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호_여성노동건강상식] 중년의 불청객, 화병

중년의 불청객, 화병

 

권윤영 회원,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50대 중반 여성이자 주부인 A씨는 최근 20대 딸의 간곡한 요청으로 난생처음 정신건강의학과를 방문했다. 지난 10년간 울화가 치밀고 열이 오르며, 목구멍이 가슴에 응어리가 지는 현상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남편과 싸울 때면 증상이 더욱 두드러졌지만, 일상생활은 그럭저럭할 만해 병원에 방문할 생각은 딱히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두 달 전, 남편이 안 하겠다고 다짐했던 인터넷 게임을 다시 하는 모습을 목격하면서부터 문제가 시작됐다. 빚에 허덕일 때도 무책임하게 게임에만 몰두했던 남편의 예전 모습이 떠오르며 분노가 되살아난 것이다. 남편과 살갑게 지내고 싶은 마음도 없고 그저 싸우지만 않으면 괜찮겠거니 생각했는데, 앞으로 남은 세월을 한집에서 살아갈 게 막막하게 느껴졌다. 화르르 불이 번지듯 한동안 괜찮던 증상이 심해져 답답함에 집을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이 들기도 했다. 부부 사이에 서운했던 일, 시댁으로부터 당한 부당한 대우 등 그간 억울했던 일이 계속 떠올라, 딸에게 끊임없이 하소연하기도 했다. 급기야 한 달 전부터 가슴에 열불이 나 가만히 있을 수 없고, 밤에 잠도 설치게 돼 기력이 떨어져 늘 하던 집안일을 하기도 벅차 차라리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화병에서 시작돼 우울증으로 번질 뻔한 사례다. 이후 A씨는 항우울제 복용 등 치료를 시작한 지 한달 내에 가슴의 뜨거운 응어리와 불면이 완화됐다. 치료받으며 스스로 시작한 운동과 딸이 보내는 정서적 지지가 큰 도움이 돼, 반년 만에 안정적인 컨디션을 찾으며 빠른 회복을 보였다.

 

화병은 우리에게서 멀지 않은, 친숙한 존재지만 정신의학과적으로 정식 진단명은 아니어서 개념이 다소 모호하다. 특정 지역의 고유문화에 따라 특유한 정신질환이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를 가리켜 문화관련 증후군(Culture-bound syndromes)’이라 한다. 한국의 문화관련 증후군으로 화병(火病, Hwa Byung)’이 제시돼왔다. 화병은 분노를 장기간 참으면서 화·열감·억울함·증오를 보이고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기분이나 가슴에 응어리·답답함·두근거림을 호소하며, 입 마름, 한숨, 잡념, 하소연 등의 특징을 보인다. 분노를 드러내거나 자기주장을 하는 게 어려운 문화, 상대적으로 빈번하게 참을 수밖에 없는 집단에서 발생하기 쉽다. 국제적으로 엄격하게 합의된 진단 기준이 없긴 해도, 넓은 의미에서 우울증의 한 종류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일반 인구의 유병률은 4~5% 정도로 추정되고, 주로 중년 이후의 여성·기혼자·사회경제적으로 낮은 계층에서 발생한다고 알려져 있다. 특히 남성보다 여성에게서 2배 이상 많이 관찰된다.

 

화병과 우울증, 범불안장애, 신체증상장애 등 유사성이 높은 다른 정신과 질환과의 감별이 필요하다. 화병은 대체로 앞서 제시한 장애보다 경미하며 증상의 악화와 완화를 반복하고, 정서적 지지를 받으면 회복이 빠르다. 그러나 화병을 방치하면 정신과 질환뿐만 아니라 만성 스트레스로 인해 생리적으로 이상이 생겨, 심장병·성인병·위장병 등으로 이어질 수 있어 초기 치료가 중요하다.

 

화병의 유발인자 연구에 따르면 배우자·시댁·사업 실패와 사기·가난·자녀 문제·오랜 지병과 같은 스트레스 요인이 네댓 개 중첩되는 경우, 화병을 앓게 된다고 한다. 화병에 취약한 심리적 요인으로는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 갈등이나 위험 자체를 회피하려는 성향이 강하거나 완벽주의, 낮은 자존감과 낮은 사회기술을 지닌 경우다. 중년 이후의 여성은 주로 가족 내 문제로 인해 화병 증상을 호소한다. 가족은 물리적·감정적으로 가까워 서로 영향을 깊이 주고받으며, 쉽게 단절할 수 없는 관계다. 그렇다 보니 전통적으로 가족 내 돌봄 관리자인 기혼 여성의 화병 원인이 가족이 되곤 한다. 동시에 가족은 치료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많은 화병 환자는 가족으로부터 공감과 인정을 받는 것만으로도 증상이 호전된다. 따라서 가족 내 소통을 점검하고, 이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이 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된 가족 내 상호작용 패턴이 달라지기엔 현실적으로 한계가 있으며, 구성원 모두가 문제점을 함께 느끼며 각자 변화하고자 하는 강한 동기가 없다면 가족 대상의 교육과 치료도 쉽지 않다.

 

설령 가족이 조력자로 나서지 않는다고 해도, 내가 나를 돕는 방법이 있다. 개인에게 가해지는 스트레스 요인을 조력자 도움을 받거나 사회적 차원에서 해결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할 때 개인적 차원에서 화병의 원인인 스트레스를 잘 관리해야 한다. 우선 스트레스 요인과 스트레스 반응을 구분해 다뤄보자. 스트레스 요인은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것으로, 더위 등 물리적 환경·사회적 환경·개인적 사건·생활 습관이나 생리적 상태 등을 가리킨다. 스트레스 반응은 심리적, 신체적 영역 모두에게서 나타난다. 불면 등 수면장애·피로·근육 뭉침이나 소화불량·심장 두근거림·숨쉬기 곤란한 느낌·어지러움 등을 보일 수 있으며, 신경질·거친 언행·충동구매·과식, 과음 등의 행동을 동반하기도 한다.

 

스트레스 요인을 잘 관리하려면 가족·일터 등 사회적 관계 내에서 적절한 자기주장, 타협과 조율을 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그러려면 우선 스트레스 요인과 스트레스 반응인 불편을 인지하고, 불편을 표현하고 해결책을 찾거나 상대에게 타협점을 요구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앞서 말했듯이 많은 수의 화병 환자는 나만 참으면 별 탈 없다라는 생각을 하거나, 참지 않았을 때 생길 위험·갈등에 대해 미리 두려움을 갖는 나머지 자기주장을 하는 대신 무작정 참는 쪽을 택한다. 물론 때로는 꾹 참을 수밖에 없는 상황도 있고, 참는 게 가장 좋은 선택일 수도 있다. 하지만 습관적으로 부정적 감정을 피하려고 화나도 참는 쪽을 선택하는 것이라면, 더 나은 문제해결을 위해서 경청하되 할 말은 하는 기회를 점차 늘려야 한다.

 

시작은 애정이 있거나 두렵지 않은 대상을 상대로, 여유롭고 편안한 태도로 한계를 알려주거나 거절혹은 타협을 해본다. 예를 들어 자녀가 용돈을 추가로 요구할 경우, 부모로서 마음이 불편해질 수 있다. 이때 잔소리하거나 그냥 용돈 주며 불편한 마음을 덮어놓고 지나치지 말고, 자녀와 잠시 눈을 맞추고 문제해결을 위해 진지하게 얘기를 나누는 것이다. 용돈 인상을 요구하는 자녀의 사정을 일단 경청한 뒤, 부모로서 추가로 줄 수 있는 용돈의 한계를 알려주고 이후에도 같은 일이 반복되지는 않을지 걱정되고 불안한 마음을 전달한다. 그리고 함께 해결책을 의논해본다. 이런 상호작용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면 자기주장이 익숙해지고 감정표현의 기술도 점차 세련돼진다. 또한 부정적인 감정을 직면하는 걸 크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 무작정 참는 것만이 나와 상대를 위하는 길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적절한 감정표현, 자기주장이나 세련된 사회기술에 대해선 시중에 나와 있는 서적과 동영상을 통해 어렵지 않게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실전에 적용할 상담이 필요하다면 정신건강의학과나 심리상담센터를 방문하는 게 좋다.

 

스트레스 반응을 관리를 위해선 규칙적인 생활, 질 좋은 수면 등 일반적인 건강 수칙을 준수하는 것뿐만 아니라 심호흡과 근육 이완 역시 도움이 된다. 스트레스 요인이 발생하면 우리 몸에선 스트레스 호르몬이 늘어나면서, 자율신경계를 흥분시키고 과민하게 만든다. 자율신경계는 의지로는 잘 조절이 되지 않기 때문에, 이를 진정시키는 방법으로 호흡과 근육 이완을 이용하는 게 좋다. 스트레스가 높은 환자에게 보건복지부에서 제작한 영상을 자주 안내하는 편인데, 이 밖에도 유튜브에서 마음 안정화를 위한 복식 훈련 기법이나 마음 안정화를 위한 근육 이완 운동등을 키워드로 검색하면 도움이 될만한 영상을 볼 수 있다. 관련된 영상을 보고 꾸준히 따라하며 수주 간 훈련하면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항우울제 등의 약물치료도 과민해진 신경계를 빠르게 안정화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