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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환경의학의사가 만난 노동자 건강 이야기] 일하다 걸리는 폐병은 쌍팔년도 얘기 아닌가요? / 2017.4 일하다 걸리는 폐병은 쌍팔년도 얘기 아닌가요? 이이령 운영집행위원, 직업환경의학전공의 저는 대학병원에서 직업환경의학 전공의를 하고 있으며, 특수 능력(?)을 가진 별종 의사입니다. 보통 병원에서 폐질환 환자들은 호흡기 내과에서 진료를 보지만, 제가 속한 병원은 대학병원 중 유일하게 직업환경의학과 의사가 진폐증 환자 진료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의사 중에서도 소규모 과를 전공하며, 특수한 질병을 가진 환자들의 주치의 경험을 가진 저는 어찌 보면 별종 의사인 셈입니다. 입원 환자의 대부분은 과거 광부나 석공으로 일하다 생긴 진폐증으로 산재 승인 받아 외래 치료를 받던 중 폐렴, 흉수, 결핵, 폐암 의심 등으로 입원하는, (서른네 살인) 저의 아버지 세대이거나 할아버지 세대인 분들입니다. 비슷한 직업력을..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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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환경의학의사가 만난 노동자 건강 이야기] 일하다 걸리는 폐병은 쌍팔년도 얘기 아닌가요? / 2017.4

일하다 걸리는 폐병은 쌍팔년도 얘기 아닌가요?



이이령 운영집행위원, 직업환경의학전공의



저는 대학병원에서 직업환경의학 전공의를 하고 있으며, 특수 능력(?)을 가진 별종 의사입니다. 보통 병원에서 폐질환 환자들은 호흡기 내과에서 진료를 보지만, 제가 속한 병원은 대학병원 중 유일하게 직업환경의학과 의사가 진폐증 환자 진료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의사 중에서도 소규모 과를 전공하며, 특수한 질병을 가진 환자들의 주치의 경험을 가진 저는 어찌 보면 별종 의사인 셈입니다.


입원 환자의 대부분은 과거 광부나 석공으로 일하다 생긴 진폐증으로 산재 승인 받아 외래 치료를 받던 중 폐렴, 흉수, 결핵, 폐암 의심 등으로 입원하는, (서른네 살인) 저의 아버지 세대이거나 할아버지 세대인 분들입니다. 비슷한 직업력을 가진 환자들을 보다 매너리즘에 빠져들 때쯤이면, 현직의 용접공 같은 분들이 요새 들어 숨이 조금씩 차는 게 혹시 진폐증 아니냐며 외래에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정신이 번쩍 들면서 용접 흄·분진·가스 등에 노출되는 수많은 전·현직 노동자들은 과연 폐질환 진료를 어디서 받는 것일까? 서울에 있는 대학병원이 멀어서 공단 주변 병원들에서 진료 받는 것인가? 산재신청은 하는 것일까? 궁금증이 꼬리에 꼬리를 물게 됩니다.


질병에 따라 다르지만, 진폐증은 물론이고 만성폐쇄성폐질환, 간질성 폐질환, 폐암 등의 발생에 직업적인 요인이 약 15~20% 기여한다고 알고 있는데, 산재신청·승인이 험난한 우리나라의 상황을 고려한다 해도 탄광부진폐증 환자 외에 제 눈에 보이는 환자가 한참 적기 때문입니다.


샤이(?) 직업성 폐질환 환자들

작업환경측정을 위해 방문한 조선소에서 의문의 실마리를 찾았습니다. 조선소는 연마 작업자, 도장공, 용접공은 물론 그 주변에서 일하며 용접 흄·분진 등에 매일 노출되는 노동자들이 많습니다. 대공장이며 노동조합 힘도 있으니 폐질환 산재 신청자가 많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오히려 거의 없었습니다. 노동자분들과의 대화 내용, 진폐증 환자 주치의를 하며 교수님들과 환자들에게서 배운 지식과 경험 등을 접목해 그 이유에 대해 어느 정도 유추해 보았습니다.


만성 폐질환은 대부분 질병 발생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며, 증상도 서서히 생깁니다. 그래서 건강한 사람이 입사하는데다가, 질병이 진행하고 있어도 한창 일하는 30~40대에는 대부분 증상이 없거나 약간의 기침·숨참이 있어도 동료들에게 꾀병 환자로 낙인찍히고, 회사에 알려져 잘리고 싶지 않아 그냥 넘기는 게 대부분입니다. 증상은 은퇴할 나이 즈음이나 은퇴한 후에나 심해지는 경향이 있는데 이미 그때는 주변에 동료 노동자도 노동조합도 없어 산재에 대한 정보도 없을 것입니다. 혹은 다른 직종으로 이직하고 나서 증상이 생겨서 생각을 못 했거나, 치료하는 병원에서 직업적인 원인을 고려하지 못해서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속한 병원에 오는 많은 탄광부진폐증 환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본인이 담배를 피웠고, 마스크를 잘 못 썼으며, 배운 게 이것밖에 없어 먼지 구덩이인 줄 알면서도 일한 것에 대한 자책이 있어 폐병은 내 잘못이려니 하며 사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대기업이며 강성노조가 있다는 조선소의 사정도 이럴 진 데 중소규모 사업장, 하청노동자들, 외국인 노동자들의 상황은 더 명확해 보입니다. 요새 정치권에서 샤이 트럼프, 샤이 보수라는 말이 있는데, 대규모로 존재하나 드러나지 않는 직업성 폐질환 환자들을 샤이 직업성 폐질환 환자라고 불러야 할까요?


석면 꼴 안 나려면, 알파고 시기 신기술에 선제적 예방이 중요

과거 노출로 인한 직업성 폐질환 환자들을 드러내는 것과 동시에 흔히 4차 산업혁명이라 불리는 현재의 산업 구조 변화에 맞춰 미래의 직업성 폐질환을 예방하려는 노력도 중요합니다. 나노 물질은 ‘꿈의 물질’로 불리며 사용이 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물질이라도 큰 입자일 때보다 나노 입자 상태일 때 인체에 더욱 유해한 물질일 수 있음에도 노출 기준 조차 부재하고, 흡입 시 건강 영향에 대한 연구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한국은 나노 물질을 사용하는 정밀화학, 제약, 화장품 제조 및 전자산업 등의 비중과 중요성이 커지고 있어 더욱 우려됩니다. 또한, 사용이 폭발적으로 늘어날 3D 프린팅에 사용되는 물질로 인한 호흡기 문제도 제기되는데 이에 대한 대비는 전무한 수준입니다. 게다가 3D 프린팅을 이용한 소규모 사업장이 늘 것으로 예상하는데, 소규모 사업장이 안전보건 사각지대인 건 말하면 입 아플 정도로 잘 알고 계실 겁니다.


건강 영향에 대한 고려 없이 무턱대고 사용하다가 문제 발생 후 임기응변식 대처로 노동자·시민의 안전보건에 위협을 일으켜 ‘기적의 물질’에서 ‘침묵의 살인자’로 불리는 석면과 가습기 살균제 등의 역사를 돌아보면 산업 구조 변화 초기, 신규 물질 도입 전에 인체 건강 영향에 대한 선제적 예방 및 연구가 절실해 보입니다. 최근 관심이 증폭되는 미세먼지 대책만큼, 오히려 그보다 더 큰 비중으로 정부·산업계 등의 대책 마련이 필요합니다. 직업성 폐질환은 쌍팔년도 이야기가 아니라 알파고와 그 친구들이 많아질 미래에도 중요한 문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