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시간 에세이] 일과 개인적 삶의 균형을 위해 /2016.10

일과 개인적 삶의 균형을 위해

 

 

 

송한수 직업환경의학 전문의, 조선대 직업환경의학 교수

 

 


1. 일과 개인적 삶의 갈등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결국 ‘역할’을 갖는 것이다. ‘역할’은 어떤 책임을 부여받는 것이며, 살아가는 방식이기도 하다. 사람은 나이에 따라 새로운 역할을 부여받는다. 자녀이면서 학생이기도 한 청소년기를 거쳐, 성인이 되어 남편 또는 아내이기도 하고 엄마 또는 아빠가 될 수 있다. 직장에서는 구성원으로서 어떤 업무를 책임진다. 친구의 역할도 소중하고, 할아버지 또는 할머니의 역할도 갖게 될 수 있다. 우리는 인생에서 맞이하는 새로운 역할들을 잘 해내기 위해 노력하고 그 과정에서 성장한다. 감당해야 할 다양한 역할들은 성장 속에서 균형과 조화를 찾아가지만, 때로는 충돌하거나 갈등을 일으킬 때도 있다. 이 글은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사례인 일과 개인적인 삶, 또는 일과 가정 사이의 갈등에 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여기 두 가지 질문이 있다. 첫 번째 질문은 다음과 같다. ‘당신은 직장에서의 역할 때문에, 가정에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기 어려운 상황이 얼마나 자주 있습니까?’ 당신은 이 질문에 어떤 상황을 떠올렸나? 몇 가지 예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A씨는 직장에서 상사의 부탁으로 어떤 일을 오늘 내로 완결지어야 했다. 이 일은 회사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라, 결국 정시 퇴근을 포기하고 회사에 남았다.
B씨는 회사를 옮기기 전까지 퇴근 후 정기적으로 배드민턴 동호회 활동을 했다. 새 직장은 이전 직장보다 급여는 더 높았다. 그러나 퇴근이 늦어지는 경우가 빈번했다. 결국, 불규칙한 연장근무로 퇴근 이후의 시간이 안정적이지 못하여 동호회 활동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C씨는 자동차 공장의 조립공정에서 일하고 있다. 어깨와 팔을 반복적으로 움직이는 근골격계 부담 작업을 수행한다. 최근에 공정이 변경되어 어깨 부담이 가중되면서 통증이 생기기 시작했다. 퇴근 후 통증 때문에 집에서 아무 일도 하지 못했고, 병원에 가야 했다.
D씨는 올해 다른 지역으로 발령을 받았다. 자녀의 교육문제로 가족이 함께 이사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 D씨는 회사 근처의 원룸을 구해 혼자 생활하고 있다. 그는 가족과의 단절로 인해 고립감을 느끼고 있다. 퇴근 후의 시간은 주로 비슷한 처지의 동료들과 술을 마시면서 보내고 있다.

어떤 경우는 A씨처럼 역할의 갈등이 일시적일 수 있다. 그러나 직장에서의 역할로 인해 개인적 삶은 지속적으로 또는 크게 방해받을 수 있다. 당신은 어떠한가?

 

두 번째 질문은 다음과 같다. ‘당신은 가정에서의 역할 때문에, 직장에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기 어려운 상황이 얼마나 자주 있습니까?’ 당신은 이 질문에 대해 어떤 상황을 떠올렸나? 예를 들어 보자면 다음과 같다.

E씨는 맞벌이 부부의 직장맘이다. 남편보다 출근이 늦어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는 일을 맡고 있다. 어느 날 아침, 아이가 감기에 걸렸다. 유치원에 보낼 수 없는 상황이고 부탁할 사람도 없다. 그래서 아이를 병원에 데려가느라 늦게 출근하게 되었다.
F씨는 입시를 앞둔 자녀가 있다. 다른 사람들은 수십만 원의 입시컨설팅을 받는다고 하지만 F씨는 그럴 형편이 못되었다. 그래서 업무시간 중 입시 관련 정보를 찾기 위해 웹서핑을 하는 시간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G씨는 임신 8개월 직장맘이다. 원래 교대근무를 하고 있었는데, 임신 이후 야간근무는 하지 않고 있다. 최근에 배가 무거워지면서 예전처럼 활발하게 일을 하기 어려워졌고, 동료들에게 자신의 업무를 부탁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 경우도 F씨처럼 역할의 갈등이 일시적일 수도 있다. 하지만 가정에서의 역할 때문에 직장의 역할이 방해받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역할의 갈등은 남성보다 여성들이 크게 느낄 것이다. 당신은 어떠한가?

 

 

2. 개인적인 삶의 가치
‘일이 중요한가? 개인적인 삶이 중요한가?’ 만약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당신은 주로 어느 쪽을 선택하게 되는가? 개인적인 삶의 가치는 일의 가치보다 낮게 평가되는 경향이 있다. 일은 직장 공동체가 공동으로 가치를 만들어 내기 때문에 더 크게 느껴질 수 있다. 황우석 박사가 말해서 유명해진 ‘월화수목금금금’에 대해 생각해보자. 줄기세포 연구로 불치병 환자들에게 새로운 삶을 선사하는 일은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가? 그래서 연구 성과를 앞당기는 것과 주말의 개인적 삶 중에, 전자가 선택되었고 후자는 희생되었다. 또한, 이러한 결정은 책임자가 주도하는 경우가 많지만, 당사자 스스로 선택하기도 한다. 왜냐면 일의 가치는 나의 삶의 중요한 가치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인적 삶의 가치에 대해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일은 삶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지만, 나의 전부는 아니다. 누구나 일 이외의 개인적 삶이 있다. 그리고 개인적 삶 중에서 상당한 시간은 가족과 함께 보낸다. 예를 들어, 가족과 함께 식사하고, 쇼핑한다. 자녀가 어떤 학원에 갈지 결정하거나, 다음 주 부모님 생신 때 무엇을 할지 이야기한다. 가족이라는 단위를 통해 미래의 사회구성원을 교육하고, 성장시키고, 돌본다. 그리고 노동자들에게 다음 날 다시 일하기 위한 휴식과 수면의 공간을 제공한다. 이러한 기능은 물질적 요소뿐만 아니라, 성장 과정의 갈등과 어려움을 나누고 상호지지해주는 심리적 요소를 포함한다. 따라서 가족은 한 사회를 재생산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너무나 일상적이고 소소한 개인적인 삶은 마치 물이나 공기와 같아서 평소에는 소중함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다가 이러한 평화가 갑자기 사라져버렸을 때,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

 


3. 일과 개인적 삶의 균형에 찾아온 변화
개인적 삶의 가치가 하찮게 여겨지고 일의 가치만 중요하게 여겨서, 삶 대부분을 일로 보내는 현상을 흔히 일 중독(workaholism)이라고 한다. 우리나라는 일 중독의 경향이 사회적으로 지지가 되고 있는 사회다. 이 경향은 전체주의, 장시간 노동, 남성생계부양자 모델이라는 토대 위에서 강화됐다. 전체주의는 전체를 위하는 것이 개인을 위하는 것이고, 전체를 위한 개인의 희생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인다. 장시간 노동은 주변국의 자본(capital)이 최대의 이윤을 얻는 방법이다. 남성생계부양자 모델은 고정된 성 역할에 근거하여 남성이 생계부양자로 가계수입을 책임지고, 여성은 가정에서 재생산을 담당하는 모델이다. 이는 남성이 가정에서의 역할을 포기하는 것에 알리바이를 제공해주면서, 여성이 남성보다 낮은 임금을 받게 만드는 근거가 된다. 그러나 상황은 달라지고 있다. 전체주의는 민주화를 통해, 장시간 노동은 노동시간 단축을 통해, 남성생계부양자 모델은 여성의 사회적 진출을 통해 도전받고 있다.

이러한 역동적인 변화 속에서 우리는 일과 개인적 삶의 균형을 어떻게 찾아가고 있을까? 한 가지 사례를 이야기해보자. 국내의 모 완성차 제조사는 주야교대근무제에서 주간연속 2교대제로 전환했고, 모기업의 변화에 맞추어 하청회사들도 비슷하게 교대제를 전환하여 수십만 명의 노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이 변화의 핵심은 심야시간대의 노동시간을 줄이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노사 간의 협상이 있었고, 노동조합 내부에서도 의견대립이 있었다. 사업주는 생산성의 하락을 우려했으며. 조합원들은 노동강도의 강화나 임금삭감에 대해 우려했다. 결국, 이 제도는 합의를 이루어 시행되었다.

이후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여가의 증가와 수면 문제의 개선이었다. 여가의 증가는 가족과 보낼 수 있는 더 많은 시간, 나를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더 많은 시간을 의미했다. 제도 시행 전후를 분석한 연구에서 앞서 이야기했던 ‘직장의 역할로 인한 가정 역할의 방해’가 크게 완화되었고, 이 때문에 노동자들의 정신건강 수준이 크게 향상되었음이 확인되었다. 반면에 이혼율이 증가하거나, 가족 간의 갈등이 심해지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새롭게 생긴 시간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경우도 있었다. 토대가 달라지면 큰 변화가 생기지만, 그 변화가 올바른 방향으로 전환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측면에서의 노력이 필요한 것 같다.

 

 

4. 일과 개인적 삶의 균형을 어떻게 지원할 것인가?
종합병원 간호사들의 ‘임신순번제’가 사회적 논란이 되었다. 여성이 다수인 종합병원의 간호사 중 여러명이 같은 시기에 출산휴가를 가면 인력 공백이 발생한다. 이는 모든 종합병원이 공통으로 겪는 문제다.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만약 중간관리자들이 전체주의적인 사고를 하고 있었다면, 전체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인권적 가치를 무시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병원만의 일일까? 많은 여성이 회사를 선택하는 대신 결혼 또는 출산을 포기하거나, 회사를 포기하고 출산과 육아를 선택한다. 상황은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생계임금에 미치지 못하는 최저임금과 초과노동 임금할증제도로 인해, 주 40시간만으로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운 저소득 노동자들은 자발적으로 장시간노동이나 야간노동을 선택한다. 그래서 노동시간의 단축을 시도하면, 장시간 저임금 노동자에게 임금하락이라는 역설적인 상황이 초래된다. 장시간 노동은 ‘일을 위해 개인적 삶의 상당 부분을 포기한 삶’이라는 사실을 전제에 놓지 않으면 문제 해결이 어려워진다.

일과 개인적 삶의 균형은 인간의 보편적 권리이며, 임금, 노동시간, 노동 건강, 복지를 아우르는 상위개념이다. ‘출산율을 높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인간다운 삶을 위해 임금을 인상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사회적 의제를 생각할 때 ‘일과 개인적 삶의 균형’은 먼저 고려되어야 한다. 과거에는 직장을 위해 개인의 삶을 희생시키는 것을 당연시했다면, 이제는 개인의 삶을 위해 직장과 사회가 더 많은 기여와 지원을 해야 한다는 인식이 퍼지고 있다.

래서 우리는 ‘일과 개인의 삶이 조화를 이루는 사회’라는 지향을 좀 더 분명하게 밝힐 필요가 있다. 이런 변화가 어려워 보이는가? 이미 현대사회는 사회보장제도를 통해 재생산영역의 지원을 공적 의무로 이양하고 있다. 더 많은 공적 육아, 공적 교육, 공적보건의료제도를 만들어가고 있다. 남성생계부양자 모델이 해체되면서 남성이 육아와 가사노동을 담당하는 비중도 증가하고 있다. 몇 해 전부터 남성이 육아휴직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는데, 벌써 여성 육아 휴직자의 10%에 근접하고 있다. 미래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그려보자. 직장에서 무재해나 안전제일과 같은 표어처럼 이제는 ‘가정 친화적 직장’이라는 의제 하에 정시퇴근, 모성보호, 가정지원이라는 표어를 확산시키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거스를 수 없다. 그러나 그 변화를 앞당기고 성공적으로 정착시키기 위해 의식적 변화를 촉진할 수 있는 자원(resource)도 필요하다. 과거의 관념은 관성처럼 남아 있어, 직장인 여성에게 가사노동의 의무를 지우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남성들이 여전히 있기 마련이다. 가족과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더 많아졌음에도 자녀와의 대화가 어려워서 상황이 더 악화할 수도 있다. 그래서 페미니즘교육이나 부모학교와 같은 프로그램이 더 필요하다. 무엇보다 자신을 돌보고, 일과 삶의 균형을 위해 스스로 성찰하고 성장할 수 있는 마음 교육이 모든 직장인에게 일반화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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