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평] 단결불패 /2015.9

 

 

특집 3. 분임조 활동으로 소중한 민주노조 지켜냈어요! - 갑을오토텍지회 조균형 조합원 인터뷰 /2015.9

분임조 활동으로 소중한 민주노조 지켜냈어요!!!
- 갑을오토텍지회 조균형 조합원 인터뷰

 

 

 

선전위원회

 

 

길고 힘들었지만 어느 때 보다 조합원 스스로 나섰던 이번 투쟁!! 싸움의 당사자였던 조합원들은 이번 투쟁 과정을 어떻게 기억할지 궁금했다. 지난 8월21일 갑을오토텍 지회 사무실에서 조합원 조균형 님을 만나 소회를 들었다. 조균형 님은 갑을오토텍에서 21년째 일하고 있는 노동자로 2005년에 대의원, 2010~2011년 노동조합 조사부장 활동을 한 적이 있다.

 

 

 

초반에 조합원들이 자발적으로 피켓 들고 일인 시위 하는 모습 보고 감동 받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첫 피켓팅한 3인 중 한 명이라고 들었다. 어떻게 행동에 나서게 되었나?

 

나는 그냥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 얹은 셈이다. 박종국 조합원이 제안했고 나랑 손찬희 조합원이 초기에 참여했다. 작년에 신규채용 60 명이 됐는데, 이 사람들이 문제가 있다는 제보가 2월부터 계속 됐다. 사실 기업노조 만들면서 복수노조 만들어서 노동조합 흔들려는 움직임은 2010년경부터 감지됐던게 있었기 때문에 조합에서 차분히 대응하는 편이었다. 초반에는 주로 외부에 이런 문제를 알리고, 정보를 모아나가는 일을 했다.

 

그러던 중 박종국 조합원이 조합원들이 먼저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냐는 제안을 한 거다. 작년 두원정공 투쟁 때 조합원들이 자발적으로 피켓팅했다는 얘기를 들었던 기억이 났다. 그 때 200일 투쟁했다고 했으니, 우리도 200일이라도 버티겠다는 생각이면 승리하지 않겠냐며 시작했다. 피켓팅 시작한 날, 정년이 얼마 안 남은 조합원 중 한 명, 늙은 노동자가 ‘나는 어차피 여기 떠나면 갑을하고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지만, 정년하기 전에 투쟁이라도 같이 할 수 있어서, 이 투쟁 같이 해서 후배들에게 노동조합이라도 지켜서 남겨주고 갈 수 있게 돼서 기쁘다’고 말했다. 지금도 그 때 생각하면 울컥해진다. 그 내용이 대자보로 붙고, 채팅방에서 공유됐다. 조합원들이 이런 얘기에 공감하고, 서로 감동받았던 것 같다. 3명으로 시작한 피켓팅이 8명, 20명 하다가 제일 많을 때 200명까지 늘었다. 처음에 간부들이 아침에 나오면, 우리가 오지 말라고 했다. 조합원들이 조합이 시켜서 하는 투쟁이라고 생각하지 않기를 바랐다. 진심으로 자발적으로, 마음이 동한 조합원들이 만들어간 투쟁이 됐다.

 

조합원들 사이에서 투쟁을 알리고, 동참을 이끌어 내는 데 SNS 등을 잘 활용한 것 같다

 

정말 SNS 활용을 잘 한 것 같다. 피켓팅 시작하면서 사람들 모아서 처음 단체 채팅방을 만들었는데, 점점 확대돼서 나중에는 거의 전 조합원이 참여하게 됐다. 초반에 피켓팅 사진도 올리고 하면서 서로 격려가 됐고, 사진이 계속 올라오니까 조합원들 사이에서 ‘오늘은 누가 참여했구나, 오늘은 누가 안 보이네’ 하는 얘기들이 되고, 안 나오는 사람에 대해 독려도 하게 됐다. 또 카톡 채팅방을 통해서는 토론도 많이 하게 돼서, 소통의 중요한 통로가 됐다. 무전기보다도 더 빠르게 상황 공유가 되더라. 조합원들이 토론도 했지만, 위안도 많이 받았던 것 같다. 사람들이 투쟁하는 동안 늘 교섭 속보를 그렇게 기다린다. 실제 내용이 궁금해서라기보다, 모르고 있는 상황이 불안한 거다. 평소에 눈 뜨고 살던 사람이 눈 감으면 불안한 거랑 같은 거다. 그런 불안감을 카톡 단체방이 덜어준 거 같다. 상황이 바로 공유되고, 그 상황에 대해 서로 얘기 할 수 있다는 것이.

 

중간에 낮 시간 투쟁이나 연대 활동에 2조(주간연속 2교대의 후반조)가 참여하는 과정도 카톡 단체방 토론을 통해 시작하게 됐다. 한 대의원이 ‘요즘 간부들이 밖으로 다니느라 바쁘다, 기자회견하고 외부 사람들한테 우리 상황 알리고 있다. 그 와중에 고용노동부, 경찰서 이런 데서 1인 시위 하고 있는데, 2조가 잠 조금 덜 자고 같이 하자’는 얘기를 카톡방에 올리고, 조합원들이 ‘그래, 좋다’하면서 시작된 거다.

 

가족대책위도 활동을 열심히 했는데, 대책위 외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가족들이 참여했던 것도 인상적이었다. 가족들 동참도 자발적으로 시작됐다고 들었다

 

피켓팅 시작하고 얼마 안 됐을 때, 딸이랑 얘기를 하게 됐다. 이러저러해서 아빠가 선전전 하느라 매일 새벽에 일찍 나가고, 주말마다 바쁜 거다 그랬더니 딸이 ‘피켓팅 나도 할까?’ 하고 먼저 얘기를 꺼냈다. 그래서 할 거면 피켓은 네가 예쁘게 만들어 와라 했다. 그랬더니 열심히 만들어서 어느 날 아침에 피켓팅을 같이 나갔다. 그 때쯤 피켓팅이 좀 뻔해지는 것 같았는데, 이벤트가 된 거다. 역시 또 사진 찍어서 올리고 그랬더니 조합원들 사이에서 얘깃거리가 되더라. 그러면서 다른 조합원 가족들도 여러모로 참여하게 됐다. 이 얘기를 했더니, 아들 녀석이 자기도 투쟁 기금으로 20만원을 보태겠다고 하더라. 딸도 자기랑 동갑인 다른 조합원 형님 딸이랑 돈을 모아서 밥버거를 400인분 사서 보내기도 했다. 그러면 또 다들 신기하고 재미있으니까 화제가 되고, 얘깃거리가 되고, 분위기가 살아나는 게 느껴졌다. 개인적으로도, 우리 가족들도 내가 하는 활동에 대해 막연하게만 알던 것을 이해하게 된 것 같아 좋다. 주말마다 나가고, 약속 많고, 저녁에 늦게 들어오는 것에 대해 부인이 불만을 갖기도 했는데, 이번 투쟁에 같이 참여하면서 나가서 무슨 일을 하는지 알고 이해하게 됐다고 한다. 그래도 우리 가족대책위들, 피부 관리해야 할 사람들인데 땡볕에 얼굴 벌개져서 투쟁하던 장면들은 지금 생각해도 안쓰럽기도 하고, 저 사람들까지 나오게 하다니 암울하다는 생각도 들고 그런다.

 

이런 아래로부터의 제안과 자발적인 분위기가 조합원들에게 활력을 줬고, 조합원 스스로 자기 투쟁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번 투쟁을 통해 느낀 게 조합원들에게 숨겨진 저력이 있었다는 것이다. 몇 년 전 노동조합 조사부장 할 때 조직 분석을 상당히 부정적으로 했었다. 복수노조 등 바람이 불면 훅 갈 수도 있겠다고 걱정도 했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우리가 몰랐던 조합원들의 저력이 있었던 것 같다. 그걸 끌어내는 계기와 모아내는 매개체가 필요했던 거다. 이번 투쟁 과정에서 정말 바닥으로부터 그런 힘이 올라왔던 것 같다.

 

이 과정에서 분임조 활동이 시작됐다. 다른 지회들도 분임조 활동은 꼭 하라고 말해주고 싶다. 우리도 몇 년 전부터 분임조 얘기를 했다. 확대간부들이나 실천단은 교육도 몇 차례 받았었다. 그런데 우리도 ‘좋긴 하지만, 그게 될까?’ 하는 생각으로, 현장내 구역별로 친목 모임 하는 정도였다. 그러던 중, 이번 투쟁이 자연스럽게 분임조 활동의 시발점이 된 거다.

 

분임조가 토론과 행동의 단위가 되면, 조합원들이 주체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지금 우리 분임조는 5명인데, 토론을 하면 누구든 한 마디씩 꼭 하게 돼 있다. 처음에는 쑥스러워하다가도, 자기 얘기를 하게된다. 불안한 마음, 반대 의견, 걱정되는 부분도 얘기가 나오게 되고, 서로 설득하고 합의하는 과정이된다. 또 같이 결정한 내용은 ‘나는 빠져도 되겠지’하는 생각을 못 하고 꼭 같이 지키게 된다. ‘전 조합원 모여라’ 하면 400명이니까, 나 한 명 빠져도 되겠지 싶은데, 분임조마다 5명씩 연락을 돌리니까 내가 빠지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기업노조 만들어 나간 사람은 우리 분임조 활동보고 ‘5호 담당제’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한다. 우리도 분임조 활동이 이제 시작된 거고, 정착된 것은 아니다. 분임조마다 활동 방식도 다양하고, 아직 운영이 서툰 조도 있다. 하지만 무슨 일이든 처음부터 다 잘 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우리 조합에서 잘 될까?’ 이런 생각하지 말고, 망설이지 말고 시도해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분임조 활동을 통해 노동조합 내적으로 조직력이 강화되고, 조합원들의 자발성과 참여도가 높아진 것이 이번 투쟁의 가장 중요한 의미 중 하나라고 보기 때문이다.

 

갑을 조합원들이 이렇게 잘 싸울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사실 우리가 몇 년 전부터 ‘자판기 노조’ 탈피하자는 얘기를 많이 했다. 조합원들이 간부들에게 ‘이 문제 해결해줘’하는 것을 안 했다. 구역 내에서 발생한 문제는 구역 내에서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우리 구역에서는 몇 년 전에, 조합원들 근무 태도 가지고 시비 걸고 인격적으로 모독하는 생산과장을, 조합원들이 항의하고 현장 투쟁 벌여서 바꿔내기도 했다. 이런 경험이 훈련이 돼 있다가, 죽기 살기로 투쟁해야 하는 시점이 되니까 터져 나온 것 같다. 조합이 시키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간부들이 하는 일이 아니라 내 투쟁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본격적인 싸움만 해도 2달이 넘고, 분위기가 뒤숭숭할 때부터 치면 거의 6개월이다. 지치거나 힘든 때도 있었을 텐데 피켓팅 처음 시작한 게 4월 8일이었으니, 4달 정도를 정신없이 지냈다. 사실 그 동안은 지치거나 힘들다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지나간 것 같다. 그 사이에는 개인 생활이라는 게 거의 없었을 정도였다. 물론 투쟁하는 동안 나도 겁났고 무서웠다. 평생 사람들이랑 싸울 일 없이 살아왔는데, 웬 깡패 같은 사람들이 현장에 들어와 돌아다니니, 무섭기도 하고 스트레스 많이 받았다. 이런 얘기도 조합원들하고 많이 했는데, 얘기하다보면 다들 똑같이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면서 위안도 받고, 다시 힘낼 수 있었던 것 같다.

 

8월 들어 현대차에 공급할 물량이 정말 부족하다는 얘기가 나오고 관리직에서 직접 기계 돌리겠다고 할 때 나도 불안했다. 그래도 돌아보면, 우리가 처음 이 싸움을 시작할 때 이 싸움에서 진다면 죽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절박함이 있어서 조합원들도 스스로 투쟁에 나섰던 거다. 그렇게 치면 싸우다 져도 죽는 거지만, 물량 때문에 지금 그만두면 그냥 죽는 거 아니냐는 얘기를 많이 했다. 그런 마음을 조합원들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잘 싸울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때, 조합도 대처를 참 잘 했다. 사무직 투입해서 기계 돌리겠다고 했을 때, ‘그럼 너네들 특별안전교육은 받았냐?’고 던지고 노동부에 고발하면서 충돌이 더 진행되지 않도록 하면서 막바지 투쟁이 잘 될 수 있었다.

 

복수노조를 등에 업고 민주노조 탄압하는 경우도 많고, 민주노조 패배 소식도 많았는데, 이번에 갑을이 긴 싸움을 승리로 마무리하게 되어 의미가 크다. 조합원 입장에서 가장 중요 하게 생각되는 의미는 어떤 것인가?

 

제일 큰 것은 노조파괴 시도에 대항해서 승리했다는 점이다. 아직도 용역들 일부는 기숙사에 남아 있고, 다 정리된 것은 아니지만. 노조파괴 시도는 노동계가 전국적으로 직면한 문제인데, 여기에 우리 투쟁이 반전의 계기를 만들수 있었다면 좋겠다. 내부적으로는 우리 조합원들이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고, 분임조 활동 등을 통해 조직력이 강화되는 계기가 됐다는 것이다. 투쟁과정에서 아쉬운 점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그런 걸 다시 짚는 평가는 큰 의미는 없는 것 같다. 어떤 때든 완벽하게 준비돼서 투쟁할 수는 없는 거다. 어떤 상황에서든 조합원들이 함께 잘 버텨준 것이 중요했다고 본다.

 

특집 2.갑을대첩 비책공개 /2015.9

갑을대첩 비책공개

 

 

안재범 운영집행위원, 갑을오토텍지회 노안부장

 

 

 

갑을오토텍은 그룹차원에서 노조파괴 용병들을 모집했다. 신입사원으로 위장해 갑을오토텍에 입사한 노조파괴 용병중 절반이상이 전직 경찰과 특전사 등 군경 이력을 가진 자들이다. 전직 경찰들은 경찰협동조합을 통해 특전사는 특전 동지회를 통해 사전 모집됐다. 특히, 노조파괴 총책 및 팀장급으로 활동한 자들은 이미 계열사인 동국실업에 부·차장으로 인사발령이 나서 투입됐던 자들이다. 용병들은 입사 전부터 수차례의 교육을 받고, 금속노조를 파괴하기 위한 어용노조 설립을 통한 노조파괴 활동을 준비했다. 갑을자본은 용병들에게 특정 지회간부 테러, 금속 파업 시 대체인력 및 파업파괴, 생산량 UP, 폭력사태유도 및 구사대, 직장폐쇄 후 선별복귀까지 계획한 것이 노조파괴문건으로 확인되었다. 금속노조 타 지회들의 노조파괴 시나리오에서 확인 되듯이 갑을자본도 노동조합을 파괴하려는 목적은 명확하다. 자본의 이익극대화 수단(사내비정규직, 외주 용역화, 생산성 등 인원 및 사업구조조정)들을 아무런 저항 없이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 모든 자본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민주노조를 이익극대화의 최대 걸림돌로 여기고 현장에서 치우려 하는 것이다.

 

분노한 조합원들의 1차 투쟁, 마침내 6·23 항복문서 쟁취!

 

갑을자본의 신종노조파괴에 맞선 지회대응은 크게 법적투쟁과 12차 파업투쟁으로 나눌 수 있다. 지회의 법적투쟁은 충남지부에 익명으로 제보된 내용을 토대로 여러 가지 정황과 증거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전직 경찰관 출신의 이력과 용역들의 모집책과 경로를 찾아냈고, 이를 근거로 고용노동부 천안지청에 요청한 특별근로감독은 노사 쪽과 산안쪽 두 가지 모두 이례적으로 즉각 받아들여졌다. 노동부의 수사는 빠르고 신속했다. 그러나 딱 그만큼이었다. 신종노조파괴의 모든 증거를 손에 쥔 고용노동부 천안지청과 검찰은 시간 끌기에 들어갔다. 반면 지회조합원들과 주변의 기대는 컸다. 노조파괴에 대해 법이 이렇게 빠르게 움직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증거도 충분했다. 적어도 노조 파괴 가담자들 중 한 두 명이라도 구속된다면 이후 투쟁의 고삐를 쥐고 갈 수 있다고 판단했다. 자본의 진짜 의도가 무엇인지 잘 알면서도 기대감을 버리기는 어려웠다. 결국 자본과의 1차전이 진행되는 내내 법과 공권력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목도하면서 그 기대가 얼마나 헛된 것인지 깨닫게 됐다. 고용노동부, 경찰, 검찰은 자본의 움직임과 태도에 따라 말과 행동을 바꿔가고 있었다.

 

파업투쟁은 합의를 우선할 지 담판을 낼 지였다. 정상적 노사관계로 보자면 현안문제든 협상이든 밀고 당기는 노사합의 과정을 거쳐 마무리가 된다. 하지만 정상적 노사관계가 모두 파탄난 상태, 즉 갑을자본에 의해 그 어떤 대화와 교섭도 차단된 상태에서 지회는 고민 끝에 섣부른 교섭을 청하기보다 최대한의 조직력과 투쟁력을 갖춘 상태에서의 담판을 결정했다. 모든 역량을 아래로부터의 조직체계를 세우는 데 집중했다. 나아가 조합원들의 자발적 투쟁과 실천을 장려하고 아낌없이 지원했다. 더불어 자본이 내세우는 논리를 하나하나 반박했다. 노동부의 조사로 잠시 미뤄뒀던 신종 노조파괴의 모든 증거 역시 조합원들에게 전면 공개했다. 이 과정을 통해 조합원들은 신종 노조파괴 분쇄는 대화나 교섭에 앞서 조합원 스스로가 이 투쟁의 선봉에 서는 것임을 알아가고 있었다. 이를 가능케 했던 것이 분임조 활동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한편, 전직 경찰과 특전사 출신으로 무장한 노조파괴용병들의 폭력은 무자비했고, 거침이 없었다. 때려보기만 했지 맞아 보지 않은 이들의 폭력은 매우 위협적이었다. 617일 용병들의 무자비한 집단 폭력을 참을 수 없어 여기서 끝장을 내자며 기업노조 사무실로 향하는 조합원들의 분노를 보며, 오히려 전세가 역전됐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언론 카메라에 죽봉 든 조합원들의 모습이 나올까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하지만 조합원들의 의지는 분명했다. ‘공장 밖으로 쫓겨나더라도 용병들과는 더 이상 현장에서 같이 일을 할 수 없다. 여기서 끝장을 보자.’ 고 다짐했다. 결국 7일간 정문봉쇄 투쟁을 통해 용병들을 공장 밖으로 몰아내고 6·23 합의라는 갑을자본의 항복 문서를 받아냈다. 6·23 합의는 조합원 동지들의 주체적인 투쟁, 가족대책위의 헌신적 투쟁, 그리고 어느 때 보다도 열렬했던 연대의 힘이 결합되어 만든 승리였다.

 

 

 

 

한 치의 망설임 없는 조합원들의 투쟁의지로 2차 투쟁도 승!!

 

6·23 합의를 통해 노조파괴 용병들을 전원 채용 취소시키고, 기업노조 설립을 주도했던 기존 5명에 대해서도 7월 중으로 퇴사조치하기로 했다. 하지만 노조파괴 분쇄투쟁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6·23합의 이행을 위한 후속 조치사항(채용취소에 따른 신규채용 및 채용원칙, 채용 취소자들과의 법적분쟁에 따른 후속조치, 2015년 발생한 민형사상 사건에 대한 징계 등 불이익 금지, 부당노동행위에 대한 사과 및 책임자에 대한 인사조치, 부상자에 대한 치료비 부담 및 치료기간 정상근태, 조합원 심리치료비 부담, 기숙사 퇴거조치, 합의서 불이행 책임 등)들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갑을자본도 완성사의 일부 생산차종에 대한 물량회수를 빌미로 한시적인 일용직 운영, 비생산부서의 용역화 및 일부 생산 공정의 외주화, 생산성 향상 등을 공격적으로 요구하며 이미 6·23합의로 채용 취소된 용병들을 적극 활용했다. 기숙사 기거는 물론이고 식사까지 제공했다. 용병들은 한발 더 나아가 기업노조 사무실을 회사 정문 앞에 차리고 지노위에 채용취소가 부당하다는 취지의 구제신청까지 했다.

 

이때 갑을자본의 이데올로기는 이랬다. “금번 사건으로 고객사로부터 일부 차종이 회수되고 주력제품에 대한 물량도 이원화될 위기에 있다며 더 이상의 파업은 고객사로부터 퇴출된다는 것과 통상임금확대, 주간연속 2교대 시행에 따른 노동시간 단축 및 임금상승비용을 감당할 수 없어 이대로 가면 회사가 폐업할 수밖에 없다.” 비생산부서의 외주용역, 생산성 30% 향상, 적자 아이템의 외주생산 등에 노동조합이 동의해 주면 용병들 문제도 말끔히 정리하겠다는 것이 6·23 합의 이후 갑을자본이 취한 태도였다.

 

이런 갑을자본의 태도에 지도부는 완성차의 요구로 주력 차종 물량이 줄어들게 되면 고용불안으로 조합원들이 흔들릴 수 있지 않을까를 우려했다. 조합원 동지들이 회사가 살아야 우리가 산다.’는 이데올로기를 넘어설 수 있을까. 그리고 물량 반납 얘기를 현장에 알리면 투쟁의지가 위축이 되거나 꺾이지 않을까. 어느 정도 수준으로 현장에 알려야 할지 고민했다. 그러나 지도부의 우려와 고민은 기우에 불과했다. 분임조에 이 문제를 공개하고 토론에 붙인 결과 조합원동지들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같이 죽자! 망하는 싸움하자!’는 반응이었다. 이에 따라 갑을오토텍지회는 곧바로 2차 투쟁을 선포하고 분임조 활동을 중심으로 조합원들의 기세를 끌어올리는데 주력했다.

 

 

 

 

또한 휴가 기간 동안 확대간부동지들이 공장을 사수하며 사무 관리직들이 휴가를 가지 못하고 현장에 투입돼서 생산하는 것을 저지하였다. 동시에 노동부 천안지청에 사무 관리직 사원들의 건강권을 위한 배치 전 건강검진, 작업변경 특별교육 등이 진행되지 않은 것을 고발조치하고 그 결과로 부분 작업 중지 명령이 내려졌으나 갑을자본은 이를 무시하고 사무 관리직의 현장투입을 끊임없이 시도했다. 이에 따라 지회는 논의 끝에 분임조를 통해 휴가 중인 조합원의 공장집결을 결정했고 300여명의 조합원동지들이 한걸음에 달려왔다. 이러한 조합원동지들의 모습을 보면서 지도부는 이 싸움은 이겼다고 생각했고 회사는 이러한 조합원들 기세에 눌려서

현장 침탈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이후 휴가 마지막 날인 89일에는 전체 조합원들에게 철야농성을 위한 파업배낭을 꾸려서 공장에 집결하도록 했고 전면적으로 공장가동을 막고 싸울 것을 결의했다. 결국 전 조합원 철야농성 하루 만에 갑을자본의 교섭요청이 왔고 후속조치에 대한 노동조합의 요구안 전체를 합의하게 되었다.

 

 

 

갑을자본은 조합원들의 분임조 활동에 떨었다

 

2014년 교대제 준비 시기부터 두원정공동지들의 투쟁을 연구하고 도움도 많이 받았다. 분임조에 대한 조합원 교육을 실시하고, 중대장, 소대장, 분임장 체계를 세우고 교육을 실시하면서 공정별로 5-6명씩 61개 분임조 조직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복수노조와 노조파괴 문제가 벌어졌다. 두원정공 지회의 2차례 분임조 교육이후 처음엔 중대장, 소대장, 분임장 3명의 동지가 뭐라도 해야겠다고 시작한 아침 출근 선전전이 1주일이 지나면서 50, 100명으로 늘고 전체 조합원으로 확대되었다. 또한 2조 근무 조합원들이 노동부, 법원 등에 가서 투쟁하겠다고 자발적으로 나서면서 분임조는 서로 투쟁을 결의하고 소통하는 논의 구조를 만들어 나갔다. 이번 신종노조파괴 분쇄투쟁을 잠시 돌이켜 생각해보면 평상시처럼 지도부나 확대간부들만 공유하고 판단하여 결정했다면 조합원동지들의 자발성 역동성은 고사하고 기세도 떨어져 투쟁을 말아 먹는 꼴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갑을자본은 막바지 실무 교섭에서 투쟁이 끝나면 분임조를 해체할 것인지" 묻고 분임조가 있어서 아무 것도 안 된다는 우스갯소리를 했다고 한다. 자본이 무서워했던 것은 지도부가 아니라는 것을 다시금 실감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이제 자본은 더 큰 공격을 더욱 철저하게 준비할 것으로 보인다. 노동조합도 이를 대비하기 위해 분임조 활동의 경험을 바탕으로 큰 투쟁이든 작은 투쟁이든 지도부가 하나하나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라 일상투쟁을 조합원들이 할 수 있도록 배치하려고 한다. 그리고 교육, 소모임, 학습모임 등을 더욱더 체계적으로 만들어 상시 분임조가 가동될 수 있도록 만들어 가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일 것이다.

특집 1.조합원의 주체성으로 다시 서는 민주노조 /2015.9

조합원의 주체성으로 다시 서는 민주노조

 

 

선전위원회

 

 

조합원의 주체성으로 다시 서는 민주노조

 

87년 노동자 대투쟁을 경과하며 민주노조가 폭발적으로 등장한 이후, 30년이 지났다. 현장의 민주적 역동성은 어느 새 80년대 전투적 노동조합주의의 추억으로만 여겨진다. 민주노조 건설을 둘러싼 격렬한 투쟁 국면이 일단락되고 노사 관계에서 제도적 측면들이 완성됨에 따라, 노동조합은 노동자를 대리하거나 대행하는 데에 머물게 된 경향을 보였다. 그 결과 노동자 개인은 운동의 주체가 아니라 지침을 이행하는 역할에 그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조합 지도부를 넘어서는 아래로부터의 투쟁, 통제 가능하지 않은 자발적인 투쟁은 환영받지 못한다. 민주적 역동성을 잃고 제도화된 노동조합은 ‘관리된 투쟁’을 조직한다. 의례화된 임단협 투쟁 일정, 자조 섞인 ‘뻥 파업’ 등은 노동조합 운동의 현재를 보여주는 한 단초다. 나아가 투쟁을 스스로 조직할 수 있는 현장의 역량에 대한 믿음 자체가 약해진지 오래다. 관성화된 조합 활동 과정에서 조합원들은 수동적인 개인으로 여겨지고, 사회적으로는 자기 밥그릇 챙기는 정규직 노동자 취급당한다. 이런 노동조합들마저 사측의 주도 아래 극단적인 폭력으로 깨져나가 억압적인 어용노조로 교체되는 것이 복수노조 시대 민주노조의 현실이기도 하다.

 

투쟁 속에 실현된 조합원 민주주의

 

이런 암울한 상황에서 사측의 노조 파괴시도에 맞선 한 노동조합의 투쟁이 이목을 끈다. 금속노조 ‘갑을오토텍 지회’의 투쟁이다. 복수노조 도입 이후, 어용 노조를 활용한 민주노조 파괴가 노무법인들의 돈벌이 수단으로까지 된 마당에, 갑을오토텍의 노조 파괴 시나리오 자체는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뒤 진행 과정은 일반적이지 않았다. 조합원들은 노동조합의 지침을 넘어서는 활동을 제안했다. 1인 시위도, 가족 연대 활동도, 교대제 2조의 오전 투쟁 결합도, 조합원 스스로 채팅방을 통해 상황을 나누고, 토론하고, 투쟁 방안을 제안하고, 호응했다. 노동조합은 이런 조합원들의 열기를 적극적으로 받아 안고, 이런 주체적인 활동을 최대한 보장하고 살리는 투쟁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이전부터 고민하던 분임조 활동을 본격화해 실질적인 소통과 논의 구조가 될 수 있도록 조직했다. 갑을오토텍지회 안재범 노안부장은 “평상시처럼 지도부나 확대간부들만 공유하고 판단하여 결정했다면 조합원 동지들의 자발성, 역동성은 고사하고 기세도 떨어져 투쟁을 말아 먹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조균형 조합원은 “우리가 몰랐던 조합원들의 저력이 있었던 것 같다. 그걸 끌어내는 계기와 모아내는 매개체가 필요했던” 것이라고 회상했다.

 

다시 발견한 조합원의 자발성과 주체성

 

갑을오토텍 조합원들에게 주체적인 활동의 영감을 준 것이 두원정공 투쟁이다. 2014년 구조조정에 반대하는 과정에서 두원정공 노동자들이 아래로부터 만들어간 투쟁이 힘이 되었다. 2014년 두원정공 지회의 투쟁은 사측의 단협 위반으로 시작되어, 교섭이 교착 상태에 있으면 폐업절차를 밟겠다는 사장의 발언으로 전면전으로 확대되었다. 폐업 발언이 나오자 조합원들이 스스로, 당시 지침으로 시행하고 있던 1시간 파업을 전면파업으로 전환시켰다. 노동조합도 이런 조합원들의 투쟁 의지에 적극적으로 호응해, 조합 지침 대신 소단위(중대)별로 파업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노래가사 바꾸기 대회, 계열사 노동자 만나러 광주에 가기, 사장을 만나러 집이나 두원공대로 원정투쟁 가기 등 이었다. 조합원들은 결국 ‘스스로의 힘으로 두원 자본을 때려눕혔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투쟁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이런 투쟁 과정에 대해 엄정흠 두원정공 대의원은 “언제부터인가 투쟁이 지침에만 의존한다. 이러니 투쟁을 노동조합이 관리하는 측면도 있고, 그런 투쟁에 간부도 조합원도 익숙해진다. 지침을 떠나 자발적으로 투쟁하자는 고민에서 출발했다. 처음에는 조합원들이 지침을 내려달라고 하기도 했지만, 막상분임조 활동이 활발해지고 매일 1시간씩 중대 총회가 벌어지자 자연스럽게 갖가지 활동을 제안하고 주체로 나섰다. 정작 판이 열리니 조합원들이 다 알아서 하더라.”고 회상했다.두원정공 지회라고 전 과정이 쉬운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조합간부들이 이렇게 해도 되나 할 정도로,기세가 올라오는 게 무서웠다. 조합 활동 오래 한 간부들에게 조합원을 통제해야 한다는 생각이 은연중에 있었던 거다. 조합원들의 투쟁이 간부들의 계획을 넘어서면, 결국은 그 부담이 조합으로 온다. 그러니 집행부도 조합원들의 자발성과 주체성을 받아 안을 수 있어야 한다.”

 

노조는 민주주의 학교라는데 주목해야

 

갑을이니까, 두원이니까 가능했다고 단정 짓지 않았으면 좋겠다. 또 한편으로 단사의 투쟁 성공사례를 접하며 고군분투하는 노동조합 활동가들이 자괴감에 빠지지도 않았으면 한다. 다만 ‘노동조합’이 형식적으로 유지되며 자본의 지배와 관리를 일부 대변하는 존재가 아닌 자본의 논리를 꿰뚫어 세상의 질서를 바꿔내는 노동자들의 학교 역할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이 투쟁과 경험에서 함께 배우고 읽었으면 한다.

[노안뉴스] 유성기업 ‘노조파괴’로 정신질환, 업무상 재해 인정 (미디어 충청)

기사 원문을 보시려면 아래 주소를 클릭해주세요

출처 : http://www.cmedia.or.kr/2012/view.php?board=total&nid=78681

 

유성기업 ‘노조파괴’로 정신질환, 업무상 재해 인정

정재은 기자

"불법적인 노조 파괴와 탄압으로 중증우울증에 걸린 노동자가 업무상 재해 판정을 받았다. 사업주의 노조 파괴 공작으로 얻은 정신질환이 산업재해로 인정된 일이라 노동자들의 업무상 재해 신청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근로복지공단 천안지사는 유성기업 아산공장 노동자 신 모 씨가 지난해 11월 29일 낸 요양 신청에 대해 서울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가 3월 26일 승인 결정했다고 28일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