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로 읽는 노동] 그 노동자는 왜 복직투쟁에 나섰나 다큐영화 <그림자들의 섬> / 2020.07

[문화로 읽는 노동] 

 

 

그 노동자는 왜 복직투쟁에 나섰나 다큐영화 <그림자들의 섬> 

 

 

강남규 / 문화사회연구소 운영위원 

 

 

시간은 기억을 남기고, 기억은 감정을 만든다. 더 많은 시간은 더 많은 기억을, 더 많은 기억은 더 많은 감정을 남긴다. 이 감정이라는 것이 복잡미묘하다. 소위 '합리적 이성'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도 어떤 감정적 상황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는' 무엇이 되곤 한다. 이해하기 어려운 얘기는 아니다. 사소하게는 헤어진 애인과의 기억이 남아있다는 이유로 특정한 음식을 먹지 않는다든지, 뭐 그런 것들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런 얘기가 남의 얘기가 되면 어쩐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된다. 별다른 동질성이 없어서 감정이입 할 구석조차 없는 남의 얘기라면 더욱 그렇다. 노동자가 그렇다. 국민 대다수가 노동자이지만, 스스로 '노동자'라는 정체성을 갖고 사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노동조합을 하는 노동자는 더욱 그렇다. 노동조합 조직률이 10% 남짓밖에 되지 않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이 대체 왜 대화보다 투쟁을 선택하는지, 왜 일해서 돈을 벌기보다 자꾸만 파업을 벌이며 손해를 보는지, 그냥 다른 직장 알아보면 될 텐데 왜 그렇게 고집스럽게 수십 년간 '복직투쟁'에 매달리는지. 그들이 그럴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어떤 감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끝까지 모른다. 

<그림자들의 섬>이 보여주는 30년의 감정들

이런 사회에서 노동조합 운동을 하는 노동자들의 어떤 감정을 이해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그들의 이야기를 직접 듣는 것이다. 책을 읽거나, 인터뷰 기사를 읽거나, 영화를 보는 것이다. 누군가의 이름과 얼굴과 목소리를 알고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의 입장을 이해하는 공감의 범위가 넓어진다.

그것 역시 감정의 효과다. 무정형의 추상화된 어떤 낯선 타자가 아니라 이름과 얼굴이 있고 목소리를 알고 있는 특정한 누군가를 마주한 '기억'이 만들어낸 '감정'.

<그림자들의 섬>(2013)이 바로 그런 다큐멘터리 영화다.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30년사를 다뤘다. 이야기는 노동조합이 어용이었던 시절부터 시작된다. 질 떨어지는 도시락을 거부하는 투쟁을 조직해 회사가 식당을 만들도록 한 '도시락 거부 투쟁'부터 전환의 단초가 마련되고, 1987년 7‧8‧9월 노동자 대투쟁을 거치며 조합원 직접 선거로 민주노조 전환을 완성한다.

이어 박창수‧김주익‧곽재규 세 명의 열사에 대한 회상, 노동조합의 조직력이 가장 강했던 시기에 비정규직을 외면했다는 뼈아픈 반성, 정리해고와 희망버스 운동, 복수노조의 탄생과 최강서 열사까지, 끊임없이 투쟁하고 사람이 죽고 실패하거나 성공하고 반목하는 이야기가 반복된다.

그렇게 30년이다. <그림자들의 섬>은 이 30년에 걸친 이야기를 한진중공업 노동자들(김진숙‧윤국성‧박성호‧박희찬 등)의 목소리로 풀어낸다. 그들이 가진 '기억'이란 이런 것들이다. 그들은 어용노조를 민주노조로 바꿔내 인간다운 공장을 만들어냈다. 그럼에도 여전히 공장에서의 일은 그 자체로 얼마나 위험한지, 하루가 멀다하고 산재로 죽는 사람들을 목격해 왔다.

그들은 1991년 박창수, 2003년 김주익‧곽재규, 2012년 최강서까지 한 사람의 의문사(박창수)와 세 사람의 자살을 목격했다. 그들은 연대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무사안일주의가 어떤 결과로 돌아오는지, 노동조합의 힘이 약할 때 회사가 얼마나 쉽게 말을 뒤집을 수 있는지를 수십 년간 경험해 왔다.

그들의 '감정'은 바로 이러한 30년간의 기억들 속에서 형성된 것이다. 쌓이기만 하고 제대로 해소되어 본 적은 없는 감정들이다. 이러한 감정들이 만들어내는 복잡미묘한 장면들이 이 다큐멘터리에는 자주 나온다.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기억을 공유해야만 이해할 수 있는 장면들이다. 

'또 한 명 깨졌네', 그 말에 담긴 감정

그들은 어째서 그렇게 노동조합을 지키는 일에 매달리는가. 1986년 노동조합 대의원에 출마해 당선됐다가 해고된 뒤 지금까지 복직하지 못한 김진숙씨가 이런 말을 한다. "술 먹으면 세상을 뒤집을 것처럼 떠들면서도 그 다음날 출근하면 그렇게 순한 양이 될 수가 없는 사람들. 그 아저씨들이 변하는 것을 봤잖아요."

어용노조 시절에는 순한 양처럼 다니며 소모품 취급을 당했지만, 민주노조 건설과 함께 투사가 되어 숱한 권리를 쟁취해온 노동자들은 '민주노조'의 귀중함을 DNA에 새겼다. 김진숙씨 역시 그 노동자들이 변하는 과정을 함께했기에, 숱한 당근과 채찍에도 노동조합 깃발을 버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어째서 현장에서 떨어져 죽은 사람을 내려다보면서 "또 한 명 깨졌네…" 하고 비인간적으로 중얼거리는가. 그러지 않으면 도무지 그다음 날의 업무를 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저 사람의 죽음을 자신의 일처럼 슬퍼하면, 자신도 당할 수 있는 일이라고 여기면, 저 사람이 떨어진 그곳으로 누가 다시 올라갈 수 있겠냐는 얘기다. 

김주익씨는 어째서 타워크레인에 홀로 올라갔고, 또 거기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나. 그의 죽음을 알게 된 곽재규씨는 왜 스스로 몸을 던졌나. 시간이 한참 흐른 뒤, 김진숙씨는 왜 김주익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그 타워크레인에 올라갔나. 왜 그는 "129일(김주익씨가 타워크레인에 머문 시간)만 넘기자"고 생각했나.

최강서씨는 왜 박근혜 후보의 당선 직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나. 복수노조(한진중공업 노동조합)가 설립되고 민주노조(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 조합원이 대거 이탈하는 상황을 지켜보면서도 왜 노동자들은 그들을 원망하면 안 된다고 말하는가.

<그림자들의 섬>은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30년사를 그들이 직접 구술하게 함으로써 그들에게 이름과 얼굴, 그리고 목소리를 부여한다. 그들은 더 이상 낯선 타자가 아니게 되고, 우리는 그들의 감정을 비로소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언뜻 비합리적인 것처럼 보였던 그들의 말과 행동에 모두 맥락이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 노동자가 복직투쟁에 나서는 이유

그리고 여기, 새로운 싸움을 준비하는 60세 여성이 있다.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용접공. 수많은 남성이 민주노조 하기를 두려워하던 1986년, 겁도 없이 스물다섯의 나이로 노동조합 대의원에 출마하고 심지어 당선된 노동자. 바로 그 때문에 해고된 뒤로도 35년을 끊임없이 싸워온 운동가.

47미터 높이의 타워크레인에 올라가 309일을 농성해 정리해고를 철회시킨 사람. 고공농성 하는 친구를 위해 항암 투병 중인 몸으로 부산에서 대구까지 걸어간 동지, 김진숙. 해고되지 않았다면 올해로 정년인 나이지만 그는 6월 23일 '복직투쟁'을 선언했다.

누군가는 물을 것이다. "왜 굳이?" 그의 싸움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욕망을 투사한 말로 김진숙씨를 조롱하지만, 이제 우리는 안다. 그가 한진중공업으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 '돈' 때문은 아닐 것임을. 그의 복직은 35년 전 민주노조를 건설하려던 그의 투쟁이 해고사유가 될 수 없음을 회사로부터 확인받겠다는 것이며, 다시 말해 그의 삶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하겠다는 것이다.

또한 비록 '지연된 정의'일지라도, 부당하게 해고당한 사람은 반드시 직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수많은 해고노동자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의지다. 그것이 항암 투병하는 몸을 이끌고 기어이 싸움에 나서는 이유임을 우리는 이제 안다. 

동료 노동자들은 그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다. "이번 복직 투쟁은 시대를 개척해 온 한 인간에 대한 예의이며 동지에 대한 의리를 지키는 투쟁입니다."(김재하 민주노총 부산본부장) 그리고 무엇보다 김진숙씨 본인의 말이, 이것이 지난 35년의 맥락 위에 있는 투쟁임을 분명히 한다. 우리는 그의 말에 서린 감정을 이해해야만 하고,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35년 동안 단 한 번도 포기하지 않았던 복직의 꿈. 그 꿈을 이룰 마지막 시간 앞에 섰습니다. 나는 다시 전선으로 갑니다. 내가 돌아갈 곳. 박창수 위원장이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조합원들의 곁으로 가기 위해. 김주익 지회장이 그토록 내려오고 싶어 했던 현장으로 가기 위해."

 

[문화로 읽는 노동] 자본주의 발전 시기 여성노동의 면면을 드러내다: 영화 「영자의 전성시대」/ 2020.06

 

[문화로 읽는 노동] 

 

 

자본주의 발전 시기 여성노동의 면면을 드러내다: 영화 「영자의 전성시대」

 

 

김대호 / 회원 

 

30~40대의 경우 제목은 들어봤지만 못 본 사람들이 많을 것이고, 20대의 경우 제목도 들어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혹여 제목을 들어본 사람은 1990년대 SBS에서 방송했던 예능 프로그램의 한 코너에서 개그맨 이영자와 홍진경이 버스 안내양으로 나와 그 시절 잘나간다는 연예인들을 버스 승객(게스트)으로 맞아 웃음을 주는 프로그램으로 알고 있는데, 이 프로그램의 기원은 소설이 원작인 영화 <영자의 전성시대>이다.


영자의 수난시대
      

영화 <영자의 전성시대>에서는 그 시대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청춘남녀가 주인공이다. 동생들의 학비와 가족의 생활비를 벌기 위해 시골에서 상경하여 청계천 철공소 사장의 집에서 가사도우미로 일을 하는 영자(배우 염복순)와 청계천 철공소에서 견습공으로 일을 시작한 창수(배우 송재호)가 어떻게 만났는지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두 사람은 창수가 철공소 사장의 심부름으로 사장의 부인에게 돈 봉투를 전달하기 위해 집에 들르게 됐다가, 거기서 가사도우미로 일하는 영자를 처음 만나면서 사랑이 시작된다.
      
제목은 <영자의 전성시대>지만, 첫 장면을 제외하고 영화는 끝날 때까지 제목과는 반대로 '영자의 수난시대'가 시작된다. 교제를 시작하자마자 창수는 군에 입대하고, 홀로 남은 영자는 철공소 사장의 아들에게 성폭행을 당하지만, 오히려 영자는 사장 부인이 준 얇은 돈 봉투를 받고 쫓겨난다.

그 뒤로 영자는 여인숙에서 살면서 봉제공장에서 힘들게 일을 하는데, 적은 월급으로는 생활비가 감당이 되지 않아 룸메이트 언니의 추천으로 술집에서 접대 일을 시작한다. 접대 일 역시 쉽게 적응되지 않아 당시 '버스 안내양'으로 불렀던 버스 차장 일을 시작하지만, 많은 승객을 태운 버스 출입문에 매달린 채로 달리다가 떨어져 오른팔이 잘리는 산재사고를 당한다.
   
사고성 재해라 산재승인 절차가 간단했는지 산재보상금 30만 원을 받는데, 미장원을 차리자는 룸메이트 언니의 이야기를 뿌리치고 동생들의 학비와 가족의 생활비로 30만 원 전액을 엄마에게 보낸다. 더는 희망이 없다고 느끼면서 자살을 시도하다가 마지막으로 영자의 눈에 들어온 것이 성매매였고, 오른쪽 팔이 없는 상태에서 다른 일을 할 수도 없어 성매매 여성으로 살아가게 된다.

군 복무를 하던 중 영자와 연락이 끊긴 상태로 제대를 한 창수는 목욕탕 보일러실을 거처로 삼아 목욕탕 세신사로 일을 하는데, 영자가 성매매한다는 소식을 듣고 영자를 찾아간다. 양복점을 차리는 게 꿈이었던 창수는 목욕탕에서 일하면서 틈틈이 영자를 도와주게 되고, 영자의 몸에 꼭 맞는 의수까지 만들어준다.

성매매 일을 힘들어하던 영자를 설득해 일을 그만두게 하고 목욕탕 보일러실에서 같이 살아가다가 꼰대 목욕탕 보일러공(배우 최불암)의 간섭에 낙심하여 영자는 다시 창수 곁을 떠난다.

몇 년이 흘러 창수는 양복점이 아닌 세탁소를 운영하면서 살다가 영자를 봤다는 친구 말에 영자를 찾아가는데, 영자는 어느 도시 변두리에서 불편한 다리로 오토바이로 짐을 나르던 남편(배우 이순재)과 함께 아이를 키우면서 행복하게 살고 있었고, 창수는 그런 모습을 보고 영자를 다시 떠난다.

여기까지가 <영자의 전성시대>의 줄거리다. 영화의 결말은 영자의 남편과 전 남친이었던 창수가 넓은 도로에서 같이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는 희망적인 장면이다. 하지만 원작 소설에서는 영자가 성매매했던 곳에서 화재가 발생하고, 시체로 발견되는 영자를 보면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고 한다. 원작 소설은 그 시절 배우지 못했던 여성 노동자의 가장 끔찍한 결말을 보여주고 있다.
        

영화 < 영자의 전성시대 > 포스터

<영자의 전성시대>는 1975년 개봉 당시 서울에서만 36만 명이 관람하였던 최고의 흥행영화였다. 1970년대는 우리나라가 본격적으로 산업화를 진행하던 시기로 지방의 많은 젊은이가 서울로 상경하여 노동자로 살아가는데, 자본주의적 모순 역시 급격하게 나타났던 시기이다. 특히 일할 기회가 상대적으로 많았던 남성 노동자인 창수에 비해 여성이었던 영자는 가사도우미, 봉제공장 노동자, 버스 차장 외에 더 이상의 기회가 없었다.

이러한 여성 노동자들에 대한 사회 폭력이, 그리고 남성 노동자들의 폭력이 영자의 삶을 어떻게 나락으로 떨어지게 만들고 있었는지 영화는 리얼하게 보여준다. 45년 전의 영화이고, 시대가 많이 변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여성 노동자들에 대한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폭력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영화다.

<영자의 전성시대>는 영자와 창수의 이야기가 빠르게 전개되기 때문에 지루하지 않다. 노동보건을 전공으로 하는 필자로서는 그 당시 철공소의 작업환경과 창수가 살았던 목욕탕 보일러실의 노동환경을 볼 수 있는 것이 흥미로웠고, 아직까지 현역으로 활동하는 배우 최불암과 이순재의 40대 모습을 볼 수 있는 것도 쏠쏠한 재미다.

물론 몇 가지 불편한 장면들도 있다. 창수가 영자를 처음 봤을 때 폭력적으로 들이대는 장면, 영자에게 꼰대처럼 훈계하는 장면, 성매매를 하던 영자를 때리는 장면, 성폭행 가해자인 철공소 사장과 영자가 성폭행 사건 이후 교제하는 장면 등은 꽤 불편하다.

하지만 <영자의 전성시대>는 자본주의 발전 단계에서 여성 노동자가 어떻게 희생되는지 그 과정을 리얼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여성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 이주 노동자 등 취약 노동자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이 시대에 다시 볼 가치가 있는 영화이다.

특히 소설 <영자의 전성시대> 결말은 주인공 딸의 비극적인 결말로 끝을 맺는 박경리의 소설인 <김약국의 딸들> 못지않게 리얼하다는 점에서 명작의 반열에 올릴 수 있는 작품이 아닐까? <영자의 전성시대>는 한국영상자료원 유튜브 채널에서 무료로 공개하고 있다.

[문화로 읽는 노동] 플랫폼 속 밀레니얼 리얼리즘 / 2020.03

[문화로 읽는 노동] 

 

 

플랫폼 속 밀레니얼 리얼리즘-장류진 소설집 <일의 기쁨과 슬픔> 

 

 

 

김상민 / 문화사회연구소 소장 

 

 

 

'일의 기쁨과 슬픔이라… 일에는 당연하게도 슬픔도 기쁨도 있는 법이지' 하면서 책을 넘기다 보면 어느새 작가가 만들어 놓은 가공의 이야기와 실재하는 사물들 사이에 걸쳐진 묘한 덫에 걸려들어 소설의 기쁨과 슬픔을 맛보고 있음을 깨닫는다.

아니, 다 읽고 책을 접을 때까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그렇다고 환상적 리얼리즘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환상적이라기에는 너무나 현실적이고, 리얼리즘이지만 웃음을 잃지 않는다. 이 소설(집)을 밀레니얼 세대, 페미니즘 리부트, 소확행, 워라밸, 플랫폼의 시대에 길어 올려진 (이렇게 이름 붙일 수 있다면) '밀레니얼 리얼리즘'의 전형이라고 한다면, 작가가 슬퍼할까?

 



밀레니얼 세대의 노동 이야기

'우리 동네 중고 마켓'의 준말인 '우동마켓'이라는 중고거래 앱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이 스타트업에서 "사실상 막내"인 나는 서비스 기획자다. 앱 개발자들이 서비스를 런칭하거나 수정하면 제대로 작동하는지, 사용상 문제는 없는지를 테스트하고 피드백하는 역할도 한다.

나는 앱 사용자들의 편의를 위해 어떤 기능을 개선해야 하는지, 어떤 과정에서 버그가 생기는지에 무척 관심이 많다. 아니나 다를까 소규모 스타트업에서 유행하는 '스크럼 시간'에 나는 '거북이알'이라는 특이한 우동마켓 사용자를 만나서 조사해보라는 대표의 지시를 받는다. '거북이알'은 "하루에 거의 백 개씩 글을 올리고 ... 가격은 늘 인터넷 최저가보다 조금씩 싸게 책정"하는 데다가 "파는 물건에도 일관성이 없"어서 혹시 어뷰저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사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결국 우동마켓 직원임을 숨기고 의심스러운 사용자 '거북이알'과 직거래함으로써 그의 실체를 알게 된다. 우동마켓은 플랫폼이다. 플랫폼은 사용자(소비자)와 생산자(판매자), 나아가 광고주까지 포함하여 모두가 하나의 앱 안에서 나름의 독자적 생태계를 유지하고 확장할 수 있어야 성립되는 기술적, 경제적, 문화적 토대다.

그런데 여기에 앱 개발자, 즉 마치 사용자나 생산자와는 달리 객관적 관점을 가져야 할 플랫폼의 직원이 상품을 매개로 생산자와 접촉한다. 그야말로 이 플랫폼은 플랫폼 개발자로 하여금 플랫폼을 통해 (혹은 플랫폼의 방식으로) 노동하게 만든다. 그런데 그 만남(혹은 노동)을 통해 '거북이알'이 들려준 이야기는 소설 밖에서 듣고 있던 이의 무릎을 털썩 꺾이게 만든다.

이웃 건물에 입주해 있는 카드사의 사원증을 걸고 나타난 '거북이알'과 물건을 거래한 뒤 우연히 점심을 같이 먹게 된 나는 "포인트로 사는 거니까 부담 갖지 말아요. 나 포인트 엄청 많아요. 아마 우리나라에서 제일 많을걸?"이라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듣는다.

이 포인트라는 것은 말하자면 신용카드로 물건을 구매하면 구매액수에 따라 부여하는 숫자인데, 소비자가 이것을 (아주 많이) 모아 사은품을 받거나 현금화할 수 있는 가상의 화폐(아직 블록체인을 떠올리진 말자) 비슷한 것이다. 클래식 마니아이자 인스타그램 셀럽인 회장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죄로 월급을 카드 포인트로 받게 된 슬픈 사연.

노동의 대가가 화폐가 아니라 소비의 보상으로 주어지는 포인트라니. 물론 포인트도 화폐의 기능을 하기는 하지만, "회사 생활 십오 년 하면서 한 번도 운 적이 없었"던 그녀는 그 포인트를 보고는 결국 눈물을 흘리고 만다. 이유는 "포인트가 너무 많아서." 마치 수십만 SNS 팔로워를 거느린 현실의 그 유명한 회장님인 것만 같은 그분은 자신이 '짠~' 하며 SNS에 올렸어야 할 깜짝 뉴스를 '거북이알'이 그만 미리 누설하는 바람에 김이샜고 찌질하게 월급-포인트 갑질로 응대한 것이다.

인스타그램에서 카드 적립 포인트로 이어지는, 소셜미디어 플랫폼과 가상 화폐 사이의 매끄러운 전환을 그려내는 소설적 묘사는 아마도 우리 시대의 노동과 자본의 본질을 보여주는 모범적인 사례라고 칭하고 싶다. 소셜미디어를 통한 회장님의 사회적 자본의 축적과 개인적 유명세를 위한 허세가 어떻게 한 노동자 개인의 노동과 소비의 대가인 포인트로 귀결되는지는 깊이 연구해볼 가치가 있을 정도다.

일은 일일 뿐…

이 심각한 사태는 '거북이알' 특유의 긍정적인마인드와 밀레니얼다운 생존 방식으로 극복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는 "포인트를 돈으로 전환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중고거래를 선택한다. 포인트를 써서 "잘 팔릴 법한 물건들"을 직원 할인가에 "근무시간에" 구매해 우동마켓에 올리고, "점심시간이나 외근 나갈 때 직거래"하면서 "나름대로 손해를 최소화"하는 방법을 터득한다.

자신의 개인 시간은 쓰지 않으면서도 근무시간에 틈틈이 (어쩔 수 없는) 제2의 밥벌이를 해나가는 그녀의 지극히 생존주의적 워라밸은 존경스럽지 않을 수 없다. 포인트로 월급을 주는 회사를 위해 어떻게 나의 소중한 시간을 1분이라도 더 쓸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이들이 자기 일을 증오하거나 두려워하는 것은 아니다. 일은 일일 뿐이다. 거의 유일하게 실명으로 등장하는 회사인 '엔씨소프트' 사옥을 바라보며, 두 사람은 이런 대화를 나눈다.

"저희 대표나 이사는 매일매일 그런 생각을 하겠죠? 어떻게 돈 끌어오고, 어떻게 돈 벌고, 어떻게 3퍼센트의 성공한 스타트업이 될지 잠들기 직전까지 고민하느라 걱정이 많을 거예요. 전 퇴근하고 나면 회사 생각을 안 하게 되더라고요."

"나도 그래요. 사무실을 나서는 순간부터는 회사 일은 머릿속에서 딱 코드 뽑아두고 아름다운 생각만 하고 아름다운 것만 봐요."

대표가 편애하는 남성 동료 개발자에게 치이고, 유명인사인 갑질 회장님에게 무시당하는 이 밀레니얼 여성 노동자들은 너무나 적절하고 우아한 자신들만의 노동윤리를 통해 거대한 시스템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균열을 만들어 낸다. 언제나 마치 자연스럽게 강요되는 퇴근 후 업무, 잔업, 야근, 특근, 회식은 임금노동자를 회사의 노예로 만들고 만다는 것을 사무치게 잘 알기라도 한 듯, 칼퇴와 퇴근 후 회사잊기를 실천하고 있다.

밀레니얼 세대의 노동관, 이해가 아닌 윤리와 실천의 문제

그런데 회사는 끈질기기 때문에 퇴근 후에도 우리를 계속해서 호출한다. 회사를 생각하고 염려하게 만든다. 그것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아름다운 생각"과 "아름다운 것"이 필요하다. 거북이라든가 "루보프 스미르노바"라든가. 반려동물에 대한 사랑이든 아티스트에 대한 덕질이든, 임금 노예가 아닌 자유로운 존재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뭔가 다른 것들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들은 거창하거나 대단할 필요가 없다. 금요일 저녁 사무실에 혼자 남아 있는데 퇴근한 줄 알았던 대표가 들어온다. 하지만 "사실 야근하려고 남아있던 것은 아니었다." 저녁 아홉 시에 시작하는 루보프 스미르노바 리사이틀 온라인 예매를 위해 회사에서 시간을 때우고 있을 뿐이었다.

기다리는 동안 "고독한 조성진" 채팅방에서 그의 카네기홀 연주사진을 업로드하고 홍콩행 항공권을 예매하면서. 조성진은 들어봤지만 루보프 스미르노바가 궁금하여 굳이 검색해보지 않기를 권한다. 누구에게나 덕질은 숨기고 싶은 것일 테니까.

다만 일의 슬픔이 있지만 기쁨 또한 있어서 우리를 살게 하고 우리 삶을 아름답게 한다는 것은 언제까지나 진리일 것이다. 밀레니얼 세대의 이해 못 할 노동관은 장류진의 소설이 그려내듯 지금의 기술적, 경제적, 문화적 상황에서 기쁨을 찾아내어야만 (그래서 생존해야) 하는 특별한 조건으로부터 온다. 따라서 그것은 이해의 문제가 아니다. 노동의 새로운 윤리와 실천의 문제다.

"사시는 동안 적게 일하시고 많이 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