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_특집1] 안전한 노동환경을 보장받을 권리, 성과 재생산 권리로 이야기하자

안전한 노동환경을 보장받을 권리, 성과 재생산 권리로 이야기하자

 

나영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SHARE

 

2020429일 대법원은 제주의료원 간호사들이 제기한 요양급여 신청 반려 처분 취소 사건에 대하여 원심을 파기하고 산업재해로 인한 자녀의 수급권을 인정했다. 이 사건은 항암약을 조제하는 업무를 하던 제주의료원 간호사들이 제기한 것으로, 당시 2009년에 임신하여 2010년에 출산한 간호사 15명 중 4명이 선천성 심장질환을 지닌 자녀를 출산하였고, 5명은 유산을 했다. 자녀의 수급권을 부정한 2심 재판부와 달리 대법원은 임신 중 태아는 모체의 일부이므로 유해한 노동환경으로 인해 임신 중 태아에게 질병이나 장애 등이 발생하였다면 유해 환경의 영향을 받은 자녀 역시도 수급 자격을 지닌 당사자가 될 수 있다고 판결한 것이다. 그리고 산재보험법 제88조 제1근로자의 보험급여를 받을 권리는 퇴직하여도 소멸되지 아니한다를 인용하여, 임신 중 태아에게 영향을 미치는 재해가 발생하여 수급 관계가 성립되었다면 이후 근로자의 지위를 상실하거나 출산한 이후라고 하더라도 수급권을 상실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의 이와 같은 판결은 그동안 업무상 재해로 자녀에게 발생한 질병이나 장애로 인해 직접 민사상 손해배상 소송을 해야 했던 고통을 해소하고, 업무상의 유해 노동환경을 여성노동자와 자녀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는 문제로서 판단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남겼다. 하지만 앞으로 산재보상보험법의 개정과 산재 인정에 대한 판단 기준 등에 있어서는 더 중요하게 논의해가야 할 내용이 아직 많다. 성별에 따른 업무 환경상의 특성과 차이는 고려되지 않고, ‘모성보호라는 틀에 한정된 관점에서 권리와 자격을 논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임신과 출산을 전제로 하지 않더라도 다른 생식 건강에 관한 문제를 어떻게 다룰지, 남성 노동자의 생식 건강 피해로 인한 자녀의 건강손상 문제는 인정될 수 있을지는 포함하지 못 한다. 나아가, 자녀의 건강손상에 대한 보상의 의미를 넘어 당사자의 삶에 관한 권리로서 그 의미를 더 확장해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아래에서 산업재해에 대한 관점의 전환, 안전한 노동환경 보장의 중요성과 그 의미를 ·재생산 건강과 권리’, ‘재생산정의의 관점에서 풀어보고자 한다.

 

모든 노동자는 성적권리와 재생산권리를 가진다

 

·재생산 건강과 권리(Sexual and Reproductive Health and Rights, SRHR)는 성 건강, 성적권리, 재생산건강, 재생산권리를 통합적으로 다루는 개념으로, ‘모든 개인이 전 생애에 걸쳐서 폭력, 강압, 차별, 낙인 없이 자신의 몸과 성, 재생산에 관련하여 건강과 자율성을 보장받고 존중받을 권리, 성적 즐거움을 향유할 권리, 관련 시설, 재화, 정보 일체에 대해 방해받지 않고 접근할 권리, 이에 대해 자유롭고 책임 있는 결정과 선택을 할 권리를 의미한다고 정의해볼 수 있다. 여기서 재생산이란 단지 임신과 출산 등 생식에 관한 차원만이 아니라 개인과 공동체에 상호영향을 미치는 삶의 전 과정을 지속가능하게 유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유엔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위원회는 2016년 성과 재생산 건강과 권리에 관한 일반논평 제22호에서 성과 재생산 권리는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 규약 제12조에 명시된 건강에 대한 권리의 필수 불가결한 요소라고 명시하고 있다. 성 건강·성적권리·재생산건강·재생산건강이 권리로서 보장되어야 할 내용이라면, 이 권리를 실질적으로 보장할 수 있도록 차별과 불평등, 착취에 대응하며 정치·경제·사회·문화적 조건에서의 사회정의를 만들어나가는 일이 바로 재생산정의 Reproductive Justice’ 운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안전한 노동환경에서 일할 권리는 지금까지 주로 노동권의 관점에서 이야기 되어 왔지만 모든 노동자가 성 건강과 재생산건강을 포괄하는 성과 재생산에 관한 권리를 지닌다면 제대로 된 노동조건과 안전한 노동환경을 보장받을 권리 역시 성·재생산 권리의 내용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불안정하거나 착취적인 노동조건과 건강을 악화시키는 노동환경에서 일한다면 삶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성적 즐거움을 향유하고, 원하는 사람과 파트너십을 유지하거나 가족을 구성하는 일, 생식 건강을 유지하는 일이나, 안전한 피임·임신·출산·임신중지를 보장받는 일, 양육과 돌봄에 필요한 여건들을 감당하는 일 또한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한국 사회는 이러한 일들을 권리의 내용으로 고려하지 않은 채, 오로지 국가가 목표로 하는 생산력만을 채우고자 했고 그 생산력을 유지하기 위한 인구조절의 수단으로서만 노동자의 몸을 다루어 왔다. 그 결과 7, 80년대의 가족계획 시대에는 남성 노동자에게 생계부양자로서의 역할을 부여했고, 여성 노동자는 저임금의 노동력으로 국가 경제와 가족 경제에 기여하면서도 자녀를 적게 낳아 검소한 가정경제를 꾸려나가는 이중의 역할을 부여했다. 그러다 2000년대에 본격적인 저출산·고령사회 대책을 시작하면서부터는 남녀 노동자 모두에게 불안정 노동과 하청에 재하청으로 이어지는 열악한 노동환경을 감당하게 하면서 여성 노동자들에게 출산과 돌봄의 부담을 더욱 강화하게 된 것이다. 제대로 된 노동조건과 안전한 노동환경을 보장받을 권리를 성과 재생산 권리로서 말한다는 것은 이처럼 오로지 국가의 경제 성장과 인구관리를 위한 목적으로서만 다루어져 온 노동자의 몸과 삶을 지속가능한 삶을 위한 권리, 평등하고 자율적인 파트너십과 가족구성에 관한 권리, 돌봄에 관한 권리, 자신의 신체에 대한 건강과 자율성을 보장받을 권리의 내용으로 채워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셰어에서는 지난해 낙태죄 폐지 이후의 대안 입법으로 ·재생산 권리 보장 기본법안을 만들면서 13장에 일터에서의 성재생산 권리 보장에 관한 내용을 담았다. 그 중 46조는 이런 내용을 담고 있다. 모든 근로자는 성적 권리와 재생산 권리를 가지며, 근로자라는 이유로 이를 침해받지 아니한다. 모든 근로자는 업무상의 사유로 성적 건강과 재생산 건강을 침해받지 아니한다. 모든 근로자는 성적 건강과 재생산 건강을 보장한다는 명목으로 업무배제 또는 고용상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법이 보장하는 권리의 주체는 모든 사람이며, 노동 현장에서의 안전과 건강권 보장은 당연히 모든 사람에게 보장되어야 하는 것이고, 따라서 성 건강, 재생산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유해 노동환경 또한 모성보호라는 명분으로 여성 노동자에게만 보장되어야 하는 권리가 아니라 모든 노동자에게 보장되어야 하는 권리가 된다. 또한 모성보호 등의 명분으로 여성 노동자를 특정한 업무에서 아예 배제하거나 취업에서 차별하는 근거로 사용해서도 안 된다. 또한 안전한 노동환경은 노동자에게 유해한 노동환경 자체를 제거해나가는 적극적인 조치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국가와 지자체, 모든 기업은 이를 보장하고 지원하며, 권리에 대한 교육을 이행할 책임을 져야 한다.

 

성과 재생산 권리를 통해 안전한 노동의 권리를 요구하자

 

제주의료원 사건에 대한 대법원의 판결 이후 1년이 훨씬 지난 지금, 그 내용을 실질적으로 적용할 산재보상보험법의 개정안은 국회에 계류 중이다. 이에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에서는 지난 520, 세 명의 반도체 노동자와 함께 자녀의 건강 손상에 대한 산재 인정 신청을 접수했다. 제주의료원 투쟁 덕분에 이번에는 판단 절차가 빠르게 시작되었지만 노동부는 법률이 개정되더라도 소급적용은 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보여 개정안을 둘러싼 싸움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물론 어떻게든 법 개정은 여러 한계를 지니겠지만 앞으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이 투쟁의 요구를 더 크게 확장해 나가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유해 노동환경으로 인한 노동자의 생식 건강 문제는 임신, 출산의 시기에만 한정되지 않아야 한다. 제주의료원 사건 이후 자녀의 산재 보상에 대한 문제는 주로 임신 중인 여성 노동자의 모성보호에 중점을 두어 논의되고 있다. 그러나 유해 노동환경의 영향은 임신·출산의 시기뿐만 아니라 일상의 노동환경 전반을 통해 확인되어야 한다. 따라서 일반적인 성 건강, 월경, 임신중지, 개인의 성정체성에 따른 건강 보장에 관한 문제도 고려되어야 하며, 이를 보장하기 위한 노동환경이 통합적인 권리로서 인식되어야 한다.

 

둘째, 유해 노동환경에 대한 판단은 성차별적 노동구조와 노동 공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해야 하며 더 다양하고 포괄적으로 인정되어야 한다. 앞서 언급한 성 건강, 월경, 임신중지, 임신·출산 등에 영향을 미치는 유해 노동환경은 단지 특정 유해 물질이나 유해 요인으로만 한정되어서는 안 된다. 작업장 환경, 고용 상태, 휴게 공간, 화장실, 휴게 시간과 휴가의 보장 정도, 과로와 스트레스 등이 모두 노동자의 성과 재생산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특히 여성 노동자들의 경우 대부분의 작업장이 남성 노동자를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기 때문에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작업환경 변화 역시 반영해야 한다. 또한 청소, 요리 등 일반적으로 여성 노동자들이 많이 종사하는 노동에 있어서는, 지금까지 노동으로 인식하지 않았던 태도를 산업에서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전반적인 문제들이 제대로 인식되어야 하며 포괄적으로 인정되어야 할 것이다.

 

셋째, 여성 노동자뿐만 아니라 남성 노동자의 생식 건강도 자녀 건강에 관한 산재 인정의 판단 근거로서 고려되어야 하며 비혼, 비출산 노동자와 성소수자 노동자의 생식 건강 또한 성과 재생산 건강에 관한 권리로서 중요하게 다뤄져야 한다. 남성 노동자에게도 당연히 유해 노동환경으로 인한 생식 건강의 문제가 발생한다. 또한 남성 노동자의 생식 건강도 자녀 건강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남성 노동자의 생식 건강 역시도 자녀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산재인정의 판단 근거로서 고려되어야 한다. 한편, 임신·출산의 여부와 상관없이 모든 노동자에게 중요한 권리로서 보장되어야 하며 산재 인정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고용 여건이나 노동환경에 있어서 비혼, 비출산 노동자, 성소수자 노동자의 성·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은 별도의 고려가 필요한 부분도 있으므로 앞으로 이에 대한 연구와 권리 보장 요구도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유해 노동환경으로 인한 자녀의 건강 문제는 당사자 자녀의 권리로서 고려되어야 한다는 점을 짚고자 한다. 지금까지는 여성 노동자의 임신 중 영향으로 인한 문제로 부각되다 보니 많은 여성 노동자들이 산재 인정 투쟁을 하면서 자녀에 대한 미안함을 가지고 투쟁하게 되고, 선천성 장애나 질병을 가지고 태어난 자녀들은 권리를 요구하는 당사자의 위치를 가지지 못했다. 그러나 태어난 이후의 자녀는 한 사람의 독립된 주체로서의 권리를 지니며 성장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권리를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재생산 권리의 관점에서 보면 성과 재생산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유해 노동환경의 문제는 자녀의 성과 재생산 건강과 권리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앞으로 이 투쟁의 의미가 산재로 인한 생식건강 피해 노동자의 부모로서의 호소로만 남지 않고, 자녀들 또한 직접 권리의 주체로 설 수 있는 운동으로 더 확장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와 함께 노동자의 권리로서 성과 재생산 권리가 어디서든 당연하게 이야기되는 날이 오도록, 더 많은 동지들이 함께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