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시간 읽어주는 사람] 소설은 '땀'을 흘린다 / 2019.06

[노동시간 읽어주는 사람] 

 

 

소설은 '땀'을 흘린다 

 

 

이종찬 / 문화사회연구소

 

 

<땀 흘리는 소설>(창비교육, 2019)은 "문학 수업을 통해 노동을 공부할 방법"에 대한 하나의 답변 격으로 기획되어 출간된 한국 단편소설 선집이다. 총 8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 이 책의 출발점은 "문학을 업으로 삼은 평론가들과 출판 관계자들에 대한 섭섭함"이었다고 엮은이들은 밝히고 있다.

이 책의 편집위원들은 모두 교육 현장에서 직접 문학을 가르치고 있는 교사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들의 문제의식은 "젊은 세대와 함께 읽을 만한 제대로 된 노동 문학 선집"이 마땅히 눈에 띄지 않았다는 데 있다. 물론 한국 사회에 노동문학의 흐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이 70~80년대의 노동 문학에 치우쳐 있었던 데 편집자들의 고민이 자리하고 있다. 오늘날의 청(소)년 세대와 함께 '지금 여기의 노동 문학'을 이야기하기에 그것들로는 시간의 이음매가 잘 맞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준비된 이 책은 "21세기에 새롭게 일과 직업에 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소설 선집"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노동의 구체적 양태는 시대에 따라 그 모습들을 달리해 왔다. 어제의 노동과 오늘의 노동이, 더 나아가서는 내일의 노동이 같은 형태를 띌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인간의 노동 환경이 시대를 막론하고 꾸준히 열악하였음을 따로 강조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땀 흘리는 소설> 속 이야기들에서 우리의 시선을 끄는 건 여전히 비루한 노동 환경으로 비롯된 감정의 어떤 무늬들이다. 노동의 조건이 가혹하다는 걸 '아는' 것과 그 가혹함으로 인해 초래된 마음의 무늬들에 대해 '이해'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좋은 문학과 예술은 인간과 세계를 아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이해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끈다.

먼저 김혜진의 <어비>를 읽는다.

도서 물류센터에서 일하는 '어비'는 동료 직원들 사이에서 수수께끼 같은 인물로 통한다. 소설 속 그의 모습은 자발적 유폐자의 형상을 닮아 있다. "그냥 별로 말할 게 없어요. 진짜요." 그는 말하자면 "여기까지라고 금을 그어 놓고 내내 그 경계를 지키는 데 필사적인 사람" 내지는 "있었나 싶으면 어느새 가고 없는 사람"이다. 여기까지 보면 자의식 과잉의 인물로 보이지만 그것도 아니다. 어비는 의식적으로 타인들과의 관계 맺음을 회피하는 유형이 아니라 그것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인물 쪽에 훨씬 가까워 보이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공간에서 근무하고 있는 소설 속 화자인 '나'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어비는 "웃으려고 하는데 그게 맘대로 안 되는 것 같았다."

단체 생활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노출하던 어비는 어느 날 팀장으로부터 책임 소재가 불분명한 클레임의 원인 제공자로 부당하게 지목받는다. 어비는 끝까지 자신의 잘못이 아님을 주장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회사를 그만 둔다. "햇볕 한 줌 들지 않는 이 커다란 창고를 빙빙 돌면서 인생을 낭비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나' 역시 얼마 뒤 퇴사를 하게 되는데 몇 주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생활용품 창고에서 어비와 다시 마주친다. 그 날 퇴근 후 '나'와 어비는 처음으로 같이 저녁 식사 자리를 하게 되면서 가까워지는 듯 하지만 그 다음날 어비는 말없이 자취를 감춰버리고 만다. 간밤에 지갑을 잃어버린 '나'는 그것이 어쩌면 어비의짓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지만 그것을 확인할 방법은 없다.
 

 
'나'가 어비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다시 보게 된 건 인터넷 개인 방송 사이트에서다. 어비는 그곳에서 기괴한 형태의 1인 방송을 하고 있었다. 산더미처럼 쌓아 놓은 번데기를 숟가락으로 게걸스럽게 떠먹거나, 싸구려 중국 음식들을 대량으로 시켜 빠르게 먹어치우는 어비의 먹방을 본 접속자들이 여기저기에서 별 풍선을 터뜨리기 시작한다. "어비가 벌어들인 돈과 앞으로 벌어들일 돈"을 카운팅해 보며 '나'는 어딘지 모르게 종잡을 수 없는 기분에 빠져든다.

 

김혜진의 <어비>에서 우리가 확인하게 되는 건 시대의 흐름에 따라 노동의 형태가 다양하게 분화되고 있는 현실이다. 다음과 같은 질문이 가능해진다. 어비의 인터넷 1인 방송은 노동일까 아닐까. IT 기술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인터넷 플랫폼 공간에서 제공되는 이와 같은 '플랫폼 노동'은 우리가 알고 있는 '노동'의 개념을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보게 만든다.

다음으로 읽고 싶은 작품은 구병모의 <어디까지를 묻다>이다.

'나'는 현재 카드 회사 콜센터 직원으로 일하고 있지만 원래 꿈은 아나운서였다. 한때는 자신의 목소리가 "언어의 잎맥을 살며시, 그러고도 단호하게 켜는 활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품고 있던 그였지만 꿈을 이루지 못하고 당장의 현실에 발이 묶여서는 지금의 직장에 취업해야만 했다. 그리고 규격화된 친절함의 언어로 점철된 그녀의 목소리는 애초의 매력과 활기를 잃어버렸다. 언어 폭력과 그것을 감내해야 하는 감정 노동은 일상이 되어버린 지 이미 오래다.

그런데 어느 날 걸려온 전화는 이전과는 결을 완전히 달리 하는 것이었다. 수화기 너머 '고객님'의 목소리, 그 첫마디는 다음과 같았다. "괜찮으세요?" '나'에게 그것은 "호미로 파헤쳐진 자리를 보드라운 흙으로 덮어 다지기 위해 토닥거리는 손길"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말문이 탁 막힌 게, 그 전까지 이어져 오던 콜의 무늬에서 한 조각이 삐끗 나가 버리니까. 그동안 퍼부어진 몇 톤 치의 욕이 거의 자장가에 가까운 패턴을 이루어 왔는데 거기 갑자기 완전 5도 화음이 추가된 상황". 바로 그 때였다. '나'는 그만 "부모님 돌아가신 것처럼 통곡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통화를 이어갈 수 없는 '나'를 대신해 다른 직원이 임의로 전화를 당겨 받지만 그 또한 마찬가지의 상황으로 전개된다. 그것을 이어받은 직원 역시도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만다. 그렇게 "울음은 우리 팀 전체에 염병처럼 퍼져 나갔어요."

구병모의 <어디까지를 묻다>는 인간 내면의 심층이 지닌 복합적인 역설을 잘 드러내 보여준다. 폭언은 상담원의 마음을 허물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친절함의 말 한 마디가 도리어 그들을 완벽하게 무너뜨려 버렸다. 인간의 마음이란 것이 이토록 허술하고 모순투성이다. 우리는 아직 인간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앞으로도 여전히 그럴 것이다.
   

 

 

[노동시간 읽어주는 사람] 시간의 의미를 묻는 하나의 방식, 미시마 유키오의 <목숨을 팝니다> / 2019.05

[노동시간 읽어주는 사람] 

 

 

시간의 의미를 묻는 하나의 방식, 미시마 유키오의 <목숨을 팝니다> 

 

 

김직수 / 사회공공연구원 연구위원

 

 

필자는 "당신 인생에서 단 한 권의 책을 꼽으라면?"이라는 질문에 주저 없이 답하는 사람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 모든 텍스트란 개인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달리 읽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인생 단 한 권의 책' 부류의 질문에서 유독 불리한 작가가 있기 마련인데 한국에서는 이에 해당하는 작가로 미시마 유키오를 꼽고 싶다. 

우리 사회는 그를 '천황 만세를 외치며 할복자살한 극우파 작가'쯤으로 고정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작가의 생애와 사상이 그의 작품과 별개인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명백히 그의 작품에 다른 결이 존재함에도 이를 사상하고 단순화하는 것은 극우 사상만큼이나 해롭다. 그의 작품들을 일련의 사회적 메시지로 읽고자 하는 경우 그가 제시하는 '처방'은 위험할지언정, 그의 '진단'은 놀랍도록 날카로우며 당대의 진보적 지식사회의 그것에 비하더라도 참신한 것들이 적지 않다.

흔히 미시마의 작품은 '심미주의적' 경향을 띤 것으로 이야기되며, 실제로 그의 작품들에서 직접적인 정치적 언급은 그다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들이 심지어는 일본의 근대 문학이라는 직접적인 카테고리를 다루면서도 좀처럼 미시마를 언급하지 않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이는 그가 내세우는 '아름다움'에 관련되며, 더욱 정확히는 그가 아름다움을 내세우게 만드는 현실의 '추악함'에 관련된다. 

그의 작품으로 <가면의 고백> <금각사> <비단과 명찰> <풍요의 바다> 등이 흔히 언급되는데 이런 '대작'들과 비교되면서 흥미 위주로 가볍게 쓰인 소설로 평가받는 책이 <목숨을 팝니다>이다. 하지만 나는 의도되었든 의도되지 않았든 간에, 이 책을 시간과 그 의미에 대해 천착하고 있는 작품으로 꼽는다. 전후 일본인들이 그들의 시간을 살아내는 모습에서 미시마는 어떤 추악함을 읽어냈던 것일까.

미시마가 자위대의 궐기를 호소하며 할복자살한 1970년으로부터 2년여 전에 쓰인 이 작품은 하니오라는 한 청년의 자살 시도로부터 시작된다. 하니오는 자본주의의 첨병으로 일컬어지는 광고업계에서 카피라이터로 일하고 있던 어느 날 석간신문을 읽다가 갑자기 죽고 싶다고 생각한다. 석간신문을 읽다가 글자가 바퀴벌레로 변하는 모습을 보면서 죽음의 충동을 느낀 것이다. 그가 읽던 신문에는 공무원의 스파이 행위, 도쿄를 뒤덮은 스모그, 하네다 공항 폭탄테러, 은행강도 사건 등 온갖 '추악한' 일에 대한 기사들이 가득했지만 그는 그저 '판에 박은 듯 똑같은 하루'라고 느끼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런 세상에 살아 봐야 의미가 없다고 느낀 이유는 무엇일까. 하니오가 생각해낸 답은 그가 '열심히 일하는 착실한 사원이었다'는 것이다. 결국 자살에 실패한 하니오는 회사를 그만두고 신문에 목숨을 판다는 광고를 낸다.

그런데 놀랍게도 손님들이 찾아온다. 어느 자산가 노인은 젊은 아내의 외도에 복수하기 위해 하니오에게 함께 죽어줄 것을 요청하고 어떤 꼬마 아이는 흡혈귀인 자신의 어머니에게 하니오가 피를 바쳐 기쁨을 주기를 원한다. 자신을 대신해 생체실험의 대상이 되어 주기를 원하는 의뢰인이 나타나는가 하면, 하니오가 첩보전의 희생양이 되어 주기를 요구하는 스파이 집단도 의뢰인으로 등장한다. 하니오는 그저 무덤덤하게 의뢰를 받아들여 충실히 수행한다. 공교롭게도 사건들이 해결되는 가운데 하니오는 계속 살아남는다. 그런데 이 모든 사건들의 배후에 ACS(아시아 컨피덴셜 서비스)라는 비밀조직의 그림자가 끊임없이 드리워진다.

의뢰인들이 화폐를 매개로 하니오에게 해결을 요청하는 문제들은 질투, 연민, 공포, 충성과 같은 다양한 감정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이러한 인간 군상을 통해 미시마는 전후 일본 사회의 다양한 모순, 보다 정확히는 의미의 상실과 관계의 파괴를 보여준다. 기업사회로의 변모가 계속되면서 장시간 노동의 굴레에 빠진 경제동물이 되어버린 노동자, 교환의 대상으로 전락한 사랑, 아무도 서로를 돌봐 주지 않는 파괴된 공동체, 의롭지 못한 일로부터 등을 돌리는 나약한 기회주의 등 이 모든 것들은 하니오의 죽음을 통해 해결될 터였다.

"세계가 의미 있는 것으로 변하면 죽어도 후회는 없다는 기분과, 세계가 무의미하니 죽어도 상관없다는 기분이 어디서 서로 화해하는 것일까. 그러나 결과가 어떻든 하니오에게는 죽음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ACS로 의심되는 검은 손의 조직적인 움직임으로 인해 하니오는 계속해서 무의미의 연쇄 속으로 떠밀려갔다. 그들은 끊임없이 하니오의 뒤를 쫓으며 문제가 불거지는 것을 막는다. 하니오는 그저 자유롭고 싶었다.

"하니오는 무의미에서 시작해, 그 무의미에 하나하나 의미를 부여하는 자유를 누리는 것이 삶이라고 생각했다." 
 

이처럼 그 의도는 다양하지만 화폐를 매개로한 의뢰인들의 요구에 목숨을 거는 행위들을 반복하면서, 삶의 의미에 대한 부정 그 자체가 하니오에게 하나의 의미가 되었고 그로 인해 역설적으로 죽고 싶지 않다고 느끼게 된 것이다.

한편 ACS의 존재는 고도로 성장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시간의 의미를 다룬 또 다른 역작인 미하엘 엔데의 <모모>에 등장하는 회색인간들을 떠오르게 한다. 이들의 그늘 아래 등장인물들이 '살아도 사는 게 아닌' 무의미한 삶을 계속하게 된다는 점은 놀랍도록 닮아 있다.

<목숨을 팝니다>에서는 주인공 하니오가 목숨을 파는 거래 행위를 계기로 등장인물들과 대화를 나누고, 또 하니오의 공감 능력에 의해 그들이 지닌 문제가 드러난다는 점도 비슷하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모모가 평범하지만 '신비한' 능력을 통해 잿빛 시간을 사는 사람들에게 심장으로 느끼는 시간의 의미를 일깨워준다면 하니오는 자신은 이미 한 번 죽었다는 사실에서 깨달은 삶의 의미, 시간의 의미를 묻는다는 점이다.

전후 일본 사회의 자본주의적 고도성장의 이면을 미시마는 한 청년노동자의 자살 시도라는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행위로부터 불러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이해하기 어려운' 죽음의 선택이 만연한 세상을 살고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과로 자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   전후 일본인들이 그들의 시간을 살아내는 모습에서 미시마는 어떤 추악함을 읽어냈던 것일까. 미시마는 전후 일본 사회의 자본주의적 고도성장의 이면을 한 청년노동자의 자살 시도라는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행위로부터 불러낸 것이 아닐까.

갑자기 과로 자살을 언급하는 이유는 광고회사에서 그저 열심히 일하다 어느 날 죽음을 선택하는 하니오의 모습이 필자에게는 과로 자살자의 하나의 전형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물론 미시마가 하니오의 자살 시도의 동기를 일일이 묘사하고 있지는 않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저 열심히 일한 것이 원인인 것 같다'는 작중 하니오의 언급은 흘려듣기 어렵다. 미시마의 작품 가운데 보기 드물게 직접적으로 노동쟁의 사건을 다루었으며 <목숨을 팝니다>와 비슷한 시기에 쓰여진 소설인 <비단과 명찰>에서도 그 단초를 찾아볼 수 있다. 당시 일본 사회에 만연해 있던 가부장적 노사관계가 파탄을 맞이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물론 미시마가 철저한 평등주의자는 아니었지만 그의 기본적인 사고방식은 '천황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것이었다. '질서의 회귀'를 통해 근대를 극복하고자 했던 그에게 자본주의 체제와 그속에서 노동자들이 장시간 노동의 노예가 되어 무의미한 세계에 직면하는 모습이 아름답지 못했던 것이리라. 잘 알려져 있듯 미시마는 '안보투쟁'의 한복판에서 도쿄대학 전공투 학생들과 토론을 벌인 적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긴장뿐만 아니라 묘한 상호 존중과 공감을 읽어낼 수 있는데 그것은 이들의 자본주의와 근대성에 대한 문제의식, 그리고 '절대자'를 중심으로 하는 질서의 회복을 통해 그것을 넘어서고자 한 의지였다. 미시마에게 그 절대자가 '천황'이었다면, 전공투 학생들에게 그것은 '프롤레타리아'였다. 오늘날의 68혁명에 대한 해석의 틀을 빌리자면 전공투가 탈물질주의적 좌파였다면, 미시마는 탈물질주의적 우파였다.

물론 우리는 세계 곳곳에서 일어났던 전복적 시도들을 '실패'로 기억하고 있지만, 삶과 그 본질로서의 시간의 의미를 묻는 목소리에 다시금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상황은 달라진 것이 없다. 과로 자살로 스러져가는 수많은 노동자들이 그들의 죽음을 통해 끊임없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시간 에세이] 일과 개인적 삶의 균형을 위해 /2016.10

일과 개인적 삶의 균형을 위해

 

 

 

송한수 직업환경의학 전문의, 조선대 직업환경의학 교수

 

 


1. 일과 개인적 삶의 갈등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결국 ‘역할’을 갖는 것이다. ‘역할’은 어떤 책임을 부여받는 것이며, 살아가는 방식이기도 하다. 사람은 나이에 따라 새로운 역할을 부여받는다. 자녀이면서 학생이기도 한 청소년기를 거쳐, 성인이 되어 남편 또는 아내이기도 하고 엄마 또는 아빠가 될 수 있다. 직장에서는 구성원으로서 어떤 업무를 책임진다. 친구의 역할도 소중하고, 할아버지 또는 할머니의 역할도 갖게 될 수 있다. 우리는 인생에서 맞이하는 새로운 역할들을 잘 해내기 위해 노력하고 그 과정에서 성장한다. 감당해야 할 다양한 역할들은 성장 속에서 균형과 조화를 찾아가지만, 때로는 충돌하거나 갈등을 일으킬 때도 있다. 이 글은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사례인 일과 개인적인 삶, 또는 일과 가정 사이의 갈등에 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여기 두 가지 질문이 있다. 첫 번째 질문은 다음과 같다. ‘당신은 직장에서의 역할 때문에, 가정에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기 어려운 상황이 얼마나 자주 있습니까?’ 당신은 이 질문에 어떤 상황을 떠올렸나? 몇 가지 예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A씨는 직장에서 상사의 부탁으로 어떤 일을 오늘 내로 완결지어야 했다. 이 일은 회사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라, 결국 정시 퇴근을 포기하고 회사에 남았다.
B씨는 회사를 옮기기 전까지 퇴근 후 정기적으로 배드민턴 동호회 활동을 했다. 새 직장은 이전 직장보다 급여는 더 높았다. 그러나 퇴근이 늦어지는 경우가 빈번했다. 결국, 불규칙한 연장근무로 퇴근 이후의 시간이 안정적이지 못하여 동호회 활동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C씨는 자동차 공장의 조립공정에서 일하고 있다. 어깨와 팔을 반복적으로 움직이는 근골격계 부담 작업을 수행한다. 최근에 공정이 변경되어 어깨 부담이 가중되면서 통증이 생기기 시작했다. 퇴근 후 통증 때문에 집에서 아무 일도 하지 못했고, 병원에 가야 했다.
D씨는 올해 다른 지역으로 발령을 받았다. 자녀의 교육문제로 가족이 함께 이사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 D씨는 회사 근처의 원룸을 구해 혼자 생활하고 있다. 그는 가족과의 단절로 인해 고립감을 느끼고 있다. 퇴근 후의 시간은 주로 비슷한 처지의 동료들과 술을 마시면서 보내고 있다.

어떤 경우는 A씨처럼 역할의 갈등이 일시적일 수 있다. 그러나 직장에서의 역할로 인해 개인적 삶은 지속적으로 또는 크게 방해받을 수 있다. 당신은 어떠한가?

 

두 번째 질문은 다음과 같다. ‘당신은 가정에서의 역할 때문에, 직장에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기 어려운 상황이 얼마나 자주 있습니까?’ 당신은 이 질문에 대해 어떤 상황을 떠올렸나? 예를 들어 보자면 다음과 같다.

E씨는 맞벌이 부부의 직장맘이다. 남편보다 출근이 늦어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는 일을 맡고 있다. 어느 날 아침, 아이가 감기에 걸렸다. 유치원에 보낼 수 없는 상황이고 부탁할 사람도 없다. 그래서 아이를 병원에 데려가느라 늦게 출근하게 되었다.
F씨는 입시를 앞둔 자녀가 있다. 다른 사람들은 수십만 원의 입시컨설팅을 받는다고 하지만 F씨는 그럴 형편이 못되었다. 그래서 업무시간 중 입시 관련 정보를 찾기 위해 웹서핑을 하는 시간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G씨는 임신 8개월 직장맘이다. 원래 교대근무를 하고 있었는데, 임신 이후 야간근무는 하지 않고 있다. 최근에 배가 무거워지면서 예전처럼 활발하게 일을 하기 어려워졌고, 동료들에게 자신의 업무를 부탁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 경우도 F씨처럼 역할의 갈등이 일시적일 수도 있다. 하지만 가정에서의 역할 때문에 직장의 역할이 방해받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역할의 갈등은 남성보다 여성들이 크게 느낄 것이다. 당신은 어떠한가?

 

 

2. 개인적인 삶의 가치
‘일이 중요한가? 개인적인 삶이 중요한가?’ 만약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당신은 주로 어느 쪽을 선택하게 되는가? 개인적인 삶의 가치는 일의 가치보다 낮게 평가되는 경향이 있다. 일은 직장 공동체가 공동으로 가치를 만들어 내기 때문에 더 크게 느껴질 수 있다. 황우석 박사가 말해서 유명해진 ‘월화수목금금금’에 대해 생각해보자. 줄기세포 연구로 불치병 환자들에게 새로운 삶을 선사하는 일은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가? 그래서 연구 성과를 앞당기는 것과 주말의 개인적 삶 중에, 전자가 선택되었고 후자는 희생되었다. 또한, 이러한 결정은 책임자가 주도하는 경우가 많지만, 당사자 스스로 선택하기도 한다. 왜냐면 일의 가치는 나의 삶의 중요한 가치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인적 삶의 가치에 대해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일은 삶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지만, 나의 전부는 아니다. 누구나 일 이외의 개인적 삶이 있다. 그리고 개인적 삶 중에서 상당한 시간은 가족과 함께 보낸다. 예를 들어, 가족과 함께 식사하고, 쇼핑한다. 자녀가 어떤 학원에 갈지 결정하거나, 다음 주 부모님 생신 때 무엇을 할지 이야기한다. 가족이라는 단위를 통해 미래의 사회구성원을 교육하고, 성장시키고, 돌본다. 그리고 노동자들에게 다음 날 다시 일하기 위한 휴식과 수면의 공간을 제공한다. 이러한 기능은 물질적 요소뿐만 아니라, 성장 과정의 갈등과 어려움을 나누고 상호지지해주는 심리적 요소를 포함한다. 따라서 가족은 한 사회를 재생산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너무나 일상적이고 소소한 개인적인 삶은 마치 물이나 공기와 같아서 평소에는 소중함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다가 이러한 평화가 갑자기 사라져버렸을 때,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

 


3. 일과 개인적 삶의 균형에 찾아온 변화
개인적 삶의 가치가 하찮게 여겨지고 일의 가치만 중요하게 여겨서, 삶 대부분을 일로 보내는 현상을 흔히 일 중독(workaholism)이라고 한다. 우리나라는 일 중독의 경향이 사회적으로 지지가 되고 있는 사회다. 이 경향은 전체주의, 장시간 노동, 남성생계부양자 모델이라는 토대 위에서 강화됐다. 전체주의는 전체를 위하는 것이 개인을 위하는 것이고, 전체를 위한 개인의 희생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인다. 장시간 노동은 주변국의 자본(capital)이 최대의 이윤을 얻는 방법이다. 남성생계부양자 모델은 고정된 성 역할에 근거하여 남성이 생계부양자로 가계수입을 책임지고, 여성은 가정에서 재생산을 담당하는 모델이다. 이는 남성이 가정에서의 역할을 포기하는 것에 알리바이를 제공해주면서, 여성이 남성보다 낮은 임금을 받게 만드는 근거가 된다. 그러나 상황은 달라지고 있다. 전체주의는 민주화를 통해, 장시간 노동은 노동시간 단축을 통해, 남성생계부양자 모델은 여성의 사회적 진출을 통해 도전받고 있다.

이러한 역동적인 변화 속에서 우리는 일과 개인적 삶의 균형을 어떻게 찾아가고 있을까? 한 가지 사례를 이야기해보자. 국내의 모 완성차 제조사는 주야교대근무제에서 주간연속 2교대제로 전환했고, 모기업의 변화에 맞추어 하청회사들도 비슷하게 교대제를 전환하여 수십만 명의 노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이 변화의 핵심은 심야시간대의 노동시간을 줄이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노사 간의 협상이 있었고, 노동조합 내부에서도 의견대립이 있었다. 사업주는 생산성의 하락을 우려했으며. 조합원들은 노동강도의 강화나 임금삭감에 대해 우려했다. 결국, 이 제도는 합의를 이루어 시행되었다.

이후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여가의 증가와 수면 문제의 개선이었다. 여가의 증가는 가족과 보낼 수 있는 더 많은 시간, 나를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더 많은 시간을 의미했다. 제도 시행 전후를 분석한 연구에서 앞서 이야기했던 ‘직장의 역할로 인한 가정 역할의 방해’가 크게 완화되었고, 이 때문에 노동자들의 정신건강 수준이 크게 향상되었음이 확인되었다. 반면에 이혼율이 증가하거나, 가족 간의 갈등이 심해지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새롭게 생긴 시간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경우도 있었다. 토대가 달라지면 큰 변화가 생기지만, 그 변화가 올바른 방향으로 전환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측면에서의 노력이 필요한 것 같다.

 

 

4. 일과 개인적 삶의 균형을 어떻게 지원할 것인가?
종합병원 간호사들의 ‘임신순번제’가 사회적 논란이 되었다. 여성이 다수인 종합병원의 간호사 중 여러명이 같은 시기에 출산휴가를 가면 인력 공백이 발생한다. 이는 모든 종합병원이 공통으로 겪는 문제다.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만약 중간관리자들이 전체주의적인 사고를 하고 있었다면, 전체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인권적 가치를 무시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병원만의 일일까? 많은 여성이 회사를 선택하는 대신 결혼 또는 출산을 포기하거나, 회사를 포기하고 출산과 육아를 선택한다. 상황은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생계임금에 미치지 못하는 최저임금과 초과노동 임금할증제도로 인해, 주 40시간만으로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운 저소득 노동자들은 자발적으로 장시간노동이나 야간노동을 선택한다. 그래서 노동시간의 단축을 시도하면, 장시간 저임금 노동자에게 임금하락이라는 역설적인 상황이 초래된다. 장시간 노동은 ‘일을 위해 개인적 삶의 상당 부분을 포기한 삶’이라는 사실을 전제에 놓지 않으면 문제 해결이 어려워진다.

일과 개인적 삶의 균형은 인간의 보편적 권리이며, 임금, 노동시간, 노동 건강, 복지를 아우르는 상위개념이다. ‘출산율을 높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인간다운 삶을 위해 임금을 인상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사회적 의제를 생각할 때 ‘일과 개인적 삶의 균형’은 먼저 고려되어야 한다. 과거에는 직장을 위해 개인의 삶을 희생시키는 것을 당연시했다면, 이제는 개인의 삶을 위해 직장과 사회가 더 많은 기여와 지원을 해야 한다는 인식이 퍼지고 있다.

래서 우리는 ‘일과 개인의 삶이 조화를 이루는 사회’라는 지향을 좀 더 분명하게 밝힐 필요가 있다. 이런 변화가 어려워 보이는가? 이미 현대사회는 사회보장제도를 통해 재생산영역의 지원을 공적 의무로 이양하고 있다. 더 많은 공적 육아, 공적 교육, 공적보건의료제도를 만들어가고 있다. 남성생계부양자 모델이 해체되면서 남성이 육아와 가사노동을 담당하는 비중도 증가하고 있다. 몇 해 전부터 남성이 육아휴직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는데, 벌써 여성 육아 휴직자의 10%에 근접하고 있다. 미래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그려보자. 직장에서 무재해나 안전제일과 같은 표어처럼 이제는 ‘가정 친화적 직장’이라는 의제 하에 정시퇴근, 모성보호, 가정지원이라는 표어를 확산시키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거스를 수 없다. 그러나 그 변화를 앞당기고 성공적으로 정착시키기 위해 의식적 변화를 촉진할 수 있는 자원(resource)도 필요하다. 과거의 관념은 관성처럼 남아 있어, 직장인 여성에게 가사노동의 의무를 지우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남성들이 여전히 있기 마련이다. 가족과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더 많아졌음에도 자녀와의 대화가 어려워서 상황이 더 악화할 수도 있다. 그래서 페미니즘교육이나 부모학교와 같은 프로그램이 더 필요하다. 무엇보다 자신을 돌보고, 일과 삶의 균형을 위해 스스로 성찰하고 성장할 수 있는 마음 교육이 모든 직장인에게 일반화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