 그 해의 성과급과 다음 해의 연봉, 즉 몸값이 정해진다. 최고의 등급을 받으려면 단순히 일만 잘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남들보다 앞서 나가야 한다. 따라서 경쟁이 시작되고, 경쟁은 과한 노동을 가져와 연장근로, 야간근로는 늘 있는 일이 된다. 게다가 옆 동료는 더이상 동료가 아니고 내가 이겨야 할 대상이 된다. 최하위 등급은 반드시 누군가가 채울 것이고, 나는 최하위 등급을 받아서는 안 되니까. 능력 있는 자는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고, 능력 없는 자는 손가락질의 대상이 된다. 경쟁으로 인해 켜켜이 쌓여있는 스트레스와 긴장감은 타인에 대한 몰이해와 배제의 도화선이 되고, 이는 일터괴롭힘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명쾌하고 정확한 숫자로 인한 서열화는 인간의 본질과 가치를 몰살시키는 도구로 작용한다. 어떤 사람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짜리 사람인지가 우선되는 것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는 받는 연봉이 깎이게 되는데, 당신의 지금 성능으론 그 가격을 주지 못하니 좀 더 일하고 싶으면 떨어진 성능만큼 하향된 가격대를 받아들이기를 권유받기도 한다. 여기에 인격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일터를 구성하고 있는 기계이거나 인적 자원’, 물건만이 남는다.

우린 가끔 나는 어떠한 것을 좋아하고, 어떤 성격을 가졌으며, 어떤 신념을 가지고 살아! 난 이런 사람이야라고 이야기하지만, ‘나는 얼마짜리야라고 이야기를 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는 각자의 본질에 관심이 없다. 대학 입학 성적, 학점, 시험 점수 등 온갖 테스트를 통한 수치, 월급, 연봉 등 각자가 얻어 낸 숫자에만 신경을 쓸 뿐이다. 그렇기에 진짜 가치를 알아봐 주는 작은 행동이 필요하다. 비록 그것이 정치적 올바름이 강한 것일지라도 의식적 노력이 필요하다. 사회 속에서 우리가 숫자로 남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몰인격을 인정하는 애석한 일이기 때문이다.

진짜 가치를 알아준다는 것은 뭘까?

이와 관련해, 드라마 속 한 장면 중, 포수 서영주에 대한 서사는 꽤 인상적이다. 야구 포지션 중, 포수는 가장 중요하지만 투수의 빛에 가려진 안타까운 자리이다. 사실 포수는 야구 경기 전체를 읽어내는 포지션이기에 그라운드 안의 감독이라고도 불리는데 말이다.

극 중 서영주는 만년 꼴찌팀 드림즈의 포수다. 현재 야구에 대한 열정보다는, 개인의 능력치를 높이는 것과 몸값을 높이는 것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는다. 모든 선수의 연봉 삭감의 위기 상황에서도 본인의 입장만을 고수한다. 그도 그럴 것이 포수 서영주는 온갖 고질병에 시달린다. 포수는 경기 내내 쪼그려 앉는 자세를 취해야한다. 투수가 던지는 공의 방향에 쉽게 따라가려면, 혹은 도루하는 선수들을 즉각 방어하려면, 순간적인 자세 변환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로 인해 땅바닥에 편하게 엉덩이를 대고 앉지 못하고, 엉덩이를 공중에 띄워 앉은 것도 아니고 서 있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자세여야만 한다. 이를 보여주듯 극 중 포수 서영주의 무릎은 물로 가득 채워져 있고(그래서 늘 물을 빼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치질 등 항문 관련 질환 등으로 고생하고 있으며, 허리 또한 망가진 상태이다. 이렇게 몸이 망가졌으니 그만큼 보상받아야겠다는 독한 맘으로 연봉 협상 과정에서 거칠게 행동한다. 그렇게 고집을 꺾지 않고 사납기만 하던 포수 서영주는 단장 백승수의 한 마디에 이 마음이 누그러진다.

 

다치지 말고 뛰세요.”

그라운드에서 자신의 포지션을 지키는 단순한 말이나 운동하는 기계가 아닌, 사람으로서의 대접을 받았다고 느낀 것일까. “지금 저 걱정해 주시냐고요.”라는 포수 서영주의 대사는 그가 진정 원했던 대접이 무엇인지를 말해준다. 우승을 위해 몸을 망가뜨려야만 하는 야구선수에게 당신의 건강이 진심으로 걱정된다는 말 한마디, 나는 당신이 다치지 않고 오래 선수 생활을 하기 바란다는 내심의 의사가 닿는 순간 그 선수는 인적 자원이 아니라 인간이 된 것이다.

일터에서든 어느 곳에서든 숫자에 따라 매겨지는 거짓된 가치를 벗어나고 싶은 것. 그건 알고 보면 우리 모두의 바람이 아닌가 생각된다. 단순히 조직 내 부품이 되어, 그리고 항상 평가의 대상이 되어, 앞으로 계속 사용될지 혹은 폐기되어 버려질지 모르는 처지에서 벗어나, ‘진정한 인격체가 되는 그 순간. 우리는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마주하려는 것. 사실, 그게 서영주와 우리 모두의 바람이 아닐까.

[문화로 읽는 노동] 플랫폼 속 밀레니얼 리얼리즘 / 2020.03

[문화로 읽는 노동] 

 

 

플랫폼 속 밀레니얼 리얼리즘-장류진 소설집 <일의 기쁨과 슬픔> 

 

 

 

김상민 / 문화사회연구소 소장 

 

 

 

'일의 기쁨과 슬픔이라… 일에는 당연하게도 슬픔도 기쁨도 있는 법이지' 하면서 책을 넘기다 보면 어느새 작가가 만들어 놓은 가공의 이야기와 실재하는 사물들 사이에 걸쳐진 묘한 덫에 걸려들어 소설의 기쁨과 슬픔을 맛보고 있음을 깨닫는다.

아니, 다 읽고 책을 접을 때까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그렇다고 환상적 리얼리즘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환상적이라기에는 너무나 현실적이고, 리얼리즘이지만 웃음을 잃지 않는다. 이 소설(집)을 밀레니얼 세대, 페미니즘 리부트, 소확행, 워라밸, 플랫폼의 시대에 길어 올려진 (이렇게 이름 붙일 수 있다면) '밀레니얼 리얼리즘'의 전형이라고 한다면, 작가가 슬퍼할까?

 



밀레니얼 세대의 노동 이야기

'우리 동네 중고 마켓'의 준말인 '우동마켓'이라는 중고거래 앱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이 스타트업에서 "사실상 막내"인 나는 서비스 기획자다. 앱 개발자들이 서비스를 런칭하거나 수정하면 제대로 작동하는지, 사용상 문제는 없는지를 테스트하고 피드백하는 역할도 한다.

나는 앱 사용자들의 편의를 위해 어떤 기능을 개선해야 하는지, 어떤 과정에서 버그가 생기는지에 무척 관심이 많다. 아니나 다를까 소규모 스타트업에서 유행하는 '스크럼 시간'에 나는 '거북이알'이라는 특이한 우동마켓 사용자를 만나서 조사해보라는 대표의 지시를 받는다. '거북이알'은 "하루에 거의 백 개씩 글을 올리고 ... 가격은 늘 인터넷 최저가보다 조금씩 싸게 책정"하는 데다가 "파는 물건에도 일관성이 없"어서 혹시 어뷰저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사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결국 우동마켓 직원임을 숨기고 의심스러운 사용자 '거북이알'과 직거래함으로써 그의 실체를 알게 된다. 우동마켓은 플랫폼이다. 플랫폼은 사용자(소비자)와 생산자(판매자), 나아가 광고주까지 포함하여 모두가 하나의 앱 안에서 나름의 독자적 생태계를 유지하고 확장할 수 있어야 성립되는 기술적, 경제적, 문화적 토대다.

그런데 여기에 앱 개발자, 즉 마치 사용자나 생산자와는 달리 객관적 관점을 가져야 할 플랫폼의 직원이 상품을 매개로 생산자와 접촉한다. 그야말로 이 플랫폼은 플랫폼 개발자로 하여금 플랫폼을 통해 (혹은 플랫폼의 방식으로) 노동하게 만든다. 그런데 그 만남(혹은 노동)을 통해 '거북이알'이 들려준 이야기는 소설 밖에서 듣고 있던 이의 무릎을 털썩 꺾이게 만든다.

이웃 건물에 입주해 있는 카드사의 사원증을 걸고 나타난 '거북이알'과 물건을 거래한 뒤 우연히 점심을 같이 먹게 된 나는 "포인트로 사는 거니까 부담 갖지 말아요. 나 포인트 엄청 많아요. 아마 우리나라에서 제일 많을걸?"이라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듣는다.

이 포인트라는 것은 말하자면 신용카드로 물건을 구매하면 구매액수에 따라 부여하는 숫자인데, 소비자가 이것을 (아주 많이) 모아 사은품을 받거나 현금화할 수 있는 가상의 화폐(아직 블록체인을 떠올리진 말자) 비슷한 것이다. 클래식 마니아이자 인스타그램 셀럽인 회장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죄로 월급을 카드 포인트로 받게 된 슬픈 사연.

노동의 대가가 화폐가 아니라 소비의 보상으로 주어지는 포인트라니. 물론 포인트도 화폐의 기능을 하기는 하지만, "회사 생활 십오 년 하면서 한 번도 운 적이 없었"던 그녀는 그 포인트를 보고는 결국 눈물을 흘리고 만다. 이유는 "포인트가 너무 많아서." 마치 수십만 SNS 팔로워를 거느린 현실의 그 유명한 회장님인 것만 같은 그분은 자신이 '짠~' 하며 SNS에 올렸어야 할 깜짝 뉴스를 '거북이알'이 그만 미리 누설하는 바람에 김이샜고 찌질하게 월급-포인트 갑질로 응대한 것이다.

인스타그램에서 카드 적립 포인트로 이어지는, 소셜미디어 플랫폼과 가상 화폐 사이의 매끄러운 전환을 그려내는 소설적 묘사는 아마도 우리 시대의 노동과 자본의 본질을 보여주는 모범적인 사례라고 칭하고 싶다. 소셜미디어를 통한 회장님의 사회적 자본의 축적과 개인적 유명세를 위한 허세가 어떻게 한 노동자 개인의 노동과 소비의 대가인 포인트로 귀결되는지는 깊이 연구해볼 가치가 있을 정도다.

일은 일일 뿐…

이 심각한 사태는 '거북이알' 특유의 긍정적인마인드와 밀레니얼다운 생존 방식으로 극복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는 "포인트를 돈으로 전환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중고거래를 선택한다. 포인트를 써서 "잘 팔릴 법한 물건들"을 직원 할인가에 "근무시간에" 구매해 우동마켓에 올리고, "점심시간이나 외근 나갈 때 직거래"하면서 "나름대로 손해를 최소화"하는 방법을 터득한다.

자신의 개인 시간은 쓰지 않으면서도 근무시간에 틈틈이 (어쩔 수 없는) 제2의 밥벌이를 해나가는 그녀의 지극히 생존주의적 워라밸은 존경스럽지 않을 수 없다. 포인트로 월급을 주는 회사를 위해 어떻게 나의 소중한 시간을 1분이라도 더 쓸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이들이 자기 일을 증오하거나 두려워하는 것은 아니다. 일은 일일 뿐이다. 거의 유일하게 실명으로 등장하는 회사인 '엔씨소프트' 사옥을 바라보며, 두 사람은 이런 대화를 나눈다.

"저희 대표나 이사는 매일매일 그런 생각을 하겠죠? 어떻게 돈 끌어오고, 어떻게 돈 벌고, 어떻게 3퍼센트의 성공한 스타트업이 될지 잠들기 직전까지 고민하느라 걱정이 많을 거예요. 전 퇴근하고 나면 회사 생각을 안 하게 되더라고요."

"나도 그래요. 사무실을 나서는 순간부터는 회사 일은 머릿속에서 딱 코드 뽑아두고 아름다운 생각만 하고 아름다운 것만 봐요."

대표가 편애하는 남성 동료 개발자에게 치이고, 유명인사인 갑질 회장님에게 무시당하는 이 밀레니얼 여성 노동자들은 너무나 적절하고 우아한 자신들만의 노동윤리를 통해 거대한 시스템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균열을 만들어 낸다. 언제나 마치 자연스럽게 강요되는 퇴근 후 업무, 잔업, 야근, 특근, 회식은 임금노동자를 회사의 노예로 만들고 만다는 것을 사무치게 잘 알기라도 한 듯, 칼퇴와 퇴근 후 회사잊기를 실천하고 있다.

밀레니얼 세대의 노동관, 이해가 아닌 윤리와 실천의 문제

그런데 회사는 끈질기기 때문에 퇴근 후에도 우리를 계속해서 호출한다. 회사를 생각하고 염려하게 만든다. 그것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아름다운 생각"과 "아름다운 것"이 필요하다. 거북이라든가 "루보프 스미르노바"라든가. 반려동물에 대한 사랑이든 아티스트에 대한 덕질이든, 임금 노예가 아닌 자유로운 존재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뭔가 다른 것들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들은 거창하거나 대단할 필요가 없다. 금요일 저녁 사무실에 혼자 남아 있는데 퇴근한 줄 알았던 대표가 들어온다. 하지만 "사실 야근하려고 남아있던 것은 아니었다." 저녁 아홉 시에 시작하는 루보프 스미르노바 리사이틀 온라인 예매를 위해 회사에서 시간을 때우고 있을 뿐이었다.

기다리는 동안 "고독한 조성진" 채팅방에서 그의 카네기홀 연주사진을 업로드하고 홍콩행 항공권을 예매하면서. 조성진은 들어봤지만 루보프 스미르노바가 궁금하여 굳이 검색해보지 않기를 권한다. 누구에게나 덕질은 숨기고 싶은 것일 테니까.

다만 일의 슬픔이 있지만 기쁨 또한 있어서 우리를 살게 하고 우리 삶을 아름답게 한다는 것은 언제까지나 진리일 것이다. 밀레니얼 세대의 이해 못 할 노동관은 장류진의 소설이 그려내듯 지금의 기술적, 경제적, 문화적 상황에서 기쁨을 찾아내어야만 (그래서 생존해야) 하는 특별한 조건으로부터 온다. 따라서 그것은 이해의 문제가 아니다. 노동의 새로운 윤리와 실천의 문제다.

"사시는 동안 적게 일하시고 많이 버세요." 

 

[노동시간 읽어주는 사람] 초장시간 노동이 만연하는 방송 영역, 더욱 심각한 아동-청소년 연기자의 노동 / 2020.02

초장시간 노동이 만연하는 방송 영역, 더욱 심각한 아동-청소년 연기자의 노동

 

성상민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활동가, 문화평론가

 

"12시간 일하고 12시간 쉬자!" 독자들에게는 이 말이 무척이나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다. 하루 12시간 일하는 것도 엄연히 노동법에 위배되는 상황인데 왜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일까. 그러나 드라마 촬영을 비롯한 방송 노동에서는 12시간 쉬는 것도 무척이나 감지덕지한 상황이 오랜 시간 이어졌다.

본래 이 구호는 2005년 결성한 전국영화산업노조에서 사용하던 문구였다. 문화예술과 관련된 업계 중에서는 가장 빠르게 노조가 생긴 편이었던 영화 영역은 다른 문화 영역의 노동과 다를 바 없이 매우 열악한 노동환경에 놓여 있었다. 노동인권을 고려하지 않는 무리한 야간 촬영, 장시간 촬영도 척박한 노동조건의 일부였다. 다행히도 영화노동은 10년 이상 지속된 영화산업노조의 투쟁과 활동의 결실로 표준 근로계약서를 정착시키는 것은 물론 열악했던 노동 환경이 차근차근 개선되고 있는 상황이다. 물론 주52시간 연장 제한 준수를 위한 움직임도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이렇게 영화 노동의 상황이 변화하고 있는 것과 달리 방송 노동은 201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야 열악한 상황이 주목을 받게 되었다. 오랜 시간관행으로 정착된 '쪽대본 문화'는 방송 촬영에 충분한 여유를 들일 수 없게 만들었고, 2000년 대 이후 방송업계에서 가속화된 프로그램 제작 외주화 는 '방송 산업 전문화'와 '방송 프로그램 다양성 추구'라는 명분과 달리 전형적인 하도급 노동의 체제를 방송업에 그대로 정착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방송국이 충분한 제작비를 지급하지 않은 상황에서 외주 제작사조차도 자기들이 살기에만 바빠 방송 노동의 문제는 등한시했다. 여기에 한국의 경우, 방송을 비롯한 문화예술 영역의 노동이 전반적으로 시장 규모에 비해 제대로 된 노동자 보호 제도가 정착 되지 못한 것은 물론 노동자들의 조직화도 충분치 않다는 제반 조건의 문제까지 존재한다. 

방송국이 자신이 만드는 프로그램에 제대로 된 책임 의식을 지니지 않는 사이 방송국은 방송노동자들을 쉽게 쓰다 버리는 휴지처럼 취급하는 일이 만연했다. 근로계약서를 쓰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방송노동자들을 노동자로 인식하지 않은 사례는 무척이나 허다했다. 방송 노동에 대한 감수성이 미비한 상황에서 '쪽대본 문화'가 겹친 결과는 초장시간 노동이다.  

20년 1월 14일 화요일 오후 <아동 청소년 대충문화예술인 노동인권 개선 토론회>가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렸다. 출처: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극히 일부의 프로그램을 제외하면 대다수의 방송 프로그램은 방송 예정 시간 하루 전, 심하면 몇 시간 전까지도 촬영이 계속된다. 또한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방송국 사이의 경쟁 속에서 한국 드라마의 평균 방송 시간은 세계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길어졌다. 방송 시간은 세계에서 제일 긴데, 준비 하는 시간은 세계에서 제일 짧은 기형적인 환경 에서 여유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빡빡한 스케줄 속에서 촬영시간은 하염없이 길어졌다. 시간이 없으면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야간 촬영 장면이 있으면 최대한 밤 시간대를 활용해야 한다는 이유로. 여기에 아무리 노동시간을 길고 길게 만들어도 제동을 걸 존재나 제도도 없었다. 

제대로 된 수면이나 휴식을 취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산재 사고는 끊이지 않고 발생했다. 업무 특성상 준비 작업과 철수 작업으로 다른 직군보다 더욱 길게 일하는 세트나 소품, 분장 등의 미술 분야 팀은 출퇴근 과정에서 크고 작은 교통사고를 당하기 일쑤였다. 폭염이나 한파가 찾아와도 노동시간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2018년 SBS에서 방송한 드라마 <서른이지만 열일곱입니다>에 참여한 방송노동자 한 명이 그해 7월, 사상 유래 없던 폭염 속에서도 76시간 촬영을 하다 집에서 잠시 수면을 취하던 중 과로사로 의심되는 돌연사로 세상을 떠난 사건이 대표적이다. 

'하루 12시간 노동'은커녕 주 70시간, 주 80시간 노동이 만연한 상황 속에서 방송노동자 대다 수가 힘겨운 상황에서, 더욱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분야가 있다. 소위 '아역배우'라는 호칭으로 익숙한 아동·청소년 연기자들이다. 많은 이들이 알다시피 아동과 청소년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 으로 성숙하는 단계에 놓여있기 때문에 세심하게 접근해야 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이 상식은 최소한 방송 노동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방송 노동에 만연한 초장시간 노동환경이 그대로 아동·청소년 연기자들에게도 적용된다. 설사 등장하는 장면이 단 몇 장면에 불과 할지라도, 그 몇 장면을 찍는 시간까지 하염없이 기다리는 일이 다반사이다. 장시간 촬영, 장시간 대기가 고착화된 상황에서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하는 것은 물론 학교에 다니는 아동·청소년 연기자는 학습권을 침해받기까지 한다. 

지난 1월 14일,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를 비롯해 문화연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언론개혁시민연대 등 인권·노동·언론 영역의 단체들이 모여서 결성한 '아동청소년 대중문화예술인 노동인권 개선을 위한 팝업(Pop-Up)'이 국회 토론회에서 발표한 아동·청소년 연기자 실태조사에 의하면 이 실태는 더욱 명확해진다. 조사에 참여 한 총 103명의 아동·청소년 연기자들 중 1일 최 장 12시간 촬영을 경험한 이들은 63명으로 60%에 육박했다.

심지어 이들 중 3명은 24시간 이상 촬영을 경험한 적이 있다고 대답하여 충격을 주었다. 이러한 초장시간 노동에 아동·청소년 연기자나 보호자의 동의를 받는 경우는 무척이나 드물었다. 단 18명의 응답자만 야간 촬영를 진행할 때마다 제작사가 동의를 구했다고 답변했다. 자연스레 이는 학습권에도 영향을 미쳤다. 단 2명의 아동·청소년 연기자만이 드라마 촬영 기간 중에 결석이나 조퇴를 한 적이 없다고 대답했다. 

성인들도 제대로 쉬지 않고 일하면 피로를 느끼는 상황에서, 한창 성장기에 놓인 아동·청소년 연기자들에게 초장시간 촬영은 더더욱 큰 피해를 줄 것은 명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도 아동·청소년 연기자들의 노동환경은 여전히 열악한 환경에 그대로 놓여 있는 것이 현실이다. 여기엔 방송노동환경이 전반적으로 열악한 것이 그대로 아동·청소년 연기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문제도 크지만, 한국 사회가 아동·청소년 연기자를 바라보는 시선도 함께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어린 나이부터 연기자 활동을 하는 아동·청소년들은 일찌감치 자신의 진로를 방송 영역의 노동으로 정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아직도 방송노동자들을 위한 의무적인 노동 교육도, 강고한 힘을 지닌 방송사나 제작사에 맞서 노동자의 권리를 보호할 수 있는 제도나 단체 의 힘도 미비하다. 게다가 현장에서는 PD의 힘이 지배적으로 작용하는 상황에서 자연스레 아동·청소년 연기자 상당수는 연기 활동을 안정적으로 지속하기 위해 아무리 부당한 일을 겪어도 참는 것이 당연하게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9살 때부터 연기 활동을 시작해 어느덧 배우로는 물론 가수로도 이름을 알린 양동근이 2015년이 되어서야 드라마 PD에게 정신적인 폭력을 받은 것을 고백한 것이 대표적이다. 청소년 시기를 지나 성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렸을 때부터 심어진 침묵의 기제가 아동·청소년 연기자들에게 강력하게 작동한다는 사실이 어렴풋이 드러난 사건이었다. 

여기에 아동·청소년 인권에 대한 인식과 감수성이 낮은 환경이 함께 영향을 미친다. 아동·청소년을 동등한 존재로서 대우하고 존중하기 보다는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차별하거나 무시하는 것이 2020년 현재에도 한국에서는 만연 한 것이 현실이다. 이렇게 방송 노동의 열악한 현실은 방송 노동 현장의 억압적인 문화와 열악한 인권 감수성이 결합하며 오랜 시간 동안 문제가 있어도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아동·청소년 연기자의 초장시간 노동환경은 연기자가 되기 위한, 또는 방송 환경에서 버티기 위한 당연한 '통과의례'로 여기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그 통과의례는 과연 누구를 위한 통과 의례인가. 그저 시청률과 광고료에만 신경 쓸 뿐, 제대로 된 휴식이나 수면은 물론 학습권조차도 보장받지 못하는 무법천지의 방송노동환경은 얼마나 아동·청소년 연기자가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돕고 있는가. 방송사나 제작사의 이권만을 신경 쓰는 방송 산업에서 한국의 아동·청소년 연기자는 열악한 방송 환경과 억압적인 방송 문화, 척박한 아동·청소년 인권의 '삼중고'에 오늘도 시달리고 있다.  

[노동시간 읽어주는 사람] 내일을 위한 시간: 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 2014 / 2020.01

[노동시간 읽어주는 사람]  

 

 

내일을 위한 시간: 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 2014 

 

 

 

천주희 / 문화사회연구소 

 

 

 

병가 후 복직을 앞둔 어느 날, 회사에서 전화 한 통이 걸려온다. 사장이 직원들에게 1000유로의 보너스와 자신의 복직 중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지 투표로 결정했다는 통보였다. 투표 결과 2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보너스를 택했다.

복직도 전에 해고라니! 이 전화를 받은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Deux jours, une nuit)>은 이렇게 황당한 상황으로 시작한다. 복직을 앞둔 주인공 산드라(마리옹 꼬띠아르 분)는 갑작스러운 해고 소식에 절망한다. 동료에 의한 해고라는 말에 더 충격을 받는다. 산드라 남편은 요리사지만 네 식구 생활비를 마련하기에는 수입이 부족하다. 이대로 산드라가 일자리를 잃으면, 가족은 대출금을 갚지 못하고 다시 임대 아파트로 돌아가야 할 상황이다. 
  
망연자실한 산드라에게 친구는 전화를 걸어 아직 결정된 것이 없으니 사장에게 함께 찾아가자고 제안한다. 그렇게 사장을 만난다. 산드라가 일하던 곳은 태양열판을 만드는 제조업체로, 사장은 아시아와 경쟁이 치열해서 회사가 위기 상황이라고 한다. 그는 완고했다. 직원들이 무엇을 원하는지에 따라 결정하겠다고 했다. 단 보너스와 복직은 양립할 수 없는 것, 둘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

산드라는 친구의 도움으로 사장을 설득해서 월요일에 다시 재투표할 기회를 얻는다. 이제 주어진 시간은 주말뿐. 영화 원제처럼 '두 번의 낮과 한 번의 밤' 사이에 그녀는 16명의 동료를 만나서 설득해야 한다. 보너스 대신 자신을 선택해달라고.

보너스를 선택할 것인가? 동료의 복직을 선택할 것인가?
 

만약 당신이 산드라 직장 동료라고 가정해보자. 보너스를 선택했고, 주말에 산드라가 찾아왔다. 산드라와 무슨 이야기를 하겠는가?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이 조마조마한 이유는 동료들이 제각각 어떤 반응을 보일지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저마다 돈이 필요한 이유는 다양했다. 자녀 학비, 생활비, 가전제품 구입비 등등. 어느 한 사람 여유로운 사람이 없었다. 

동료들은 그녀에게 "네가 해고되는 건 싫지만 돈도 놓치고 싶지 않다"고 말하거나, 집에 없는 척한다거나, "너를 반대하는 게 아니라 보너스를 택한 것"뿐이라고 상처를 주기도 한다. 또 아팠기 때문에 예전처럼 일하지 못할 거라는 말도 한다. 회사는 이미 산드라 없이도 16명으로 충분한 상황이었다. 주당 3시간씩 추가 근무를 해야 하지만 그만큼 추가 수당을 받아서 좋다는 말까지 듣는다. 

물론 모두가 산드라 대신 보너스를 원하는 건 아니었다. 산드라의 복직을 선택하고 싶었지만 계약직인 상태에서 재계약을 위해서 반장의 지시에 따랐고, 남편 요구에 못 이겨 보너스를 택했다가 산드라를 지지하겠다고 마음을 돌렸다. 또 보너스를 선택한 후에 후회했다며 사과한 사람도 있었다. 

산드라에게 동료를 만나서 설득하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자신을 지지해주는 사람만 있으면 좋겠지만, 거절하는 동료를 만날 때마다 안정제를 먹지 않으면 버티기 어려웠다. 일자리를 구걸하는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불안감은 커지고, 동료를 괴롭히는 것 같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남편과 동료들은 산드라가 다른 동료를 만나 설득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격려한다.
     
이 영화의 흥미로운 점 중의 하나는 시간 설정이다. 이틀이라는 짧은 기간에 다양한 이야기를 담아내는 것도 탁월하지만, 무엇보다 '주말'이라는 휴일에 직장 동료를 만난다. 또 아직 복직하지 않은 상태, 즉 일터 현장에 완전히 포함되지도 않고 그렇다고 외부인도 아닌 상태에서 동료를 만난다. 이러한 경계적 성격의 시간성은 오히려 일터 내에서 다루지 못한 동료들의 상황과 마음을 잘 드러낸다. 일터에서 강하게 작동하는 규율에서 보다 한 발자국 벗어나 있고, 대부분의 장소가 각자의 집이라는 점에서 동료들의 삶을 엿볼 수 있다. 

영화는 내내 동료에게 보너스를 선택할 것인지, 동료를 선택할 것인지 묻는 것처럼 보이지만, 관객 또한 그 선택지에 말려들어 갈 필요는 없다. 오히려 산드라가 동료에게 자신을 선택해달라고 설득하는 과정을 바라보면서 관객은 두 가지 선택보다 더 큰 맥락을 보게 된다. 동료 사이의 관계, 그들의 역사, 그들의 가족, 생활 등. 일터를 배경으로 삼았다면 잘 드러나지 않았을 개인사들이 산드라의 방문을 통해 조명되는 것이다. 

'내일을 위한 시간'을 살아가는 힘 

드디어 월요일 아침, 재투표가 진행됐다. 결과는 찬성 8표, 반대 8표. 찬성이 과반을 넘지 못했기 때문에 산드라는 복직할 수 없었다. 하지만 사장은 주말 동안 다른 직원을 설득한 산드라의 모습을 보고 복직과 보너스 모두 제공하겠다고 한다. 단 당장 복직하는 것은 어렵고 계약직 직원이 나간 후에 복직할 수 있다고 했다. 

산드라는 복직을 간절하게 바랐지만 "남을 해고하고 복직할 수 없어요"라고 단번에 거절한다. 사장은 어차피 계약직이기 때문에 재계약을 안 하는 것뿐, 해고가 아니라고 말했지만 산드라에게 재계약을 안 하는 것이나 복직을 못 하는 것은 누군가 직장을 잃는다는 점에서 같은 것이었다. 

영화 초반에 산드라는 상황을 판단할 수 없을 정도로 기운도 없고 정서적으로 힘든 상태였다. 그럴 때 남편과 친구들은 그녀가 어떤 길로 가야 하는지 안내하고 이끌었다. 그런데 영화가 끝날 무렵 그녀는 스스로 삶을 주도하고 있었다. 사장의 제안이 다른 동료의 삶에 미칠 영향에 대해 명확하게 알고 있었고, 그런 선택을 강요한 것이 부당한 것임을 '거절'을 통해 표현했다. 
      
이 영화는 애초에 보너스를 선택할 것인지, 산드라를 선택할 것인지를 묻는 게 아니었다. 한 사람이 자기 일과 미래를 위한 시간을 어떻게 만들어 가고, 어려운 상황을 마주하며 해결하는지 그 과정에서 성장하는 이야기를 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산드라는 이전과 다른 존재가 된다. 동료도, 관객도.

사장의 제안을 거절하고 나가는 산드라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이틀 사이에 그녀는 그다음을 살아갈 힘이 생긴 것이다. 산드라는 회사를 나서면서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말한다.
  
"우리 잘 싸웠지? 난 행복해"라고.

[노동시간 읽어주는 사람] 문화상품이 된 노동자 : 창의노동 안에 기입된 감정노동의 성격에 대하여 / 2019.12

문화상품이 된 노동자 : 창의노동 안에 기입된 감정노동의 성격에 대하여

 

박범기 (문화사회연구소 운영위원)

 

한국에서 노동자라는 말은 협소한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육체노동자에 국한하여, 천시하는 뉘앙스로 사용되는 경우가 흔하다. 하지만 소수의 부자를 제외한다면, 노동자가 아닌 이들은 많지 않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노동자는 문화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자들, 나아가 문화상품이 되어버린노동자들이다. 특히,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문화상품을 생산하거나 문화상품 자체가 되어버린 노동자들이 수행하는 감정노동의 성격에 대한 것이다.

 

미디어에 의해 매개되어, 대중 앞에 드러나는 문화상품들은 손쉽게 대중의 평가에 노출된다. 이때 대중의 평가는 긍정적인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부정적이다. 대중은 손쉽게 판단하고, 자신들의 잣대로 재단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마음에 들지 않은 경우, 비난한다. 이런 식의 부정적인 판단을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공간이 댓글 창이다.

 

얼마 전, 악플에 시달렸던 아이돌 가수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들이 연달아 있었다. 이들의 죽음은 다분히 페미사이드(femicide, 여성이 여성이란 이유로 살해당하는 것을 의미)의 요소가 있지만, 페미사이드는 이 글에서 다루는 주제와는 거리가 있다. 다만, 나는 여기서 이들의 죽음이 드러내는 한 성질로서, 문화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자에게 가해지는 어떤 폭력에 대해 문제화하고자 한다.

 

악플의 다양한 양태 : 작가를 비난하는 독자

 

웹툰은 다른 어떤 문화상품보다 이용자(user)의 욕구를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매체다. 이용자는 웹툰을 보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반응한다. 이러한 반응들은 웹툰 서비스를 개선하는 데 적극적으로 활용된다. 이러한 이용자 친화성은 웹툰이 짧은 시간 안에 급성장 할 수 있는 배경 중 하나이다.

 

이용자는 수많은 웹툰 중에서 특정한 웹툰을 골라본다. 조회수는 빅데이터로 모이고 이것이 순위로서 정리된다. , 이용자는 자신의 만족도에 따라 평점(별점)을 매기거나, 자신의 의견을 댓글로 남긴다. 이용자들의 반응은 빅데이터에 의해 모두 취합되고, 웹툰 작품을 평가하는 요소가 된다. 이처럼 이용자들은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내가 웹툰을 보는 이들을 독자가 아니라 이용자라 명명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웹툰 독자들은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이용자로서 위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의 기호에 따라 적극적으로 웹툰을 이용한다. 자신의 기준에 맞지 않으면 그것에 대해서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평점을 낮게 주거나, 댓글을 통해 작가와 웹툰 플랫폼에 자신의 의견을 표현한다.

이용자들의 평가는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평가가 가시화되는 때는 대부분 부정적인 평가들이 쌓일 때이다. 이때 말하는 부정적인 평가란, 작품과 작가에 대한 비난이다. 어떤 웹툰은 그림체나 스토리 등이 부실하다는 이유로 비난받는다. 이용자들은 질이 떨어지는 작품에 대해 비난하면서, 질 좋은 작품을 볼 권리를 요구한다. 혹은, 작가가 연재 일자를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해 비난한다.

 

이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웹툰 작가는 이용자에게 좋은 작품을 제공해야 한다. 그것이 의무이기 때문이다. 연재 일자를 지키지 못하고 지각 연재를 하거나, 작품의 그림체가 떨어지거나 스토리 엉성 등 작품의 질이 떨어지는 작품을 제공한다면, 비난받아 마땅하다.’ 이용자들은 자신들을 소비자로서 인식하고, 자신들이 보는 행위가 곧 작가의 수익으로 직결된다는 점에서, 소비자로서 자신이 좋은 작품을 볼 권리를 웹툰 플랫폼과 웹툰 작가에게 요구한다. 그리고 소비자로서 자신에게 좋은 작품이 제공되지 않는다고 판단되면 가차 없이 비난한다. 이런 일이 몇몇 개인의 의견으로 그치는 경우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수많은 댓글과 베스트 댓글 등을 통해 공유되면서 집단적인 방향으로 작품에 대한 비난이 쏠리기도 한다.

 

이때, 작가를 비난하는 이들은 웹툰을 제작하기 위해 수행하는 작가의 노동에 대해서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다. 웹툰 한편을 제작하기 위해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작가의 개인적인 어려움 때문에 작품이 늦어지는 것은 아닌지, 작가가 질병에 걸리거나 개인적인 사정으로 창작에 어려움이 생기는지 등은 이용자가 고려해야 할 요소가 아니다. 다만, 작가가 약속대로 작품을 제공했느냐, 그렇지 않으냐만이 이용자들의 고려 요소이다. 작품이 자신들의 마음에 드는지, 자신들의 기준에 부합하는지에 따라서 작품과 작가는 평가받는다.

 

▲  웹툰은 다른 어떤 문화상품보다 이용자(user)의 욕구를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매체다.ⓒ KTOON 캡처

 

문화상품 생산자에게 노동 시간의 의미는 무엇인가?

 

문화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자들은 노동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다. 출퇴근 시간이 따로 없기 때문에, 노동 시간에 대한 규정이 따로 없다. 웹툰을 비롯하여 문화 상품을 만드는 노동자들에게 있어 노동 시간은 작품을 완성할 때까지의 모든 시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화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자들의 노동 시간은 일상의 시간과 섞이기 쉽다. 작품을 만들어 내는 데 모든 시간이 노동시간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화상품을 생산하는 이들의 노동 시간을 둘러싸고 여러 질문이 가능하다. 가령, 더 좋은 창작을 위한 자기개발은 노동시간일까? 작품을 읽고, 더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 인문학 서적을 읽는 것은 노동시간일까? 다른 이들의 작품을 읽는 것은 노동시간일까? 작품을 더 낫게 하기 위해서 댓글을 찾아 읽는 것은 노동시간일까? 이 경우들은 모두 노동시간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만한 시간이지만, 노동시간으로 셈해지는 시간은 아니다.

 

웹툰의 경우, 웹툰이라는 결과물을 통해 대중과 소통하게 된다. 웹툰이라는 문화상품이 있고, 작가는 문화상품을 생산하는 자이다. 그런데, 경우에 따라 노동자자체가 문화상품이 되어 버리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 대표적인 경우가 아이돌이다. 아이돌의 경우 사람 그 자체가 문화상품이다. 상품의 소비자로서 대중은 아이돌이라는 문화상품을 자신들의 멋대로 소비한다. 아이돌이 된 순간, 개인의 인격성은 사라진다. 미디어에 의해 매개되고 노출된 상품으로서의 아이돌만 있을 뿐이다. 대중은 문화상품으로서 아이돌을 소비한다. 미디어에 노출된 문화상품으로서의 이미지를 소비한다. 이때, 사람으로서의 인격성은 빠져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대중은 손쉽게 아이돌을 비난할 수 있다. 다음(DAUM)은 지난 1025일 연예뉴스 댓글과 인물 관련 검색어를 폐지한다고 발표했다.* 악성 댓글의 부작용이 커지는 상황에서, 악성 댓글이 유포되는 장 중 하나를 없애기로 한 것이다. 다분히 환영할만한 조치이다. 그렇다고 악성댓글이 완전히 없어질 것 같지는 않다. 아이돌은 문화상품이기 이전에 사람이다. 하지만 그들을 사람으로서 존중하거나 대우하는 대중이 얼마나 있을까? 그들이 상품이기 이전에 사람임을 고려하고 생각했다면, 손쉽게 상품으로서 소비하고, 판단하고 재단하면서 악플을 다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아무쪼록 이런 죽음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 문화상품을 만드는 노동자들은 대중의 '관심'을 다양한 방식으로 받게 된다.

 

*최민영, 카카오, ‘다음연예뉴스 댓글·인물 관련 검색어 폐지, 한겨레, 2019.10.25. http://www.hani.co.kr/arti/economy/it/914587.html#csidx2e9a623954b9a68b86c290e64a6a251

 

[노동시간 읽어주는 사람] ‘미국 공장’의 노동자들은 어쩌다 ‘교체’됐을까 / 2019.11

미국 공장의 노동자들은 어쩌다 교체됐을까

-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아메리칸 팩토리(American Factory)>

 

강남규 문화사회연구소 운영위원

 

이런 가정을 해보자. 당신이 10년간 잘 다니던 회사가 있다. 야근도 별로 없고 나름대로 노동문화가 잘 잡힌 모범 직장이다. 하지만 어느 날 지속적인 경영악화로 사장이 홀라당 도망가고, 회사는 공중분해 위기에 처했다. 그때 한 귀인이 나타나 자신이 회사를 사겠노라고 약속한다. 아아, 당신의 이름은 착한 자본가.

그런데 이 사장님, 취임 일성에 난데없이 6일제복원을 외친다. 아침마다 1시간씩 일찍 집합해서 단결을 위한 조례를 갖자고도 한다. 아이고, 어떻게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소리들을 태연하게 할 수 있단 말인가? 함께 일해 온 동료들도 동요하는 게 느껴진다. “미친 거 아냐? 시대가 어느 땐데.”

 

3세계의 일이 미국에서 일어난다면

 

사람에겐 국경이 있지만 자본에겐 국경이 없는 시대에 이런 일은 그다지 낯설지 않다. 이런 일은 주로 상대적으로 경제력이 높고 임금수준이 높은 나라의 자본이 사람 값이 싼 나라로 생산 공장을 옮기면서 일어난다. 어떤 나라의 임금수준이 낮다는 것은 대체로 노동자의 힘이 약하다는 뜻이고, 밀려드는 자본의 공세에 속수무책이기 쉽다. 그리고 자본은 그래도 되는곳에선 필연 그렇게한다. 자국에선 그리하지 못하는 기업들이 동남아시아나 아프리카 등 제3세계에서 끔찍한 노동착취를 자행해 왔다는 이야기는 비밀 축에도 못 낀다.

그런데 세계 최강대국이자 자본주의의 총 집산이라는 미국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면 어떻게 될까. 오바마 부부가 제작해 화제가 된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아메리칸 팩토리(American Factory)>는 바로 이 드문 사례를 근접거리에서 생생하게 보여주는 흥미로운 작품이다. 원래는 GM이 자동차를 만들다가 2008년에 버리고 떠난 미국 오하이오 주 데이턴 시의 빈 공장을 중국계 차량용 유리제작 기업인 푸야오(FUYAO)6년 만인 2014년 인수하면서 2년 반 동안 생긴 일들을 보여준다.

다큐멘터리는 희망적으로 시작한다. 가장 큰 일자리를 잃고 도시가 황폐화되던 와중에 글로벌 기업이 공장을 인수해 일자리를 제공하겠다고 하니, 지역에서도 큰 희망을 품을 수밖에. 물론 홍보를 위한 멘트일 테지만 푸야오도 자기들이 상당한 일자리를 창출하게 될 것이라며 지역사회에 희망을 주고 싶다고 말한다. 그들은 이 말을 실천해서 데이턴 시의 주민들을 적극 고용한다.

 

중국식 경영과 노동자들의 패배

 

갈등은 푸야오 회장이 본격적으로 중국식 경영을 도입하면서 시작된다. 장시간 노동. 중국 본사는 12시간 2교대제를 운용하고, 주말도 잘 보장되지 않는다. 어용 노조. 중국 본사의 노동자 대표 기구를 책임지는 것은 푸야오 차오 더왕 회장의 사위다. 군대식 문화. 중국 본사의 중간 관리자들은 아침마다 노동자들을 집합시켜 회사를 찬양하는 구호를 외치게 한다. 위험한 노동. 유리를 자르고 나르는 노동자들에게 반드시 필요할 안전장비들도 비용을 이유로 지급되지 않는다. 그리고 중국 본사 노동자들은 그걸 당연하다고 여긴다. (‘중국식이라기엔 좀 낯익은 경영법이긴 하다.)

자본주의가 진작 고도로 발달한 까닭에 노동조합이 일찍 성장한, 그래서 상식적이라고 부를 만큼은 노동문화가 안착된 미국의 조건 속에서 그 같은 시도들은 크게 논란이 됐다. 하지만 차오 더왕 회장은 최선(?)을 다해 중국식 경영을 미국 공장에 이식하려 들고 노동자들은 강력 반발하기에 이른다. GM이 있을 적 노동조합의 힘을 경험한 고참 노동자들로서는 퍼뜩 이런 생각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노동조합을 만들어야 한다!

본격적인 갈등이 시작된다. 노동자들은 노조 조직에 나선다. 차오 더왕 회장은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노조는 안 된다는 듯 노조파괴 컨설팅을 고용하거나, 임금을 올려준다며 회유책을 뿌리거나, 노동조합 생기면 공장 버리고 떠나겠다며 협박을 해대는 식으로 노조 조직을 방해한다. 결과는 어떨까. 반대 800여 표, 찬성 400여 표, 부결. 이후 노조 조직을 주도한 노동자 몇몇은 교체’(경영진은 해고를 이렇게 표현했다)된다. “노동조합의 필요를 못 느낀 젊은 노동자들이 많이 반대한 것 같아요.” 교체되어 나가는 노동자의 마지막 말이다.

다큐멘터리는 노조 조직 실패 이후의 이야기도 보여준다. 얼마간 시간이 흐른 뒤 푸야오 경영진은 공장 자동화 시스템 구축에 돌입한다. 쉽게 말해 기계팔로 대체할 수 있는 공정은 모두 기계팔로 대체해서, 노동자 2~3명이 일해야 할 곳에 1명만 일하게 하거나 아무도 일하지 않아도 되게 만들자는 얘기다. 노동조합이 조직되었다면, 그래서 노동자들이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면 이런 계획을 감히 언급이나 할 수 있었을까.

 

5일제에서 주52시간제까지

 

<아메리칸 팩토리>가 보여주는 것은 미국과 중국의 노동문화 성장 차이에 따른 갈등이지만, 한편으로 이러한 갈등은 한 국가 안에서도 종종 발생한다. 5일을 출근하고 주말 이틀은 쉬는 문화에 대해 생각해보자. 젊은 독자는 이렇게 물을 수도 있겠다. 그게 무슨 문화씩이나 되냐고, 당연한 것 아니냐고. 하지만 주5일제는 시행된 지 불과 15년밖에 되지 않은 제도다. 게다가 시행 초기에 논란도 많았다. 경영계가 특히 우는 소리를 많이 냈다. “지금 주 5일 근무제로 들어가기에는 대단히 빠르다(한국경총)”고 했던가.

그들 중 누구도 이제는 주5일제에 대해 이런 얘기를 (적어도 공개적으로는!) 하지 않는다. 어느 정도 상식적인 회사라면, 토요일에 출근하라는 말을 당연하게 하지는 않는다. 이제 주6일 출근은 비상식적이거나 예외적인 편에 속하게 됐다. 물론 여전히 주6일 출근을 강요하는 직장들이 제법 많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지만, 적어도 정치권이든 경영계든 6일제로 법제도를 복원하자는 식의 이야기를 감히 할 수 없다는 시대라는 사실 역시 분명하다.

오늘날 갈등의 대상이 된 것이 있다면 바로 주52시간제다. 하지만 주5일제가 그랬듯, 최저임금 인상이 그렇게 되어가듯, 시간이 흐르면서 주52시간제 역시 점차 당연한 것이 되어 우리 사회에 착근될 것이다. 달리 말하면 그들의 징징거림은 일종의 상수라는 얘기다. 그들은 언제나 그랬고, 그들의 말은 대체로 틀려왔다.

 

불가역적 제도를 만들려면

 

그런데 이번에는 정부의 입장이 이상하다. 52시간 시행 1년 조금 지난 지금 노동시간 단축에 대해서 내년도 50인 이상 기업으로 확대 시행되는 것에 대해서는 경제계의 우려가 크다(108일 국무회의 대통령 들머리발언)”면서 탄력근로제 도입을 의제화하고 나선 것이다. 새로운 제도가 정착되도록 독려하며 인내심을 요청해야 할 정부는 이번 결정으로 시곗바늘을 한참 뒤로 돌리고 있다.

중국 공장의 전근대적 풍경을 마주한 미국 노동자의 표정을 기억한다. “5일제를 주6일제로 바꾸겠다는 말을 누군가 한다면 우리의 표정도 과연 그러할 터다. 문화란 그렇게 발전하는 것이다. 우선 법으로 제도화되고, 당장은 잡음들이 일어날 수밖에 없지만, 시간이 흘러가며 자연히 사회가 제도에 맞춰 재구성되고, 마침내는 모두가 당연한 문화로 인식하게 된다. 52시간제에 대해 지금 필요한 것도 시간일 뿐이다.

노동조합 결성에 실패하고 해고되어 나가는 미국 노동자들의 뒷모습도 기억한다. 미국에서 당연한 것이 푸야오 공장에서만은 당연하지 않게 된 것은 노동조합을 저지한 자본이 이곳은 그래도 되는 곳이라고 확신을 가졌기 때문이다. 미국 노동자들은 푸야오의 문화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결국 노동자들은 힘을 잃음으로써 이런 파국을 맞았다. 이곳 문재인 정부가 자신들이 추진한 정책을 스스로 뒤집은 것도 그래서일 게다. 자본 앞에선 그럴 수 없지만, 노동 앞에선 그래도 되니까.

어떤 제도도 그 자체로 불가역적일 수 없으며, 다만 그것을 불가역적으로 만드는 힘이 있을 뿐이다. 무한 야근의 시대에서 주52시간의 시대로, 그리고 적당히 합의된 노동시간이 아닌 노동자 스스로가 그리는 노동시간의 시대로 가는 길을 보장하는 것은 착한 정부착한 자본가가 아니라 오직 강한 노동조합이다. <아메리칸 팩토리>의 씁쓸한 결말이 보여주는 사실들이다.

 

[노동시간 읽어주는 사람] ‘크라우드소싱’이 배달노동자에게 자율성을 가져다줄까? / 2019.10

크라우드소싱이 배달노동자에게 자율성을 가져다줄까?

  지안 상임활동가

 

배달앱 배달의 민족은 지난 9월 새로운 광고 하나를 올렸다. 30초짜리 광고는 주인공의 역동적인 몸의 움직임으로 시작해, 헤드폰으로 음악을 들으면서 팝핀댄스를 추고, 옥탑방에 걸터 앉아 옷을 매만지는 모습으로 이어진다. “춤춘 지는 15년이 넘었어요. 세계대회도 크루들 하고 계속 나가고 있어요. 강의도 하면서. 제가 디자인에 관심이 많아서 요즘 옷도 만들고 있어요.”  

크라우드소싱, 초단시간 미만의 배달노동을 가능케 하다

이 배달앱에는 당신을 위한 다양한 음식점이 구비되어있어요라는 것도 아니고, 빠른 배달에만족할 거라는 메시지도 아닌 대체 무슨 광고일까? 라는 의문이 들 때쯤, 주인공은 그래피티가 그려진 지하차도에서 춤을 추다가, 배달 옷과 보호구를 착용한 채 자전거를 열심히 밟으며 같은 차도를 지난다. 그리고 되묻는다. “제 직업이 뭐냐고요? 그게 뭐 중요한가요?” <춤도 추고, 디자인도 하고, 배달도 해요>라는 제목의 이 광고는 배달의 민족 서비스를 운영하는 기업 우아한 형제들의 새로운 배달 프로그램인 배민커넥트를 홍보하는 영상이다. 배민커넥트는 대중(Crowd)과 아웃소싱(Outsourcing)의 합성어인 크라우드소싱방식의 배달 프로그램을 활용한, ‘일반인대상의 배달 서비스이다. 이러한 방식은 대표적으로 우버이츠가 한국 시장에 진출하던 초기에 크라우드소싱 기반 배달 프로그램을 기업의 대표적인 전략으로 내세우면서 잘 알려졌다. 현재는 우버이츠와 배민커넥트 뿐만 아니라 쿠팡이츠, 쿠팡플렉스 등 다양한 배달, 물류 서비스들이 크라우드소싱 기반 프로그램을 활용하고 있고 참여자들을 모집하기 위해 홍보하고 있다.

배민커넥트가 만든 구글링크로 신청을 하면, 1회의 오프라인 교육 이후에 바로 원하는 시간”, “원하는 만큼일할 수 있다. 이동수단도 각 서비스에 따라 자차부터 전동자전거, 전동킥보드, 심지어는 도보나 일반자전거를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강력한 유입책이 된다. 애초에 1~2시간, 혹은 분이나 건단위의 배달이 이 서비스의 핵심이기 때문에 기업은 시간 단위로 일하는 노동자가 필요하지 않다. 또 최대한 많은 인력을 단시간 확보하여 개별 사용자들의 집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를 배차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배달노동의 대표적 이동수단인 오토바이도 크게 필요하지 않게 된다. 그래서 특정 구에서 공유서비스로 이용할 수 있는 전동킥보드나 서울시 따릉이를 활용한 배달도 가능해진다.

내가 원할 때, 달리고 싶은 만큼만”, 누구의 자율성인가?

지금까지 배달노동자들에게 가장 우선적인 문제는 이들이 특수고용노동자로 분류되어 근로기준법에서 적용제외 된다는 문제점이다. 배달앱의 관리/감독 속에서 일을 하더라도 현재 노동법 상으로 플랫폼과 노동자를 고용관계로 보지 않기 때문에 플랫폼 노동자들은 노동자로 인정되지 않는다. 일을 해도, 심지어 장시간 해도 특수고용노동자 신분으로 인해 각종 법적 보호에서 배제되는 것이다. 반면에 배민커넥트 등의 서비스들은 플랫폼과 노동자간의 고용관계가 성립 안 된다는 문제점을 넘어서 초단시간 미만의 건당 배달자 다수를 채용하는 것이 목적이라는 것이 핵심이다. 그런 점에서 이 일반인노동자들의 기본적인 노동법 적용이나 노동환경은 물론이고, 배달 과정 중 사고가 났을 때 책임은 기업이 부담하지 않는다는 문제점이 있다.

그러나 단순히 초단시간 배달 노동자들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초단시간 노동에 대한 법적 규제가 없다거나 플랫폼 노동자들에 대한 법적 보호가 없다는 점만이 문제는 아니다. ‘크라우드’ ‘소싱이라는 말 자체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기업은 노동자를 고용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 속의 남는 인력, ‘일반인들을 모집하고 건당, 시간당 가격을 지불한다. 그래서 배달앱이라고 하는 전체 서비스에서 사용자와 가장 최적의 경로로 배달 장소가 배치되는 프로그램, 지금 배달하면 얼마를 더 주겠다는 공지만 있을 뿐 이 배달 프로그램에 배달을 수행하는 노동자는 없다. 노동자와 노동이라는 과정은 지워지고 그 자리를 무수히 많은 초단시간 미만의 건당 배달들이 채우는 것이다.

내가 정하는 자유로운 스케줄” “자유로운 근무”(배민커넥트), “스스로 선택하여 일할 수 있습니다.” “유연합니다”(쿠팡플렉스) 등의 수사를 통해 볼 수 있듯이 자율성과 유연성은 이 서비스들이 참여자에게 부여하는 가장 큰 혜택이다. 참여자들의 후기를 담은 형식으로 만든 쿠팡플렉스와 배민커넥트 웹페이지는 시간이 남는 김에, 근처에 볼일이 있어서, 운동 삼아 잠깐씩 일하는 라이프 스타일을 제시한다. 이러한 인식 속에서 서비스에 참여하는 일반인라이더들 역시 이 행위를 노동으로 인식하거나 스스로를 노동자로 생각하지 않는다. 여기서 이 서비스들이 강점으로 꼽는 자율성은 마치 노동(과 그에 따르는 법적 보호)과 교환되는 것처럼 생각된다.

이 자율성은 분명히 기업에게 이익이다. 이 자율적인 일자리를 통해서 4대보험, 퇴직금, 각종수당 등 수많은 비용이 절감된다. 그러나 퇴근 이후나 주말을 이용해서 배달할 수 있는 자율성이란 대체 어떤 자율성인가? 여기에는 쉬지 못하는 삶, 진정한 의미의 자율성과 협상한 비자율적인 노동만 있을 뿐이다. 앞으로도 다양한 플랫폼이 개발될 것이고 그에 따라 쿠팡플렉스에 등록된 30만명의 일반인라이더들은 여러 형태의 일자리로 옮겨갈 것이다. 이 초단시간 미만의 노동을 어떻게 문제화할 수 있을지 지속적인 고민이 필요하다.

[노동시간 읽어주는 사람] 핵발전소 노동자가 치르는 '거짓의 대가'는 무엇인가 / 2019.09

[노동시간 읽어주는 사람] 

 

핵발전소 노동자가 치르는 '거짓의 대가'는 무엇인가

 

박기형 / 상임활동가 

 

요즘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드라마가 있다. 미국 HBO에서 제작한 <체르노빌>이라는 5부작 드라마다. 그동안 체르노빌 원전 사고를 조명한 여러 다큐멘터리, 영화, 에세이 등이 있었지만 <체르노빌>은 드라마로서의 높은 완성도와 긴장감 그리고 선명한 문제의식 등으로 사람들에게 큰 울림을 주며, 원전 사고 당시 상황과 사고 대응 및 조사 과정 전반에 이르기까지 체르노빌 원전 사고를 섬세하게 재현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넷플릭스만 구독하던 필자는 부랴부랴 왓챠플레이를 구독하고서 5부작을 정주행했다. 각 잡고 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에 마음을 굳게 먹고서 5시간에 걸쳐 손에 땀을 쥐고 시청했다. 마지막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난 후 하나의 대사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많은 사람이 명대사로 꼽을 정도로 원전 문제의 핵심을 함축한 질문이자 드라마를 여는 레가소프의 첫 마디 "거짓의 대가는 무엇인가?"
   
거짓의 대가는 무엇인가?

인류가 자초한 최악의 재앙으로 손꼽히는 1986년의 체르노빌 원전 사고는 2011년 3월 11일 발생한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자연스레 떠올리게 한다. 두 참사 모두 우리가 마주할 수밖에 없었던, 거짓의 대가가 무엇인지 여실히 보여주었다. <체르노빌>에서 무채색에 가까운 이미지로 펼쳐 보인 비참함, 즉 황폐해진 삶의 터전과 자연, 피폭으로 인해 죽거나 다친 사람들과 살처분 당하는 동·식물 등 사회와 자연이 송두리째 파괴당한 참혹한 현장 말이다.

특히 <체르노빌>에서는 피폭을 당한 원자력 부근 주민의 아픔뿐만 아니라 발전소에서 일한 노동자들과 이미 벌어진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또는 더 큰 참사를 막기 위해 살인적인 수준의 방사선에 그대로 노출되며 고군분투한 소방관, 군인, 의료인 등 수많은 노동자의 얼굴과 몸짓을 볼 수 있다. 자신이 상대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그것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파괴해버릴 수 있을지 알지 못한 채 그들은 온몸으로 거짓의 대가를 받아야 했다.

그 참혹한 사태가 일어나기까지 거짓의 굴레를 뒤얽히도록 한 사람들, 아니 그 사회는 어떤 책임을 졌는가. 우리는 누구에게 어떤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오히려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듯 체르노빌 원전 사고가 벌어진 지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거짓의 굴레가 우리를 짓누르고 있다. 언제 또다시 사고가 벌어지지 않으리라고 예측할 수 없기에 우리는 언젠가 또 한번 거짓의 대가를 치러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거짓의 대가는 이런 극단적인 상황에만 치러지는 게 아니다. 거대한 수준의 참사가 벌어지지 않더라도 우리는 일상적으로 거짓의 대가를 치르고 있다. 다만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치르고 있을 뿐이다. 그 '다른 누군가'는 바로 '핵발전소 노동자'들이다.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핵발전소 노동자의 저선량 피폭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한국에도 탈원전 논의가 촉발되면서 핵발전소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이야기에 주목하는 책들이 출간되었다. 그중 한 권을 꼽자면, 반핵의사회·사회건강연구소가 공동기획한 <핵발전소 노동자>가 있다. 이 책은 핵발전소 노동자들의 증언을 통해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피폭 및 각종 사고, 발전소와 국가의 조직적 은폐 나아가 다단계 하청을 통한 위험의 전가 등을 다루고 있다.

저자인 테라오 사호는 이 책에서 '나는 알 수 없어요'라는 노래를 언급한다. 그 노래의 가사 중 한 구절은 다음과 같다. '핵발전소에서 노가다 일로 방사선에 피폭된 아저씨가 벌레처럼 약해지는 데도 도시의 밤은 묵살한다.' 우리가 아름다운 도시의 야경을 즐기는 순간에도 빛을 만들어내는 핵발전소 노동자의 생명은 점차 빛을 잃어간다.
 
<체르노빌>을 본 사람들의 후기를 살펴보면 다들 하나 같이 심각한 수준의 방사능 노출에도 아무 보호장비를 갖추지 않은 채, 심지어 마스크도 제대로 끼지도 않고 방사능 피해자를 만지거나 폐기물을 치우는 등의 모습을 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헛웃음 나는 끔찍한 상황은 비단 무너져가는 소련, 가난하고 꽉 막힌 '사회주의' 사회에서만 벌어지는 게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자유롭고 평등한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공공연히 일어나고 있다. 거기서는 국가의 체면 때문에 거짓말했다면, 여기서는 자본의 이윤 때문에 거짓말하는 게 유일한 차이일 뿐이다. 핵발전소가 돌아가는 작업현장에서 위와 같은 일은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은폐된 저선량 피폭 문제

거짓은 단지 핵발전소에서 일어난 각종 사고, 위험 상황을 은폐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특별한 상황이 벌어지기 전부터 노동자들은 일상에서 언제나 방사선에 노출된다. 병원에서 방사선 검사 및 치료를 하는 사람이 방사선에 노출되지 않을 수 없듯이, 핵발전소에서 일하는 노동자들도 '당연히' 방사선에 노출된다. 문제는 '당연히'라는 말을 어떤 의미로 해석할 것이냐다.

핵발전소 노동자의 생명을 위협하는 거짓은 위험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시작된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핵발전소에서 방사선에 노출되지 않고 어떻게 일하라는 말이냐. 핵발전소는 원래 위험한 곳이다." 그 이후엔 위험이 당연하다고 전제하고서 어느 수준이 정말 위험한 것인가를 묻기 시작한다. 인체에 유해한 방사능의 수준, 즉 한계선을 설정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피폭 선량 기준을 각종 연구를 통해 객관적이고 과학적으로 도출하려 한다.

하지만 정말 피폭 선량 기준은 객관적·과학적인가? 아니다. 반대로 피폭 선량 기준은 자의적이다. 왜냐하면 고선량 피폭의 위험성은 명확하지만 저선량 피폭의 위험에 관해서는 여전히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어떤 질병을 일으키는지, 어떤 인과관계로 그렇게 되는 건지, 발병까지 어느 정도 기간이 걸리는지 등 여전히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혹자는 불확실하기에 입증되지 않았고 그래서 유해하다고 단정 지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 점에서 <체르노빌> 1화에서 사고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기 위해 방사능 수치를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지는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원자로의 핵연료를 담고 있는 노심이 폭발하지 않았다고 사안을 축소하고 싶은 이들은 측량 한계가 낮은 기계의 수치를 그대로 따른다. 그래서 위험하지 않은 상황이라고 판단한다. 그 기계가 측량할 수 있는 최고치가 나왔음에도 말이다. 결국 고성능 측량 장비를 통해 원자로가 폭발했음을 확인한 후에야 순순히 인정했다. 이미 수십 시간이 지난 후였고, 엄청난 양의 방사능에 수많은 사람이 노출되고 수백km의 지역이 오염된 후였다.

이와 같은 일이 핵발전소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위험이 입증되지 않았으니 안전관리 비용이나 인건비를 들이지 않으려는 태도, 저선량 피폭이 있었다고 하지만, 기준상 위험하지 않았고 그게 정말 암을 비롯한 특정 질병의 발생에 주요 원인이라고 입증되기 어려우니 산재 인정을 하지 않겠다는 논리 등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의 책임자들처럼 저선량 피폭의 유해성이 아주 오랜 뒤에 입증되면 그때에야 피폭자들에게 보상하고 안전조치를 취할 것인가?

정말 우리가 방사능의 위험으로부터 사람들을 안전하게 지키고자 한다면 불확실하기에 최대한 안전할 수 있도록 조치하는 것, 일상에서부터 모든 예측 가능한 위험에 대비하는 것, 조그만 방사선 노출에도 주의를 기울이고 관리하는 것 등이 아닐까. 그러한 원칙들에 입각할 때에야 비로소 거짓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고 나아가 거짓의 대가를 핵발전소 노동자가, 우리 사회구성원 모두가 치르지 않을 수 있는 출발점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노동시간 읽어주는 사람] 구준풍은 배달노동을 해서 집을 살 수 있을까?웹툰 <새벽 날개>, 박흥용 / 2019.08

[노동시간 읽어주는 사람]

구준풍은 배달노동을 해서 집을 살 수 있을까?웹툰 <새벽 날개>, 박흥용

 

박범기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

웹툰 <새벽 날개>는 배달노동을 주제로 삼고 있는 웹툰이다. 이 웹툰의 주인공인 구준풍은 배달노동을 하면서 여러 사람을 만나고, 많은 일들을 겪어낸다. 그 과정에서 구준풍은 성장한다. 노동은 구준풍의 성장 과정에 있어 중요한 화두로 제기되고 있는 주제이다. 구준풍은 배달노동을 통해 자신의 삶을 보다 낫게 일궈가기 위해 노력한다.

무엇보다 구준풍이 자신의 삶을 더 낫게 만들기 위한 과정에 있어 중요한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은 집을 사는 것이다. 구준풍은 열심히만 하면 집을 살 수 있다고 믿으며, 끼니도 걸러 가면서 배달노동에 매진한다. 한 건이라도 더 많은 콜 수를 올리기 위해 노력하면서 악착같이 돈을 모으고자 한다. 그러면서 구준풍은 자신이 집을 갖게 되는 날을 소망한다. 그런데 과연, 구준풍은 배달노동을 하면서 모은 돈으로 집을 살 수 있을까?

2019년 최저임금은 시급 8350원, 월급 174만 5천 원이다. 내년도 최저임금은 올해보다 240원(2.9%) 오른 8590원이다. 배달노동자들은 평균적으로 최저임금보다 높은 임금을 받는다.

그렇지만 차이가 크지는 않다. 한국노동연구원의 보고서에 따르면 배달노동자들은 주 6일, 하루 10.7시간씩 일하며, 월평균 소득은 229만 5천 원이라고 한다. (배달대행 배달원의 종사실태 및 산재보험 적용 강화 방안 연구, 한국노동연구원, 2016) 보통의 노동자들보다 많은 시간 일하고, 수많은 위험에 노출 되어 있는 데도 많은 임금을 받지 못한다.

▲ 새벽날개의 한 장면  ⓒ새벽날개 박흥용 작가

더욱이 4대보험은 되지 않고, 사고가 생기면 병원비는 물론이고 오토바이 수리 등의 일체 비용 역시 배달기사가 부담해야 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열심히 배달 노동을 한다면, 집을 살 수 있지 않을까? 잘 모르겠다. 서울 아파트값 평균 가격은 8억 1378만 원이다. (월간 KB주택가격동향, 2019년 3월호) 평균적인 배달노동자가 서울지역에서 아파트를 사기 위해 한 푼도 안 쓰고 있는 돈을 모은다면, 354개월 (대략 29년)의 시간이 걸린다. 그렇게 꾸역꾸역 돈을 모 아서 아파트를 살 수 있는 배달노동자가 얼마나 많이 있을까?

노동의 곁에 있는 위험

이 웹툰은 구준풍을 비롯한 다양한 배달노동자들의 양상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들의 노동의 단면들을 내보인다. 배달노동이 다른 노동과 분별되는 한 특징은, 이 노동 안에 담겨 있는 위험이다. 작가는 이 작품 안에서 배달노동자들에게 닥치는 여러 가지 위험들을 다양하게 보여준다. 구준풍이 일하는 타임 배달대행 사무소에서는 신입 라이더를 채용할 때, "저승에서 벌어 이승에서 쓴다"는 말을 들어본 적 있는지 묻는다. 이 말은 이 웹툰에서 여러 번 반복되는데, 배달노동자의 노동이 위험과 밀착되어 있음을 경고하는 말이다.

이 웹툰에서는 배달노동의 와중에 일어났던 사고들을 다루는 장면들이 빈번히 등장한다. 2화에서 구준풍은 죽음의 위험에 처한다. 구준풍은 겨우 사고를 면한 뒤에 배달을 마무리 짓는다. 배달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구준풍은 혼잣말로 이렇게 말한다.

"언제 무슨 일이 있었어? 신호 위반한 자동차와 충돌해서 스무 살짜리 오토바이 배달기사가 사망했다고 한들. 그게 뭐 대단해. 몇십 초짜리 뉴스감으로 곧 휘발되고 말 텐데. 언제 무슨 일 있었냐구." (2화)

다행히 구준풍은 위험에서 벗어나 다시 일상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지만, 그의 친구 병호는 교통사고에 의해 죽음을 맞는다. 신호 위반한 차에 치여 죽은 것이다. 병호의 죽음은 구준풍의 혼잣말처럼 몇 초짜리 단신뉴스만을 남긴 채 휘발되어 버린다. 배달노동자로서 구준풍은 위험의 곁에서 노동한다. 그것이 자신의 일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고의 위협들이 그를 스쳐 지나간다고 하더라 도 그는 자신의 일을 해야 한다. 그것을 통해서만 자신의 삶을 일궈갈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배달대행 노동의 특성이 위험을 가중시킨다.

"배달대행 기사의 임금은 봉급제(월급제)가 아니다. 배달 건수대로 산정하는 성과급제이기 때 문에 배달기사들은 가능한 한 짧은 시간에 많은 오더를 소화하려고 한다."(2화)

자신이 처리한 콜 의 숫자만큼 돈을 벌기 때문에 배달노동자들은 조 금이라도 더 많은 콜을 올리기 위해 노력하고, 이 과정에서 다양한 위험이 상존한다. 또한, 최근의 배달노동은 플랫폼을 매개하여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 과정에서 배달노동자에게 부여되는 노동 강도가 더욱 높아지고 있다.

배달노동자 대다수는 배달대행 사무소와 위탁계약을 맺은 개인사업자인데, 개인사업자로서 이들은 배달앱에 올려진 주문을 접수하여 처리하고, 이에 대해 건당 수수료를 받는다. 자신이 처리한 배달 개 수 만큼 임금을 받기 때문에 이들은 조금이라도 더 많은 콜을 처 리하기 위해 애쓴다. 이러한 상황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은어가 '전투콜'이다.

전투콜은 배달노동자가 음식배달이 집중되는 시간에 많은 콜을 받고 처리하는 과정을 가리키는 은어이다. 배달 주문이 몰릴 때에 한꺼번에 많은 주문들을 집중적으로 처리하기 위해서 배달노동자들은 자신의 끼니를 뒤로 미룬 채 일 에 집중한다. 이렇듯, 개인사업자로서 배달노동자는 보다 많은 수익을 올리기 위해 다른 배달노동자들과 경쟁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으면서 보다 많은 노동을 기꺼이 감내해낸다. 이 과정에서 다양 한 위험들이 따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 "제한된 능력으로 산을 넘어야 한다."  ⓒ새벽날개 박흥용 작가

구준풍에게 미래가 있을까? 

사실 이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 사회가 이렇게 구축되어 있으니까. 이 웹툰에서 말하고 있는 것 역시, 이런 상황의 어쩔 수 없음이다. 이 웹툰은 이러한 상황에 대한 대안이나 대책 혹은 전망을 제시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이 웹툰은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 인가요?' 라는 질문과 그 답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때 답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 "사람은 자신의 제한적인 능력으로 산을 넘어야 합니다." (39화)라는 메시지이다.

이 말이야말로, 이 웹툰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메시지이다. 제한된 능력으로 산을 넘어야 한다는 말은, 자신의 주어진 것 안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능력주의적인 사고 안에서 개인의 노력을 강조하고 있는 어투처럼 읽히기도 한다. 이 웹툰에서 가장 불편한 부분이 이러한 메시지이다. 웹툰을 읽다 보면, 과연 제한된 능력으로 산을 넘어야 하는 것이 올바른 답인지 의심이 되는 부분들이 적지 않다. 단순히 노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산재해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위험의 곁에서 배달노동을 수행하지만, 그 노동에 대해 충분한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는 배달노동자들에게, 어차피 "삶은 슬픔과 고통 뿐"(36화)이니, 참고 견디며 "제한된 능력으로 산을 넘어야 한다"(39화)고 말하는 건 지나치게 꼰대적인 훈계인 것은 아닐까?

웹툰의 마지막 장을 넘기면서 자꾸만 이런 질문이 남는다. 제한된 능력으로 산을 넘어야 한다. 그런데 애초부터 발이 잘린 이들은 산을 어떻게 넘을 수 있을까? 그래서 구준풍은 과연 집을 샀을 까? 그래서 구준풍은 행복했을까? 자꾸만, 자꾸만 질문이 남는다.

[노동시간 읽어주는 사람] 소설은 '땀'을 흘린다 / 2019.06

[노동시간 읽어주는 사람] 

 

 

소설은 '땀'을 흘린다 

 

 

이종찬 / 문화사회연구소

 

 

<땀 흘리는 소설>(창비교육, 2019)은 "문학 수업을 통해 노동을 공부할 방법"에 대한 하나의 답변 격으로 기획되어 출간된 한국 단편소설 선집이다. 총 8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 이 책의 출발점은 "문학을 업으로 삼은 평론가들과 출판 관계자들에 대한 섭섭함"이었다고 엮은이들은 밝히고 있다.

이 책의 편집위원들은 모두 교육 현장에서 직접 문학을 가르치고 있는 교사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들의 문제의식은 "젊은 세대와 함께 읽을 만한 제대로 된 노동 문학 선집"이 마땅히 눈에 띄지 않았다는 데 있다. 물론 한국 사회에 노동문학의 흐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이 70~80년대의 노동 문학에 치우쳐 있었던 데 편집자들의 고민이 자리하고 있다. 오늘날의 청(소)년 세대와 함께 '지금 여기의 노동 문학'을 이야기하기에 그것들로는 시간의 이음매가 잘 맞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준비된 이 책은 "21세기에 새롭게 일과 직업에 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소설 선집"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노동의 구체적 양태는 시대에 따라 그 모습들을 달리해 왔다. 어제의 노동과 오늘의 노동이, 더 나아가서는 내일의 노동이 같은 형태를 띌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인간의 노동 환경이 시대를 막론하고 꾸준히 열악하였음을 따로 강조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땀 흘리는 소설> 속 이야기들에서 우리의 시선을 끄는 건 여전히 비루한 노동 환경으로 비롯된 감정의 어떤 무늬들이다. 노동의 조건이 가혹하다는 걸 '아는' 것과 그 가혹함으로 인해 초래된 마음의 무늬들에 대해 '이해'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좋은 문학과 예술은 인간과 세계를 아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이해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끈다.

먼저 김혜진의 <어비>를 읽는다.

도서 물류센터에서 일하는 '어비'는 동료 직원들 사이에서 수수께끼 같은 인물로 통한다. 소설 속 그의 모습은 자발적 유폐자의 형상을 닮아 있다. "그냥 별로 말할 게 없어요. 진짜요." 그는 말하자면 "여기까지라고 금을 그어 놓고 내내 그 경계를 지키는 데 필사적인 사람" 내지는 "있었나 싶으면 어느새 가고 없는 사람"이다. 여기까지 보면 자의식 과잉의 인물로 보이지만 그것도 아니다. 어비는 의식적으로 타인들과의 관계 맺음을 회피하는 유형이 아니라 그것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인물 쪽에 훨씬 가까워 보이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공간에서 근무하고 있는 소설 속 화자인 '나'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어비는 "웃으려고 하는데 그게 맘대로 안 되는 것 같았다."

단체 생활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노출하던 어비는 어느 날 팀장으로부터 책임 소재가 불분명한 클레임의 원인 제공자로 부당하게 지목받는다. 어비는 끝까지 자신의 잘못이 아님을 주장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회사를 그만 둔다. "햇볕 한 줌 들지 않는 이 커다란 창고를 빙빙 돌면서 인생을 낭비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나' 역시 얼마 뒤 퇴사를 하게 되는데 몇 주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생활용품 창고에서 어비와 다시 마주친다. 그 날 퇴근 후 '나'와 어비는 처음으로 같이 저녁 식사 자리를 하게 되면서 가까워지는 듯 하지만 그 다음날 어비는 말없이 자취를 감춰버리고 만다. 간밤에 지갑을 잃어버린 '나'는 그것이 어쩌면 어비의짓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지만 그것을 확인할 방법은 없다.
 

 
'나'가 어비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다시 보게 된 건 인터넷 개인 방송 사이트에서다. 어비는 그곳에서 기괴한 형태의 1인 방송을 하고 있었다. 산더미처럼 쌓아 놓은 번데기를 숟가락으로 게걸스럽게 떠먹거나, 싸구려 중국 음식들을 대량으로 시켜 빠르게 먹어치우는 어비의 먹방을 본 접속자들이 여기저기에서 별 풍선을 터뜨리기 시작한다. "어비가 벌어들인 돈과 앞으로 벌어들일 돈"을 카운팅해 보며 '나'는 어딘지 모르게 종잡을 수 없는 기분에 빠져든다.

 

김혜진의 <어비>에서 우리가 확인하게 되는 건 시대의 흐름에 따라 노동의 형태가 다양하게 분화되고 있는 현실이다. 다음과 같은 질문이 가능해진다. 어비의 인터넷 1인 방송은 노동일까 아닐까. IT 기술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인터넷 플랫폼 공간에서 제공되는 이와 같은 '플랫폼 노동'은 우리가 알고 있는 '노동'의 개념을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보게 만든다.

다음으로 읽고 싶은 작품은 구병모의 <어디까지를 묻다>이다.

'나'는 현재 카드 회사 콜센터 직원으로 일하고 있지만 원래 꿈은 아나운서였다. 한때는 자신의 목소리가 "언어의 잎맥을 살며시, 그러고도 단호하게 켜는 활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품고 있던 그였지만 꿈을 이루지 못하고 당장의 현실에 발이 묶여서는 지금의 직장에 취업해야만 했다. 그리고 규격화된 친절함의 언어로 점철된 그녀의 목소리는 애초의 매력과 활기를 잃어버렸다. 언어 폭력과 그것을 감내해야 하는 감정 노동은 일상이 되어버린 지 이미 오래다.

그런데 어느 날 걸려온 전화는 이전과는 결을 완전히 달리 하는 것이었다. 수화기 너머 '고객님'의 목소리, 그 첫마디는 다음과 같았다. "괜찮으세요?" '나'에게 그것은 "호미로 파헤쳐진 자리를 보드라운 흙으로 덮어 다지기 위해 토닥거리는 손길"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말문이 탁 막힌 게, 그 전까지 이어져 오던 콜의 무늬에서 한 조각이 삐끗 나가 버리니까. 그동안 퍼부어진 몇 톤 치의 욕이 거의 자장가에 가까운 패턴을 이루어 왔는데 거기 갑자기 완전 5도 화음이 추가된 상황". 바로 그 때였다. '나'는 그만 "부모님 돌아가신 것처럼 통곡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통화를 이어갈 수 없는 '나'를 대신해 다른 직원이 임의로 전화를 당겨 받지만 그 또한 마찬가지의 상황으로 전개된다. 그것을 이어받은 직원 역시도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만다. 그렇게 "울음은 우리 팀 전체에 염병처럼 퍼져 나갔어요."

구병모의 <어디까지를 묻다>는 인간 내면의 심층이 지닌 복합적인 역설을 잘 드러내 보여준다. 폭언은 상담원의 마음을 허물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친절함의 말 한 마디가 도리어 그들을 완벽하게 무너뜨려 버렸다. 인간의 마음이란 것이 이토록 허술하고 모순투성이다. 우리는 아직 인간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앞으로도 여전히 그럴 것이다.
   

 

 

[노동시간 읽어주는 사람] 시간의 의미를 묻는 하나의 방식, 미시마 유키오의 <목숨을 팝니다> / 2019.05

[노동시간 읽어주는 사람] 

 

 

시간의 의미를 묻는 하나의 방식, 미시마 유키오의 <목숨을 팝니다> 

 

 

김직수 / 사회공공연구원 연구위원

 

 

필자는 "당신 인생에서 단 한 권의 책을 꼽으라면?"이라는 질문에 주저 없이 답하는 사람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 모든 텍스트란 개인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달리 읽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인생 단 한 권의 책' 부류의 질문에서 유독 불리한 작가가 있기 마련인데 한국에서는 이에 해당하는 작가로 미시마 유키오를 꼽고 싶다. 

우리 사회는 그를 '천황 만세를 외치며 할복자살한 극우파 작가'쯤으로 고정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작가의 생애와 사상이 그의 작품과 별개인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명백히 그의 작품에 다른 결이 존재함에도 이를 사상하고 단순화하는 것은 극우 사상만큼이나 해롭다. 그의 작품들을 일련의 사회적 메시지로 읽고자 하는 경우 그가 제시하는 '처방'은 위험할지언정, 그의 '진단'은 놀랍도록 날카로우며 당대의 진보적 지식사회의 그것에 비하더라도 참신한 것들이 적지 않다.

흔히 미시마의 작품은 '심미주의적' 경향을 띤 것으로 이야기되며, 실제로 그의 작품들에서 직접적인 정치적 언급은 그다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들이 심지어는 일본의 근대 문학이라는 직접적인 카테고리를 다루면서도 좀처럼 미시마를 언급하지 않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이는 그가 내세우는 '아름다움'에 관련되며, 더욱 정확히는 그가 아름다움을 내세우게 만드는 현실의 '추악함'에 관련된다. 

그의 작품으로 <가면의 고백> <금각사> <비단과 명찰> <풍요의 바다> 등이 흔히 언급되는데 이런 '대작'들과 비교되면서 흥미 위주로 가볍게 쓰인 소설로 평가받는 책이 <목숨을 팝니다>이다. 하지만 나는 의도되었든 의도되지 않았든 간에, 이 책을 시간과 그 의미에 대해 천착하고 있는 작품으로 꼽는다. 전후 일본인들이 그들의 시간을 살아내는 모습에서 미시마는 어떤 추악함을 읽어냈던 것일까.

미시마가 자위대의 궐기를 호소하며 할복자살한 1970년으로부터 2년여 전에 쓰인 이 작품은 하니오라는 한 청년의 자살 시도로부터 시작된다. 하니오는 자본주의의 첨병으로 일컬어지는 광고업계에서 카피라이터로 일하고 있던 어느 날 석간신문을 읽다가 갑자기 죽고 싶다고 생각한다. 석간신문을 읽다가 글자가 바퀴벌레로 변하는 모습을 보면서 죽음의 충동을 느낀 것이다. 그가 읽던 신문에는 공무원의 스파이 행위, 도쿄를 뒤덮은 스모그, 하네다 공항 폭탄테러, 은행강도 사건 등 온갖 '추악한' 일에 대한 기사들이 가득했지만 그는 그저 '판에 박은 듯 똑같은 하루'라고 느끼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런 세상에 살아 봐야 의미가 없다고 느낀 이유는 무엇일까. 하니오가 생각해낸 답은 그가 '열심히 일하는 착실한 사원이었다'는 것이다. 결국 자살에 실패한 하니오는 회사를 그만두고 신문에 목숨을 판다는 광고를 낸다.

그런데 놀랍게도 손님들이 찾아온다. 어느 자산가 노인은 젊은 아내의 외도에 복수하기 위해 하니오에게 함께 죽어줄 것을 요청하고 어떤 꼬마 아이는 흡혈귀인 자신의 어머니에게 하니오가 피를 바쳐 기쁨을 주기를 원한다. 자신을 대신해 생체실험의 대상이 되어 주기를 원하는 의뢰인이 나타나는가 하면, 하니오가 첩보전의 희생양이 되어 주기를 요구하는 스파이 집단도 의뢰인으로 등장한다. 하니오는 그저 무덤덤하게 의뢰를 받아들여 충실히 수행한다. 공교롭게도 사건들이 해결되는 가운데 하니오는 계속 살아남는다. 그런데 이 모든 사건들의 배후에 ACS(아시아 컨피덴셜 서비스)라는 비밀조직의 그림자가 끊임없이 드리워진다.

의뢰인들이 화폐를 매개로 하니오에게 해결을 요청하는 문제들은 질투, 연민, 공포, 충성과 같은 다양한 감정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이러한 인간 군상을 통해 미시마는 전후 일본 사회의 다양한 모순, 보다 정확히는 의미의 상실과 관계의 파괴를 보여준다. 기업사회로의 변모가 계속되면서 장시간 노동의 굴레에 빠진 경제동물이 되어버린 노동자, 교환의 대상으로 전락한 사랑, 아무도 서로를 돌봐 주지 않는 파괴된 공동체, 의롭지 못한 일로부터 등을 돌리는 나약한 기회주의 등 이 모든 것들은 하니오의 죽음을 통해 해결될 터였다.

"세계가 의미 있는 것으로 변하면 죽어도 후회는 없다는 기분과, 세계가 무의미하니 죽어도 상관없다는 기분이 어디서 서로 화해하는 것일까. 그러나 결과가 어떻든 하니오에게는 죽음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ACS로 의심되는 검은 손의 조직적인 움직임으로 인해 하니오는 계속해서 무의미의 연쇄 속으로 떠밀려갔다. 그들은 끊임없이 하니오의 뒤를 쫓으며 문제가 불거지는 것을 막는다. 하니오는 그저 자유롭고 싶었다.

"하니오는 무의미에서 시작해, 그 무의미에 하나하나 의미를 부여하는 자유를 누리는 것이 삶이라고 생각했다." 
 

이처럼 그 의도는 다양하지만 화폐를 매개로한 의뢰인들의 요구에 목숨을 거는 행위들을 반복하면서, 삶의 의미에 대한 부정 그 자체가 하니오에게 하나의 의미가 되었고 그로 인해 역설적으로 죽고 싶지 않다고 느끼게 된 것이다.

한편 ACS의 존재는 고도로 성장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시간의 의미를 다룬 또 다른 역작인 미하엘 엔데의 <모모>에 등장하는 회색인간들을 떠오르게 한다. 이들의 그늘 아래 등장인물들이 '살아도 사는 게 아닌' 무의미한 삶을 계속하게 된다는 점은 놀랍도록 닮아 있다.

<목숨을 팝니다>에서는 주인공 하니오가 목숨을 파는 거래 행위를 계기로 등장인물들과 대화를 나누고, 또 하니오의 공감 능력에 의해 그들이 지닌 문제가 드러난다는 점도 비슷하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모모가 평범하지만 '신비한' 능력을 통해 잿빛 시간을 사는 사람들에게 심장으로 느끼는 시간의 의미를 일깨워준다면 하니오는 자신은 이미 한 번 죽었다는 사실에서 깨달은 삶의 의미, 시간의 의미를 묻는다는 점이다.

전후 일본 사회의 자본주의적 고도성장의 이면을 미시마는 한 청년노동자의 자살 시도라는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행위로부터 불러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이해하기 어려운' 죽음의 선택이 만연한 세상을 살고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과로 자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   전후 일본인들이 그들의 시간을 살아내는 모습에서 미시마는 어떤 추악함을 읽어냈던 것일까. 미시마는 전후 일본 사회의 자본주의적 고도성장의 이면을 한 청년노동자의 자살 시도라는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행위로부터 불러낸 것이 아닐까.

갑자기 과로 자살을 언급하는 이유는 광고회사에서 그저 열심히 일하다 어느 날 죽음을 선택하는 하니오의 모습이 필자에게는 과로 자살자의 하나의 전형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물론 미시마가 하니오의 자살 시도의 동기를 일일이 묘사하고 있지는 않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저 열심히 일한 것이 원인인 것 같다'는 작중 하니오의 언급은 흘려듣기 어렵다. 미시마의 작품 가운데 보기 드물게 직접적으로 노동쟁의 사건을 다루었으며 <목숨을 팝니다>와 비슷한 시기에 쓰여진 소설인 <비단과 명찰>에서도 그 단초를 찾아볼 수 있다. 당시 일본 사회에 만연해 있던 가부장적 노사관계가 파탄을 맞이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물론 미시마가 철저한 평등주의자는 아니었지만 그의 기본적인 사고방식은 '천황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것이었다. '질서의 회귀'를 통해 근대를 극복하고자 했던 그에게 자본주의 체제와 그속에서 노동자들이 장시간 노동의 노예가 되어 무의미한 세계에 직면하는 모습이 아름답지 못했던 것이리라. 잘 알려져 있듯 미시마는 '안보투쟁'의 한복판에서 도쿄대학 전공투 학생들과 토론을 벌인 적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긴장뿐만 아니라 묘한 상호 존중과 공감을 읽어낼 수 있는데 그것은 이들의 자본주의와 근대성에 대한 문제의식, 그리고 '절대자'를 중심으로 하는 질서의 회복을 통해 그것을 넘어서고자 한 의지였다. 미시마에게 그 절대자가 '천황'이었다면, 전공투 학생들에게 그것은 '프롤레타리아'였다. 오늘날의 68혁명에 대한 해석의 틀을 빌리자면 전공투가 탈물질주의적 좌파였다면, 미시마는 탈물질주의적 우파였다.

물론 우리는 세계 곳곳에서 일어났던 전복적 시도들을 '실패'로 기억하고 있지만, 삶과 그 본질로서의 시간의 의미를 묻는 목소리에 다시금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상황은 달라진 것이 없다. 과로 자살로 스러져가는 수많은 노동자들이 그들의 죽음을 통해 끊임없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시간 읽어주는 사람] 게임 속 노동과 노동의 시뮬레이션 / 2019.04

[노동시간 읽어주는 사람] 

 

 

 

 

게임 속 노동과 노동의 시뮬레이션

 

 

 

 

김상민 / 문화사회연구소 

 

 

 

 

큰 아이가 초등학교에 다니기 시작할 때쯤 아이패드라는 물건이 세상에 나왔다. 노트북이나 데스크탑 컴퓨터 보다 납작한 이 태블릿으로 이런저런 것을 하는 것이 아이에게 자연스럽게 되었다. 유튜브를 찾아보거나 게임을 하는 것이 대부분의 용도였다. 친구들이 하던 게임이나 우연히 발견하게 된 게임을 설치해 플레이하곤 했는데, 유난히 좋아했던 게임들이 있다. 다름 아닌 미용실 게임과 햄버거 가게 게임이었다.

 

 

노동과정부터 자본주의 윤리의식까지 가르치는 게임의 공식 


미용실 게임은 플레이어가 애견 미용사가 되어서 줄 서 있는 손님을 자리로 안내하고 머리를 손질한 다음 샴푸를 하고 드라이어로 말려 주고서 돈을 받는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빨리하지 않거나 순서가 꼬이면 손님들이 화를 내고 가버리거나 돈을 지불하지 않기도 했다. 햄버거 가게도 비슷하다.

아이 입장에서는 난이도 높은 게임이나 멀티 플레이어 게임은 즐기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나마 단순한 루틴으로 이루어지고 정해진 순서에 따라 적절한 타이밍에 클릭이나 터치를 해주기만 하면 되니 나름 즐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주어진 단순 업무를 완료하면 금색 동전이나 초록색 지폐가 짤랑 혹은 촤르륵 소리를 내면서 자기의 아바타에게 날아가는 장면을 보는 것은 무척 보람된 일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단순한 놀이와 그에 대한 보상은 많은 게임들이 채택한 기본적 방식이다. 플레이어가 받는 보상이 실제 돈은 아니지만, 게임은 플레이어로 하여금 주어진 임무(머리 깎기, 햄버거 만들기 등)를 한정된 시간 안에 효율적으로 수행할 때에만 적절한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을 반복적으로 가르친다. 아이는 게임을 플레이할 뿐이지만 언젠가 자신이 살아갈 현실의 노동 조건 하에서 어떻게 고객에 응대하고 주어진 노동의 프로세스에 맞춰나가야 하는지 학습하고 있는 듯 보인다.

물론 정해진 순서나 시간에 맞추지 못하거나 한눈을 팔아 손님의 요구를 들어주지 못하는 경우에는 여지없이 자기 노동에 대한 적절한 대가를 받지 못한다는 매우 자본주의적인 윤리의식도 어느새 심어준다는 점에서 아이들의 게임이지만 진지하게 들여다볼 필요도 있다.

어느새 게임들은 점점 세련되고 복잡한 방식으로 디자인된다. 화려한 그래픽과 실감 나는 장면, 캐릭터의 묘사는 플레이어로 하여금 게임 내에서 노동하도록 혹은 '노동을 플레이'하면서 게임을 즐기도록 한다. 일종의 시뮬레이션 게임들에서 특히 그런 특성들이 보인다. 예컨대 농사 시뮬레이션 게임이나 트럭운전 시뮬레이션 게임은 플레이하는 일-노동이 얼마나 신나고 흥미롭고 매력적인지를 보여준다.

농사 시뮬레이션 게임에서는 광활한 미국, 유럽의 농장에서 가축을 기르거나 각종 트랙터와 콤바인 등 성능 좋은 첨단 농기계와 시설을 선택해가면서 파종에서부터 수확과 저장에 이르기까지 실제 농사를 짓는 것과 똑같은 경험을 할 수 있다. 현재 실제로 시판되고 있는 고가의 농기계 브랜드가 그대로 등장하고 농장주와 계약을 맺어 특정 농작물을 수확하는 등 농사를 지어보지 않은 이들도 실감나게 농사를 지어볼 수 있다.

트럭운전 시뮬레이션 게임 또한 플레이어가 운전기사가 되어 유럽의 경계를 넘나들며 여러 나라의 풍경과 날씨, 도로 등을 경험하면서 화물을 정해진 시간 안에 배달하는 것이 목표다. 실제 판매되고 있는 유명 자동차 제조사의 트럭 모델을 구매하기 위해서는 게임 속에서 대출도 받아야 하고 운전 도중 사고가 발생하거나 교통법규 위반을 할 경우 수리비가 들거나 벌금을 내야 할 수도 있다. 트럭에서 라디오를 듣거나 내비게이션 장치를 켤 수도 있고 심지어 장시간 운전 시에는 졸음운전을 할 위험도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게임은 정말 '게임'일 뿐일까

이처럼 현실에서의 노동 환경과 조건은 시뮬레이션 게임 속으로 들어오면서도 여전히 유지되는 것처럼 보인다. 플레이어들은 노동에 대한 시뮬레이션으로, 즉 노동을 재미로 플레이하면서 경험의 재미를 얻는다. 게임이 재현하는 상황이나 시각적 경험은 현실에서와 무척 유사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게임을 통해서 플레이하는 노동은 언제나 노동이 아니라 플레이, 즉 놀이가 된다.

그렇다고 해서 게임 속에서의 노동이 무의미하거나 아무 것도 아닌 것은 아니다. 노동을 시뮬레이션함으로써 플레이어는 여전히 노동을 경험하는 셈인데, 때로는 그 노동의 시간과 강도가 단순히 감내해야 할 것, 게임처럼 즐겁고 즐길만한 것으로 낭만화하게 된다.

게임은 게임일 뿐이니 즐기기만 하라는 것도 일견 맞는 말이지만, 게임 속에서 이루어지는 플레이어의 노동과 그 노동에 투여되는 시간, 그리고 플레이에서 생성되는 데이터는 실제로 매우 물질적인 것으로 그것이 현실과 맺는 관계는 매우 밀접하다. 말하자면, 게임의 플레이 혹은 게임을 통한 노동은 그 자체로 플레이어의 재미만을 제공하도록 설계되지는 않는다.

모든 노동의 절차가 자동화되고 가상화되는 게임 자체의 매력에 빠져들면서 플레이어는 스스로 경영자가 되는 자본주의적 인간, 호모에코노미쿠스, 나아가 노동을 놀이하거나 놀이로 노동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지금 여기에서의 노동 현실과 조건을 그저 하나의 시뮬레이션의 대상으로 경험한다.

또한 게임은 플레이어의 노동 시뮬레이션이면서 동시에 플레이어의 게임 데이터 수집과 이를 통한 미래 경제의 시뮬레이션이 될 수도 있다. 트럭운전 시뮬레이션 게임 플레이어들의 데이터가 머지않아 무인(자동운전) 트럭의 인공지능 알고리즘이나 플랫폼을 제작하기 위한 기본 데이터로 쓰일지 누가 알겠는가. 게임 속 노동이 현실노동의 시뮬레이션이 되고 또 그것이 인간의 노동을 대체할 자동화의 시뮬레이션이 되는 그런 시대가 금방 도달할 것만 같다. 그때 인간의 노동은 또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