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노동자는 자기를 돌볼 시간이 필요해요
- 컨벤션기획 노동자 백진슬 님 인터뷰
이나래 상임활동가
교복을 입고 학교에 다니던 시절 가끔씩 설레는 마음으로 친구들과 서울행 지하철을 탄 적이 있다. 옹기종기 모여 내부로 들어가 연신 감탄을 했다. 내 키의 몇 십배나 되는 높은 천장과 화려한 조명, 북적이는 사람들 속에서 정신없이 돌아다녔던 곳. 코엑스, 킨텍스 등 이름으로 더 익숙한 바로 컨벤션 센터였다. 이번 <일터>가 만난 다양한 노동이야기의 주인공은 바로 컨벤션 기획을 하는 백진슬 님이다. 올해 입사 4년 차로 전공을 살려 일하고 있다는 그를 지난 2월 20일 한 카페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혹시 마이스 산업이라고 들어보셨나요? MICE산업은 회의(Meeting), 포상관광(Incentives), 컨벤션(Convention), 전시회(Exhibition)의 머리글자를 딴 용어로, 폭넓게 정의한 전시·박람회와 산업을 말해요. 한국에서도 강조하는 산업 중 하나죠. 그중 컨벤션이 주로 모든 걸 다 포함한다 할 수 있어요. 흔히 생각하는 미술전 같은 건 아니고, 코엑스나 킨텍스 같은 데서 맨바닥에 부스를 짓고 참가 기업사들을 모집해서 비즈니스 대 비즈니스, 비투비로 전시할 때도 있고, 기업과 소비자가 만나는 비투씨 퍼블릭 전시할 때도 있어요. 그 전시회를 만드는 걸 컨벤션 기획이라고 해요. 말 그대로 기획이긴 한데, 분야가 컨벤션인 거죠.”
생소한 분야인 컨벤션 기획이 무엇이냐 묻는 말에 상세하게 소개를 해주는 백진슬 님은 많은 사람들이 컨벤션 기획을 생소해 하고, 많이들 어려워한다며 아쉬워했다. 본인은 대학에서 전공을 하면서 컨벤션 기획이라는 것에 대해 어렵게 느껴져 1년간 휴학을 하기도 했지만,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우연한 기회로 베이비페어(임신출산육아박람회) 진행요원으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면서 자연스레 지금의 직장, 베이비페어 전시기획팀에 입사를 하게되었다.
“많은 분이 대부분 미술품 전시를 생각해요. 그래서 지원자 전공이 예체능이 많죠. 컨벤션이란 단어가 생소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또 자주 들어보는 단어기도 하거든요. 코엑스에선 매주 전시가 열려요. 목, 금, 토, 일 4일간요. 한 번씩은 가보셨을텐데, 컨벤션으로 얘기를 하고, 그걸 ‘기획한다.’ 라고 생각하면 어려워하세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저희가 전시를 여는 거예요. 해당 장소를 대관해서 거기에 우리가 하나부터 열까지 다 만들어요. 예를 들면 우리 회사에서 언제부터 언제까지 전시를 열거라고 홈페이지와 이전 참가기업에 안내하면 신청을 하고, 자리를 배정하죠. 그리고 준비해서 전시회를 열게 돼요.”
컨벤션은 서울에서는 코엑스, 킨텍스 등에서 많이 열리지만, 그 외 지역에서도 다양한 분야와 규모로 열린다. 그렇기 때문에 출장도 제법 잦다. 특히 전시 특성상 시뮬레이션이나 예행연습이 안 되기 때문에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백진슬 님은 보통 전시장과 가까운 곳에 상주한다고했다. 그게 마음도 편하고, 긴급 상황에 대처하기 쉽기 때문이다.
“전시회에 참여하는 기업과 관람객들의 요구는 달라요. 예를 들어, 제가 맡고 있는 전시회로 설명드리자면, 관람객은 필요한 상품을 눈앞에서 만져보고, 저렴하게 사고 싶어 해요. 기업은 좋은 값으로 물건을 팔고 싶어 하죠. 그런 요구를 파악하는 게 필요해요. 하다못해 각자가 느끼는 온도도 다르거든요. 밖에 있다 들어온 관람객은 춥다고 느끼지만, 계속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덥다고 느껴요. 그런 세밀한 부분들까지 조율이 필요해요.”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과 전시가 이뤄지는 동안 높은 긴장이 요구된다. 굉장히 예민해지고, 본의 아니게 스스로 압박감을 주기 때문에 노동시간과 휴식시간의 균형이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백진슬 님이 다니는 회사는 대표님의 ‘업무시간이 무작정 길다고 능률이 오르는 것이 아니다’라는 철칙 덕분에 노동시간은 짧고 휴식시간은 길게 운영된다고 했다. 평소 오전 9시까지 출근하고 1시간 정도의점심시간을 가진 후 오후 5시에 퇴근을 한다. 전시가 없는 기간에는 좀 더 이른시간에 퇴근하기도 하고, 얼마 전 매서운 한파가 찾아왔던 날은 더 일찍 퇴근하기도 했다고 했다.
지금 다니는 직장의 직원 규모는 15명인데, 분야별로 최소 2~3명, 4~5명이 팀을 꾸리고 평소 일을 하고 전시회 때 필요한 인원은 진행요원 등 아르바이트를 구한다. 그러다 보니 분야별로 꾸려진 팀원들 간의 협력이 매우 중요하다.
“하나로 똘똘 뭉칠 수밖에 없어요. 제 주변 컨벤션기획에 종사하는 분들도 그렇고요. 그래야 전시가 잘 준비되고 문제없이 끝날 수가 있거든요. 그렇지않으면 어려워요.”
그렇기 때문일까. 회사를 그만두는 일이 흔치 않다고 했다. 한 동료의 경우 최근둘째 키울 때도 육아휴직을 쓰고 다시 복직했다. 눈치를 주는 건없다. 물론 5명이 하던 일을 4명이 하면 힘은 들지만, 평소의 업무량이 부담되지 않기 때문이다. 평소 육아휴직, 연차를 써도 커버가 될 수 있도록 서로 배려해주는 문화가 존재해 안정적으로 직장을 다닐 수 있다.
“물론 전시를 더 많이 기획하고 업무를 늘릴 수 있죠. 그러려면 인원도 더 필요하고, 야근도 해야 해요. 그런 회사들도 있죠. 그런데 저희는 조금 더 안전하고, 완성도가 높을 수 있게 하자는 주의라서무리하지 않아요.”
백진슬 님이 맡고 있는 전시 분야는 임신출산육아 분야로 저출산 영향을 받긴 하지만 한 가정에 아이 한 명만 키우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한 아이에게 소비가 집중되는 경향이 커졌다고 했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성인 8명이 필요하단 말이 있어요.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친할머니, 친할아버지, 엄마, 아빠, 이모, 삼촌이요. 그러니 아이가 관심 있어 하고 재미있어하는 게 있으면 최신판 장난감과 도서를 사주죠. 출산율은 저하 돼도, 한 아이에게 정말 좋은 걸 해주려고 해요. 그러니 임신출산육아 시장은 쉽게 사라지진 않을 것 같아요. 그래도 요즘 전반적으로 시장이 안 좋아서 전시업계도 힘들다고 해요. 특히 제가 하는 베이비페어는 관람객들의 실제 구매가 이뤄지기 때문에 굉장히 예민해요. 제가 입사하기 전에 있었던 일이지만 메르스 사건이 영향이 컸어요. 임산부들과 어머니들은 미세먼지, 날씨, 온도 등에 굉장히 예민할 수밖에 없거든요. 그래서 그런 것들도 꼼꼼히 확인해야 해요.”
컨벤션 기획 일을 하면서 보람차거나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는지 물었다.
"보람찰 때는 제가 진행요원일을 할때는 느끼지 못했던 건데요. 전시장 셋팅할 때 맨바닥에서 시작해요. 하루, 이틀만에 장치물이 셋팅되죠. 바닥재가깔리고, 그 다음날 전시에 참여하는 업체의 물건이 들어와요. 그게 단 2일 만에 뚝딱 이뤄지죠. 관람객들이 전시를 다 하고, 전시의 마지막 날 당일에 모든 참가기업사와 장치사가 철수를 해요. 그때 바닥이 정말 더럽거든요. 대부분 이사갈 때 필요 없는것들은 다 버리고 가잖아요. 그런 것처럼 정말 철거를 한 전시장 바닥이 지저분하거든요. 저는 그걸 매 전시때마다 사진을 찍어둬요. 하기 전에 제일 깨끗한 공간, 하고 나서 제일 더러웠던 공간. 그게 기분이 되게 오묘하더라고요. 뭔가 뿌듯하고, 개운해요. 아무 탈 없이 사흘동안 잘 했을때요. 더 기분이 좋을땐 참가했던 기업사들이 수고했다고, 다음에도 같이해보자고 말할때에요. 이렇게 얘기할 때 우리가 준비한 전시에 만족하고 갔구나 싶어서 행복해요.”
마치 그때의 기억을 생생하게 떠올리듯 백진슬 님의 얼굴엔 미소가 지어졌다. 자기 노동에 대한 가치와 보람, 자부심을 느낀다는 건 그렇게 소중하고 아름다운 일이란 걸 백진슬 님과의 인터뷰를 통해 새삼 깨닫게 됐다. 물론 좋은 일만 있는 건 아니다. 졸업까지 한 학기를 앞두고 입사한 회사에서 20대 초년생이 일하기란 쉽지 않았다. 특히 진행요원들과의 오해가 불거져 마음 고생 했던 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마음이 아프고, 속상하다고 했다. 그때 어린 나이의 여성이어서 더 고생했단 생각이 한편으로 들었다고 했다.
“저희 어머니도 저에게 하신 말이 날이 갈수록 화장이 진해진다고요. 그런데 저에겐 불가피한 일이기도 해요. 뭔가 그렇게 조금 더 선명하게, 또렷한 인상을 줘야 할 것 같아서 화장도 화려하게 하게 돼요. 머리도 원래 길었는데 짧게 잘랐어요. 물론 지금 제 머리가 저는 마음에 들어요. (웃음) 사람을 대하는 게 되게 어렵더라고요.”
그에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컨벤션 기획 노동을 하는 노동자들이 행복한 일터가 어떤 풍경이었으면 하는지 물었다.
“많은 분이 컨벤션 기획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세요. 대학에서도 컨벤션 학과가 사라지고 있거든요. 문화예술경영, 관광경영으로 통합되고 있는데 개설되는 수업을 보면 프랜차이즈, 외식 이런 쪽이에요. 벽이 높게 느껴질 수 있지만, 현장에 와서 다시배워야 하거든요. 현장만의 용어가 있고 그렇게 움직여요. 모든 일은 배우는 거니까요. 사실 저는 지금 일에 만족하는 편인데, 후임이 들어오면 저도 동등하게 대하고 싶어요. 아까 말한 것처럼 팀원들 간의 분위기가 좋아야 노동자들도 즐겁게 일 할 수 있거든요. 더러 야근도 많이 시키고, 막무가내 스타일인 회사도 있을거에요. 그런 사람들 혹은 회사의 분위기 때문에 고생하는 선배들도 봤구요. 모든 회사에서 사람이 사람답게 대우 받아야해요. 그리고 본인을 아껴줘야 하고요. 그러기 위해선 일에만 매이도록 하는 장시간 노동이 아니라, 자기를 위한 시간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자기를 돌볼 시간이요.“
당당하게 자기 노동에 자부심을 느끼고 앞으로 나아가는 백진슬 님이 순간 반짝이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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