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노동건강상식] 날 열받게 한 건 사회인데 왜 내가 약을 먹어야 하지? / 2021. 03

[여성노동 건강상식]

날 열받게 한 건 사회인데 왜 내가 약을 먹어야 하지?

권윤영, 회원, 정신의학과 전문의

일반적으로 타과 질환과 달리 원인 파악 및 치료과정에서 정신질환은 생물학적인 요인이 쉽게 간과되고 심리적-사회환경적인 요인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처럼 이해될 때가 있다. 외부적 스트레스로 인해서 병이 생겼고 그 병은 스트레스를 멀리하면 나아질 것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에 비해 의료인은 생물학적인 요인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정신과에 가면 얘기도 안 듣고 약만 처방하더라.'라는 불만이 나온다. 정신건강 문제가 발생된 계기가 사회환경적인 요인이라고 해도 결국 질병이 발생하는 영역은 생물학적인 신체! 바로 우리의 뇌와 신경, 몸이다.

특히, 여성의 몸은 초경과 월경, 임신, 출산, 완경 등 생리적 변화가 늘 일어나며, 이에 따른 스트레스가 높다. 월경 전 불쾌기분 장애와 같이 여성에게만 나타나는 질환도 있고 주요 우울장애, 불안장애, 섭식장애,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 등 남성보다 여성에게서 더 흔한 질환도 있다.

이런 남녀의 유병률 차이는 문화, 제도, 사회적 역할에서 기인한 면도 분명 있고 성별에 따른 뇌발달의 차이, 생리적 차이, 생물학적인 원인도 중요하게 작용한다. 결국 생물학적-심리-사회적 요인들을 각각 균형 있게 보고 다루는 태도가 정신건강 문제 해결을 위해 바람직하다. 

한국 성인 성별 정신장애 일년유병률(2016): 지난 1년 동안 한 가지 이상의 정신질환에 한 번 이상 이환된 적이 있는 비율. 출처: 보건복지부, 정신질환실태조사(이 조사는 2011년부터 시작되어 5년 주기로 실시되는 조사로 만 18세 이상 국민의 주요정신질환유병률을 추정하고 있다) 


약물치료는 최후의 방법?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상담을 받는 것에 대한 거부감은 많이 없어진 것 같지만 약물치료에 대해서는 여전히 거부감이 크다. 정신과적 증상, 즉 우울, 불안, 불면, 악몽, 강박증, 대인 공포, 자살 생각, 환청, 망상 등은 신경 생물학적 원인(뇌에서의 세로토닌 조절 이상, 도파민 분비 조절 및 자율신경계 장애 등)과 환경적 스트레스, 심리적 어려움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환경적인 문제, 심리적 어려움이 첫 시작이었다고 해도, 그렇게 생겨난 스트레스는 신경전달물질, 호르몬 분비에 영향을 미쳐서 증상을 발생시키게 되고, 단순히 환경을 바꿔주거나 심리상담을 해주는 것만으로는 너무나 오래 걸리거나 해결이 안 되는 경우가 있다.

또한 환경, 심리적인 영향보다 신경 생물학적 원인이 제일 크게 작용하는 질환도 일부 존재한다. 그래서 약으로 신경전달물질, 호르몬 분비를 교정해주면 생물학적으로 불균형이던 뇌의 기능이 정상화되고 그에 따라 증상이 한결 가라앉게 돼서 상담치료, 인지행동치료 등 다른 치료들의 효과도 높아지게 된다. 즉, 약이 심리적 어려움, 환경 변화 등의 외부 스트레스 자체를 없애주지는 않지만 스트레스 상황에 대처할 수 있도록 증상을 완화시키고 준비시킬 수 있다.

정신과 약에는 주요우울장애나 불안 증상, 강박증에 쓰는 항우울제, 불안을 빠르게 가라앉혀 주고 수면을 도와줄 수 있는 항불안제, 기분이 너무 들뜨거나 너무 가라앉는 것이 반복적으로 나타날 때 기분의 안정을 도울 수 있는 기분안정제, 환청이나 망상 등의 현실감의 저하가 있을 때 쓸 수 있는 항정신병제, ADHD에 쓸 수 있는 중추신경자극제 등 종류가 여러 가지이다.

항정신병제를 꼭 환청이나 망상이 있어야만 쓰는 것도 아니며 때로는 불면을 다스리기 위해, 때로는 분노를 조절하기 위해 사용하기 때문에 약물은 정신과에 방문한 분의 특성에 맞춰 섬세하게 처방된다. 때로는 원래 고혈압약으로 발명된 약을 불안을 조절하기 위해 쓰기도 하고 약의 부작용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약을 쓰는 경우도 있다.

약물치료는 '하다하다 안되면 쓰는 최후의 방법'이라는 생각도 많이들 하신다. 약물치료 없이 상담만 받으면 정신과 문제가 경한 것이고, 약을 먹으면 정신과 문제가 심각한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앞서 말했던 정신과 문제의 다양한 원인과 속성에 맞추어, 약을 초기에 사용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경우, 초기부터 사용하고 약이 필요 없는 경우에는 쓰지 않기도 한다.

정신과적 문제가 지속되면 뇌기능 저하가 뒤따를 수 있기 때문에 약물로서 정신과적 증상을 완화시키는 것이 뇌기능을 향상시키고 보호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많은 양을 복용할 경우 부작용으로 인해 멍해 보이는 경우도 있지만, 이러한 증상도 약을 줄이거나 중지하면 대부분 호전된다.

의사에게 물어보세요

우울증, 주의력 결핍 과잉행동 장애 등에서 사용하는 약은 뇌에서 감정이나 주의집중력을 관장하는 신경전달물질을 조절해서 장기적으로 뇌의 신경망을 변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약 먹을 때만 효과가 있다고 보기보다는 장기적으로 뇌 기능을 치료해주는 역할을 하는 약도 있는 것이다.

약을 복용하기 시작하면 중독성이 있어서 평생 먹어야 하는지도 많은 분들이 궁금해한다. 항우울제, 기분안정제, 항정신병제 등은 의존성과 전혀 상관이 없다. 최근 주의력 결핍 과잉행동장애 등에서 쓰는 중추신경자극제 역시 '약 성분에 마약성 물질이 있다, 중독이 된다더라'라는 루머가 많다. 하지만 주의력 결핍 과잉행동장애가 있는 환자들에서 경구 투여하는 약은 중독, 의존이 생기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이 환자들이 술, 담배, 약물, 도박, 게임 등에 '쉽게 중독될 수 있는 성향'이 있는데 그 성향을 크게 줄여준다.

항불안제와 수면제 중 일부 약물이 내성과 금단 등의 의존이 생길 수 있지만 최근 개발된 약은 의존성이 낮아졌고 몸에 독성이 없어서 불안해하지 않아도 된다. 게다가 정신과 의사는 알코올 중독, 도박 중독, 마약 등 약물 중독 등등 '중독'을 치료하는 의사이다. 정신과 의사가 약물에 중독이 생기게 내버려 두지 않으니 임의로 더 먹거나 갑자기 끊지 말고 처방한 대로 먹으면 내성, 금단으로 고생하는 일은 없다.

그리고 특정 약에 중독이 될 것 같으면 그 약은 되도록 소량만 일시적으로 쓰거나 다른 약으로 대체해서 쓰는 것이지 평생 쓸 수 없다. 어떤 정신과 환자가 약을 거의 평생 먹어야 했다면 그것은 약에 중독되어서가 아니라 약을 중단하면 조절되지 않을 증상이 있거나 재발 위험성이 높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양극성 장애(조울병) 환자가 증상이 있으나 없으나 약을 먹지 않으면 조증이나 우울증이 다시 생길 가능성이 90% 이상이고 재발이 잦을수록 치료가 어려워진다거나 환자 및 보호자에게 손실이 많기 때문에 계속 약물을 복용하도록 안내하는 것이다.

제일 중요한 것은 정신과 의사와 약의 작용과 부작용, 약에 대해 드는 생각과 감정을 솔직하게 의논하고 모르는 것을 의사에게 직접 물어보면서 용법, 용량을 지키는 것이다. 약에 이런저런 의미를 너무 부여하지 말자. 그냥 중요한 치료의 한 축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