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1. 만인을 위한 노동사회의 유니버설 디자인 - 노동시장으로의 참여를 넘어 공공시민노동 체제로 / 2018.04

만인을 위한 노동사회의 유니버설 디자인

- 노동시장으로의 참여를 넘어 공공시민노동 체제로

노들장애학궁리소 김도현 연구활동가


장애인 노동권, 그 엄혹한 현실에 대하여

3년마다 보건복지부가 시행하는 장애인실태조사 자료에 의한 2014년 장애인의 실업률은 6.3%로 같은 기간 전체 인구 실업률 3.5%의 1.8배 정도이다. 그러나 정부가 얘기하는 실업률이라는 것이 워낙 기만적이어서 실제 사람들이 느끼는 실업률과는 큰 차이가 난다. 장애인의 경우 15세 이상 노동 가능 연령 인구 중 2/3에 가까운 61.0%가 비경제활동 인구로 분류되어 있어(전체 인구에서는 36.9%가 비경제활동인구임), 사실 공식적인 실업률은 별 의미가 없다. 더구나 보건복지부는 오랫동안 장애인 실태조사에서 실망실업자가 포함된 실업률을 산정하였고 이것이 공식적인 실업률로 주로 사용되었지만, 2008년도부터는 아예 이를 누락시켰다. 그래서 장애인계에서는 경제활동인구와 비경제활동인구를 구분하지 않은, 전체 노동 가능 연령 인구 중 미고용률 63.4%가 훨씬 더 의미 있는 수치라고 보며 전체 장애 인구 중 70% 가까이가 실업 내지는 반실업 상태에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사진 출처: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그러나 이렇게 취업해 있는 36.6%의 장애인들이 처해 있는 노동 환경 역시 열악함을 면치 못하고 있다. 임금 노동자 중 임시직(28.8%)과 일용직(31.4%) 비율의 합이 60.2%로, 고용계약 기간이 1년 이상인 상용직의 비율은 39.8%에 불과하다. 그리고 취업 장애인의 임금 수준은 153만 원으로 우리나라 전체 상용 노동자 평균임금 329만원(고용노동부,「사업체 노동력조사」(2014년 2/4분기), 5인이상 사업체)의 46%에 불과한 수준이다. 한마디로 장애인에게는 건강한 일자리가 존재하지 않으며, 일하면서 건강한 삶을 유지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불인정노동자로서의 장애인

소위 자본주의 중심부 국가이자 장애 정책이 잘되어 있다고 하는 나라들도 장애인의 고용률에서는 우리나라와 별반 다르지 않은 수치를 보여준다. 한국의 장애 인권이나 장애인복지 관련 지표들을 살펴보면 거의 모든 것들이 OECD 34개 회원국 중 최하위권에 머물러 있지만, 2000년대 후반 장애인 고용률은 OECD 국가 평균과 그다지 차이가 나지 않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¹ 그리고 이는 ‘장애(인)’이라는 근대적 범주의 형성 과정을 이해한다면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니다.

자본주의의 형성기, 즉 본원적 축적기는 토지에서 쫓겨났지만 임노동 관계에 편입되지 못했던 소위 ‘부랑자’가 대량으로 양산된 시기였다. 느리고 자율적이며 유연한 형태의 노동에 익숙해 있던 많은 사람은 칼 맑스(Karl Marx)가 『자본』에서 사용한 표현을 빌자면 “별다른 도리가 없어서” 그렇게 부랑자가 되었는데, 이들을 임노동 관계로 포섭하기 위해 국가는 강제 수용과 훈육 정책을 실시하게 된다. 서구 사회복지 역사에서 등장하는 구빈원(workhouse)은 바로 이러한 강제 노동과 결합한 수용소였다.

그런데 구빈원에서는 일정 시점부터 효과적인 훈육과 나태의 방지를 위해 수용자들을 분류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핵심적인 목표는 ‘일 할 수 없다고 간주한 사람들’을 일할 수 있지만 하지 않으려는 사람들로부터 분리하는 것이었다. 구빈원과 같은 시설 밖에서의 구제 조치(원외 구제)를 폐지한 영국의 1834년 「개정구빈법」(The Poor Law Amendment Act)은 빈민들을 분류하면서 아동, 병자, 광인, 심신결함자(defective), 노약자(the aged and infirm)를 특별히 중요한 다섯 개의 범주로서 설정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범주에 들지 않는 사람들을 잔여적인 방식으로 노동 능력자로서 간주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러한 다섯 가지 범주 중 아동을 제외한 네 가지 범주가 바로 장애인을 구성하게 된다.

즉, 일을 할 수 있는 몸(the able-bodied)을 선별하기 위해 일을 할 수 없는 몸(the disable-bodied)을 명확히 규정하고자 했고, 이로부터 오늘날과 같은 ‘장애인’(disabled people)라는 개념이 발명된다.² 요컨대, 근대 사회로의 전환기에 생겨난 장애인이라는 범주는 근대의 자본주의적 노동에서 배제 당해온 사람들, 즉 ‘불인정 노동자’(不認定 勞動者, unrecognized worker) 집단을 가리켰던 개념인 것이다.³

노동개념의 혁신과 공공시민노동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장애인의 노동권이 보장되는 사회로의 전환을 만들어 갈 수 있을까? 필자는 그러한 전환을 ‘공공시민노동’이라는 개념의 확립과 시스템의 구축을 통해 만들어가자고 제안하고 싶다.

기본적으로 공공시민노동이라는 ‘개념’은 다음과 같은 문제의식을 전제로 한다. 첫째, 노동은 상품이 아니라는 것. 오스트리아 출신의 경제인류학자 칼 폴라니(Karl polanyi)는 근대 자본주의가 노동·토지·화폐를 상품처럼 다룸으로써 시장경제 체제를 확립했지만, 그것은 단지 ‘상품 허구’(commodity fiction)일뿐이며 노동·토지·화폐는 결코 본래적인 의미에서의 상품일 수 없다고 말한다. 상품이란 판매를 위해 생산되는 것인데, 토지는 자연의 다른 이름이고, 노동이란 인간의 다른 이름이며, 화폐는 신용관계의 매개물이기 때문에, 판매를 위해 더 생산하거나 덜 생산할 수 있는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1944년 개최되었던 국제노동기구(ILO) 총회에서는 통상 ‘필라델피아선언’이라고 불리는「국제노동기구의 목표와 목적에 관한 선언」을 채택하게 되는데, 이 선언에서 가장 먼저 제시되고 있는 원칙도 바로 “노동은 상품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둘째, 노동은 헌법의 정신에 따라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시민권, 즉 ‘권리’로 존재해야 하며, 더구나 노동(근로)은 단지 ‘권리’인 것만이 아니라 교육과 마찬가지로 국민의 4대 ‘의무’ 중 하나라는 것. 대한민국의 헌법은 제32조 ①항에서 “모든 국민은 근로의 권리를 가진다”라고 노동할 권리를 명시적으로 규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②항에서 “모든 국민은 근로의 의무를 진다”라고 적시하고 있다. 그런데 어떤 것이 이처럼 권리이자 동시에 의무로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교육의 예에서 명확히 드러나는 것처럼 민간(시장)의 영역에 방치되어서는 안 되며, 공적인 개입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져야만 한다. 예컨대 공교육이 존재하지 않고 사교육(교육시장)만이 존재한다면, 혹은 공교육+‘α’의 위상으로 사교육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교육+‘α’의 위상으로 공교육이 존재한다면, 교육은 결코 권리도 될 수 없고 국가가 부과하는 의무도 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노동이 하나의 권리이자 의무로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노동 역시 시장이 아닌 공공의 영역에 존재하거나 최소한 공공의 영역에 의해 통제될 수 있어야만 한다. 즉 공공시민노동+‘α’의 위치에 노동시장이 자리매김 되도록 함으로써, 일정 연령 이상의 모든 이들에게 기본적으로 공공이 노동의 기회를 보장해야만 하는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공공시민노동 ‘정책’은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원칙을 따른다. 첫째, 공공시민 노동을 통해 제공되는 급여는 전체 상용노동자 평균 임금의 50% 이상(2014년을 기준으로 하자면 최저 약 165만원)에서 정해진다. 이것이 가능하다면 터무니없이 낮은 민간영역의 최저임금을 견인하는 효과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둘째, 공공시민노동으로 인정되는 활동은 국가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흔히 ‘제3섹터’라고 불리는 광범위한 시민사회의 다양한 단위들과 공공시민노동을 하려고 하는 개인들 자신으로부터 신청을 받는다. 그리고 그러한 단위 및 개인이 신청한 활동이 공공시민노동에 합당한지는 기초지방자치단체 단위로 꾸려지는 ‘공공시민노동위원회’에서 심의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위원회에는 여성·성소수자·장애인·노인·이주민·청소년 등의 소수자를 포함해서 지역사회를 대표할 수 있는 다양한 시민위원들이 2/3 이상 참여를 한다. 물론 이러한 위원회와는 별도로 ‘공공시민노동청’도 중앙과 지방에 필요한데, 공공시민노동청은 기본적인 행정 업무를 총괄하는 것과 더불어, 보다 핵심적으로는 공공시민노동을 하기를 원하지만 스스로 적절한 활동을 찾거나 개발하지 못한 이들을 지원하는 업무를 수행하게 된다.

한편, 공공시민노동위원회에서 이루어지는 공공시민노동으로의 인정에 대한 심의 기준은 ‘해당 개인이 지닌 현재적 조건 및 능력’에 비추어 ‘지역사회 구성원들의 물질적·정신적·정서적 삶에 기여’를 하는가의 여부 이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기준을 적용할 경우 현재 매우 심각한 정신적 장애를 지니고 있거나 식물인간 상태에 있는 사람의 경우에는 그들의 생존 활동 자체를 노동으로 인정하게 된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노동이란 ‘해당 개인이 지닌 현재적 조건 및 능력’에 비추어 판단되며, 그/그녀의 생존(활동)은 그/그녀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사회구성원들에게 상당한 정신적·정서적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학교에 다니고 있는 학생들도 학업노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인정하여 일정 수준의 급여를 단계별로 지급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학생들의 학업은 이 사회가 유지·발전하는 데 있어 필수적인 활동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상이 실현될 수 있다면,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출현과 더불어 노동을 할 수 없다고 치부됐던 중증장애인이나 발달장애인들도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한 만큼은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위한’ 소득을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여성(또는 남성)의 가사 활동도 새롭게 그 가치를 공인받을 수 있으며, 현재 광범위한 사회문제가 되는 청년실업 문제도 실질적인 돌파구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공공시민노동의 적용 집단이 점차 확대되고 사회적으로 자리를 잡아가면서 노동에 대한 정의와 관념이 일정하게 재구성될 수 있다면, 그 토대 위에서 기본소득 제도의 도입도 병행해 추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노동의 재구성을 통해 만인을 위한 노동사회가 구축될 때에만, 노동은 다른 사람을 밀어내야만 내가 앉을 수 있는 ‘의자놀이’가 아니라 장애인을 포함한 사회 구성원 모두가 함께 자기 삶의 가치를 실현해 나가기 위한 하나의 시민권으로서 자리매김 될 수 있을 것이다.


* 각주

1) 김성희 외, 『장애인 복지지표를 통해 살펴 본 OECD 국가의 장애인 정책 비교 연구』, 한국보건사회연구원, 2011, 122쪽.

2) Michael Oliver, The Politics of Disablement, St. Martin’s Press: New York, 1990, pp. 32~34.

3) 김도현, 『당신은 장애를 아는가』, 메이데이, 2007, 7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