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올림 산재인정 투쟁의 성과
임자운 반올림 상임활동가, 변호사
224명의 피해 제보. 57명의 산재보상 신청. 8개의 질병(백혈병, 림프종, 재생불량성빈혈, 유방암, 뇌종양, 난소암, 다발성신경병증, 폐암)에 대한 13명의 산재인정. 2007년부터 시작된 삼성반도체 산재인정 투쟁의 성과다. 2011년 법원이 처음으로 반도체 백혈병을 직업병으로 인정했을 때, 모두들 기적 같은 판결이 나왔다고 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회사의 자료 은폐와 근로복지공단의 부실한 재해조사는 계속 되었고, 무거운 입증책임을 노동자 측에 떠안기는 산재보험법의 문제도 여전했다. 그 와중에 만들어진 이러한 성과는 그래서 의미가 크다.
하지만 이 싸움의 진정한 성과를 알려면 법원과 근로복지공단이 밝힌 산재인정의 근거들을 보아야 한다. 예컨대, 법원은 일부 판결에서 “근로자에게 책임 없는 사유로 사실 규명이 어렵게 된 사정”들을 나열했다. 근로복지공단이 재해조사를 잘못한 점, 회사가 업무환경에 관한 자료를 구비하지 않거나 제출하지 않은 문제들을 지적한 것이다.
그러면서 “이러한 상황에서는 업무기인성에 대한 엄격 증명책임을 근로자 측에게 부담시키는 것은 맞지 않다.”거나 “이러한 사정은 상당인과관계를 추단함에 있어 근로자에게 유리한 간접정황으로 참작함이 마땅하다.”고 했다. 난소암에 대한 산재인정 판결에서는 “발병률이 낮고 그 발병원인이나 발생기전이 의학적으로 명백히 밝혀지지 아니한 질병에 대하여는 의학적으로 다수의 연구가 이루어진 질병에 비하여 상당인과관계에 대한 증명의 정도를 완화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했다.
근로복지공단의 자문기관인 산업보건연구원과 폐질환연구소가 작성한 ‘역학조사 보고서’에도 인상적인 내용들이 나왔다. 회사의 자료 미비나 은폐, 조사 거부 등을 적시한 후, “직무를 세세하게 구분하여 판단하기보다는 생산직 여성 내지는 여성 오퍼레이터라 보고 업무관련성을 판단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거나 “(이러한 상황에서는) 상당수준의 유해물질 노출을 배제할 수 없다”며, 질병의 업무관련성을 긍정한 것이다.
이러한 내용들은 모두 직업병 문제와 관련된 과거의 판결문이나 공단 측 보고서에서 찾기 힘들었던 내용들이다. 반도체 공장의 위험성은 시간이 지날수록 알 수 있는 부분보다 알 수 없는 부분들이 더 많이 드러났다. 예컨대 재해자가 취급한 화학제품의 위험성을 규명하려 해도, 그 제품의 이름과 성분, 노출 정도 등을 도무지 알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회사가 관련 조사를 아예 하지 않았거나 관련 자료들을 진작 폐기해 버렸고, 국가도 그러한 상황을 계속 방치해 왔다는 문제가 여러 사건에서 드러났다. 그래서 법원과 공단도 ‘업무환경이 얼마나 위험했느냐’와 함께 ‘업무환경의 위험성을 알 수 없게 된 원인이 무엇이냐’, ‘그러한 정보 부족이나 정보 은폐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느냐’를 묻기 시작한 것이다. 매우 긍정적인 변화라 할 수 있다.
앞으로 5개월 후면, 황유미 씨가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 된다. 유미 씨의 아버지는 삼성전자 본관 앞 노숙농성을 1년 째 하고 있다. 그 오랜 시간 동안 피해자들에 대한 산재인정 여부를 다투는 법적 공방도 꾸준히 이어져 왔다. 그런데 그러한 법적 공방들의 가장 중요한 성과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다소 허무한 감이 있다. 우리는 여러 사건과 소송을 거치며 피해자들이 처했던 업무환경의 구체적인 위험성을 알게 된 것이 아니다. 그들이 얼마나 심각한 위험 속에서 일을 했는지 알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리고 여전히 많은 위험이 은폐되거나 규명되지 않은 채 그 공장 안에서 수많은 노동자들이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 것인가. 그토록 은폐되고 규명되지 않은 위험이 더 이상 회사와 공단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해석되도록 해서는 안 된다. 회사와 정부의 잘못으로 발생하는 정보 부족의 문제가 재해노동자의 불이익을 귀결되는 ‘입증책임’의 문제를 뜯어 고쳐야 한다. 산재보험법상질병의 업무관련성에 대한 입증책임의 전환 혹은 분배를 이끌어 내야 한다. 또한, 은폐되고 규명되지 않은 위험에 대해 노동자들이 직접 대응할 수 있는 수단이 마련되어야 한다. 산업안전보건법을 개정하거나 별도의 법률을 제정하여, 사업장의 안전보건에 관한 정보를 정부가 광범위하게 수집하여 장기간 보관하도록 해야 하고, 해당 사업장의 전ㆍ현직 근무자들은 그 자료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지난해와 올해, UN ‘인권과 유해물질ㆍ폐기물 특별보고관’과 UN ‘기업과 인권 실무그룹’이 잇따라 한국을 방문하여 각각 담당 분야와 관련된 인권침해 실태를 조사한 후 보고서를 발표했다. 두 보고서 모두 산재인정 과정에서의 입증책임 문제와 알권리 문제를 주요하게 지적했다. 어쩌면 10년 가까이 이어져 오고 있는 반올림 산재인정 투쟁의 가장 큰 성과는 이러한 상황을 만들어 냈다는데 있다. 그 어느 때보다 ‘산재보험법상 입증책임문제’와 ‘노동자 알권리 문제’가 큰 관심을 받고 있다. 이 싸움의 진정한 성과를 만들어 낼, 제2라운드를 본격적으로 시작할 때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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