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주에게 노동시간 기록과
제출 의무를 부과하자
최민 상임활동가, 직업환경의학 전문의
내 노동시간 기록에 대한 권리가 내게는 없다
농협정보시스템에서 일하던 한 IT 노동자는, 10년간 일하던 중 계속된 과로로 면역력이 떨어져, 결핵에 걸려 폐절제 수술까지 받게 됐다. 큰 수술 후 복귀했지만, 그 다음 해까지 완쾌되지 않아 휴직과 복직을 반복했다. 회사는 수술한 이듬해, 휴직 상한기간 1년을 채운 이 노동자를 해고했다. 해고까지 당하고 나니 억울했다.
"과로로 면역력이 약해졌고 폐 절제 수술까지 받아야 했다"는 점을 입증해 산재 인정을 받고자 했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제일 먼저 면역력이 떨어질 정도로 과로했다는 점을 증명해야 했다. 해고까지 한 회사가 근로 시간 관련 자료를 순순히 내놓을 리 만무했다. 결국 이 노동자는 시간외근로 수당을 청구하는 소송을 진행했고, 자신의 주장보다는 적지만 1천 427시간의 시간외근로를 인정받았다. 그는 시간외근로를 강요당했다는 점을 입증한 1심 판결 이후에야 근로복지공단에 산재를 신청할 수 있었다. 이후 과정도 순탄치는 않았다. 공단의 심사 결과는 요양불승인 처분, 결국 항소심까지 가는 소송을 통해 산재를 인정받았다. (2016.6.2. 서울고법, “폐 잘라낸 SW개발자 산재 인정하라" (http://www.zdnet.co.kr/news/news_view.asp?artice_id=20160602151425)
올 해 5월 게임업체 넷마블의 계열사 12곳에서 법정 노동시간 초과와 연장근로수당 체불이 대대적으로 적발됐다. 지난 한 해만 해도, 전체 노동자 3250 명 중 2057 명이 법정 노동시간을 초과해서 일했고, 체불된 연장 근로수당은 44억 원이나 됐다.
그 동안 연장근로수당을 주지 않던 회사가 자발적으로 노동시간 기록을 내놓은 것은 아니었다. 서울지방고용노동청 광역근로감독과 디지털증거분석팀에서 건물 출입 기록 880만 건, 시스템 접속 기록, 컴퓨터 사용 기록, 야근 교통비 및 식대 지급 내역 등을 모두 찾아내 분석해서 잡아낸 것이다.
이 팀은 파리바게뜨에서 협력업체 제빵기사들의 연장근로수당을 축소 지급한 사건에서도 톡톡한 역할을 해냈다. 아예 출퇴근 시간을 전산 조작해 임금을 떼먹던 회사 내 별도의 서버에서, 노동자들이 직접 입력한 출퇴근 시간 원데이터를 찾아낸 것이다. (2017.8.6. 넷마블 체불 잡아낸 디지털 포렌식, 노동법 위반 꼼짝 마) (한겨레 http://www.hani.co.kr/arti/society/labor/805733.html)
노동시간 기록과 보관을 법으로 규정한다면
현행법상 사업주에게는 노동자 노동시간을 기록할 의무가 없다. 체불임금, 불법적인 연장근무 적발을 목적으로 근로감독을 하더라도, 회사에서 “근로시간 기록이 없다”고 버티면 디지털 포렌식 등을 동원하지 않으면 장시간 노동을 적발할 수 없다. 건강 문제때문이든, 떼어먹힌 임금 때문이든 노동자가 자신이 일한 노동시간 기록을 원할 때도 마찬가지다. 위 두 사례는, 체불임금 소송까지 불사하며 본인의 장시간 노동을 밝혀내고 인정받은 노동자의 노력과 신기술로 무장한 성실한 공무원에 의해 장시간 노동 실태를 숨기려던 회사의 장막을 거둬낸 사례다. 그런데, 언제까지 이 두 사례를 미담으로 기억할 것인가? 애초에 노동시간 기록을 강제하고, 이에 대한 정보를 노동자나 당국이 요구하는 것이 당연한 권리가 될 수는 없을까?
노동시간법을 따로 제정하여 노동시간을 세밀하게 규정하는 유럽 국가들은 대부분 노동시간을 기록하고, 기록을 2~3년간 보관해야 할 의무를 사업주에게 부여하고 있다. 핀란드의 노동시간법은 각각의 노동자가 노동한 시간, 그에 해당한 보수를 기록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 노동시간은 정규 노동시간, 연장근로 시간, 일요일 노동시간, 초과 노동시간 등을 모두 분류해서 기록해둬야 하고, 각각에 해당하는 보수도 따로 기록해둬야 한다. 기록 보관 기간은 2년이다. 영국의 경우는 최대 노동시간과 야간 노동시간을 따로 기록을 남겨 2년간 보관해야 한다. 독일의 경우도 정해진 하루 노동시간을 초과하는 연장근무 시간을 기재하고, 이 근로시간 연장에 동의를 표시한 노동자의 목록도 작성해서 2년간 보관하게 돼 있다.
기록된 노동시간은 장시간 노동 예방으로
기록과 보관은 활용을 위해서다. EU 노동시간 관련 가이드라인은, 각 나라에서 국내법으로 이런 노동시간 기록을 법적 의무로 할 뿐만 아니라 그 기록을 노동부 등 관할 주무 기관의 감독 하에 두도록 권유하고 있다. 관할 주무 기관이 이 기록을 활용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기록을 사후에 확인하는 데에만 사용하는 게 아니라, 법으로 정해진 노동 시간의 상한을 초과할 가능성이 있다면, 이를 금지하거나 제한하는 데에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시간을 기록해서 보관할 의무를 부과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노동시간이 법적 기준을 넘지 않도록 미리 제한한다고? 과로로 산재가 발생한 다음에도 노동시간 기록 얻는 게 하늘의 별 따기고, 노동부 근로감독관이 근로감독을 하려고 해도 노동시간 기록을 얻는 게 쉽지 않은 우리로서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적정한 노동시간’이라는 노동자 권리를 보장하는 데, 어떤 상황이 더 적절할지 물을 필요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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