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의 힘으로 중대재해 막아내자]
중대재해 트라우마 대응 실태와 개선 방향
장경희 / 회원, 충남노동인권센터 노동자심리치유사업단 두리공감 상임활동가
책임을 전가, 축소, 은폐하려는 가해자
중대 재해 그 자체로도 그렇지만, 중대 재해 이후 트라우마를 바라보는 태도와 시각은 천차만별이다. 최근 충청남도 모 대기업에서 발생한 사망 사고 이후 트라우마 예방을 위한 프로그램에 참여한 적이 있다. 트라우마 예방을 위한 노사 간의 합의과정도 그렇지만, 합의 이후 회사와 근로복지공단의 태도에는 기가 막혀 분노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트라우마 예방 활동을 위해 고용노동부가 지정한 기관 중 하나였지만, 회사는 두리공감을 배제하고 싶어 했다. 배제하려는 마음이야 전부는 아니어도 일부는 이해하는 대목이다. 그렇지만 예의 바르게 배제하고 싶어 했던 과정에서 확인된 회사의 태도는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이 사람들은 직접 목격자가 아닙니다.” “저 사람들은 그 자리에 없었던 사람인데 힘들다고 합니다.” “근로자들은 어떻게든 놀고 싶어 하기 때문에 자기 보고식 설문지는 신뢰할 수 없습니다.” “고용노동부 트라우마 매뉴얼에는 2차, 3차 피해자에 동일 부서를 명시한 적이 없습니다.” “그 많은 사람을 다 만나봐야 한다면 공장은 누가 돌립니까?”
모르는 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의 과오로 발생한 사건에서 사람이 목숨을 잃었고, 그것의 직간접 피해가 퍼지고 있는 상태에서 자신의 책임을 전가하고 축소하고 은폐하려는 시도는 분명한 죄다. 더불어 불특정 다수에게 낙인을 찍어 원래 그들은 문제가 많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전형적인 가해자 레퍼토리다. 중대 재해 사망사고 현장에서 우리가 만난 대부분의 회사는 위와 같았다. 위 사건 당시 회의에 참석한 근로복지공단 담당자는 회사의 말이 맞다는 말 외에는 하지 않았다.
고통의 근원을 모른 채 자신을 탓하는 피해자
반면, 중대 재해를 경험하거나 동료의 처참한 죽음을 목격한 노동자들은 스스로 죄인이 된다. ‘내가 좀 더 일찍 발견했더라면’, ‘내가 혹시 스위치를 잘 못 누른 것은 아닌지’, ‘평소에 문제가 많았던 곳인데 주저하지 말고 개선을 요구하며 싸웠더라면’ 등이 첫 번째 동료의 죽음을 대하는 살아남은 동료들의 마음이다. 그들은 자신에게 찾아오는 죄책감, 두려움, 도망가고 싶은 마음을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다. 차라리 이 상황을 만든 회사에 분노하며 고함을 치고 통곡하는 것은 그나마 다행인 것이다. 동료와 자신이 당한 이 비참한 고통을 고스란히 가슴에 묻으며, 일상의 공포를 재경험하면서도 가
해자들의 지시를 받으며 일하고 살아내야 한다. 자신이 느끼는 고통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불면의 밤을 지내야만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못난’ 자신을 탓한다. 이것이 트라우마다.
정부의 중대 재해 트라우마 대응 실태와 문제점
고용노동부는 2017년 ‘산업재해 트라우마 관리 프로그램 운영 매뉴얼’을 만들고 현재는 직업적 트라우마 전문 상담센터까지 운영하고 있다. 중대 재해가 발생한 사업장에 트라우마 위기에 대한 검토를 거쳐 고용노동부가 사업주에게 트라우마 프로그램 시행 명령(권고)을 내리게 된다. 그러면 사업주는 각 지역의 근로자건강센터, 직업적 트라우마 전문 상담센터 등과 연계하여 재해의 직간접피해자를 대상으로 트라우마 관리 프로그램을 시행하게 된다. 노동 현장에서 물리적으로 발생하는 크고 작은 사고들과 그로 인한 신체적 손상, 사망 등에 대한 대응에서 정신적·심리적 대응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실행한다는 점에서 진전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매뉴얼 시행 이후 많은 중대 재해 사업장에서 실행돼 왔다. 반면 매뉴얼과 그 시행과정에서 몇 가지 한계와 문제 들도 나타나고 있다.
첫째, 중대 재해 사건 처리 자체와 트라우마 예방 프로그램의 분리 문제다.
자연재해나 사회적·인적 재난의 원인, 사건처리 절차 및 과정, 재발위험의 방지와 안전대책 등이 심리적 위기 수준에도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중대 재해 현장에서는 이러한 통합적 접근이 이뤄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안전의 확보”라는 것은 사고 위험으로부터의 안전, 사고를 재경험하도록 만드는 장소·사람 등으로부터의 안전, 자신이 경험한 피해를 제기하고 시정을 요구하며 사고위험을 인식했을 때 배치를 거부할 수 있는 권리로서의 안전을 모두 포함한다. 또한 사건처리 과정 전반에서 노동자들의 참여를 보장하고 처리 결과에 동의 여부를 묻는 것은 원칙적 절차를 넘어 통제권과 자율성의 회복이라는 심리적 위기를 완화하는 주요한 기제가 된다. 하지만 고용노동부 매뉴얼에는 이와 같은 관점이 결여돼 있다.
중대 재해 사고와 트라우마 예방 프로그램을 종합적으로 안내하지 않는 문제가 나타난다. 사고의 원인과 처리 과정과 더불어 트라우마 예방 프로그램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는지, 누가 오는지 등을 전혀 안내하지 않는다. ‘해 주는 거니까 잠자코 해’라는 식이다. 당사자인 노동자들의 결정권과 통제권을 빼앗아 오히려 위기를 부추기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두 번째, 트라우마 예방 프로그램 자체의 한계다.
고용노동부 매뉴얼은 중대 재해 직후 직간접 피해자들에 대한 사건충격도 검사를 거쳐 고위험군에 대한 상담 및 전문기관 연계 등을 밝히고 있다. 많은 전문가가 주장하듯이 외상을 경험한 사람들의 심리적·정신적 고통의 수준을 객관적 지표로 측정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사람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증상과 발현 시기가 다르기 때문이다. 프로그램이 갖는 효과성을 확인하기 위해 사전 사후 검사가 필요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되어선 안 된다. 심리상담의 경우도 각 지역의 근로자건강센터가 확보한 상담 인력의 부족, 1개소뿐인 직업적 트라우마 전문 상담센터 등의 한계도 있지만, 심리 상담만으로 급성 스트레스를 완화하는 데는 역부족이기 때문에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 또한 전문치료기관 연계가 매뉴얼에 나와 있으나 그에 따른 비용이나 시간 등을 노동자 개인이 책임져야 하는 시스템도 개선이 필요하다.
세 번째, 사고의 원인을 제대로 밝히고, 철저한 현장 개선으로 안전한 현장을 만드는 과정이 트라우마 예방매뉴얼에 포함되어야 한다.
트라우마 예방을 위한 위기 개입은 보통 1개월에서 3개월 단기개입으로 이뤄지며, 고용노동부 매뉴얼 역시 그와 같은 기간을 명시하고 있다. 이 경우 두 측면의 대책이 세워져야 한다. 우선 트라우마 예방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기간에 철저한 원인 규명과 책임자에 대한 처벌, 완전한 현장 개선이 이뤄져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트라우마를 완전히 예방할 수 없다. 다음으로 설사 위와 같은 개선이 모두 이뤄지더라도 이미 발생한 사고로 인한 트라우마 증상들이 이후에도 계속될 경우 치료방안이 수립되고 제공되어야 한다. 급성스트레스 증상이 2개월 이상 경과되면 외상후 스트레스로 봐야하며 이는 보다 더 전문적이고 지속적인 관리와 치료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현재의 매뉴얼에 이 같은 내용들이 빠져있다.
마지막으로 트라우마 위기의 완전한 극복은 “신뢰”를 통해 이뤄진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분명한 가해자, 외부로부터의 위해적 상황 등은 ‘신뢰의 상실’을 초래한다. 중대 재해를 경험한 피해 및 생존자들은 회사와 정부기관을 불신하며 때로는 자신을 보호해주리라 기대했던 노동조합에 대해서도 신뢰를 잃는다. 세상과 주변이 절대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몸과 마음으로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중대 재해 트라우마 예방에서 중요한 고리는 피해자의 신뢰를 회복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피해 및 생존자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제대로 사과하며 그들의 요구를 알아차려 수용하고, 안전을 위해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그들에게 돌려주는 것이야말로 신뢰 회복의 실마리다. 이러한 과정이 트라우마 치유의 핵심이라고 하는 ‘사회적 지지’의 시작이다. 사람이 죽을 수 있는 노동은 이미 강제노동이다.
자동차 자율 안전주행처럼 소비자 또는 고객의 안전을 위한 기술은 나날이 발전한다. 하지만 그 소비자가 노동자로 살아가는 현장에서의 안전은 답보상태이거나 후퇴하는 듯하다. 그러니 관점과 태도의 문제를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위험한 일을 하는 노동자이기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이기 때문에 죽게 된다. 노동 현장에서 노동자 개인의 힘만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사건이나 사고로 인한 트라우마의 예방은 노동자가 죽지 않고 일하는 구조를 바꾸는 과정과 함께 가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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