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시간 읽어주는 사람] ‘미국 공장’의 노동자들은 어쩌다 ‘교체’됐을까

미국 공장의 노동자들은 어쩌다 교체됐을까

-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아메리칸 팩토리(American Factory)>

 

강남규 문화사회연구소 운영위원

 

이런 가정을 해보자. 당신이 10년간 잘 다니던 회사가 있다. 야근도 별로 없고 나름대로 노동문화가 잘 잡힌 모범 직장이다. 하지만 어느 날 지속적인 경영악화로 사장이 홀라당 도망가고, 회사는 공중분해 위기에 처했다. 그때 한 귀인이 나타나 자신이 회사를 사겠노라고 약속한다. 아아, 당신의 이름은 착한 자본가.

그런데 이 사장님, 취임 일성에 난데없이 6일제복원을 외친다. 아침마다 1시간씩 일찍 집합해서 단결을 위한 조례를 갖자고도 한다. 아이고, 어떻게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소리들을 태연하게 할 수 있단 말인가? 함께 일해 온 동료들도 동요하는 게 느껴진다. “미친 거 아냐? 시대가 어느 땐데.”

 

3세계의 일이 미국에서 일어난다면

 

사람에겐 국경이 있지만 자본에겐 국경이 없는 시대에 이런 일은 그다지 낯설지 않다. 이런 일은 주로 상대적으로 경제력이 높고 임금수준이 높은 나라의 자본이 사람 값이 싼 나라로 생산 공장을 옮기면서 일어난다. 어떤 나라의 임금수준이 낮다는 것은 대체로 노동자의 힘이 약하다는 뜻이고, 밀려드는 자본의 공세에 속수무책이기 쉽다. 그리고 자본은 그래도 되는곳에선 필연 그렇게한다. 자국에선 그리하지 못하는 기업들이 동남아시아나 아프리카 등 제3세계에서 끔찍한 노동착취를 자행해 왔다는 이야기는 비밀 축에도 못 낀다.

그런데 세계 최강대국이자 자본주의의 총 집산이라는 미국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면 어떻게 될까. 오바마 부부가 제작해 화제가 된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아메리칸 팩토리(American Factory)>는 바로 이 드문 사례를 근접거리에서 생생하게 보여주는 흥미로운 작품이다. 원래는 GM이 자동차를 만들다가 2008년에 버리고 떠난 미국 오하이오 주 데이턴 시의 빈 공장을 중국계 차량용 유리제작 기업인 푸야오(FUYAO)6년 만인 2014년 인수하면서 2년 반 동안 생긴 일들을 보여준다.

다큐멘터리는 희망적으로 시작한다. 가장 큰 일자리를 잃고 도시가 황폐화되던 와중에 글로벌 기업이 공장을 인수해 일자리를 제공하겠다고 하니, 지역에서도 큰 희망을 품을 수밖에. 물론 홍보를 위한 멘트일 테지만 푸야오도 자기들이 상당한 일자리를 창출하게 될 것이라며 지역사회에 희망을 주고 싶다고 말한다. 그들은 이 말을 실천해서 데이턴 시의 주민들을 적극 고용한다.

 

중국식 경영과 노동자들의 패배

 

갈등은 푸야오 회장이 본격적으로 중국식 경영을 도입하면서 시작된다. 장시간 노동. 중국 본사는 12시간 2교대제를 운용하고, 주말도 잘 보장되지 않는다. 어용 노조. 중국 본사의 노동자 대표 기구를 책임지는 것은 푸야오 차오 더왕 회장의 사위다. 군대식 문화. 중국 본사의 중간 관리자들은 아침마다 노동자들을 집합시켜 회사를 찬양하는 구호를 외치게 한다. 위험한 노동. 유리를 자르고 나르는 노동자들에게 반드시 필요할 안전장비들도 비용을 이유로 지급되지 않는다. 그리고 중국 본사 노동자들은 그걸 당연하다고 여긴다. (‘중국식이라기엔 좀 낯익은 경영법이긴 하다.)

자본주의가 진작 고도로 발달한 까닭에 노동조합이 일찍 성장한, 그래서 상식적이라고 부를 만큼은 노동문화가 안착된 미국의 조건 속에서 그 같은 시도들은 크게 논란이 됐다. 하지만 차오 더왕 회장은 최선(?)을 다해 중국식 경영을 미국 공장에 이식하려 들고 노동자들은 강력 반발하기에 이른다. GM이 있을 적 노동조합의 힘을 경험한 고참 노동자들로서는 퍼뜩 이런 생각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노동조합을 만들어야 한다!

본격적인 갈등이 시작된다. 노동자들은 노조 조직에 나선다. 차오 더왕 회장은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노조는 안 된다는 듯 노조파괴 컨설팅을 고용하거나, 임금을 올려준다며 회유책을 뿌리거나, 노동조합 생기면 공장 버리고 떠나겠다며 협박을 해대는 식으로 노조 조직을 방해한다. 결과는 어떨까. 반대 800여 표, 찬성 400여 표, 부결. 이후 노조 조직을 주도한 노동자 몇몇은 교체’(경영진은 해고를 이렇게 표현했다)된다. “노동조합의 필요를 못 느낀 젊은 노동자들이 많이 반대한 것 같아요.” 교체되어 나가는 노동자의 마지막 말이다.

다큐멘터리는 노조 조직 실패 이후의 이야기도 보여준다. 얼마간 시간이 흐른 뒤 푸야오 경영진은 공장 자동화 시스템 구축에 돌입한다. 쉽게 말해 기계팔로 대체할 수 있는 공정은 모두 기계팔로 대체해서, 노동자 2~3명이 일해야 할 곳에 1명만 일하게 하거나 아무도 일하지 않아도 되게 만들자는 얘기다. 노동조합이 조직되었다면, 그래서 노동자들이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면 이런 계획을 감히 언급이나 할 수 있었을까.

 

5일제에서 주52시간제까지

 

<아메리칸 팩토리>가 보여주는 것은 미국과 중국의 노동문화 성장 차이에 따른 갈등이지만, 한편으로 이러한 갈등은 한 국가 안에서도 종종 발생한다. 5일을 출근하고 주말 이틀은 쉬는 문화에 대해 생각해보자. 젊은 독자는 이렇게 물을 수도 있겠다. 그게 무슨 문화씩이나 되냐고, 당연한 것 아니냐고. 하지만 주5일제는 시행된 지 불과 15년밖에 되지 않은 제도다. 게다가 시행 초기에 논란도 많았다. 경영계가 특히 우는 소리를 많이 냈다. “지금 주 5일 근무제로 들어가기에는 대단히 빠르다(한국경총)”고 했던가.

그들 중 누구도 이제는 주5일제에 대해 이런 얘기를 (적어도 공개적으로는!) 하지 않는다. 어느 정도 상식적인 회사라면, 토요일에 출근하라는 말을 당연하게 하지는 않는다. 이제 주6일 출근은 비상식적이거나 예외적인 편에 속하게 됐다. 물론 여전히 주6일 출근을 강요하는 직장들이 제법 많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지만, 적어도 정치권이든 경영계든 6일제로 법제도를 복원하자는 식의 이야기를 감히 할 수 없다는 시대라는 사실 역시 분명하다.

오늘날 갈등의 대상이 된 것이 있다면 바로 주52시간제다. 하지만 주5일제가 그랬듯, 최저임금 인상이 그렇게 되어가듯, 시간이 흐르면서 주52시간제 역시 점차 당연한 것이 되어 우리 사회에 착근될 것이다. 달리 말하면 그들의 징징거림은 일종의 상수라는 얘기다. 그들은 언제나 그랬고, 그들의 말은 대체로 틀려왔다.

 

불가역적 제도를 만들려면

 

그런데 이번에는 정부의 입장이 이상하다. 52시간 시행 1년 조금 지난 지금 노동시간 단축에 대해서 내년도 50인 이상 기업으로 확대 시행되는 것에 대해서는 경제계의 우려가 크다(108일 국무회의 대통령 들머리발언)”면서 탄력근로제 도입을 의제화하고 나선 것이다. 새로운 제도가 정착되도록 독려하며 인내심을 요청해야 할 정부는 이번 결정으로 시곗바늘을 한참 뒤로 돌리고 있다.

중국 공장의 전근대적 풍경을 마주한 미국 노동자의 표정을 기억한다. “5일제를 주6일제로 바꾸겠다는 말을 누군가 한다면 우리의 표정도 과연 그러할 터다. 문화란 그렇게 발전하는 것이다. 우선 법으로 제도화되고, 당장은 잡음들이 일어날 수밖에 없지만, 시간이 흘러가며 자연히 사회가 제도에 맞춰 재구성되고, 마침내는 모두가 당연한 문화로 인식하게 된다. 52시간제에 대해 지금 필요한 것도 시간일 뿐이다.

노동조합 결성에 실패하고 해고되어 나가는 미국 노동자들의 뒷모습도 기억한다. 미국에서 당연한 것이 푸야오 공장에서만은 당연하지 않게 된 것은 노동조합을 저지한 자본이 이곳은 그래도 되는 곳이라고 확신을 가졌기 때문이다. 미국 노동자들은 푸야오의 문화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결국 노동자들은 힘을 잃음으로써 이런 파국을 맞았다. 이곳 문재인 정부가 자신들이 추진한 정책을 스스로 뒤집은 것도 그래서일 게다. 자본 앞에선 그럴 수 없지만, 노동 앞에선 그래도 되니까.

어떤 제도도 그 자체로 불가역적일 수 없으며, 다만 그것을 불가역적으로 만드는 힘이 있을 뿐이다. 무한 야근의 시대에서 주52시간의 시대로, 그리고 적당히 합의된 노동시간이 아닌 노동자 스스로가 그리는 노동시간의 시대로 가는 길을 보장하는 것은 착한 정부착한 자본가가 아니라 오직 강한 노동조합이다. <아메리칸 팩토리>의 씁쓸한 결말이 보여주는 사실들이다.

 

[노동시간 읽어주는 사람] ‘크라우드소싱’이 배달노동자에게 자율성을 가져다줄까? / 2019.10

크라우드소싱이 배달노동자에게 자율성을 가져다줄까?

  지안 상임활동가

 

배달앱 배달의 민족은 지난 9월 새로운 광고 하나를 올렸다. 30초짜리 광고는 주인공의 역동적인 몸의 움직임으로 시작해, 헤드폰으로 음악을 들으면서 팝핀댄스를 추고, 옥탑방에 걸터 앉아 옷을 매만지는 모습으로 이어진다. “춤춘 지는 15년이 넘었어요. 세계대회도 크루들 하고 계속 나가고 있어요. 강의도 하면서. 제가 디자인에 관심이 많아서 요즘 옷도 만들고 있어요.”  

크라우드소싱, 초단시간 미만의 배달노동을 가능케 하다

이 배달앱에는 당신을 위한 다양한 음식점이 구비되어있어요라는 것도 아니고, 빠른 배달에만족할 거라는 메시지도 아닌 대체 무슨 광고일까? 라는 의문이 들 때쯤, 주인공은 그래피티가 그려진 지하차도에서 춤을 추다가, 배달 옷과 보호구를 착용한 채 자전거를 열심히 밟으며 같은 차도를 지난다. 그리고 되묻는다. “제 직업이 뭐냐고요? 그게 뭐 중요한가요?” <춤도 추고, 디자인도 하고, 배달도 해요>라는 제목의 이 광고는 배달의 민족 서비스를 운영하는 기업 우아한 형제들의 새로운 배달 프로그램인 배민커넥트를 홍보하는 영상이다. 배민커넥트는 대중(Crowd)과 아웃소싱(Outsourcing)의 합성어인 크라우드소싱방식의 배달 프로그램을 활용한, ‘일반인대상의 배달 서비스이다. 이러한 방식은 대표적으로 우버이츠가 한국 시장에 진출하던 초기에 크라우드소싱 기반 배달 프로그램을 기업의 대표적인 전략으로 내세우면서 잘 알려졌다. 현재는 우버이츠와 배민커넥트 뿐만 아니라 쿠팡이츠, 쿠팡플렉스 등 다양한 배달, 물류 서비스들이 크라우드소싱 기반 프로그램을 활용하고 있고 참여자들을 모집하기 위해 홍보하고 있다.

배민커넥트가 만든 구글링크로 신청을 하면, 1회의 오프라인 교육 이후에 바로 원하는 시간”, “원하는 만큼일할 수 있다. 이동수단도 각 서비스에 따라 자차부터 전동자전거, 전동킥보드, 심지어는 도보나 일반자전거를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강력한 유입책이 된다. 애초에 1~2시간, 혹은 분이나 건단위의 배달이 이 서비스의 핵심이기 때문에 기업은 시간 단위로 일하는 노동자가 필요하지 않다. 또 최대한 많은 인력을 단시간 확보하여 개별 사용자들의 집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를 배차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배달노동의 대표적 이동수단인 오토바이도 크게 필요하지 않게 된다. 그래서 특정 구에서 공유서비스로 이용할 수 있는 전동킥보드나 서울시 따릉이를 활용한 배달도 가능해진다.

내가 원할 때, 달리고 싶은 만큼만”, 누구의 자율성인가?

지금까지 배달노동자들에게 가장 우선적인 문제는 이들이 특수고용노동자로 분류되어 근로기준법에서 적용제외 된다는 문제점이다. 배달앱의 관리/감독 속에서 일을 하더라도 현재 노동법 상으로 플랫폼과 노동자를 고용관계로 보지 않기 때문에 플랫폼 노동자들은 노동자로 인정되지 않는다. 일을 해도, 심지어 장시간 해도 특수고용노동자 신분으로 인해 각종 법적 보호에서 배제되는 것이다. 반면에 배민커넥트 등의 서비스들은 플랫폼과 노동자간의 고용관계가 성립 안 된다는 문제점을 넘어서 초단시간 미만의 건당 배달자 다수를 채용하는 것이 목적이라는 것이 핵심이다. 그런 점에서 이 일반인노동자들의 기본적인 노동법 적용이나 노동환경은 물론이고, 배달 과정 중 사고가 났을 때 책임은 기업이 부담하지 않는다는 문제점이 있다.

그러나 단순히 초단시간 배달 노동자들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초단시간 노동에 대한 법적 규제가 없다거나 플랫폼 노동자들에 대한 법적 보호가 없다는 점만이 문제는 아니다. ‘크라우드’ ‘소싱이라는 말 자체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기업은 노동자를 고용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 속의 남는 인력, ‘일반인들을 모집하고 건당, 시간당 가격을 지불한다. 그래서 배달앱이라고 하는 전체 서비스에서 사용자와 가장 최적의 경로로 배달 장소가 배치되는 프로그램, 지금 배달하면 얼마를 더 주겠다는 공지만 있을 뿐 이 배달 프로그램에 배달을 수행하는 노동자는 없다. 노동자와 노동이라는 과정은 지워지고 그 자리를 무수히 많은 초단시간 미만의 건당 배달들이 채우는 것이다.

내가 정하는 자유로운 스케줄” “자유로운 근무”(배민커넥트), “스스로 선택하여 일할 수 있습니다.” “유연합니다”(쿠팡플렉스) 등의 수사를 통해 볼 수 있듯이 자율성과 유연성은 이 서비스들이 참여자에게 부여하는 가장 큰 혜택이다. 참여자들의 후기를 담은 형식으로 만든 쿠팡플렉스와 배민커넥트 웹페이지는 시간이 남는 김에, 근처에 볼일이 있어서, 운동 삼아 잠깐씩 일하는 라이프 스타일을 제시한다. 이러한 인식 속에서 서비스에 참여하는 일반인라이더들 역시 이 행위를 노동으로 인식하거나 스스로를 노동자로 생각하지 않는다. 여기서 이 서비스들이 강점으로 꼽는 자율성은 마치 노동(과 그에 따르는 법적 보호)과 교환되는 것처럼 생각된다.

이 자율성은 분명히 기업에게 이익이다. 이 자율적인 일자리를 통해서 4대보험, 퇴직금, 각종수당 등 수많은 비용이 절감된다. 그러나 퇴근 이후나 주말을 이용해서 배달할 수 있는 자율성이란 대체 어떤 자율성인가? 여기에는 쉬지 못하는 삶, 진정한 의미의 자율성과 협상한 비자율적인 노동만 있을 뿐이다. 앞으로도 다양한 플랫폼이 개발될 것이고 그에 따라 쿠팡플렉스에 등록된 30만명의 일반인라이더들은 여러 형태의 일자리로 옮겨갈 것이다. 이 초단시간 미만의 노동을 어떻게 문제화할 수 있을지 지속적인 고민이 필요하다.

[노동시간 읽어주는 사람] 핵발전소 노동자가 치르는 '거짓의 대가'는 무엇인가 / 2019.09

[노동시간 읽어주는 사람] 

 

핵발전소 노동자가 치르는 '거짓의 대가'는 무엇인가

 

박기형 / 상임활동가 

 

요즘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드라마가 있다. 미국 HBO에서 제작한 <체르노빌>이라는 5부작 드라마다. 그동안 체르노빌 원전 사고를 조명한 여러 다큐멘터리, 영화, 에세이 등이 있었지만 <체르노빌>은 드라마로서의 높은 완성도와 긴장감 그리고 선명한 문제의식 등으로 사람들에게 큰 울림을 주며, 원전 사고 당시 상황과 사고 대응 및 조사 과정 전반에 이르기까지 체르노빌 원전 사고를 섬세하게 재현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넷플릭스만 구독하던 필자는 부랴부랴 왓챠플레이를 구독하고서 5부작을 정주행했다. 각 잡고 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에 마음을 굳게 먹고서 5시간에 걸쳐 손에 땀을 쥐고 시청했다. 마지막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난 후 하나의 대사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많은 사람이 명대사로 꼽을 정도로 원전 문제의 핵심을 함축한 질문이자 드라마를 여는 레가소프의 첫 마디 "거짓의 대가는 무엇인가?"
   
거짓의 대가는 무엇인가?

인류가 자초한 최악의 재앙으로 손꼽히는 1986년의 체르노빌 원전 사고는 2011년 3월 11일 발생한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자연스레 떠올리게 한다. 두 참사 모두 우리가 마주할 수밖에 없었던, 거짓의 대가가 무엇인지 여실히 보여주었다. <체르노빌>에서 무채색에 가까운 이미지로 펼쳐 보인 비참함, 즉 황폐해진 삶의 터전과 자연, 피폭으로 인해 죽거나 다친 사람들과 살처분 당하는 동·식물 등 사회와 자연이 송두리째 파괴당한 참혹한 현장 말이다.

특히 <체르노빌>에서는 피폭을 당한 원자력 부근 주민의 아픔뿐만 아니라 발전소에서 일한 노동자들과 이미 벌어진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또는 더 큰 참사를 막기 위해 살인적인 수준의 방사선에 그대로 노출되며 고군분투한 소방관, 군인, 의료인 등 수많은 노동자의 얼굴과 몸짓을 볼 수 있다. 자신이 상대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그것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파괴해버릴 수 있을지 알지 못한 채 그들은 온몸으로 거짓의 대가를 받아야 했다.

그 참혹한 사태가 일어나기까지 거짓의 굴레를 뒤얽히도록 한 사람들, 아니 그 사회는 어떤 책임을 졌는가. 우리는 누구에게 어떤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오히려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듯 체르노빌 원전 사고가 벌어진 지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거짓의 굴레가 우리를 짓누르고 있다. 언제 또다시 사고가 벌어지지 않으리라고 예측할 수 없기에 우리는 언젠가 또 한번 거짓의 대가를 치러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거짓의 대가는 이런 극단적인 상황에만 치러지는 게 아니다. 거대한 수준의 참사가 벌어지지 않더라도 우리는 일상적으로 거짓의 대가를 치르고 있다. 다만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치르고 있을 뿐이다. 그 '다른 누군가'는 바로 '핵발전소 노동자'들이다.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핵발전소 노동자의 저선량 피폭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한국에도 탈원전 논의가 촉발되면서 핵발전소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이야기에 주목하는 책들이 출간되었다. 그중 한 권을 꼽자면, 반핵의사회·사회건강연구소가 공동기획한 <핵발전소 노동자>가 있다. 이 책은 핵발전소 노동자들의 증언을 통해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피폭 및 각종 사고, 발전소와 국가의 조직적 은폐 나아가 다단계 하청을 통한 위험의 전가 등을 다루고 있다.

저자인 테라오 사호는 이 책에서 '나는 알 수 없어요'라는 노래를 언급한다. 그 노래의 가사 중 한 구절은 다음과 같다. '핵발전소에서 노가다 일로 방사선에 피폭된 아저씨가 벌레처럼 약해지는 데도 도시의 밤은 묵살한다.' 우리가 아름다운 도시의 야경을 즐기는 순간에도 빛을 만들어내는 핵발전소 노동자의 생명은 점차 빛을 잃어간다.
 
<체르노빌>을 본 사람들의 후기를 살펴보면 다들 하나 같이 심각한 수준의 방사능 노출에도 아무 보호장비를 갖추지 않은 채, 심지어 마스크도 제대로 끼지도 않고 방사능 피해자를 만지거나 폐기물을 치우는 등의 모습을 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헛웃음 나는 끔찍한 상황은 비단 무너져가는 소련, 가난하고 꽉 막힌 '사회주의' 사회에서만 벌어지는 게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자유롭고 평등한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공공연히 일어나고 있다. 거기서는 국가의 체면 때문에 거짓말했다면, 여기서는 자본의 이윤 때문에 거짓말하는 게 유일한 차이일 뿐이다. 핵발전소가 돌아가는 작업현장에서 위와 같은 일은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은폐된 저선량 피폭 문제

거짓은 단지 핵발전소에서 일어난 각종 사고, 위험 상황을 은폐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특별한 상황이 벌어지기 전부터 노동자들은 일상에서 언제나 방사선에 노출된다. 병원에서 방사선 검사 및 치료를 하는 사람이 방사선에 노출되지 않을 수 없듯이, 핵발전소에서 일하는 노동자들도 '당연히' 방사선에 노출된다. 문제는 '당연히'라는 말을 어떤 의미로 해석할 것이냐다.

핵발전소 노동자의 생명을 위협하는 거짓은 위험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시작된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핵발전소에서 방사선에 노출되지 않고 어떻게 일하라는 말이냐. 핵발전소는 원래 위험한 곳이다." 그 이후엔 위험이 당연하다고 전제하고서 어느 수준이 정말 위험한 것인가를 묻기 시작한다. 인체에 유해한 방사능의 수준, 즉 한계선을 설정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피폭 선량 기준을 각종 연구를 통해 객관적이고 과학적으로 도출하려 한다.

하지만 정말 피폭 선량 기준은 객관적·과학적인가? 아니다. 반대로 피폭 선량 기준은 자의적이다. 왜냐하면 고선량 피폭의 위험성은 명확하지만 저선량 피폭의 위험에 관해서는 여전히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어떤 질병을 일으키는지, 어떤 인과관계로 그렇게 되는 건지, 발병까지 어느 정도 기간이 걸리는지 등 여전히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혹자는 불확실하기에 입증되지 않았고 그래서 유해하다고 단정 지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 점에서 <체르노빌> 1화에서 사고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기 위해 방사능 수치를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지는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원자로의 핵연료를 담고 있는 노심이 폭발하지 않았다고 사안을 축소하고 싶은 이들은 측량 한계가 낮은 기계의 수치를 그대로 따른다. 그래서 위험하지 않은 상황이라고 판단한다. 그 기계가 측량할 수 있는 최고치가 나왔음에도 말이다. 결국 고성능 측량 장비를 통해 원자로가 폭발했음을 확인한 후에야 순순히 인정했다. 이미 수십 시간이 지난 후였고, 엄청난 양의 방사능에 수많은 사람이 노출되고 수백km의 지역이 오염된 후였다.

이와 같은 일이 핵발전소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위험이 입증되지 않았으니 안전관리 비용이나 인건비를 들이지 않으려는 태도, 저선량 피폭이 있었다고 하지만, 기준상 위험하지 않았고 그게 정말 암을 비롯한 특정 질병의 발생에 주요 원인이라고 입증되기 어려우니 산재 인정을 하지 않겠다는 논리 등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의 책임자들처럼 저선량 피폭의 유해성이 아주 오랜 뒤에 입증되면 그때에야 피폭자들에게 보상하고 안전조치를 취할 것인가?

정말 우리가 방사능의 위험으로부터 사람들을 안전하게 지키고자 한다면 불확실하기에 최대한 안전할 수 있도록 조치하는 것, 일상에서부터 모든 예측 가능한 위험에 대비하는 것, 조그만 방사선 노출에도 주의를 기울이고 관리하는 것 등이 아닐까. 그러한 원칙들에 입각할 때에야 비로소 거짓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고 나아가 거짓의 대가를 핵발전소 노동자가, 우리 사회구성원 모두가 치르지 않을 수 있는 출발점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노동시간 읽어주는 사람] 구준풍은 배달노동을 해서 집을 살 수 있을까?웹툰 <새벽 날개>, 박흥용

[노동시간 읽어주는 사람]

구준풍은 배달노동을 해서 집을 살 수 있을까?웹툰 <새벽 날개>, 박흥용

 

박범기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

웹툰 <새벽 날개>는 배달노동을 주제로 삼고 있는 웹툰이다. 이 웹툰의 주인공인 구준풍은 배달노동을 하면서 여러 사람을 만나고, 많은 일들을 겪어낸다. 그 과정에서 구준풍은 성장한다. 노동은 구준풍의 성장 과정에 있어 중요한 화두로 제기되고 있는 주제이다. 구준풍은 배달노동을 통해 자신의 삶을 보다 낫게 일궈가기 위해 노력한다.

무엇보다 구준풍이 자신의 삶을 더 낫게 만들기 위한 과정에 있어 중요한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은 집을 사는 것이다. 구준풍은 열심히만 하면 집을 살 수 있다고 믿으며, 끼니도 걸러 가면서 배달노동에 매진한다. 한 건이라도 더 많은 콜 수를 올리기 위해 노력하면서 악착같이 돈을 모으고자 한다. 그러면서 구준풍은 자신이 집을 갖게 되는 날을 소망한다. 그런데 과연, 구준풍은 배달노동을 하면서 모은 돈으로 집을 살 수 있을까?

2019년 최저임금은 시급 8350원, 월급 174만 5천 원이다. 내년도 최저임금은 올해보다 240원(2.9%) 오른 8590원이다. 배달노동자들은 평균적으로 최저임금보다 높은 임금을 받는다.

그렇지만 차이가 크지는 않다. 한국노동연구원의 보고서에 따르면 배달노동자들은 주 6일, 하루 10.7시간씩 일하며, 월평균 소득은 229만 5천 원이라고 한다. (배달대행 배달원의 종사실태 및 산재보험 적용 강화 방안 연구, 한국노동연구원, 2016) 보통의 노동자들보다 많은 시간 일하고, 수많은 위험에 노출 되어 있는 데도 많은 임금을 받지 못한다.

▲ 새벽날개의 한 장면  ⓒ새벽날개 박흥용 작가

더욱이 4대보험은 되지 않고, 사고가 생기면 병원비는 물론이고 오토바이 수리 등의 일체 비용 역시 배달기사가 부담해야 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열심히 배달 노동을 한다면, 집을 살 수 있지 않을까? 잘 모르겠다. 서울 아파트값 평균 가격은 8억 1378만 원이다. (월간 KB주택가격동향, 2019년 3월호) 평균적인 배달노동자가 서울지역에서 아파트를 사기 위해 한 푼도 안 쓰고 있는 돈을 모은다면, 354개월 (대략 29년)의 시간이 걸린다. 그렇게 꾸역꾸역 돈을 모 아서 아파트를 살 수 있는 배달노동자가 얼마나 많이 있을까?

노동의 곁에 있는 위험

이 웹툰은 구준풍을 비롯한 다양한 배달노동자들의 양상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들의 노동의 단면들을 내보인다. 배달노동이 다른 노동과 분별되는 한 특징은, 이 노동 안에 담겨 있는 위험이다. 작가는 이 작품 안에서 배달노동자들에게 닥치는 여러 가지 위험들을 다양하게 보여준다. 구준풍이 일하는 타임 배달대행 사무소에서는 신입 라이더를 채용할 때, "저승에서 벌어 이승에서 쓴다"는 말을 들어본 적 있는지 묻는다. 이 말은 이 웹툰에서 여러 번 반복되는데, 배달노동자의 노동이 위험과 밀착되어 있음을 경고하는 말이다.

이 웹툰에서는 배달노동의 와중에 일어났던 사고들을 다루는 장면들이 빈번히 등장한다. 2화에서 구준풍은 죽음의 위험에 처한다. 구준풍은 겨우 사고를 면한 뒤에 배달을 마무리 짓는다. 배달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구준풍은 혼잣말로 이렇게 말한다.

"언제 무슨 일이 있었어? 신호 위반한 자동차와 충돌해서 스무 살짜리 오토바이 배달기사가 사망했다고 한들. 그게 뭐 대단해. 몇십 초짜리 뉴스감으로 곧 휘발되고 말 텐데. 언제 무슨 일 있었냐구." (2화)

다행히 구준풍은 위험에서 벗어나 다시 일상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지만, 그의 친구 병호는 교통사고에 의해 죽음을 맞는다. 신호 위반한 차에 치여 죽은 것이다. 병호의 죽음은 구준풍의 혼잣말처럼 몇 초짜리 단신뉴스만을 남긴 채 휘발되어 버린다. 배달노동자로서 구준풍은 위험의 곁에서 노동한다. 그것이 자신의 일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고의 위협들이 그를 스쳐 지나간다고 하더라 도 그는 자신의 일을 해야 한다. 그것을 통해서만 자신의 삶을 일궈갈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배달대행 노동의 특성이 위험을 가중시킨다.

"배달대행 기사의 임금은 봉급제(월급제)가 아니다. 배달 건수대로 산정하는 성과급제이기 때 문에 배달기사들은 가능한 한 짧은 시간에 많은 오더를 소화하려고 한다."(2화)

자신이 처리한 콜 의 숫자만큼 돈을 벌기 때문에 배달노동자들은 조 금이라도 더 많은 콜을 올리기 위해 노력하고, 이 과정에서 다양한 위험이 상존한다. 또한, 최근의 배달노동은 플랫폼을 매개하여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 과정에서 배달노동자에게 부여되는 노동 강도가 더욱 높아지고 있다.

배달노동자 대다수는 배달대행 사무소와 위탁계약을 맺은 개인사업자인데, 개인사업자로서 이들은 배달앱에 올려진 주문을 접수하여 처리하고, 이에 대해 건당 수수료를 받는다. 자신이 처리한 배달 개 수 만큼 임금을 받기 때문에 이들은 조금이라도 더 많은 콜을 처 리하기 위해 애쓴다. 이러한 상황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은어가 '전투콜'이다.

전투콜은 배달노동자가 음식배달이 집중되는 시간에 많은 콜을 받고 처리하는 과정을 가리키는 은어이다. 배달 주문이 몰릴 때에 한꺼번에 많은 주문들을 집중적으로 처리하기 위해서 배달노동자들은 자신의 끼니를 뒤로 미룬 채 일 에 집중한다. 이렇듯, 개인사업자로서 배달노동자는 보다 많은 수익을 올리기 위해 다른 배달노동자들과 경쟁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으면서 보다 많은 노동을 기꺼이 감내해낸다. 이 과정에서 다양 한 위험들이 따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 "제한된 능력으로 산을 넘어야 한다."  ⓒ새벽날개 박흥용 작가

구준풍에게 미래가 있을까? 

사실 이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 사회가 이렇게 구축되어 있으니까. 이 웹툰에서 말하고 있는 것 역시, 이런 상황의 어쩔 수 없음이다. 이 웹툰은 이러한 상황에 대한 대안이나 대책 혹은 전망을 제시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이 웹툰은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 인가요?' 라는 질문과 그 답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때 답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 "사람은 자신의 제한적인 능력으로 산을 넘어야 합니다." (39화)라는 메시지이다.

이 말이야말로, 이 웹툰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메시지이다. 제한된 능력으로 산을 넘어야 한다는 말은, 자신의 주어진 것 안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능력주의적인 사고 안에서 개인의 노력을 강조하고 있는 어투처럼 읽히기도 한다. 이 웹툰에서 가장 불편한 부분이 이러한 메시지이다. 웹툰을 읽다 보면, 과연 제한된 능력으로 산을 넘어야 하는 것이 올바른 답인지 의심이 되는 부분들이 적지 않다. 단순히 노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산재해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위험의 곁에서 배달노동을 수행하지만, 그 노동에 대해 충분한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는 배달노동자들에게, 어차피 "삶은 슬픔과 고통 뿐"(36화)이니, 참고 견디며 "제한된 능력으로 산을 넘어야 한다"(39화)고 말하는 건 지나치게 꼰대적인 훈계인 것은 아닐까?

웹툰의 마지막 장을 넘기면서 자꾸만 이런 질문이 남는다. 제한된 능력으로 산을 넘어야 한다. 그런데 애초부터 발이 잘린 이들은 산을 어떻게 넘을 수 있을까? 그래서 구준풍은 과연 집을 샀을 까? 그래서 구준풍은 행복했을까? 자꾸만, 자꾸만 질문이 남는다.

[노동시간 읽어주는 사람] 소설은 '땀'을 흘린다 / 2019.06

[노동시간 읽어주는 사람] 

 

 

소설은 '땀'을 흘린다 

 

 

이종찬 / 문화사회연구소

 

 

<땀 흘리는 소설>(창비교육, 2019)은 "문학 수업을 통해 노동을 공부할 방법"에 대한 하나의 답변 격으로 기획되어 출간된 한국 단편소설 선집이다. 총 8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 이 책의 출발점은 "문학을 업으로 삼은 평론가들과 출판 관계자들에 대한 섭섭함"이었다고 엮은이들은 밝히고 있다.

이 책의 편집위원들은 모두 교육 현장에서 직접 문학을 가르치고 있는 교사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들의 문제의식은 "젊은 세대와 함께 읽을 만한 제대로 된 노동 문학 선집"이 마땅히 눈에 띄지 않았다는 데 있다. 물론 한국 사회에 노동문학의 흐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이 70~80년대의 노동 문학에 치우쳐 있었던 데 편집자들의 고민이 자리하고 있다. 오늘날의 청(소)년 세대와 함께 '지금 여기의 노동 문학'을 이야기하기에 그것들로는 시간의 이음매가 잘 맞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준비된 이 책은 "21세기에 새롭게 일과 직업에 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소설 선집"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노동의 구체적 양태는 시대에 따라 그 모습들을 달리해 왔다. 어제의 노동과 오늘의 노동이, 더 나아가서는 내일의 노동이 같은 형태를 띌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인간의 노동 환경이 시대를 막론하고 꾸준히 열악하였음을 따로 강조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땀 흘리는 소설> 속 이야기들에서 우리의 시선을 끄는 건 여전히 비루한 노동 환경으로 비롯된 감정의 어떤 무늬들이다. 노동의 조건이 가혹하다는 걸 '아는' 것과 그 가혹함으로 인해 초래된 마음의 무늬들에 대해 '이해'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좋은 문학과 예술은 인간과 세계를 아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이해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끈다.

먼저 김혜진의 <어비>를 읽는다.

도서 물류센터에서 일하는 '어비'는 동료 직원들 사이에서 수수께끼 같은 인물로 통한다. 소설 속 그의 모습은 자발적 유폐자의 형상을 닮아 있다. "그냥 별로 말할 게 없어요. 진짜요." 그는 말하자면 "여기까지라고 금을 그어 놓고 내내 그 경계를 지키는 데 필사적인 사람" 내지는 "있었나 싶으면 어느새 가고 없는 사람"이다. 여기까지 보면 자의식 과잉의 인물로 보이지만 그것도 아니다. 어비는 의식적으로 타인들과의 관계 맺음을 회피하는 유형이 아니라 그것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인물 쪽에 훨씬 가까워 보이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공간에서 근무하고 있는 소설 속 화자인 '나'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어비는 "웃으려고 하는데 그게 맘대로 안 되는 것 같았다."

단체 생활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노출하던 어비는 어느 날 팀장으로부터 책임 소재가 불분명한 클레임의 원인 제공자로 부당하게 지목받는다. 어비는 끝까지 자신의 잘못이 아님을 주장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회사를 그만 둔다. "햇볕 한 줌 들지 않는 이 커다란 창고를 빙빙 돌면서 인생을 낭비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나' 역시 얼마 뒤 퇴사를 하게 되는데 몇 주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생활용품 창고에서 어비와 다시 마주친다. 그 날 퇴근 후 '나'와 어비는 처음으로 같이 저녁 식사 자리를 하게 되면서 가까워지는 듯 하지만 그 다음날 어비는 말없이 자취를 감춰버리고 만다. 간밤에 지갑을 잃어버린 '나'는 그것이 어쩌면 어비의짓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지만 그것을 확인할 방법은 없다.
 

 
'나'가 어비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다시 보게 된 건 인터넷 개인 방송 사이트에서다. 어비는 그곳에서 기괴한 형태의 1인 방송을 하고 있었다. 산더미처럼 쌓아 놓은 번데기를 숟가락으로 게걸스럽게 떠먹거나, 싸구려 중국 음식들을 대량으로 시켜 빠르게 먹어치우는 어비의 먹방을 본 접속자들이 여기저기에서 별 풍선을 터뜨리기 시작한다. "어비가 벌어들인 돈과 앞으로 벌어들일 돈"을 카운팅해 보며 '나'는 어딘지 모르게 종잡을 수 없는 기분에 빠져든다.

 

김혜진의 <어비>에서 우리가 확인하게 되는 건 시대의 흐름에 따라 노동의 형태가 다양하게 분화되고 있는 현실이다. 다음과 같은 질문이 가능해진다. 어비의 인터넷 1인 방송은 노동일까 아닐까. IT 기술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인터넷 플랫폼 공간에서 제공되는 이와 같은 '플랫폼 노동'은 우리가 알고 있는 '노동'의 개념을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보게 만든다.

다음으로 읽고 싶은 작품은 구병모의 <어디까지를 묻다>이다.

'나'는 현재 카드 회사 콜센터 직원으로 일하고 있지만 원래 꿈은 아나운서였다. 한때는 자신의 목소리가 "언어의 잎맥을 살며시, 그러고도 단호하게 켜는 활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품고 있던 그였지만 꿈을 이루지 못하고 당장의 현실에 발이 묶여서는 지금의 직장에 취업해야만 했다. 그리고 규격화된 친절함의 언어로 점철된 그녀의 목소리는 애초의 매력과 활기를 잃어버렸다. 언어 폭력과 그것을 감내해야 하는 감정 노동은 일상이 되어버린 지 이미 오래다.

그런데 어느 날 걸려온 전화는 이전과는 결을 완전히 달리 하는 것이었다. 수화기 너머 '고객님'의 목소리, 그 첫마디는 다음과 같았다. "괜찮으세요?" '나'에게 그것은 "호미로 파헤쳐진 자리를 보드라운 흙으로 덮어 다지기 위해 토닥거리는 손길"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말문이 탁 막힌 게, 그 전까지 이어져 오던 콜의 무늬에서 한 조각이 삐끗 나가 버리니까. 그동안 퍼부어진 몇 톤 치의 욕이 거의 자장가에 가까운 패턴을 이루어 왔는데 거기 갑자기 완전 5도 화음이 추가된 상황". 바로 그 때였다. '나'는 그만 "부모님 돌아가신 것처럼 통곡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통화를 이어갈 수 없는 '나'를 대신해 다른 직원이 임의로 전화를 당겨 받지만 그 또한 마찬가지의 상황으로 전개된다. 그것을 이어받은 직원 역시도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만다. 그렇게 "울음은 우리 팀 전체에 염병처럼 퍼져 나갔어요."

구병모의 <어디까지를 묻다>는 인간 내면의 심층이 지닌 복합적인 역설을 잘 드러내 보여준다. 폭언은 상담원의 마음을 허물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친절함의 말 한 마디가 도리어 그들을 완벽하게 무너뜨려 버렸다. 인간의 마음이란 것이 이토록 허술하고 모순투성이다. 우리는 아직 인간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앞으로도 여전히 그럴 것이다.
   

 

 

[노동시간 읽어주는 사람] 시간의 의미를 묻는 하나의 방식, 미시마 유키오의 <목숨을 팝니다> / 2019.05

[노동시간 읽어주는 사람] 

 

 

시간의 의미를 묻는 하나의 방식, 미시마 유키오의 <목숨을 팝니다> 

 

 

김직수 / 사회공공연구원 연구위원

 

 

필자는 "당신 인생에서 단 한 권의 책을 꼽으라면?"이라는 질문에 주저 없이 답하는 사람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 모든 텍스트란 개인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달리 읽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인생 단 한 권의 책' 부류의 질문에서 유독 불리한 작가가 있기 마련인데 한국에서는 이에 해당하는 작가로 미시마 유키오를 꼽고 싶다. 

우리 사회는 그를 '천황 만세를 외치며 할복자살한 극우파 작가'쯤으로 고정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작가의 생애와 사상이 그의 작품과 별개인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명백히 그의 작품에 다른 결이 존재함에도 이를 사상하고 단순화하는 것은 극우 사상만큼이나 해롭다. 그의 작품들을 일련의 사회적 메시지로 읽고자 하는 경우 그가 제시하는 '처방'은 위험할지언정, 그의 '진단'은 놀랍도록 날카로우며 당대의 진보적 지식사회의 그것에 비하더라도 참신한 것들이 적지 않다.

흔히 미시마의 작품은 '심미주의적' 경향을 띤 것으로 이야기되며, 실제로 그의 작품들에서 직접적인 정치적 언급은 그다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들이 심지어는 일본의 근대 문학이라는 직접적인 카테고리를 다루면서도 좀처럼 미시마를 언급하지 않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이는 그가 내세우는 '아름다움'에 관련되며, 더욱 정확히는 그가 아름다움을 내세우게 만드는 현실의 '추악함'에 관련된다. 

그의 작품으로 <가면의 고백> <금각사> <비단과 명찰> <풍요의 바다> 등이 흔히 언급되는데 이런 '대작'들과 비교되면서 흥미 위주로 가볍게 쓰인 소설로 평가받는 책이 <목숨을 팝니다>이다. 하지만 나는 의도되었든 의도되지 않았든 간에, 이 책을 시간과 그 의미에 대해 천착하고 있는 작품으로 꼽는다. 전후 일본인들이 그들의 시간을 살아내는 모습에서 미시마는 어떤 추악함을 읽어냈던 것일까.

미시마가 자위대의 궐기를 호소하며 할복자살한 1970년으로부터 2년여 전에 쓰인 이 작품은 하니오라는 한 청년의 자살 시도로부터 시작된다. 하니오는 자본주의의 첨병으로 일컬어지는 광고업계에서 카피라이터로 일하고 있던 어느 날 석간신문을 읽다가 갑자기 죽고 싶다고 생각한다. 석간신문을 읽다가 글자가 바퀴벌레로 변하는 모습을 보면서 죽음의 충동을 느낀 것이다. 그가 읽던 신문에는 공무원의 스파이 행위, 도쿄를 뒤덮은 스모그, 하네다 공항 폭탄테러, 은행강도 사건 등 온갖 '추악한' 일에 대한 기사들이 가득했지만 그는 그저 '판에 박은 듯 똑같은 하루'라고 느끼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런 세상에 살아 봐야 의미가 없다고 느낀 이유는 무엇일까. 하니오가 생각해낸 답은 그가 '열심히 일하는 착실한 사원이었다'는 것이다. 결국 자살에 실패한 하니오는 회사를 그만두고 신문에 목숨을 판다는 광고를 낸다.

그런데 놀랍게도 손님들이 찾아온다. 어느 자산가 노인은 젊은 아내의 외도에 복수하기 위해 하니오에게 함께 죽어줄 것을 요청하고 어떤 꼬마 아이는 흡혈귀인 자신의 어머니에게 하니오가 피를 바쳐 기쁨을 주기를 원한다. 자신을 대신해 생체실험의 대상이 되어 주기를 원하는 의뢰인이 나타나는가 하면, 하니오가 첩보전의 희생양이 되어 주기를 요구하는 스파이 집단도 의뢰인으로 등장한다. 하니오는 그저 무덤덤하게 의뢰를 받아들여 충실히 수행한다. 공교롭게도 사건들이 해결되는 가운데 하니오는 계속 살아남는다. 그런데 이 모든 사건들의 배후에 ACS(아시아 컨피덴셜 서비스)라는 비밀조직의 그림자가 끊임없이 드리워진다.

의뢰인들이 화폐를 매개로 하니오에게 해결을 요청하는 문제들은 질투, 연민, 공포, 충성과 같은 다양한 감정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이러한 인간 군상을 통해 미시마는 전후 일본 사회의 다양한 모순, 보다 정확히는 의미의 상실과 관계의 파괴를 보여준다. 기업사회로의 변모가 계속되면서 장시간 노동의 굴레에 빠진 경제동물이 되어버린 노동자, 교환의 대상으로 전락한 사랑, 아무도 서로를 돌봐 주지 않는 파괴된 공동체, 의롭지 못한 일로부터 등을 돌리는 나약한 기회주의 등 이 모든 것들은 하니오의 죽음을 통해 해결될 터였다.

"세계가 의미 있는 것으로 변하면 죽어도 후회는 없다는 기분과, 세계가 무의미하니 죽어도 상관없다는 기분이 어디서 서로 화해하는 것일까. 그러나 결과가 어떻든 하니오에게는 죽음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ACS로 의심되는 검은 손의 조직적인 움직임으로 인해 하니오는 계속해서 무의미의 연쇄 속으로 떠밀려갔다. 그들은 끊임없이 하니오의 뒤를 쫓으며 문제가 불거지는 것을 막는다. 하니오는 그저 자유롭고 싶었다.

"하니오는 무의미에서 시작해, 그 무의미에 하나하나 의미를 부여하는 자유를 누리는 것이 삶이라고 생각했다." 
 

이처럼 그 의도는 다양하지만 화폐를 매개로한 의뢰인들의 요구에 목숨을 거는 행위들을 반복하면서, 삶의 의미에 대한 부정 그 자체가 하니오에게 하나의 의미가 되었고 그로 인해 역설적으로 죽고 싶지 않다고 느끼게 된 것이다.

한편 ACS의 존재는 고도로 성장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시간의 의미를 다룬 또 다른 역작인 미하엘 엔데의 <모모>에 등장하는 회색인간들을 떠오르게 한다. 이들의 그늘 아래 등장인물들이 '살아도 사는 게 아닌' 무의미한 삶을 계속하게 된다는 점은 놀랍도록 닮아 있다.

<목숨을 팝니다>에서는 주인공 하니오가 목숨을 파는 거래 행위를 계기로 등장인물들과 대화를 나누고, 또 하니오의 공감 능력에 의해 그들이 지닌 문제가 드러난다는 점도 비슷하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모모가 평범하지만 '신비한' 능력을 통해 잿빛 시간을 사는 사람들에게 심장으로 느끼는 시간의 의미를 일깨워준다면 하니오는 자신은 이미 한 번 죽었다는 사실에서 깨달은 삶의 의미, 시간의 의미를 묻는다는 점이다.

전후 일본 사회의 자본주의적 고도성장의 이면을 미시마는 한 청년노동자의 자살 시도라는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행위로부터 불러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이해하기 어려운' 죽음의 선택이 만연한 세상을 살고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과로 자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   전후 일본인들이 그들의 시간을 살아내는 모습에서 미시마는 어떤 추악함을 읽어냈던 것일까. 미시마는 전후 일본 사회의 자본주의적 고도성장의 이면을 한 청년노동자의 자살 시도라는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행위로부터 불러낸 것이 아닐까.

갑자기 과로 자살을 언급하는 이유는 광고회사에서 그저 열심히 일하다 어느 날 죽음을 선택하는 하니오의 모습이 필자에게는 과로 자살자의 하나의 전형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물론 미시마가 하니오의 자살 시도의 동기를 일일이 묘사하고 있지는 않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저 열심히 일한 것이 원인인 것 같다'는 작중 하니오의 언급은 흘려듣기 어렵다. 미시마의 작품 가운데 보기 드물게 직접적으로 노동쟁의 사건을 다루었으며 <목숨을 팝니다>와 비슷한 시기에 쓰여진 소설인 <비단과 명찰>에서도 그 단초를 찾아볼 수 있다. 당시 일본 사회에 만연해 있던 가부장적 노사관계가 파탄을 맞이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물론 미시마가 철저한 평등주의자는 아니었지만 그의 기본적인 사고방식은 '천황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것이었다. '질서의 회귀'를 통해 근대를 극복하고자 했던 그에게 자본주의 체제와 그속에서 노동자들이 장시간 노동의 노예가 되어 무의미한 세계에 직면하는 모습이 아름답지 못했던 것이리라. 잘 알려져 있듯 미시마는 '안보투쟁'의 한복판에서 도쿄대학 전공투 학생들과 토론을 벌인 적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긴장뿐만 아니라 묘한 상호 존중과 공감을 읽어낼 수 있는데 그것은 이들의 자본주의와 근대성에 대한 문제의식, 그리고 '절대자'를 중심으로 하는 질서의 회복을 통해 그것을 넘어서고자 한 의지였다. 미시마에게 그 절대자가 '천황'이었다면, 전공투 학생들에게 그것은 '프롤레타리아'였다. 오늘날의 68혁명에 대한 해석의 틀을 빌리자면 전공투가 탈물질주의적 좌파였다면, 미시마는 탈물질주의적 우파였다.

물론 우리는 세계 곳곳에서 일어났던 전복적 시도들을 '실패'로 기억하고 있지만, 삶과 그 본질로서의 시간의 의미를 묻는 목소리에 다시금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상황은 달라진 것이 없다. 과로 자살로 스러져가는 수많은 노동자들이 그들의 죽음을 통해 끊임없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시간 읽어주는 사람] 게임 속 노동과 노동의 시뮬레이션 / 2019.04

[노동시간 읽어주는 사람] 

 

 

 

 

게임 속 노동과 노동의 시뮬레이션

 

 

 

 

김상민 / 문화사회연구소 

 

 

 

 

큰 아이가 초등학교에 다니기 시작할 때쯤 아이패드라는 물건이 세상에 나왔다. 노트북이나 데스크탑 컴퓨터 보다 납작한 이 태블릿으로 이런저런 것을 하는 것이 아이에게 자연스럽게 되었다. 유튜브를 찾아보거나 게임을 하는 것이 대부분의 용도였다. 친구들이 하던 게임이나 우연히 발견하게 된 게임을 설치해 플레이하곤 했는데, 유난히 좋아했던 게임들이 있다. 다름 아닌 미용실 게임과 햄버거 가게 게임이었다.

 

 

노동과정부터 자본주의 윤리의식까지 가르치는 게임의 공식 


미용실 게임은 플레이어가 애견 미용사가 되어서 줄 서 있는 손님을 자리로 안내하고 머리를 손질한 다음 샴푸를 하고 드라이어로 말려 주고서 돈을 받는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빨리하지 않거나 순서가 꼬이면 손님들이 화를 내고 가버리거나 돈을 지불하지 않기도 했다. 햄버거 가게도 비슷하다.

아이 입장에서는 난이도 높은 게임이나 멀티 플레이어 게임은 즐기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나마 단순한 루틴으로 이루어지고 정해진 순서에 따라 적절한 타이밍에 클릭이나 터치를 해주기만 하면 되니 나름 즐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주어진 단순 업무를 완료하면 금색 동전이나 초록색 지폐가 짤랑 혹은 촤르륵 소리를 내면서 자기의 아바타에게 날아가는 장면을 보는 것은 무척 보람된 일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단순한 놀이와 그에 대한 보상은 많은 게임들이 채택한 기본적 방식이다. 플레이어가 받는 보상이 실제 돈은 아니지만, 게임은 플레이어로 하여금 주어진 임무(머리 깎기, 햄버거 만들기 등)를 한정된 시간 안에 효율적으로 수행할 때에만 적절한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을 반복적으로 가르친다. 아이는 게임을 플레이할 뿐이지만 언젠가 자신이 살아갈 현실의 노동 조건 하에서 어떻게 고객에 응대하고 주어진 노동의 프로세스에 맞춰나가야 하는지 학습하고 있는 듯 보인다.

물론 정해진 순서나 시간에 맞추지 못하거나 한눈을 팔아 손님의 요구를 들어주지 못하는 경우에는 여지없이 자기 노동에 대한 적절한 대가를 받지 못한다는 매우 자본주의적인 윤리의식도 어느새 심어준다는 점에서 아이들의 게임이지만 진지하게 들여다볼 필요도 있다.

어느새 게임들은 점점 세련되고 복잡한 방식으로 디자인된다. 화려한 그래픽과 실감 나는 장면, 캐릭터의 묘사는 플레이어로 하여금 게임 내에서 노동하도록 혹은 '노동을 플레이'하면서 게임을 즐기도록 한다. 일종의 시뮬레이션 게임들에서 특히 그런 특성들이 보인다. 예컨대 농사 시뮬레이션 게임이나 트럭운전 시뮬레이션 게임은 플레이하는 일-노동이 얼마나 신나고 흥미롭고 매력적인지를 보여준다.

농사 시뮬레이션 게임에서는 광활한 미국, 유럽의 농장에서 가축을 기르거나 각종 트랙터와 콤바인 등 성능 좋은 첨단 농기계와 시설을 선택해가면서 파종에서부터 수확과 저장에 이르기까지 실제 농사를 짓는 것과 똑같은 경험을 할 수 있다. 현재 실제로 시판되고 있는 고가의 농기계 브랜드가 그대로 등장하고 농장주와 계약을 맺어 특정 농작물을 수확하는 등 농사를 지어보지 않은 이들도 실감나게 농사를 지어볼 수 있다.

트럭운전 시뮬레이션 게임 또한 플레이어가 운전기사가 되어 유럽의 경계를 넘나들며 여러 나라의 풍경과 날씨, 도로 등을 경험하면서 화물을 정해진 시간 안에 배달하는 것이 목표다. 실제 판매되고 있는 유명 자동차 제조사의 트럭 모델을 구매하기 위해서는 게임 속에서 대출도 받아야 하고 운전 도중 사고가 발생하거나 교통법규 위반을 할 경우 수리비가 들거나 벌금을 내야 할 수도 있다. 트럭에서 라디오를 듣거나 내비게이션 장치를 켤 수도 있고 심지어 장시간 운전 시에는 졸음운전을 할 위험도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게임은 정말 '게임'일 뿐일까

이처럼 현실에서의 노동 환경과 조건은 시뮬레이션 게임 속으로 들어오면서도 여전히 유지되는 것처럼 보인다. 플레이어들은 노동에 대한 시뮬레이션으로, 즉 노동을 재미로 플레이하면서 경험의 재미를 얻는다. 게임이 재현하는 상황이나 시각적 경험은 현실에서와 무척 유사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게임을 통해서 플레이하는 노동은 언제나 노동이 아니라 플레이, 즉 놀이가 된다.

그렇다고 해서 게임 속에서의 노동이 무의미하거나 아무 것도 아닌 것은 아니다. 노동을 시뮬레이션함으로써 플레이어는 여전히 노동을 경험하는 셈인데, 때로는 그 노동의 시간과 강도가 단순히 감내해야 할 것, 게임처럼 즐겁고 즐길만한 것으로 낭만화하게 된다.

게임은 게임일 뿐이니 즐기기만 하라는 것도 일견 맞는 말이지만, 게임 속에서 이루어지는 플레이어의 노동과 그 노동에 투여되는 시간, 그리고 플레이에서 생성되는 데이터는 실제로 매우 물질적인 것으로 그것이 현실과 맺는 관계는 매우 밀접하다. 말하자면, 게임의 플레이 혹은 게임을 통한 노동은 그 자체로 플레이어의 재미만을 제공하도록 설계되지는 않는다.

모든 노동의 절차가 자동화되고 가상화되는 게임 자체의 매력에 빠져들면서 플레이어는 스스로 경영자가 되는 자본주의적 인간, 호모에코노미쿠스, 나아가 노동을 놀이하거나 놀이로 노동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지금 여기에서의 노동 현실과 조건을 그저 하나의 시뮬레이션의 대상으로 경험한다.

또한 게임은 플레이어의 노동 시뮬레이션이면서 동시에 플레이어의 게임 데이터 수집과 이를 통한 미래 경제의 시뮬레이션이 될 수도 있다. 트럭운전 시뮬레이션 게임 플레이어들의 데이터가 머지않아 무인(자동운전) 트럭의 인공지능 알고리즘이나 플랫폼을 제작하기 위한 기본 데이터로 쓰일지 누가 알겠는가. 게임 속 노동이 현실노동의 시뮬레이션이 되고 또 그것이 인간의 노동을 대체할 자동화의 시뮬레이션이 되는 그런 시대가 금방 도달할 것만 같다. 그때 인간의 노동은 또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될까.

 

 

 

 

 

[노동시간 읽어주는 사람] 어느 응급의학과 의사의 고백 / 2019.03

[노동시간 읽어주는 사람]

 

 

 

어느 응급의학과 의사의 고백

 

 

 

 

 

응급의학과 의사 L

 

 

 

 

최은영의 소설집 내게 무해한 사람에는 아치디에서라는 제목의 짧은 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주인공 랄도는 브라질에서 엄마와 누나의 노동에 의존해 방에서 마리화나나 피우며 목적 없이 살아가는 청년이다. 잠깐의 연인이었던 여자를 아일랜드까지 만나러 왔다가 화산폭발로 발이 묶이게 된다. 더 이상은 그를 경제적으로 지원할 수 없다는 엄마의 뜻에 어쩔 수 없이 돈을 벌 곳을 찾게 되고, 그렇게 찾아간 작은 마을 아치디에서 그는 하민이라는 한국인 여자를 만난다. 무뚝뚝하고 항상 화난 표정이던 그녀와 몇 번의 만남을 통해 약간 친밀해진 그는 그녀가 한국의 대도시에서 3교대로 일하던 간호사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왜 좋은 직업을 놔두고 여기까지 왔냐는 물음에 그녀는 대답한다. 한 간호사가 있었는데 그녀를 너무너무 싫어했었다고, 여기까지 모든 것을 버리고 올 정도로. 그러면서 그녀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일이 몰릴 때가 있어. 한시도 앉지 못하고 거의 뛰어다니다시피 해야 하는 때가.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고 그렇게 계속 일을 해. 그런 날 중 하루였어. 거의 백 살이 다 된 할머니가 환자로 들어온거야. 딸은 팔십 먹은 노인이고. 그 노인이 그녀에게 부탁한거지. 자기 엄마 욕창에 드레싱 좀 해달라고. 그녀는 짜증이나. 그리고 생각하지. 왜 노인들은 이렇게 짜증나는 존재들인가. 다른 일들도 많으니까 조금만 기다리라고 해. 정신없이 일해. 할 일이 너무 많아. 노인이 다시 찾아오니. 할머니, 기다리시라고 했잖아요. 네 시간 기다렸어. 노인이 대답해. 조금만 더 기다리세요. 우리 엄마가 아파서 울잖아. 기다리세요. 그녀는 차갑게 말해. 급한 일들을 다 끝내고 가서 드레싱을 하지. 손길은 빠르지만 거칠어. 그리고 생각하는 거야. 왜 백 살까지 살아서 모두를 귀찮게 하느냐고. 왜 이렇게까지 살고 싶어 하냐고. "

 

 

그녀가 그렇게 싫어하게 된 간호사는 자기 자신이었다.

 

 

책장이 넘어가지 않았던 이유는 예전 대학병원 응급실에서 전공의로 일하던 때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커피와 에너지음료로 매일을 겨우 버티던 그 시기에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차마 입 밖으로는 꺼내놓지 못했지만 사실 '왜 이렇게까지 살고 싶어 하냐고' 푸념하듯 속으로 중얼거릴 때가 있었다. 그 전에 스스로 상상했었던 따뜻하고 유능한 의사의 모습이 아니라 분노와 피로와 짜증으로 뭉쳐있는 싸가지 없는 전공의가 된 자신을 발견했던 시간이었다.

응급실에서 일하는 이상, 밤낮이 바뀌는 건 당연했다. 식당 시간을 맞추지 못해 식은 배달음식이나 편의점 음식으로 식사를 때웠다. 야간 근무가 연달아 있을 때에는 밤을 꼴딱 새고 컨퍼런스에 졸면서 참석한 후 편의점에서 빵과 음료수를 사서 머리맡에 놓고 잠이 들었다. 자다가 배가 고파 깨면 머리맡에 있는 음식을 주섬주섬 먹고 다시 잠이 들었다. 그러다 맞춰놓은 알람이 울리면 깨서 다시 밤 근무를 위해 응급실로 향했다.

 

전국에서 환자가 몰려들었다. 건강하게 지내다가 갑자기 청천병력 같은 이야기를 듣고 황망히 내원한 이들도 있었고, 타병원에 몇 달째 입원해 있다가 해결되지 않아 사전만큼 두꺼운 의무기록을 가지고 응급실로 오는 환자들도 있었다. 환자 수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은 베드는 이미 찬지 오래라 목도 가누지 못하는 노인들이 휠체어에서 수십 시간이 넘게 버티고 있었고 보호자들은 그 뒤에서 환자분의 머리를 붙잡고 힘들게 서 있다가 때때로 분통을 터트리곤 했다. 가벼운 질환으로 내원한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의무기록 한 페이지에 다 들어가지 않는 긴 병력을 가졌고 많은 약과 시술과 수술을 필요로 했다. 충분한 시간을 들여 정보를 알아내고 적절한 진료를 제공하는 일은 시간도 경험도 없던 나에겐 너무 어려웠다.

 

그 와중에도 끊임없이 접수되는 환자들이, 항상 무언가를 요구하는 보호자들이, 계속해서 들이닥치는 구급차가 원망스러웠다. 이미 한 설명을 다시 해야 하는 상황이면 짜증이 치밀어 올랐고 끊임없이 전자차트에 새로 뜨는 이름들을 보면 분노마저 느끼곤 했다. 모두가 아픈 환자고 각자의 긴 이야기가 있었지만 귀를 기울여 들을 여유가 없었다. 그들의 고통이나 불안함, 아픔을 느끼고 연민하거나 위로하기에는 너무 둔감해져 있었다.

 

근무가 끝나고 몸이 좀 편해지면 후회했다. 환자를 환자로만 보지 않겠다고, 하나의 인격으로 보고 존중하겠다고 생각했던 나는 어디로 갔는지, 나는 왜 이리 체력도 약하고 잠도 많고 성격도 더러운지, 자주 자책했고 그러지 않으려 다짐했다. 새롭게 다짐하고 근무를 시작했어도, 피곤하고 배고플 때가 되면 또 짜증을 냈다. 간혹 같이 일하던 동료나 선후배 중 한 두 명이 말없이 도망가거나 사정이 있어 빈자리가 생길 때가 있었고 그럴 때면 그 부재를 누군가는 채워야 했다. 인력이 부족하다고 해서 아픈 환자가 덜 생기는 건 아니니까. 근무 때 마다 진료를 하면서 부지런히 환자를 퇴원시키거나 다른 병원으로 전원 시켜야 했다. 입원하고 싶어 하는 환자와 원망 섞인 보호자의 비난을 들으면서도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들에게 '어쩔 수 없다고'만 반복했을 뿐. 그 과정에서 하민이란 여자가 그랬던 것처럼 나는 내 자신이 싫어하는 의사가 되어 있었다.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이 시간이 끝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전공의와 전임의 시절이 끝나고 나는 그곳을 빠져 나와 전보다 건강해진 몸과 정신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누군가는 크게 달라지지 않은 의료현장에서 여전히 과중한 노동을 하고 있다. 주로 인턴, 전공의, 그리고 펠노예 (펠로우+노예를 합친 말이다)라고 우리가 부르는 전임의들 이다. 어떠한 사명감을 가지고 헌신하고자 하는 이들도 그 곳이 열악하고 위험부담이 많으며 보수가 적은 자리임을 안다.

 

그러나 여전히 그 현장을 지키고 있고, 그 대가로 건강을 위협받는다. 아주대 외상센터의 이국종 님은 한쪽 눈이 거의 실명 상태이며 어깨와 다리도 잘 못쓰신다고 한다. 아마 함께 일하는 팀의 대부분이 수면장애를 포함 자잘한 질병에 시달리실 거라고 짐작된다. 고 윤한덕 님은 응급의료 시스템을 위해 과도한 근무를 하면서 과로와 수면부족에 시달리다 기저질환도 없이 심정지로 사망하셨다. 한 대학병원의 33세 소아과 전공의는 36시간 연속근무 중 당직실에서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다. 간호사들의 현실은 어떤가. 현재 신규 간호사의 이직률은 38.1%이고 간호사 평균 근속년수는 5.4년이다. 수면부족과 과중한 업무, 감정적인 스트레스 및 부담감 속에서 그중 몇은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고, 그 외의 많은 이는 위염과 수면장애를 얻은 채 그곳을 떠난다. 하민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나의 경우, 내가 부족해서 그랬던 것인지도 모른다. 많은 시간을 자책하면서 보냈다. 비슷한 상황에서 더 나은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들도 있다. 같은 환경에서도 어떤 이들은 더 친절하고 공감하는 태도를 보여줬고, 틈틈이 환자들과 라뽀(rapport)를 쌓는 모습도 보였다. 그렇지만 모두에게 그런 것을 기대할 수는 없는 법이다. 나를 포함한 보통의 많은 사람들은 최소한의 수면시간을 보장받고 예측 가능한 근무 속에서 적절한 노동 강도로 일할 때 인간을 인간으로 대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이 책에서 랄도는 궁금해 한다. 왜 하민은 항상 자신은 열심히 살았다라고 하는지.

 

나는 살다라는 동사에 열심히라는 부사가 붙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 hard’는 주로 부정적인 느낌으로 쓰이는 말 아닌가. ‘hardworking’이라는 말이 있긴 하지만 사는 게 일하는 건 아니니까.”

 

사는 게 일하는 것은 아니다. 새삼스러운 말이다. 열심히 일하고, 헌신하는 것, 더할 나위 없이 좋다. 그러한 헌신을 높이 평가하고 추앙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헌신과 희생에 대한 강요가 되어서는 안 된다. 누군가 자신의 몸을 갈아가며, 삶을 바쳐가며 일하지 않아도 무리 없이 돌아갈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꼭 전쟁터에 나간 장수처럼 비장하게 일하지 않아도 되는, 누군가 과로로 죽거나 아프고 나서 안타까워하지 않아도 되는 환경. 내가 소명의식 없고 게으른 사람이라 그런지는 모르다. 하지만 나는 너무 열심히 일하지 않아도, 보통 정도로 적당히 일해도 문제없이 굴러가는 곳에서 스스로의 몸을 돌보며 일하고 싶다.

 

 

 

 

 

 

 

[노동시간 읽어주는 사람] 조선생의 월급은 얼마인가 : 드라마 <SKY캐슬> / 2019.02

[노동시간 읽어주는 사람]

 

조선생의 월급은 얼마인가 : 드라마 <SKY캐슬>

 

최혜란 노동시간센터 회원

 

 

<SKY캐슬>이라는 인기 드라마가 얼마 전 종영했다. 드라마는 입시를 통해서 아버지들의 '대학교수'라는 지위를 유지하려는 교수의 아내 및 자식들의 분투를 다양하게 그려내며 많은 호응을 받았다. 마지막 회에서 황급히 해피엔딩으로 갈등을 봉합하고자 한 것에 대해서도 원성이 자자할 만큼 드라마는 큰 인기를 끌었다.

그 극의 중심에는 자신이 맡은 학생을 100% 서울 의대에 합격시킨다는 입시 코디 '김주영'이 있었다. 오늘은 그 김주영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비서 '조 선생'의 이야기를 해 보려 한다.

드라마의 인기와 비례해 주연뿐 아니라 조연에게도 많은 관심이 쏟아졌는데, 비서인 조 선생에 대해 '극한직업이다', '대체 월급이 얼마냐'는 재미있는 반응이 나오기도 했다. 그래서 1화부터 20화까지 조 선생이 등장한 장면을 분석해 업무내용과 업무 시간을 추정해 보았다.


김주영을 위한 24시간 대기조


먼저 조 선생은 학생의 입시와 직접 관련된 일뿐 아니라 김주영 선생의 사적인 지시사항까지도 모두 수행하는 그야말로 '수행비서'. 보통 수행 비서는 운전하는 역할을 맡기 때문에 어디를 가든 동행하는 것으로 그려지지만 조 선생은 운전만 하는 수행비서가 아니다. 김주영이 하는 일에 다양하게 관여하고 폭넓게 지시를 받는다.

먼저, 학생의 입시와 관련된 일이라면 무엇이든 도맡아서 한다. 김주영과 학생의 운전기사 역할을 하며, 학생을 지도할 과외 선생을 물색하고, 그들의 프로필을 정리해 보고하며, 선생님들과 학생을 어떻게 지도할지 회의를 주관한다.

그뿐 아니라 학생의 봉사활동과 교내·외 수상실적을 위해 대회 등에 참가하도록 지원하고 스케줄을 조정하며 학생의 스트레스 관리까지 맡는다. 20회차에서 조 선생은 34번 등장하는데 그중 김주영이 퇴근 후 자신의 집에서 전화로 조 선생에게 지시하는 장면은 2회 나오고 10번 가량은 통상적인 퇴근 시간 이후인 밤중에 일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밖에도 김주영의 장애인 딸을 돌보는 역할까지 한다. 이렇게 조 선생의 업무 시간은 길고, 그 내용 역시 다양하다.



일방적인 지시 하에 업무 수행, 질문하면 혼나요


극 중 조 선생은 대부분 김주영에게 지시를 받는다. 34번의 등장 중 조 선생이 자기의 생각을 말하거나 김주영에게 질문하는 것은 총 7번이다. 그때마다 조 선생은 김주영에게 꾸지람을 듣는다.

김주영은 조 선생에게 일방적인 지시를 내리고("이수임 뒷조사해", "혜나를 밀착 감시해", "예서 명상실로 데려와"), 그의 질문에는 공격적으로 반응한다. "몰라서 물어?", "왜 두 번씩 말하게 만들지?", "내가 그 정도 계산도 없이 행동했을 것 같아?"라는 식이다. 할 말이 있다가도 쏙 들어갈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 선생이 계속 일을 하는 이유


조 선생이 우호적이지 않은 상사 밑에서 장시간 노동을 감내하며 계속 일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직무 스트레스를 판단하는 여러 가지 방법 중 노력-보상 불균형 모델이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자신의 노력과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 어느 정도로 균형을 이루느냐에 따라서 힘든 일임에도 불구하고 계속할지 그만둘지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18화에서 조 선생은 시험지 유출 사건을 무마시키기 위해 살인을 사주한 사실이 발각될까 두려워한다.

김주영에게 이렇게까지 하는 것에 회의감이 든다는 사실을 털어놓자 김주영은 거액의 아파트를 선물이라며 건넨다. 이로써 조 선생의 보너스가 수십억 원에 달했고 노력-보상의 균형이 있었기 때문에 극한직업을 견디고 있지 않았느냐는 추측을 하게 된다.

조 선생의 결말은 좋지 않았다. 살인을 교사한 죄가 발각되어 감옥 신세를 진다. 상사가 지시하였으나 명백히 범죄에 가담했고, 거기에는 자신의 의지도 반영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 선생은 자신이 저지른 범죄 사실을 순순히 인정하고 감옥 신세를 받아들인다.

사실 시청자로서 조선생의 서사가 다소 엉뚱하게 흘러가서 아쉽기도 하다. 그러나 범죄 사실만 제외하고 조 선생의 직업을 고찰해 보면 장시간 노동뿐 아니라 그 사람이 놓여 있는 업무 환경에도 주목해야 할 필요성을 다시 한 번 느낀다.

조 선생과 같은 사무직의 노동조건을 평가할 때 물리적인 환경보다는 노동시간과 업무 스트레스의 원인이 무엇인지 따져보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굳이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일을 하면서 얼마든지 경험할 수 있기에 시청자들은 조 선생에게 주목했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상당한 압박이 있는 직업으로 느껴졌기 때문에 '월급이 얼마냐'라는 궁금증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그동안 업무상 과로와 스트레스로 인한 뇌심혈관계 질환 발생에 대한 논의와 연구가 축적되었고 작년에는 업무상 뇌심혈관계질환을 평가하는 고용노동부 고시도 개정되기에 이르렀다.

 

현재 우리 사회에는 장시간 노동이 만연해 있다. 이를 다시 얘기하는 것이 소모적으로 느껴질 정도다. 정부에서도 장시간 노동을 줄이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펼치고 있지만, 그 정책의 한계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그만큼 우리 사회는 장시간 노동을 줄이려는 노력으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오간다.

그러나 조 선생의 사례는 직장에서 '얼마나' 시간을 보내느냐뿐 아니라 그 직장에서 보내는 시간의 '(quality)'이 어떠한가에 대한 관심도 뜨겁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노동 시간이 어떤 내용으로 채워지느냐(직장 내의 관계, 보상의 적절함, 합리적인 의사소통, 능력 개발의 기회 등)에 대한 논의도 함께 이루어져야 더 건강하게 일할 수 있는 사회를 맞이할 수 있겠다.

[노동시간 읽어주는 사람] 돌봄노동자 마리아의'어머니 되기' / 2019.01

돌봄노동자 마리아의 '어머니 되기'

 신희주 (노동시간센터 회원, 가톨릭대 사회학과)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Sound of Music)>은 제작된 지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전 세계 사들에게 사랑받는 영화이다. 많은 이들은 아마 이 영화를 주인공 마리아가 7명의 아이와 함께 잘츠부르크의 광활한 자연과 아름다운 도시를 배경으로 도레미 송을 부르는 장면같이 음악을 통해 전해지는 감동으로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주제곡들을 수도 없이 반복해 듣곤 했던 시절로부터 30년 훌쩍 지난 지금 내게 이 영화는 또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다. 견습 수녀이자 가정교사 마리아가 한 가족에게 행한 '돌봄'에 대한 문제로 말이다.

▲ 영화의 한 장면 [출처: 갈무리]

우리가 가족이라는 일차적 사회집단 속에 태어나고 성장하면서 늘 인지하고 있지는 않지만 부인할 수 없는 사실 하나는 돌봄이라는 것이 인간사회의 가장 본원적인 가치 중 하나라는 점이다. 모든 인간은 삶의 첫 순간부터 돌봄이 필요한 의존을 경험하며, 자신의 현재 모습을 형성시킨 돌봄의 가치를 기억한다. 아동, 노인, 장애를 가진 사회구성원과 같은 취약한 의존인의 돌봄은 매우 절박한 도덕적 요구에 대한 응답이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 속 마리아의 돌봄 노동은 다섯 살의 막내 그레틀부터 사춘기를 지나고 있는 열여섯 살 첫째 리즐까지 일곱 아이가 살아가는 위기의 가족 내에서 이루어진다. 마리아는 엄격한 규율과 통제 속에서 가족 이외의 타인들과 관계 맺는데 서툰 이 아이들을 이해하고, 그들에게 마음을 여는 법을 가르치며, 노래와 웃음을 찾아주고, 놀이의 즐거움을 알려준다.

돌봄은 한 개인의 태도, 동기 혹은 심성의 미덕으로 설명될 수 없다. <모성적 사유>의 저자 새라 러딕에 의하면 돌봄은 노동이지만 노동 그 이상이기도 하고, 동시에 본질적으로 관계적인 것이다.

다른 사람의 필요를 이해하고 그 필요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에 대해 대답을 하기 위해서는 동감(同感)과 감정적 개입이 꼭 필요하다. 돌봄 노동을 주고받는 것은 자신과 타인의 감정 그리고 사람 사이의 관계가 교류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타인을 돌보는 나 역시 다른 사람의 돌봄이 필요한 의존적 존재였거나 그런 존재가 될 것이며, 내가 돌보지 못한 나에 대한 돌봄도 타인에 의해 제공된다.

이러한 돌봄이 단지 미덕의 측면에서 평가될 때 생길 수 있는 문제는 무엇일까. 최근 같은 시간대 시청률 1위를 달리는 주말드라마를 잠깐 살펴보자. 가난한 가정에서 자란 주인공은 부유한 치매 노인과의 인연으로 노인의 손자와 결혼까지 하게 되고, 결혼 후 치매노인에 대한 돌봄을 둘러싸고 끊임없이 가족들과 갈등하다가, 결국은 치매노인을 돌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직장을 그만두게 된다.

'착한' 심성을 가진 이 드라마의 주인공은 약자가 불공정한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지에 대한 수세적 처세술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부조리하고 폭력적인 가족관계를 침묵과 인내로 감내하는 '이타적' 가치를 구현한다. 여기서 상호 의존적, 시혜적 관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운드 오브 뮤직>은 그러한 전통적 미덕 윤리에서 일정 정도 거리를 둔다. 돌봄 윤리는 윤리의 문제를 이기적 개인의 자기 이해와 보편적 도덕률이라는 두 극단 간 갈등보다는 그사이의 영역에 주목한다. 좋은 돌봄 관계는 그 관계 자체를 건강하게 유지할 뿐 아니라 그 관계 속의 사람들이 서로 협력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돌봄의 윤리는 일차적 관계성을 넘어 그 영역을 넓히며 대안적 사회윤리를 제시하기도 한다. 영화가 제작된 시대를 고려하면 감독이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영화 속에 돌봄의 가치와 돌봄의 윤리가 서툴게나마 구현되고 있다는 점은 상당히 놀랍다.

그러나 영화는 돌봄 노동에 관한 젠더적 편향을 피해가지는 못한다. 마리아가 떠난 후 트랩 대령은 자녀들에게 약혼자인 슈레이더 부인과의 결혼을 발표하며 이렇게 말한다. "다른 가정교사는 더 이상 오지 않아. 너희들에게 새엄마가 생길 것이거든." 하지만 대령은 아이들을 돌보는데 서툴고 로맨틱한 사랑의 욕구를 가진 슈레이더 부인 대신에, 돌봄에 익숙한 가정교사 마리아에게 마음이 움직이고 결국 마리아가 아이들의 새엄마가 된다.

돌봄을 담당하는 사람으로서의 여성의 경험이 어머니로서의 이야기로 환원되고, 특정인의 경험들이 여성의 보편적 속성으로 받아들여지는 과정이다. 출산과 수유로 대표되는, 피할 수 없는 경험으로서 돌봄이라는 행위는 여성 전체 삶에서 극히 일부분이거나 실현되지 않는 경우도 많지만, 돌봄은 어차피 여성의 영역이라는 점을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한다.

가족 안에서 이루어지는 돌봄은 그 제공자가 누구인가와 관계없이 중요하고 본질적이라는 점을 누가 부인할 수 있을까. 물론 많은 경우 그 제공자는 대개 여성, 특히 어머니가 되고 있지만 말이다.

그러나 사적 영역을 벗어나면 돌봄은 전혀 다른 현실에 놓여있다. 이 영화에서 나타난 돌봄의 여성화는 사실 현실에서는 매우 중요한 노동 문제로 나타난다. 여성들의 사회진출이 늘어나며 전통적 돌봄의 영역은 가족과 친족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담당하게 되었고, 사회가 고령화되면서 노인에 대한 돌봄은 사회적 과제가 되었다.

돌봄 대상의 범위가 친밀한 관계를 벗어나 전 사회로 확대된 것이다. 돌봄 노동의 이러한 가치를 반영하듯, 최근 한국에서는 아이돌보미, 보육교사, 요양보호사, 장애인 활동지원사 등 돌봄 노동의 다양한 직업이 공공 서비스의 영역으로 포함됐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들은 최저임금 수준의 (때로는 그에 미치지 못하는) 저임금에, 많은 경우 사회 보호의 사각지대에 존재하고 있다. 돌봄 활동은 저평가되고, 그 본질적 가치가 폄훼된다. 전형적인 여성노동으로 인식되어 온 돌봄 노동은 세계화된 세계에서 점차 직업의 성차 논리까지 넘어서 인종, 계급적 속성까지 드러낸다. 요양병원의 간병노동이 더 저임금 여성 이주노동자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사회 서비스로서의 돌봄 노동에 대한 권력적 특성을 잘 보여준다.

돌봄은 그 자체가 사회적이고 공공의 책임으로 인식되어야 하는 가치이자 윤리임에도 불구하고, 돌봄을 상품화, 상업화시키는 시장의 논리는 가장 왜곡된 방식으로 돌봄을 평가하는 것이다.

영화 속 마리아의 아이들에 대한 돌봄은 어떠한 물질적 대가로 이루어진 것인지 영화는 말하지 않는다. 단지, 우리가 보는 마리아의 돌봄 가치는 효용성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시장이 판단할 수 없다는 점만은 명확하다. 어머니의 지위를 얻음으로써 마리아의 돌봄이 완성된 것으로 그려지는 것이 못내 아쉽긴 하지만, 시장의 변덕과 왜곡에 마리아의 돌봄이 내던져지지 않아 그래도 다행이라는 것은 나만이 느끼는 안도일까.


[노동시간 읽어주는 사람] 마블 영화 시리즈에서 노동은 어디로 갔을까? / 2018.12

마블 영화 시리즈에서 노동은 어디로 갔을까?

 박상빈 (서교인문사회연구실)

 

내년에 어벤져스 시리즈의 마지막 편이 나온다고 한다. 과연 그 마지막 편으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arvel Cinematic Universe, 이하 MCU)가 끝이 날지 우리로서는 알 수 없다. 미국 군수재벌의 이중생활이나 2차 세계대전 참전군인의 세계 구원기로 시작한 이 영화의 우주(MCU)는 가히 한 시대를 풍미한 영화 스타일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전 세계적으로 수백억 달러의 수입을 벌어들였고, 디즈니를 세계 최대의 영화배급사로 성장하게 만든 일등 공신이다. 또한 여태껏 볼 수 없었던 시리즈 영화의 스타일을 제시했다는 평가도 가능하다. 

▲ 마블 히어로 [출처: 나무위기]

보편 언어가 상실된 마블 시리즈 

사실 나는 언제부터인가 마블 영화를 보는 일이 퍽 피곤한 일처럼 느껴졌다. MCU의 어떤 특징 때문이다. 마블 영화는 자꾸 영화 바깥에 있는 정보를 관객에게 미리 공부하고 오라고 부추긴다. 관객이 영화로 보지 않은 곳에서도 영화 속 인물들은 지속해서 살아있고, 활동하고 있다. MCU의 새 영화가 나오면 그곳에는 MCU에 속한 다른 영화들에 대한 언급이 당연하게 펼쳐지고, 그걸 이해하는 건 온전히 관객의 몫으로 전가된다. 

그게 몇 명이 되었건, 수천만 명이건, 수십억 명이건 간에, 같은 가격의 입장권만 사면 같은 이야기가 전달되고 따라서 같은 즐거움을 느끼게 되는 것. 그것은 20세기 영화의 이상이었다. 그러나 21세기의 영화는 조금 달라졌다. 같은 가격을 지불하고 들어간 영화관에서 누군가는 사건의 전개를 따라가기에 급급한 반면, 다른 누군가는 전작에서 펼쳐진 인물 관계도를 상기하면서 화면 속에서 펼쳐지는 행위들의 온갖 숨은 의미까지 찾아내며 영화를 즐긴다. 물론 20세기에도 보편언어로서 영화의 이상과는 달리, 실제 영화관에서는 관객의 정체성에 따라 영화의 의미가 많이 달라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20세기에 영화의 이상적인 형태는 모두에게 동일한 즐거움을 전달할 수 있는 보편언어였다. 

그런데 MCU는 적어도 그런 형태의 이상적인 언어를 추구하려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MCU는 자신을 한 편의 영화로 국한하지 않음으로써 이전의 MCU 영화들을 섭렵하는 노동을 한 관객들에게만 자신의 즐거움을 허락한다. 마치 은행이 ATM 기기를 도입하면서 은행 출납계 직원의 노동을 소비자들에게 전가한 것처럼. 

바꿔 말하자면 MCU 영화 한 편의 가격은 단순히 1만 원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새로 출시되는 MCU 영화 한 편의 온전한 재미를 느끼려면 최소한 MCU의 다른 모든 영화를 한 번은 보아야 하므로 영화의 편수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그 실질적인 가격은 상승한다고까지 할 수 있다. 

MCU가 구축한 완벽한 세계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후기 자본주의 문화논리(Postmodernism, or the Cultural Logic of Late Capitalism)에서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의 그 유명한 보나벤투라(Bonaventura) 호텔 공간에 대한 분석을 떠올려보자. 

일본의 미쓰비시사가 투자하고 존 포트먼(John Portman)이 설계한, 1974년 시공되어 1976년 완공된, 로스앤젤레스 신중심가 한가운데에 위치한, 35층이라고 표기되어있지만 실제로는 33층의 층고를 가진, 꼭대기에는 빙글빙글 회전하는 레스토랑이 있는, 현재 20억 달러를 웃도는 가치를 지녔다고 평가되는 이 호텔은 제임슨에게 포스트모더니즘의 문화 논리를 가장 투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건축물이었다. 

이 건물은 마치 선글라스를 낀 사람처럼 외벽이 모두 반사유리로 마감되어 그 속내를 파악할 수 없다. 고전적인 호텔들의 차양 달린 위풍당당한 입구 같은 게 없어 호텔의 내부 공간이 외부 공간과 분리된 것 같으며, 입구에 들어선다고 할지라도 쇼핑몰이나 정원이 펼쳐져 있어 로비에 도착할 때까지는 한참을 더 이동해야해 호텔 외부에서의 방향감각이 호텔 내부에서는 단절된다. 이런 특징은 제임슨으로 하여금 이 건물을 도시의 한 부분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그와 맞먹는 것, 즉 도시의 교체물이나 대체가 되고자 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게 만든다. 

이렇게 그것이 자리하고 있는 외부 도시를 거부하면서 어떤 전체적 공간, 완전한 세계, 혹은 일종의 축소도시가 되고 싶어 한다는 생각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자신의 문화적 생산을 그 내용으로 삼는 경향을 가진 문화의 자기지시성을 두드러지게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제 MCU의 구조를 떠올려 보자. 2008년 개봉했던 <아이언맨>을 필두로 펼쳐지기 시작한 MCU는 기존의 히어로 영화 시리즈물이 히어로 한 명의 삶과 영웅적 행적을 좇는 것과는 달리 세계 곳곳에서 다른 기원을 가지고 활동을 시작한 능력자 모두를 주인공으로 삼는다. MCU로 들어가는 입구는 시간상으로 가장 먼저 개봉된 <아이언맨>이 될 수도 있지만, <토르><캡틴 아메리카>,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닥터 스트레인지>, <앤트맨>, <블랙팬서>, <스파이더맨: 홈커밍>이 된다고 해도 그 우주를 이해하는 데에는 큰 무리가 없다. 일단 그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개별 영화들이 가지고 있는 서사의 층위는 좀 더 근본적인 우주(MCU)의 역사 속에서 돌출된 미시적 사건에 불과하다. <어벤져스> 시리즈가 보여주는 전 우주적 전쟁의 거시적 전장 속에서 각각의 영웅들은 각자의 매력을 뽐내며 관객들을 유혹한다. 마치 거대한 쇼핑몰 안의 서로 다른 상품과 분위기를 판매하는 소매점들처럼. 

노동자의 재현을 거부하는 MCU 

MCU의 또 다른 특징은 그 우주 안에서 노동()의 재현을 거부한다는 점이다. 시리즈가 진행되면서 토니 스타크의 비서 버지니아 펩퍼 포츠(기네스 펠트로)의 지위가 노동자의 신분에서 최고 경영자로 급상승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스파이더맨: 홈커밍>의 피터 파커(톰 홀랜드)는 이전의 소니 픽쳐스 버전의 피터 파커(토비 맥과이어)와는 달리 노동하지 않는 이로 그려진다. 피자를 배달해 생계를 해결하고 지역신문사에 자신이 찍은 사진을 투고해 사회적 지위 상승을 이루려 했던 피터 파커는 이제 군수 재벌 토니 스타크(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후원 아래 들어가 노동의 강제로부터 해방된 것처럼 보인다. 혹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사례처럼 <가오갤> 시리즈는 무수히 많은 익명의 노동자(군인)를 우주전쟁에 배치하곤 하는 <스타워즈> 시리즈보다, 거대한 우주함선 안에서 선원 개개인의 두드러진 개성을 부각하는 <스타트렉> 시리즈의 방식에 더 가깝다. <가오갤>의 등장인물은 <스타트렉>보다 한층 더 진일보하여 모두가 복제 불가능한 각자의 독특한 개성을 지녀 서로 다른 자신만의 목적으로 움직이기에 타인의 지시를 따른다는 일은 상상할 수 없다. MCU에서 유일하게 타인의 지시에 복종하며, 타인을 위해 노동하는 존재는 토니 스타크의 AI 비서 자비스 뿐이다. 그러나 그 역시 인피니티 스톤의 힘으로 자신만의 신체가 생기고 토니로부터 독립한다. 

노동자이기보다는 전문가이기를, 자기 자신을 경영하는 경영자이기를 촉구하는 것이 신자유주의의 노동 이데올로기라는 점은 이제 익숙해졌다. 어떤 것이든 너무 많이 말해지다 보면 그 본래의 맥락에서 떨어져 나와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되는 법이다. MCU가 보여주는, 자신을 경영하는 캐릭터 역시 그렇다. 그들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보여주는 유토피아적 삶, 그러니까 자신의 가치를 끌어올려 지위 상승을 이루어내는 삶을 어느 정도 성취하는 것처럼 보이긴 한다. 그러나 그 성취는 스타크 인더스트리의 자금력과 미국의 패권 질서에 지배를 받는 한에서의 성취다. 혹은 MCU의 거대한 우주 전쟁을 박진감 넘치게 표현할 수 있는 도구로서 존재하는 한에서의 성취다. 

“[우주]의 한 부분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그와 맞먹는 것, [우주]의 교체물이나 대체가 되고자 하는” MCU의 욕망은 그들이 내쫓았던 노동()들의 형상을 부지불식간에 다시 불러들인다. 경영자들은 자신을 위해 일하는 동시에 MCU라는 거대한 타자를 위해 일한다. 이쯤 되면 MCU를 동시대 자본주의 사회를 대체하는 완벽한 또 하나의 세계라고 말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아니, 대체하는 것인지 알레고리 속에서 연장해 나가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우울한 비전 

이런 맥락 속 비전(VISION)’의 우울함을 한번 살펴보자. 자비스이던 시절(<아이언맨>, <아이언맨2>, <아이언맨3>)에는 감정을 가질 새도 없이 스타크를 위해 노동했다. 그러나 <에이지 오브 울트론> 이후 신체를 얻게 되고 자기 자신의 존재 목적이 타인을 위해 노동하는 존재가 아님을 알게 된 순간부터 그는 우울감에 빠진다. 본다는 것이 지니는 앎의 함의(‘I see’라는 관용어, 혹은 백문이불여일견’)를 떠올려 봤을 때, 보기()의 화신인 그가 느끼는 우울감은 퍽 당혹스럽다. 그가 느끼는 우울감은 이제 노동이 완벽하게 사라진 세계, 모두가 자기 자신의 목적의식 속에서 행위를 결정하는 세계가 완성된 시점에서 자신의 행위를 결정하지 못하는 데로부터 오는 우울감이기 때문이다. 

물론 영화 속에서는 그가 비전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우주적인 지식을 얻게 된 결과 우주를 위해 인류를 없앨 것이냐 인류와 함께 싸워나갈 것이냐를 고민하게 되면서 그런 감정에 사로잡힌 것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나는 그가 우울감을 느끼는 이 지점이 동시대 유연 노동체제 속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가지는 감정의 구조와 유비관계를 이루는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가령 배달대행 노동자들은 자기 자신의 가치를 건당 3,500원의 배달대행료로 표상한다. 그들이 자신의 가치를 올리는 일은 더 많이, 더 빠르게 배달을 치는 것을 통해서이다. 그러는 와중에 요식업의 유통 속도는 더욱 빨라지고, 사회 전체의 가치 실현 속도가 증대해 연간 GDP의 일정한 상승에 기여한다. 그들은 그 누구도 타인을 위해 일한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사회라는 개인들의 완벽한 타자는 그들을 자신의 가치를 증대시키게끔 기계처럼 작동하는 한에서만 그 개인들을 자신의 구성원으로 가진다. 사회 내에서 배달대행 노동자들의 노동은 노동력 재생산비용을 절감시키는 노동으로 나타나며, 자본가들의 잉여가치 수취분은 그들이 의식하지 않은 이 과정에 의해 증대하게 된다. 이 배달대행 노동자들의 오롯한 자기 자신을 위한 노동은 토니 스타크를 위해서만 노동하는 자비스의 이전의 삶과 거울 이미지를 이룬다. 정확히 같지만 정확히 정반대인 그런 이미지로서 말이다. 

비전이 우울감에 빠지는 순간은 그 우주에서 타인을 위한 노동을 완벽하게 제거한 순간이다. 우울이라는 감정은 이전에 애착을 가졌던 대상을 상실했을 때 발생한다. 비전의 대상은 명백하다. 그는 자비스이던 시절을 상실했다. 완벽하게 타인을 위해 일하던 자기 자신을. 그는 자기 자신의 목적을 위해 행동해야 하는 순간에 도달했을 때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결정하지 못한다. 

거울 이미지로서 비전의 우울감은 아마도 유연 노동체제의 노동자들이 자기 자신을 위한 노동이 자신을 배신했을 때 겪는 감정이 아닐까?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생활 수준은 나아지지 않을 때, 자기 자신을 위해 일하는 시간이 오히려 자신의 건강을 해칠 때, 그럴 때 느끼는 우리들의 감정이 아닐까? MCU가 구축한 완벽한 세계는 우리들의 세계를 정말인지 완벽하게도 대체/연장하고 있는 것 같다.

[노동시간 읽어주는 사람] 재난과 노동인권 - 영화 <감기> / 2018.11

재난과 노동인권 

- 영화 <감기> 


김영선, 고려대 한국사회연구소 연구교수, 노동시간센터 회원


바이러스 재난은 연례행사처럼 발생한다. 바이러스 재난은 예외적이거나 우연적인 사고가 아니다. 바이러스 재난의 반복성은 사회학자 찰스 페로우가 말하는 정상사고의 범주에 넣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다.

정상사고(normal accident)는 위험성이 높은 기술과 시설들, 이를테면 화학 공장이나 핵발전소 등이 증가하면서 그 자체가 가진 복잡성과 불확실성 때문에 예기치 않게 체계 전체를 뒤흔드는 사고가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음을 가리킨다. 바이러스 재난이 정상사고에 꼭 부합하는 사례인가에 대한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전염병 재난이 기후 변화와 전 지구적인 이동이 가속화된 시대에 빈도 높게 반복됨을 고려할 때, 바이러스 재난을 정상 사고의 범주로 넣을 수 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시대에 사람과 사물의 전 지구적 이동이 가속화되고 환경 개발에 따른 기후 변화 등이 감염과 전염의 위험성을 높일 수 있다는 의미다. 또한 바이러스 감염이 이런저런 동물(원숭이, 박쥐, 낙타 등)로부터 비롯하는 지역적 기원을 갖는 우발적 사건이라 하더라도 전염의 위험성은 전 지구적인 동시에 사회적이다.

영화 <감기>가 플루(flu, 독감) 발생을 선상의 컨테이너로 설정한 것은 꽤나 상징적이다. 플루가 특정하고 단일한 장소에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물류 공간을 가로지르며 전 지구적으로 확산될 수 있는 위험임을 잘 형상화하고 있다.

또한 <감기>는 플루가 감염자들을 한 군데(탄천 주차장의 임시 막사) 몰아넣는 대책 본부의 반인권적인 격리 조치로 악화됨을 강조했다. 전염의 확산이 전염병 그 자체에 있을 수 있지만, 전염병에 대한 사회적 대응에 따라 확산의 양상이 달라짐을 적확하게 포착하고 있다.

<감기>는 메르스 재난 2~3년 전에 상영됐지만 우연하게도 메르스 공포의 광풍을 예견한 것 마냥 다시 회자됐다. 메르스 사태를 미리 재현할 수 있었던 건 감독의 영화적 상상력만은 아니었다. 감독은 사전에 전문가 인터뷰와 사례 분석에 오랜 시간을 들였고 이를 통해 바이러스 재난에서 반복되는 특성을 연출했을 뿐이라고 한다.

여느 바이러스 재난 영화처럼 <감기>도 빠른 전염 속도, 100퍼센트에 달하는 치사율, 피를 토할 정도의 고통 등으로 플루의 위험성을 극화한다. 관계기관의 대응 또한 여느 영화처럼 바리케이드를 쌓는 방식의 격리, 감염자를 일괄 감금해 살처분하는 방식으로 그렸다.

그렇지만 한국 사회에서 메르스에 대한 공포가 전례 없었던 것은 메르스의 내재적인 파괴력, 높은 치사율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다. 전례 없던 공포는 신뢰할 수 없는 대응 체계에서 비롯했다.

공포와 불안은 저 신뢰 사회일수록 배가되는데, 세월호 이후 "바람에 슬레이트지붕 날아가듯" 날아간 국가에 대한 신뢰가 사라진 국면에 WHO의 감염병 소통 가이드라인(신뢰 확보, 빠른 공지, 투명하게 공개, 대중과 공감, 대응 계획)을 "교과서적으로 어겼다"는 대책 본부의 '아몰랑'식 대응이 반복되면서 전 국민의 공포와 불안은 폭발했다.

재난 불평등과 노동인권

메르스 재난은 시민의 안전을 위협했던 것은 물론 재난 대응에 투입된 노동자들을 죽음의 사지로 몰아넣었다. 재난이 반복될 때마다 노동인권의 침해는 심각하다. 안그래도 빠듯한 인력난이나 위험의 외주화 등 기존의 위험에 메르스 재난이 덧대지면서 병원노동자는 이중의 위험에 노출된다.

그간 간호노동자나 간병노동자를 포함한 비정규 노동자의 노동인권은 병원자본의 저비용 전략에 일상적인 침해 상태에 놓여 있었다. 메르스 재난 시기 확진자 186명 중 20%가량이 병원종사자였고 그 가운데 간호노동자와 간병노동자의 비율이 유독 높았던 것은 전염병의 내재적 특성에 기인한다기보다는 병원 내 노동자가 다뤄져 왔던 방식들을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조류독감이나 구제역 때마다 벌어진 대량의 살처분 방식은 한국 사회에 동물권이 실종된 현실을 날것으로 보여주는데, <감기>는 살처분 대상을 닭이나 돼지가 아닌 '인간'으로 상정하면서 인권 또한 재난에 얼마나 무력한 상태로 내몰릴 수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노동인권 침해의 고통은 비정규 노동자에게 더욱 파고든다.

병원 '직원'이 아니라는 이유로 치료보호 대상 명단에서 빠졌다는 어느 비정규 노동자의 분노는 병원자본의 비용절감 논리의 폐해를 함축하고 있다. 폴란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이 <쓰레기가 되는 삶들>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비정규 노동자는 병원 내에서 일하면서도 병원 '외부'에 놓인 잉여였다. 메르스 재난은 이러한 병원 내 '외부', 재난 불평등의 지점을 타고 또한 확산됐다.

재난의 고통이 이렇게 내부이면서도 '외부'로 처리되는 사람들에게 직접 관통하는 모습이 자주 반복된다. 후쿠시마 원전 제염작업에 투입된 비정규노동자 및 이주노동자들을 비롯해 구제역이나 조류독감으로 강제 살처분 작업에 투입된 일용직 및 용역업체 노동자들, 호리에 구니오의 표현처럼 '원전 집시'라고 명명할만한 원자력발전소 협력업체 노동자들도 마찬가지다.

<감기>에서 소방구조대원으로 나오는 주인공 장혁은 불굴의 '직업정신'을 발휘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재난 시 이러한 직업정신을 우리는 기대할 수 있을까? '비상 상황'이라는 이유로 노동자 안전도 보장되지 않은 채 위험의 한복판에 투입되는 현실, 위험으로 겪게 될 신체적·정신적 문제에 대해서는 보호나 보상이 터무니없는 현실에서 영화 주인공 같은 직업정신의 발휘를 기대하는 건 영화에서나 찾을 일이다.

[노동시간 읽어주는 사람] 일, 방치나 탈주 혹은 주체되기 영화 <잠깐만 회사 좀 관두고 올게> / 2018.10

일, 방치나 탈주 혹은 주체되기 

- 영화 <잠깐만 회사 좀 관두고 올게>

김재광 노동시간센터 회원


한낮 주인공 다카시는 약간 실성한 듯 기뻐하며 건널목을 건너고 있다. 그에 비하면 주변의 사람들은 별다른 표정이 없다. 정장을 차려입은 그는 마치 운동복을 입은 듯 사뿐사뿐 발걸음이 가볍고, 자유롭다. 그는 방금 사표를 쓰고 회사에서 탈출했다. 반인권적 괴롭힘과 출근과 퇴근 그리고 평일, 휴일이 구분이 없었던 회사를 때려 치운 것이다.


다카시를 바라보는 관객은 다카시와 같은 자유로움과 쾌감을 느낀다. 소설이 원작인 영화 <잠깐만 회사 좀 관두고 올게>는 제목 자체로 탈주의 욕망을 '쿨(cool)'하게 대변한다.

이미 관용어가 된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 일과 삶의 균형은, 당장 가능하지 않아도, 우리 사회가 달성해야 할 목표가 된 듯하다. 일에 종속된 피폐한 삶이 워낙 비일비재한지라, 지극히 당연히 장시간 노동에서 벗어나고, 휴가나 휴일을 제대로 누려야 된다는 사회적 요구와 방향에 대해 반대할 이유가 전혀 없다.

이런 연장선에서 보자면 밤낮없이 일하고, 자살까지 감행한 <잠깐만회사 좀 관두고 올게>의 다카시의 고뇌에 찬 결단도 충분히 공감하고, 응원하게 된다. 그런데 찜찜하다. 고뇌에 찬 결단이 분명 결단이 맞는데 말이다.

'워라밸'은 일과 삶이 서로 마주 본다. 일은 삶의 일부도 아니고 분명한 대칭이다. '워라밸'의 목표는 일에 포식된 삶을 일로부터 분리하여 삶의 독자적인 것을 구축하고,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 이다. 이러한 설정에 이르게 된 배경을 물론 모르는 바는 아니나, 노파심인지 몰라도 이러한 설정은 일이 삶에서 분리되어 노동자에게 주체적 영역이 되고, 일을 제외한 그 외의 삶만이 노동자의 주체적 영역으로 분리되는 기이한 이데올로기가 성립될 위험이 있다.

이러한 분리 사고는 일은 사용자에 처분에 맡겨진 비주체적 영역으로, 삶의 방치영역으로 고립될 수 있다. 어떠한 자에게 일은 대부분을 차지할 수도 있고, 어떤 자에게는 작은 부분일 수 있다. 분명한 것은 크건 작건 간에 일은 삶의 일부이고, 모두 주체적 영역이 되어야 하며, 일관된 자기 결정이 동반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노동자의 일과 삶을 분리하려는 것은 현실을 인정한 한편의 개량적 모색이기도 하고, 아예 현실을 은폐하고 현실을 공고히 하기 위한 전략적 포석일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전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차피 노동은 소외되는 것이므로, 노동력에 대한가격에 대한 흥정이나, 그 외의 부수적 처우에 대해 논할 수 있지만, 노동소외 자체를 극복할 수 없으므로, 일(노동)을 삶의 영역에서 분리하여 가능한 노동에서 벗어나는 것을 도모하고자 하는 것이다.

후자는 아예 노동의 소외를 언급할 근거도 없이 판매된 노동력에 대한 독점적 처분권을 자본(사용자)이 행사하고, 나머지 시간만을 주체적으로 처분 가능한 삶으로 규정하여 판매된 노동에 대한 노동자 스스로의 개입을 원천적 차단하고자 하는 것이다. 전자가 되었건 후자가 되었건 결과적으로 일은 주체적 삶에서 분리되어 방치되기는 마찬가지이다.

다카시는 맨 처음 자기 일과 삶을 일치시키려 했다. 그러나 하루 24시간 가까이 일을 했음에도 일은 자기 삶의 일부 조차 될 수가 없었다. 일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부장으로 대표되는 자본의 것이었다. 다카시의 의도와 무관하게 일은 삶 속에서 방치되게 되었는데, 이에 대해 다카시는 괴로워는 했지만 이를 극복하려는 엄두도, 시도도 하지 않는다.

종국에는 사표를 쓰고, 일을 삶 속에서 드디어 주체적으로 단절시켰다. 다카시를 응원 했던 것은 사표를 쓴 것이 아니라, 주체적 삶속에서 배치되는 일을 다시 용기 있게 찾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카시의 선택을 모두가 할 수 없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방치가 당연시되고, 탈주가 마냥 칭송된다면 도대체 정작 삶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저 일은 짧은 시간만 하는 것이 답이고, 휴일과 휴가를 가능한 많이 향유하면 되는 것인가? 일과 삶은 분리된 것이고, 분리되어야만 하는 것일까? 일과 직장은 그저 호구지책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호구지책 이상의 일은 특정하게 한정되는 것이 맞는 것인가?

직장에서의 노동을 포함한 삶은 사용자의 것이고, 직장을 벗어나서야 온전한 내 삶이 성립되는 것이 맞는 것인가? 그 삶은 실제 온전히 자신의 삶일까? 노동시간이 짧건 길건, 여유롭건 고되건 간에 그 공간과 시간에서 내가 내 노동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인가? 모두 다카시와 같이 먼 이국땅 아이들과 함께 보내는 일과 삶을 가질 수 없기에 묻고 또 묻게 된다.

[노동시간 읽어주는 사람] 우리는 시(時) 쓰는 버스운전 기사를 만날 수 있을까 / 2018.09

우리는 시(時) 쓰는 버스운전 기사를 만날 수 있을까

- 영화 <패터슨Paterson>, 2016

나래 노동시간센터 회원, 상임활동가

[영화 패터슨 스틸컷]


사무실 창밖을 넌지시 바라본다. 익숙한 풍경이 곧 선명하게 들어온다. 4차선 도로 위를 무심히 달리는 차 중 버스가 보인다. 나는 오늘 아침에도 사무실 출근을 위해 파란색의 기다란 버스에 몸을 실었다. 재빨리 내리기 위해 뒷문에 가까이 앉은 내 자리에서 익숙한 뒤통수가 보였다. 맨 앞자리에 앉아 운전대를 잡은 버스운전 노동자다. 빨노초 신호에 맞춰 적절한 때 브레이크를 밟고 다시 속도를 내는 그 덕분에 오늘도 무사히 사무실에 도착했다. 

2017년 한국에서 개봉한 영화 <패터슨>이 불현듯 떠올랐다. ‘패터슨’은 미국 뉴저지주의 소도시 패터슨에 사는 버스 운전사 패터슨의 이야기다. 스크린 속 패터슨의 삶은 단조롭고, 평온하다. 매일 아침 6시 10분과 15분 사이에 기상한다. 침대에서 일으킨 몸을 끌고 나와 식탁 의자에 앉아 시리얼을 먹는다. 아내가 싸준 도시락을 들고 정해진 출근 시간에 맞춰 직장까지 걸어가 PATERSON(패터슨)이라 쓰여 있는, 그가 담당하는 버스에 몸을 싣는다.

자기가 사는 도시의 이름과 같은 이름을 가졌다는 설정도 독특하지만 정작 내 눈길을 끈 건 그가 입고 있는 푸른색의 유니폼이다. 버스 운전기사인 그가 하는 행위 중 운전보다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바로 ‘시(時) 쓰기’이다.

꽤 단조롭고 단순 반복되어 보이는 패터슨의 일상에서 꿈틀대며 조금씩 나아가는 것은 그의 비밀수첩에 적는 시다. 주변의 모든 것이 그에게 영감을 준다. 출근해 동료에게 듣는 비슷한 푸념, 운전석 뒤로 오가는 버스 승객들의 다양한 이야기, 반려견 마빈을 데리고 산책하러 나갔다 항상 들리는 단골 바(bar)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사건, 패터슨이 가장 사랑하는 동반자 아내 로라의 이야기 등 무궁무진하다.

이렇듯 패터슨의 반복되는 매일은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패터슨을 오로지 패터슨으로,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힘은 바로 매일 써 내려가는 시(時)이자, 그 시를 쓰는 바로 그 ‘시간’이다. 패터슨은 오로지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라는 새로운 생명을 잉태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진 버스 운전 노동자인 것이다.

영화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후 순간 ‘한국의 버스 운전 노동자들도 패터슨처럼 시를 쓸 수 있을까?’라는 다소 엉뚱하지만, 마음이 묵직해지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 버스 운전노동자들의 장시간 노동 문제의 심각성은 익히 알려져 있다. 2015년 시행된 「버스운전노동자의 과로 실태와 기준 연구」에 따르면 경기 시내버스 노동자들은 하루 15시간 이상 운전하는 경우가 전체의 95.7%, 경기 광역버스는 70.1%를 나타냈다. 장시간 노동을 가중시키는 격일제, 복격일제 등 교대제 근무제도 문제다. 격일제란 하루 일하고 하루를 쉬는 것, 복격일제는 이틀 일하고 하루를 쉬는 것을 말한다. 격일제의 경우 하루 평균 17~19시간 근무한다.

이들이 호소하는 노동, 건강문제는 심각하다. 기본적 욕구 해결을 위한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는 상황이 한국 버스 운전 노동자들의 현실이다. 

“우리가 국물을 잘 안 먹어요. 소변 때문에. 2, 3시간 가는데 소변 마려우면 고속도로에서 어떡할거야. 기사들이 그런 거 다 감안해서 물도 잘 안 마시려 해. 딱 맞춰서 가서 소변 볼 거 생각하고. 커피도 이뇨작용 땜에 안 마시는 사람들 많아요. 그만큼 힘들고, 우리가 다 모든 걸 신경 써서 해야 되고.” (인터뷰 H, 2018년 경기도 버스제도의 문제점과 개선방향 연구)

작년 노동시간을 둘러싼 싸움이 크게 벌어졌다. 무제한 노동을 가능하게 하는 근로지준법 59조 폐지에 대한 노동계의 요구가 뜨거웠다. 노동자들은 정말 ‘죽지 않기’ 위해 장시간 노동 근절을 요구했다. 노동조합, 시민사회단체, 시민들도 함께 목소리를 높였다. 결국 2월 28일 특례업종이 26개에서 5개로 줄었다. 시내버스로 대표되는 노선여객자동차운송사업도 특례업종에서 제외됐다. 하지만 버스업체와 정부는 대규모 인력채 용과 근무체계 개편이 당장 어렵다는 이유로 ‘노선버스 근로시간 단축 연착륙을 위한 노사정 선언문’에 합의했다. 이 합의에 따라 버스 운전 노동자들의 장시간 노동, 중노동, 과로사 위협이 1년 연장됐다. 지금도 하루 10시간, 20시간 가까운 장시간 운전을 하고 있다.

만약 패터슨이 한국에서 일하는 버스 운전 노동자였다면 그 주옥같은 시(時)가 탄생할 수 있었을까? 매일 반복되는 장시간 노동 속에서 그의 푸른색 유니폼은 언제나 반짝였을까? 캄캄한 새벽에 출근해 5분도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식판에 겨우 배고픔을 잊을 밥을 먹으며 다시 버스에 올라타는 한국의 버스 운전 노동자들에게도 시간이 필요하다. 자기 자신을 위하는,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그런 시간 말이다.

[노동시간 읽어주는 사람] 폭염 속 노동시간 / 2018.08

폭염 속 노동시간

최민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상임활동가

[그림] 카유보트, 마루를 깎는 사람들(1875, 오르세 미술관)


남성 노동자 세 명이 마룻바닥을 대패로 긁어내고 있다. 건축 막바지에 나무로 된 마룻바닥을 다듬는 작업이다. 날씨가 몹시 더운지 세 명 모두 웃옷을 벗어 던졌다. 한여름에 무릎을 꿇고, 힘을 다해 바닥을 긁어내는 일을 하다 보면, 옷이고 뭐고 거추장스러울 것이다. 서너 시간 같은 일을 하다보면, 무릎, 허리, 어깨, 손가락 어디든 아프지 않을 수 없다.

아니, 오늘이 이 일을 처음 하는 날이 아닌 이상, 어쩌면 일을 시작하기 전부터 여기저기 아파질 것이다. 꿇어앉아 체중을 지탱해야 하는 무릎은 뻐근할 것이고, 뻗었다 당겼다 반복해야 하는 어깨는 묵직하고, 대패를 꼭 쥐어야 하는 손가락은 뻣뻣할 것이다.

일하면서 지친 심신을 달래려면 적당한 알코올은 필수. 그림 한쪽에 큰 술병이 하나 놓였다. 더울 때 알코올 섭취는 위험하다는 조언이나, 작업 중에 술을 마시지 말라는 훈계는 통할 것 같지 않다. 이렇게 더운 날, 저렇게 힘들게 일한다면 평소 8시간씩 일하던 노동자도 네 시간이면 진이 다 빠질 것 이다.

그나마 그림 속 노동자들이 건물 안 그늘에서 일하고, 서로 얘기도 나누는 모습은, 요즘  뙤약볕에 밖에서 일하는 한국 노동자들에 비하면 여유마저 느껴진다.

올여름, 유난한 더위 폭염으로 인한 희생자도 여럿 발생하면서, 폭염 속 노동자들의 건강에도 언론이나 정부가 관심을 쏟는 것처럼 보인다. 노동부는 올해부터 산업안전보건기준에 관한 규칙에 '폭염에 직접 노출되는 옥외장소에서 작업 하는 경우에 적절하게 휴식하도록 하는 등 근로자 건강장해를 예방하기 위하여 필요한 조치를 하여야 한다'는 내용을 포함했다.

또, <옥외작업자 건강보호 가이드>를 발행하여, 휴식, 작업중지, 음료수 제공 등 다양한 측면에서의 폭염 시 주의할 점을 제공하기도 했다. 그늘막 제공, 식수 제공, 휴식 장소 제공 등도 필요하지만, 너무 더운 시간에는 작업을 아예 중단하는 것, 일을 할 수 있는 기온에서도 충분한 휴식 시간을 제공하고, 노동시간을 단축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한국에도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라 고열작업 노동자의 노동시간을 제한하는 규정이 있는데, 폭염 시 옥외 노동자의 경우 이를 준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이 글을 쓰는 7월 30일 오전 9시에 이미 더위체감지수는 29로 건설 노동자라면 15분 일하고, 45분 쉬어야 하는 기상 상황이다. 기계 조정을 하기위해 손 또는 팔을 가볍게 쓰는 경작업조차 오전 9시가 넘으면서는 45분 일하면 15분 쉬어야 한다. 전체 노동시간의 25%는 쉬어야 한다고 돼 있다.

7월 30일 정오 서울특별시 더위체감지수는 33이다. 곡괭이질 또는 삽질하는 중작업은 물론, 모든 옥외작업은 작업을 중지해야 하는 온도다. 이런 날 건설 노동자를 비롯해 힘을 많이 쓰는 옥외 작업자들은 평상시 노동의 1/4~1/2만 일해도, 평소 하루 노동에 사용하는 에너지를 다 쓰게 된다.

그러니, 폭염 시기 하루 노동일은 8시간이 아니라, (노동의 종류에 따라 다르겠지만), 6시간이나 4시간, 심지어는 2시간이나 0시간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더울 때는 노동시간을 단축해야 한다는 말만으로는 부족하다. 노동시간은 곧 임금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더위로 인해 줄어든 노동시간은 반드시 유급으로 보상되어야 한다. 노동시간을 단축하고도 날이 더워 일을 못 하는 것은 노동자 탓이 아니니까.

뜨거운 차량으로 종일 이동하며, 중량물을 싣고 내려야 하는 택배 노동자의 경우 건당 수수료는 여름에 더 높게 책정되어야 한다. 그래야 폭염 시간대에는 배달을 중단하고 마음 편히 쉴 수 있지 않을까. 집배 노동자에게도 폭염 시간 노동을 제한하고 대신, 여름에는 배달이 늦어지는 것을 우정본부가 감수해야 한다. 안 그러면 낮에 쉰만큼, 밤늦게까지 일해서 메우거나, 폭염 이외의 시간에 노동강도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이로 인한 당장의 손실은 고용보험 일부를 활용할 수도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적정 노동강도와 적정 임금이라는 측면에서 임금 산출에 반영되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여름에는 더위로 인해 노동시간이 줄어들어야 하니, 공사 기간을 정할 때 처음부터 7~8월에는 다른 계절에 비해 공사 기간을 2배 이상으로 넉넉하게 산정해야 한다. 이 기간에 맞춰 하루 일당으로 계산하는 건설 노동자들의 급여가 미리 책정되면 된다.

폭염 아래 하루 노동/ 천근 만근 짓눌러오네/ 이러케 살아야 쓰는 거시냐고 차라리 하루/ 포기해버리자고/ 주저앉다가 다시 일어서네 

철근공이면서 시를 쓰는 김해화 시인의 시 <새벽 세시>의 일부다. 폭염 자체가 문제가 아니다. 꼭 이렇게 살아야 하나 싶은 폭염 아래 노동마저, 포기하지 못 하고 새벽 세시에 일어나 나갈 수밖에 없는 노동 조건이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