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Z까지 노동이야기] 모든 노동자는 자기를 돌볼 시간이 필요해요 / 2018.03

모든 노동자는 자기를 돌볼 시간이 필요해요

- 컨벤션기획 노동자 백진슬 님 인터뷰

이나래 상임활동가


교복을 입고 학교에 다니던 시절 가끔씩 설레는 마음으로 친구들과 서울행 지하철을 탄 적이 있다. 옹기종기 모여 내부로 들어가 연신 감탄을 했다. 내 키의 몇 십배나 되는 높은 천장과 화려한 조명, 북적이는 사람들 속에서 정신없이 돌아다녔던 곳. 코엑스, 킨텍스 등 이름으로 더 익숙한 바로 컨벤션 센터였다. 이번 <일터>가 만난 다양한 노동이야기의 주인공은 바로 컨벤션 기획을 하는 백진슬 님이다. 올해 입사 4년 차로 전공을 살려 일하고 있다는 그를 지난 2월 20일 한 카페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혹시 마이스 산업이라고 들어보셨나요? MICE산업은 회의(Meeting), 포상관광(Incentives), 컨벤션(Convention), 전시회(Exhibition)의 머리글자를 딴 용어로, 폭넓게 정의한 전시·박람회와 산업을 말해요. 한국에서도 강조하는 산업 중 하나죠. 그중 컨벤션이 주로 모든 걸 다 포함한다 할 수 있어요. 흔히 생각하는 미술전 같은 건 아니고, 코엑스나 킨텍스 같은 데서 맨바닥에 부스를 짓고 참가 기업사들을 모집해서 비즈니스 대 비즈니스, 비투비로 전시할 때도 있고, 기업과 소비자가 만나는 비투씨 퍼블릭 전시할 때도 있어요. 그 전시회를 만드는 걸 컨벤션 기획이라고 해요. 말 그대로 기획이긴 한데, 분야가 컨벤션인 거죠.”


생소한 분야인 컨벤션 기획이 무엇이냐 묻는 말에 상세하게 소개를 해주는 백진슬 님은 많은 사람들이 컨벤션 기획을 생소해 하고, 많이들 어려워한다며 아쉬워했다. 본인은 대학에서 전공을 하면서 컨벤션 기획이라는 것에 대해 어렵게 느껴져 1년간 휴학을 하기도 했지만,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우연한 기회로 베이비페어(임신출산육아박람회) 진행요원으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면서 자연스레 지금의 직장, 베이비페어 전시기획팀에 입사를 하게되었다.

“많은 분이 대부분 미술품 전시를 생각해요. 그래서 지원자 전공이 예체능이 많죠. 컨벤션이란 단어가 생소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또 자주 들어보는 단어기도 하거든요. 코엑스에선 매주 전시가 열려요. 목, 금, 토, 일 4일간요. 한 번씩은 가보셨을텐데, 컨벤션으로 얘기를 하고, 그걸 ‘기획한다.’ 라고 생각하면 어려워하세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저희가 전시를 여는 거예요. 해당 장소를 대관해서 거기에 우리가 하나부터 열까지 다 만들어요. 예를 들면 우리 회사에서 언제부터 언제까지 전시를 열거라고 홈페이지와 이전 참가기업에 안내하면 신청을 하고, 자리를 배정하죠. 그리고 준비해서 전시회를 열게 돼요.”

컨벤션은 서울에서는 코엑스, 킨텍스 등에서 많이 열리지만, 그 외 지역에서도 다양한 분야와 규모로 열린다. 그렇기 때문에 출장도 제법 잦다. 특히 전시 특성상 시뮬레이션이나 예행연습이 안 되기 때문에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백진슬 님은 보통 전시장과 가까운 곳에 상주한다고했다. 그게 마음도 편하고, 긴급 상황에 대처하기 쉽기 때문이다.

“전시회에 참여하는 기업과 관람객들의 요구는 달라요. 예를 들어, 제가 맡고 있는 전시회로 설명드리자면, 관람객은 필요한 상품을 눈앞에서 만져보고, 저렴하게 사고 싶어 해요. 기업은 좋은 값으로 물건을 팔고 싶어 하죠. 그런 요구를 파악하는 게 필요해요. 하다못해 각자가 느끼는 온도도 다르거든요. 밖에 있다 들어온 관람객은 춥다고 느끼지만, 계속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덥다고 느껴요. 그런 세밀한 부분들까지 조율이 필요해요.”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과 전시가 이뤄지는 동안 높은 긴장이 요구된다. 굉장히 예민해지고, 본의 아니게 스스로 압박감을 주기 때문에 노동시간과 휴식시간의 균형이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백진슬 님이 다니는 회사는 대표님의 ‘업무시간이 무작정 길다고 능률이 오르는 것이 아니다’라는 철칙 덕분에 노동시간은 짧고 휴식시간은 길게 운영된다고 했다. 평소 오전 9시까지 출근하고 1시간 정도의점심시간을 가진 후 오후 5시에 퇴근을 한다. 전시가 없는 기간에는 좀 더 이른시간에 퇴근하기도 하고, 얼마 전 매서운 한파가 찾아왔던 날은 더 일찍 퇴근하기도 했다고 했다.

지금 다니는 직장의 직원 규모는 15명인데, 분야별로 최소 2~3명, 4~5명이 팀을 꾸리고 평소 일을 하고 전시회 때 필요한 인원은 진행요원 등 아르바이트를 구한다. 그러다 보니 분야별로 꾸려진 팀원들 간의 협력이 매우 중요하다. 

“하나로 똘똘 뭉칠 수밖에 없어요. 제 주변 컨벤션기획에 종사하는 분들도 그렇고요. 그래야 전시가 잘 준비되고 문제없이 끝날 수가 있거든요. 그렇지않으면 어려워요.”

그렇기 때문일까. 회사를 그만두는 일이 흔치 않다고 했다. 한 동료의 경우 최근둘째 키울 때도 육아휴직을 쓰고 다시 복직했다. 눈치를 주는 건없다. 물론 5명이 하던 일을 4명이 하면 힘은 들지만, 평소의 업무량이 부담되지 않기 때문이다. 평소 육아휴직, 연차를 써도 커버가 될 수 있도록 서로 배려해주는 문화가 존재해 안정적으로 직장을 다닐 수 있다.

“물론 전시를 더 많이 기획하고 업무를 늘릴 수 있죠. 그러려면 인원도 더 필요하고, 야근도 해야 해요. 그런 회사들도 있죠. 그런데 저희는 조금 더 안전하고, 완성도가 높을 수 있게 하자는 주의라서무리하지 않아요.”

백진슬 님이 맡고 있는 전시 분야는 임신출산육아 분야로 저출산 영향을 받긴 하지만 한 가정에 아이 한 명만 키우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한 아이에게 소비가 집중되는 경향이 커졌다고 했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성인 8명이 필요하단 말이 있어요.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친할머니, 친할아버지, 엄마, 아빠, 이모, 삼촌이요. 그러니 아이가 관심 있어 하고 재미있어하는 게 있으면 최신판 장난감과 도서를 사주죠. 출산율은 저하 돼도, 한 아이에게 정말 좋은 걸 해주려고 해요. 그러니 임신출산육아 시장은 쉽게 사라지진 않을 것 같아요. 그래도 요즘 전반적으로 시장이 안 좋아서 전시업계도 힘들다고 해요. 특히 제가 하는 베이비페어는 관람객들의 실제 구매가 이뤄지기 때문에 굉장히 예민해요. 제가 입사하기 전에 있었던 일이지만 메르스 사건이 영향이 컸어요. 임산부들과 어머니들은 미세먼지, 날씨, 온도 등에 굉장히 예민할 수밖에 없거든요. 그래서 그런 것들도 꼼꼼히 확인해야 해요.”

컨벤션 기획 일을 하면서 보람차거나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는지 물었다. 

"보람찰 때는 제가 진행요원일을 할때는 느끼지 못했던 건데요. 전시장 셋팅할 때 맨바닥에서 시작해요. 하루, 이틀만에 장치물이 셋팅되죠. 바닥재가깔리고, 그 다음날 전시에 참여하는 업체의 물건이 들어와요. 그게 단 2일 만에 뚝딱 이뤄지죠. 관람객들이 전시를 다 하고, 전시의 마지막 날 당일에 모든 참가기업사와 장치사가 철수를 해요. 그때 바닥이 정말 더럽거든요. 대부분 이사갈 때 필요 없는것들은 다 버리고 가잖아요. 그런 것처럼 정말 철거를 한 전시장 바닥이 지저분하거든요. 저는 그걸 매 전시때마다 사진을 찍어둬요. 하기 전에 제일 깨끗한 공간, 하고 나서 제일 더러웠던 공간. 그게 기분이 되게 오묘하더라고요. 뭔가 뿌듯하고, 개운해요. 아무 탈 없이 사흘동안 잘 했을때요. 더 기분이 좋을땐 참가했던 기업사들이 수고했다고, 다음에도 같이해보자고 말할때에요. 이렇게 얘기할 때 우리가 준비한 전시에 만족하고 갔구나 싶어서 행복해요.”

마치 그때의 기억을 생생하게 떠올리듯 백진슬 님의 얼굴엔 미소가 지어졌다. 자기 노동에 대한 가치와 보람, 자부심을 느낀다는 건 그렇게 소중하고 아름다운 일이란 걸 백진슬 님과의 인터뷰를 통해 새삼 깨닫게 됐다. 물론 좋은 일만 있는 건 아니다. 졸업까지 한 학기를 앞두고 입사한 회사에서 20대 초년생이 일하기란 쉽지 않았다. 특히 진행요원들과의 오해가 불거져 마음 고생 했던 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마음이 아프고, 속상하다고 했다. 그때 어린 나이의 여성이어서 더 고생했단 생각이 한편으로 들었다고 했다.

“저희 어머니도 저에게 하신 말이 날이 갈수록 화장이 진해진다고요. 그런데 저에겐 불가피한 일이기도 해요. 뭔가 그렇게 조금 더 선명하게, 또렷한 인상을 줘야 할 것 같아서 화장도 화려하게 하게 돼요. 머리도 원래 길었는데 짧게 잘랐어요. 물론 지금 제 머리가 저는 마음에 들어요. (웃음) 사람을 대하는 게 되게 어렵더라고요.” 

그에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컨벤션 기획 노동을 하는 노동자들이 행복한 일터가 어떤 풍경이었으면 하는지 물었다.

“많은 분이 컨벤션 기획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세요. 대학에서도 컨벤션 학과가 사라지고 있거든요. 문화예술경영, 관광경영으로 통합되고 있는데 개설되는 수업을 보면 프랜차이즈, 외식 이런 쪽이에요. 벽이 높게 느껴질 수 있지만, 현장에 와서 다시배워야 하거든요. 현장만의 용어가 있고 그렇게 움직여요. 모든 일은 배우는 거니까요. 사실 저는 지금 일에 만족하는 편인데, 후임이 들어오면 저도 동등하게 대하고 싶어요. 아까 말한 것처럼 팀원들 간의 분위기가 좋아야 노동자들도 즐겁게 일 할 수 있거든요. 더러 야근도 많이 시키고, 막무가내 스타일인 회사도 있을거에요. 그런 사람들 혹은 회사의 분위기 때문에 고생하는 선배들도 봤구요. 모든 회사에서 사람이 사람답게 대우 받아야해요. 그리고 본인을 아껴줘야 하고요. 그러기 위해선 일에만 매이도록 하는 장시간 노동이 아니라, 자기를 위한 시간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자기를 돌볼 시간이요.“

당당하게 자기 노동에 자부심을 느끼고 앞으로 나아가는 백진슬 님이 순간 반짝이게 보였다.

[A-Z까지 다양한 노동이야기] 후암동에서 食(식)빵과 함께 - 빵 만드는 오너 셰프 이유나 님 인터뷰 / 2018.02

후암동에서 食(식)빵과 함께

- 빵 만드는 오너 셰프 이유나 님 인터뷰

재현 선전위원장


이번 일터가 만난 이유나 님은 서울 후암동에서 빵을 만들고 판매하는 오너 셰프였다. 이유나 님은 오래도록 좋아하는 빵을 만드는 일을 하고 싶다고 했는데 그러기 위해 어떠한 노동과 일상을 보내고 있는지, 좋아하는 일을 하는데 있어서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어려움은 없는지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인터뷰는 지난 1월 22일 월요일 빵집 인근에서 진행하였다.


좋아했던 빵을 만들기 위해 준비했던 시간

“저는 원래 음악을 전공했는데, 졸업을 앞두고 미래에 대한 고민을 하며 여행을 다니다가 다른 삶도 살아보고 싶었어요. 제과에 관심이 많던 터라 대학졸업을 하고 한국에서 ‘르 꼬르동 블루’를 다니게 되었어요.”

르 꼬르동 블루란 프랑스 본교와 여러 나라에 분교를 가지고 있는 프랑스 요리, 제과, 제빵 전문 학원인데 이유나 님은 여기서 제과 공부를 마치고 관련된 일을 하다가 좀 더 심도 있게 일을 배우기 위해 캐나다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났다. 그러다 마침 다운타운의 큰 빵집에서 함께 운영하는 비스트로에서 일을 하면서 빵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정말 혼자 아무도 없는 곳에 빈손으로 영어 이력서만 몇 십장 준비해서 캐나다로 떠났어요. 그러다 괜찮아 보이는 곳에 무작정 들어가서 일자리가 있는지 물었어요. 정말 운 좋게 취직이 되었고 몇 번의 해프닝 끝에 집도 구했어요. 함께 일하는 빵팀, 제과팀, 요리팀 친구들 대다수가 퀘벡사람들이라 그런지 서투른 저의 영어에 대해 크게 개의치 않아했고, 밥은 잘 먹고 다니는 지 힘든 건 없는지 걱정해주고 많이 챙겨줬어요. 캐나다에 가기 전에 한국 가로수길 레스토랑에서 1년 넘게 막내 일을 해서 그런지 일은 하나도 힘들지 않았어요. 워킹비자가 끝날 때쯤에는 제가 원하면 취업비자를 알아봐주겠다고 했는데 제가 혼자 있기에는 외로워서 돌아가겠다고 했어요. 그 시절 생각하면 내가 꿈을 꿨었나 싶어요. 한국에 다시 돌아와서는 유명한 빵집을 돌며 맛보고 그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개인 빵집에 문을 두드려서 취업하게 되었어요.”

우리가 흔히 아는 파리바게트나 뚜레쥬르 같은 프랜차이즈와 달리 개인 빵집은 빵을 만들기 위한 준비부터 만드는 과정, 판매까지 한곳에서 이뤄진다. 때문에 그곳 직원들은 권위와 실력을 겸비한 셰프에게 빵에 대해 배우는 것은 물론 판매 등 가게 운영 전반에 대해서도 배움의 기회를 얻게 된다.

“어디서 일을 하느냐에 따라 조금씩 과정이 다른데 제가 처음으로 일한 빵집은 저희 업계에서 알만한 사람은 아는 셰프가 있는 곳이었는데 취업하고 2년 넘게 빵은 만져보지도 못했어요. 오래토록 그 가게의 미래와 함께 성장할 사람이라는 검증을 마친 사람만이 주방으로 들어올 수 있다면서 손님과의 소통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라고 했었죠. 그 당시 저희 직원들 모두 정말 열심히 일했어요. 다음날, 다 다음날까지 빵 예약은 넘쳐났고 판매는 맨투맨 시스템이라 손님 한 분 한 분 서비스에 신경을 많이 썼어야 했어요. 쉬는날에는 시장조사를 다니며 셰프님께 고서를 써 내야 했고 항상 모든 것에 대한 피드백을 서로 쏟아내고 받아들이는 시간을 보냈어요. 그러다 번아웃 된 직원들이 하나둘씩 그만두고 저 역시 그곳을 나오고 로테이션이 확실히 되는 빵집으로 취업을 하게 되었어요.”

이유나 님은 두 곳의 빵집에서 5년의 시간을 보낸 후에 2015년 5월 후암동에 [후암동 食빵]이라는 식사 빵을 만드는 빵집을 열었다. 함께 근무했던 동료들 중에도 본인들의 가게를 운영하는 친구들이 있어서 서로 도움을 주고받고 있다.


후암동에서 꿈을 펼치다

“학창시절에 부모님께서 준비해주시는 밥만 받아먹다가 외국에 나갔을 때 직접 밥을 차려 먹어보니 삼시세끼 차려먹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닌 거예요. 특히 한식이 손이 많이 가더라고요. 아침식사로라도 빵으로 대신해보니 간편했어요. 그래서 저는 밥 대신 식사로 먹을 수 있는 식사빵에 관심이 가고 만들게 되었어요.”

이유나 님은 다양한 맛을 연구하면서 후암동食빵 에서만 맛 볼 수 있는 식사빵을 만드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일반적으로 빵에 관심이 없으신 분들은 치아바타 나 깜빠뉴(컨트리브레드) 등의 유럽 빵들을 조금 생소해 하더라고요. 그래서 누구나 친숙한 식빵 틀에 넣어서 치아바타食빵, 시골食빵 등등 이런식으로 개발했어요. 건강한 아침식사를 위해 상대적으로 저온에서 장시간 발효를 하여 소화가 잘 되는 식사빵이 되도록 하고 있어요.”

후암동 동네는 어떤 곳인지, 주로 어떤 분들이 빵집을 찾아오는지 물었다.

“후암동은 남산아래 서울 한 중심에 있지만 고즈넉한 분위기를 가진 동네에요. 오래사신 터줏대감 같은 어르신들도 많고 교통편이 좋다보니 새로 유입된 젊은 가족들도 많고요. 연령대를 불문하고 많은 분들이 찾아주세요.”


후암동에서의 하루

“일단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출근해요. 낮 12시에 가게를 오픈하려면 5시에는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해야 되거든요. 전날 반죽을 해서 저온발효 해 놓은 빵도 있고요, 전날 계량해둔 재료들로 당일 반죽을 하는 빵도 있어요. 반죽을 하고 1차 발효, 2차 발효, 분할, 벤치타임, 성형, 최종발효 등등 중간 중간 짬날 때 크로와상 제품도 만들고 하면 12시까지 정신이 하나도 없어요. 12시에 가게 오픈을 하고 손님응대를 하면서 최종 발효만 남은 빵들을 2~3시 까지 차례로 구워요. 빵이 다 나오는 3시부터는 식빵 틀을 닦고 발효실이나 오븐을 청소하고 다음날 계량과 프렙을 준비해요. 그러면 해가 지고 매장 청소를 하고 빵이 다 팔리면 바로 퇴근하고 빵이 남으면 늦게까지 손님을 기다리기도 해요. 보통 8시에 끝나는 편이에요.”

이유나 님은 쉬는 날을 제외하곤 보통 15시간씩 일했다. 직원을 채용해서 교대로도 일해 봤지만 여러 문제로 인해 계속해서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루에 문 열고 있는 시간을 생각하면 제 생각에 2명이 교대로 일하면 될 것 같거든요. 이전에는 직원분이 있어서 제가 새벽에 나와서 빵 만들고 낮에 그분과 교대를 했는데 지금은 휴무를 늘리고 혼자 일하고 있어요."


허리에서부터 전해지는 고통

“일하면서 무거운 걸 많이 들어야 할 일이 많은데 이점이 가장 힘들어요. 제가 이쪽 일을 하면서 허리가 많이 안 좋아졌는데요 밀가루포대 라던가 무거운 걸 요령 없이 무조건 허리힘으로만 들어서 그랬던 것 같아요. 10여 년간 주방에서 일을 하다 보니 손목 무릎 안 아픈 곳이 없어요.”

이유나 님은 노동과정에서 겪는 어려움도 있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겪는 또 다른 어려움이 있다고도 했다.

“저처럼 결혼과 맞물려 있는 여성들이 1인 가게를 운영하기에는 굉장히 힘든 거 같아요. 저한테는 후암동 食빵이 자아실현의 공간인데 주변에서는 올해 나이가 몇이냐, 애는 언제 낳을꺼냐 이런 거만 물어보고 관심을 가지세요. 남성들과 달리 여성들은 가정을 꾸리게 되고 아이가 생기면 최소 몇 년은 일을 하기 힘들기 때문에 정말 신중한 고민이 필요하거든요”


일과 삶 균형을 맞추기 위한 노력

“쉬는 날도 바빠요. 밀린 빨래해야죠, 물리치료 받으러 병원도 다니고요, 은행일도 봐야하고요. 가게에서 사용하는 포장지에 도장도 찍어야 해요.”

이유나 님은 지난 3년간 쉼 없이 달려온 끝에 요즘 영업일을 주 4일(화~금)로 변경하면서 일과 삶의 균형을 맞추고 있다.

“저는 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충분히 쉬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가게를 오픈할 때 휴무를 정하려고 하니 사람들이 다 말리는 거예요. 가게가 자리 잡을 때까지 하루도 못 쉰다는 생각으로 일해야 한다고요. 결국 그 얘기에 설득되어 첫해엔 주6일을 영업했어요. 사실 하루 쉰다 해도 영업을 쉬는 것이지 가게는 나와서 다음날 반죽과 프렙 등을 준비하고 들어가야 해요. 무튼 그러고 나서 가게를 운영해보니 손님이 없는 요일이나 특정 시기가 있잖아요. 그래서 두 번째 해에는 주5일 영업을 했어요. 그 당시엔 후암동 食빵 이라는 책을 작업 중이라 판매는 직원과 함께 했어요. 그러고 최근에 날이 추워지면 손님도 줄고 해서 주4일 영업으로 파격 결정했어요.”

요즘 이유나 님은 소비를 줄이고 나에게 휴식이라는 시간을 투자하는 게 낫겠다는 마음으로 휴일을 보내고 있다.

“지금은 제가 몸을 혹사하면서 일하고 싶지 않아서 이렇게 결정을 했는데 사실 부양할 가족이 없으니까 가능 한 것 같아요. 만약 책임져야하는 자녀나 부모님이 계신다면 아무리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도 선뜻 이렇게 쉬겠다고는 못 했을 것 같아요."


오래도록 빵을 곁에 두었으면

인터뷰 마지막으로 이유나 님에게 이 일을 길게 하고 싶다고 했는데 10년 뒤 후암동 食빵은 어떤 모습일 것 같은지를 물었다.

“글쎄요. 저도 요즘 고민이에요. 요즘 들어 혼자 운영해 가는 것이 버거운 감이 없지 않아 들어서요. 우물 안 개구리가 되는 것 같기도 해요. 추상적으로 10년 후에 시골에 작은 빵집을 운영하고 싶어요. 저는 꼭 내 가게를 해야 되는 건 아니라서 좋은 곳이 있다면 하나의 구성원으로써 사람들과 복작대며 일하고 싶기도 해요.”

가게운영의 책임, 육체적인 부담, 여성으로서 결혼과 출산의 압박 등으로 인해 결코 쉽지 않겠지만 오래도록 이유나 님이 좋아하는 빵을 손에서 놓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래본다.

[A-Z 다양한 노동이야기] 내 꿈은 좋은 선생님이 되는 거예요 - 영어 학원 선생님 인터뷰 / 2018.01

내 꿈은 좋은 선생님이 되는 거예요

- 영어 학원 선생님 인터뷰

재현 선전위원장


이번 일터가 만난 피터 님은 비록 어릴 적 원했던 학교 선생님은 아니지만,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함께 호흡하는 영어 선생님으로 일하고 있다. 우연한 기회에 아르바이트로 시작했지만, 어느덧 5년 차에 접어든 피터님의 이야기를 2017년 12월28일 한 카페에서 직접 만나 들어보았다.


꿈과 현실의 간극이 컸던 시기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피터고요, 올해로 33살이에요. 학원에서 5년째 초. 중. 고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있어요.

피터님은 고등학교를 다닐 때부터 선생님의 꿈을 키웠다고 한다.

제가 고등학교를 일반 학교가 아닌 대안 학교에 다녔는데요. 졸업할 때 선생님이 너는 나중에 훌륭한 영어 교사가 될 거라고 기대하신다고 했었거든요. 대학교 졸업할 때 즈음 학교 선생님으로 오라는 연락도 받았고요. 그만큼 저를 잘 아는 선생님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피터님은 꿈을 이루기 위해 대학에서 영문과를 전공하고, 교직 이수를 받아 학교로 가고 싶어했다. 그러나 비민주적인 대학과 부조리한 사회에 눈을 뜨게 되면서 교직의 꿈은 접어야만 했다.

영문과에 교직 이수가 과정이 있어서 공교육을 고민했는데 학생운동하고 학생회 활동하다 보니까 공부를 못했어요. 그러다 졸업을 해야 하는데 저한테 남은 건 벌금뿐이더라고요. 그래서 벌금 갚으려고 알바를 시작한 게 학원 선생님이었는데 이게 업이 돼서 5년을 했네요.


저녁 없는 삶

피터님은 악착같이 돈을 벌기 위해 제대로 된 휴가나 휴일도 없이 5년을 일했다고 한다.

학원이라는 곳이 아무래도 열악하잖아요. 특히 학원은 저녁 늦게까지 일하고 주말에 출근을 많이 해요. 월차, 연차, 휴가 같은 것도 없고요. 일할 때 근로계약서를 쓰기는 하는데 계약서 자체가 4대 보험 되는 거 빼고는 대부분 원장님에게 유리한 조항들이거든요. 예를 들면 다른 학원에서 일하지 않는다, 과외를 하지 않는다, 이런 조항만 있는 거예요. 그나마 있는 4대 보험도 학원에서 들어준다고 하면 고맙기는 한데, 이게 또 4대 보험을 들면 월급이 줄어서 웬만하면 안 하려고 해요.

그나마 월급에 더해서 성과에 따른 인센티브제도가 있었다고 한다.제가 가르치는 반에 학생들이 늘어나면 학원마다 조금씩 다르기는 한데, 학생 한 명 당 얼마 이렇게 인센티브를 받아요. 저는 한 명당 3만 원씩 받았던 것 같아요.


반복되는 시험과 씨름하는 학원 선생님의 하루 

저는 초, 중, 고를 다 가르치니까 오후 2시에 출근해서 밤 9시나 10시 돼야 퇴근했어요. 2시에 출근하면 원장님하고 선생님들이 학원 운영이나 학생들 학업 관련해서 회의를 해요. 그리고 나면 수업 준비를 하고 3시 반이나 4시 정도부터 초등학생들 수업을 시작해요. 그 다음부터는 중학생, 고등학생들을 가르쳤어요.

날마다 조금씩은 다르지만 대개 하루 3~4번 정도의 수업이 있다고 했다. 그나마 수업이 없는 경우에 교육과 관련해서 연구하고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다고 했다.

학생들에게 가르칠 교재를 연구하는 거예요. 혹시 모르니까 앞에 진도를 나가야 할 부분을 확인하기도 하고, 문제를 직접 풀어보기도 하고요. 만약 모르는 게 있으면 답을 찾아보고 하는 거예요. 학생들 수업 끝나면 교실 가서 간단하게 청소도 해야 하고요. 수업을 안 해도 일은 끊이지 않았던 것 같아요.

이러한 일상 시기를 거쳐 시험 기간이 되면 학원과 선생님들은 긴박하게 움직이게 된다고 한다.

시험 기간에는 주말이 아예 없어요. 보충 수업도 해야 하고 자습 감독도 해야 하니까요. 근데 이렇게 일해도 돈은 못 받아요. 요즘엔 워낙 경쟁이 치열하니까 어느 학원에서 주말에 다 무료로 보충해주고 공부시켜준다고 하는데 우리 학원이라고 어떻게 가만히 있겠어요.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으려면 학원비도 안 받고 무료로 노동해요. 기출문제들 모아서 알려주고 문제 풀이해주고, 뒤떨어지는 아이들 있으면 나머지 공부시키고 정신없이 돌아가요. 시험 끝나면 원장님이 수고했다고 따로 몇십 만 원 챙겨주실 때가 있어서 그날만 기다리면서 버텨요.


학생뿐만 아니라 늘 평가받는 선생님

어쨌든 시험은 피할 수 없다 보니 결국 시험 점수에 따라 학원 선생님들도 평가받고 영향을 많이 받을 것으로 예상하였다.

처음 이 일을 시작했을 때는 열정을 가지고 아이들을 가르치려고 하고, 너무 공부해라 잔소리하기 보다는 학생들과 친밀하게 관계도 맺고, 공부 좀 못해도 된다고 생각했는데 이게 안 되더라고요. 아이를 학원에 보낸 부모님들은 시험 성적 안 나오면 바로 학원을 바꾸거나 원장님께 항의하거든요. 그럼 원장님은 선생님들을 이른바 쪼는 거에요. 이렇다 보면 선생님들이 압박을 안 받을 수가 없어요. 시험 끝나면 아이들이 그만두고 바뀌는 게 눈으로 확확 보이니까, 학원이 어려우면 저는 돈을 못 벌게 되니까 아이들에게 공부하라고 잔소리를 계속하게 돼요.


그래도 누군가를 가르칠 때 느끼는 행복감

아이들을 가르치는게 부담도 되는데, 그래도 아이들이 공부를 해서 성적이 오를 때 그럴 때 가장 보람을 느끼는 것 같아요. 스승의 날 이럴 때 손편지 써주고, 선물주고 그러면 아이들은 형식적으로 했을지도 모르지만 저는 정말 고맙더라고요. 학원을 그만둔 친구들이나, 이전에 다녔던 학원 아이들한테 연락왔을땐 정말 고맙더라고요. 그리고 학원 그만 뒀을 때 학부모들이 과외는 따로 안하냐고, 아이들이 선생님 너무 좋아하는데 아쉽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그래도 내가 아이들을 잘 가르쳤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요.

반대로 일하면서 원장님, 학부모, 학생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나 어려움도 있었을 것 같은데 어떨 때 그런 생각이 드는지 물었다.

이게 영어라는 게 하루아침에 되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래서 저는 이왕 공부하는 거 재미있게 하자 그런 생각이거든요. 그런데 학부모들은 일단 무조건 성적을 올리기 위해서 비싼 돈 내고 아이들 학원으로 보내는 거니까 그 기대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부담이 있어요. 그러다 보면 저도 모르게 성적이 안 오르는 학생에게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낼 때가 있어요. 정말 그러면 안 되는 건데, 가끔 이런 제 모습을 보면 이제는 이 일을 그만둬야 하나 그런 생각도 들어요. 특히 선생님과 학생은 분명한 권력 관계가 있는 거니까 이런 점을 분명 경계해야 되거든요.

최근엔 피터님이 같이 일하는 동료 여선생님들이 남자 학생들이 가하는 각종 성폭력, 성희롱 등으로 인해 수치스러움을 느끼고 힘들어 하는걸 볼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이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깊어진다고 한다.


결국 몸은 아프고 건강을 점차 잃어가는 학원 선생님

이 일을 하다 보니까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그런지 대상포진이 온 적 있어요. 의사 선생님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때가 있었냐고 물어보더라고요. 진짜 학원 선생님들의 비애가 뭐냐면요 아파도 출근해야 하는 거예요. 우리는 쉴 수가 없어요. 아프면 아픈 데로 참고 해야 해요.

피터님은 몸이 아픈 것뿐만 아니라 저녁 없는 삶에 대해 어려움과 고층도 매우 크다고 말했다.

제가 5년 만에 일을 잠깐 그만두고 영국으로 여행을 다녀왔는데요. 저녁에 노을을 보는데 너무 예쁜 거예요. 그리고 한국에 다시 돌아와서 노을을 보는데 여기도 너무 예쁜 거예요. 그때 내가 이렇게 예쁜 저녁노을도 못 보고 살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왜곡된 사교육 시장의 한복판에서 드는 고민

지금의 사교육은 학부모에게는 너무 큰 부담을 주고 학생들은 억압시키잖아요. 잘못된 영어 교육 방식도 참 문제고 학원 선생님을 하고는 있지만 뭔가 바꿔야 할 것도 많고 고민도 있는데 당장 저 혼자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라서 이점이 늘 어려운 것 같아요.

그래서 피터님은 전체 교육제도의 변화가 필요하지만, 당장 사교육을 없앨 수 있는 게 아니라면 학원 선생님들의 노동조건이 잘 갖춰져서 휴가도 쓰고, 아프면 병원도 갈 수 있고, 학부모나 학생들이 갑질해도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되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A-Z 노동이야기] 영원히 기억될 프로젝트를 남기고 싶어요 / 2017.12

영원히 기억될 프로젝트를 남기고 싶어요

- 홍보대행사 AE 김서영님 인터뷰

재현 선전위원장

 

언제나 클라이언트의 필요와 요구를

충족해야 하는 홍보대행사

저는 홍보대행사에서 일하는데요. 기업이나 공공기관에서 홍보를 해야 하는 모든 역할과 내용을 컨설팅해요. 그중에서도 구체적으로 저는 AE(Account Executive)역할을 하고 있어요. 회사 클라이언트와 소통하면서 홍보대행과 관련한 전체 모든 일을 총괄하는 역할을 하죠. 1년에 보통 4~5개 정도 회사랑 일하는데, 회사 관련 언론 모니터링부터 시작해서 보도자료 만들고, 홍보물이나 각종 행사 기획도 하고 인터넷이나 오프라인에 광고가 필요하면 광고대행사 통해서 직접 광고를 배치하는 일 등등을 해요.”

예전에는 홍보할 수 있는 매체가 주로 언론사밖에 없었는데 요즘엔 인터넷이나 SNS가 발달해서 홍보대행사에서 집중하는 매체도 이쪽으로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고 한다.

“AE가 하는 일 중에 가장 중요한 역할은 제안서를 쓰는 거예요. 매년 봄에 기업이나 공공기관에서 홍보 관련해서 입찰 공고를 내거든요. 그럼 이때부터 회사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홍보 방향에 맞게 제안서를 쓰기 위해 제품이나 정책에 대한 공부를 시작해야 해서 준비할 게 많아요. 공부를 해야 만일 공공기관이라고 했을 때 그 정책이 왜 잘 알려지지 않았는지 원인을 찾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핵심적인 어떤 메시지와 방법이 필요한지, 홍보를 위한 효과적인 매체나 수단은 뭘지 이런 걸 분석하고 예상할 수 있거든요.” 

AE들은 제안서 채택 여부에 따라 회사의 1년이 좌지우지되기 때문에 1년 농사를 시작하는 마음으로 일을 한다고 했다. 

일하다 보니 야근도 밥 먹듯이 하고 가장 바쁘게 지내요. 그래서 이때가 가장 힘든데 늘 그때가 벚꽃이 지거든요. 그래서 우리끼리 매년 하는 말이 벚꽃이 떨어지는 걸 보니 제안서를 쓸 때가 됐나보다 이런 푸념을 늘어놔요. 친구들하고 약속이 있어도 나 이번에 제안서 쓰는 시즌이라 아무래도 못 나갈 것 같아이런 이야기만 반복하게 되고요. 그리고 꼭 이때가 아니어도 공공기관에서 종종 긴급입찰이라고 해서 7~10일 정도 시간만 주고 제안서를 받을 때가 있어요. 일반적으론 40일 정도 시간을 주는데 이때는 회사에서 발등에 불이 떨어졌으니 진짜 급하게 써야 해요. 문제는 애초에 계획에 있던 일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원래 예정에 있던 일은 그대로 하면서 야근하거나 주말에 출근해서 그 회사에 대해서 처음부터 공부하고 1주일 만에 제안서를 쓰는 거예요.“

이쯤에서 무조건 긴급입찰에 참여해야 하는 것인지, 제안서를 쓰자, 쓰지 말자 선택하는 기준에서 AE에게 권한이 있는 것인지 궁금했다. 

무조건 모든 긴급입찰을 다 해야 하는 건 아니에요. 그렇지만 회사를 운영하기 위해서 최소한 벌어야 하는 연간사업비가 있잖아요. 그걸 맞추려면 제안서를 안 쓸 수가 없어요. 그리고 회사도 회사인데 결국 그 일을 하게 되면 저 스스로 커리어에 도움이 되는 거잖아요. 성과가 있으면 연말에 인센티브도 있으니까 시간이 부족해도 그 일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자주 있어요.”

 

일상이 되어버린 야근과 주말 출근

여기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비슷할 텐데 야근도 워낙 자주 하고 주말에 출근하는 일도 생각보다 많아서 내가 하는 일은 노동강도가 높은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야근과 관련해서 이게 참 애매하고 어려운 것 같아요. 왜냐면 회사에선 스스로 야근 안 하고 싶으면 6시 퇴근 시간 맞춰서 일 끝내고 집에 가라고 하거든요. 대신 내가 일을 다 못 마치니까, 결과물이 없으면 평가나 성과에 안 좋으니까 하는 거죠. 그리고 제안서를 쓰거나 뭔가 집중해서 해야 하는 일은 낮에 하기가 어려워요. 이때는 회사 클라이언트나 같이 협력해서 일해야 하는 광고, 행사업체들이랑 조율하면서 일상 업무를 해야 하거든요. 만약 회사나 공공기관에서 클라이언트도 예상 못 한 이슈가 터져서 내일까지 해결해달라고 우리한테 전화가 오면 현장에 가서 사실관계 확인하고 기자나 SNS 등에 알려야 하거든요.” 

그래서 결국 AE들은 제안서를 쓰는 일처럼 긴 시간 집중이 필요한 일들은 저녁이나 주말에 몰아서 하게 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사람이 하는 일에 대해 저평가하는 사회

일하면서 속상할 때는 기업이나 공공기관에서 우리와 같은 일하는 사람들 인건비에 대한 개념이 부족하거나 없을 때인 것 같아요. 우리는 재료를 사서 상품을 만드는 일이 아니잖아요. 홍보 기획을 하는데 비용이 얼마가 드는지 시간은 얼마나 들었는지 필요한지 정해진 답이 있거나 증명하기가 어렵거든요. 그리고 우리가 아무리 만족할만한 기획을 했다고 해도 결국엔 회사 클라이언트의 필요나 취향, 선호도에 따라서 합격이든 아니든 결정되거든요. 그래서 제가 밤새도록 고민하고 준비했든 아니든 회사 클라이언트가 별로라고 저평가하면 그만이에요. 사람들이 우리가 만들어내는 무형의 가치를 인정하는 거에 너무 인색한거죠. 그래서 매번 계약할 때마다 인건비 좀 깎아주시죠 이 말이 자동으로 나오나 봐요." 

이러한 경우가 유독 한국만 있는지 해외에서는 어떻게 평가받고 있는지 궁금했다. 

제안서를 낼 때 한 회사뿐만 아니라 많은 회사가 제안서를 낼 거 아니에요. 그러면 외국 같은 경우엔 기획을 채택하지 않더라도 제안서를 제출해준 회사에 최소한의 보상을 하고 있어요. 제안서를 쓰기 위해 일했던 사람들이 있고 자료를 만들든 디자인을 만들든 비용이 들어갔을 거 아니에요. 그 수고에 대해 답례를 하는 개념인 거죠. 우리도 광고 시장이 호황일 때는 있었다고 하는데 요즘은 홍보 대행사가 워낙 많으니까 너희 아니어도 입찰할 회사 많다, 우리는 그 내용으로 안 할 건데 돈을 왜 줘야 하냐 그렇게 이야기해요. 근데 우리가 제출한 내용이 좋든 안 좋든 맞든 아니든 그 회사 사업에 도움이 될 만한 다양한 아이디어를 제공한 거잖아요. 적어도 우리가 한 곳을 결정하는데 비교 대상 역할이라도 한 거고요.”

 

일을 처음 시작했을 때 마음을 잊어버리게 되는 요즘

제가 이 일을 하게 된 건 그때는 몰랐는데 요즘 고등학교 때 선생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걸 새삼 느끼고 있어요. 언젠가 선생님들이 대학교에서 <송환>이라는 독립영화를 상영하는데 보러 가고 싶은 사람은 야간자율학습 빼줄 테니까 가도 된다고 안내해주셨어요. 그 영화가 비전향 장기수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왠지 그 영화를 보면 뭔가 세상에 비밀을 알게 될 것만 같은 느낌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친구들이랑 같이 영화를 보러 갔는데 그때 아니 사람이 이렇게 사는 세상이 있구나! 그런데 세상이 어떻게 이럴 수 있지? 내가 어떻게 이런 걸 모르고 살았을까 충격이 엄청 컸어요. 그때까지 살면서 이렇게 마음이 힘들었던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때부터 대학에 가서 다큐멘터리 감독을 하고 싶어서 방송반 활동을 하면서 꿈을 키웠는데, 졸업을 앞두고 문득 현실에 벽이 높다는 걸 느끼겠더라고요. 그래서 어떤 일을 하더라도 공익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려고 했는데 기업이나 공공기관에서 그게 이미지 포장이든 뭐든 광고를 통해 이런 역할을 하잖아요. 그래서 자연스레 이쪽에서 일을 시작하게 됐는데 벌써 7년이란 시간이 흘렀어요. 요즘엔 직업관이라고 해야 하나 생각을 많이 하게 돼요. 처음 시작했을 땐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었는데, 일에 치이면서 바쁘게 살다 보니 기업이나 공공기관이 해야 할 사회적 책임이나 역할을 내가 대신 때워주고 있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일에서 의미를 못 찾겠으니까 몸도 마음도 더 힘들어지고 그냥 월급이나 받자 사람이 이렇게 되더라고요.” 

그래서일까. 김서영 님은 요즘 사회적인 가치를 우선하고 그 가치를 같이 실현할 수 있는 조직이나 사람과 같이 일해보고 싶다는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고 한다. 

이런 생각을 들게 한 시발점이 노동강도에요. 하루 24시간 중에 저를 위해 쓰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더라고요. 저 스스로 에너지가 있어야 일에 결과물도 좋을 텐데 지금은 영 그렇지 못해요. 한편으론 그동안 너무 일을 통해서만 자아실현을 하려고 했나 그런 고민도 들어요. 요즘 워라벨(일과 삶의 균형을 뜻하는 신조어, Walk and Life Balance)이 중요하다는 이야기가 많이 되고 있는데 저한테도 절실한 이야기인 것 같아요.” 

 

힘들어도 이 일을 계속하는건

일에 대해 자부심도 있고 기쁨도 있어서일 거에요. 제가 기획한 홍보가 지하철이나 라디오 광고로 나오고 이런 결과물이 나왔을 때 가장 기쁜 것 같아요. 우리가 하는 일은 사람과 협업이 중요한데 다 같이 과로하고 힘들지만 서로 잘 알고 이해해주고, 서로서로 인정해줄 땐 뿌듯하기도 하고요. 가장 힘들었을 땐 내 생활이 없을 때겠죠. 2주 동안 계속 야근해봐요. 일하는 시간이 길어서 신입들이 들어오면 1년 정도 다니다 그만두는 경우가 자주 있어요. 일을 통해 재미를 찾거나 자부심을 느끼거나 성취감을 느끼는 사람들만 남는 거죠. 그리고 저희 일이 늘 촉각을 다투다 보니 시기도 중요하고 마감도 지키면서 완벽해야 하는 부담이 있어요. 기사로든 온라인으로든 세상에 알려지고 나면 주워 담지 못하잖아요. 그래서 저 같은 경우엔 평일엔 항상 몸이 많이 긴장되어 있어요. 작은 것 하나에도 예민해지고요. 이럴 때 그나마 숨 좀 쉬고 싶을 땐 여행을 가요. 우리 회사가 출퇴근이나 연차 휴가 이런 게 자유로운 편이라 프로젝트가 끝나거나 일을 어느 정도 마무리했을 때 여행 갈 수 있게 시간을 보장해주거든요. 그리고 3년마다 유급으로 안식월 휴가를 줘요. 그나마 이런 시간을 회사가 보장해주니까 다들 재충전하고 힘내서 일하는 것 같아요.”

 

앞으로의 계획과 바람

저는 끝까지 이 일을 잘 해내고 싶어요. 일은 힘들지만, 항상 일할 때 이 생각해요. 사람이 평생 살면서 뭔가를 남기잖아요. 그래서 저는 뭔가 프로젝트를 하나 남기고 싶은 마음이 들어요. 그리고 오늘 인터뷰 나오면서 이 이야기는 꼭 하고 싶었는데 요즘 4차 산업혁명이다 뭐 다 그러는데 저는 오히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 사람이 할 수밖에 없는 일에 대해 사회적으로 가치 평가가 높아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얼마 전에 제주에서 특성화고 현장실습생 문제가 또 불거졌잖아요. 일하다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을 볼 때면 너무나 슬프고 마음이 아파요. 그래서 어쩔 땐 외면하고 싶은 마음도 들어요.” 

[A-Z 노동이야기] 화면 밖에서 방송을 만드는 사람들 / 2017.10·11

화면 밖에서 방송을 만드는 사람들

- 방송작가 황민주 님 인터뷰

재현 선전위원장


우연한 기회에 방송국 조연출로 알바를 하면서 방송작가의 꿈을 키웠다던 황민주님은 지난 3년간 방송국에서 일했다. 최근에는 현장에서 일하는 방송작가 노동자의 노동인권을 위해 ‘공정노동을 위한 방송작가 대나무 숲’를 운영하며 온오프라인 할 것 없이 활동하고 있다. 이번 일터에서는 황민주님이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방송작가 생활 3년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방송작가는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요.

"대학에서 언론 정보학을 전공했는데 정작 학교 다닐 때는 전공을 살릴 생각이 없었어요. 부모님도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으면 좋겠다고 강하게 권유하셨거든요. 그래서 학교 휴학하고 시험 준비를 했는데 도저히 못할 것 같아서 공부는 정리하고 학교 복학 전까지 등록금 마련하려고 알바를 구했어요. 그때 마침 한 파견업체에서 제 전공을 보더니 방송국에 자리가 있으니 오라고 해서 그때부터 1년 반 동안 방송국에서 뉴스 송출하는 조연출 알바를 했어요. 왜 뉴스 진행할 때 앵커가 보는 카메라 화면을 프롬프터라고 하잖아요 그걸 만들었어요.

그리고 뉴스에 필요한 영상 틀어주고 그 밑에 자막 넣고, 앵커 뒤에 있는 배경화면에 맞는 사진이나 영상도 찾고요. 한 달 일해서 받는 월급은 150만 원 정도였는데 그것도 제가 새벽 4시까지 출근이라 하루 교통비 1만 5천 원이 포함된 거였어요. 사실상 최저임금도 못 받으면서 일한 거죠. 그렇게 일하면서 제가 예전부터 글 쓰는 걸 좋아해서 그런지 조연출 일보다 옆에서 방송 작가가 하는 일이 재미있어 보이더라고요. 그때부터 방송 작가가 되기로 했어요."

그 뒤로 황민주님은 KBS 구성작가 협의회 홈페이지에 구인구직 글이 올라오는 걸 보고 이력서를 보내며 일을 찾았다. 이곳 홈페이지가 방송 작가 구인구직이 제일 활발한 곳이기 때문이다. 지상파 3사에서 운영하는 아카데미에서 구성작가 반 수업을 듣지 않는 이상 대부분은 방송사나 외주제작사가 작가의 이력서를 보고 직접 계약하는 형태로 작가 일을 시작한다.

"제가 보낸 이력서를 보고 KTV라고 국가에서 운영하는 정책방송원 방송국에서 연락이 와서 휴먼다큐 프로그램에서 일하게 됐죠. 서울에서 세종시까지 출퇴근 하는 게 힘들어서 6개월 정도 막내 작가로 일했어요. 그다음엔 MBC에서 1년 가까이 일하고, 채널 A에서 1년 반 정도 일했고 입봉도 여기서 했어요."

- 방송국에서 하루 동안 어떤 일을 하나요.
"KTV 방송은 수요일에 한 번 30분 동안 방송했기 때문에 주 단위로 일을 했어요. 방송내용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의미 있는 일을 하는 일반인들을 조명하는 다큐멘터리였어요. 그래서 방송을 하는 수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다음 방송 아이템을 찾거나 사람을 섭외했어요. 섭외가 확정되면 전화로 사전 인터뷰하고 어떠한 내용으로 촬영하면 좋겠다는 구성안을 촬영팀에 작성해줘요. 촬영팀은 그대로 주말 내내 영상 찍어서 월요일에 제작팀에 줘요.

그 다음날부터 막내작가들은 촬영한 걸 프리뷰라고 해서 영상에 있는 모든 상황을 말로 풀어요. 누가 등장했다 어떤말을 했다 등등요. 그걸 보고 제작진이 방송에 나갈 영상을 대략 편집한 가편집본을 만들면 저희는 자막 입히고, 더빙하고 작업을 마치죠. 1주일 내내 이렇게 방송을 만들면 수요일 오전에 부장급 임원들이랑 시사회를 열고 수정 의견 있으면 반영해서 저녁에 방송을 내보내요. 그렇게 방송 끝나면 다시 아이템 찾고 지난주에 했던 일을 반복하고요."

황민주 님은 매주 계속되는 방송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최소 10개 이상의 아이템을 확보하려고, 퇴근하거나 주말에도 아이템 찾기를 쉴 수 없었다고 한다.

"MBC에서는 창사특집 방송이었는데 청년을 주제로 해보자는 것 외에 세부적인 내용이 없어서 방송 제작보다는 가장 처음 기획부터 같이했어요. 그때는 아이템 회의 정말 많이 했는데 하면서 허탈했던 기억이 있어요. 피디나 조연출분들이 요즘 불안정한 청년들, 3포 세대 청년들 취재해보자면서 누가 좋을지 고민하는데, 사실 자기들 눈앞에 방송 작가들이 있잖아요. 최저임금 받으면서 주말도 없이 일하는데 저희가 그렇게 일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나 봐요. 아무튼, 그래서 기획이 정해지면 방송에 필요한 출연진, 대역배우, 소품, 광고까지 모든 섭외를 다 하는 게 중요했어요. 

채널A에서는 오후 시간대 뉴스 프로그램에서 일했어요. 주간에 있던 뉴스들에 이슈가 된 몇 개를 선정해서 집중적으로 분석하는 방송이었죠. 그때는 점심시간 전까지 주요뉴스를 선정하는 게 중요해서 아침에 늘 쫓기며 일했던 것 같아요. 출근하자마자 회사 내부 홈페이지에서 기자들이 이슈들 발제한 자료 읽고, 오늘 청와대, 국회 등에서 어떤 주요 뉴스가 있는지, 자료를 받으려면 어느 기자에게 연락하면 되는지 확인하고 현장에 연락해서 자료 요청하고 인터뷰를 받고 그랬었죠. 그리고 나서 생방송 때 전체적인 영상을 어떻게 구성할지 스케치해서 제작팀에 넘기고, 앵커한테 순서지랑 대본 주고, 패널한테는 예상 질문과 답변할 때 참고해야 할 자료를 정리해줬죠. 방송 시작하면 작가 몇 명은 부조정실이라고 하는데 거기서 방송을 송출하고 몇 명은 스튜디오에서 앵커랑 패널들한테 진행 상황 알려주고, 속보 있으면 안내하고 그렇게 하루 일을 마무리했어요."

- 일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건 뭐였나요.
"처음 조연출 알바 할 때 세월호 참사가 있었어요. 그때는 저뿐만 아니라 다들 너무 슬퍼해서 평점심을 유지하고 방송하는 게 힘들었죠. KTV에서 일할 때는 일을 해도 해도 끝이 없어서 답답했어요. 일반인들 섭외하는 것도 어려웠고요. 제가 만약 섭외를 못 하면 선배 언니들이 "너가 설득력 있게 말을 못 해서 그런 거라"고 혼낼 때는 서럽기도 하고요. 채널 A에 있을 때는 촛불 정국이라 뉴스가 너무 많았잖아요. 일도 많은데다 박근혜랑 태극기 부대 쳐다보면서 일하는 게 힘들어서, 그때는 진짜 영혼은 집에 두고 몸만 출근해서 기계처럼 일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방송 작가들은 다 공감 할 텐데 전화하는 일이 어려웠어요. 생판 모르는 사람한테 방송을 출연해달라고 전화하고, 인터뷰도 해야 하는데 용기가 안 나더라고요. 그래도 방송 작가는 전화로 일 시작해서 전화로 일 끝나니까 꾸역꾸역했던 것 같아요. 아 그리고 뉴스 프로그램을 하다 보니까 온갖 시사 문제를 이해하고 내용을 쫓아가는 일도 처음엔 쉽지 않더라고요."

- 방송 작가에 대한 처우는 어떠했나요.
"어디를 가나 막내 작가는 대부분 최저임금 못 받아요. 2~3년 정도 지나야 그나마 최저임금 받으려나요. 여기는 돈이 진짜 안 돼서 서울에서 혼자 살면 월세 내고 남는 것도 없어요. 그리고 만일 방송 촬영을 마쳤어도 방송국에서 내부 사정으로 방송을 못 하거나 안 하잖아요 그걸 방송이 죽는다고 하는데 그랬을 때 우리는 주급을 못 받아요. 내부 사정으로 방송이 죽었는데 그 피해는 방송 작가들이 받는 거예요."

그래서 방송 작가들은 월드컵이나 올림픽 때 경제적으로 제일 어렵다고 한다. 이 기간이 되면 각 방송사는 2~3주 정도 기존 방송 편성을 죽이고 스포츠 경기로 채운다. 이렇다 보니 방송 작가들 세계에서 월드컵이나 올림픽은 불청객 취급을 받는다.

- 그런데도 이 일을 계속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사건은 슬픈 내용이었는데 개인적으로 보람 있었던 기억이 있어요. 얼마 전에 아파트 주민이 외벽 청소하던 노동자 생명줄을 끊어서 죽인 일이 있었잖아요. 제가 사건사고 담당이라서 소식 접하고 유족분에게 전화로 인터뷰를 요청했어야 했는데, 그때 너무 죄송하고 미안해서 머뭇거렸거든요. 그러다 전화를 걸었는데 유족분이 흔쾌하게 인터뷰에 응해주시고, 방송 이후에도 직접 전화를 주셔서 언론 보도 때문에 너무 큰 도움 받았다고 고맙다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때 내가 하는 일이 누군가에게 작은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기쁘더라고요."

- 일하면서 다치거나 아프면 어떻게 해결하나요? 그리고 현장에서 가장 먼저 바뀌어야 할 점은 뭐라고 생각하나요.
"아무래도 컴퓨터 작업이 많으니까 목, 어깨, 손목 이런 데가 늘 아파요. 그런데 산재는 신청도 어렵고 승인받는 것도 어렵잖아요. 저희는 산재보험료를 안 내는 사람들도 많거든요. 정규직으로 일하면 무급으로라도 병가 내고 쉬려고 할 텐데 방송 작가는 99%가 비정규직이니까 병가 내고 쉬는 건 불가능하죠. 지금 당장 꼭 바꾸고 싶은 거는 다운 계약서를 써보는 거예요. 방송 작가들이 평균 6개월이나 1년에 한 번씩 프로그램이나 방송사를 바꾸게 되거든요.

그런데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계약서를 써본 적이 없어요. 제가 정책방송원에서 일 할 때도 거긴 정부기관인데 계약서를 안 쓰더라고요. 그러니까 정확히 내 월급이 얼마인지 노동조건은 어떠한지 몰라요. 제가 MBC에서 일하게 됐을 때 조연출한테 월급이 얼마냐고 물어보니까 "근데 그걸 왜 물어보세요"라고 답을 하더라고요. 노동부도 우리는 노동자가 아니고 개인사업자라서 보호해줄 수 있는 방법이 없데요. 정권 바뀌고 나서는 노동자성을 인정받을 만한 자료를 찾아오라고는 안내하는데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어요."

그래서 황민주 님은 방송 작가들 스스로 어떤 조건과 환경에서 일하고 있는지 알 수 있고,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항의할 수 있도록 근거가 되는 표준 계약서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강조했다.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은.
"사실 방송 작가들이 열악하게 일하는 거 모르는 사람은 없잖아요. 그렇지만 방송 작가들 이 일을 너무 하고 싶어서 시작했거든요. 일하면서 자부심도 느끼고 즐겁게 살고 있고요. 그런데 한쪽에선 방송 작가들이 너무 불쌍하고 열정 페이 받으면서 일하는 사람으로 비치는 것 같아서 마음이 복잡해요.

어떨 땐 열악한 환경이 알려지면 좋겠다는 마음과 우리가 불쌍하게 여겨지는 것 같아서 괜히 불편한 마음 사이에서 늘 왔다 갔다 하게 돼요. 그래서 요즘 생각하는 게 다른 사람들이 우리가 불쌍하다고 생각하는게 아니라 방송 작가들 스스로 어떠한 마음으로 어떠한 환경에서 일하고 있는지, 변화가 필요한 건 무엇인지 말하고 알리는 게 너무나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렇게 되도록 더 많은 작가들을 만날 거예요."

[A-Z 노동이야기] 음식의 종합예술가, 푸드스타일리스트 / 2017.9

음식의 종합예술가, 푸드스타일리스트

- 푸드스타일리스트 김아름 님 인터뷰

재현 선전위원장


바야흐로 먹방의 시대다. 방송과 SNS에선 언제든 음식을 먹는 장면과 그 음식을 아주 저렴하고 쉽게 만드는 영상들이 수없이 방영된다. 이러한 먹방 컨텐츠가 최근 인기가 점차 줄고는 있지만 1인 가구와 혼밥족에게 여전히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이번 일터가 만난 김아름 님도 그 영향력을 매일 같이 확인하며 일하고 있다.


▲ 화려한 조명 뒤에 보이지 않는 푸드스타일리스트 


본인 소개 부탁드려요

“안녕하세요. 저는 김아름이고요 컨텐츠 회사에서 1년 차 푸드스타일리스트로 일하고 있어요. 컨텐츠 회사란 말이 익숙하지 않을 수 있는데 SNS에서 음식 만드는 영상이 나오는 회사들은 다 컨텐츠 회사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먹방부터, 요식업, 구매대행, 책 발간 등 다양한 사업을 하고 있어요.”

요리사를 할 수도 있었을텐데 이 일을 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고등학생 때부터 요리를 좋아해서 대학 진학을 푸드스타일리스트학과로 했어요. 본격적으로 공부하고 졸업해서 처음엔 레스토랑에 매니저로 취직해서 일했어요. 레스토랑 운영과 관련해서 전반을 배울 수 있어서 좋았는데 일이 너무 힘들고 저랑 맞지 않는 것 같아서 그만두고 무역 회사에서 사무직으로 일했어요. 그런데 몸은 편해도 너무 무료하니까 다시 하고 싶은 일을 찾고 싶어서 고민하다가 지금 이 회사에서 푸드스타일리스트로 일을 하게 되었어요. 요리사를 할 수도 있었을 텐데 굳이 이 일을 하게 된 건 요리도 기본 잘하면서, 음식과 함께 공간을 연출하면서 다양한 소품을 사용하고, 사진과 영상도 촬영하면서 종합적으로 일을 할 수 있어서 저랑 맞고 재미도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푸드스타일리스트는 일할 수 있는 분야도 다양해요. 요리책을 만들기도 하고 호텔, 웨딩홀, 출장뷔페, 파티룸 등에서 음식 세팅하는 일을 푸드스타일리스트가 하거든요. 방송이나 광고, 음식점 메뉴판에 들어가는 사진이나 영상을 제작하는 일도 하고요.”

지금은 회사에서 주로 어떤 일을 하고 있고, 운영은 어떻게 하나요?

“이 회사가 10대~20대층을 주 타깃으로 SNS, YouTube 채널에서 음식 만드는 방송을 하다 보니, 그 음식을 정하고 만들기 위한 레시피와 재료 준비를 하고 직접 만들어요."

김아름 님의 회사와 비슷한 컨텐츠 회사가 요즘 매우 많아지다 보니 경쟁이 아주 치열하다고 한다. 그래서 푸드스타일리스트들은 동영상 조회수나 좋아요와 공유 횟수, 댓글 반응 등에 굉장히 민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방송할 때 보는 사람이 나중에 혼자서 만드는 법을 따라 할 수 있도록 쉽게 만들어요. 그래야 사람들이 직접 요리를 하게 되고, 그러면 외식업계 광고주나 회사에서 저희 회사에 광고를 문의하고 계약하죠. 그다음부턴 저희가 요리를 정하고 레시피를 만들 때 계약을 한 회사 제품을 사용해요. 요리를 할 때 사람들이 사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거나 계속 그 제품을 노출해서 판매에 도움이 되게 하는 거죠.”

사회적으로 1인 가구가 증가하면서, 이른바 혼밥으로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다 보니, 각종 컨텐츠 회사와 외식업계 이러한 방송을 통해 시장을 창출하고 수익을 내고 있었다.

출근해서 퇴근까지 일과가 어떻게 되나요?

“집에서 아침 5시에 일어나요. 준비해서 나가면 5시 반이고 버스랑 지하철 타고 한시간 반 정도 가요. 회사 근처에 도착하면 헬스장 가서 운동하고 씻고 10시에 출근해요. 출근하면 오늘 어떤 요리를 할 지 확인하고 스튜디오에 가서 냉장고 확인하고 없는 재료가 있으면 회사 차 끌고 재래시장, 백화점 등에 가서 장을 봐요. 회사 도착하면 12시쯤 되고 장바구니 들고 스튜디오로 가요. 저희는 어차피 요리할 때 음식 맛보고 먹어야 하니까 점심을 따로 안 챙겨 먹어요. 1시쯤 되면 이제 요리를 해요 하루에 4~5개 정도 만드는데 평균적으로 저녁 8~9시가 돼야 끝나요. 그나마 쉬운 요리가 많아서 빨리 끝난다고 해도 7시에요. 이렇게 촬영하는 게 1주일에 한 두 번 정도 돼요.”

김아름 님은 요리를 마쳐도 일이 끝이 아니라고 한다. 뒷정리하는데 만 1시간 정도 걸리고 사무실에 올라가서 업무 일지 쓰고 영수증 정리해야 퇴근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요리가 없는 날은 어떻게 일과를 보낼까?

“보통 금요일에 긴 회의를 해요. 회사에서 방송 반응이 어땠는지 SNS 좋아요 횟수, 댓글 반응 같은거 정리해서 피드백을 주거든요. 그럼 그거 평가하면서 다음 한주는 어떤 요리를 할지 레시피는 뭐로 할지 논의해요. 요리를 정하는 방식은 회의 때 푸드스타일리스트 각각 한 명씩 레시피를 제출하고 이건 어떤 층이 좋아할 것 같고, 이렇게 하면 더 간단할 것 같다 등등 설명을 해요. 그 음식이 채택되면 미리 손질해야 할 재료 같은 게 있으면 준비해서 방송을 대비하죠.”

레시피 연구하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거 같아요?

“그나마 촬영이 없을 때 레시피를 연구하니까 몸은 살짝 여유가 있는데 정신적으로 스트레스가 상당해요. 주로 대부분 먹방 TV에 나와서 사람들이 알 만한 거, 방송에서 입체적으로 보이기 쉬운 치즈 요리를 많이 연구하는데 사실 워낙 먹방이 많고 오래되면서 사람들이 식상해 하는 게 있어요. 그런데다 저희는 광고 계약 한 회사 제품을 사용해서 레시피를 만들어야 하니까 요리에 제한이 많아요.”

상황이 이렇다 보니 최근 이 회사는 최근 해외에서 유명한 음식을 구매대행 하거나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등 새로운 수익 모델을 만들고 있다고 한다.

“요즘엔 요리하는 것도 계속하면서 회사에서 낸 레스토랑메뉴를 음식으로 만들고 사진이랑 영상 촬영하는 일이 많아요. 그리고 책도 내려고 해서 그거 작업하고 있고요. 사실 이런 게 회사한테 수입이 되니까 일할 때 시간을 많이 쏟게 되는데, 방송은 돈은 별로 안 돼도 회사 인지도가 쌓이는 거니까 그것대로 해야 하거든요. 이러니 매일 새벽에 퇴근하고 회사 간이 침대에서 쪽잠 자고 일어나서 헬스장 가서 씻고 다시 일하고 이 루트를 반복하고 있어요."

일하면서 속상했던 점은 없나요?

"아무래도 다치거나 아플 때 마음이 안 좋죠. 요리하면서 손에 물이 많이 닿으니까 주부습진, 포진 이런 게 심해요. 약 바르고 고무장갑 끼고 별 방법을 써봐도 손에 물이 들어오니까 내가 이렇게까지 일을 해야 하나 싶어요. 그리고 매일 서서 일하니까 허리도 아프고 부종이 너무 심해요. 집에 와서 꼭 족욕을 하는데 그런데도 안 풀려요. 다리에 쥐가 나니까 새벽에 자다가 깬 적도 많고요. 공간 연출할 때 무거운 나무판 같은 거 들고 다니고, 시장도 한꺼번에 많이 보니까 그 무게도 부담이 돼요.

아픈 거 말고는 아무래도 같이 일하는 동료들 나잇대가 저랑 비슷하다 보니 또래 친구들보다 일을 못 한다는 생각이 들 때 속상해요. 선의의 경쟁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게 없지 않아 있거든요. 살이 계속 찌는 것도 짜증이 나고 스트레스에요. 일하면서 음식 맛보고 해야 하니까 입사해서 지금까지 살이 8kg 나 쪘어요. 내 능력으로 최선을 다했는데 남들이 그건 아니라고 질책 할 때도 힘들고 속상해요. 이럴 때 친구들한테 속 시원히 마음에 있는 이야기하고 싶은데 친구들은 대부분 학교에 다니니까 공감도 안되고 제가 회사 힘든 이야기를 하면 하루 이틀이면 들어주지만 제가 매일 그러니까 이젠 듣기 싫어하죠."

반대로 일하면서 즐거웠던 적은 언제에요?

"누구나 다 아는 방송이나 책에서 제 손이 나올 때 기쁘고 뿌듯해요. 음식점 갔을 때 메뉴판에 제가 만들고 촬영한 음식이 있으니까 자부심이 느껴지더라고요. 그런 재미라도 있어야죠. 그리고 촬영할 때 어려운 요리인데 뭔가 쉽게 척척 될 때가 있어요. 자주는 없는데 그럴 때가 기쁜 것 같아요. 말하고 나니 속상한 게 더 많네요."

사람들이 푸드스타일리스트라는 직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런 인식이 불편하거나 그렇지는 않나요?

“대부분 신기해하거나, 우와 그런 것도 있어요! 와 멋있다 대박이다!는 이야기를 가장 많이 듣는 것 같아요. 어떤 분들은 요리 엄청 잘하겠네!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그럴 땐 속으로 조금 찔려요. 요리를 기본 하는 거지 요리사처럼 그렇게 잘하는 건 아니거든요. 아 연세가 있으신 분들은 결혼해서 남편 밥 하나는 잘하겠다고 1등 신붓감이라는 이야기를 하세요. 특히 회사에서 청소하는 아주머니들이 저만 보면 매번 그 말씀을 하세요.”

5년 뒤나 10년 뒤에는 어떻게 살고 있을 것 같아요?

"글쎄요 이 일은 계속할 것 같은데 지금 회사에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신생 회사라서 체계가 계속 바뀌고 자리도 불확실해서요. 동료들도 이 회사는 한 번 쯤 경험해보고 더 큰 회사를 가거나 프리랜서로 일하려고 해요. 지금도 일을 하고 있는데 앞으로 뭐 해먹고 살지 이걸 진짜 많이 생각해요. 지금 일이 워낙 힘들고 만족도가 떨어져서 그런지 이 생각을 계속하게 돼요. 그리고 독립도 하고 싶어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요?

"인터뷰 하다 보니 대학 입학할 때 이 일을 너무 하고 싶어서 자기소개서에 큰 포부를 쓰고 면접 보고 했던 기억이 떠올랐어요. 지금 일이 조금 익숙해지면서 나태해진 게 없지 않아 있는데 인터뷰하면서 그때의 포부 자신감을 다시 찾아가는 느낌이 들어요. 고맙습니다."

여행을 좋아하는 아름 씨는 언젠가 반드시 세계일주의 꿈을 이루고 싶다고 한다. 많은 사람에게 유익하고 즐거움을 주는 푸드스타일리스트로써 꼭 성공하길 바라며 원하는 세계일주의 꿈도 꼭 이룰 수 있기를 늘 응원하겠다


[A-Z 노동이야기] 우리 일터부터 좋게 만들어요! / 2017.8

우리 일터부터 좋게 만들어요!

- 노동인권 시민단체 활동가 복성현 님 인터뷰

문영 한노보연 실습 학생

시민단체 파견근무를 하고 있다는 복성현 활동가 말에 먼저 떠오른 것은 SNS의 시민사회활동가 대나무숲페이지였다. SNS에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를 외친 대숲에서 따온 ○○대숲 페이지가 흔하다. 시민사회 활동가 대숲도 그 중 하나다. 활동가들의 장시간 노동, 저임금, 감정노동과 여러 소진 문제를 터놓는 글들이 종종 익명으로 게시되며, 활동가들이 기명 또는 익명으로 공감의 댓글을 단다.

저는 제 일자리에 굉장히 만족하고 있어요.

올해 4월부터 서울시 아르바이트 청년 권리지킴이로 시민단체 우리동네노동권찾기에서 파견근무를 하는 복성현 활동가는 환하게 웃으며 얘기했다. 그래서 지금은 힘든 얘기가 하나도 없단다. 지금 일하는 곳 말고, 작년부터 올해 3월까지 특성화고교 현장실습으로 취직해서 일했던 곳의 이야기를 주로 풀어내겠다는 그를 말렸다.

복성현 활동가는 이전 직장은 제가 활동하던 동아리에서 말하는 노동과 너무 괴리감이 커서, 그만두고 일자리를 찾다가지금의 단체에서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했다. 지금 일터의 어떤 요소들 덕분에 일자리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환하게 웃음꽃이 피는지 하나하나 들어보았다.

우리의 노동부터 좋게 만들자이런 분위기가 있어요.

"제 시간이 많이 늘어났다고 느껴요. 업무도 제시간 안에 할 수 있는 정도지만, 많으면 미뤄라! 이렇게 말씀하시거든요. 전에 세무사 사무실에서 일했을 때는 야근을 많이 했어요. 신고가 몰려서 바쁜 기간에는 야근을 계속했죠. 한 달에 일주일은 한 것 같아요. 지금은 오전 9시 출근, 저녁 6시 퇴근인데 사실 칼퇴라는 말도 되게 이상해요. 퇴근은 제때 하는 게 맞잖아요. 칼퇴도 지금은 잘 돼서 그 외의 시간도 제 시간으로 쓸 수 있어요.

일하는 중에도 그래요. 그 전에는 회사에 있는 동안엔 일해야 한다, 세무사님이 이런 게 있으셨거든요. 개인 SNS나 인터넷을 아예 못 하고 업무시간에 다른 일 하는 걸 싫어했어요. 그래서 할 일을 다 하고 일하는 척도 했어요. 바쁠 땐 계속 일이 몰렸고요. 실수를 안 하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하고 싶지 않아도 일이 많아서 열심히 하게 되고, 그랬었죠. 지금은 제가 할 수 있는 만큼만 받고, 그래서 잘 처리해낼 수 있어요. 사업 하다가 어쩔 수 없이 야근하게 되면 다른 시간에서 빼 주세요.

보통 일주일에 주말 이틀이 제 시간이잖아요? 회사에 얽매여 있을 때 주말에는 아 또 회사 가면 이거 해야 해. 하기 싫어.’ 이런 생각이 되게 많았는데, 지금은 주말에는 뭐 하고 놀지?’ 이렇게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물리적인 시간은 비슷할 텐데도 느끼는 시간이 되게 다르더라고요."

임금 부분에서는 어땠을까. 이전에는 최저임금보다 못 받았었다고 했다.

"7시간 근무에 115만 원이었는데 일단 기본 일하는 게 8시간이었거든요, 그러면 최저가 안돼요. 그것 때문에 싸웠어요. 제가 자취를 안 했는데, 만약 자취했으면 그 돈으로 생계를 이어갈 수 없었을 것 같아요. 지금은 제대로 나와요. 160만 원. 이 정도면 생활은 그래도 가능하죠."

동료와의 관계도 물었다. 함께 일하는 동료 한 명, 한 명을 헤아리는 얼굴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지금 직장에서 일하기 전에는 대표라는 직함이 강압적일 것이라는 편견이 있었다고 했다. 이전에는 상사들로부터 여러 이유로 혼났다. 배우지 않고 익숙하지 않은 일에 서툴러서, 고졸로 취업했으니 대졸보다 더 조심하고 꼼꼼해야 한다며 챙겨준다는 이유로. 지금은 경험 많은 동료들이 잘 챙겨주고, 배울 것도 많다고 했다. 힘든 일이 없다고, 힘들다면 사이가 너무 좋아서 같이 노느라 힘들다며 함빡 웃는다.

일이 좀 더 일상이고 삶 같아요. 이 일로 제가 더 발전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제가 저희 단체에서 맡은 주 업무는 재정이에요. 그리고 단체 사업인 고졸 노동인권 동아리 운영을 돕는 보조일을 하고, 노동인권 교육도 고등학교로 나가고 있습니다. 원래 제가 회계만 하는 걸로 여기 들어왔어요. 교육 나가서 얘기도 해주고 싶었는데, 제가 부족할까봐 걱정됐었어요. 처음엔 보조강사로 같이 나갔고, 노동인권교육 강사 양성 과정을 마치고 나니까 수업도 할 수 있게 되더라고요. 강사 양성 과정 듣는 시간도 업무 시간에 다 포함됐고요. 일을 잘 해내는데, 새로 경험하고 배우는 것도 항상 많아요. 저는 엄청난 경험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나가서 친구들 보는 것도 좋고, 강의하기 위해서 제가 항상 공부하니까요. 이전 회사는 제가 그냥 돈 벌러 간 곳, 그렇게 느껴졌는데 지금은 좀 더 제 일상이고 삶 같아요."

복성현 활동가는 단체사업으로 진행하는 고졸취업동아리 처음처럼을 매우 아낀다. 자신이 고등학교 때 가입해 활동했던 동아리다. 작년 10월에 만들어져 이제 2기를 모집하고 있다고 했다. 학교에 노동인권교육을 오셨던 활동가분을 통해 알게 됐고, 친구들과 함께 놀면서 나오다보니 어느덧 단체의 할동가가 되어 고등학교로 인권 교육을 나가고 있다.

"처음엔 친구들도 만나는 재미로 나갔었는데 종종 배우거나 다른 활동도 해요. 노동인권교육도 듣고요. 노동절에 같이 강의 듣고 행진도 하고, 캠페인도 했어요. 누가 어떤 내용을 배우고 싶다고 의견을 내면 알아보고 가능하면 자리를 만들어요. 친구들이 연애강의 듣고 싶다고 했었거든요. 그래서 자리를 만들어서, 서로 사람 대 사람으로 관계를 어떻게 맺어야 하는지를 배우고, 이야기도 많이 나눴어요. 얘기하면서 알게 모르게 많이 배우는 것 같아요.

동아리에서 노동에 대한 얘기를 듣다보니 , 내가 하는 노동도 이상한데’, 이런 인식도 생겼고, 친구들에게도 그거 잘못 된거야’, 얘기해주다보니까 친구들 인식도 높아졌고요. 같이 캠페인도 다니게 됐어요."

노동인권단체 활동가들 역시 동아리 소속으로, 모임이 있을 때 함께 모여 이야기를 나눈 경험이 목성현 활동가에게 노동에 대해 돌아볼 계기가 됐다. 직접 일하기 전 학교에서 한 번 들었던 노동권 강의는 사실 거의 기억에 남지 않는다고 회상한다. 현장실습으로 취업해서 일하며 친구들을 만나면, 갓 취업한 친구들 사이에서 오가는 이야기는 거의 일자리의 힘듦에 대한 토로다.

그런 이야기들을 동아리 모임에서 활동가들과 나누며 노동에 대한 인식이 싹텄다. 노무사를 대상으로 준비한 노동 강사 양성 프로그램을 동아리에서 함께 듣기도 했다. 프로그램 성원들의 청소년 인권 감수성을 높이는 계기도 되었다. 동아리 구성원 중에서 노동인권 강사 활동에 관심이 생긴 친구가 있다고 한다.

"저는 이런 동아리가 되게 좋은 것 같아요. 친구들 인식부터 올려야, 사회가 노동에 대한 감수성이 높아질 텐데, 이 학생들이 노동자가 되는 거잖아요. 노동권에 대한 얘기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으면 좋겠어요. 저도 동아리를 안 했다면 내 권리가 침해당하는 걸 모르고 있었을 거예요. 학교에선 기업가 정신 교육이런 걸 과목으로 넣는다고 하는데 다들 사장이 되는 것도 아니잖아요."

고등학교로 노동인권교육을 나가면 동아리 처음처럼에 대한 안내도 한다. 동아리에 관심을 보이고 가입 의사를 밝히는 분들도 있다. 그 친구들이 백성현 활동가는 참 반갑다. 특성화고는 곧 현장실습 명목으로 취업을 나갈 시즌이다. 취업을 나가면 오직 회사를 위한 시간밖에 없고, 회사에 얽매여 있다는 느낌을 받을 친구들을 생각하면 너무 안타깝고 화가 난다고 했다.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그런 사회를 만든 게 미안하다고, 한 톤 낮은 목소리로 말을 잇는 성현씨의 말투에 무게가 실린다. 일을 나가게 될 여성들을 떠올리며 회사에서 여성들이 커피타오기 등의 잡일을 맡게 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노동이 스스로에게 돈벌이만 뜻하기보다는 경험이자 새로운 것을 배운다는 의미가 크다는 백성현 활동가에게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을 물었다. 활동도 더 하고 싶고, 사진도 해보고 싶고, 동물 커뮤니케이션도 해보고 싶어요. 해보고 싶은 건 많아요.” 다 할 수 있지 않을까요라는 필자의 물음에 다 할 수 있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어요.”라고 백성현 활동가는 답했다. 우문현답이었다

[A-Z 노동이야기] 약 만드는 사람들 /2017.07

약 만드는 사람들

- 제약공장 베테랑 A씨 인터뷰



정경희 선전위원



약병에 가득 담긴 영양제를 보면 어떻게 만들어졌을까보다는 이것을 먹으면 내 몸이 어떤 효과를 보게 될지, 혹여나 후유증은 없을지에 대한 생각이 앞서기 마련이다. 약국에 빼곡히 진열된 약과 건강보조식품도 다른 상품과 마찬가지로 공장에서 제조되고 있다.


15년 넘게 약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는 A씨. 지난 6월 23일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치료실에서였다. 아팠던 얘기를 하며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기조차 힘들었던 A씨. 그녀가 해왔던 일에 대한 이야기를 몇 개월이 지나고서야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지금부터 경기도 화성시 소재 제약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A씨가 전해주는 약을 만드는 사람들의 노동이야기에 귀 기울여보자.


전자회사에서 기계 보는 일을 하던 A씨는 지인의 소개로 비교적 보수가 괜찮았던 제약회사에서 일하게 되었고, 어느덧 15년째 몸담고 있다. 제약공장에서 이루어지는 전반적인 업무 중 투피스 방진복, 마스크, 모자, 손 소독을 하고 일하는 멸균실의 작업과정을 먼저 들어 보았다.


"원료실에서 제조할 약에 들어가는 원료를 각각 만들고, 혼합실에서 이 원료들을 혼합해요. 그런 다음 제조할 약 모양으로 찍어내는 타정 과정을 거치고, 이 약이 큰 봉지에 쌓이면 무거워요. 큰 약봉지를 4시간 동안 10번 정도 들어서 기계에 갖다 부어요. 기계가 소분하면 약에 따라 다른 라벨을 작업자가 걸어줘야 해요. 쳐서 원료의 함량이나 모양 등을 선별해요. 선별된 약을 모아서 큰 봉지에 담긴 약을 소비자들이 받을 수 있도록 100정이면 100알씩 나누는 소분과정을 거치는데 포장하는 게 달라요. 병 포장도 있지만, 플라스틱에 비닐이 입혀져서 한 알씩 까먹게 되어있는 PTP 포장을 하죠."


제약회사라고 하면 텔레비전에 나오는 것처럼 자동화가 되어서 지나가는 약만 검사하는 줄 알았는데 들어보니 자동화라고 해도 작업자의 손이 많이 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날 작업량은 혼합된 약의 양에 따라 결정이 돼요. 기계로 할 때는 4시간에 1만 개 정도, 사람이 할 때는 4천 개 정도 뽑죠. 요즘은 기계화가 돼서 그 전보다 수월하긴 한데 기계가 병에 약을 소분하면 실리카겔과 비닐을 넣고 뚜껑을 일일이 닫아줘야 하는 반자동화예요. 라벨이 제대로 붙어있는지 사람이 일일이 검사하고 케이스에 넣어야 해요. 기계에서 약이 적거나 많은 경우에는 계정기를 흔들어줘야 합니다. 약이 100개면 100개에 맞는 마름모, 동그라미, 길쭉한 모양 등의 100개의 구멍에 약이 각각 맞게 들어가게끔 흔들어주는 거죠. 

그래서 자동화지만 손목과 손가락, 어깨에 무리가 가는 일이 많아요. 멸균실은 청정지역이라 먼지가 있으면 안 되고, 화장, 액세서리도 하면 안 돼요. 복장 자체가 답답하고, 기계에서 나오는 소리가 엄청 시끄러워요. 멸균실에서 소분과정 중 약을 부을 때와 기계에서 하루에 2만 개의 약이 떨어질 때 약가루가 계속 날려서 마스크는 하지만 그것으로 다 차단이 안 되니 목도 아프고 비염을 앓고 계신 분도 많죠."


단순 반복 작업이라 언뜻 쉬워 보이지만, 계속하니 그렇지 않다고 한다. A씨가 15년 동안 주로 근무했던 곳이 멸균실 밖 포장작업이어서인지 더욱 생생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한 겹씩 포장이 이루어진 상태에서 멸균실 밖으로 물건이 나오면 또다시 병 포장이나 소케이스에 10개씩 담아서 설명서를 넣어요. 요즘은 이 약을 누가 언제 어떻게 만들었는지 정보를 넣는 바코드로 된 태그 작업(RFID)을 하고 라면상자 크기의 상자에 100정, 30정씩 넣어서 개수 확인하고 회사 로고와 약 번호 그리고 약에 대한 설명이 적힌 라벨을 다시 붙이고 상자를 들어서 옮기죠. 무게는 4kg 정도 되는 것부터 시럽제의 경우 25kg 정도 돼요. 4시간 동안 40~50상자는 들어 옮기는 것 같아요."


A씨가 멸균실 밖 포장작업 중 가장 힘들었던 것은 지금은 자동화로 없어졌지만 몇 년간 계속해 온 수축작업이라고 한다.

"수축이라고 해서 병 안에 약을 보호하기 위해 비닐을 집어넣고 거기에 설명서 넣어 코팅하듯이 기계에서 비닐을 씌워서 10개씩 포장하는 작업을 했는데 가장 힘들었어요. 기계화되기 전이었으니 둘이서 4시간에 4천 개, 온종일 7천~8천 개 하고 나면 녹초가 됐어요. 

그 일을 했던 사람들은 다들 힘들어 했고 저도 그때 몸이 많이 망가진 것 같아요. 제약회사가 일정한 온도를 유지해야 하는데 약이 굳어져야 하니 기계에서 나오는 열 때문에 엄청 더워요. 그리고 일일이 손으로 눌러서 비닐을 씌워줘야 하니 손가락, 손목, 어깨가 멀쩡하지 않았죠.

자동화 이후에 비닐 작업은 없어졌는데, 그래도 기계에서 병이 나오면 라벨이 잘 붙어있는지 확인해야 하고, 주사제라 크기가 작으니 한 번에 다섯 개정도 일일이 병을 들어서 봐야 해요. 8시간에 2만개를 들어서 보려고 하면 반복적 동작 때문에 손가락, 손목에 무리가 많이 느껴져요."


근무시간이나 휴식시간, 휴게 공간에 관해 물었는데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침 8시 출근해서 오후 5시에 퇴근해요. 5년 전 안정된 기계화가 되기 전에는 잔업이 정말 많았는데 지금은 거의 줄었어요. 잔업이 많을 때는 거의 매일 했어요. 돌아가면서 일주일에 두 번씩 보통 저녁 9시나 9시 30분까지 했죠. 점심시간은 낮 12시부터 오후 1시까지인데 식사하고 탈의실 바닥에서 쉬죠. 작업 중간에 휴식시간은 없어요. 아침 8시부터 12시까지 4시간 꼬박하는 거죠. 화장실은 중간에 교대로 갔다 오는데 대타로 일해 줄 사람이 없으니 화장실에 가면 동료가 힘들어져요. 보통은 반장들이 그 역할을 하는데 우리 회사는 이상하게 반장이 없어요. 그래서 동료들끼리 미안해서 서로 눈치 보여 자주 못 가고, 화장실 안 가려고 일하는 중간에 물을 아예 안 마시는 분들도 계세요."


인간의 생리현상조차 해결할 수 없는 전근대적인 작업조건이 한 번쯤은 들어봤을 제약회사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경악스러웠다. 휴게 시간도 없이 4시간을 연속으로 반복작업 하는 것은 근골격계 부담이 될 수밖에 없고, 이것은 전적으로 사업주의 책임이다. 그런데도 이런 행태가 행해지는 현실을 개선할 방법은 없을지 물었을 때 그녀는 쓴 미소를 지었다.


"부서장 밑에 남자 관리자들이 있지만, 자신들은 여유 있게 일하면서 저희의 편의는 안 봐주더라고요. 전반적인 제약회사 분위기가 관리자는 대부분 남성인데, 일반 여성 작업자를 대하는 태도가 강압적이고 보수적이라고 하더라고요. 우리 회사는 여자 반장도 없으니 더 심하고요. 작업자들의 생각이 뭉쳐져야 바뀔 텐데 사업주의 친인척들이 곳곳에 포진해있어 힘들 거예요. 많은 제약회사가 소규모로 시작해서 점점 커지면서 친인척으로 관계되는 사람들이 들어오게 되는데 우리 회사도 예외가 아니에요. 그래서 아마도 노동조합 같은 낌새가 있다면 색출해서 그 사람은 사직해야 할 거예요. 제가 입사하기 전에 이런 움직임이 있었는데 회사 문 걸어 잠갔다 하더라고요."


테니스 엘보, 손목터널증후군 같은 근골격계 질병을 자연스럽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봐서 주변에 근골격계 질환을 앓고 계신 분들이 많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동료 중 몸이 아프면 어떻게 하시는지 물었는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부분 손목터널증후군 같이 한 번쯤은 들어본 질병이고, 많이 아파서 일 못 하겠으면 그만두죠. 저도 일하다 허리를 다친 적이 있었는데 부서장이 와서 대놓고 산재 신청할 생각은 하지 말라고 하더군요. 밥줄 끊길까 봐 못했어요. 몇 년 전에 산업안전공단 같은 데서 한번 조사하러 나온 적이 있었어요. 그분이 이 작업을 이렇게 계속했냐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15년째 이렇게 하고 있다고 대답했더니 깜짝 놀라던데요."


개선할 것이 너무나 많은 현실에서도 약을 만드는 일에 보람을 느낄 때는 언제인지 여쭤봤다.

"전문의약품을 주로 만들어서 많지는 않지만, 약 만드는 기계장비가 비싸서 한 제약공장에서 만든 약이 여러 제약회사나 상품명으로 나가는 경우도 있거든요. 제가 만드는 약이 광고로 나오고 가끔 그 약 먹고 효과 봤다는 얘기를 들을 때 기분이 좋죠. 처음에는 심혈관질환이나 간질환 환자들이 먹게 되는 약을 만든다는 사실에 나름 뿌듯하기도 했고, 이 약이 다 팔리는 걸 보면 세상에 아픈 사람들이 정말 많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아프지 말고 건강해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이 일을 하면서 제 몸이 이렇게 아프게 되었죠."


마지막으로 이 글을 읽는 독자에게 한 말씀 부탁드렸다.

"단순반복적인 작업이지만 그 과정에서도 꼼꼼하게 봐야할 것이나 노하우가 축적되는 경력에서 나오는 나름의 전문성이 있어요. 그런데 여성 작업자는 10년이 되면 호봉도 오르지 않고, 진급의 기회도 없어요. 남은 건 통증뿐이죠. 그래서 요즘 우울할 때도 있지만, <일터>처럼 건강하게 일할 권리를 알려나가는 사람들이 있고, 이것을 공감하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이 반갑고 제게는 희망이 되는 것 같아요. 부끄럽지만 산재보상보험법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거든요. 저처럼 아파하는 제약공장 노동자도 건강하게 일할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어요. 쉬어가며 일해서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계속 일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한국에 「산업안전보건법」 제24조 제1항 제5호 및 「산업안전보건기준에 관한 규칙」 제656조 제1호에 따르면 근골격계 부담작업 2항에는 '하루에 총 2시간 이상 목, 어깨, 팔꿈치, 손목 또는 손을 사용하여 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작업'을 명시하고 있다. 산재보상보험법에는 정당한 절차를 밟아 아프면 치료받을 권리도 보장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을 현실화시키는 문제는 또 다른 과제라는 것을 절실히 느낀다. 사람들의 병을 치료하는 약을 만드는 제약회사에서 기본적인 법도 지키지 않으며 노동자를 병들게 하고 있는 이 불편한 진실을 우리 사회는 묵과할 것인가. 제약회사에 몸담고 있는 이들과 이 글을 읽는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A-Z 노동이야기] 서로 다름을 이해하고 함께 어우러지는 '노란 들판' /2017.06

서로 다름을 이해하고 함께 어우러지는 '노란 들판'

[A-Z까지 다양한 노동이야기] 노란들판 나해니, 조수안 팀장 인터뷰


정경희 선전위원



지난 5월 24일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일한다는 가치를 10년 넘게 실현해오고 있는 서울 성북구에 위치한 사회적 기업 노란들판에서 일하는 나해니, 조수안 팀장을 만났다.


-노들 야학에서 시작되었다는 노란 들판 설립과정이 궁금하다.

"노들 장애인 야학에서 수업 후 교사와 학생의 뒤풀이 자리에서 검정고시를 거치고 사회에 나가도 취업이 안 되는 현실을 한탄하니, 이알찬 교사가 야학에 일터를 만들어보자고 제안해서 시작하게 되었어요. 현수막이라면 장애인도 할 수 있겠지라는 생각에 2006년 3월 노들 장애인 야학 자립작업장으로 시작했어요. 교사, 동문, 학생 세 명이 시작하며, 이 알찬 교사가 수원에 있는 바다의별 직업재활센터에서 일주일 동안 숙식하며 업무 흐름을 배워온 거죠. 


2006년도에 사회복지공동모금회사업으로 실사기계 한 대를 들여와서 일당백으로 고생을 많이 했는데, 너무 급한 상황이면 현수막 출력기 걸어놓고 기계 밑에서 자고 다음 날 새벽에 현수막 마감해서 들고 나가서 시공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10년이 흘렀는데 현재는 직원이 18명이고 장애인고용공단에서 지원하는 근로 지원, 활동보조인까지 합하면 22명이 일을 하고 있고, 이 중 장애인은 관악지역자활센터 인턴까지 8명이 일하고 있어요."


- 노란 들판에서 현수막이나 인쇄물이 제작되기 위해서 어떤 작업과정을 거치게 되나?

"먼저 홈페이지, 메일, 웹하드를 통해 주문접수가 되면 사무팀에서 고객 응대를 해서 납기일, 디자인 문구, 사이즈 등을 파악해 작업지시서를 적어 접수해놓으면 디자이너들이 자기 폴더로 가져가요. 그러면 서버로 소통하는데 디자이너가 가져가는 순간부터는 디자이너와 근로지원인의 몫이에요. 수정과정을 거쳐서 완성되면 작업팀 폴더에 넣어놔요. 작업팀이 출력 기계로 뽑고 작업지시서에 적힌 배송방법이나 기일을 지켜서 퀵이나 택배로 발송하는 시스템이에요. 인쇄 쪽도 마찬가지로 디자이너가 고객과 소통해서 최종 협력인쇄소로 넘기는 시스템이죠."


- 여러 작업과정 중 가장 힘든 과정은 어떤 것인가? 

"다들 힘든데 아무래도 출력, 마감, 시공, 배송, 포장을 하면서 몸을 많이 사용하고 서 있는 작업팀이 힘들 것 같고, 디자이너의 경우 목, 어깨, 허리, 팔 통증이 많이 있어요. 작업이 많을 때는 야근도 하게 되면서 장시간 앉아서 작업을 하니까 오십견 진단 받으신 분도 계세요. 뇌성마비 특성상 디스크가 많은데 디스크로 물리치료 받는 분들도 계시고요."


- 일하시다 아픈 거니 산재라 할 수 있는데 어떻게 처리하시나?

"출퇴근 중, 사무실에서 미끄러져 넘어진 경우가 있어서 산재 처리를 했어요. 시공 나갔는데 강당 문이 닫혀 있길래 아무도 없는 줄 알고 사다리 놓고 올라가서 시공하던 중 갑자기 강당 문이 열리면서 사람들이 우르르 나와서 사다리가 그대로 넘어간 사고가 있었는데, 다행히 다치지는 않았지만 다들 너무 놀랐었어요. 예방하려고 노력은 하지만 예상치 못한 경우가 가끔 발생해요."


- 사고뿐 아니라 일상적으로 누적되는 질환에 대한 예방을 위해 어떤 것을 하고 계시나?  

"아직은 안 하지만 일하는 중간에 스트레칭 체조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작업팀에서 열 재단을 할 때 코팅된 원단이 녹으면서 유독한 연기를 흡입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 같아서 공기청정기를 계속 돌리고는 있지만, 걱정이 돼요. 그 부분만 국소 배기 장치를 설치해야하는데 건물구조상 고려를 못하고 있는 부분이 있어요. 그래도 여러 가지로 많이 노력을 해야 할 것 같아요."


- 2009년도부터 함께했다는 경영지원팀 나해니 팀장님의 역할이 궁금하다.

"사회적 기업 관련 사업보고, 지원사업 제안과 관련된 각종 보고, 사업비 신청 등 전반적 행정업무를 하고 있어요. 종이 인쇄물 견적 내고 초기상담을 하는 일이 매일 하는 업무고요. 고정적으로는 못하지만 해야 하는 일 영업, 사회적 경제 네트워크 회의가 있을 때 참여하는 일을 하고 있어요. 제가 외부 인터뷰를 많이 하는 이유가 노란 들판 대표님이 노란 들판 야학 상근을 하시고, 대표대행 하시던 경영 이사님이 성북구 마을 사회적 경제센터의 센터장을 맡으면서 노란 들판은 현재 팀장 공동운영으로 가고 있어요."


- 여러 가지 일을 맡고 계신데 힘든 점은 어떤 것이 있는지?

"5년 차까지 인건비를 지원해주는 정부의 지원이 2011년에 끊기면서 노란 들판의 매출로만 운영을 해야 했어요. 납기일을 맞춰야 하는데 노동력은 한계가 있으니까 일을 많이 할 수 있는 사람에게 일이 몰렸어요. 그 과정에서 힘든 시기가 있었죠. 제 역량을 벗어나는 일을 책임을 지고 감당해야 했어요. 노란 들판의 가치에 공감해서 일을 시작했지만, 육체적으로 너무 힘드니 무력감이 오고, 정신적인 우울감도 오더라고요. 지난 3년간 5명의 청년을 채용하면서 일이 많이 나뉘어졌어요. 지금 가장 힘든 것은 물리적으로는 일이 많이 몰릴 때이고(일이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만), 정신적으로는 주문이 몰려서 디자이너들이 야근을 오래 해야 하는 상황을 보는 것이 가장 힘들어요. 개인적으로는 팀장으로서 당연히 가져가야 하는 책임이지만 가끔 무겁게 느껴질 때에요. 이거는 어쩔 수 없이 지혜와 노력을 통해 계속 감당해 나가야 하는 것 같아요."


2006년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중증장애인 취업 지원프로그램으로 참가하셨던 세 분이 모두 지금까지 함께하고 계신데 그 중 한 분으로 청각장애를 갖고 있는 조수안 디자인팀장의 역할과 힘든 점도 들어보았다.


"사무팀이 접수를 하고, 고객의 요청을 반영하여 디자인을 잘하고자 노력해요. 근무시간 내내 컴퓨터 앞에서 일해요. 일을 오래 하다 보니 자세가 좋지 않아요. 허리가 아프고 어깨도 아파요. 퇴근 후와 토요일마다 병원에 가서 물리치료 받아요. 일하다 스트레칭을 해야 하는데 시간이 촉박하다 보니 잘 안 돼요. 일할 때 가장 힘든 점은 디자인을 했는데 고객의 마음에 들지 두려움이 있죠. 그리고 어려운 점은 의사소통이 제일 어려워요. 디자인 수정할 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서 고민이 쌓이는데요. 혼자 스트레스받아요. 회식이 몇 번 있는데 사람들이 먼저 다가와서 뭐 때문인지 물어보기도 해요. 그러면 반은 풀려요."


- 8시 30분부터 10시 30분 사이에 본인이 출퇴근 시간을 정하는 선택적 근로 시간제를 적용하고 있는 이유가 궁금하다.

"8시 30분에 시작한 사람은 5시 30분에 퇴근하고, 가장 많은 이들이 근무하는 시간은 10시부터 7시까지에요. 10시 출근 7시 퇴근 근무 시간제를 시작한 이유는 장애인 직원이 많다 보니 9시 출퇴근 시간에 걸음이 늦으신 분도 있고 해서 대중교통이 붐비는 시간을 피해서 1시간을 더 늦췄어요."


- 다른 기업에서 보기 드문 내부프로그램이 적지 않다고 들었는데 간단히 소개해주신다면.

"초창기부터 10년 동안 일한 직원들의 체력이 방전 되고 있었어요. 초창기 멤버 중 일의 과부하로 지친 직원들을 대상으로 7-3-7 제도를 만들었어요. 7년 이상 근무한 사람은 3개월 전에 공지하고 회사와 같이 조정을 하면 7개월의 무급휴직을 쓸 수 있는 제도예요. 직원들의 행복을 위한 행복위원회라고 있어요. 그달의 생일자 문화상품권 챙겨주기, 전반적인 간식거리, 사무용품, 소모품 등을 관리하고 구매하는 일을 맡는데요. 직원이 3명씩 두 달마다 돌아가면서 하니 살림살이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자연스럽게 알 게 돼요. 회식비용이 초과되면 다른 비용에서 줄여야 하는 걸 알게 되고,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 자신이 조금은 희생하는 경험을 해보면서 서로 챙겨주는 문화가 자리 잡는 것 같아서 긍정적인 평가가 있어요. 


청각장애인과 소통을 위해서 일주일에 한 번씩 선생님 모시고 수화도 배우고, 전화를 받는 분은 점심시간에 30분을 더 쉴 수 있게 해드리고 있어요. 물리치료나 작업치료가 필요한 뇌성마비 장애인의 경우 근무시간에 치료받을 수 있게 하고 있어요. 직원 내부역량 강화교육으로 디자이너 한겨레문화 센터 교육비 지원이나 통역이 가능하도록 노란 들판 디자이너에게 맞춤 교육계획을 짜서 4회 차 진행했는데 반응이 매우 좋았어요. 물론 휴식시간도 가능한 보장하려고 해요. 샌드위치 데이에 쉬고, 생일에는 강제로라도 휴가를 써야 해요. 올해부터 1월 비수기에 5일씩 재충전 휴가를 팀원이 돌아가며 가졌는데 반응이 매우 좋았어요."


- 이렇게 좋은 제도를 실현하려면 현실적으로 급여는 어느 정도 받는지 궁금해진다. 

"임금제가 직급수당이 있고, 업무의 힘든 정도에 따라 업무수당이 있어요. 기본급이 있고 년차가 올라갈수록 3만원씩 느는 게 있고요. 매년 초에 성북구 생활임금과 최저임금을 놓고 기본급을 책정해요. 생활임금에 가깝게 책정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보통 일터의 노동자들보다 많이 받지 못해요. 풀타 임 근무자를 기준으로 평균임금이 약 180만 원 정도 돼요. 작년에 임금체계 논의를 하고 설문조사도 했었는데 60%는 만족하고, 40%는 부족하다고 느꼈어요."


- 앞으로 노란 들판이 성장해 나갈 방향과 일터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은. 

"한국사회에서 장애인이 살기 너무 힘들잖아요. 교육, 생활, 기본소득, 취업 등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많은데 지금 시점에서 노란 들판이 할 수 있는 일을 계속 논의하며 고민해나가고자 해요. 내부적으로는 새로 들어온 청년들과 오래 일한 장애인분들이 서로 이해하고 어우러지면서 노란 들판이 지향하는 바를 잘 실현해가는 것이 있고, 외부적으로는 부설기관으로 장애인 노동상담센터를 만들어서 장애인 노동권에 대한 세미나, 취업과정에서 곤란을 겪을 일에 대한 상담을 해보고자 하는 희망이 있어요. 


노란 들판 고객의 60%는 시민사회단체인데 노란 들판을 유지시키는 힘이에요. 그런데 노란 들판이 어떻게 일하고 있는지 대부분 잘 모르세요. 그래서 노란 들판의 얘기를 할 수 있는 창구로 블로그를 만들었어요. 소소한 이야기들이 많이 올라오고 있어요. 블로그에 들려주시면 좋겠고,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같이 일하는 일터가 어떤 모습으로 일이 굴러가고 있는지 관심을 가져주시면 좋겠어요."


청각장애를 갖고도 10년간 노란 들판에서 함께하고 있는 조수안 팀장은 장애인도 용기를 내면 당당하게 일할 수 있다는 말을 남겼다. 장애인이 자신감을 갖고 비장애인들과 평등한 일터를 만들어가는 노란 들판의 물결이 세상 곳곳에 퍼져나가길 바란다.



[A-Z 다양한 노동이야기] 호두과자 세 개 /2017.5

호두과자 세 개

- 화성시 방문건강관리센터 조미순 선임간호사 인터뷰

 


정경희 선전위원


보건소 하면 청결하고 안정적인 이미지가 먼저 떠오른다. 더구나 지역주민의 건강을 위해 보건소는 여러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방문건강관리 사업이다. 화성시 보건소에서 방문건강관리센터 소속으로 10년째 일하고 있는 조미희 선임간호사를 만났다.

 

- 다양한 간호의 영역 중 방문건강관리는 무엇이고, 지역사회에서 이루어지는 방문건강관리는 누구에게 무엇을 하는 것인지 궁금했다.

“방문건강관리사업은 국가에서 하는 사업이에요. 병원은 치료와 처치 중심이라면 지역사회 방문건강관리는 질환관리와 합병증 예방, 재활을 목적으로 지역사회의 취약계층 중 건강문제가 있는 분들이 주 대상이에요. 화성시는 방문간호사가 19명이에요. 한 간호사당 350가구를 관리하죠. 매주 방문 드리는 가구는 이 중 6~7% 정도 되고, 대부분 1~3개월마다 주기적으로 방문해서 만성질환이나 건강문제가 더 악화하지 않고 잘 관리되고 있는지 모니터링하고 건강문제에 따른 질환 관리교육, 필요할 때 타 기관 연계를 주로 하고 있어요.”

 

- 방문간호와 어떤 계기로 인연을 맺게 되었는지 여쭤봤다.

“간호대를 졸업하고 종합병원에 3년 정도 다녔는데 3교대 주기의 벽이 너무 크더군요. 신체 리듬이 깨지고, 그에 따른 업무 부담이 커지면서 그만두고 잠깐 일할 곳을 찾던 곳이 지역사회 보건소였어요. 처음에는 난임 지원 분야 10개월 기간제로 채용되었는데, 같은 시기에 방문간호 쪽에서 채용한 간호사 선생님이 개인 사정으로 근무를 못 하게 되어 대신 방문간호 업무를 권유받아 시작하게 되었어요.”

 

- 그럼 졸업하고 3년 뒤니까 아직 20대였는데 힘들지는 않았는지 궁금해진다.

“방문 간호하면 은퇴하신 선생님이 하는 분야 정도로 인식하고 있었는데 제 나이가 스물일곱이었으니 주위에서는 만류하는 편이었죠. 시작할 때는 3교대가 아닌 규칙적인 패턴으로 일할 수 있는데 만족을 느꼈지만, 차츰 병원에서 함께 일했던 동료 간호사들은 점차 좋은 자리로 올라가고 있는 것에 비해 열악한 취약계층의 가정을 방문하면서 힘들게 일하는 것이 비해 보이는 성과가 없는 저 자신이 무척 초라해 보이더라고요. 스스로 이전 동료들보다 뒤처진 것 같고, 취약계층은 마음에 공허함이 많은 편이라 그런 부분을 껴안아줘야 하는데 젊은 패기만으로 방문간호에 임했던 저는 힘든 벽에 부딪히는 느낌이었어요.”

 

분명히 필요한 손길이기에 그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10년째 방문간호를 하고 있고, 지금은 선임간호사로 열아홉 명의 방문간호사를 아우르고 있지만, 힘든 시기를 넘길 수 있었던 몇 번의 계기가 있었다고 한다. 그중 하나를 들어보았다.

“송산이라는 곳 아세요? 30분 넘게 차를 운전해야 갈 수 있는 외딴집 하나가 있었어요. 고혈압이나 당뇨 같은 만성질환은 주기적으로 체크하면서 모니터링 해야 하는데 이곳은 마을버스도 다니지 않아 방문간호사가 직접 찾아가 주기적으로 체크해 드려야 하거든요. 할머니께서 귀가 잘 안 들리시는 데다 아드님을 일찍 여의셔서 며느님과 함께 힘들게 생활하고 계셨어요.

그러던 어느 겨울날 제가 갔을 때 근처 어르신 몇 분이 모여 민화투를 치고 계시더라고요. 여느 때와 같같이 건강 체크를 해드리고 건강교육을 하는데 할머니께서 자꾸 부엌을 왔다 갔다 하시는 거예요. 다른 어르신이 정신없게 왜 왔다 갔다 하냐고 핀잔해도 그냥 웃기만 하시고요. 업무를 마치고 집을 나서는 저를 배웅해주시려는지 할머니께서 쫓아 나오셨어요. 감기 드니 얼른 들어가시라고 했지만, 한사코 차 있는 곳까지 따라 나오시더라고요. 그리고 무언가를 주머니에서 슬쩍 꺼내서 제 손에 꼬옥 쥐여 주시는 거예요. 뭔가 펴보니 호두과자 세 개였어요.

할머니께서는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지만, 할머니께는 호두과자가 세 개뿐이라 다른 분 몰래 주려고 추운 날씨에 여기까지 나오셨구나 생각하니 마음이 뭉클하더라고요. ‘감사합니다. 또, 올게요.’하며 할머니를 꼬옥 안아드렸습니다. 어떻게 보면 사소한 일화지만 그 호두과자 세 개로 그간 젊은 패기로만 임했던 방문간호업무에 대한 생각을 360도 바꾸는 계기가 되었어요. 이후 ‘또 올게요.’라고 약속한 말을 지키기 위해 매일 감사하는 마음으로 방문을 다니게 되었어요. 마음으로 대상자를 대하게 되고, 함께 울고 웃었던 경험이 쌓여 10년 넘게 방문간호를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 보통 방문간호 업무의 일과는 어떤지요.

“오전 9시부터 6시까지 8시간 근무를 하고 계시고 권역마다 사무실이 따로 있는데 10시~10시 30분까지 대상자와 연락을 하면서 방문스케줄을 짜요. 이후에는 권역 대상자의 가정에 출장을 나가서 업무를 하고, 4시 30분에서 5시 사이에 복귀해서 대상자 서비스 제공 내용을 시스템에 입력이나 서류 작업을 하죠. 보통 5~6시간은 외근을 한다고 보면 돼요. 하루에 방문하는 가정은 5~6가정 정도 되는데, 방문하면 그동안의 건강문제 점검하고 새롭게 생긴 문제는 없는지 그날의 활력 징후나 만성질환의 정도가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체크해요. 그리고 대상자에게 필요한 건강교육이나 투약관리를 하는데 보통 대상자의 건강문제에 따라 다양한 서비스가 제공되기 때문에 업무 일과를 간단명료하게 정리하기가 쉽지 않아요.”

 

불안을 느낄 때 동행방문 필요해

- 방문간호에 있어서 어려움은 어떤 것이 있는지 궁금했다.

“현장과 행정의 두 가지가 있는데, 현장 차원의 어려움이라면 아무래도 알코올 의존증이나 정신질환자 등 다양한 건강문제를 가지고 있는 취약가정을 직접 방문하다 보니 불안전성에 노출돼 있거든요. 안전에 대한 매뉴얼이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지침 수준이고 현장에서는 각기 다른 특이한 상황이 있기 마련이에요. 이런 경우 경험이 오래되신 선생님은 대처할 수 있지만, 신규 선생님은 당황하거나 두려워하는 안전에 관한 문제가 발생하거든요. 물론 개인의 성향에 따라 위험성을 달리 느끼기도 하지만 개인의 책임으로 돌릴 수는 없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렇게 문제점이 확인되는 가정은 동행방문을 한다든지, 지침 차원에서 배제 대상자로 둘 것인지, 아니면 타 기관과 연계하여 관리할 것인지에 대한 지침이 명확하게 나와 있지 않아서 어려워요.”

 

- 방문간호 업무 중 겪는 심리적 불안감, 감정적 소진 같은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시는지요.

“공식화되어 있는 건 없어요. 아직까지는 대상자와 안전에 대한 심각한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혹시라도 대상자가 키우는 개한테 물리거나 방문하면서 다칠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 상해보험에 따로 가입하고 있어요. 하지만 나머지 부분에 대한 대책이 없기 때문에 개선이 필요한 사항입니다. 감정적 소진은 분기별로 한 번씩 모든 선생님이 모여서 워크숍 형태로 동료끼리 서로 소통하고 힐링하는 기회를 만들고는 있어 도움이 되고 있어요. 대상자의 건강을 책임지고 있는 방문간호사가 먼저 심신이 건강해야 하므로 정말 중요하고 필요한 사항이죠.”

 

적절한 인원충원이 선행돼야 질적 서비스 유지 가능해

- 화성시의 경우 취약계층이 5만 명이라고 하는데 방문간호사 한 명당 몇 세대를 맡고 있고, 질적인 서비스를 위해 적절한 가구 수는 몇 세대나 된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전에는 한 방문간호사당 500가구를 맡았던 적이 있어요. 그러면 건강 체크만 하고 돌아와야 해서 질적인 서비스를 제공하기가 힘들어요. 저희의 경우 현재 350가구로 맞춰놓은 상태지만, 사실 질적인 서비스로 대상자의 만족도를 높이기 위해 200~300가구 정도가 적절하고 이를 위해서는 방문간호인력 더 필요한 상황입니다. 화성시는 점점 인구가 증가하므로 방문간호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매년 1~2명 방문간호 인력을 증원하고 있지만, 아직도 부족한 상황이죠.”

 

기간제, 위탁이라는 이름으로 비정규직 가속화

- 일하실 때 느끼는 어려움 중 행정적인 어려움이라면 어떤 것인지요?

“지자체에서 모든 인력을 정규직화하기에는 어려운 구조적 문제가 있나 봅니다. 그래서 연속적인 사업을 진행할 때 인력구성에 어려움이 있어요. 보건소뿐 아니라 읍면동 주민자치센터 등도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해요. 특히 방문간호의 특성상 대상자를 1년만 관리하고 끝나는 게 아니라 건강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계속 관리를 해야 하죠. 방문간호가 처음에는 기간제 형태로 진행이 되었는데 2년 이상 근무할 수 없어 방문건강관리사업을 민간위탁체계로 바꾸게 되었어요. 사실 민간위탁체계가 연속적으로 일할 수 있다는 장점은 있지만, 인력고용체계는 1년 단위로 재계약을 하는 계약직 체계이긴 마찬가지죠. 등록대상자의 건강을 책임 있게 관리하고 지속해서 지켜봐야 하는 상황인데 고용이 안정되지 않는다면 업무 책임감이라는 게 상실되기 쉬워요. 하지만 저희 방문간호사들은 열악한 조건 속에도 책임감을 느끼고 근무하셔서 존경스럽고, 어떻게 보며 안타까워요. 빨리 방문간호사의 노력의 대가가 고용안정으로 인정받았으면 좋겠어요.”

 

안정적 고용보장으로 방문간호 이루어지길 

- 급여책정이나 인상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민간위탁사업이 워낙 다양하기 때문에 사업지침 등에 따라 급여체계는 달리 이루어져요. 그래도 저희는 다른 시에 비해 급여체계가 좀 더 나은 편이지만 역시나 급여 인상의 한계점과 안정적인 고용보장이 되지 않아서 매년 이직이 발생되고 있어요. 올해도 두 분이 그만두셨거든요. 고용하는 입장이나 건강관리를 받는 대상자 입장에서는 매우 안 좋죠. 대상자의 건강력에 대해 구체적으로 누구보다 잘 아시는 경험과 노하우가 풍부한 방문간호사가 그만두게 되니... 이런 부분들은 행정적인 차원에서 더 채워져야 할 부분이에요.”

 

취약계층의 건강문제는 복합적인 해결이 필요할 때가 있는데 이는 여러 기관과 기구의 구조적 인프라 구성이 촘촘하게 이뤄져야 가능하므로 화성시 지역사회보장협의체 총무를 맡으며 함께 하고 있다는 그녀를 만나니 우리 사회안전망을 만드는 희망이 보여 든든했다

[A-Z 다양한 노동이야기] 건설노동자라고 불러주세요 /2017.4

‘건설노동자’라고 불러주세요

 


정경희 선전위원



수원의 한 아파트 건설현장 출입구에서 마중 나온 김창규 님을 만났다. 김창규 님은 형틀목수이자 건설노조 경기중서부 조합원이기도 하다. 출입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 1, 2층으로 쌓여 있는 컨테이너 박스들이 보였다. 그 사이로 들어가 녹슨 간이계단을 따라 2층 컨테이너 박스로 올라가니 조합원들의 휴식 공간이자 탈의실이기도 한 사무실이 나타났다.

 

회사 월급으로 자식 키우기 힘들어 형틀목수 시작 


조금 있으면 외손자를 보게 될 그는 형틀목수 일을 시작한 지 20년이 넘었다. 어떤 계기로 시작하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안산에서 회사를 다녔는데 월급이 짜서 자식들 키우기 힘들더라고요. 88년도에 건설 붐이 한창 성행했던 때라 새벽 컴컴한 시간에 시작해서 저녁 컴컴한 시간에 끝날 만큼 일이 많았고, 월급이 회사 다닐 때보다 많아서 목수 일을 배우게 되었어요. 이 일을 시작할 때는 30대라 젊어서 힘든 줄 모르고 했는데 이제는 골병이 많이 들었죠.”

 

보통 하루 일과는 어떻게 되시는지요?

 

“집에서 보통 새벽 5시에 출발해요. 가면서 동료들 태우고 6시쯤 현장에 도착해요. 아침식사하고 체조하고 간단한 조회하고 현장에 가면 7시 정도 돼요. 점심시간 1시간이고, 참시간이 30분씩 있는데 대부분 참 먹고 담배 한 대 피울 정도 쉬어요. 어쩔 때는 참 시간을 쉬지 않고 끝나는 시간을 앞당기기도 하죠. 그렇게 일마치면 저녁 6시쯤 됩니다.”

 

아파트 공사의 기초와 마무리 하는 형틀목수

 

노동조합을 가입한 후 5년 전부터 줄곧 아파트 건설현장에서 일하고 있지만 그 전에는 아파트보다 주택이나 연립 짓는 곳에서 일을 했었다고 한다. 아파트 공사를 할 때 형틀목수는 어떤 일을 주로 하는지 물었다.

 

“아파트 뿌리라고 할 수 있는 파일을 박고나면 철근 넣고 기초 매트를 치는 것을 시작하는 거죠. 그리고 지하주차장과 본 건물의 지하층을 만드는 거죠. 나머지 본 건물은 알폼 조립공이라 불리는 작업자들이 옥탑 바로 아래층까지 반복해서 올리는 작업을 하게 되는데 굉장히 힘들어서 대부분 이주노동자들이 작업을 해요. 힘든 일에 비해 돈이 적어서 젊은 사람들이 안 들어오니 대부분 50살 넘은 사람들이 많아요. 내국인 형틀 목수는 1층 출입구까지 작업이 끝나면 관리동 같은 부속건물을 지으러가요.”

 

이주노동자도 건설노조 중서부지부 조합원

 

가끔 접하는 이주 노동자와 한국인 노동자의 갈등은 사소한 오해와 문화적 배려의 부족 때문만은 아니다. 이주노동자의 존재가 자신의 일자리를 빼앗고 임금하락을 부추기는 요인이라 생각하는 한국인 노동자들의 인식을 바꾸어 내는 방법은 없을지 궁금했는데 그의 말 속에서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이주노동자 중 합법적으로 국내에서 일하고 있는 분은 저희와 똑같이 건설노조 경기중서부 조합원으로 가입해서 일하고 있어요. 사업주들은 비용 아끼려 이주노동자를 선호하는데 노동조합 가입해서 함께 싸우면 그런 꼼수는 더 이상 안 통하겠죠. 저희 팀에도 이주노동자 조합원이 있는데 팀의 책임자로서 작업이 잘못됐을 때 지적을 하면 차별한다고 생각할까봐 걱정이 되고, 한국인 작업자들과 갈등이 생길까 노심초사하는 게 있죠. 한국인 노동자들이 무심코 던진 말에도 상처를 받을 수 있으니까요.”

 

형틀목공 일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작업과정을 물었더니 뜻밖에도 현장에서 일할 때는 느끼지 못했던 힘듦이 있다고 했다.

 

“워낙 이 바닥에서 잔뼈가 굵어져서인지 기술적으로 힘든 것은 별로 없는데 현장에 들어와서 노조를 거부하는 원청과 최하위 하도급이라 할 수 있는 회사 사람들과 갈등을 빚을 경우가 주로 힘들죠. 그 사람들은 떡 주무르듯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이주노동자나 불법체류자가 들어오면 대 환영이나 우리처럼 노동법을 들고 나오는 노조가 들어오면 싫어라 하죠. 그리고 제일 힘든 것은 항상 노상에서 일해야 하니 여름에 덥고, 겨울에 추운 날씨예요.“

 

직업성질환 요인 넘쳐나지만 사고성 재해 아니면 힘들어

 

20년 넘게 건설현장에서 일하시면 사실 종합적인 근골격계 질환에 걸리지 않았을까 싶다. 필자도 그래서 이렇게 질문드렸다. 어디부터 골병이 들던가요?

 

“허허~ 허리가 가장 먼저 신호가 왔어요. 물론 쌓여서 안 좋아지는 건데 대부분 구르거나 뚝-해야 입원해서 치료를 받는 게 대부분이죠. 어깨 무릎 할 것 없이 집에서 며칠 놀면 온몸이 쑤셔요. 사실 모두 다 가는 귀 먹은 사람이 많아서 그런 건데 서로 못 듣는다고 불편해 해요. 건축 일하는 사람들이 가래를 많이 뱉어요. 시멘트 속에는 양잿물이라는 성분이 있어요. 그 물에 손을 담그면 물집이 생겨서 터지고 짓물러버려요. 그런 게 바닥에 굴러다니다 말라서 먼지가 돼 바람이 불면 날아다니다가 호흡기로 들어오는 거죠. 그런데 아직 이런 것으로 산재를 받은 경우는 없어요. 대부분 사고로 다치고 부러지면 보상을 받는 거죠.”

 

살 사람도 죽게 만드는 119 돌려보내기

 

매우 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건설현장. 그동안 많은 사고를 겪으셨을 텐데 혹시 기억에 남는 사건이 있는지 물었다.

 

“오야지 밑에서 주택 짓는 일을하다가 주춤하더니 철근이 쌓여져 있는 곳에 거꾸로 떨어져 버렸어요. 다행히 정신은 안 잃고 머리가 핑 돌더라고요. 1년 정도 치료받고 나았죠. 동료들이 119에 신고한다고 하니, 119에 신고하면 사고 건으로 등록이 돼서 벌금이 나오고 산재건수도 올라가게 되니 사장이 막았어요. 그래도 동료들이 119를 불러서 결국 병원에 갔고 1년에 걸쳐서 나은 적이 있죠. 보통 큰 회사의 경우는 오는 119도 돌려보내고 회사지정병원 응급차를 부르거나 자기들 차로 병원에 태우고 가죠. 그래서 이런 아파트 공사장에서 떨어지면 살 확률이 높은 사람들도 죽게 되는 거죠. 얘네들은 사람목숨을 아깝게 생각 안 해요.”

 

법을 지켜야 우리의 안전도 지킬 수 있어요

 

이 현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다른 현장에서 얼마 전에 배선공이 떨어져서 사망하는 사고가 있었고, 사망사건을 접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런 죽음의 행진을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건설법을 지켜야죠. 하도급 철폐 내걸고 있는데 원청에서 하도급이 4, 5단계까지 내려오고 가장 마지막 하도급 현장에서는 일반공(일명 잡부)까지 하도급을 주죠. 그러면 팀장들이 팀원들을 데리고 들어와서 그것을 받는 거죠. 그러다보니 땡겨먹기 위해서 부실공사하고 안전시설을 안 하고 그런 것을 빼야 남으니까, 서로 하도급 받으려고 경쟁하면서 제 살 깎아먹는 거죠. 저단가로 넣고 이윤을 남겨야하니 결국 불량자재 쓰고 불법체류자 같은 저임금 노동자로 인건비 낮추는데 그 피해는 결국 누구에게 오느냐면 노동자에게 오죠. 그 집을 노동자들이 사서 살게 되니까요. 그러니까 원청의 자본가는 돈만 벌어먹지 우리의 안전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에요. 불법하도급 하면 안 되고 직접고용 직접시공을 해야 해요. 그렇게 되면 노동자들 작업복, 6개월에 한 번씩 안전화 지급받고, 작업마치고 깨끗하게 샤워하고 적정한 인건비도 받을 수 있다고 봐요.”.

 

인터뷰 내내 분명히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노동조합 활동에 상당히 고무돼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노동조합 활동을 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는지 궁금했다.

 

“그 전에는 노동조합에 대해 부정적이었는데 노동조합 활동은 먼저 시작한 동료가 자기 권리를 주장할 수 있어서 좋다며 권유해줘서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집회에 가도 불안하고 대오 맨 뒤에서 무대도 잘 안 보이데 있곤 했죠. 그런데 사람다운 대우도 못 받으면서 일해 주고 돈도 많이 뜯기고 여러 어려움이 있을 때 노동조합에 함께 하니 훨씬 안정적이고 든든해요. 또, 현장에 노동조합이 있어서 업주들이 비조합원들에게 저지르는 불법을 예방하는 효과도 있다고 느껴요. 평소 부정적인 비조합원들도 저희가 임금인상이 되면 같이 올라가니 내놓고 동조는 안 해도 필요성은 느끼는 거죠.”

 

자신이 일해서 번듯하게 지어진 높은 아파트 앞을 지날 때 고생은 했지만 기분이 좋아진다는 그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들어보았다.

 

“제 나이 쉰여섯인데 노동조합에 늦게 들어왔어요. 앞으로 길어야 10년은 할 수 있겠죠. 남은 시간동안 노동조합 활동 열심히 하고 싶어요. 약자는 뭉쳐야 싸울 수 있으니까요. 노동조합 상근자들과 조합원들 챙기면서 활동 열심히 하면 나중에 우리 아들딸들도 서민으로 살아갈 건데 좀 더 살기 좋아지지 않을까 생각해요.”


마지막으로 꼭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건설노동자라고 불러줬으면 좋겠어요!! 자본가들이 만들어 냈죠.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는 노가다, 일꾼, 인부라는 말이 듣고 싶지 않아요. 그러기 위해서는 하도급을 철폐해야 하고, 적정임금제를 도입해야 하는데 저희 건설노동자들 열심히 싸울 때 관심 가져주셨으면 좋겠어요!”

 

인터뷰를 마치고 현장에 왔으면 직접 봐야한다며 안전모를 쓰게 하고 직접 22층 작업 현장에 데려가셨다. 일어설 때마다 철커덩 흔들리고 사방이 한 장의 철창으로만 만들어진 간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22층까지 올라가는 동안 엄청난 위험 앞에 허술하기 그지없는 안전장치에 의지해 일하는 건설노동자의 아슬아슬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A-Z 다양한 노동이야기] 삼각산 재미난 학교에서 산나물을 만나다 /2017.3

삼각산 재미난 학교에서 산나물을 만나다

- 대안학교 교장 인터뷰 -

 


정경희 선전위

 


동네 할아버지께 길을 여쭈었더니 알려주신 곳은 가정집인 줄 알고 지나쳐 왔던 대문이었다. 교문에 붙어있는 ‘삼각산 재미난 학교’라는 간판을 보고서야 내 머릿속에 자리한 학교에 대한 고정관념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산나물이라 불리는 이상훈 교장을 인터뷰하는 내내 얼마나 좁은 교육관으로 아이들은 양육하고 있었는지 반성하게 되었다. 이렇게 고정관념을 넘어서는 학교와 어떻게 연을 맺게 됐을까.

 

“이 동네에는 98년에 공동육아가 생겼고, 아내가 좋은 어린이집이 있다고 해서 우리는 2000년에 이사를 왔어요. 그때 저는 가끔 나타나는 동네 아저씨였죠. 한창 비정규직 조직화 활동으로 바쁠 때는 아빠로서 해야 할 일에 대한 배려를 많이 받았어요. 그래서 활동을 그만둔 후 그동안 외상값 갚는다는 심정으로 어린이집에서 일했는데 그러면서 일상에서 협업하고 연대하는 것들이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어요.”

 

산나물은 95년 서울지하철 노조에서 활동 후, 99년부터 2006년까지 공공운수노조 공공부문 비정규직 노동자 조직화 활동을 했다고 한다. 불안정노동이 일상화돼버린 요즘, 길고도 치열했던 그의 활동 이야기를 듣는 동안 여러 가지 울림을 받았다. 아쉽지만, 지면상 간단히 소개한다.

 

“월요일 아침에 나가서 토요일 저녁에 집에 들어왔어요. 전국의 투쟁 사업장들 농성에 파업에 구속되고 다치고 침탈당하는 일의 반복이었는데 그렇게 10년 가까이 살았죠. 동지가 제 눈앞에서 분신해서 죽고, 가정이 파괴되는 걸 보니 감당이 안 되는 거예요. 그리고 싸우다 보니, 자본이 이윤율 하락의 마지노선으로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공장을 중국으로 옮기는 등 끝내 양보하지 않는 걸 보면서, 비정규직 싸움이 개별 사업장의 문제로 풀어갈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됐죠.”

 

현장에서 직접 비정규직 노동자가 되어 조직화를 시도해보았지만 여의치 않았고, 투쟁현장과 일상에서의 괴리감으로 힘들었던 시기를 지나, 어깨너머로 학교를 만드는 일에 참여하게 되면서 교육의 문제가 중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소비는 대자본 유통에 종속돼 있고, 일상은 피폐화돼 있는데 그런 것들을 협동하고 연대해서 공동으로 해결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학교 또한 노동시장에 종속돼 있죠. 결국, 노동시장의 변화 없이는 학교가 변하지 않는 거죠. 대안학교도 노동시장에서 자유롭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예요. 우리는 불안하고 힘든 노동시장에 몸담고 있고, 거기서 번 돈으로 여기에 보내면서, 단지 제도권 학교 싫으니 대안학교에 보낸다는 생각은 근대화된 학교 틀에서 벗어나지 않다는 문제의식을 느끼게 되었어요. 자식의 삶 문제 즉 일상의 먹거리, 생필품, 생활문화 변화를 함께 만들어야 한다는 거죠.”

 

아이들의 학교가 어른들의 삶을 변화시키다. 

2009년부터 시작했고, 삼각산 재미난 학교 출신 졸업생 부모들이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마을활동에 대해 들어보았다.

 

“배움은 관계에서 일어납니다. 가정을 벗어난 아이들이 만나는 사회는 이웃이고 마을이잖아요. 학교가 마을이고 마을이 학교라던 간디 선생님의 실천을 시도하는 거죠. 무엇이 필요한가 생각하다가 사람들이 마음 편하게 믿을 수 있는 밥집 하나쯤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학부모와 교사, 마을주민들이 돈을 모아 친환경 농산물 마을식당을 만들었죠.

엄마 아빠가 늦은 일이 있으면 ‘마을식당 가서 밥 먹고 있어라.’고 믿고 말할 수 있는 곳. 학교는 일정 정도 합의와 동의가 있어야 보내지만, 마을식당은 문턱이 없잖아요. 먹고 싶은 사람들이 오면 되니까요. 새로운 커뮤니티가 생긴 거죠. 그러다 보니 누구는 마을 카페, 누구는 마을 목공소를 만들고, 나는 음악을 좋아하는데 밴드를 해보자 이러면서 커뮤니티 공간이 생기고 관계가 만들어지더니, 여기서 생긴 또 다른 필요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공간을 만들고 그 공간이 더 많은 사람에게 확장되면서 공간과 관계의 변증법이 벌어진 거죠.“

 

아이들이 변하려면 결국 어른이 변해야 하니 아이들을 위해 학교를 만들었지만 결국 실제 어른들의 학교가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삼각산 재미난 학교는 마을공동체 활동의 훈련소같이 예비활동가를 길러내는 역할을 하게 되었지만, 뜻밖의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고 한다.

 

“학교가 내부 갈등으로 학생 수가 절반으로 줄었죠. 학교 설립부터 함께 했던 선임 교사들은 상처를 받아서, 또 도의적 책임으로 떠나게 돼요. 교장도 책임을 지고 임기 중에 떠났지요. 마을활동의 핵심인 학교의 뿌리가 흔들리는 상황에서 교장 공모를 했어요. 이런 마을 형 대안학교의 교장은 통합적 리더십이 필요하거든요. 학교 경영도 해야 하고, 교육적 비전도 제시해야 하고, 추상적 수준이 높으면서도 구체적인 역할도 해야 하는 어려운 역할이더라고요. 아무도 안 오죠. 그때 제가 목공소 일하면서, 마을법인의 상임이사였거든요. 몇몇 부모들과 교사들이 마을법인에서 학교 운영을 책임질 수밖에 없으니, 저더러 교장을 하라고 하더군요. 거절할 수가 없었죠. 임기가 4년이니 올해가 마지막이에요.”

 

모든 관계와 공간이 배움의 현장이다. 

한국의 교육이 실제 삶과 앎이 괴리되고 있는데, 학교 안에서 그렇지 않은 순환적인 배움을 만드는 것뿐 아니라 모든 관계와 공간이 배움의 현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밝혀내고 실천해보고자 노력 중이다.

 

“제가 직접 하는 수업은 목공 수업밖에 없지만 아이들과 관계 맺기, 부모와 파트너쉽을 만들어가는 활동을 하면서 마을과 연결해나가는 코디네이터 역할을 합니다. 그 과정에서 교육이 깊고 넓어지길 바라죠. 서울시의 다양한 지원 사업이 생기면서 상대적으로 더욱 주목받게 되었고, 우리 활동이 강북구 외의 다른 구에도 확장되고 있죠. 마을공동체가 자립적인 경제구조를 만들어가는 것이 사실은 매우 적극적인 반자본적 실천이죠. 대자본과 독립적인 유통구조를 만들기 위해, 더 많은 사람이 일상에서 실질적인 협력과 연대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 구체적인 삶의 문제를 가지고 커뮤니티적인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죠.”

 

정해진 교과서를 쓰지 않는 삼각 산재미난 학교의 일과는 8시 45분에 시작하여 3시에 마친다. 1시 반 이후에는 마을도서관이 되어 동네 아이들 누구나 올 수 있고, 오후 6시까지 아이들이 상주한다고 하니 교사들이 힘들지 않을까 궁금했다.

 

“도서관 사서 교사는 10시에 출근해서 6시까지 근무해요. 실제 아이들을 만나는 생활교사들은 회의나 행사로 그렇지 않은 날도 있지만, 아침 8시에 출근해서 4시에 퇴근해요. 저희가 정해진 교과서를 쓰는 게 아니라서 교사들이 수업을 담당하지 않은 시간에는 계속 교과연구를 해야 해요. 마을의 다양한 공간과 관계들이 교육과정의 살아있는 재료가 되는 것이니까 사람들을 만나려면 활동에 직접 참여도 해야 하죠. 학생마다 다른 관심, 다른 흥미 모두를 교사가 다 채워줄 수는 없겠죠. 그러다 보면 서로 연결해 줘야 하기 때문에 늘 열려있어야 교재연구가 가능하죠. 6년 만근을 하면 10개월간 유급 안식 휴가가 있어요. 급식교사는 6년 만근에 5개월 유급 안식 휴가가 있어요.”

 

교사나 학부모나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해본 경험이 많지 않기 때문에 선생님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시간은 학부모를 만나는 시간이라고 한다.

 

“아이들과는 소통이 잘 되지만 부모들은 다양하잖아요. 갈등이 발생했을 때 서로 생각이 다르면 인정해주고 평화적으로 해결해본 경험이 많지 않죠. 일상적인 협동을 통해서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변화를 만들어 본 경험이 없는 세대들이니까, 정체성이나 가치관을 공동체적으로 모아나가고 공감하는 과정에서 갈등이 있죠. 교사나 학부모들도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해나가는 것이 늘 일상적인 자기 과제고 훈련의 내용이기도 하죠.”

 

대안적 삶에 대한 고민이 대안 교육의 첫 출발

코흘리개에 오줌 지리던 애가 커서 술 사달라고 하면서 여자친구 얘기, 인생 얘기할 때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는 이상훈 교장에게 마지막으로 대안학교나 대안 교육에 관심이 있는 분들께 한 말씀 부탁드렸다.

 

“정규직 비정규직 할 것 없이 노동시간이 길잖아요. 고용관계가 불안정하고 늘 삶에 지쳐있죠. 자신의 삶, 자신과 가까운 주변을 차분하게 둘러보는 시간이 필요한데 우리 노동자들은 사람으로서 가장 소중한 이 활동을 할 시간이 없어요. 그래서 보수화되는 거거든요. 피곤하니까 자신의 삶을 생각하지 않아요. 자본가들이 원하는 것이죠. 어른인 당신이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먼저 스스로 물어보라고 말하고 싶어요. 대안적 삶을 살고 싶은가? 그래야 아이가 대안 교육을 받을 수 있고 대안 교육적 환경을 만들 수 있어요.

비싼 수업료 냈으니 내 자식 잘 키워주세요. 저는 기존대로 따로 살 거예요.” 라는 분들은 이중적인 것이죠. 대안적인 삶을 함께 일굴 것이냐. 그런 식구가, 가족이, 동지가 될 것이냐가 중요하다고 봐요. 대안 교육에 관심이 있다면 내 삶에서 대안은 무엇인지 질문해보고 나는 그렇게 살지 못했지만 아이는 그런 대안적 삶을 살기 바라는 마음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을 때 구체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좋습니다.“

 

[A-Z 다양한 노동이야기] 언젠가 모든 사람에게 솔직한 PD가 되고 싶어요! /2017.2

언젠가 모든 사람에게 솔직한 PD가 되고 싶어요! 

- 방송국 프리랜서 조연출 한별 님 인터뷰


재현 선전위원장

 


방송의 세계는 굉장히 화려하면서서 사회적으로 미치는 힘과 영향력 역시 상당하다. 그러한 이유로 많은 사람이 방송 일을 해보고 싶다는 꿈을 갖는데, 이번 일터가 만난 한별 님도 방송을 연출하는 PD(Producer, 프로듀서)를 꿈꾸며 조연출 일을 하고 있다. 공중파에서 더는 예전처럼 정규직 신입 PD를 뽑지 않고 대부분 열악한 영세 외주 제작사에서 시작해야 하는 어려운 조건이지만, 한별 님은 누구보다 즐겁게 꿈을 향해 한 발자국씩 내디디고 있었다.

 

영세한 외주 제작사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어렸을 때부터 막연하지만, PD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꾸다가, 대학 때 전공하면서 습작에 불과하지만, 영상을 제작하면서 이 일에 한 발짝 다가선 것 같아요. 졸업하고서는 국가에서 운영하는 아카데미에 다니면서 일을 더 배웠어요. 그러다 여행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외주 회사에 입사하면서 조연출 생활을 시작했죠. 지금은 방송사랑 프리랜서로 계약을 맺고 일하고 있고요.”

 

많은 사람이 방송국 PD가 되려면 언론고시를 준비해서 방송사 공채에 합격하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방송을 꿈꾸고 있는 청년들이 방송사에서 공채로 인력을 많이 뽑지 않다 보니, 외주 제작사로 들어가 방송을 시작하는 경우가 많아요. 워낙 외주 제작사에서 방송을 많이 만들기 때문에 처음부터 외주 제작사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있고요. 저도 처음에는 공채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에요. 무엇보다 안정적이라는 것이 큰 장점이잖아요. 그런데 지금 일을 병행하며 완벽하게 준비하기가 쉽지 않고, 외주 제작사에서도 충분히 배울 기회가 많아서 공채 를 준비하지 않는 것에 대한 아쉬움은 크게 없어요.”

 

한별 님은 지금까지 여행 프로그램을 시작으로 아침 방송을 거쳐 현재 동물 관련 쇼양 (쇼 +교양) 프로그램을 하고 있다고 한다. “


“여행 프로는 제가 처음 입사한 외주 제작사에서 제작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10년 차 이상의 경력이 있는 분만 PD를 할 수 있었어요. 평소에 해보고 싶던 프로그램을 하게 된 것이라 아주 즐겁게 일했는데 회사 사정상 제가 ‘입봉’을 할 수가 없는 상황이 다 보니 결국 이직을 해야 했죠. 그래서 입봉이 빠르다는 아침 방송을 하는 제작사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제작되는 시스템이 제가 생각하던 것과 많이 달랐어요. 솔직히 말하면 못 버텼다고 할 수 있겠죠? (웃음) 그래서 이대로는 방송이라는 자체에 흥미를 잃을 것 같아서 다른 회사로 이직하게 되었죠. 다행히 지금은 재밌게 일하고 있죠. 그래서 조금 돌아가더라도 내가 하고 싶은 프로그램을 해야겠다고 생각해요.”

 

방송국 일은 늘 월화수목금금금이다 

“매일 매일 다른데 촬영하는 날은 하루 종일 촬영만 해요. 얼마 전에 촬영 팀이 (PD, 카메라 감독, 조연 출) 지방으로 1박 2일 출장 다녀왔는데, 아침 6시 반 에 출발했어요. 전 그 전날 미리 장비 챙기고, 숙직 실에서 자는 거죠. 그리고 새벽에 출발해서 지방에 도착하자마자 종일 촬영했죠. 밥은 밤 10시에 촬영 마치고 먹거나, 잠깐의 휴식 시간이 주어질 때 먹곤 해요.

촬영을 다 마치면 숙소 들어와서 종일 촬영한 메모리카드 파일을 컴퓨터나 외장하드에 백업해요. 그리고 메모리카드 포맷하고, 다음날 다시 촬영하고 백업하는 걸 반복하죠. 사실 촬영하고 돌아오면 이제부터 제 일이 시작되는 거나 마찬가지죠. 백업한 파일들을 영상으로 작업할 수 있도록 변환하는데 이게 시간과의 싸움이거든요. 그리고 같은 시간에 촬영한 부분을 맞추는 작업인 ‘싱크 맞추기’를 시작해요. 가끔 박수를 치거나 슬레이트를 치는 게 다 이것 때문인 거죠. 그리고 이제 PD님이 편집을 시작하고, 편집이 끝나면 작가님들이 그 영상을 가지고 자막과 내레이션용 원고를 쓰기 시작하죠. 그 뒤에 자막과 더빙, CG 등 모든 후반작업이 끝나면 방송 전에 심의위원이 최종 검토하고 방송이 나가게 되요.“

 

한별님이 하는 방송은 총 5팀이 팀당 4명 (PD, 메인작가, 서브작가, 조연출)씩 구성해서 5주에 1번 방송을 담당한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듣고 꽤 사람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완전 착각이었다.

 

“첫째 주는 기획회의를 하고 아이템을 찾아요. 그럼 서브 작가님이 몇 백통 전화 할 걸요. 둘째 주에 는 그렇게 섭외가 된 사례자 가정들에 답사를 가게 되죠. 가서 방송이 가능하겠다 싶으면 촬영을 시작 하죠. 이렇게 촬영을 시작했다가도 중간에 파토 나게 되는 경우도 있어요. 다행히 촬영이 끝나면 메모 리카드를 백업하고 싱크를 맞춰요. 셋째 주는 PD님 이 편집을 시작하시는데, 이때 추가로 촬영을 나가기도 해요. 그리고 넷째 주에는 저는 서브 작가님과 예고편을 만들고, 피디님과 작가님이 편집하신 영상으로 전체 팀 시사를 합니다. 이때 나온 의견들로 수정과 보완을 해서 가 편집본을 만드는 거죠. 다섯 째 주는 가 편집 끝내놓고 자막 넣고 최종 수정해서 방송 나가는 거죠. 그러면 다시 첫째 주로 돌아가죠. 인터뷰 하는 지금이 넷째 주인데 이틀 동안 밤새서 예고편 만들고, 다섯째 주 넘어가기 전에 잠깐 틈이 있는 날이에요.”

 

즐거운 방송일이지만 늘 열악한 환경이다

“주요 방송국에서 계약직들도 그렇지만 특히 외주 제작사 쪽은 정말 열악해요. 대개 조연출 처음 시작 할 때 월급을 80~120만 원에서 시작해요. 계약서도 거의 안 쓰고 4대 보험도 안 들죠. 물론 외주도 정규직으로 채용하는 곳이 있긴 하지만 드물어요. 초봉도 많아 봐야 150만 원 정도일 거예요. 일하는 시간에 비례하면 최저시급도 안 되는 수준이죠. 예전에 선배 PD님께서 20년 전 조연출 할 때 100만 원 받았다고 하셨는데, 제가 외주에 있을 때 120만 원 정도 받았으니 20년 동안 만원 씩 오른 셈이네요." 


급여만 열악한 게 아니라 제대로 쉬는 것도 어려웠다. 한별님이 1년 넘게 일하면서 제대로 쉬어본 날이 작년 올림픽 때 방송이 쉬면서 이례적으로 있었다고 한다. 만일 정말 쉬고 싶으면 일을 그만두고 쉴 수 있다고 말했다.

 

“방송사에서 1년 동안 얼마나 일하고 있는지 조사를 해서 결과를 발표했는데 저희 팀의 조연출들이 일하는 시간이 대략 3,600시간 정도 나왔어요. 저희 팀은 촬영도 많아서 매일 밤새고 주말도 없거든 요. 이렇다보니 친구들은 한 달에 한두 번 쉴 때 만 나는데, 그것도 언제 쉴지 모르니까 ‘너희들 되는 시간에 만나고 난 일찍 퇴근 하면 갈게’ 그렇게 해서 만나요. 친구들을 만나도 늦은 시간까지 술 마시기도 그래요. 다음날 아침에 또 일찍 촬영하고 일하고 그래야 하니까요. 그래서 집에 가서 가족들과 술 한 잔 하거나 쉬는 편이죠. 사실 아빠는 제가 매일 늦게 까지 일하고 집에 자주 안 들어와서 이 직종에 대해 좋지 않게 생각하세요. 그래도 제가 원해서 하는 일이니까 그러려니 하시는 거죠.”


지난 1월 7일 OECD(경제개발협력기구)에서 발표한 국가별 1인당 연간 노동시간 결과 한국이 2,113시간으로 멕시코, 코스타리카에 이어 3위를 기록했고, 독일은 평균 1,371시간으로 노동시간이 가장 짧았다. 그런데 방송 업계는 3,600시간이라니 독일인 연간 2명이 일하는 시간을 방송 업계 노동자 1명이 다 해치운 거다. 아무리 즐거운 일이지만 늘 월화수목금금금 같은 일상에 박봉이다 보니 일자리는 남아돈다고 한다. 미디어잡 홈페이지나 1,000명 정도 모여 있는 카카오톡 단체방에서 PD(조연출)를 구하는 공고가 매일 끊이지 않는 것이다. 

 

그렇지만 더 즐겁게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힘들 때도 있지만,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점에서 매일이 즐거워요. 특히 제가 처음 이 일을 시작 하고 스크롤 (방송 제작한 사람들 이름이 자막으로 나오는 것에 제 이름 올라갈 때 정말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기뻤죠. 최근에는 스크롤 올라가는 것에도 무뎌지긴 했지만요. 가끔 그때 기뻐했던 기분을 생각하곤 해요. 요즈음에는 소소하지만 제가 만든 예고편 영상의 반응이 좋을 때 뿌듯하죠. 반대로 힘들 었던 점까진 아니고 하나의 에피소드가 있는데, 최근에 저보다 더 큰 개한테 바짓가랑이를 물렸어요. 사람을 물어서 문제가 된 개였는데 (웃음). 훈련하느라 줄을 풀어 놨더니 촬영하던 저를 문 거예요. 저는 촬영도 계속해야 하고, 으악! 하고 반응하면 더 세게 앙 물을 것 같아서 가만히 있었어요. 다행이 멍만 살짝 들고 크게 물리지 않아서 다행이었는데, 정말 무서웠어요.”


모두에게 솔직한 PD가 되고 싶다

"방송이라는 것이 어떤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시청 자들에게 제작자의 의도를 여과 없이 보여주는 거 잖아요. 그럼으로 다수의 사람들에게 피드백도 받을 수 있고요. 그런 점에서 매력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내 생각을 가장 솔직하게 담을 수 있는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PD가 되겠다고 생각하고요. 그리고 솔직히 지금 한국이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 지 못하잖아요. 지금이 5공화국 때보다 더 심한 것 같은데 이렇게 언론탄압이 심하다보니 방송에 대한 사람들의 불신도 하늘을 찌르고 있죠. 그렇지만 요즘 시국처럼 많은 사람들이 세상일에 끊임없이 관심을 갖는다면 조금은 더디더라도 언론의 자유도, 국민의 알 권리도 모두 충족할 수 있는 방송들이 나오지 않을까요. 모두가 함께 풀어나가야 할 과제라고 생각해요."

 

언젠가는 조금 더 나은 환경을 만드는데도 노력해야 할 것 같다

“한낱 조연출이라 뭘 말한다고 달라지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한 마디 한다면 예전에 한 방송 프로 그램에서 최저임금도 못 받고 사는 청년들 취재를 한 걸 봤어요. 그런데 그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막내들조차 최저임금도 받지 못하고 있었죠. 솔직히 지 금은 제가 뭘 바꿀 수 있진 않지만, 그래도 제가 조 금 더 성장해서 내 목소리를 낼 수 있을 즈음에는, 내 뒤를 이을 후배들은 조금이라도 나은 환경에서 꿈을 펼쳐가라고 말할 수 있게 노력해 봐야하지 않을까 싶어요.”

 

 

 

 

[A-Z 다양한 노동이야기] 행복한 보육이 시작되는 길목 /2017.1

행복한 보육이 시작되는 길목

 


정경희 선전위원



아이 봐준 공은 없다는 옛말이 있다. 아이를 돌보는 일이 그만큼 쉽지 않음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말이다. 13년째 어린이집에서 아이 돌보는 일을 하고 계시는 이수현 선생님을 뵙고 진솔한 얘기를 들었다.

 

초보 교사도 베테랑 관리원장도 겪어야 하는 하루일과

이수현 선생님은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도 주변에서 아이를 접할 기회가 없어서 아이를 돌보는 일에 대한 자신감이 없었지만, 우연한 기회에 어린이집 초보 교사 생활을 시작하셨다고 한다.

 

교과서에서는 아이의 행동이나 발달이 이렇게 진행될 거라고 배웠지만, 아이들은 한 명 한 명이 모두 다르거든요. 처음엔 벽에 부딪히는 느낌이었어요.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과 같은 아이에게 적응하는 기간이 필요했고, 예전 같지 않아서 부모님께도 맞춰야 하는 게 힘들었죠.”

 

지금은 관리원장을 맡고 계실 정도로 베테랑이 되셔서 가급적이면 선생님들이 8시간 근무를 하도록 노력하고 있지만 일이 생기면 그렇지 못할 때도 있다고 한다. 보육 교사의 하루는 어떤지 들어보았다.

 

"보통 아침 8시에 출근해서 청소부터해요. 그러다 아이들이 오기 시작하면 교실에서 아이들과 하루 일상이 시작되죠. 950분부터 아이들 손 씻기고 간식 먹이고 나면 첫 수업을 시작해요. 두 시간 수업을 마치면 아이들 점심시간에 선생님들도 같이 드세요. 점심시간은 굉장히 스피드하게 갈 수밖에 없는 게 눈으로는 아이들 보면서 밥 먹고, 다 먹으면 아이들 양치를 시켜주고, 먹은 자리 뒷정리까지 하셔야 하기 때문에 따로 점심 식사나 티타임은 전혀 가질 수가 없죠.”

 

정신없이 점심시간을 보내고 나면 곧바로 오후 일과가 시작된다고 한다.

 

오후일과는 연령별로 좀 달라요. 4세까지는 보통 낮잠을 자기 때문에 낮잠시간에 일하세요. 5세부터는 바깥활동까지 3시에 정규수업이 끝나면 종일반 친구들은 남아서 통합수업을 하죠. 정규수업을 마친 아이들과 함께 오후 간식을 먹고 정리하고 차량 한번 갔다 오시면 4시 반 정도죠. 남아있는 친구들 을 챙기기도 하면서 선생님들이 돌아가며 다음 날 수업준비, 일지 쓰기, 부모님 문자나 전화가 온 것 대응하고 나면 6시에요. 그럼 청소하고 6시 반에서 7시에 퇴근하는 거예요.”

 

힘들고 빠듯한 하루 일과중 가장 보람을 느끼는 때가 언제인지 여쭤보았다.

 

아이들이 울지 않고 집에 돌아갔을 때죠. 아이들이 돌아갈 때 찡그리거나 아프고 가면 그게 다음 날까지 선생님 마음에 남아있어요. 엄마가 오셨을 때 엄마 오늘 재미있었어.’ 하고 가는 애들, 가기 전에 안아주는 애들이 있을 때 좋죠. 하루를 그 아이가 잘 보냈다는 뜻이니까요.“

 

점심시간은 전쟁을 치르는 시간

언론에 나오는 아동학대 사건들 중 식사와 관련된 내용이 종종 등장하는 이유가 1시간이 안 되는 시간에 이 많은 일을 해야 하는 업무 부담문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 예민해지는 건 사실이에요. 먹기 싫어하는 아이는 밥을 던지기도 하니까요. 어머니들이 편식하지 않게 잘 먹이기를 원하니까 선생님들이 억지로 먹인 경우도 있지 않나 싶어요. 예전에는 원장님이 잔반 많이 나오는 반에는 지적하기도 했거든요. 그런데 요즘은 오히려 어머니들이 먹기 싫어하면 줄여 달라 하시고, 저희도 싫어하는 반찬은 적게, 좋아하는 반찬은 많이 주며 유도를 해서 먹이려 노력하죠.”

 

점심시간이 선생님들에게는 전쟁을 치르는 시간이라고 한다. 그래서 소화제를 드셔야 하는 선생님들도 있다고 하는데 편안한 마음으로 점심을 드실 현실적인 방법은 정말 없는 것인지 궁금했다.

 

점심시간을 개선하는 방법은 경기도에서 평가인증을 통과했을 경우 파견해주는 4시간 보조교사제를 활용하는 거죠. 그런데 순번을 너무 많이 대기해야 해요. 나이가 어린 반의 경우 누가 한 명을 먹여주기만 해도 도움이 많이 되니, 보조교사가 절실히 필요해요. 그러면 선생님도 좀 더 여유 있게 식사를 하실 수 있고 아이에게도 더 신경을 쓰고 돌아볼 수가 있겠죠.”

 

탄력보육은 아이들이나 보육 교사 모두에게 독

보육 교사 1인당 만 0세는 3, 1세는 5, 2세는 7명 정원이나 탄력보육으로 인원을 초과할 수 있는데 만 1세는 6명까지, 2세는 9명까지 볼 수 있다고 한다.

 

“2015년에 초과 보육을 안 하겠다고 했었는데 원장님들이 강하게 항의하고 난 다음에 2년만 유예를 주겠다고 한 거죠. 초과한 2명에 대한 정부의 지원금은 절반만 나와요. 그래도 원장님들한테는 그것이 크니 대부분 다 하시죠. 교사 입장에서는 5월 초까지 적응하는 시기에 아이 한두 명 더 느는 것이 힘드니 너무 하신 거죠. 정부는 초과보육에 대한 지원금을 차라리 간식비나 난방비, 교재 도구를 늘려주는 것으로 해 줬으면 좋겠어요. 아이를 늘리는 건 너무 안 좋은 방향이에요.”

 

CCTV와 맞춤형 보육의 그늘

아동학대가 사회적 주목을 받으면서 대안으로 모든 어린이집에 CCTV를 달았다. 그런데 일선에서 이것으로 인한 단점도 만만치 않아 보였다.

 

어머니들 입장에서는 ‘CCTV를 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하시는데, 당연히 보여드려도 문제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무심코 하시는 말씀이 힘들어요. 요즘에는 애가 한두 명이니까 우리 애는 절대 안 그래요. 선생님이 잘못 보셨어요.’ ‘우는 데는 이유가 있을 거예요.’ ‘선생님이 안 보신 것 아니에요?’ 교사를 믿지 못하고 심하게 말씀하시면 속상하죠. 저희가 본다고 보지만 아이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문제가생기거든요.”

 

박근혜 정부 들어서 오후 3시 이후에는 필요한 아이들에 대해서 맞춤형 보육을 하겠다고 했다. 일선 현장에 얼마나 맞춰진 정책인지 여쭤 보았다.

 

원의 입장에서 싫죠. 매번 클릭해서 올리고, 등원일지도 써야 하고, 맞춤형 프로그램도 따로 짜야 하는데 실질적으로 그 프로그램을 다 돌릴 수 있는 것도 아니에요. 30분 있다 가는 아이도 있고, 한 시간 있다가 가는 아이도 있는데 그 아이마다 다 맞춰서 짜줄 수가 없어요. 엄마들 입장에서는 연장할 때마다 일일이 선생님들께 얘기해야 하니까 눈치 아닌 눈치도 보시게 되고, 또 일찍 가는 아이의 엄마는 원의 수입을 줄게 할까 봐 미안해하시기도 하고, 연장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바우처로 따로 결제를 하셔야 하는 불편함이 있어요. 누구를 위한 정책인지 모르겠어요.”

 

정신은 안정제로 몸은 깁스로 버티는데 겨우 기본급 받지요

별난 학부모들뿐 아니라 재원생 받는 시기, 입학생 받는 시기에는 특히 선생님들의 스트레스가 심하다. 이석증을 앓은 적도 있는데 불안해서 안정제를 갖다 놓기도 한단다.

 

한 선생님은 자기가 불안하고 스트레스 받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해서 병원에 다녀오셨어요. 그런데 그 당시가 선생님 반 아이 중 많이 물리고, 때리는 아이의 어머니와 트러블이 굉장히 심했던 시기였든요. 일요일 저녁에는 심장이 쿵쾅거리고 금요일 저녁에는 안정기에 접어드는 패턴을 보이다가 결국 아이가 원을 그만두고 나서야 선생님이 안정을 찾는 경우도 있었어요.”

 

2주 이상 입원치료를 할 정도가 돼야 병가가 가능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병원에 가는 시간 내기도 힘든 조건이라고 한다. 일하다 다쳐도 산재는 엄두도 못 내는 상황에 대해 들어보았다.

 

어린 반일수록 스킨십도 많이 해주고 안아주고 달래줘야 하니 허리통증이 제일 많고, , 손가락 인대가 안 좋으세요. 인대가 찢어져서 팔에 반 깁스하고 일하시는 선생님도 계시는데 정형외과를 안 가본 선생님이 없을 정도예요. 산재에 대해서 저희끼리는 얘기해요. 그런데 산재를 요구했을 때 해 주시는 원장님도 안 계실뿐더러 인정받은 사례도 없으니 답답하죠.“

 

4대 보험을 떼면 기본급 1,180,950. 거기에 경기도에서 평가인증을 통과하면 나오는 처우개선비 50만 원이 대부분 보육 교사의 급여라고 한다. 근무시간이나 노동 강도를 고려하면 턱없이 부족한 급여라는 생각이 들었다.

 

행복한 보육이 시작되는 길목에서 필요한 것들

어머니들이 아이를 원에 보낸다고 했을 때는 선생님을 좀 믿어주시면 좋겠어요. 선생님들의 말을 한 번이라도 귀 기울여 들어주셨으면 좋겠어요. 저희도 인간이기에 스트레스 주면 받거든요. 인격을 지켜주셨으면 해요. 원장님들도 마찬가지세요. 식비많이 나왔다고 싫은 소리하고, 커피나 차도 안 사주시는 분들 계세요. 자신의 이권보다 교사와 아이들을 먼저 생각해 주시면 좋겠어요. 정부에서는 원장의 이권에 영향 받지 않는 보육이 이루어지도록 보육 교사에게 인력 지원이라든지, 교육의 기회를 직접 지원하여 보육의 질을 높였으면 해요.”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내 아이를 맡아주셨던 선생님께서도 이렇게 힘들게 일하셨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착잡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양육서에는 흔히 엄마가 행복해야 아이도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보육 받는 아이가 행복하려면 누가 먼저 행복해져야 하겠는가? 이제 더는 보육 교사의 희생에 기대는 보육이 아닌 건강하고 행복한 보육을 위해 보육 교사 삶의 질이 필연적으로 개선돼야 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A-Z 다양한 노동이야기] 느긋하게 다니는 버스를 꿈꾸며 /2016.12

느긋하게 다니는 버스를 꿈꾸며

- 시내버스 운전사 엄도영님 인터뷰




정경희 선전위원


버스가 왜 이렇게 다니지?

시내버스는 쉽게 이용할 수 있는 대중교통 수단이다. 버스를 타면 여러 풍경도 보고, 상념에도 잠기고, 가끔 졸아도 되는 여유를 누린다. 하지만 직접 운전하시는 분은 어떠실지. 주유소 일을 하시다 2009년도부터 평택에서 7년째 시내버스를 운전하시는 엄도영 님을 만났다.


“입사해서 1년 정도 일을 하는 동안 ‘버스가 왜 이렇게 다니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운전을 해보니까 교통법규를 위반하면서 빨리 달려야 하더라고요. 노선을 혼자 운행하는 게 아니어서 배차 간격도 고려해야 하거든요. 배차 시간도 맞추고 너무 짧게 보장된 휴식시간을 늘리기 위해 그렇게 운전하는 거죠. 그런데 이렇게 달리는게 저한테는 힘들더라고요.”


당시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소속 전국 자동차 노동조합이 있었는데 조합원들이 노조에 배차시간을 운전기사의 근무환경을 고려해서 조정하라는 요구를 누누이 해왔다고 한다. 그러나 노조는 전혀 반응이 없었고, 오히려 사고가 나서 그만두는 동료들을 계속 봐왔다고 한다.


“사망 사고가 3년에 2건 정도 있었어요. 이렇게 하다가는 내가 죽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우리 애들도 학생이고 가족들도 버스를 타는데 이런 운전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선배들이 복수노조 만들자고 제안해 왔어요. 그래서 ‘신호위반 하기 싫어서 노조를 탈퇴한다.’하고 민주노조에 가입했어요. 당시 선배들은 과속, 신호위반, 임금 때문만은 아니었고 18년 동안 해온 조합장을 바꿔보자는 생각도 있었죠.”


강경한 민주노조 조합원은 일당백

회사를 그만둘 때 조합원들이 월급에서 20만 원씩 모아서 주는 전별금을 포기하면서 236명 중 13명으로 시작하였다고 한다. 만만치 않았을 민주노조 설립 무용담을 잠깐 들었다.


“처음에 너무 힘들었죠. 한국노총 조합원들은 사고 나면 무마되는데 민주노조 조합원들은 그렇지 않았죠. 제 운전 습관대로 교통법규를 지키며 다녔더니 한 달 반 정도는 아침만 먹고 점심 저녁을 못 먹으며 일했어요. 저쪽 노조에서 회유해서 한 명을 빼 갔어요. 그래서 12명이 1년 7개월 정도 버텼죠. 한국노총 노조 위원장 선거가 있었고 우리 측과 연대한 후보가 당선되었죠. 그런데 그쪽에서 우리 조합원 중 사고로 해고된 분이 계셨는데 복직시켜 줄 테니 민주노조 없애라 하더라고요. 민주노조 안에는 사측에 보고하는 불량 조합원도 있었지만, 어처구니가 없었죠. 내부논의를 한 끝에 두 명이 남고 나머지는 한국노총으로 가는 것으로 결론을 냈어요. 결국, 해고자 복직은 안 시켜줬죠.”


그런데 마지막 남은 둘 중 한 분이 지난 5월에 회사를 사직하셔서 지금은 홀로 민주노조를 지키고 계신다고 한다. 머지않아 의기투합하실 분 만나실 것 같다고 한다. 그때까지 잘 이겨내시리라 믿습니다.


“강경한 민주노조의 힘은 일당백이에요. 두 명이 있어도 꿀릴 게 없더라고요. 그런데 지금은 힘들어요. 활동시간도 보장 못 받고, 쉬는 시간에 조합비로 다니죠. 둘이 있을 때는 같이 나눌 수 있었는데 혼자니까 아무래도 활동영역이 좀 좁아졌죠. 다행히 얼마 전 10년 전에 잃어버렸던 친구를 찾은 듯한 사람을 만났어요. 기뻐서 어제는 잠이 잘 오더라고요.”


줄어드는 회사수입을 휴식시간을 줄여서 만회?

매년 자가용 신규 등록 대수가 늘어나면 승객은 줄어드니까 버스회사는 수입이 줄지만, 시청에 운행 신고한 6회전을 운행해야 시에서 보조금을 받으니 배차시간을 무리하게 짜고 이것은 짧은 휴식시간으로 운전기사들이 고스란히 감내한다고 한다.


“1회전을 갔다 와서 대기실에서 쉬고 있으면 사무실 배차하는 사람이 와서 앞 차 나갔으니 나가라고 해요. 그러면 한국노총 조합원들은 대부분 나가요. 저희는 안 나갔죠. 한 노선을 1회 운행하면 시간이 2시간 50분에서 3시간 걸리는데 최소 15분은 쉬어야 하지 않냐고. 시청에도 요구하고 시민단체에도 알리고 해서 많이 바뀌었죠. 지금은 운행시간이 3시간 10분으로, 휴식시간은 30~40분으로 늘어났어요.”


휴게실은 식당과 연결된 장소에 고작 짧은 평상이 있었고 식당에는 쥐가 다녔다고 한다. 그런데 민주노조에서 지적하고 요구하니 많이 개선되었다고 한다.


“컨테이너 박스 한군데 금연실은 누워서 쉴 수 있게 대형 TV를 만들었고, 다른 곳은 탁자에 깔끔하게 유리도 깔아놨어요. 영업소 식당에서 한 분이 식중독에 걸린 적이 있었죠. 시청 식당 위생 분야에 고발했더니 일주일 뒤에 바닥 새로 다 깔아주고 페인트 작업 해주고 주기적으로 점검도 하겠다는 약속을 받았죠.”


문제를 덮으려다 늘어나는 안전사고

차에 이상이 발생하면 정비사가 부족해서 바로 정비 안 되기가 일수라고 한다. 이럴 경우 예비 차를 운전해야 하는데 상태가 워낙 불량해서 상태 안 좋은 예비 차를 가지고 나가나 문제가 있는 자기 차를 가지고 나가나, 둘 중 하나는 사고의 위험을 두고 운전하게 된다고 한다.


“운행 중 시장에서 타이어가 터지는 사고가 난 적이 있어요. 그 전전날 타이어 마모가 심해서 교체해달라고 했는데 타이어가 없다고 안 바꿔줬어요. 알고 보니 회사에서 결제를 안 해줬다더군요. 이 사고로 뒷바퀴 올라오는 부분에 앉았던 여성승객이 다리를 다쳤고, 철판이 뚫리면서 서 있던 승객들에게 파편이 튀어서 네 명이 병원에 실려 갔어요. 이 사건을 계기로 민주노조에서 문제를 제기했더니 지금은 타이어는 잘 교환을 해 주고 있어요.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고 문제를 제기하면 너만 조용히 하면 된다는 식이니 사고예방이 더 안 되는 거죠.”


아파도 찍히고 리스트 올라가니 참아

1회전 운전하는데 보통 3시간 정도 긴장된 상태로 앉아계셔야 하니 근골격계 질환이 많으실 것 같다. 아프면 어떻게 해결하시는지도 궁금했다.


“가장 힘든 건 무릎, 허리, 어깨, 목 아픈 사람이 많아요. 에어쿠션이 중요한데 10대 중 6대는 불량이에요. 방지 턱을 넘어갈 때 허리가 전기 통한 듯 찡한 기분이 들 때가 있거든요. 그럴 때 디스크 걸리지 않을까 걱정돼요. 그런데 대부분 산재 신청하면 찍히고 리스트에 올라가니까 조용히 다닌다는 생각이죠. 산재 신청은 최근에 그만둔 동지가 교통사고 나서 했었어요. 저도 목 디스크 초기로 산재신청 때문에 입원했는데 병원에서 안 좋아하더라고요. 그래서 결국은 산재 신청 못 했죠. 대부분 개인적으로 치료하고 있죠.”


이 밖에도 위장병, 치질, 기관지염 등 여러 질환으로 불편함을 호소하시는 분들도 계신다고 한다.


“새벽 5시부터 아침 식사를 주는데 이른 순번에 나온 기사들이 먹어요. 점심은 9시 반부터 1시나 2시까지, 저녁은 5시부터 8시까지고. 아침 6시에 아침을 먹은 사람이 한 번 돌고 오면 9시예요. 그때 점심을 먹지 않고 한 번 더 돌고 나면 점심을 놓치게 되니 아침 먹은 지 3시간 만에 점심을 먹어야 해요. 식사를 불규칙하게 먹으니 위장병도 심한 편이죠. 치질도 심해요. 버스 의자가 비닐로 돼 있어 추울 때는 얼음판이죠. 시트에 보통 열선이 들어가 있는데 돈을 아끼려고 옵션에서 그걸 빼요. 환풍기가 고장 난 상태에서 많이 다녀요. 특히 여름에 에어컨 많이 켜는데 겉에만 청소를 하고 필터는 청소를 안 해줘요. 타이어에서 나오는 먼지나 미세먼지가 심하니 마스크를 쓰고 다니기도 하죠. 밤에는 자동차 브레이크 등이 요즘 LED로 나와서 눈이 너무 부셔요. 그래서 시각적으로 많이 피곤하죠.”


서로 존중하며 존대어를 썼으면

일하다 보면 승객들에게 받는 스트레스도 만만치 않을 것 같다. 본인 실수로 넘어져도 버스 안에서 다치면 인사사고로 처리한다니 취객들은 각별히 주의해야 할 것 같다. 진상 승객들에게 겪은 에피소드 하나 소개할까 한다.


“춥고 더운 날씨에 연세 드신 분들 오래 기다리시면 힘든 것 알아요. 그런데 타실 때 버스요금 동전을 던져요. 그럼 튀어서 요금함에 다 안 들어가도 그냥 들어가시라고 했는데 자리에 앉으셨어도 계속 투덜대고 거기에다 옆에 계신 분들도 거들면서 버스가 늦게 왔다고 운전기사에게 막말했을 때 좀 서운하더라고요.”


버스 완전공영제로 시민 안전과 버스노동자 안전 함께 만들어 가요

서울시는 버스 준공영제 이후 교대근무도 하고, 근무시간이나 급여가 타 지역에 비해 개선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시민의 발이 되어주는 중요한 역할에 비해 근무조건이나 처우는 어떤지 또 어떤 방향으로 개선되어야 하는지 들었다.


“서울은 준공영제로 저희랑 월급이 30만 원 정도 차이가 나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한 달에 13개 만근을 했을 경우 세금 떼고 213만 원정도예요. 1년이 지나면 근속수당 만원이 더 붙는 것 말고는 없어요. 월급이 적으니 일을 더 하고 싶은 사람이 있을 것 아니에요. 하루 근무시간이 16~18시간이고 다음 날 자기 쉬어야 하는데 특근을 하면 다음 날은 자기 순번이니 또 근무하면 3일을 연속으로 일하는 거죠. 그러면 그 운전기사가 제정신으로 도로를 다닐 수 있겠어요? 꼭 돈벌이가 아니더라도 실질적으로 버스가 좋아서 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좀 더 느긋하게 다니는 버스, 출퇴근하는 사람들을 같은 공간에서 많이 만나고 그 사람들의 안전을 책임져야 하니까 나름대로 긍지가 있죠."


소신 있게 일하시는 분들이 자기 삶을 보장받을 수 있는 근무환경은 시민의 안전을 위해서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낀다. 엄도영 님의 바람처럼 좀 더 느긋하게 다니는 안전한 버스는 버스를 운영하는 주체가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하고 이것은 버스 완전공영제로 가까이 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