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터 정신질환 짚어보기] 산재보험 취지에 부합하는 업무상 정신질환 판정을 요구한다 / 2020.07

[일터 정신질환 짚어보기] 

 

 

산재보험 취지에 부합하는 업무상 정신질환 판정을 요구한다

 

 

박경환, 이성민 / 한노보연 회원 

 

 

산업재해 신청 사건을 진행하다 보면, 재해자의 산업재해 신청에 대한 사업주 의견이 제시되는 경우가 있다. 사업주의 의견은 주로 ①이 사고(혹은 질병)는 재해자 개인의 잘못으로 발생했으므로 산업재해가 아니다 ②같은 환경의 다른 직원들에겐 아무런 이상이 없는데 재해자에게만 발생한 질병이기에 산업재해가 아닌 개인적 질병이라는 취지의 주장이 주로 담긴다.

이런 내용의 사업주 의견을 접하면, 사업주들이 업무상 재해 원인을 재해자와 함께 일했던 동료 탓으로 돌리고 모든 책임을 회피하려는 태도가 느껴져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대부분의 경우 그런 주장은 업무상 재해 인정 여부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할 것을 알기에 나는 담담히 무시하곤 한다. 

왜냐면 '무과실책임의 원칙'에 따라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은 재해자의 과실로 발생한 사고(질병)도 보호 대상에서 배제하지 않으며, 업무상 재해를 판단할 때 업무와 질병 사이의 인과관계는 일반적으로 보통의 체격이나 건강 상태를 가진 '사회 평균인'이 아니라 '재해자의 건강과 신체조건을 기준'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근거가 되는 판례는 다음과 같다.

▲   정신질환의 업무상 재해 판단은 산재보험제도의 무과실책임 원칙에 따라야 하므로 재해자의 과실 여부는 판단 요소가 아니다. 고려 요소는 재해자의 업무상 스트레스이다.

법률에 특별한 규정이 없는 한 근로자의 과실을 이유로 책임을 부정하거나 책임의 범위를 제한하지 못하는 것이 원칙이므로, 해당 재해가 산재보험법 제37조 제2항에 규정된 근로자의 고의·자해 행위나 범죄 행위 또는 그것이 원인이 돼 발생한 경우가 아닌 이상 재해 발생에 근로자의 과실이 경합돼 있음을 이유로 업무와 재해 사이의 상당인과관계를 부정하는 경우에는 신중을 기하여야 한다. (대법 2017. 3. 30. 선고 2016두31272)

업무와 질병 사이의 인과관계는 사회 평균인이 아니라 질병이 생긴 근로자의 건강과 신체조건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 (대법 2017.8.29. 선고 2015두 3867)

따라서 사업주가 업무상 재해 책임을 재해자에게 전가하거나 설령 산업재해의 과실 원인이 재해자에게 있다 하더라도 산업재해보상보험법에 의거해 보상은 이루어져야 한다. 또한 재해자 개인의 질병 감수성이 사회 평균인과 다를 경우, 재해자 개인에게 초점이 맞추어져야지 사회 평균인의 기준을 근거로 업무상재해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판례의 취지에 맞지 않는다. 그러나 근로복지공단에서 정신질환의 업무상 재해를 판단한 경우를 살펴보면 산업재해 보상제도의 업무상 재해 판정 원칙과 모순되는 결과를 빈번히 볼 수 있다.

개인 과실로 인한 업무 스트레스

(사례1) 유치원 교사인 A씨는 최근 우울증을 진단받았다. A씨는 일터에서의 업무 미숙으로 인해 동료 노동자들과 갈등이 있었으며, 업무수행 중 발생한 실수에 대해 징계 처분을 받기도 하였다. A씨는 최근 우울증의 원인이 일터에서의 업무 스트레스라고 생각했다. A씨는 근로복지공단에 우울증을 업무상 재해로 인정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업무 스트레스의 발생 원인이 A씨의 과실이므로 A씨의 우울증을 업무상 재해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결과가 담긴 통지서를 받았다.

다른 업무상 재해 사건과 달리 정신질환의 산업재해 신청 사건에서는 일터에서의 '개인의 과실' 여부를 비교적 자세히 살펴본다. 가령, 근로복지공단은 '업무 관련성 조사 지침'을 통해 정신 질병의 업무 관련성 조사 시 ①사고와 관련하여 본인의 고의 또는 법이나 규칙 위반이 있었는지 ②법적 문제나 감사 등에 연루된 사건인지 등을 조사하도록 한다. 재해조사 과정에서 업무 스트레스의 원인이 된 사건에 재해자의 과실이 확인되면, 업무상 재해 판단에 부정적인 요소로 작용한다.

정신질환의 업무상 재해 여부를 판단한 질병판정위원회의 판정 근거를 살펴보면, 상당수 사례에서 재해조사 결과, 일터에서의 업무 스트레스를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업무 스트레스가 '개인의 과실'과 결부되었다는 점을 근거로 업무상 재해가 아니라고 판단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업무 스트레스로 인해 발생한 상병이지만, (당해 스트레스를 유발한) 귀책 사유는 재해자 본인 요인이 더 크다고 사료됨.", "정당한 징계에 의한 스트레스 이외에 다른 업무상 스트레스가 확인되지 않은 점을 고려하였을 때, 신청 상병의 발병에 있어서 업무적 요인의 기여도 보다는 개인적 요인의 기여도가 높은 것으로 판단됨."

개인적 취약성에 따른 스트레스

(사례2) B씨는 회사에서 업무를 시작한 지 상당한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회사의 업무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업무 스트레스로 힘들어하던 B씨는 '불안장애'를 진단받았다. B씨는 '불안장애'에 대해 산업재해 신청을 했다. 그러나 근로복지공단은 B씨의 업무가 통상적인 근로자들이 수행하는 업무이며, 높은 수준의 업무 스트레스가 없었을 것이라며 불승인 처분을 통지했다.

업무상 재해로 불승인된 정신질환의 질병판정위원회 판정서에는 '개인적 취약성'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이때 '개인적 취약성'은 주로 청구인이 통상적인 업무를 했기 때문에 정신질환이 발생할만한 수준의 업무 스트레스에 노출된 것은 아니라는 결론, 혹은 일터에서의 업무 스트레스는 확인되지만, 사회 평균인이 용인 가능한 수준의 스트레스이므로 신청한 정신질환과는 무관하다는 결론을 내리는 데 사용된다. 이런 판단에 객관적인 기준을 찾아보기는 힘들며, 통상 판정위원들의 주관적인 판단에 의해 정신 질병을 유발할 수 있는 업무 스트레스 수준이 결정되는 것으로 보인다.

"근무 중 상사와의 마찰, 폭언 등은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극단적 스트레스로 보기는 어려워 '우울장애'를 인정하기 어려우며 (중략) 업무 관련성 보다는 개인적 소인 및 취약성, 스트레스에 의한 것으로 보임.", "직장 내 상사와의 갈등상황 및 부당해고가 일부 스트레스 요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이기는 하나, 심각한 심리적 타격을 주었다고 판단하기는 어려움이 있어 (중략) 개인적 취약성 및 생물학적 요인에 의해 발병한 것으로 판단됨."

정신질환이라고 판단 기준이 달라야 할 이유는 없다 

산재보험제도는 무과실 책임의 원칙과 질병에 대한 개인의 감수성을 고려해 업무상 재해 여부를 판단하도록 한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정신질환의 업무상 재해 판단에 있어 '개인 과실'과 개인적 소인이 불승인 처분의 근거로 제시되는 경우를 쉽게 접할 수 있다.

정신질환의 업무상 재해 판단은 일터에서 재해자에게 업무스트레스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여부에 따라 결정돼야 한다. 즉, 정신질환과 관련된 업무 스트레스에 대한 재해자의 과실 여부를 평가할 필요는 없으며, 업무 스트레스가 재해자의 과실로 발생했다고 해도 재해자가 겪은 업무 스트레스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런 원칙을 무시한 판정은 산업재해보상보험제도의 '무과실책임 원칙'과도 모순된다.

또한, 업무 스트레스에 대한 개인적 감수성을 고려한 판정이 이루어져야 한다. 사회 평균인의 입장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상황이라도, 재해자 개인에게는 상당한 업무 스트레스로 작용할 수 있다. 현재 근로복지공단은 '개인적 취약성'을 다른 업무 스트레스 요인을 배제하는 용도로 사용하고 있는데, 재해조사 과정에서 재해자의 성격이 스트레스에 취약하다고 판단된 경우 이는 불승인의 근거로 제시될 것이 아니라 업무 스트레스에 취약한 개인적 감수성을 고려해 상병의 업무 관련성을 긍정하는 방향으로 검토돼야 한다.

'신속하고 공정한 보상'이라는 산업재해보상보험의 목적을 다시 생각해본다면, 적어도 업무상 재해의 판정 원칙이 정상적으로 작동할 때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일이 가능해질 것이다.

[일터 정신질환 짚어보기] 업무상 정신질환 여부, 어떻게 결정되나 / 2020.06

[일터 정신질환 짚어보기] 

 

 

업무상 정신질환 여부, 어떻게 결정되나

 

 

최민 / 상임활동가 

 

과로사는 임상 진단명이 아니다. 이미 발생한 뇌심혈관질환 사망에 '과로'가 원인이 되었는지를 사후적으로 평가하여 붙이는 사회적이고 제도적인 이름이다. '업무상 정신질환'도 마찬가지다. 진단을 따로 받는 것이 아니라, 이미 진단된 다양한 정신질환에 대해 업무상 요인이 발생의 원인인지, 또는 악화 요인으로 상당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평가한 뒤에 사후적으로 붙는 이름이다.

일하는 도중에 일과 관련하여 발생하는 '업무상 사고'와는 달리, 업무상 질병은 업무 중 뿐만 아니라 집에서 쉬다가, 혹은 퇴직한 이후에 발병할 수도 있고, 업무의 어떤 요인이 어떻게 질병을 일으켰는지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업무상 사고와 업무상 질병은 다른 판정 과정을 거친다.

근로복지공단은 지역본부별로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를 운영한다. 해당 질병과 관련된 임상의사, 직업환경의학 의사, 인간공학자나 변호사, 노무사, 산재보험전문가 등 전문가들로 질병판정위원을 구성하고, 이들 중 5~7명으로 판정회의를 열어 재해자의 신청서, 근로복지공단 지사에서 실시한 조사 내용 등을 기초로 업무상 질병 여부를 결정한다.

2018년 한 해 동안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에서 검토한 건이 1만 건이 약간 넘었는데, 한번 회의에 10건 정도씩 검토하다보니, 판정 결과가 나오기까지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리는 것이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로 지적되고 있다.


산재로 승인되는 정신질병

정신질환도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에서 위와 같은 절차를 밟는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제37조에서는 '근로기준법' 제76조의2에 따른 직장 내 괴롭힘, 고객의 폭언 등으로 인한 업무상 정신적 스트레스가 원인이 되어 발생한 질병을 따로 명시하고 있다.

또,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시행령 별표 '업무상 질병에 대한 구체적인 인정 기준'에서도 신경정신계 질병을 규정하고 있는데, 물질의 급성 중독에 따른 질병 외에 '업무와 관련하여 정신적 충격을 유발할 수 있는 사건에 의해 발생한 외상후스트레스장애', '업무와 관련하여 고객 등으로부터 폭력 또는 폭언 등 정신적 충격을 유발할 수 있는 사건 또는 이와 직접 관련된 스트레스로 인하여 발생한 적응장애 또는 우울병 에피소드'를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여기에 제한되지 않고, 공황장애 등과 같은 불안장애, 수면장애, 주요우울장애 등이 모두 업무상질병으로 인정된 바 있다. 고객과 관련하지 않은 업무상 스트레스로 발생한 적응장애나 우울병 에피소드 역시 업무상 질병으로 인정된다.

진단명에 제한되지 않고, 어떤 정신질환이라도 업무상 부담이 질병의 악화에 기여했다고 판단되면 산재보상이 승인되는 편이다. 근로복지공단에서 활용하고 있는 '정신질병 업무관련성 조사지침'에서 제시하는 정신질병의 종류와 업무관련 위험요인은 다음과 같다.
  

▲   정신질환 업무관련 유해요인 표.


자살이나 자해의 경우 산업재해보상보험법에서 '근로자의 고의·자해행위나 범죄행위 또는 그것이 원인이 되어 발생한 부상·질병·장해 또는 사망은 업무상의 재해로 보지 아니한다'고 한다.

하지만 시행령은 ▲업무상 정신질환으로 치료를 받았거나 받고 있는 사람이 정신적 이상 상태에서 자해행위를 한 경우 ▲(정신질환이 아니더라도) 업무상의 재해로 요양 중인 사람이 그 업무상의 재해로 인한 정신적 이상 상태에서 자해행위를 한 경우 ▲그밖에 업무상의 사유로 인한 정신적 이상 상태에서 자해행위를 하였다는 상당인과관계가 인정되는 경우에 자해행위에 따른 업무상 재해도 인정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두었다.

이에 따라 한 해에 30~50여건의 자살 사건이 업무상 재해로 승인되고 있다. 이때 업무상의 사유로 인한 '정신적 이상 상태'라는 것이 반드시 정신질환을 진단받는다든지, 환각 등의 증상을 보이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자살'을 선택했다는 것 자체를 판단 능력이 현저히 저하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업무상 스트레스와 정신질환의 관계

산업재해보상보험법에서는 '업무와 재해 사이에 상당 인과관계가 있는' 경우를 업무상 재해로 본다. 이때 '상당인과관계'가 중요하나 뚜렷하게 정의되어 있지는 않은데, 보통은 '사회상규 상 일반적인 지식이나 경험에 비추어 어떤 원인이 있으면 그러한 결과가 발생하리라고 인정되는 관계'로 생각할 수 있다.

현재 정립되어 있는 대법원 판례에서는, 이 인과관계란 '반드시 의학적, 자연과학적' 인과관계는 아니고, 노동자의 '취업 당시의 건강상태, 발병경위, 질병의 내용, 치료의 경과 등 제반 사정을 고려'하여 판단하도록 하고 있다.

사실 업무상 유해요인과 질병 사이의 관계가 확실해 질병판정위원회를 거치지도 않아도 되는 진폐증이나 소음성 난청을 제외한 대부분의 질병에서 업무상 요인이 '의학적, 자연과학적' 인과관계를 갖는다는 것을 밝히는 일은 쉽지 않다. 뇌심혈관질환, 근골격계질환, 정신질환 등 흔히 거론되는 여러 업무상 질병들은 다양한 요인에 의해 발생하기 때문이다.

정신질환의 경우, 업무상 스트레스 뿐 아니라, 경제적 문제나 가족관계 등 개인적 스트레스 상황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신체적 질병에 따라 이차적으로 발생하는 정신질환도 있을 수 있고, 질병의 특성상 외부 요인보다는 내적인 요인(신경계 발달이나 유전 등)이 훨씬 중요하다고 알려진 질병도 있다. 그래서 업무상 질병 여부 판정 과정은 쉽지 않고, '의학적, 과학적' 인과관계에만 기대서 판단할 수도 없다.

현재 근로복지공단과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에서는 업무상 스트레스와 업무 이외의 스트레스 요인, 질병에 대해 조사한 뒤 이를 바탕으로 '업무상 스트레스가 질병 발생이나 악화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 인정되는지를 '노사정에 의해 추천된 전문가들의 합의'에 의해 결정하고 있는 셈이다.
  

판정 과정의 개선 과제

근로복지공단의 '정신질병 업무관련성 조사 지침'에서 조사하도록 정해놓은 '주요 업무상 스트레스 요인'에는 업무상 사고, 폭언·폭력·성희롱, 업무의 양과 질 변화, 업무의 실수· 책임, 민원·고객과의 갈등, 회사와의 갈등, 배치전환, 직장내갈등, 업무부적응, 괴롭힘·차별 등이 포함된다.

지침은 해당 요인 자체의 심각성 뿐 아니라, 노동자의 주관적 충격 정도를 감안하고, 사건 발생 이후 처리과정에서의 적절한 지원과 지지, 근로자 보호가 가능한 체계였는지를 감안하여 스트레스가 가중되는 과정 등을 고려하여 주요 스트레스 요인의 심각도를 확인하도록 하고 있다. 정신질환과 관련된 조사 과정은 예전에 비해 상당히 진전되었지만, 이에 대한 평가와 판정은 아직은 각 사례마다 개별적으로 이루어진다.

한 사례를 보자면, 50대 초반의 남성 A씨는 공공기관의 관리직으로 일하고 있었다. 평소 스트레스가 심한 직장은 아니었다. 그는 고향에서 취업하여 오랫동안 한 도시에서 살아왔는데, 갑자기 전혀 다른 도시로 전보가 났다. 믿어왔던 본부장이 자신을 내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딱히 직위가 낮아진 것은 아니지만, 강등 혹은 좌천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가족이 다 함께 사는 곳을 옮기는 것도 만만치 않아 결국 낯선 도시로 혼자 이사했다. 새로운 도시에서 근무를 시작하고 한 달 뒤 A씨는 '미안하다'는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는 한국과로사과로자살유가족 모임에 참여하는 한 가족의 사례를 재구성한 것이다. A씨의 죽음은 산업재해로 승인받지 못했다. A씨의 업무 변화와 관련된 스트레스와 새로운 도시에서 부닥친 직장 문제의 구체적 증거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정신질환을 진단받은 재해 당사자 혹은 자살로 가족을 잃은 유가족이 관련한 '충분한' 증거를 수집하여 제출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불합리하다는 지적이 많다. 모든 업무상 질병 입증 과정이 다 어렵지만, 정신질환 특히 자살에 대해서는 재해당사자 측의 입증책임을 덜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또 폭력이나 폭언, 징계 등과 같은 뚜렷한 이벤트가 있는 경우에 비해, 장기간에 걸친 과로처럼 저강도의 만성적인 스트레스 요인에 의해 발생하거나 악화된 정신질환의 경우 판정위원을 설득하기 어렵다는 문제도 있다.

일본은 여러 가지 업무스트레스를 강, 중, 약으로 평가하도록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놓았다. 그리고 '중에 해당하는 스트레스 요인이 2개 이상이면 승인' 등 매우 구체적인 승인 지침을 제공하고 있다.

승인 지침 자체가 편향될 수 있고, 판정위원들의 자율적인 판단 여지를 좁히는 문제가 있을 수 있지만, 업무 스트레스 요인을 세분하여 평가하도록 해 판정의 일관성을 높일 수 있다. 따라서 국내에서도 자살뿐 아니라 정신질환 판정과 관련된 체계성을 좀 더 갖추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일터 정신질환 짚어보기] 정신질환과 자살,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 2020.05

정신질환과 자살,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정여진 업무상 정신질환 연구팀

 

1. 들어가며

정신질환과 자살 모두 논란이 많은 영역이다. 현재 정신질환 자체를 부정하는 고전적인 반정신의학적 도전은 잦아들었다고 하더라도 일부 질환에 대해서는 그 타당성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정신질환에 대한 공식적으로 내려진 명쾌한 정의는 없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임상가들은, ‘상당기간 지속되는 인지적, 정서적, 지각적(perceptual), 행동적, 기타 심리적인 역기능적 변화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고, 대체로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신체질환보다 정신질환에 대한 논쟁이 더욱 활발하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필자는 정신질환의 특수성, 특히 분류와 진단에 있어서의 특수성을 간략하게 다루고자 한다. 그리고 자살과 정신질환과의 연관성과 그 논란에 대해서도 덧붙이고자 한다.

 

2. 신체 질환과 다른 정신질환 진단의 특징

정신질환의 증상과 징후는 단순히 개인의 생존 기능에만 머무르지 않고, 대인 관계나 직업적 수행을 포함한 사회적 기능의 변화를 통하여 그 실체를 드러낸다는 점을 우선적으로 꼽아볼 수 있다. 그런데 생물학적 현상보다 심리학적 현상, 그보다는 사회적 현상이라는 더 높은 층위에 자리할수록 더 복잡한 기제들의 조합에 노출이 되며, 의도를 갖고 실천하는 인간에 의해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는 개방된 체계에 가까워진다.1) 이러한 이유로 정신질환의 원인부터 증상의 발현까지 여러 층위의 무수한 요인들이 동시에 작용하여, 경우에 따라서는 무엇이 직접적인 원인인지 알기가 대체로 (신체질환보다) 어렵다. 더구나 사회적 규범에 따라 문화적 배경에 따라 이러한 정신과 행동의 변화는 달리 평가될 수도 있다.

다음으로는 정신질환의 개념과 기준이 모호하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예를 들자면, 누군가가 정신병적(psychotic)이라면, 현실적으로 정의를 내리기보다 어떤 때정신병적이라고 하는지만 말할 수 있을 뿐이다.2) 현실 검증력이 손상되었다고 판단될 때 어디서부터 현실검증력(reality testing)’이 손상되었다고 볼 수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신체질환 역시 정의와 진단기준을 둘러싼 무수한 논의가 벌어지고 있는 데다, 자료와 근거(유전학, 역학 등의 연구결과)가 축적되면서 정신질환에 대한 임상적 지침 역시 개정과 업데이트가 이루어지고 있다. 관건은 신체질환이건, 정신질환이건 당시의 과학적 근거들에 뒷받침된 최선의 결론이었는지 여부일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진단기준이나 척도상 절단점을 단지 잠재적인 합의로 받아들여야 한다.

끝으로 정신질환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불확실성을 지닌다. 뚜렷한 예측 인자들이 부재하는 데다, 당사자의 성향이나 인지기능, 사회적 자원 등의 상호 작용으로 증상의 결과를 예측하기 어렵고, 증상이 고정적이지 않은 경우가 허다하다. 더구나 사회적 관계는 의도를 갖고 행동하는 사람들 간에 형성되어 상호작용이 일어나는데, 정신질환의 증상이 여기에 영향을 끼칠 수 있고, 거꾸로 사회적 상호작용이 증상의 발현이나 중증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당연히 진단명은 전문가들끼리도 의견이 엇갈릴 수도 있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렇다고 하여 진단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진단은 자의적인 딱지 붙이기(labelling)을 지양하고, 치료에 있어 체계적인 도움을 주고, 사회적 지원, 법적 배/보상 등의 사회적 개입의 준거를 마련하여 이를 정당화해주는 역할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신질환의 진단 분류는 자연과학적이면서 동시에 사회적인 것이다. 다시 말해, 다른 자연과학적 근거들이 등장한다면 한 질환이 두셋으로 나뉘거나 분류 체계상 거리가 멀어질 수도 가까워질 수도 있음은 물론이고, 사회 환경적 변화로 인해 더이상 아무런 문제가 없게 되어폐기된 진단도 적어도 일부 생길 수 있다. 덧붙여 병인론적 기제가 밝혀지지 않은 점들이 많아 신체 질환에 비해 월등히 현상학적인 방법을 많이 쓴다는 점도 상기한 불확실성에 더 기여하고 있다. 증상은 각기 특정한 패턴으로 군집하여 나타나므로, 우리는 서로 다른 정신질환을 논할 수는 있다.3)

그렇다면 정신질환은 왜 생기는가? 가장 간단한 대답은 유전과 환경의 상호작용의 결과라는 것이다. 여기서 유전이라는 말은, 가족력이 있다는 뜻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현재까지 적지 않은 유전학적 성과들이 진단분류학에 기여하고 있는데, 흔한 오해와는 달리 유전학이 곧 결정론은 아니다. 반대로 환경의 영향을 강조하는 결정론도 있을 수 있다. 최근 환경적인 영향이 유전자 일부를 활성화하거나 억제한다는 후성유전학(Epigenetics)이 주목을 받고 있다.4) 사족으로 유전적 영향이 크다고 하여 치료가 불가능하거나 생물학적 치료만 가능하다는 뜻은 더더욱 아니다.

한편, 환경적 요인에는 초기 생애적 환경(대개 정신치료는 여기에 초점을 둔다)도 있으나, 출생 전 태내 환경, 물리적/화학적, 사회적 환경 등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물론 정신질환이 나타나는 이유는 생물학적 변화로 설명할 수 있는 여지가 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예를 들어, 증상이 발현되는 것은 물리적, 화학적 뇌손상 때문이기도 하고, 이른바 신경전달물질 간의 불균형과 조절실패에 대해서도 익히 잘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의학적 처치의 표적이 된다. 그러나 과연 이들을 문제의 원인이라고 일컫는 것이 온당한가? 차라리 질환을 구성하는 결과가 아닌가? 조현병, 우울장애, 자폐증, ADHD등 환자들의 뇌발생상의 기능적, 구조적(비특이적) 이상의 근거들 역시 마찬가지이다.5) 환경적 요인들에 대한 개입이 무척 중요할 법한데도, 정신질환에 대한 1차적 예방-질환 발생의 결정 요인에 대한 개입-은 신체질환에 비해서도 거의 논의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정신질환만큼 개인화, 의료화가 문제인 영역이 있는데 바로 자살이다.

 

3. 자살과 정신질환, 그리고 논란

먼저 자살과 정신질환과의 연관성을 부인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전공의 수련 과정에서 기본적으로 쓰이는 교과서인 Synopsis Of Psychiatry를 보면, 최대 95%의 자살 성공자들에게 정신질환이 있었으며, 우울증(80%), 조현병(10%), 치매나 섬망(5%), 알코올 의존(25%)이 차지한다고 한다. 정신과 환자는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3~12배가량 자살 위험도가 올라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와 같은 사실에 기반하여 현 산재보상보험법 상 원칙상 자살을 고의적 자해의 일부로 보고, 산재 보상의 대상 범위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되어있으나, 정신적인 이상 상태에서 실행했을 것으로 인정되는 경우는 예외로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란의 여지는 여전히 남는다. 정신질환으로 자살을 고려할 때 대부분은 현실에 대한 왜곡된 인지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왜곡된 인지가 현실검증력의 저하와 동의어인지도 의문이 남는다. 앞서 현실검증력 저하 상태의 기준이 모호하다는 것은 언급하였다. 또한 정신질환의 결과로서의 자살이 틀림없다고 할지라도 그 개인의 동기는 고통으로부터의 탈출, 타인에 대한 복수, 자기 징벌 등 여러 양상을 보일 수 있기에 개인의 의도가 어디까지인지를 고려한다면 더욱 복잡하다.

물론 질병에 의한 결과로 간주하는 것은 장점이 있기는 하다. 남겨진 이들에게 적잖은 위안을 주며, 업무상 자살에 대한 보상을 비교적 쉽게 합의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럼에도 자살의 의료화를 우려하는 목소리들은 작지 않다. 어려운 철학적인 논의는 차치하고라도, 지금까지 정신질환의 사회적 관리나 예방에 관한 주류의 행보를 본다면 충분히 우려할만 하다고 생각한다. 현실적으로 자살의 원인은 운 나쁘게정신질환이 걸린 탓으로 되어, 고위험군 대상으로 한 정신질환에 대한 조기발견과 전문가에 의한 개인 치료가 강조되기가 십상이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자살이 발생한 사회적 경제적 맥락은 삭제되어버리고 만다.

 

4. 맺음말

이상으로 짧게나마 정신의학의 전통적인 견해, 이에 대한 비판, 그리고 필자의 관점에 대해 다루었다. 최근 일과 정신건강에 관한 관심이 커지고 활동가들의 고민도 깊어진 것으로 안다. 전술하였듯이 정신질환과 자살에 관한 논란의 지점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분명한 것은, 우리의 최종적인 목표는 일터의 정신건강 증진이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가 질환과 질병이라고 부르는 결과에 이르기 전에 각종 위험요인들, 특히 환경적 요인을 통제하는 1차 예방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아직도 신체 건강에 대한 사회환경적 요인의 중요성도 인정하지 않는 의사나 기타 전문가들이 대다수인데, 정신적 건강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

1) 베르트 다네마르크 외 저. 이기홍 역. 2005. 새로운 사회과학방법론 : 비판적 실재론의 접근. 파주 : 한울아카데미.

2) Fulford, B. 2004. Insight and delusion: from Jaspers to Kraepelin and back again via Austin In X. Amador Ed, Insight and Psychosis, Awareness of illness in Schizophrenia and related disorders 2nd ed, pp. 51-78.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3) Sims, A. . 김용식, 김임렬, & 정성훈 역. 2003. 마음의 증상과 징후(3)서울 : 중앙문화사.

4) 그리고리 L. 프리키온, 애너 이브코비치, 앨버트 S. 융 저. 서정아 역. 2017. 스트레스, 과학으로 풀다 : 더이상 스트레스에 반응하지 않는 방법서울 : 한솔아카데미.

5) Sadock, B., Sadock, V., & Ruiz, P. 2015. Kaplan& Sadock's Synopsis of Psychiatry: Behaviora Sciences/Clinical Psychiatry (11th ed). New York: Wolters Kluwer.

[일터 정신질환 짚어보기] 노동자의 정신적 고통이 산재가 되기까지 / 2020.04

[일터 정신질환 짚어보기] 

 

 

노동자의 정신적 고통이 산재가 되기까지

 

 

 

류한소 / 선전위원

 

 

 

노동안전보건운동의 역사는 '보이지 않는 고통'에 이름을 부여해 온 역사다. '직장 내 (성)폭력', '가학적 노무관리', '갑질', '직장 내 괴롭힘' 등 노동자가 일터에서 겪는 정신적 고통에 붙인 이름들의 목록이 그렇다. 노동이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심리적 요인에 대한 관심은 20세기 중후반부터 대두됐다. 이 요인에는 자본주의의 주요 생산방식의 변화, 일터의 조직, 노동자에 대한 관리 및 통제 방식의 변화를 반영되어왔다. 따라서 정신건강의 침해를 호소하는 노동자들이 많아진다는 것은 그러한 질병을 일터에서 일으키는 위험 요인들 또한 많아진다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정신적으로 아픈 사람을 바라보는 개인적/사회적 인식이 변했고, 의료지식 및 전문가도 변화했으며, 제도적 차원에서의 인정과 보상도 변화했다. 이렇게 다양한 사회문화적 각축장을 통해 이미 존재하고 있던 고통들이 이름을 얻으면서 노동자의 정신적 고통도 비로소 부상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국내의 정신질환 집단산재투쟁

국내의 정신질환 산재에 관한 논의는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탄압을 고발하면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이전에도 정신질환 산재를 개별적으로 신청한 사례는 있었으나 노조탄압으로 인한 정신질환에 대해 집단으로 산재신청을 제기한 첫 사례는 2003년 청구성심병원 노동자들의 집단요양투쟁으로 알려져 있다.

연이어, 공황장애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는 말도 생소했던 2004년, 도시철도기관사들이 집단산재신청 투쟁을 시작했다. 당시 근로복지공단은 사상사고 경험 여부로 산재여부를 따졌지만, 이 투쟁들은 사고 경험 유무와 상관없이 구조조정으로 인한 1인 승무 등 노동자들의 정신건강이 심각하게 침해될 수밖에 없는 근무환경에 일상적으로 노출되어 있음을 밝히는 계기가 되었다.

비슷한 시기, 민영화에 따른 경영효율화를 위해 인력 퇴출 프로그램을 운영한 KT(2004년)와 노조탄압을 당한 하이텍알씨디코리아(2005년) 노동자들 역시 적응장애, 우울증 등에 대한 산재신청으로 자신들이 처한 현실을 알렸다. 이러한 투쟁들 때문인지 근로복지공단의 2006년 통계부터는 이전까지 작업관련성 질병에 '기타'로 들어가던 정신질환 항목이 별도 범주의 항목으로 분류됐다. 그 뒤로 2008년 이랜드 일반노조, 코스콤 비정규지부, KTX 새마을호 승무지부 등 비정규직 투쟁 사업장 노동자들에 대한 정신건강 실태조사를 실시했으며, '적응장애', '우울증',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와 같은 진단명은 문제를 제기하고 싸우는 사람들이 마주했던 현실을 고발하는 언어로 자리 잡았다.

2009년 쌍용자동차 문제는 정리해고와 국가폭력이 노동자뿐 아니라 그들의 동료와 가족들에게도 신체적 외상은 물론, 정신적 외상까지 입힌다는 것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됐다. 2011년에는 쌍용자동차 정리해고자와 무급휴직자, 그 가족을 위한 심리치유센터 '와락'이 개소했다. 유성기업 노동자들의 심리적 위기상황을 치유하기 위한 '두리공감'이 개소한 것도 2011년이었다. 이처럼 '싸우는 사람들'의 마음 건강에 대한 관심은 2016년 여러 단체가 참여해 출범한 사회활동가와 노동자들을 위한 심리치유 네트워크 '통(通)통(統)톡(talk)'으로 이어졌다.

 


감정노동의 이슈화

정신질환 산재의 제도화 과정에서 또 하나 중요한 점은 감정노동의 이슈화이다. 감정노동이란 단어가 생소하던 2008년부터 민주노총 서비스연맹과 유통업종(백화점, 면세점) 노동조합들은 감정노동 문제를 부각시키고 산재 인정을 위해 노력해왔다. 그 결과 2015년 3월, 양대 노총과 여러 단체로 구성된 '감정노동 전국 네트워크'가 출범했으며 같은 해 12월, 국내에서 처음으로 감정노동 문제를 제도화한 "서울특별시 감정노동 종사자의 권리보호 등에 관한 조례"가 통과됐다.

이와 더불어 KTX 승무원(2015년), 마트 계산업무 노동자 산재 인정(2016년) 등은 열악한 근무환경과 지속적인 성희롱 및 폭언에 시달리는 서비스업 노동자의 정신적 스트레스를 산재로 인정하기 시작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콜센터에 전화를 걸면 나오는 "2018년 10월 18일부터 산업안전보건법에 고객응대근로자 보호조치가 시행됩니다"라는 자동음성도 오래전부터 감정노동의 이슈화를 위해 싸워 온 사람들의 성과다.

위에서 살펴본 조직된 노동자들의 집단산재신청으로 시작된 정신질환 산재에 대한 논의는, 이제 '갑질'이나 '직장 내 괴롭힘'이란 언어를 통해 노동운동을 넘어 한국사회에 만연한 악질적 갑을관계와 조직문화에 경종을 울리면서 일상의 민주주의를 재고하는 계기로 쓰이고 있다. 2017년에 설립된 '직장갑질 119'에 고발된 기가 막히는 사례들은 우리 일터가 얼마나 다양하게 노동자들의 권리를 침해하는지를 지속적으로 보여준다.

이 결과, 비록 실효성에는 많은 비판이 있었으나 2019년 7월 근로기준법이 개정되면서 '직장 내 괴롭힘'이 법적으로 '사용자 또는 근로자가 직장에서의 지위 또는 관계 등의 우위를 이용해 업무상 적정범위를 넘어 다른 근로자에게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라고 정의됐고 정부 차원에서 이를 규제하기 위한 노력이 시작되었다.



이름을 부여하는 일, 우리가 해야 하는 일

정리하자면, 국내 정신질환 산재 논의는 '싸우는 노동자'들의 집단요양투쟁을 시작으로 감정노동의 이슈화를 거쳐 일터의 전반적 조직문화에 대한 경종을 울리는 데까지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어왔다. 이외에도 장시간 노동으로 발생하는 정신질환이나 자살 및 사고 현장을 목격한 노동자들의 트라우마 관리 등으로 논의영역이 계속 확대되고 있다.

또한 무엇보다 여성 노동자들이 일터에서 일상적으로 겪는 구조적 차별로서, 노동권과 건강권에 주요한 영향을 끼치면서도 그간 '노동 문제'가 아니라고 치부되어온 직장 내 성폭력과 이로 인한 여성 노동자들의 건강 피해를 업무상 질병으로 제도화하기 위한 노력도 정신질환 산재를 논의할 때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이 글에서 언급한 사례들의 공통점은 노동과정에 계속 존재해왔지만 이름을 부여받지 못했던 정신적 고통들에 이름을 붙이고 이에 대한 사회적 논의의 장을 펼쳐왔다는 점이다. 아픔에 이름을 부여하고 인과적 설명을 통해 그 고통의 실체를 확인하며 그 고통이 발생하는 맥락을 찾는 일은, 그로 인한 아픔이 기존 지식체계나 타인에 의해 관찰되기 힘들수록 더욱 중요하다.

나아가 그 고통이 개인의 심리적 기질이나 배경이 아닌, 일터의 구조적 문제에서 기인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고통의 실체를 확인하고 발생하는 맥락을 찾는 일은 더욱 중요하다. 정신질환 산재에 대한 논의는 시작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향후, 기존의 좁은 인과관계 중심의 산재 논의를 사회적 협의 등으로 확장 시켜야 하며, 변화하는 자본주의와 이에 따라 변화하는 노동자들의 노동권과 건강권을 사고해야 한다. 무엇보다 정신질환 산재에 대한 논의가 그 사회의 전반적인 감수성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깊고 다양한 토론이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