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호_여성노동건강상식] 20대 여성이 더는 죽지 않는 사회려면

[일터 5월호_여성노동건강상식]

20대 여성이 더는 죽지 않는 사회려면

출처: pixabay

청년들이 번아웃됐다. 진료실에서 만난 청년들은 다 타고 남은 재처럼 파릇한 생기가 없다. 저성장 그늘, 능력주의 신화에 쪼그라든 청년들을 더욱 내몰았던 것은 코로나였다. 통계상 코로나 시대에 제일 먼저, 제일 많이 일터에서 내쫓긴 건 20대 여성이다. 이 때문인지 최근 치솟는 20대 여성 자살률처럼 진료실을 방문하는 여성 청년도 매우 늘어났다. 초기 우울 증상은 약과 상담으로 비교적 완화가 잘 되는 편이지만, 그들이 처한 고된 현실은 여전하다.

능력주의만큼은 공정할 것이라는 착각

20대 청년들의 가시밭길을 더욱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능력주의(Meritocracy). 능력주의란 공평한 기회 위에서 누구나 자기 능력에 따라 보상을 받는다는 개념인데, 예전의 폐쇄적 신분제를 극복하며 계층 이동을 허용한다는 점에서 꽤 유용했었다. 그러나 전 세계의 양극화 문제가 시사하듯이 능력주의는 새로운 신분제를 공고히 하는 수단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능력주의 사회에서는 효율과 생산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능력을 기준 삼아 인간을 줄 세우는데, 당연히 모든 이의 출발선을 제로일 수 없고 따라서 능력주의도 언제나 공평한 것만은 아니다.

한국은 오래전부터 능력주의에 익숙한 사회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시작되는 각종 교육은 이후에도 끊임없이 반복되는 시험과 성적, 스펙의 출발에 불과하다. 그렇다 해서 양질의 일자리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선진국의 고질병인 경제적 저성장 구조에 직면한 한국에서는 그저 적당히, 평범하게 살기 위해서는 죽기 살기로 아등바등해야 하는 청년들이 가득하다. 그러다 보니 능력주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게임은 과열되고, 능력주의가 만든 공정이라는 규칙의 중요성은 더욱 대두된다.

능력주의의 심리적 측면은 20대 청년들의 정신건강에 유해 요소로 작용한다. 능력주의 사회에서 승자는 노오력으로 정당한 보상을 얻어냈으니 독점하는 게 당연하다. 도태된 패자에게 허락된 것은 수치심과 모멸감뿐이다. 그리고 오늘날 많은 수의 청년들은 자신이 능력주의 관점에서 패자가 될 것이라는 위기감을 늘 간직한 채 살아간다.

인천국제공항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가장 반대한 이들은 청년이자 사내 정규직이다. 일명 인국공 사태와 관련된 논란의 사실관계 자체가 언론에 의해 왜곡된 점을 차치하고서라도, 지금의 청년들에게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은 게임의 규칙을 위반한 불공정한 일이다. 당연히 공감과 연대의 자리가 들어설 곳은 없다. 다만 나만큼 노력하지 않았는데 나와 같은 보상을 받는 것에 대한 패배감과 원망만이 가득할 뿐이다.

어떤 것이 공정한가

능력주의 사회에서의 적은 자신보다 월등히 높은 능력을 지닌 사람이 아니다. 놀랍게도 서로가 적이다. 애초에 적용되는 규칙 자체가 다르다고 여겨져, 감히 경쟁상대로조차 둘 수 없는 재벌이나 권력자에게는 비교적 우호적이거나 선망의 눈빛을 보내기도 한다. 여기에서는 같은 규칙이 적용되는, 나와 비슷한 처지의 경쟁자가 가장 큰 적이며 서로에게 가장 공격적이다.

물론 공정은 우리 사회가 수호해야 할 가치다. 문제는 어떤 것이 과연 공정하냐는 것이다. 누군가는 사회적 약자로 대표되는 특정 집단을 배려하는 규칙이야말로 공정이라 할 것이고, 또 다른 이들은 그런 배려야말로 불공정 그 자체라 말한다.

남성 청년들의 말에 따르면, 자신들은 이전 세대와 달리 가부장제의 혜택을 누린 적도 없는데 어째서 여성을 배려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진정으로 억울해한다. 그것을 가리켜 과연 배려라 칭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은 차치하고서라도, 이렇다 보니 남성 청년에게 페미니즘은 공정성이라는 절대적 규칙을 훼손하고 망가뜨리는 반칙이다. 명백한 반칙으로 인해 오늘날 우리 사회는 남성이 차별받는 사회가 되고, 이것은 곧 남성 청년이 분노하는 이유가 된다. 결국 이 세계에서 여성 청년은 남성 청년과 극렬한 대치를 이루는 적으로 상정될 수밖에 없다.

남성 청년들이 분노한다면, 여성 청년들은 혼란스럽다. 자신의 위치가 능력주의의 수혜인지 아닌지 긴가민가하기 때문이다. 성별이 핸디캡으로 존재하는 사회에서 여성들이 시험 위주의 채용 기회를 얻는다면, 아마 능력주의의 수혜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본격적인 사회생활이 시작되면 성적 외의 다양한 변수들이 능력을 결정짓고,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성별은 걸림돌이 된다. 능력주의의 모순 즉, 모든 출발선이 공평하지 않은 것이다.

82년생 김지영이 수많은 여성, 그중에서도 MZ세대(1980년대 초~2000년대 초 출생한 밀레니얼 세대와 1990년대 중반~2000년대 초 출생한 Z세대를 통칭하는 말) 여성들 사이에서 그토록 주목받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김지영에게서 자신의 미래 즉, 능력주의 사회에서 패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보기 때문이다. 결혼과 출산 모두, 미래의 자기 능력을 손상하는 일들이다. 결혼, 나아가 임신과 출산의 가능성이 있는 여성은 노동시장에서 보조적·예비적 인력으로 취급된다. 이미 아내이거나 혹은 엄마까지 된 여성 노동자라면, 두 역할 모두 잘 해낼 것을 요구받곤 한다. 능력으로만 인간의 가치를 매기는 사회에서 여성 청년들이 결혼과 출산을 꺼리는 건 당연하다.

20대 여성의 위기에 답하라

코로나19는 우리에게 기존과는 전혀 다른 노동환경을 요구한다. 할 수 있는 한 대면은 최소화해야 하며, 회사가 아닌 집에서 업무를 보는 게 그렇게 낯설지만은 않게 됐다. 그렇게 팬데믹 상황이 지속됨에 따라 필수적이지 않다고 여겨지거나 고대면 혹은 재택근무가 불가능한 일자리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 노동할 곳은 차차 사라졌다.

지난달 한국여성정책연구원에서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코로나19 이후 1년간 남녀 임금노동자는 작년 대비 108천 명 감소했다. 그중 여성은 57천 명, 남성은 51천 명 감소해 남성보다 여성의 일자리 감소가 더 컸다. 그 면면을 좀 더 들여다보면 더 심각하다. 코로나 이후 퇴직한 여성의 41.6%는 회사의 휴·폐업, 해고 등으로 일자리가 사라져 그만둘 수밖에 없었는데, 20대 여성은 다른 연령대 여성보다 감염병 위기가 취약한 일자리에서 퇴직한 경우가 많았다. 코로나 시기 퇴직한 20대 여성 5명 중 1명은 숙박음식점업, 5명 중 2명은 서비스·판매직이었으며 비필수·고대면·재택근무가 불가한 일자리에서 그만둔 비중도 다른 연령대 여성보다 더 높았다. 즉 코로나로 인한 여성 일자리 위기는 기존 노동시장의 성별화된 이중구조와 더불어 감염병 확산에 취약한 일자리 특성이 결합 돼 나타난 현상이다.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소규모 대면 업종 사업장이나 임시·일용직 여성일수록 정부의 일자리·소득 지원 정책의 수혜율도 낮았다. 갑작스러운 실직으로 인해 생활이 어려운 상황에서 실업급여와 고용유지지원금은 고용보험 사각지대에 있는 여성 노동자의 위기 해소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코로나19는 모두의 위기이지만, 코로나19 발발 이후 사회에서 가장 먼저 자리를 잃는 건 20대 여성이다. 자신의 자리에서 내쳐지고, 더는 자신의 자리가 없다는 데서 오는 위기와 불안은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지우려는 안타까운 시도로 이어지기도 한다. 다만 하나 다행인 점은 여성 청년들은 서로 갈만한 정신과 병원을 공유하는 등의 방식으로 서로를 보듬으며 버티고 있다. 진료실에서 가능한 치료에는 한계가 있다. 어떻게든 살고자 버티고 있는 여성 청년들에게 이제는 사회가 답해야 할 때다.

(권윤영 회원,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