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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시간 읽어주는 사람] 재난과 노동인권 - 영화 <감기> / 2018.11 재난과 노동인권 - 영화 김영선, 고려대 한국사회연구소 연구교수, 노동시간센터 회원 바이러스 재난은 연례행사처럼 발생한다. 바이러스 재난은 예외적이거나 우연적인 사고가 아니다. 바이러스 재난의 반복성은 사회학자 찰스 페로우가 말하는 정상사고의 범주에 넣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다. 정상사고(normal accident)는 위험성이 높은 기술과 시설들, 이를테면 화학 공장이나 핵발전소 등이 증가하면서 그 자체가 가진 복잡성과 불확실성 때문에 예기치 않게 체계 전체를 뒤흔드는 사고가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음을 가리킨다. 바이러스 재난이 정상사고에 꼭 부합하는 사례인가에 대한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전염병 재난이 기후 변화와 전 지구적인 이동이 가속화된 시대에 빈도 높게 반복됨을 고려할 때, 바이러스..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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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시간 읽어주는 사람] 재난과 노동인권 - 영화 <감기> / 2018.11

재난과 노동인권 

- 영화 <감기> 


김영선, 고려대 한국사회연구소 연구교수, 노동시간센터 회원


바이러스 재난은 연례행사처럼 발생한다. 바이러스 재난은 예외적이거나 우연적인 사고가 아니다. 바이러스 재난의 반복성은 사회학자 찰스 페로우가 말하는 정상사고의 범주에 넣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다.

정상사고(normal accident)는 위험성이 높은 기술과 시설들, 이를테면 화학 공장이나 핵발전소 등이 증가하면서 그 자체가 가진 복잡성과 불확실성 때문에 예기치 않게 체계 전체를 뒤흔드는 사고가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음을 가리킨다. 바이러스 재난이 정상사고에 꼭 부합하는 사례인가에 대한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전염병 재난이 기후 변화와 전 지구적인 이동이 가속화된 시대에 빈도 높게 반복됨을 고려할 때, 바이러스 재난을 정상 사고의 범주로 넣을 수 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시대에 사람과 사물의 전 지구적 이동이 가속화되고 환경 개발에 따른 기후 변화 등이 감염과 전염의 위험성을 높일 수 있다는 의미다. 또한 바이러스 감염이 이런저런 동물(원숭이, 박쥐, 낙타 등)로부터 비롯하는 지역적 기원을 갖는 우발적 사건이라 하더라도 전염의 위험성은 전 지구적인 동시에 사회적이다.

영화 <감기>가 플루(flu, 독감) 발생을 선상의 컨테이너로 설정한 것은 꽤나 상징적이다. 플루가 특정하고 단일한 장소에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물류 공간을 가로지르며 전 지구적으로 확산될 수 있는 위험임을 잘 형상화하고 있다.

또한 <감기>는 플루가 감염자들을 한 군데(탄천 주차장의 임시 막사) 몰아넣는 대책 본부의 반인권적인 격리 조치로 악화됨을 강조했다. 전염의 확산이 전염병 그 자체에 있을 수 있지만, 전염병에 대한 사회적 대응에 따라 확산의 양상이 달라짐을 적확하게 포착하고 있다.

<감기>는 메르스 재난 2~3년 전에 상영됐지만 우연하게도 메르스 공포의 광풍을 예견한 것 마냥 다시 회자됐다. 메르스 사태를 미리 재현할 수 있었던 건 감독의 영화적 상상력만은 아니었다. 감독은 사전에 전문가 인터뷰와 사례 분석에 오랜 시간을 들였고 이를 통해 바이러스 재난에서 반복되는 특성을 연출했을 뿐이라고 한다.

여느 바이러스 재난 영화처럼 <감기>도 빠른 전염 속도, 100퍼센트에 달하는 치사율, 피를 토할 정도의 고통 등으로 플루의 위험성을 극화한다. 관계기관의 대응 또한 여느 영화처럼 바리케이드를 쌓는 방식의 격리, 감염자를 일괄 감금해 살처분하는 방식으로 그렸다.

그렇지만 한국 사회에서 메르스에 대한 공포가 전례 없었던 것은 메르스의 내재적인 파괴력, 높은 치사율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다. 전례 없던 공포는 신뢰할 수 없는 대응 체계에서 비롯했다.

공포와 불안은 저 신뢰 사회일수록 배가되는데, 세월호 이후 "바람에 슬레이트지붕 날아가듯" 날아간 국가에 대한 신뢰가 사라진 국면에 WHO의 감염병 소통 가이드라인(신뢰 확보, 빠른 공지, 투명하게 공개, 대중과 공감, 대응 계획)을 "교과서적으로 어겼다"는 대책 본부의 '아몰랑'식 대응이 반복되면서 전 국민의 공포와 불안은 폭발했다.

재난 불평등과 노동인권

메르스 재난은 시민의 안전을 위협했던 것은 물론 재난 대응에 투입된 노동자들을 죽음의 사지로 몰아넣었다. 재난이 반복될 때마다 노동인권의 침해는 심각하다. 안그래도 빠듯한 인력난이나 위험의 외주화 등 기존의 위험에 메르스 재난이 덧대지면서 병원노동자는 이중의 위험에 노출된다.

그간 간호노동자나 간병노동자를 포함한 비정규 노동자의 노동인권은 병원자본의 저비용 전략에 일상적인 침해 상태에 놓여 있었다. 메르스 재난 시기 확진자 186명 중 20%가량이 병원종사자였고 그 가운데 간호노동자와 간병노동자의 비율이 유독 높았던 것은 전염병의 내재적 특성에 기인한다기보다는 병원 내 노동자가 다뤄져 왔던 방식들을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조류독감이나 구제역 때마다 벌어진 대량의 살처분 방식은 한국 사회에 동물권이 실종된 현실을 날것으로 보여주는데, <감기>는 살처분 대상을 닭이나 돼지가 아닌 '인간'으로 상정하면서 인권 또한 재난에 얼마나 무력한 상태로 내몰릴 수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노동인권 침해의 고통은 비정규 노동자에게 더욱 파고든다.

병원 '직원'이 아니라는 이유로 치료보호 대상 명단에서 빠졌다는 어느 비정규 노동자의 분노는 병원자본의 비용절감 논리의 폐해를 함축하고 있다. 폴란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이 <쓰레기가 되는 삶들>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비정규 노동자는 병원 내에서 일하면서도 병원 '외부'에 놓인 잉여였다. 메르스 재난은 이러한 병원 내 '외부', 재난 불평등의 지점을 타고 또한 확산됐다.

재난의 고통이 이렇게 내부이면서도 '외부'로 처리되는 사람들에게 직접 관통하는 모습이 자주 반복된다. 후쿠시마 원전 제염작업에 투입된 비정규노동자 및 이주노동자들을 비롯해 구제역이나 조류독감으로 강제 살처분 작업에 투입된 일용직 및 용역업체 노동자들, 호리에 구니오의 표현처럼 '원전 집시'라고 명명할만한 원자력발전소 협력업체 노동자들도 마찬가지다.

<감기>에서 소방구조대원으로 나오는 주인공 장혁은 불굴의 '직업정신'을 발휘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재난 시 이러한 직업정신을 우리는 기대할 수 있을까? '비상 상황'이라는 이유로 노동자 안전도 보장되지 않은 채 위험의 한복판에 투입되는 현실, 위험으로 겪게 될 신체적·정신적 문제에 대해서는 보호나 보상이 터무니없는 현실에서 영화 주인공 같은 직업정신의 발휘를 기대하는 건 영화에서나 찾을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