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시간센터] 201903 월례토론 "유연근무제와 페미니즘" 북토크

노동시간센터 월례토론

2019.03 "유연근무제와 페미니즘" 저자 국미애 선생과 함께 하는 북토크




3월 21일 목요일에는 "유연근무제와 페미니즘(2018, 푸른사상) 저자인 국미애 선생님을 모시고 북토크를 나눴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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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연근무제가 정말 장시간 노동체제에 균열을 가할 수 있을까?

사실은 유연근무제가 가정에서나 일터에서나 성별 분업을 고착화하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유연근무제 중 하나로 불리는 시간제일자리는 여성노동자를 더욱 불안정하게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

노동자에게 시간 주권이 없을 때, '유연근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쉽게 부담의 전가가 일어나는가? 


등 여전히 많은 질문을 남겼지만, 여성운동이나 노동운동 양쪽에서 모두, 

가부장제와 결탁한 장시간노동체제에 대한 문제제기와 저항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국미애 선생님의 발제 자료와 월례토론에 대한 오마이뉴스 기사를 싣습니다. 


국미애_0321_유연근무제와페미니즘.pdf


오마이뉴스 기사 보기 ==> 유연근무제는 장시간 노동체제를 흔드는 기획이 될 수 있을까?




4월에는 "과로자살 2019, 한울아카데미"의 저자 김명희 선생님을 모시고 북토크가 예정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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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시간 읽어주는 사람] 돌봄노동자 마리아의'어머니 되기' / 2019.01

돌봄노동자 마리아의 '어머니 되기'

 신희주 (노동시간센터 회원, 가톨릭대 사회학과)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Sound of Music)>은 제작된 지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전 세계 사들에게 사랑받는 영화이다. 많은 이들은 아마 이 영화를 주인공 마리아가 7명의 아이와 함께 잘츠부르크의 광활한 자연과 아름다운 도시를 배경으로 도레미 송을 부르는 장면같이 음악을 통해 전해지는 감동으로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주제곡들을 수도 없이 반복해 듣곤 했던 시절로부터 30년 훌쩍 지난 지금 내게 이 영화는 또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다. 견습 수녀이자 가정교사 마리아가 한 가족에게 행한 '돌봄'에 대한 문제로 말이다.

▲ 영화의 한 장면 [출처: 갈무리]

우리가 가족이라는 일차적 사회집단 속에 태어나고 성장하면서 늘 인지하고 있지는 않지만 부인할 수 없는 사실 하나는 돌봄이라는 것이 인간사회의 가장 본원적인 가치 중 하나라는 점이다. 모든 인간은 삶의 첫 순간부터 돌봄이 필요한 의존을 경험하며, 자신의 현재 모습을 형성시킨 돌봄의 가치를 기억한다. 아동, 노인, 장애를 가진 사회구성원과 같은 취약한 의존인의 돌봄은 매우 절박한 도덕적 요구에 대한 응답이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 속 마리아의 돌봄 노동은 다섯 살의 막내 그레틀부터 사춘기를 지나고 있는 열여섯 살 첫째 리즐까지 일곱 아이가 살아가는 위기의 가족 내에서 이루어진다. 마리아는 엄격한 규율과 통제 속에서 가족 이외의 타인들과 관계 맺는데 서툰 이 아이들을 이해하고, 그들에게 마음을 여는 법을 가르치며, 노래와 웃음을 찾아주고, 놀이의 즐거움을 알려준다.

돌봄은 한 개인의 태도, 동기 혹은 심성의 미덕으로 설명될 수 없다. <모성적 사유>의 저자 새라 러딕에 의하면 돌봄은 노동이지만 노동 그 이상이기도 하고, 동시에 본질적으로 관계적인 것이다.

다른 사람의 필요를 이해하고 그 필요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에 대해 대답을 하기 위해서는 동감(同感)과 감정적 개입이 꼭 필요하다. 돌봄 노동을 주고받는 것은 자신과 타인의 감정 그리고 사람 사이의 관계가 교류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타인을 돌보는 나 역시 다른 사람의 돌봄이 필요한 의존적 존재였거나 그런 존재가 될 것이며, 내가 돌보지 못한 나에 대한 돌봄도 타인에 의해 제공된다.

이러한 돌봄이 단지 미덕의 측면에서 평가될 때 생길 수 있는 문제는 무엇일까. 최근 같은 시간대 시청률 1위를 달리는 주말드라마를 잠깐 살펴보자. 가난한 가정에서 자란 주인공은 부유한 치매 노인과의 인연으로 노인의 손자와 결혼까지 하게 되고, 결혼 후 치매노인에 대한 돌봄을 둘러싸고 끊임없이 가족들과 갈등하다가, 결국은 치매노인을 돌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직장을 그만두게 된다.

'착한' 심성을 가진 이 드라마의 주인공은 약자가 불공정한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지에 대한 수세적 처세술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부조리하고 폭력적인 가족관계를 침묵과 인내로 감내하는 '이타적' 가치를 구현한다. 여기서 상호 의존적, 시혜적 관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운드 오브 뮤직>은 그러한 전통적 미덕 윤리에서 일정 정도 거리를 둔다. 돌봄 윤리는 윤리의 문제를 이기적 개인의 자기 이해와 보편적 도덕률이라는 두 극단 간 갈등보다는 그사이의 영역에 주목한다. 좋은 돌봄 관계는 그 관계 자체를 건강하게 유지할 뿐 아니라 그 관계 속의 사람들이 서로 협력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돌봄의 윤리는 일차적 관계성을 넘어 그 영역을 넓히며 대안적 사회윤리를 제시하기도 한다. 영화가 제작된 시대를 고려하면 감독이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영화 속에 돌봄의 가치와 돌봄의 윤리가 서툴게나마 구현되고 있다는 점은 상당히 놀랍다.

그러나 영화는 돌봄 노동에 관한 젠더적 편향을 피해가지는 못한다. 마리아가 떠난 후 트랩 대령은 자녀들에게 약혼자인 슈레이더 부인과의 결혼을 발표하며 이렇게 말한다. "다른 가정교사는 더 이상 오지 않아. 너희들에게 새엄마가 생길 것이거든." 하지만 대령은 아이들을 돌보는데 서툴고 로맨틱한 사랑의 욕구를 가진 슈레이더 부인 대신에, 돌봄에 익숙한 가정교사 마리아에게 마음이 움직이고 결국 마리아가 아이들의 새엄마가 된다.

돌봄을 담당하는 사람으로서의 여성의 경험이 어머니로서의 이야기로 환원되고, 특정인의 경험들이 여성의 보편적 속성으로 받아들여지는 과정이다. 출산과 수유로 대표되는, 피할 수 없는 경험으로서 돌봄이라는 행위는 여성 전체 삶에서 극히 일부분이거나 실현되지 않는 경우도 많지만, 돌봄은 어차피 여성의 영역이라는 점을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한다.

가족 안에서 이루어지는 돌봄은 그 제공자가 누구인가와 관계없이 중요하고 본질적이라는 점을 누가 부인할 수 있을까. 물론 많은 경우 그 제공자는 대개 여성, 특히 어머니가 되고 있지만 말이다.

그러나 사적 영역을 벗어나면 돌봄은 전혀 다른 현실에 놓여있다. 이 영화에서 나타난 돌봄의 여성화는 사실 현실에서는 매우 중요한 노동 문제로 나타난다. 여성들의 사회진출이 늘어나며 전통적 돌봄의 영역은 가족과 친족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담당하게 되었고, 사회가 고령화되면서 노인에 대한 돌봄은 사회적 과제가 되었다.

돌봄 대상의 범위가 친밀한 관계를 벗어나 전 사회로 확대된 것이다. 돌봄 노동의 이러한 가치를 반영하듯, 최근 한국에서는 아이돌보미, 보육교사, 요양보호사, 장애인 활동지원사 등 돌봄 노동의 다양한 직업이 공공 서비스의 영역으로 포함됐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들은 최저임금 수준의 (때로는 그에 미치지 못하는) 저임금에, 많은 경우 사회 보호의 사각지대에 존재하고 있다. 돌봄 활동은 저평가되고, 그 본질적 가치가 폄훼된다. 전형적인 여성노동으로 인식되어 온 돌봄 노동은 세계화된 세계에서 점차 직업의 성차 논리까지 넘어서 인종, 계급적 속성까지 드러낸다. 요양병원의 간병노동이 더 저임금 여성 이주노동자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사회 서비스로서의 돌봄 노동에 대한 권력적 특성을 잘 보여준다.

돌봄은 그 자체가 사회적이고 공공의 책임으로 인식되어야 하는 가치이자 윤리임에도 불구하고, 돌봄을 상품화, 상업화시키는 시장의 논리는 가장 왜곡된 방식으로 돌봄을 평가하는 것이다.

영화 속 마리아의 아이들에 대한 돌봄은 어떠한 물질적 대가로 이루어진 것인지 영화는 말하지 않는다. 단지, 우리가 보는 마리아의 돌봄 가치는 효용성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시장이 판단할 수 없다는 점만은 명확하다. 어머니의 지위를 얻음으로써 마리아의 돌봄이 완성된 것으로 그려지는 것이 못내 아쉽긴 하지만, 시장의 변덕과 왜곡에 마리아의 돌봄이 내던져지지 않아 그래도 다행이라는 것은 나만이 느끼는 안도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