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시간 읽어주는 사람] ‘미국 공장’의 노동자들은 어쩌다 ‘교체’됐을까

미국 공장의 노동자들은 어쩌다 교체됐을까

-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아메리칸 팩토리(American Factory)>

 

강남규 문화사회연구소 운영위원

 

이런 가정을 해보자. 당신이 10년간 잘 다니던 회사가 있다. 야근도 별로 없고 나름대로 노동문화가 잘 잡힌 모범 직장이다. 하지만 어느 날 지속적인 경영악화로 사장이 홀라당 도망가고, 회사는 공중분해 위기에 처했다. 그때 한 귀인이 나타나 자신이 회사를 사겠노라고 약속한다. 아아, 당신의 이름은 착한 자본가.

그런데 이 사장님, 취임 일성에 난데없이 6일제복원을 외친다. 아침마다 1시간씩 일찍 집합해서 단결을 위한 조례를 갖자고도 한다. 아이고, 어떻게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소리들을 태연하게 할 수 있단 말인가? 함께 일해 온 동료들도 동요하는 게 느껴진다. “미친 거 아냐? 시대가 어느 땐데.”

 

3세계의 일이 미국에서 일어난다면

 

사람에겐 국경이 있지만 자본에겐 국경이 없는 시대에 이런 일은 그다지 낯설지 않다. 이런 일은 주로 상대적으로 경제력이 높고 임금수준이 높은 나라의 자본이 사람 값이 싼 나라로 생산 공장을 옮기면서 일어난다. 어떤 나라의 임금수준이 낮다는 것은 대체로 노동자의 힘이 약하다는 뜻이고, 밀려드는 자본의 공세에 속수무책이기 쉽다. 그리고 자본은 그래도 되는곳에선 필연 그렇게한다. 자국에선 그리하지 못하는 기업들이 동남아시아나 아프리카 등 제3세계에서 끔찍한 노동착취를 자행해 왔다는 이야기는 비밀 축에도 못 낀다.

그런데 세계 최강대국이자 자본주의의 총 집산이라는 미국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면 어떻게 될까. 오바마 부부가 제작해 화제가 된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아메리칸 팩토리(American Factory)>는 바로 이 드문 사례를 근접거리에서 생생하게 보여주는 흥미로운 작품이다. 원래는 GM이 자동차를 만들다가 2008년에 버리고 떠난 미국 오하이오 주 데이턴 시의 빈 공장을 중국계 차량용 유리제작 기업인 푸야오(FUYAO)6년 만인 2014년 인수하면서 2년 반 동안 생긴 일들을 보여준다.

다큐멘터리는 희망적으로 시작한다. 가장 큰 일자리를 잃고 도시가 황폐화되던 와중에 글로벌 기업이 공장을 인수해 일자리를 제공하겠다고 하니, 지역에서도 큰 희망을 품을 수밖에. 물론 홍보를 위한 멘트일 테지만 푸야오도 자기들이 상당한 일자리를 창출하게 될 것이라며 지역사회에 희망을 주고 싶다고 말한다. 그들은 이 말을 실천해서 데이턴 시의 주민들을 적극 고용한다.

 

중국식 경영과 노동자들의 패배

 

갈등은 푸야오 회장이 본격적으로 중국식 경영을 도입하면서 시작된다. 장시간 노동. 중국 본사는 12시간 2교대제를 운용하고, 주말도 잘 보장되지 않는다. 어용 노조. 중국 본사의 노동자 대표 기구를 책임지는 것은 푸야오 차오 더왕 회장의 사위다. 군대식 문화. 중국 본사의 중간 관리자들은 아침마다 노동자들을 집합시켜 회사를 찬양하는 구호를 외치게 한다. 위험한 노동. 유리를 자르고 나르는 노동자들에게 반드시 필요할 안전장비들도 비용을 이유로 지급되지 않는다. 그리고 중국 본사 노동자들은 그걸 당연하다고 여긴다. (‘중국식이라기엔 좀 낯익은 경영법이긴 하다.)

자본주의가 진작 고도로 발달한 까닭에 노동조합이 일찍 성장한, 그래서 상식적이라고 부를 만큼은 노동문화가 안착된 미국의 조건 속에서 그 같은 시도들은 크게 논란이 됐다. 하지만 차오 더왕 회장은 최선(?)을 다해 중국식 경영을 미국 공장에 이식하려 들고 노동자들은 강력 반발하기에 이른다. GM이 있을 적 노동조합의 힘을 경험한 고참 노동자들로서는 퍼뜩 이런 생각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노동조합을 만들어야 한다!

본격적인 갈등이 시작된다. 노동자들은 노조 조직에 나선다. 차오 더왕 회장은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노조는 안 된다는 듯 노조파괴 컨설팅을 고용하거나, 임금을 올려준다며 회유책을 뿌리거나, 노동조합 생기면 공장 버리고 떠나겠다며 협박을 해대는 식으로 노조 조직을 방해한다. 결과는 어떨까. 반대 800여 표, 찬성 400여 표, 부결. 이후 노조 조직을 주도한 노동자 몇몇은 교체’(경영진은 해고를 이렇게 표현했다)된다. “노동조합의 필요를 못 느낀 젊은 노동자들이 많이 반대한 것 같아요.” 교체되어 나가는 노동자의 마지막 말이다.

다큐멘터리는 노조 조직 실패 이후의 이야기도 보여준다. 얼마간 시간이 흐른 뒤 푸야오 경영진은 공장 자동화 시스템 구축에 돌입한다. 쉽게 말해 기계팔로 대체할 수 있는 공정은 모두 기계팔로 대체해서, 노동자 2~3명이 일해야 할 곳에 1명만 일하게 하거나 아무도 일하지 않아도 되게 만들자는 얘기다. 노동조합이 조직되었다면, 그래서 노동자들이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면 이런 계획을 감히 언급이나 할 수 있었을까.

 

5일제에서 주52시간제까지

 

<아메리칸 팩토리>가 보여주는 것은 미국과 중국의 노동문화 성장 차이에 따른 갈등이지만, 한편으로 이러한 갈등은 한 국가 안에서도 종종 발생한다. 5일을 출근하고 주말 이틀은 쉬는 문화에 대해 생각해보자. 젊은 독자는 이렇게 물을 수도 있겠다. 그게 무슨 문화씩이나 되냐고, 당연한 것 아니냐고. 하지만 주5일제는 시행된 지 불과 15년밖에 되지 않은 제도다. 게다가 시행 초기에 논란도 많았다. 경영계가 특히 우는 소리를 많이 냈다. “지금 주 5일 근무제로 들어가기에는 대단히 빠르다(한국경총)”고 했던가.

그들 중 누구도 이제는 주5일제에 대해 이런 얘기를 (적어도 공개적으로는!) 하지 않는다. 어느 정도 상식적인 회사라면, 토요일에 출근하라는 말을 당연하게 하지는 않는다. 이제 주6일 출근은 비상식적이거나 예외적인 편에 속하게 됐다. 물론 여전히 주6일 출근을 강요하는 직장들이 제법 많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지만, 적어도 정치권이든 경영계든 6일제로 법제도를 복원하자는 식의 이야기를 감히 할 수 없다는 시대라는 사실 역시 분명하다.

오늘날 갈등의 대상이 된 것이 있다면 바로 주52시간제다. 하지만 주5일제가 그랬듯, 최저임금 인상이 그렇게 되어가듯, 시간이 흐르면서 주52시간제 역시 점차 당연한 것이 되어 우리 사회에 착근될 것이다. 달리 말하면 그들의 징징거림은 일종의 상수라는 얘기다. 그들은 언제나 그랬고, 그들의 말은 대체로 틀려왔다.

 

불가역적 제도를 만들려면

 

그런데 이번에는 정부의 입장이 이상하다. 52시간 시행 1년 조금 지난 지금 노동시간 단축에 대해서 내년도 50인 이상 기업으로 확대 시행되는 것에 대해서는 경제계의 우려가 크다(108일 국무회의 대통령 들머리발언)”면서 탄력근로제 도입을 의제화하고 나선 것이다. 새로운 제도가 정착되도록 독려하며 인내심을 요청해야 할 정부는 이번 결정으로 시곗바늘을 한참 뒤로 돌리고 있다.

중국 공장의 전근대적 풍경을 마주한 미국 노동자의 표정을 기억한다. “5일제를 주6일제로 바꾸겠다는 말을 누군가 한다면 우리의 표정도 과연 그러할 터다. 문화란 그렇게 발전하는 것이다. 우선 법으로 제도화되고, 당장은 잡음들이 일어날 수밖에 없지만, 시간이 흘러가며 자연히 사회가 제도에 맞춰 재구성되고, 마침내는 모두가 당연한 문화로 인식하게 된다. 52시간제에 대해 지금 필요한 것도 시간일 뿐이다.

노동조합 결성에 실패하고 해고되어 나가는 미국 노동자들의 뒷모습도 기억한다. 미국에서 당연한 것이 푸야오 공장에서만은 당연하지 않게 된 것은 노동조합을 저지한 자본이 이곳은 그래도 되는 곳이라고 확신을 가졌기 때문이다. 미국 노동자들은 푸야오의 문화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결국 노동자들은 힘을 잃음으로써 이런 파국을 맞았다. 이곳 문재인 정부가 자신들이 추진한 정책을 스스로 뒤집은 것도 그래서일 게다. 자본 앞에선 그럴 수 없지만, 노동 앞에선 그래도 되니까.

어떤 제도도 그 자체로 불가역적일 수 없으며, 다만 그것을 불가역적으로 만드는 힘이 있을 뿐이다. 무한 야근의 시대에서 주52시간의 시대로, 그리고 적당히 합의된 노동시간이 아닌 노동자 스스로가 그리는 노동시간의 시대로 가는 길을 보장하는 것은 착한 정부착한 자본가가 아니라 오직 강한 노동조합이다. <아메리칸 팩토리>의 씁쓸한 결말이 보여주는 사실들이다.

 

[노동시간 읽어주는 사람] 핵발전소 노동자가 치르는 '거짓의 대가'는 무엇인가 / 2019.09

[노동시간 읽어주는 사람] 

 

핵발전소 노동자가 치르는 '거짓의 대가'는 무엇인가

 

박기형 / 상임활동가 

 

요즘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드라마가 있다. 미국 HBO에서 제작한 <체르노빌>이라는 5부작 드라마다. 그동안 체르노빌 원전 사고를 조명한 여러 다큐멘터리, 영화, 에세이 등이 있었지만 <체르노빌>은 드라마로서의 높은 완성도와 긴장감 그리고 선명한 문제의식 등으로 사람들에게 큰 울림을 주며, 원전 사고 당시 상황과 사고 대응 및 조사 과정 전반에 이르기까지 체르노빌 원전 사고를 섬세하게 재현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넷플릭스만 구독하던 필자는 부랴부랴 왓챠플레이를 구독하고서 5부작을 정주행했다. 각 잡고 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에 마음을 굳게 먹고서 5시간에 걸쳐 손에 땀을 쥐고 시청했다. 마지막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난 후 하나의 대사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많은 사람이 명대사로 꼽을 정도로 원전 문제의 핵심을 함축한 질문이자 드라마를 여는 레가소프의 첫 마디 "거짓의 대가는 무엇인가?"
   
거짓의 대가는 무엇인가?

인류가 자초한 최악의 재앙으로 손꼽히는 1986년의 체르노빌 원전 사고는 2011년 3월 11일 발생한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자연스레 떠올리게 한다. 두 참사 모두 우리가 마주할 수밖에 없었던, 거짓의 대가가 무엇인지 여실히 보여주었다. <체르노빌>에서 무채색에 가까운 이미지로 펼쳐 보인 비참함, 즉 황폐해진 삶의 터전과 자연, 피폭으로 인해 죽거나 다친 사람들과 살처분 당하는 동·식물 등 사회와 자연이 송두리째 파괴당한 참혹한 현장 말이다.

특히 <체르노빌>에서는 피폭을 당한 원자력 부근 주민의 아픔뿐만 아니라 발전소에서 일한 노동자들과 이미 벌어진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또는 더 큰 참사를 막기 위해 살인적인 수준의 방사선에 그대로 노출되며 고군분투한 소방관, 군인, 의료인 등 수많은 노동자의 얼굴과 몸짓을 볼 수 있다. 자신이 상대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그것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파괴해버릴 수 있을지 알지 못한 채 그들은 온몸으로 거짓의 대가를 받아야 했다.

그 참혹한 사태가 일어나기까지 거짓의 굴레를 뒤얽히도록 한 사람들, 아니 그 사회는 어떤 책임을 졌는가. 우리는 누구에게 어떤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오히려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듯 체르노빌 원전 사고가 벌어진 지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거짓의 굴레가 우리를 짓누르고 있다. 언제 또다시 사고가 벌어지지 않으리라고 예측할 수 없기에 우리는 언젠가 또 한번 거짓의 대가를 치러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거짓의 대가는 이런 극단적인 상황에만 치러지는 게 아니다. 거대한 수준의 참사가 벌어지지 않더라도 우리는 일상적으로 거짓의 대가를 치르고 있다. 다만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치르고 있을 뿐이다. 그 '다른 누군가'는 바로 '핵발전소 노동자'들이다.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핵발전소 노동자의 저선량 피폭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한국에도 탈원전 논의가 촉발되면서 핵발전소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이야기에 주목하는 책들이 출간되었다. 그중 한 권을 꼽자면, 반핵의사회·사회건강연구소가 공동기획한 <핵발전소 노동자>가 있다. 이 책은 핵발전소 노동자들의 증언을 통해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피폭 및 각종 사고, 발전소와 국가의 조직적 은폐 나아가 다단계 하청을 통한 위험의 전가 등을 다루고 있다.

저자인 테라오 사호는 이 책에서 '나는 알 수 없어요'라는 노래를 언급한다. 그 노래의 가사 중 한 구절은 다음과 같다. '핵발전소에서 노가다 일로 방사선에 피폭된 아저씨가 벌레처럼 약해지는 데도 도시의 밤은 묵살한다.' 우리가 아름다운 도시의 야경을 즐기는 순간에도 빛을 만들어내는 핵발전소 노동자의 생명은 점차 빛을 잃어간다.
 
<체르노빌>을 본 사람들의 후기를 살펴보면 다들 하나 같이 심각한 수준의 방사능 노출에도 아무 보호장비를 갖추지 않은 채, 심지어 마스크도 제대로 끼지도 않고 방사능 피해자를 만지거나 폐기물을 치우는 등의 모습을 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헛웃음 나는 끔찍한 상황은 비단 무너져가는 소련, 가난하고 꽉 막힌 '사회주의' 사회에서만 벌어지는 게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자유롭고 평등한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공공연히 일어나고 있다. 거기서는 국가의 체면 때문에 거짓말했다면, 여기서는 자본의 이윤 때문에 거짓말하는 게 유일한 차이일 뿐이다. 핵발전소가 돌아가는 작업현장에서 위와 같은 일은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은폐된 저선량 피폭 문제

거짓은 단지 핵발전소에서 일어난 각종 사고, 위험 상황을 은폐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특별한 상황이 벌어지기 전부터 노동자들은 일상에서 언제나 방사선에 노출된다. 병원에서 방사선 검사 및 치료를 하는 사람이 방사선에 노출되지 않을 수 없듯이, 핵발전소에서 일하는 노동자들도 '당연히' 방사선에 노출된다. 문제는 '당연히'라는 말을 어떤 의미로 해석할 것이냐다.

핵발전소 노동자의 생명을 위협하는 거짓은 위험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시작된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핵발전소에서 방사선에 노출되지 않고 어떻게 일하라는 말이냐. 핵발전소는 원래 위험한 곳이다." 그 이후엔 위험이 당연하다고 전제하고서 어느 수준이 정말 위험한 것인가를 묻기 시작한다. 인체에 유해한 방사능의 수준, 즉 한계선을 설정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피폭 선량 기준을 각종 연구를 통해 객관적이고 과학적으로 도출하려 한다.

하지만 정말 피폭 선량 기준은 객관적·과학적인가? 아니다. 반대로 피폭 선량 기준은 자의적이다. 왜냐하면 고선량 피폭의 위험성은 명확하지만 저선량 피폭의 위험에 관해서는 여전히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어떤 질병을 일으키는지, 어떤 인과관계로 그렇게 되는 건지, 발병까지 어느 정도 기간이 걸리는지 등 여전히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혹자는 불확실하기에 입증되지 않았고 그래서 유해하다고 단정 지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 점에서 <체르노빌> 1화에서 사고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기 위해 방사능 수치를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지는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원자로의 핵연료를 담고 있는 노심이 폭발하지 않았다고 사안을 축소하고 싶은 이들은 측량 한계가 낮은 기계의 수치를 그대로 따른다. 그래서 위험하지 않은 상황이라고 판단한다. 그 기계가 측량할 수 있는 최고치가 나왔음에도 말이다. 결국 고성능 측량 장비를 통해 원자로가 폭발했음을 확인한 후에야 순순히 인정했다. 이미 수십 시간이 지난 후였고, 엄청난 양의 방사능에 수많은 사람이 노출되고 수백km의 지역이 오염된 후였다.

이와 같은 일이 핵발전소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위험이 입증되지 않았으니 안전관리 비용이나 인건비를 들이지 않으려는 태도, 저선량 피폭이 있었다고 하지만, 기준상 위험하지 않았고 그게 정말 암을 비롯한 특정 질병의 발생에 주요 원인이라고 입증되기 어려우니 산재 인정을 하지 않겠다는 논리 등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의 책임자들처럼 저선량 피폭의 유해성이 아주 오랜 뒤에 입증되면 그때에야 피폭자들에게 보상하고 안전조치를 취할 것인가?

정말 우리가 방사능의 위험으로부터 사람들을 안전하게 지키고자 한다면 불확실하기에 최대한 안전할 수 있도록 조치하는 것, 일상에서부터 모든 예측 가능한 위험에 대비하는 것, 조그만 방사선 노출에도 주의를 기울이고 관리하는 것 등이 아닐까. 그러한 원칙들에 입각할 때에야 비로소 거짓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고 나아가 거짓의 대가를 핵발전소 노동자가, 우리 사회구성원 모두가 치르지 않을 수 있는 출발점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