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리포트] 출판산업 내 숨은 노동 일러두기 / 2019.09

출판산업 내 숨은 노동 일러두기

- 2018 출판산업 여성노동 실태조사

전국언론노동조합 출판노조협의회 여성위원회


출판산업은 여성노동자들이 전체 노동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지만, 이들은 결코 여성 친화적이라 할 수 없는 노동 환경에 놓여 있다. 가부장적인 작업장 문화 아래 여성 출판노동자는 일상적인 차별적 경험을 토로하고 있으며, 과도한 노동과 가사노동의 이중 부담에 언제든지 노출되어 있고, 여성의 생애주기와 무관한 노동 관행 때문에 ‘경력단절’을 반복하고 있다. 특히 출판계 내부에서 날로 심해지는 노동의 외주화·비정규직화 추세는 임신과 출산이라는 생애사적 사건을 교묘히 이용해 여성노동자의 일할 권리를 심각하게 위협하고있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 낮은 노조 조직률과 소규모 사업장으로 파편화된 노동 환경 등으로 인해 출판업에 종사하는 여성노동자의 목소리는 아직 공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여성 출판노동자는 작업장에서 어떤 일들을 겪고 있는가? 일상생활에서는 또 어떤 삶을 경험하고 있는가? 여성 출판노동자는 노동, 가족, 일상 영역에서 어떤 생각과 욕구, 전망을 갖고 있는가? 특히 외주노동의 형태로 출판에 종사하는 여성노동자의 경우에는 이런 사정이 더욱더 장막에 가려져 있다.

이런 맥락에서 2018 출판산업 여성노동 실태조사를 요약한 『숨은 노동 일러두기』는 출판산업에 종사하는 여성노동자의 노동세계와 생활세계에 관한 광범위한 기초 조사를 목표로 여성노동자들이 처한 구체적인 노동조건을 살피고 미조직 노동자들의 욕구를 파악하고, 노동 생활과 일상 생활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에 초점을 맞추었다. 본 조사는 출판노동조합 산하 여성위원회의 제안으로, 연구자와 노동조합 활동가들이 조사에서 집필까지 전체 과정을 공동으로 실시했으며 전체 조사 기간은 2015년 7월부터 2017년 12월까지이고, 연구 참여자(조사 대상)는 서울경기 지역에 거주하는 전현직 재직노동자(정규직, 비정규직)와 외주노동자를 포괄한다.

1. 산업적·노동적 측면

1) ‘영세 사업장’이라는 면죄부

출판진흥원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실태조사에 응답한 3,606개의 사업장 중 2,761개의 사업장이 1∼4인 규모를 보인다. 이는 표본 중 76.6%의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상당수 출판 사업장이 규모 면에서 ‘영세’한 사업장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편, 매출 측면에서는 서적과 교과서/학습지를 출간하는 출판사들―기성의 ‘출판업’ 의미에 부합하는―의 2014년 매출 규모는 약 4조 207억 원이었다. 전체 콘텐츠산업 매출액인 94조 9,472억 원을 고려해 보았을 때, 이는 그리 높은 수치라고는 볼수 없다. 또한 콘텐츠의 다변화에 따라, 전통적인 의미의 출판시장은 점차 위축되고 있기도 하다. 이처럼 규모와 매출 면에서 출판산업은 ‘영세’하다고 보인다. 또한, 이와 같은 산업의 ‘영세성’이 노동조건을 악화시키고 있다고 짐작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영세성이 모든 면에서 ‘면죄부’로 작용할 수 있을까?

근로기준법은 “상시 5명 이상의 노동자를 사용하는 모든 사업 또는 사업장에 적용”된다고 규정하는 동시에, 상시 4명 이하의 노동자를 사용하는 사업 또는 사업장에 대해서 일부 규정을 적용할 것 역시 정하고 있다. 얼핏 보면 4인 이하의 노동자를 고용하는 사업장들이 법의 적용을 피해 갈 여지가 많아 보이지만, 그 상세를 살펴보면 몇몇 규정을 제외하고 중요한 조문은 대부분 적용됨을 알 수 있다. 예컨대 근로계약서의 작성 및 교부, 해고의 예고, 산전후 휴가의 지급 등이 그러하다.

일부 참여자들은 ‘근로계약서 작성 유무’를 묻는 질문에, ‘5~10인 규모의 작은 사업장이라 작성하지 않아도 무방했다’고 답하기도 했다. 하지만 현행법상 근로계약서는 규모 여하를 막론하고 반드시 작성하고 교부해야 한다. 한편, 근로계약서 같은 기본적인 것들이 잘 감시되고 관리되는 것만으로는 부족할 것이다. 과도한 노동을 방지하고, 연차휴가의 제공을 보장하는 등 삶의 질을 높이는 데 필수적인 규정들이 현재 5인 미만의 사업장과 비정규직에게는 적용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부당해고로부터의 보호 규정 역시 마찬가지이다.

최근 들어 사업의 위험 부담과 노무 부담을 줄이기 위해, 별도의 (5인 미만) 자회사와 계열사를 만들어 관리하는 대형출판사들이 늘어가고 있다. 이 자회사들은 기대 매출에 부응하면 살아남고, 그렇지 않으면 ‘정리’된다. 본사의 경영주들과 ‘월급사장’인 자회사의 대표는 위험 부담을 줄이는 전략이겠지만, 노동자들의 입장에서는 위험 부담과 열악한 노동조건을 감내해야 한다. 이러한 분사 경영 전략은 비단 출판계에서만 벌어지고 있는 문제는 아니다. 교묘한 방식으로 노동을 통제하고 수익을 높이려는 이러한 전략으로 인해 피해를 보고 있는 노동자들을 포괄하여 보호할 수 있는 법제의 구축이 시급하다.

2) 저임금·장시간 노동을 방조하는 시스템

많은 출판노동자가 ‘체계 없음’을 출판업계 시스템의 특징으로 꼽았다. 규모가 작고 체계가 갖추어지지 않은 사업장에서 노동자들은 제대로 된 실무 교육을받을 시간 없이 곧바로 업무에 투입된다. 개별 노동자들이 ‘알아서’ 업무 방법을 습득하고 익혀야 하는 이러한 시스템은 정해진 노동시간을 초과해 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초래한다.

신간의 매출에 상당 부분 기대는 수익 구조는 ‘좀 더 빠르게’ 책을 만들어 내라고 요구하고, 매월 혹은 격월로 찾아오는 마감을 수행하기 위해 야근은 “어쩔수 없는” 것이 된다. 이렇게 장시간 노동이 자연스럽게 일상이 되어 가는 것이다. 많은 출판사에서 생산성 향상을 위해, 다른 어떤 방법보다도 초과노동(그리고 노동에서의 비용 절감)에 기대고 있다. 그저 회사의 고정인원들이 좀 더 많은 양의 일을, 좀 더 빨리 끝내주길 바라는 것은 사실상 ‘경영의 부재’를 방증할 뿐이다.

본 실태조사에서 저임금 장시간 노동 관행은 노동자들의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주요한 요인으로 지목 되었다. 저임금 장시간 노동은 더욱 더 질 높은 여가를 영위할 수 있는 물리적인 조건 자체가 불가능하게끔 만든다. 특히 양육을 하고 있거나 통근에 걸리는 시간이 긴 여성노동자들의 경우, ‘시간 빈곤’의 정도는 더욱 심했다. 퇴근하더라도 업무에 대한 생각으로 인해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경우도 상당했다.

운동하거나 몸을 챙길 시간이 부족하여 근골격계 질환을 비롯한 각종 질병을 초래하고, 심한 경우 우울증과 ‘번아웃’을 동반하기도 한다. 마감을 바로 앞두고 있을 때에만 한시적으로 초과노동이 이루어진다고 추측해 보아도, 1~2달에 한번씩 ‘밀어내기식’ 마감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이러한 업무와 조직문화의 특성이 야근을 조장하기도 하지만, ‘야근을 부담 없이 시켜도’ 되게끔 방조하는 제도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바로 출판계에 널리 퍼져 있는 ‘포괄임금제’라는 임금계약 구조 때문이다. 포괄임금제는 말 그대로 “연장·야간근로 등 시간외근로 등에 대한 수당을 급여에 포함해 일괄지급하는 임금제도”이다. 법적으로 문제없이 야근을 시켜도 되기에, 인원을 충원하지 않고 초과노동으로 인력의 부족을 해소할 수 있다. 일부 규모가 큰 기업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이 출판사업체들이 이러한 임금계약 제도를 택하고 있다. 

초과근로 수당 지급의 대상이 되는 5인 이상 사업장들 역시 이러한 임금계약으로 인해 사실상 5인 미만 사업장과 마찬가지의 상황에 놓인 것이다. 출판업계의 노동이 ‘포괄임금제’의 성격에 해당하는 노동인지부터 다시 따져 보고, 정당한 초과근로 수당을 지급하거나 혹은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야근을 줄여 가는 방향으로 노동 관행을 개선해 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출판계에 만연한 ‘포괄임금제’의 정당성을 묻고, 이에 대한 공론화를 기대해 본다.

3) 외주노동의 조건 개선

외주출판노동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전체 응답자의 77.2%가 여성이었다. 더 많은 표본을 조사할 경우 약간의 차이가 발생할 수는 있겠지만, 이는 어느 정도 실제의 비율을 반영하고 있으리라 생각된다. 한편, 재직자를 중심으로 조사한 출판진흥원 실태조사의 ‘출판사업체 종사자 규모’ 항목에 따르면 남성 종사자는 48.9%(14,455명), 여성 종사자는 51.1%(15,124명)로 추산된다. 표본의 범위는 다르지만 이 두 자료를 놓고 보았을 때, 재직노동자의 성별 구성과 외주노동자의 성별 구성에는 큰 차이가 존재한다. 조건이 불안정한 외주 부문에 더 많은 여성들이 종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성별화는 사회 전반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비정규직의 여성화’와 밀접해 보인다.

외주실태 보고서와 이번 조사 모두에서 공통으로 외주노동을 시작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출산과 육아라는 점이 드러났다(외주실태 보고서에서는 직군별로 그 계기가 달리 나타났는데, 재직 경험이 있는 노동자의 경우, 출산과 육아가 결정적인 계기였다). 특정 부문의 ‘여성화’ 현상은 ①여성이 내부 노동시장으로부터 밀려나기 쉽도록 산업이 구조화되어 있다는 것, ②그리고 해당 노동이 ‘여성이 하기에 적합한일’이라고 인식될수록 이들의 노동조건은 고착되고 더욱 열악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시사한다. 실제로 외주 계약 조건은 십수 년째 답보 상태이며, 작업비가 체불되는 사례도 적지 않다.

‘외주실태 조사’ 당시, 작업단가의 책정 기준을 묻는 질문(중복답변 가능)에 ‘출판사의 관행’(287건)이라는 답이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뒤이어 ‘작업의 난이도’(200건), ‘작업에 들이는 시간’(115건), ‘기존 작업 경력’(112건)의 순으로 답변이 이어졌다. 흥미로운 사실은 ‘잘 모르겠다’는 답변도 45건에 달했다는 것이다. 이 같은 답변을 통해 유추컨대, 근거가 빈약한 기준과 관행에 따라 단가가 정해지고 있으며, 기존 작업 경력을 반영하는 사례도 많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외주자들의 노동은 ‘숙련 노동’으로 인식되고 있지 않은 것이다.

또, 주변의 외주자들이 어느 정도의 작업비를 받고 있는지 알기 어렵다는 점은 이들의 협상력을 저하시키고 있다. 본 보고서에서는 현실을 반영한 표준 단가표와 표준화된 계약서의 마련을 제안하려 한다. 외주자들은 개별적인 협상 혹은 노사 집단의 협상이 어려운 상황이기에, 공개 토론회 등을 통해 현실성 있는 단가 기준을 마련하고, 노사 양자가 참고해서 볼 수 있도록 ‘표준단가표’를 마련할 필요가 있겠다. 표준화된 계약서에는 현실성 있는 작업 기간과 작업비 지급 일정 등을 명시하여야 할 것이다.

2. 성평등적 측면

1) 출판노동 = 특히 여성에겐 ‘불안정 노동’

출판업은 흔히 여성들이 많은 직종으로 여겨지고있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출판진흥원 실태조사’의 ‘출판사업체 종사자 규모’ 항목에 따르면 남성 종사자는 48.9%, 여성 종사자는 51.1%로 추산되고 있다. 이는 통념과는 모순된 결과이다. 여기에는 몇 가지 고려해야 할 사항이 존재한다.

첫째, 남성의 경우 전체 대비 2.3%, 여성의 경우 전체 대비 3.1%의 비정규직 비율을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 해당 조사가 외주 종사자의 규모를 측정해 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보고서의 필진들 역시 “산업 특성상 종사자 수에 포함되지 않는 아웃소싱의 비중 또한 매우 높기 때문에, 통계 수치상 집계되는 상근 종사자 수 외에 실제 출판산업에 관여하는 종사자는 훨씬 많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77쪽)는 점을 짚고 있었다. 2012년에 발표된 ‘외주실태 보고서’에서 여성 응답자는 전체의 77.2%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전수(全數)를 파악한 것은 아니지만 외주의 성별화가 얼마나 불균형하게 진행되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데는 무리가 없을 것이다.

남성 노동자들 역시 ‘권고사직을 가장한 해고’의 위협과 열악한 노동조건에 놓여 있기는 매한가지이다. 하지만 여성노동자들은 결혼, 출산, 육아라는 경험을 맞닥뜨리면서(혹은 당장 결혼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을 존재라고 가정되면서), 더욱 불안정한 고용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

체크리스트에 ‘출산휴가’ 및 ‘육아휴직’ 적용 여부에 체크를 하기는 했지만, 실제로 회사에서 육아휴직을 사용하는 경우를 보지 못했다거나, 육아휴직 제공을 둘러싼 문제로 갈등을 벌이다 퇴사로 이어지는 경우를 본 참여자도 있었다. 실제 육아를 하고 있는 참여자 중에는 본인 역시 경영주의 입장과 노동자의 입장 사이에서 내적 갈등을 겪고 있다고 답한 경우도 있었다. 규모가 작은 사업체에서는 노동자 1인이 맡는 업무의 범위가 광범위하고, 이로 인해 대체인력을 가용하는 것에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었다.

출산 관련 제도에 따라 마땅히 수행되어야 할 일련의 일들은 ‘회사가 감당해야 할 비용 내지는 손해’로 여겨졌다. 공기업, 공공기관, 그리고 최근에는 대기업에 이르기까지 육아휴직을 활용하는 종사자가 늘고 있다고는 하지만, 규모가 작은 사업장의 경우에는 언감생심인 일이다. 앞서 말했듯 작은 규모의 사업장에 재직 중인 노동자들은 임금이나 각종 복리후생 면에서 열악한 노동조건을 감내하는 동시에, 법적/제도적인 면에서도 배제되기 쉽다. 기업의 복지와 사회적 복지 모두에서 배제됨으로써, 노동자 개인이 감당해야 하는 부담이 이중, 삼중으로 늘어나는 것이다. 소규모 사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 특히 여성노동자들에게 고루 제도적 혜택이 돌아갈 수 있도록, 규모가 영세한 사업체의 경우 지원의 규모를 대폭 키워야 할 것이다.

2) 차별을 어떻게 인식하는가?

사업장 안팎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형태의 차별이 노동을 지속하는 데에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지는 않은지에 대해서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하지만 실상은 여성노동자들 스스로 ‘차별’을 인식하는 것에 서부터 어려움이 있었다. ‘차별을 경험한 적이 있는지’를 묻는 질문에 대하여 ‘없다’고 답한 경우가 예상보다 많았던 것이다. 그런데도 인터뷰 전반에 걸쳐 들을 수 있었던 사례를 종합해 보았을 때, 직/간접적인 차별이라고 해석되는 경험들이 적지 않았다.

차별을 경험하고 있음에도 ‘차별’이라고 명시적으로 답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이러한 차별들이 간접적으로 경험되는 것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예컨대 참여자들은 (나이가 어린) 여성으로서 감당해야 하는 ‘감정노동’―손님이 왔을 때 차를 내가야 할지, 상사의 담배 심부름에 응해야 할지―에 어떤 이름을 붙여야 할지 혼란스러워하고 망설였다. 둘째, 차별을 직접 느낄 수 있는 몇몇지표의 경우, 투명하게 드러나지 않거나 다른 산업군과 다르게 의미화되어 있었다. 예컨대 임금의 경우, 노동자들 간에 임금 수준을 공유할 수 없기에 차별의 정도가 확인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또 다른 중요한 지표인 승진의 경우, 영세한 사업체 규모상 승진의 기회가 많지 않거나 승진의 의미가 크지 않기에 이와 관련하여 차별을 경험한 적이 있다고 느끼지 못할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셋째, 여성들이 많은 직군이기에 차별을 드물게 경험했다는 답변들도 있었다. 하지만 출판노동, 특히 출판외주노동의 열악한 노동 실태는 여성이 많이 진출해 있는 여러 직군들의 현실과 별반 다르지 않으며, 이를 넓은 의미에서 ‘차별’과 연결 지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 여성노동자들이 ‘차별’을 잘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스스로에 대한 낮은 평가, 혹은 낮은 집단자존감(collective self-esteem)의 영향일 수도 있다. 몇몇 연구는 소수자 집단이 가지고 있는 낮은 집단자존감이 차별을 알아차리는 데에 방해가 되며, 오히려 차별적 인식을 강화할 수도 있다는 점을 밝혔다. 부정적으로 인식되는 내집단(ingroup)으로부터 거리를 두려는 심적 기제가 발동하기에, 차별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차별의 원인을 (자신을 포함한) 개인에게 돌리는 것이다.

3) 성희롱/성폭력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는 권리는 곧 노동권의 일부

출산과 육아의 경험만이 여성노동자들의 노동권을 위협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사업장 안팎에서 벌어지는 성희롱/성폭력 경험은 여성노동자들을 위축시키고,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동반하며, 남성 동료들과 동등한 위치와 여건에서 일할 수 없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에 ‘성희롱/성폭력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는 권리’가 곧 노동권의 일부라는 명제를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성폭력은 직장 내의 성적/계급적 위계질서 위에서 이루어지는 폭력으로, 문제 제기의 어려움을 수반한다. 특히 직급이 낮거나 고용 형태가 불안정한 인턴·비정규직, 그리고 「남녀고용평등법」상 ‘사업장에 직접 고용된 노동자’ 규정에 속해 있지 않은 외주노동자의 경우, 더욱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다. 성폭력경험이 있음을 말한 참여자 8명 중 6명이 성폭력 가해자로 ‘남성 상급자’를 지목했다. 이는 성폭력 실태조사에서도 동일하게 드러난다. 업무와 관련하여 성폭력을 당한 적이 있다면, 가해자가 누구였는지 묻는 문항(복수 응답 가능)에 전체 응답자 166명 중 가장 많은 94명이 ‘직장 상사’를 꼽았으며, 67명이 ‘사업주’를 꼽았다(덧붙여 21명이 ‘직장 동료’를 꼽았다). 때문에 피해를 경험한 여성노동자들의 대다수가 그냥 넘기거나, 우회적인 방식으로 문제를 제기했다고 답했다. 문제를 제기한 경험이 있더라도, 어떤 공식화된 매뉴얼에 따라 처리되거나 만족스러운 결과는 없었다는 답이 많았다. 

성희롱에 대한 판단이 모호하거나, 사업장의 규모가 사실상 가해자와의 분리할 수 없다는 점 역시 문제 제기가 어렵게끔 하는 요인이다. 고용이 불안정한 비정규직, 외주자에게 ‘근무 장소 변경’ 내지 ‘배치전환’이란 ‘계약해지’를 의미한다. 그렇기에 이 같은 성희롱, 성폭력은 직장 내 위계관계에서 벌어지는 폭력일 뿐 아니라, ‘노동권의 침해’로서 이해되고대응되어야 할 것이다.

한편, 적절한 징계 및 사후조치의 권한이 사업주에게 맡겨 있다는 점은 사후 대처의 실효성을 담보하지 못하고 있다. 사업주가 성희롱/성폭력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노동자의 인권보다는 효율을 중시할 때, 책임은 피해자에게 손쉽게 전가될 수 있다. 사업주의 인식 고양과 대처의 실효성 담보를 위해 1차적으로는 예방교육 이수와 법적 제재가 수반되어야 하지만, 뒤에서 살펴볼 것처럼 사전예방의 노력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4) 사후 수습이 아닌 사전 예방

남녀고용평등법은 직장 내 성희롱 예방 교육을 의무화할 것을 명시해 두고 있지만, 이는 많은 출판사업장의 실정에 맞지 않고, 이를 이수하는 출판사업장도 거의 드물다. 10인 미만 사업장에서는 “근로자가 알 수 있도록 교육 자료 또는 홍보물을 게시하거나 배포하는 방법으로” 갈음이 가능하도록 예외를 두고 있는데, 2014년 기준 82.3%에 달하는 출판사업장이 10인 미만의 사업장이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교육 자료나 홍보물로 이를 대신한 적도 없는 경우도 많았다. 또한 재직 중인 노동자들이 대다수 여성이라는 점을 근거로 성희롱 예방 교육을 시행하지않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 같은 인식은 ‘성희롱’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고 있다. 성희롱은 다른 성별 간에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며, 직장 내뿐 아니라, 저역자, 거래처 관계자와의 관계에서도 이러한 폭력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

성폭력 사건 발생 시 이를 규탄하고 사후적으로 대응하는 것을 넘어, 법의 빈틈을 메우고 관련자들의 인식을 개선하기 위한 노조 차원의 노력이 필요하다. 앞서 살폈듯 성희롱, 성폭력은 고용인-피고용인의 관계뿐 아니라 저역자-노동자 간의 권력 관계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 저역자나 다양한 거래처 종사자를 대상으로 한 캠페인을 기획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한 출판사 저자의 경우, 판권면에 “이 책을짓고 만든 이들은 성차에 의해, 성정체성에 의해, 나이에 의해, 사회적 지위에 의해, 신체적 조건에 의해 발생하는 명시적, 암묵적 위계와 위계에 의한 폭력을 거부합니다”라는 문구를 넣어 줄 것을 계약조건으로 했다. ‘#문단_내_성폭력’에 연대하는 한 시인의 경우, 출판사와의 계약서에 “갑(작가)의 성폭력, 성희롱 그 밖의 성범죄 사실이 인지될 경우 을(출판사)은 계약을 해지할 수 있으며, 갑이 을로부터 성폭력, 성희롱 그 밖의 성적인 괴롭힘을 당한 경우 갑은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는 문장을 포함해 계약을 맺었다. 이러한 사례들 모두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차별과 폭력이 일어나서는 안 됨을 명시적으로 확인하고 서로 간에 당부하는 의미인 것이다. 저자 측에서 출판사에 이러한 요구를 할 수도, 반대로 출판사 측에서 저자에게 요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사례들을 좀 더 고안해 볼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3. 결론

본 조사는 실제 출판계에 종사 중인 출판노협 조합원들, 그리고 출판노조의 운동에 연구로서 연대한 사회학 연구자들이 함께 수행한 협동 작업으로서, 25명이라는 적지 않은 참여자들을 직접 인터뷰한 내용을 바탕으로 질적으로 연구하고 노동자 관점에서 서술한 첫 작업물이다. 연구자와 참여자가 분리되어 있지 않고, 그간 행정의 조사에서는 포착할 수 없었던 출판노동계의 세부 실태와 노동자들의 관점을 포착해 낸 연구로서 그 의의가 있다.

본 조사의 연구자들은 사실에 대한 분석과 제시에 그치지 않고, 행정과 노동조합 차원에서의 정책을 제언하고자 했다. 독자들이 출판노동의 실태를 더 내밀히 들여다보고 알아가는 동시에, 점진적 변화를 위한 주체로서 노동조합의 다양한 운동을 기획하고 이에 참여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또한 각 파트의 내용을 읽고 모여 공적으로 토론할 수 있는 다양한 장이 열리기를 기대한다. 이러한 토론이 본 조사에서 놓친 부분들을 보완하고 심화, 발전시켜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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