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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환경의사가 만난 노동자건강 이야기] 어느 군무원의 업무관련성 평가 이야기 / 2019.03 [직업환경의사가 만난 노동자건강 이야기] 어느 군무원의 업무관련성 평가 이야기 권종호 / 회원, 직업환경의학 전문의 직업병과 관련한 참고 자료로 사용하기 위해 직업환경의학 전문의들에게는 업무관련성 평가 의뢰가 심심치 않게 들어온다. 전공의 수련 과정 중에도 이러한 업무관련성 평가서를 작성하도록 되어 있다. 필자도 전공의 시절 20여 건의 업무관련성 평가서를 작성하였는데 그중 아직까지도 기억에 남는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업무관련성 평가서는 가끔 간단하기도 하고 가끔 아주 복잡하기도 한데, 이는 각 작업의 특성과 발생한 질환의 인과관계 수준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의뢰된 사례와 관련하여 연구된 자료가 많지 않거나 작업과의 인과관계를 추정하기 어려운 경우에 혹시 있을지 모르는 내용을 검색하느라 많은 시간이..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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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환경의사가 만난 노동자건강 이야기] 어느 군무원의 업무관련성 평가 이야기 / 2019.03

[직업환경의사가 만난 노동자건강 이야기]

 

 

어느 군무원의 업무관련성 평가 이야기

 

 

 

권종호 / 회원, 직업환경의학 전문의

 

 

 

직업병과 관련한 참고 자료로 사용하기 위해 직업환경의학 전문의들에게는 업무관련성 평가 의뢰가 심심치 않게 들어온다. 전공의 수련 과정 중에도 이러한 업무관련성 평가서를 작성하도록 되어 있다. 필자도 전공의 시절 20여 건의 업무관련성 평가서를 작성하였는데 그중 아직까지도 기억에 남는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업무관련성 평가서는 가끔 간단하기도 하고 가끔 아주 복잡하기도 한데, 이는 각 작업의 특성과 발생한 질환의 인과관계 수준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의뢰된 사례와 관련하여 연구된 자료가 많지 않거나 작업과의 인과관계를 추정하기 어려운 경우에 혹시 있을지 모르는 내용을 검색하느라 많은 시간이 소요되기도 하고 노동자의 작업 관련 자료를 보충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이번 글에서 이야기하려는 업무관련성 평가 사례는 36세 스프레이 도장공에서 발생한 비소세포성 폐암 사례로 직업환경의학 전문의라면 누구나 발생할 확률이 높은 직업병임을 알 수 있는 사례였다. 처음에 접했을 때는 명확한 자료들을 찾아 첨부해주면 간단하게 끝날 것으로 생각했다. 다양한 발암물질이 들어있는 도료를 칠하는 도장공은 그 업무 자체로 국제암연구소(IARC)에서 1급 발암 직업군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노동자는 군무원이었다. 공무원 신분을 가지고 군에서 종사하는 직군인 군무원은 산재나 직업병 관련하여 산재보험이 아닌 공무원 연금공단의 산재 승인을 받도록 되어있다. 그리고 작업 환경에 대한 감시나 특수건강진단 등의 과정은 산안법이 아닌 군 작업환경 및 작업자 보건관리 훈령이라는 규칙을 따른다. 그 결과 이 노동자는 스프레이 도장공으로 열악한 환경에서 작업하며 폐암에 걸렸음에도 직업병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법원을 상대로 공무상 요양불승인처분 취소 청구소송을 준비 중이었다. 오히려 몇 년 전 같은 공정에서 근무한 동료의 백혈병은 바로 승인되었다고 했다. 산재보험의 직업병 인정 과정도 여러가지 문제가 있지만 공무원 연금공단의 직업병 인정 과정은 훨씬 심각한 수준이었다.

관련 자료를 모두 검토하고 실제 사용했던 보호구와 작업 장소에 대한 자료를 보충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해당 노동자 분께 전화를 걸었다. 첨부된 의무 기록 상 폐암이 이미 뼈에 전이된 상태여서 어떤 이야기부터 꺼내야 할지, 너무 우울한 상태는 아닐지 수많은 생각이 오갔다. 하지만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걱정과 달리 다소 활기찼다. 공무원 연금공단의 불승인이 매우 억울해서 본인이 쓰던 보호구며 작업 환경이며 모두 잘 알리고 싶으니 필요한 내용은 이야기해주시라고, 그동안 제대로 된 보호구나 환기 시설도 없이 일해서 결국 이렇게 된 거라 생각한다고 했다. 덕분에 나는 궁금한 질문을 원 없이 했고 필요한 사진 자료들도 추가로 받기로 했다. 통화 말미에 그 노동자분은 조심스레 아이들 이야기를 꺼냈다. 아이가 둘이 있는데 그 아이들이 걱정이라고 소송은 꼭 이기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당시 업무관련성 평가의 자료는 소송에서 절대 지지 않을 정도로 준비해야 했다. 실제로도 근무 환경이 매우 열악했다. 넓은 창고를 그냥 정비소라고 쓰고 있었고 창문에 달린 환풍기 하나가 환기시설의 전부였다. 그곳에서 군용 대공포를 정비하고 도색하는 업무를 하는데 정비 작업은 많지 않고 노후된 장비의 도색이 주된 업무였다. 주로 스프레이 도장 작업인데 안전관리 담당자도 전문 인력이 아니고 이에 대한 외부 감사도 받지 않으니 백혈병이 발생했고 산재 승인까지 받았음에도 여전히 방진마스크만 쓰고 작업해왔다. 작업에 주로 사용된 군용 카키색은 발암물질인 크롬을 함유하고 있었고 스프레이 도장을 통해 노출되는 경우 방진마스크는 효과적으로 이를 막아줄 수 없었다. 오히려 막아줄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로 더 노출될 가능성마저 있었다.

예상보다 훨씬 길어진 업무관련성 평가서를 보내드리고 몇 해 지난 3월 어느 날, 도장 작업하던 군무원에서 발생한 폐암이 소송을 통해 승인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도장 작업 노동자 분들을 만날 때면 가끔, 예상외로 다소 활기찼던 당시 군무원 분의 목소리가 떠오르곤 한다. 울분보단 열정이 느껴지던 목소리. 다행히 2018921일 공무 상 재해 보상의 내용을 수준을 높이기 위해 공무원 재해보상보험법이 공무원연금법에서 분리돼 제정·시행되기로 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공무상 질병과 관련한 요양 승인은 만족스럽지 못한 상황이다. 지속적인 개정, 보충을 통해 불필요한 소송이 발생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