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시간 읽어주는 사람] 핵발전소 노동자가 치르는 '거짓의 대가'는 무엇인가 / 2019.09

[노동시간 읽어주는 사람] 

 

핵발전소 노동자가 치르는 '거짓의 대가'는 무엇인가

 

박기형 / 상임활동가 

 

요즘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드라마가 있다. 미국 HBO에서 제작한 <체르노빌>이라는 5부작 드라마다. 그동안 체르노빌 원전 사고를 조명한 여러 다큐멘터리, 영화, 에세이 등이 있었지만 <체르노빌>은 드라마로서의 높은 완성도와 긴장감 그리고 선명한 문제의식 등으로 사람들에게 큰 울림을 주며, 원전 사고 당시 상황과 사고 대응 및 조사 과정 전반에 이르기까지 체르노빌 원전 사고를 섬세하게 재현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넷플릭스만 구독하던 필자는 부랴부랴 왓챠플레이를 구독하고서 5부작을 정주행했다. 각 잡고 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에 마음을 굳게 먹고서 5시간에 걸쳐 손에 땀을 쥐고 시청했다. 마지막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난 후 하나의 대사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많은 사람이 명대사로 꼽을 정도로 원전 문제의 핵심을 함축한 질문이자 드라마를 여는 레가소프의 첫 마디 "거짓의 대가는 무엇인가?"
   
거짓의 대가는 무엇인가?

인류가 자초한 최악의 재앙으로 손꼽히는 1986년의 체르노빌 원전 사고는 2011년 3월 11일 발생한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자연스레 떠올리게 한다. 두 참사 모두 우리가 마주할 수밖에 없었던, 거짓의 대가가 무엇인지 여실히 보여주었다. <체르노빌>에서 무채색에 가까운 이미지로 펼쳐 보인 비참함, 즉 황폐해진 삶의 터전과 자연, 피폭으로 인해 죽거나 다친 사람들과 살처분 당하는 동·식물 등 사회와 자연이 송두리째 파괴당한 참혹한 현장 말이다.

특히 <체르노빌>에서는 피폭을 당한 원자력 부근 주민의 아픔뿐만 아니라 발전소에서 일한 노동자들과 이미 벌어진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또는 더 큰 참사를 막기 위해 살인적인 수준의 방사선에 그대로 노출되며 고군분투한 소방관, 군인, 의료인 등 수많은 노동자의 얼굴과 몸짓을 볼 수 있다. 자신이 상대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그것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파괴해버릴 수 있을지 알지 못한 채 그들은 온몸으로 거짓의 대가를 받아야 했다.

그 참혹한 사태가 일어나기까지 거짓의 굴레를 뒤얽히도록 한 사람들, 아니 그 사회는 어떤 책임을 졌는가. 우리는 누구에게 어떤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오히려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듯 체르노빌 원전 사고가 벌어진 지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거짓의 굴레가 우리를 짓누르고 있다. 언제 또다시 사고가 벌어지지 않으리라고 예측할 수 없기에 우리는 언젠가 또 한번 거짓의 대가를 치러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거짓의 대가는 이런 극단적인 상황에만 치러지는 게 아니다. 거대한 수준의 참사가 벌어지지 않더라도 우리는 일상적으로 거짓의 대가를 치르고 있다. 다만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치르고 있을 뿐이다. 그 '다른 누군가'는 바로 '핵발전소 노동자'들이다.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핵발전소 노동자의 저선량 피폭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한국에도 탈원전 논의가 촉발되면서 핵발전소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이야기에 주목하는 책들이 출간되었다. 그중 한 권을 꼽자면, 반핵의사회·사회건강연구소가 공동기획한 <핵발전소 노동자>가 있다. 이 책은 핵발전소 노동자들의 증언을 통해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피폭 및 각종 사고, 발전소와 국가의 조직적 은폐 나아가 다단계 하청을 통한 위험의 전가 등을 다루고 있다.

저자인 테라오 사호는 이 책에서 '나는 알 수 없어요'라는 노래를 언급한다. 그 노래의 가사 중 한 구절은 다음과 같다. '핵발전소에서 노가다 일로 방사선에 피폭된 아저씨가 벌레처럼 약해지는 데도 도시의 밤은 묵살한다.' 우리가 아름다운 도시의 야경을 즐기는 순간에도 빛을 만들어내는 핵발전소 노동자의 생명은 점차 빛을 잃어간다.
 
<체르노빌>을 본 사람들의 후기를 살펴보면 다들 하나 같이 심각한 수준의 방사능 노출에도 아무 보호장비를 갖추지 않은 채, 심지어 마스크도 제대로 끼지도 않고 방사능 피해자를 만지거나 폐기물을 치우는 등의 모습을 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헛웃음 나는 끔찍한 상황은 비단 무너져가는 소련, 가난하고 꽉 막힌 '사회주의' 사회에서만 벌어지는 게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자유롭고 평등한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공공연히 일어나고 있다. 거기서는 국가의 체면 때문에 거짓말했다면, 여기서는 자본의 이윤 때문에 거짓말하는 게 유일한 차이일 뿐이다. 핵발전소가 돌아가는 작업현장에서 위와 같은 일은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은폐된 저선량 피폭 문제

거짓은 단지 핵발전소에서 일어난 각종 사고, 위험 상황을 은폐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특별한 상황이 벌어지기 전부터 노동자들은 일상에서 언제나 방사선에 노출된다. 병원에서 방사선 검사 및 치료를 하는 사람이 방사선에 노출되지 않을 수 없듯이, 핵발전소에서 일하는 노동자들도 '당연히' 방사선에 노출된다. 문제는 '당연히'라는 말을 어떤 의미로 해석할 것이냐다.

핵발전소 노동자의 생명을 위협하는 거짓은 위험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시작된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핵발전소에서 방사선에 노출되지 않고 어떻게 일하라는 말이냐. 핵발전소는 원래 위험한 곳이다." 그 이후엔 위험이 당연하다고 전제하고서 어느 수준이 정말 위험한 것인가를 묻기 시작한다. 인체에 유해한 방사능의 수준, 즉 한계선을 설정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피폭 선량 기준을 각종 연구를 통해 객관적이고 과학적으로 도출하려 한다.

하지만 정말 피폭 선량 기준은 객관적·과학적인가? 아니다. 반대로 피폭 선량 기준은 자의적이다. 왜냐하면 고선량 피폭의 위험성은 명확하지만 저선량 피폭의 위험에 관해서는 여전히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어떤 질병을 일으키는지, 어떤 인과관계로 그렇게 되는 건지, 발병까지 어느 정도 기간이 걸리는지 등 여전히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혹자는 불확실하기에 입증되지 않았고 그래서 유해하다고 단정 지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 점에서 <체르노빌> 1화에서 사고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기 위해 방사능 수치를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지는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원자로의 핵연료를 담고 있는 노심이 폭발하지 않았다고 사안을 축소하고 싶은 이들은 측량 한계가 낮은 기계의 수치를 그대로 따른다. 그래서 위험하지 않은 상황이라고 판단한다. 그 기계가 측량할 수 있는 최고치가 나왔음에도 말이다. 결국 고성능 측량 장비를 통해 원자로가 폭발했음을 확인한 후에야 순순히 인정했다. 이미 수십 시간이 지난 후였고, 엄청난 양의 방사능에 수많은 사람이 노출되고 수백km의 지역이 오염된 후였다.

이와 같은 일이 핵발전소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위험이 입증되지 않았으니 안전관리 비용이나 인건비를 들이지 않으려는 태도, 저선량 피폭이 있었다고 하지만, 기준상 위험하지 않았고 그게 정말 암을 비롯한 특정 질병의 발생에 주요 원인이라고 입증되기 어려우니 산재 인정을 하지 않겠다는 논리 등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의 책임자들처럼 저선량 피폭의 유해성이 아주 오랜 뒤에 입증되면 그때에야 피폭자들에게 보상하고 안전조치를 취할 것인가?

정말 우리가 방사능의 위험으로부터 사람들을 안전하게 지키고자 한다면 불확실하기에 최대한 안전할 수 있도록 조치하는 것, 일상에서부터 모든 예측 가능한 위험에 대비하는 것, 조그만 방사선 노출에도 주의를 기울이고 관리하는 것 등이 아닐까. 그러한 원칙들에 입각할 때에야 비로소 거짓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고 나아가 거짓의 대가를 핵발전소 노동자가, 우리 사회구성원 모두가 치르지 않을 수 있는 출발점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