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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안전보건활동가에게 듣는다] 동료의 죽음을 안고 시작한 노안 활동 / 2019.06 [노동안전보건활동가에게 듣는다] 동료의 죽음을 안고 시작한 노안 활동 나래 / 상임활동가 격동의시기였다. 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열기 속에서 탄생한 금속노조 SJM지회는 이현옥 노안위원에게 노동운동의 시작이자 마침표가 될 곳이기도 하다. 그 역시 근무를 시작한 20대 시절엔 노동조합에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회사가 노동조합을 탄압하는 과정에서 마주한 현실은 결코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그 생각으로 시작한 활동이 조직부장, 체육부장, 부지회장을 거쳐 가장 최근엔 노동안전부장을 4년간 역임했다. 그에게 노안활동의 의미를 물으니 "가장 힘들었고, 가장 의미 있는 활동"이었다고 웃으며 대답했다. SJM지회는 2012년 용역업체를 동원해 직장폐쇄를 단행했던 노조파괴 사업장이기도 했.. 더보기
월 간 「일 터」/[노동안전보건 활동가에게 듣는다]

[노동안전보건활동가에게 듣는다] 동료의 죽음을 안고 시작한 노안 활동 / 2019.06

[노동안전보건활동가에게 듣는다] 

 

 

동료의 죽음을 안고 시작한 노안 활동 

 

 

나래 / 상임활동가 

 

격동의시기였다. 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열기 속에서 탄생한 금속노조 SJM지회는 이현옥 노안위원에게 노동운동의 시작이자 마침표가 될 곳이기도 하다. 그 역시 근무를 시작한 20대 시절엔 노동조합에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회사가 노동조합을 탄압하는 과정에서 마주한 현실은 결코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그 생각으로 시작한 활동이 조직부장, 체육부장, 부지회장을 거쳐 가장 최근엔 노동안전부장을 4년간 역임했다. 그에게 노안활동의 의미를 물으니 "가장 힘들었고, 가장 의미 있는 활동"이었다고 웃으며 대답했다. SJM지회는 2012년 용역업체를 동원해 직장폐쇄를 단행했던 노조파괴 사업장이기도 했다. 이 투쟁을 계기로 노조는 공장 담벼락을 넘어 지역과 함께 살기를 고민하기 시작했고, 이현옥 노안위원 역시 안산노동안전센터 운영위원, 마을 협동조합 마실의 이사로 활동을 하고 있다. 지난 5월 22일에 그를 직접 만나 공장 담벼락을 넘어선 노안활동의 고민을 들어봤다.
 



 후배의 죽음과 본인의 아픔으로 시작한 노안활동

"제가 활동하게 된 계기요? 투쟁하신 분들이 가열찬 투쟁 열기만으로 활동했던 건 아니고, 살펴보면 가족, 친지, 그 분들을 도왔던 누군가의 죽음을 목격하면서 함께 했던 것도 있어요. 저 역시도 노동조합 활동을 옆에서 보면서 저 활동이 정말 필요하고 정당한 활동이라고 생각해 노동조합 활동을 하는 겁니다. 일터를 지키기 위한 싸움이죠."
 
반월공단과 시화공단 두 곳에 있는 SJM은 각각 자동차 벨로우 생산과 발전소, 조선소 등에 들어가는 플랜트 사업을 하고 있다. 노동조합은 장시간노동 철폐, 심야노동 철폐를 위해 주간연속 2교대제 전환, 주40시간 노동 쟁취 투쟁 활동에 집중했다. 그 활동 가운데 노동안전보건운동을 하게 된 계기를 물었다.

"저에겐 두 가지 계기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여종엽이란 후배 때문이었어요. 아직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제가 노동안전보건 활동에 관심이 없을 때, 노동조합도 노안활동보다 조직화 문제에 관심이 많을 때 그 친구가 근골격계 질환으로 아주 아팠어요. 저희가 플랜트 용접 일을 하다 보니깐요. 산재 신청을 하고 다시 현장으로 복귀하고.. 그게 반복됐죠. 그러다 보니 업무 강도가 높은 상황에서 아픈 동료에 대해 따뜻한 마음으로 잘 위로해주질 못했어요. 관리자나 주변 동료들이요. 그 친구가 얼마나 아팠는지 몰랐으니깐요. 기억나는 게 종엽이가 날 좋을 때 공장 담벼락에 앉아서 혼자 있는걸 보고 가끔 같이 이야기도 나누고 했었어요. 그러다 얼마 뒤 그 친구가 자살했어요. 노조에서 함께 산재 투쟁을 벌였고요. 결국 산재로 인정이 됐죠. 그 계기로 노동조합도 노동안전보건활동에 눈을 뜨게 됐어요."

"두 번째는 저의 산재 경험 때문이에요. 8년 전쯤에 일을 하다가 다쳤어요. 위험했죠. 큰 쇳덩어리가 넘어져서 저를 쳤는데, 쇠붙이에 머리를 부딪혔는데 이마가 오픈됐죠. 인생 끝났다고 생각했어요. 다행히 치료가 잘 됐죠. 저 역시 산재를 당하고 보니 노동안전보건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2004년 11월 5일, 31세의 젊은 나이로 자살한 여종엽씨는 10년 넘게 조립작업을 해오다가 2001년 목과 어깨에 근골격계 질환을 얻어 산재 요양 치료를 받았다. 하지만 일을 다시 시작하면서 통증이 재발했고, 2003년까지 산재와 공상 치료 그리고 복귀를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2004년 4월엔 허리에 근골격계 질환까지 얻게 됐다. 허리치료를 위해 산재 요양을 신청했지만, 근로복지공단은 산재승인 여부를 계속 미뤘고, 그 과정에서 고인은 신체적 고통뿐만 아니라 우울증까지 발생해 정신적 건강마저 크게 훼손됐다. 산재로 인한 고통을 멈추기 위해 극단적 선택을 한 그의 죽음은 노동조합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고 큰 충격과 아픔을 준 사건이기도 했다. 이후 노동조합은 노동강도, 근골격계질환 등 다양한 의제로 노안활동을 벌여나갔다.

"근속이 오래되다 보니까 제가 노안부장 포함해서 노안활동만 10여년 가까이 했는데, 사실 우리 사업장 100%가 근골 질환자들이에요. 치료 안받아본 사람이 없고 공상, 산재를 안한 사람이 없을 정도로 다 아파요. 그래서 종엽이가 많이 아팠던 거고 그 친구가 가고 나서 현장 개선 사업에 집중했죠. 근골격계유해요인 조사도 하기 시작했고요. 증상이 있으면 동행 진료해서 진단이 나오거나 증상이 있으면 근무 중 치료를 하거나 휴업 치료를 받게 하거나 단계별로 면담을 통해 진행하고 있습니다."

공상 없는 일터의 중요성

이현옥 노안위원에게 가장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사업은 어떤 것이었는지 물었다.

"제가 노안부장을 하면서 가장 문제의식을 느낀 건 '공상' 문제였어요. SJM이 공상 제도가 얼마나 잘 되어 있었냐면 무조건 증상 있어서 요구하면 진료를 통해 휴업치료를 받을 수 있었어요. 아파서 일 못 하겠다고 얘기하면 2~3주 휴업을 했죠. 급여도 120%까지 줬고요. 사실 그땐 급여가 아주 낮았기 때문에 처리해준 것도 있죠. 그러다 보니 치료를 많이 받기는 하는데 도리어 환자가 늘어난 거에요. 우리 입장에선 아이러니했죠. 그러면서 공상이란 제도가 정말 우리한테 좋은 것인가라는 고민이 들기 시작했어요."

"두 번째는 산재 은폐 문제였죠. 그래서 공상을 줄여야겠다고 판단해 노조 임원들과 상의했어요. 공상 문제를 짚어야 한다, 왜냐면 이 제도를 그대로 두면 회사도 노동조합 탄압의 구실로 삼겠다 싶더라고요. 노동력 상실 문제는 자본과 굉장히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2012년에 직장폐쇄가 있었다고 봐요. 직장폐쇄 전 압박이 많았거든요. 회사가 우리에게 했던 말이 환자가 너무 많다, 1년에 의료비로 5억 이상이 든다, 근로 손실수가 어마어마하다고 했거든요."

"직장폐쇄 투쟁 승리하고 나서 노안부장이 됐어요. 그 뒤에 임원들과 본격 논의를 시작해서 현장에서 공상을 없애고 산재로 집중하자고 했어요. 조합원들의 반발이 거셌죠. 그 좋은 제도를 왜 없애냐고요.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어요. 문제를 더 크게 봐야 했죠. 단순한 공상 문제가 아니었어요. 산재은폐로 인한 사업장 개선 문제, 공상은 나가지만 재발 방지가 안 되는 문제 같은 거요. 그래서 금속노조 노안실에 문의를 해봤어요. 금속 사업장 중에 산재하는 곳이 있냐고 하니 금호타이어, 유성 정도를 얘기하더라고요. 그래서 그 뒤에 계획을 세워 재해가 발생하면 공상이 아닌 산재로 처리한다고 산업안전보건위원회를 통해 합의했어요. 그리고 지금까지 온거죠. 그땐 잠을 못잘 정도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어요. 다행히 잘 버텨온 것 같습니다."

그는 획기적 변화가 단번에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점진적으로 조금씩 변화하는 것, 조합원 마음속에 각인되면서 조금씩 바뀌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며 당시 일을 회상했다. 어려움이 많은 현실 속에서 노동조합이 노동안전보건 문제에 관심을 갖고 노력해야 하는 이유를 뭐라고 생각할지 궁금했다.

"노동안전은 권리라고 하죠. 생산의 도구로 활용되어선 안돼요. 그렇기 때문에 알권리 사업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봐요. 왜 문제가 되고, 어떤 이유로 이렇게 해야 하는지를 모두가 알아야 하는 거죠. 노동자가 시민이기도 하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공장이란 담벼락을 넘어서 시민과 아직 조직되지 못한 노동자들에게 문제를 알려나가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도 도움이 된다고 봐요. 사실 공장 담벼락 안으로 들어가기 쉽지 않거든요. 노동안전보건운동을 노동조합만 있는 곳에서 할 건 아니잖아요?"


 2012년 직장폐쇄 투쟁을 경험하며 이현옥 노안위원은 연대의 중요성을 절실히 깨달았다. 그러다보니 SJM이라는 일터만 바라보는 것이 아닌 더 확장된 운동을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 고민속에서 2년 전 안산노동안전센터가 설립됐다. 설립 과정에 누구보다 애정과 힘을 쏟은 그였다.

"거창할 게 없어요. 미조직 노동자, 노동안전 사각지대에 있는 노동자들에게 산재 받을 권리, 알권리 등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는 것들을 하자고 생각했어요. 거리 상담, 산재 접수, 직접 방문해서 면담도 하고요. 소책자도 만들어서 홍보도 했죠. 지금 그 정도로 사업을 하고 있어요. 우리가 SJM 직장폐쇄를 당하고 나서 탄압을 이길 수 있었던 아주 중요한 힘은 사회적 연대의 힘이었어요. 단사의 힘으로 버티긴 했지만 주변에서 도와주지 않았다면 힘들었을 거에요. 그래서 사회연대에 눈을 뜨기 시작했고, 무언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게 안산노동안전센터의 탄생 계기에요. 조합원들이 기부금을 모아주기도 했죠. 저희 사업장뿐 아니라 안산지역의 금속노조 사업장, 화섬 사업장도 함께 고민하고 힘을 모았습니다."

실제 SJM이 위치한 반월시화공단은 대부분이 영세사업장이다. 그러다보니 아주 열악한 사업장이 많다. 각 사업장 안으로 직접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이들은 본인들의 점심시간을 활용하고 있다. 공단 중식 선전전을 통해 여러 노동조합의 보안부장들이 권리수첩도 배포하고, 직접 만나보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전국에서 고군분투 하고 있을 노동안전보건 활동가들에게 마지막으로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물었다.

"안을 챙겼으면 좋겠습니다. 주변을 챙기고 그들과 같이 만들지 않으면 결국 고립될 수밖에 없어요. 그것이 마지막으로 드리고 싶은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