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환경의학의사가 만난 노동자건강이야기] 당신 탓이 아닙니다 이제 그 기억을 놓아주세요 /2016.6

 당신 탓이 아닙니다 이제 그 기억을 놓아주세요

- 칠순 노동자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류현철 직업환경의학 전문의, 회원



머뭇머뭇 지인의 손에 이끌려 상담실 문을 들어선 칠순의 노동자. 단정한 옷매무새와 차분한 말투, 오랜 시간을 두고 일터에서 그을려 온 특유의 구릿빛 얼굴과 미간을 가로지르는 세월의 주름, 거기에 더하여 뭔가 짐작하기 어려운 무거움과 어둠이 더해진 낯빛. 내 아버지 세대의 노동자와 마주한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노동을 시작했을 그가 아들뻘의 직업환경의학과 의사를 찾아온 사연은 무엇일까? 한자리에 머물지 못했던 시선이 조금씩 내 시선과 마주하는 시간이 길어지고, 아직 어색했지만, 언뜻 엷은 미소가 깊은 주름으로 굳어진 미간을 부드럽게 풀어주니 진즉부터 가지고 계셨을 듯한 순박하고 인자한 표정이 비친다.  


"1년 반쯤 되었나 봅니다. 처음 그 일이 벌어진 것이..." 그는 차분했지만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곧장 공장에 취업했다. 8명이 일하는 조그마한 단조 공장에서 그는 고무공장에 납품하는 가위를 만들었다. 10시간이든 11시간이든 열심히 일했다. 나이를 먹고 결혼을 하고, 아들 하나 딸 하나를 얻었다. 그리고 남들보다 더 열심히 일해서, 아니면 운이 좋아서 일하던 공장을 인수했다. 직원이 10명도 안 되는 작은 공장이었지만, 풍족하지 않아도 괜찮은 삶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IMF 경제위기를 넘어설 재주는 없었다. 공장은 폐업했고, 다들 퇴직한다는 55세에 임금 노동자가 되었다. 피혁 공장에서 일을 다시 시작했는데 그곳이 3년 만에 폐업하면서 다른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그러다 10년 전부터는 주물공장에서 일했다. 시끄럽고, 덥고, 주물사와 로(爐)에 날리는 분진과 흄에 뒤덤벅이 되었지만, 환갑을 넘긴 그에게 허락되는 일자리는 그런 자리였다.


주물공장을 이곳저곳 옮겨 다니면서 그가 하던 일은 중자(심지, core)를 만드는 일이었다. 주물 제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쇳물을 부어서 모양을 만드는 외부 주형과 만들어질 제품의 내부의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미리 주형 안에 만들어 넣어두는 중자가 필요하다. 1년 6개월 전 그 일이 벌어진 것은 그 공장에서 일한 지 2년 정도 되었던 어느 겨울이었다. 일요일이었지만 늘 그랬듯이 일을 했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다시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고가 났다. 


그가 만든 중자가 주형과 합체되어 쇳물을 부을 틀을 완성하기 위해 크레인으로 들어 옮겨지다가 아래로 추락한 것이다. 이상하게 그 공장은 크레인이 높이 달려서 불안 했는데, 기어코 사단이 났다. 떨어진 중자 아래로 동료 노동자가 깔려서 사망했고, 그는 처참해진 동료의 시신을 수습했다.  나이가 많이 어려서 그와 자주 어울리지는 않았지만, 알고는 지냈다는 사망 노동자는 61세였다. 처참한 광경은 잊히지 않았고 꿈에 계속 나타나서 그를 괴롭혔다. 사고 현장에 가면 가슴이 떨려 일을 할 수 없었다. 며칠을 쉬다가 업무가 바쁘다고 해서 다시 출근했지만, 업무에 집중할 수 없었다. 


결국, 회사를 그만두었다. 하지만 그날 일은 그를 계속 괴롭혔다. 하릴없는 심정을 달래려 기도하러 다니던 절에 부탁해 자비를 들여 사망한 동료의 천도재를 지냈다. 이렇게라도 하면, 극락왕생을 빌어주면 이 심경이 나아질까 싶어서였다. 그래도 자리에 누우면 처참한 광경이 떠올라 잠을 잘 수 없었고 무기력했고, 집 밖으로 나가기도 싫었다. 10개월 동안 일을 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다시 일을 시작해야 했다. 10년 전 주물 일을 처음 시작할 때 알게 되어 동갑내기라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일자리를 알아봐 주었다. 


그런데 다시 일을 시작한 지 1개월이 지난 겨울 어느 날, 갑자기 현장이 소란스러웠다. 지게차 사고가 난 것이다. 그를 일터로 다시 불러준 조형 반에서 일하던 친구가 쓰러졌다. 운행하던 지게차에 찍혀 흐르기 시작한 피는 멈추지 않았다. "처음에는 의식도 있었고, 그렇게 갈 줄은 몰랐지요. 내게 왜 자꾸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요?" 지게차 사고로 쓰러졌던 칠순의 동갑내기 친구이자, 동료 노동자는 결국 과다출혈로 사망했고, 1년 간 일터에서 두 번의 죽음을 경험한 그는 더는 일을 할 수가 없었다. 칠순을 넘긴 나이, 세상사 웬만한 풍파는 겪고 넘어온 그에게도 지난 2년 동안 두 번이나 겪어야 했던 끔찍한 경험은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그는 전형적인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고통 받았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는 신체나 정서상의 심각한 손상 (외상, 트라우마)을 입은 사건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하고 그것에 대한 공포감이나 부정적인 감정이 계속 고통스럽게 회상되고, 재경험 되고, 유사한 상황과 조건을 회피하고 때로는 지나친 각성상태나 반대로 지나친 위축이 계속되는 것을 뜻한다. 최근 업무와 관련하여 발생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대하여 산재로 인정할 것을 명문화한 바 있다. 자신의 경험과 증상이 무엇에 연후하는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산재요양 대상이 되는지도 몰랐으나 세상일에 밝은 또 다른 친구의 권유로 나를 찾았다. 이후 정신건강의학과 상담을 받고 산재 요양신청을 하기로 했다. 그는 아들 뻘의 의사에게 연신 고맙다 인사했지만 나는 미안함이 더할 뿐이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는 참혹한 전장에서 돌아온 군인들의 사회 심리적 병리를 다루는 과정에서 자리 잡은 질환이다. 그런데 매년 9만 명이 넘는 노동자가 병들고 다치고 2천 명이 죽어가는 오늘 우리 사회의 일터는 참혹한 전장과 다름없다. 노동자들은 또 쓰러지고 죽어간다. 화가 난다. 다들 그렇게 열심히 일했고 그렇게 다치고 스러져 갔다. 


는 죽게 내버려 두지 말아야 한다. 최근 지하철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 어이없는 산재사고로 세상을 등지게 된 19살 노동자에게 수많은 시민이 애도와 공감을 남기고 있다. 이제 애도와 공감을 넘어서야 한다. 지금의 어이없는 산업안전보건법 개악의 면면을 보라! 죽음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시스템을 멈추는 행동이 같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야만 나도 이런 메모 한 장이라도 전해줄 수 있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