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시간 읽어주는 사람] 마블 영화 시리즈에서 노동은 어디로 갔을까? / 2018.12

마블 영화 시리즈에서 노동은 어디로 갔을까?

 박상빈 (서교인문사회연구실)

 

내년에 어벤져스 시리즈의 마지막 편이 나온다고 한다. 과연 그 마지막 편으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arvel Cinematic Universe, 이하 MCU)가 끝이 날지 우리로서는 알 수 없다. 미국 군수재벌의 이중생활이나 2차 세계대전 참전군인의 세계 구원기로 시작한 이 영화의 우주(MCU)는 가히 한 시대를 풍미한 영화 스타일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전 세계적으로 수백억 달러의 수입을 벌어들였고, 디즈니를 세계 최대의 영화배급사로 성장하게 만든 일등 공신이다. 또한 여태껏 볼 수 없었던 시리즈 영화의 스타일을 제시했다는 평가도 가능하다. 

▲ 마블 히어로 [출처: 나무위기]

보편 언어가 상실된 마블 시리즈 

사실 나는 언제부터인가 마블 영화를 보는 일이 퍽 피곤한 일처럼 느껴졌다. MCU의 어떤 특징 때문이다. 마블 영화는 자꾸 영화 바깥에 있는 정보를 관객에게 미리 공부하고 오라고 부추긴다. 관객이 영화로 보지 않은 곳에서도 영화 속 인물들은 지속해서 살아있고, 활동하고 있다. MCU의 새 영화가 나오면 그곳에는 MCU에 속한 다른 영화들에 대한 언급이 당연하게 펼쳐지고, 그걸 이해하는 건 온전히 관객의 몫으로 전가된다. 

그게 몇 명이 되었건, 수천만 명이건, 수십억 명이건 간에, 같은 가격의 입장권만 사면 같은 이야기가 전달되고 따라서 같은 즐거움을 느끼게 되는 것. 그것은 20세기 영화의 이상이었다. 그러나 21세기의 영화는 조금 달라졌다. 같은 가격을 지불하고 들어간 영화관에서 누군가는 사건의 전개를 따라가기에 급급한 반면, 다른 누군가는 전작에서 펼쳐진 인물 관계도를 상기하면서 화면 속에서 펼쳐지는 행위들의 온갖 숨은 의미까지 찾아내며 영화를 즐긴다. 물론 20세기에도 보편언어로서 영화의 이상과는 달리, 실제 영화관에서는 관객의 정체성에 따라 영화의 의미가 많이 달라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20세기에 영화의 이상적인 형태는 모두에게 동일한 즐거움을 전달할 수 있는 보편언어였다. 

그런데 MCU는 적어도 그런 형태의 이상적인 언어를 추구하려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MCU는 자신을 한 편의 영화로 국한하지 않음으로써 이전의 MCU 영화들을 섭렵하는 노동을 한 관객들에게만 자신의 즐거움을 허락한다. 마치 은행이 ATM 기기를 도입하면서 은행 출납계 직원의 노동을 소비자들에게 전가한 것처럼. 

바꿔 말하자면 MCU 영화 한 편의 가격은 단순히 1만 원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새로 출시되는 MCU 영화 한 편의 온전한 재미를 느끼려면 최소한 MCU의 다른 모든 영화를 한 번은 보아야 하므로 영화의 편수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그 실질적인 가격은 상승한다고까지 할 수 있다. 

MCU가 구축한 완벽한 세계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후기 자본주의 문화논리(Postmodernism, or the Cultural Logic of Late Capitalism)에서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의 그 유명한 보나벤투라(Bonaventura) 호텔 공간에 대한 분석을 떠올려보자. 

일본의 미쓰비시사가 투자하고 존 포트먼(John Portman)이 설계한, 1974년 시공되어 1976년 완공된, 로스앤젤레스 신중심가 한가운데에 위치한, 35층이라고 표기되어있지만 실제로는 33층의 층고를 가진, 꼭대기에는 빙글빙글 회전하는 레스토랑이 있는, 현재 20억 달러를 웃도는 가치를 지녔다고 평가되는 이 호텔은 제임슨에게 포스트모더니즘의 문화 논리를 가장 투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건축물이었다. 

이 건물은 마치 선글라스를 낀 사람처럼 외벽이 모두 반사유리로 마감되어 그 속내를 파악할 수 없다. 고전적인 호텔들의 차양 달린 위풍당당한 입구 같은 게 없어 호텔의 내부 공간이 외부 공간과 분리된 것 같으며, 입구에 들어선다고 할지라도 쇼핑몰이나 정원이 펼쳐져 있어 로비에 도착할 때까지는 한참을 더 이동해야해 호텔 외부에서의 방향감각이 호텔 내부에서는 단절된다. 이런 특징은 제임슨으로 하여금 이 건물을 도시의 한 부분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그와 맞먹는 것, 즉 도시의 교체물이나 대체가 되고자 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게 만든다. 

이렇게 그것이 자리하고 있는 외부 도시를 거부하면서 어떤 전체적 공간, 완전한 세계, 혹은 일종의 축소도시가 되고 싶어 한다는 생각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자신의 문화적 생산을 그 내용으로 삼는 경향을 가진 문화의 자기지시성을 두드러지게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제 MCU의 구조를 떠올려 보자. 2008년 개봉했던 <아이언맨>을 필두로 펼쳐지기 시작한 MCU는 기존의 히어로 영화 시리즈물이 히어로 한 명의 삶과 영웅적 행적을 좇는 것과는 달리 세계 곳곳에서 다른 기원을 가지고 활동을 시작한 능력자 모두를 주인공으로 삼는다. MCU로 들어가는 입구는 시간상으로 가장 먼저 개봉된 <아이언맨>이 될 수도 있지만, <토르><캡틴 아메리카>,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닥터 스트레인지>, <앤트맨>, <블랙팬서>, <스파이더맨: 홈커밍>이 된다고 해도 그 우주를 이해하는 데에는 큰 무리가 없다. 일단 그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개별 영화들이 가지고 있는 서사의 층위는 좀 더 근본적인 우주(MCU)의 역사 속에서 돌출된 미시적 사건에 불과하다. <어벤져스> 시리즈가 보여주는 전 우주적 전쟁의 거시적 전장 속에서 각각의 영웅들은 각자의 매력을 뽐내며 관객들을 유혹한다. 마치 거대한 쇼핑몰 안의 서로 다른 상품과 분위기를 판매하는 소매점들처럼. 

노동자의 재현을 거부하는 MCU 

MCU의 또 다른 특징은 그 우주 안에서 노동()의 재현을 거부한다는 점이다. 시리즈가 진행되면서 토니 스타크의 비서 버지니아 펩퍼 포츠(기네스 펠트로)의 지위가 노동자의 신분에서 최고 경영자로 급상승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스파이더맨: 홈커밍>의 피터 파커(톰 홀랜드)는 이전의 소니 픽쳐스 버전의 피터 파커(토비 맥과이어)와는 달리 노동하지 않는 이로 그려진다. 피자를 배달해 생계를 해결하고 지역신문사에 자신이 찍은 사진을 투고해 사회적 지위 상승을 이루려 했던 피터 파커는 이제 군수 재벌 토니 스타크(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후원 아래 들어가 노동의 강제로부터 해방된 것처럼 보인다. 혹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사례처럼 <가오갤> 시리즈는 무수히 많은 익명의 노동자(군인)를 우주전쟁에 배치하곤 하는 <스타워즈> 시리즈보다, 거대한 우주함선 안에서 선원 개개인의 두드러진 개성을 부각하는 <스타트렉> 시리즈의 방식에 더 가깝다. <가오갤>의 등장인물은 <스타트렉>보다 한층 더 진일보하여 모두가 복제 불가능한 각자의 독특한 개성을 지녀 서로 다른 자신만의 목적으로 움직이기에 타인의 지시를 따른다는 일은 상상할 수 없다. MCU에서 유일하게 타인의 지시에 복종하며, 타인을 위해 노동하는 존재는 토니 스타크의 AI 비서 자비스 뿐이다. 그러나 그 역시 인피니티 스톤의 힘으로 자신만의 신체가 생기고 토니로부터 독립한다. 

노동자이기보다는 전문가이기를, 자기 자신을 경영하는 경영자이기를 촉구하는 것이 신자유주의의 노동 이데올로기라는 점은 이제 익숙해졌다. 어떤 것이든 너무 많이 말해지다 보면 그 본래의 맥락에서 떨어져 나와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되는 법이다. MCU가 보여주는, 자신을 경영하는 캐릭터 역시 그렇다. 그들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보여주는 유토피아적 삶, 그러니까 자신의 가치를 끌어올려 지위 상승을 이루어내는 삶을 어느 정도 성취하는 것처럼 보이긴 한다. 그러나 그 성취는 스타크 인더스트리의 자금력과 미국의 패권 질서에 지배를 받는 한에서의 성취다. 혹은 MCU의 거대한 우주 전쟁을 박진감 넘치게 표현할 수 있는 도구로서 존재하는 한에서의 성취다. 

“[우주]의 한 부분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그와 맞먹는 것, [우주]의 교체물이나 대체가 되고자 하는” MCU의 욕망은 그들이 내쫓았던 노동()들의 형상을 부지불식간에 다시 불러들인다. 경영자들은 자신을 위해 일하는 동시에 MCU라는 거대한 타자를 위해 일한다. 이쯤 되면 MCU를 동시대 자본주의 사회를 대체하는 완벽한 또 하나의 세계라고 말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아니, 대체하는 것인지 알레고리 속에서 연장해 나가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우울한 비전 

이런 맥락 속 비전(VISION)’의 우울함을 한번 살펴보자. 자비스이던 시절(<아이언맨>, <아이언맨2>, <아이언맨3>)에는 감정을 가질 새도 없이 스타크를 위해 노동했다. 그러나 <에이지 오브 울트론> 이후 신체를 얻게 되고 자기 자신의 존재 목적이 타인을 위해 노동하는 존재가 아님을 알게 된 순간부터 그는 우울감에 빠진다. 본다는 것이 지니는 앎의 함의(‘I see’라는 관용어, 혹은 백문이불여일견’)를 떠올려 봤을 때, 보기()의 화신인 그가 느끼는 우울감은 퍽 당혹스럽다. 그가 느끼는 우울감은 이제 노동이 완벽하게 사라진 세계, 모두가 자기 자신의 목적의식 속에서 행위를 결정하는 세계가 완성된 시점에서 자신의 행위를 결정하지 못하는 데로부터 오는 우울감이기 때문이다. 

물론 영화 속에서는 그가 비전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우주적인 지식을 얻게 된 결과 우주를 위해 인류를 없앨 것이냐 인류와 함께 싸워나갈 것이냐를 고민하게 되면서 그런 감정에 사로잡힌 것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나는 그가 우울감을 느끼는 이 지점이 동시대 유연 노동체제 속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가지는 감정의 구조와 유비관계를 이루는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가령 배달대행 노동자들은 자기 자신의 가치를 건당 3,500원의 배달대행료로 표상한다. 그들이 자신의 가치를 올리는 일은 더 많이, 더 빠르게 배달을 치는 것을 통해서이다. 그러는 와중에 요식업의 유통 속도는 더욱 빨라지고, 사회 전체의 가치 실현 속도가 증대해 연간 GDP의 일정한 상승에 기여한다. 그들은 그 누구도 타인을 위해 일한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사회라는 개인들의 완벽한 타자는 그들을 자신의 가치를 증대시키게끔 기계처럼 작동하는 한에서만 그 개인들을 자신의 구성원으로 가진다. 사회 내에서 배달대행 노동자들의 노동은 노동력 재생산비용을 절감시키는 노동으로 나타나며, 자본가들의 잉여가치 수취분은 그들이 의식하지 않은 이 과정에 의해 증대하게 된다. 이 배달대행 노동자들의 오롯한 자기 자신을 위한 노동은 토니 스타크를 위해서만 노동하는 자비스의 이전의 삶과 거울 이미지를 이룬다. 정확히 같지만 정확히 정반대인 그런 이미지로서 말이다. 

비전이 우울감에 빠지는 순간은 그 우주에서 타인을 위한 노동을 완벽하게 제거한 순간이다. 우울이라는 감정은 이전에 애착을 가졌던 대상을 상실했을 때 발생한다. 비전의 대상은 명백하다. 그는 자비스이던 시절을 상실했다. 완벽하게 타인을 위해 일하던 자기 자신을. 그는 자기 자신의 목적을 위해 행동해야 하는 순간에 도달했을 때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결정하지 못한다. 

거울 이미지로서 비전의 우울감은 아마도 유연 노동체제의 노동자들이 자기 자신을 위한 노동이 자신을 배신했을 때 겪는 감정이 아닐까?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생활 수준은 나아지지 않을 때, 자기 자신을 위해 일하는 시간이 오히려 자신의 건강을 해칠 때, 그럴 때 느끼는 우리들의 감정이 아닐까? MCU가 구축한 완벽한 세계는 우리들의 세계를 정말인지 완벽하게도 대체/연장하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