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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_문화로읽는노동] 저 너머의 굴뚝은 언젠가 찾아온다_극단고래의 17번째 작품, 연극 <굴뚝을 기다리며> 저 너머의 굴뚝은 언젠가 찾아온다. 극단고래의 17번째 작품, 연극 박기형 선전위원 연극 의 막이 오르고, 두 사람이 절뚝이며 무대 가운데로 걸어 나온다. 그들의 이름은 누누와 나나. 누가 누구인지, 내가 나인지, 나는 여기 왜 여기 있는지 잊은 듯 너는 누구냐며 서로의 이름을 묻다가, 스스로를 가리키며 부르는 이름. 마치 언어유희와 같은 이름을 가진 누누와 나나는 굴뚝의 좁은 난간 사이를 위태롭게 절뚝이며 돌아다닌다. 그때 갑자기 누누가 발이 아프다며 주저앉는다. 나나는 누누의 발을 낫게 하려고 어디가 아픈지 묻는다. 하지만 누누는 이 발이 아프다고 물으면 저 발이 아프다고 답하고, 저 발이 아프냐고 물으면 저 발이 아프다고 답한다. 나나가 재차 발이 왜 아프냐고 묻자 누누는 신발(작업화)이 작은 것 ..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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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_문화로읽는노동] 저 너머의 굴뚝은 언젠가 찾아온다_극단고래의 17번째 작품, 연극 <굴뚝을 기다리며>

저 너머의 굴뚝은 언젠가 찾아온다.

극단고래의 17번째 작품, 연극 <굴뚝을 기다리며>

 

박기형 선전위원

 

연극 <굴뚝을 기다리며>의 막이 오르고, 두 사람이 절뚝이며 무대 가운데로 걸어 나온다. 그들의 이름은 누누와 나나. 누가 누구인지, 내가 나인지, 나는 여기 왜 여기 있는지 잊은 듯 너는 누구냐며 서로의 이름을 묻다가, 스스로를 가리키며 부르는 이름. 마치 언어유희와 같은 이름을 가진 누누와 나나는 굴뚝의 좁은 난간 사이를 위태롭게 절뚝이며 돌아다닌다.

그때 갑자기 누누가 발이 아프다며 주저앉는다. 나나는 누누의 발을 낫게 하려고 어디가 아픈지 묻는다. 하지만 누누는 이 발이 아프다고 물으면 저 발이 아프다고 답하고, 저 발이 아프냐고 물으면 저 발이 아프다고 답한다. 나나가 재차 발이 왜 아프냐고 묻자 누누는 신발(작업화)이 작은 것 같다고 한다. 그러자 나나는 신발이 작은 게 아니라 발이 커서 그런 거라고 말한다. 발이 큰 건지 신발이 작은 건지를 두고 한참을 얘기한다. 객석에서는 웃음이 터져 나온다.

자꾸만 질문과 답이 비켜나면서, 대화는 도돌이표처럼 맴돈다. 통하지 않은 말들은 굴뚝 너머 공중으로 흩어지고 만다. 그 가운데 시간은 자꾸만 흘러간다. 무의미한 하루하루의 반복. 그때, 누누가 나나에게 묻는다. 우리는 대체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저 너머를 바라보며, 나나가 대답한다.

 

우린 굴뚝을 기다리고 있지.’

 

연극 <굴뚝을 기다리며>는 크게 두 축으로 구성된다. 중심이 되는 축은 앞서 소개한 누누와 나나의 이야기다. 다른 한 축은 누누와 나나가 지내는 굴뚝으로 손님이 한명씩 찾아오면서 펼쳐진다. 홀로 굴뚝을 청소하는 노동자 청소와 굴뚝청소를 담당하는 AI로봇 미소’, 배달라이더 이소의 방문이다.

본 연극이 오마주한 사무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의 두 주인공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 또한, 시덥잖은 얘기를 하염없이 주고받는다. 중간마다 누군가 그들을 방문하고 다시 떠난다. 그러다 그들의 대화는 언제나 고도에 대한 기다림으로 귀결된다. “오늘은 고도가 올까? (글쎄, 어쨌든 기다려보자고.)” 관객들 사이에선 고도가 누군지 또는 무엇인지에 관한 수많은 논쟁이 오갔다. 하지만 제목에서도 드러나듯, 두 희곡과 연극 모두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건 다름 아닌 기다림이다.

 

기다림, 그 치열한 몸짓

 

흔히 기다린다고 하면, 누군가 저 멀리 무언가를 바라보며 가만히 서 있는 이미지를 떠올리곤 한다. 옛 설화에서 떠난 사람을 기다리는 망부석의 이미지랄까. 그래서 기다림은 정적이고 수동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정말 기다림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멈춰 서있는 걸까? 철학자 고병권은 저서 다이너마이트 니체에 관한 한 강연에서 니체가 선악의 저편에 논의한 것을 빌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니체는 가만히 있는 것은 기다리는 게 아니라고 말해요.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사람은 가만히 있지 않고 두드립니다. 열매를 기다리는 사람은 씨앗을 심어요. 기다림은 중요해요. 기다림이 없으면 사건이 없어요. 그 점에서 기다림은 실천입니다.”

기다림이 적극적인 몸짓인 이유는 뭘까? 기다림은 언제나 바람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망부석처럼 떠난 임이 돌아오기를 바라고, 지금보다 나은 세상이 오기를 소원하는 것 등등. 기다리는 사람은 자신의 기대와 소원 등이 장래에 실현되길 바란다. 그래서 기다림은 여기와는 다른 저기, 현재가 아닌 미래를 바라보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바람을 이루기 위해, 저 너머를 향해 끊임없이 행동한다.

본 연극의 작가이자 연출가인 이해성 님은 블랙리스트 사태 당시 광화문 광장 캠핑촌에서 함께했던 유성, 쌍용차, 콜트콜텍, 파인텍 등 고공농성을 했던 해고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작품을 구상하게 되었다고 한다. 2018년 겨울, 426일에 걸친 세계 최장기 고공농성이었던 2018파인텍 투쟁15일간 연대하면서, 이 투쟁을 모티브 삼고 고공농성투쟁의 당사자들의 일기와 이야기를 반영해 구체화시켰다. 이에 비춰볼 때, 누누와 나나가 굴뚝에 올라간 이유가 극 중에 밝혀지지 않지만, 추정해볼 수 있다. 부당한 정리해고에 맞서 노동권을 지키기 위함이라고.

굴뚝 위에서 굴뚝을 기다리는 삶도 아래의 삶과 별반 다르지 않다. "올리고, 내리고, 뒤집고, 넘기고올리고, 내리고 뒤집고, 넘기고" 아침에 일어나 씻고, 점심엔 운동하고 밥 먹고, 저녁엔 사람들과 소통을 하고 잠을 청한다. 그렇게 매일 같은 일상을 보낸다. 그럴 때 지루함의 끝에 뒤이어 찾아오는 고립감. 홀로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드는 순간, ‘우리의 바람이 정녕 이뤄질 수 있을까?’하는 의구심이 연이어 떠오른다. 품고 있던 기대는 쉬이 흔들린다. 그러다가도 어느 날 굴뚝 아래 사람들이 출근하고 퇴근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굴뚝에 올라온 이유를 되새긴다. “우린 굴뚝을 기다려야 해.” 흔들리고 다잡는 일의 무한한 반복. 어쩌면, 우리 삶의 실존적 면모일테다.

 

기다림의 형태

 

수십 미터에 이르는 굴뚝은 생을 걸고 올라가야만 할 정도로 높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이들은 혹시나 여기가 너무 낮아서 우리를 찾지 못하는 걸까?’라는 의구심을 갖는다. 하지만 자신의 발아래를 보면 까마득하기만 하다. 지루하고 무의미한 기다림을 그만두고서, 이 위험하고 고독한 곳에서 벗어나 저 아래로 내려가고 싶기도 하다. 도대체 우리는 왜 여기 있는 것일까?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외침이 정녕 이 높은 곳에서도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 것일까? 그래서 누누와 나나는 굴뚝의 높이를 두고 우습고도 씁쓸한 다툼을 벌인다.

 

여기는 높은 곳. (여기는 낮은 곳인데.) 아니야. 여기는 높은 곳이야. (아니야, 여기는 낮은 곳이라니까?) ······ 여기는 너무 높아. (아니야. 여긴 너무 낮아.) 너무 높다니깐? (너무 낮다니깐?)”

 

우리는 살면서 더 높은 곳에 올라가길 바란다. 하지만 그 바람, 즉 기다림의 형태는 누누와 나나의 것과는 사뭇 다르다. 남들보다 높은 곳에서 남들이 누리지 못하는 것을 누리고 싶다. 그러니 내가 속한 여기는 여전히 낮다. 내가 기다리는 건, 저 너머로부터 찾아올 굴뚝이 아니라, 이 굴뚝이 더 높아지는 거다.

더 많은 자산·소득을 갖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 찬 기다림들. 각지의 랜드마크를 자처하며 경쟁적으로 짓고 있는 초고층 빌딩들. 어쩌면, 오늘날 난쟁이가 쏘아올린 공은 그 수많은 높은 곳들에 가려 손쉽게 사라지고 있는 게 아닐까.

누누와 나나는 굴뚝 위에서 굴뚝을 기다린다. ‘굴뚝이 혹시나 우리를 찾지 못할까 전전긍긍한다. 여기서 굴뚝은 가장 단순하게는 누누와 나나의 복직으로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필자는 또 다른 굴뚝은 아닐까 상상해본다. 굴뚝처럼 높은 곳에 올라 여기 사람이 있다고 외치는 또 다른 이들을 기다리는 일이 아닐까. 누누와 나나의 굴뚝만이 아니라,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바람을 간직한 수많은 이들의 굴뚝 말이다.

극의 말미에 나나는 굴뚝에 서서 무대와 객석 저 너머를 응시한다. 언젠가 저 너머에서 찾아올 굴뚝을 기다리며. 아마도 막이 내리고, 나나는 다시 똑같은 굴뚝 위의 일상을 보낼 것이다. 어쩌면 어느 날 굴뚝 아래로 내려와 일상을 보낼지도 모른다. 그 모든 순간, 언젠가는 굴뚝이 반드시 찾아올 것이라는 기대를 잃지 않을 수 있을까. 수없이 흔들리는 가운데서도 굳건히 버틸 수 있을까. 저 너머 굴뚝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 또 다른 굴뚝이 함께 이 땅에 있음을 인지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할 수 있을까.

그러나 각자도생의 길만 남은 듯한 오늘날, 우리는 나만의 기다림외에는 다른 곳을 바라볼 여유도 없는 것일지 모르겠다. 또 다른 굴뚝이 있음을 알고도, 우리가 딛고 있는 이 자리가 올라가기만을 바라고 있는 건 아닐는지. 그러면, 이 자리에 찾아올 또 다른 굴뚝을 향한 기다림이란 정녕 불가능한가? 나아가 또 다른 굴뚝이 우리를 찾도록 하려면, 우리는 어떤 기다림의 형태를 만들어가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