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로 읽는 노동]
흰둥이가 또 다른 흰둥이에게 건네는 위안-만화 『흰둥이 1』. 윤필. 창비. 2016.
박채은 선전위원
너나 할 것 없이 우울한 시절이다.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신종 바이러스의 출현이 가져다준 우울이랄까. 세상은 마치 망가진 세탁기처럼 기이익 힘겨운 소리를 내며, 겨우 돌아가는 것 같다. 반복되는 낮은 소음이 그다지 불청객만은 아닌 듯 온통 차분해지고 가라앉아버린 모종의 분위기 속에 그동안 켜켜이 쌓여 있던 거짓의 환호와 행복들이 하나둘씩 벗겨져 가고, 애써 감춰왔던 그러나 마주해야만 했던 진실들이 드러났다. 어쩜 이렇게나! 불평등하기 짝이 없을까.
흰둥이의 시선이 머무는 자리
코로나19 이후 더욱 극명히 드러난 우리 사회의 민낯을 마주했다. 매체의 지면 곳곳을 온통 불평등과 관련한 단어들이 장식하고 있다. 노동의 취약지대가 드러났고, 권리의 사각지대를 조성하는 약한 고리가 어디인지 나타났다고. 어떤 현상이 특정한 단어로 정의되고 나면, 그 현장과 관련한 새로운 집단이 우리 시야에 들어오기 마련이다. 그러면 우린 과연 자신이 해당 범주에 드는지 아닌지를 주의 깊게 살펴보게 된다. 이를 쓸데없는 고민으로 치부하기엔, 인간은 언제나 어디서든 자신이 누구인지를 정의하고 싶어 하며, 사회적으로 인정받기를 찾아 헤매는 존재가 아니던가. 그래서 생각해본다. '과연 나는 사회적 약자에 속하는가?', '사회적 약자의 범주에 들지 않아서, 조금은 안도가 되는가?'
윤필 작가의 만화 <흰둥이>의 주인공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취약한 노동자의 모습을 대변한다. 소위 사회적 약자의 범주에 포함되는 존재이다. 흰둥이의 눈을 따라가면서 더욱 그 존재의 모습은 구체화한다. 흰둥이는 주인에게 버림받은 강아지다. 성대 수술이 되어 있어서 말(?)을 할 수 없다. 기쁨이나 슬픔, 아픔마저도 쉽게 표현할 수 없는 모습이 애잔하다. 흰둥이는 묵묵히 일하며 하루하루 버틴다.
그러던 어느 날, 폐지를 줍는 할머니와 할머니의 어린 손녀를 만나게 되어 가족이 된다. 할머니는 생계를 위해 매일 고물과 폐지를 줍다가 다치게 되고, 흰둥이는 좀 더 돈을 벌기 위해 직업소개소에 가게 된다. 거기서 일용직 일자리를 얻어 성실히 일하던 도중, 동료 아저씨가 공사 중인 건물에서 떨어져 죽는 모습을 보게 되고, 동료를 잃는 상실감을 알게 된다. 이후, 흰둥이는 다행히도 좀 더 나은 일자리를 얻게 되었고, 사립대학교에서 청소노동자로 일하게 된다.
이렇게 윤필 작가는 흰둥이가 거쳐 가는 일터와 그곳에서 일하고 생활하는 이들의 면면을 그려낸다. 폐지를 주어야만 겨우 하루를 유지할 수 있는 사람들. 특히, 사회에서 더 노동을 팔 수 있는 매력을 갖추지 못한 존재로 판정되어 '정상 노동'에서 배제된 고령 노동자. 추운 겨울 새벽같이 나가 일하다 위험한 노동환경에서 산재를 당해 죽음을 맞이한 건설노동자. 일하다 다치거나 아파도 다음날 일자리를 구할 수 없을까 봐 병원에도 가지 않고 하루를 버텨내야 하는 일용직 노동자. 학교 건물 곳곳에 아무 생각 없이 버려놓은 쓰레기들을 묵묵히 치우고 혹여나 학생들 눈에 띄면 불편할까 봐 건물 후미진 구석에서 휴식을 취하고 끼니를 해결하는 청소노동자. 흰둥이의 눈을 쫓아감으로써 보이는, 우리 사회에 감춰진 노동의 모습들이다.
점점 드러나는 노동권 사각지대
점점 불평등이 심화되던 와중에 마침내 코로나19를 계기로, 우리에게도 애써 숨겨져 있던 이런 노동의 모습이 극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외부 활동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나니, 집에서 대부분을 해결하기 시작한다. 우선, 택배, 배달 관련만 해도 그렇다. 물량은 살인적으로 늘어났다. 급격히 증가한 물량에 택배 노동자은 더욱 쉴 수 있는 시간이 없어졌다. 잠도 못 자고 배달을 하다 돌아가신 택배 노동자의 이야기는 듣는 사람을 숨 막히게 한다.
엄청난 폭우가 쏟아지던 날, 새벽에 음식을 배달해야만 했던 배달 노동자의 사진을 기억하는가. 몸이 반 이상 잠겨버린 물속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일을 해야만 했다. 운이 좋은 사람은 재택근무를 통해 외부와 접촉을 줄이고 일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무실이 있는 건물의 청결을 늘 유지해야 하는 청소노동자들은 매일 출근해야만 했다. 돌봄노동을 해야 하는 사람들은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는 사람들처럼 살 수 없었고, 콜센터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은 바이러스에 취약한 환경에서도 위험을 감수하며 일을 했다.
이런 사회적 현상들을 보며 너나 할 것 없이 노동의 약한 고리가 드러났고, 그래서 우리가 고쳐나가야 할 것이 무엇이고 바꿔나가야 한다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그 목소리 안에서 언뜻 내가 그 주인공은 아닐 거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건 왜일까. 이 모든 모습이 나의 모습이 아니던가. 흰둥이를 보면서 가슴 한구석이 아릿하게 저렸던 것은 사실 나의 노동에 대한 연민과 아픔 때문이 아니었는지.
손을 번쩍 들고, 환대의 몸짓으로
만화의 마지막 장면에 이르고서, 우리 모두 흰둥이처럼 살 수 있다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게 되었다. 만화 속 흰둥이는 '흰둥이 같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위로받고 위로한다. 취업의 문턱에서 계속 실패를 거듭하다 자살을 하려는 학생의 마음을 돌려놓는다. 묵묵히 곁에서 그저 함께 있어줌으로써 말이다. 흰둥이가 불어주는 하모니카 소리에 지친 마음을 달래고 살아갈 힘을 얻기도 한다. 반대로 대학에서 청소하고 있는 흰둥이에게 어느 교수가 늘 지나가며 인사를 건넨다. "안녕하세요. 고마워요. 고생이 많아요." 짧은 한마디지만, 흰둥이에게 긴 여운을 남기기도 한다. 갈 곳 없는 어미 길고양이는 흰둥이가 나눠주는 콩 반쪽으로 하루를 버틸 수 있었고, 그 보답으로 건넨 어미 고양이의 꾹꾹이로 흰둥이는 하루의 피로를 녹인다.
우리 모두 흰둥이가 아닌가. 누구는 약자이고 누구는 강자인지를 끊임없이 재고 삶의 승자와 패자를 가르며, 차별할 필요가 있는가? 불평등의 범주로 사회를 나누는 것이 과연 온당한가? 그저 이 사회를 살아가는, 고약한 이 시기를 견뎌내는 다 같은 노동자/사람이 아니던가. 예민함을 넘어 울분이 가득 찬 오늘날. 너나 할 것 없이 경쟁에 목을 매며 공정이라는 거짓 이름으로 경쟁의 우위를 탐하는 지금. 서로가 서로를 몰아내고 밀어내는 이때. 흰둥이가 건네는 메시지는 소박하지만 묵직하다.
만화 속 흰둥이는 기쁠 때, 나아가 '그래 나를, 그리고 우리를 응원해!'라고 말을 하고 싶을 때, 양손을 높게 번쩍 들고 얼굴엔 큰 웃음을 짓는다. '번쩍', 그렇게 우리 모두 두 손을 높게 들어, 환대의 몸짓을 건네보자. '번쩍!' 우리의 노동을 위해. 우리의 이 지난한 삶을 함께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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