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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환경의사가 만난 노동자 이야기] 진단보다 치료가 우선 / 2018.05 진단보다 치료가 우선권종호 직업환경의학 전문의서울 시내의 지하철 건설 현장으로 출장 검진을 나간 날이었다. 새벽부터 때 묻은 작업복에 안전화 차림으로 줄을 서서 기다리던 노동자들은 한창 정선에서 채광이 한창이던 때 갱도로 내려가려는 광부들의 모습처럼 보였다. 서울 한복판에서 보는 1970년대 광부들의 모습에 이질감을 느끼던 것도 잠시, 이내 정신없는 문진이 시작되었다. 문진이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아 여기저기 볼멘 목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했다."매년 똑같은 폐기능 검사, 청력 검사를 뭐하러 하느냐." "검사한다고 달라질 것도 없고 나아질 것도 없는 그런 검사들을 병원이 돈 벌려고 하는 것 아니냐." "차라리 그 돈으로 사람을 더 써주던가, 환풍기를 좋은 걸로 바꿔주던가, 소음이나 좀 줄일 수 있게 개선해 ..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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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환경의사가 만난 노동자 이야기] 진단보다 치료가 우선 / 2018.05

진단보다 치료가 우선

권종호 직업환경의학 전문의

서울 시내의 지하철 건설 현장으로 출장 검진을 나간 날이었다. 새벽부터 때 묻은 작업복에 안전화 차림으로 줄을 서서 기다리던 노동자들은 한창 정선에서 채광이 한창이던 때 갱도로 내려가려는 광부들의 모습처럼 보였다. 서울 한복판에서 보는 1970년대 광부들의 모습에 이질감을 느끼던 것도 잠시, 이내 정신없는 문진이 시작되었다. 문진이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아 여기저기 볼멘 목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매년 똑같은 폐기능 검사, 청력 검사를 뭐하러 하느냐." 
"검사한다고 달라질 것도 없고 나아질 것도 없는 그런 검사들을 병원이 돈 벌려고 하는 것 아니냐." 
"차라리 그 돈으로 사람을 더 써주던가, 환풍기를 좋은 걸로 바꿔주던가, 소음이나 좀 줄일 수 있게 개선해 달라."

실제로 지하철 건설 현장의 상황은 매우 열악하다. 예를 들면, 지하철 건설 현장 위의 도로를 뒤덮은 철판 소음 같은 것이 있다. 밖에서는 그 위를 차로 지나면서 잠깐 소음을 접하지만 지하의 건설 현장은 그 소음을 직접, 그것도 작업 시간 내내 접하게 된다. 그럼에도 건설 현장 특성상 산재 사고의 위험이 크고 작업자들 간 의사소통을 하며 진행해야 하는 작업이 많기 때문에 귀마개에 귀덮개 까지 할 정도로 차음 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때문에 다른 건설 현장에 비해 소음성 난청인 노동자들이 훨씬 많고 그 정도도 심각했다.

아무리 청력 검사를 하고 수십 명의 소음성 난청자가 나와도 개선되지 않는 현실에 볼멘소리가 나올만하다. 위험해서, 작업의 특성상 귀마개를 할 수 없는 상황이니 이대로 청력 손상을 두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인가. 이럴 경우 매우 큰 소리는 줄여주고 주변의 작은 소리는 반대로 적정 수준으로 증폭시켜주는 귀덮개를 적절히 사용하면 청력 손상을 다소 완화 할 수 있다. 실제로 공항에서 일부 사용하고 있고 최근에는 공군에서도 2016년부터 2022년까지 1만 개를 공급하기로 했다.

지하철 건설 현장에는 매년 반복되는 청력 검사보다 위와 같은 보호구가 더욱더 절실하다. 이러한 보호구로도 부족하다면 추가적인 시설 개선도 필요할 수 있다. 즉, 검사를 통한 진단보다 문제 되는 질환에 대한 치료가 시급한 것이다. 현재의 상황은 감기 환자가 폐렴으로 진행되는 것을 확인하고도 적절한 항생제 치료 없이 감기약만 주는 것과 같다. 좀 더 자세히 비유하자면 폐렴이 악화되는 것을 매년 강제적인 엑스레이 촬영으로 확인하면서 제대로 된 치료는 전혀 하지 않는 매우 비정상적인 상황이다. 

물론 정확한 진단과 조기 발견도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의 궁극적인 목표는 적절한 치료가 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폐렴을 다시 예로 들면, 폐렴을 치료하기 위해 사용하는 항생제는 폐렴의 원인이 되는 여러 종류 세균 중에 정확한 원인균이 세균 배양 검사를 통해 밝혀지지 않았더라도 정황상 예상되는 세균에 대해 효과가 좋을 것으로 보이는 '경험적 항생제'를 통해 치료를 먼저 시작한다. 더 큰 손상을 막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치료가 정확한 진단에 앞설 수 있다는 것이다.

특수건강진단, 근골격계 유해요인 조사, 위험성 평가, 직무스트레스 및 뇌심 발병 위험도 평가 등 노동자들은 수많은 '진단' 과정을 매번 겪고 있고 이를 통해 발견된 노동 환경 문제들에 대한 개선 '처방'까지 그 안에 포함되어있다. 하지만 정작 실제 현장을 바꾸는 '치료'는 얼마나 되고 있는가. '치료'에 해당되는 시설 및 보호구 개선, 인력 충원 등에 '진단'에 사용되는 비용만큼이라도 사용되고 있는가. '진단'으로 행해지는 항목을 일부 조정해서라도 '치료'를 위한 비용으로 사용할 수는 없을까(실제로 특수건강진단으로 청력검사를 재검까지 모두 시행하는 경우 비용은 6만 원 정도. 반면 귀덮개 정가는 18만 원 정도다).

핸드폰이 컴퓨터의 성능을 뛰어넘는 시대, 청소 로봇이 상용화된 시대이다. 그만큼 노동 환경을 개선할 수 있는 기술도 크게 발전해왔다. 하지만 노동 현장에서는 법적으로 정해진 '진단'과 '처방'에 사용될 비용이 있을 뿐 발전된 기술을 통해 '치료'하는데 쓰일 비용은 필요 없다. 누구도 강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특수건강진단을 위해 길게 줄지어선 노동자들 사이의 볼멘소리는 이와 같은 비정상적인 '진단'과 '치료' 상황에 대한 당연한 불만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