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시간에세이] 노동자가 아닌 노동자들, 그들의 노동시간 /2016.8

노동자가 아닌 노동자들, 그들의 노동시간



신경아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 노동시간센터



대학 연구실의 조교, 병원의 인턴과 레지던트, 기업의 인턴사원.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직업을 얻기 위해 수련과정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대학이나 기업의 훈련과정에서 일정 기간 실무 경험을 쌓고 더 높은 수준의 직업적 역량을 갖추기 위해 현장에서 일하며 배우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대개 20대부터 30대 초중반의 젊은이들이고 연구원이나 교수, 의사나 기업의 사원이 되리라는 희망을 품고 노동배움사이에서 분투하고 있다. 보통 장시간 노동이라고 하면 생산직 노동자를 연상하기 쉽지만, 그들만 그런 것은 아니다.


한국에서 노동시간 조사 자체가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지도 의문이지만, 장시간 노동은 특정 산업이나 직업에 한정되지 않는다. 통계적으로 노동시간이 가장 긴 집단은 자영업자이다. 영세사업장의 자영업자들 은 노동시간의 규제를 받지 않아 낮은 수익구조 속에서 장시간 노동을 하는 경향이 있다. 때문에 한국의 장시간 노동은 자영업자의 낮은 소득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법적으로 노동시간 규제를 받지 않는 소위 특례업종의 노동자들도 있다. <근로기준법> 59조에는 운수, 물품 판매 및 보관, 금융보험, 영화, 통신,교육 및 조사연구, 광고, 의료 및 위생, 접객, 소각및 청소, 이용등의 업종에서 사용자가 근로자와 서면합의를 한 경우 근로시간 규제의 대상이 되지 않으며 그밖에 공중의 편의 또는 업무의 특성상 필요에 따라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사업도 여기에 포함된다. 얼핏 보아도 일상생활에 필요한 서비스 제공 업무와 주요 전문적 업무들이 노동시간 규제에서 벗어나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자영업자든 특례업종 노동자든 하루 24시간을 일터에서 보내지는 않을 것이다. 장시간 노동체제라고 해도 먹고 자고 쉬고 이동하는 일상 활동에 필요한 기본 시간은 주어지기 마련이다. 현대 사회는 노예제나 봉건제가 아니라 자유로운임금노동자들의 사회이며 개인은 노동자이자 동시에 시민으로서 그의 고용주와 동등한 시민권을 갖기 때문이다. 그러나 20168월 지금 여기, 하루 6시간 수면도 없이 일을 해야 하는 이들도 있다. 바로 수련노동자들이다. 대한민국의 법과 각급 기관의 인사규칙, 심지어 이 들이 작성한 고용계약서에도 있지만, 정작 현실에서는 없는 것. 그것들 중 하나가 수련생의 노동시간 규제다. 정부는 201410<대학원생 권리장전>(대통령직속 청년위원회)을 발표하고 대학원생 이 조교로 일할 경우 근로시간과 근로내용, 임금기준의 정보를 제공하고 준수할 것을 명시했지만, 이 규정이 대학에서 얼마나 지켜지는지는 알 수 없다. 어떤 효과적인 처벌 규정도, 현실 점검을 위한 후속 절차도 명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자는 지금까지 대학의 어떤 연구실에서 노동시간 규정이 엄격하게 준수되고 시간을 넘겨 일할 때는 조교의 동의를 얻으며 초과근무 수당이 지급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없다.


필자의 과문한 탓과, 조교를 노동자이기보다는 학생으로 생각하는 교수들의 입장, 대학의 형식적 관리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조교들의 노동시간이 대학사회의 중요한 '노동문제로 제기되고 있다는 소식은 아직 들리지 않는다. 더 이상 참을 수없게 된 그들이 스스로 조직화해서 문제를 제기하고 있지만, 여전히 조교 노동자’(조교로 일하는 대학원생들을 연구 노동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조교 업무에는 연구 지원뿐만 아니라, 교육과 행정 업무를 전담하는 경우도 있어 이 글에서는 조교 노동자로 부르기로 한다.) 는 노동자이기보단 학생며 교수의 제자이다. 따라서 이들 수련생들에게는 노사관계보다 사제관계가 더 우선한다. 대학병원 인턴의 경우 그들의 관리 책임을 맡은 부서는 고용노동부가 아니라 교육부라는 사실이 이를 보여준다. 일을 시키기보다 가르치는 데 목적을 두고 학생들을 지원하기 위해 힘들게 프로젝트를 따와 연구실을 운영하는 교수들이 더 많겠지만, 대학사회의 조교나 수련의들을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은 사제관계가 앞서기 쉽다. 때문에 이들 수련생들이 처한 현실은 법적 테두리를 넘어 도덕과 인습의 경계에까지 걸쳐 있다. 따라서 문제를 드러내기도 해결하기도 어려워, 많은 경우 수련생들은 스스로 감내하는 상황에 있다. P는 대학원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하는 박사과정생이다. 대학 입학 후 자신이 원하는 일이 무엇인지 몰라 방황했던 그는 컴퓨터를 전공하기로 결심한 후 대학 입시를 다시 치러 컴퓨터 학과를 졸업했다.


선배의 소개로 컴퓨터 전공 교수의 연구실에서 대학원 생활을 시작한 그는 실리콘밸리의 입성을 꿈꾸며 프로젝트에 열심히 참여했다. 그러나 3년이 지난 지금 연구실 조교 생활을 계속할지 아니면 그만 둘지 고민하고 있다. 일주일 내내 주말도 없이 연구실에서 하루를 보내고 가끔 밤을 새워야 하는 생활에서 몸과 마음이 지쳐버렸다. 지도교수의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만으로도 하루 24시간이 부족한 상황에서 자신의 연구를 시작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이제 P는 왜 자신이 대학 입시를 두 번이나 가치르며 대학원까지 왔는지, 대학원에서 자신이 원래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잘 기억나지 않기 때문이다.


K는 의류디자인을 전공하고 4학년이 되던 해 의류회사에 인턴으로 입사했다. 디자인 팀에서 인턴사원으로 월화수목금금금밤낮없이 일하던 그녀는 월급날 누구에게 말하기조차 부끄러울 만큼 적은 급여를 받고 고민에 빠졌다. 그렇게 몇 달을 일한 후다른 회사에 들어갔지만, 역시 인턴은 시키는 대로 일하고 주는 대로 받아야 하는 존재였다. 그들은 노동자가 아니라 일을 배우는수습생이었기 때문이다. 졸업 후 K는 취업 대신 창업을 선택했다. 혼자서 작은 작업실을 얻어 옷을 만들고 인터넷에서 판다. 여전히 그녀는 일요일에도 가끔씩 일을 하지만, 불만은 없다. 그 댓가가 자신에게 돌아온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Y는 대학병원 소아과 병동에서 근무하는 레지던트 1년차 의사다. 대학 재학 시절을 늘 수석 장학금을받을 만큼 명민하고 성실했던 그는 인턴과정을 거치며 자신이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 행복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소아과를 선택하고 악명 높은 레지던트 1년차를 시작한 후 그는 혼란에 빠졌다. 24시간, 48시간, 심지어 72시간 동안 깊이 잠을 자지도, 편히 음식을 먹기도 어려울 정도로 바쁜일과에서 자신의 체력이 점점 소진되어 갔고, 진료중에 잠시 의식을 잃는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잘못하면 어린 환자의 치료를 그르칠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에 빠진 그는 병원을 그만둘 생각을 하고 있다. 곧장 군대에 끌려가야 하지만, 군의관에게는 잠 잘 시간은 주어질 거라고 생각하면 그리 나쁜 선택은아닐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출처_ SBS 카드뉴스 갈무리

P, K,  Y는 모두 고용계약을 맺고 일하고 급여를 받는 노동자이지만, 노동자만은 아니다. 수련과정에 있는 사람들이므로 피교육생(수련생)이기도 하며, 교육기관이나 교수, 상사의 지시를 따라야 할 의무가 있다. 또 교수와 상사의 평가에 따라 채용이 결정되고 자신이 원하는 길을 갈 수 있다. 일반 노동자들처럼 평가가 나쁘면 다른 직장으로 이동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교수와 상사의 인정을 얻지 못하면 자신이 원하는 길을 가기 위한 기본 조건, 자격 자체가 주어지지 않는다. 20대 초반부터 짧게는 4년 길게는 10년 이상 준비해 온 길을 수련기간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포기한다면 낙오자로 낙인찍히기 쉽다. 또 다른 길을 가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두려움으로 대부분의 수련생들은 무제한적인 노동시간 앞에서 속수무책이다. 수면 부족, 불규칙한 식사, 무거운 스트레스로 몸과 마음이 피폐해진 이들을 바라보는 기성세대의 시선은 어떤 것인가?

 

우리 때는 더 했는데, 그걸 무슨 고생이라고 하냐? 요즘 애들은 헝그리 정신이 없다.”


필자가 만난 주류사회의 영향력 있는 인사들의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1960년대 개발 시대도 아닌 21세기에 웬 헝그리 정신인가?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의 수련생들은 매우 헝그리(hungry)하다’. 배가 고프고 잠이 고프고 따뜻한 격려가 고프고 생활을 꾸려가기 위한 임금이 고프다. 노동자에 대한 존중이 고프고 노동자의 인권이 고프다. ‘헝그리하지만, ‘헝그리하다고 말할 수 있는 권리, 노동현장의 정치적 권리가 이들에게는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고달픈 몸과 마음을 간신히 지탱하며 미소를 짓는다. 괜찮다고. 견딜만하다고. 필자는 두렵다. 이들이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간신히 버텨낸 이들에게 정말 장밋빛 미래가 있을것인지. 소수이나마 장밋빛 미래를 움켜쥔 이들이 40대가 되면 청년들에게 또 얼마나 헝그리 정신을 강요할 것인지. 우리는 20대들의 땀과 눈물을 팔아 얼마나 더 우리의 탐욕을 채워갈 것인지.


출처_jtbc 뉴스 갈무리

 

2014년 고려대학교 일반대학원 총학생회가 발표한 <대학원생 실태조사보고서>에 따르면, 대학원생들이 조교업무를 수행하는 데 가장 어려웠던 경험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 학업 및 연구시간의 감소59%(183)로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다. 조교 업무로 인해 자신의 학업에 사용할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병원의 인턴이나 레지던트 역시 같을 것이다. 환자 진료에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면 의사로서 자기 공부를 할 시간이 그만큼 줄어들 것이다. 이런 환경 속에서 그들의 연구 성과나 진료 행위가 얼마나 높은 질을 지닐 수 있을지, 그들이 제대로 성장할 수 있을지 걱정스럽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 한 가지 소식이 들려왔다. 보건복지부가 레지던트의 연속근무 시 10시간의 휴식시간을 보장하는 <전문의의 수련 및 자격 인정 등에 관한 규정 시행령 및 시행규칙 개정안>을 발표한 것이다. 이제 내년부터는 Y와 같은 불행한 사례가 더 나오지 않을 수 있을까? 그 기대가 긍정보다는 부정 쪽으로 기우는 것은 필자의 지나친 기우일지 모르지만, 법이 만들어졌으니 반드시 그 효과를 거둘 수 있기 바란다. 이제 더 이상 우리 사회가 실적경쟁이라는 목표를 위해 젊은이들의 눈물을 외면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기도한다.

 

 

 

[노동시간에세이] 시간의 두 결: 시간 적대에 대하여 /2016.7

시간의 두 결: 시간 적대에 대하여

 


강수돌 노동시간센터 회원, 고려대 세종캠퍼스 경영학부 교수

 


하루 24시간. 일 년 365.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공평한 시간이다. 오늘날 우리는 평균 80년 산다. 물론 최근 서울 지하철 스크린도어 노동자나 공고 실습생처럼 10대에 억울하게 죽어가는 이도 많고, 90~100세를 넘기며 장수하는 노인도 있다. 그러나 살아 있는 모든 이에게 하루 24시간은 동일하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에게 시간이 다 같은가? 다르다. 시간의 결이 다르다.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에는 크게 두 가지 결이 있다. 하나는 돈의 시간이고 다른 하나는 삶의 시간이다.

 

시간은 돈이라는 규율 

시간은 돈이다(Time is money)!” 벤자민 프랭클린(1706~1790)의 말이다. 그는 1776년 미국 독립선언문을 작성한 이다. 그는 정치가이자 발명가이기도 했으며 사상가였다. 프랭클린의 사상은 미국 건국 초기부터 오늘날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실용주의적으로 살아가게 영향을 주었다. 그는 어느 젊은 상인에게 주는 충고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은 명언을 남겼다.

 

시간이 돈임을 명심하라. 하루 종일 일해서 10실링을 벌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만일 그가 한 나절 동안 밖에서 놀거나 그냥 빈둥거리며 시간을 보낸다 하자. 그러면서 설사 그가 6펜스만 썼다 하더라도 그는 그것만이 비용의 전부라 생각해선 안 된다. 왜냐하면 그는 그 외도 5실링을 낭비하거나 포기한 거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1848년에 끌로드 F. 바스티아의 에세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서 보다 발전 되었고, 마침내 1914년 오스트리아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폰 뷔저(von Wieser)에 의해 기회비용 (opportunity cost)’ 개념으로 각인되었다. 시간이 돈이므로, 돈 버는 일에 시간을 쓰지 않고 엉뚱한일만 하면 그 엉뚱한 일을 하느라 든 직접비용 (explicit costs)만이 아니라 원래 그 시간에 벌어야할 돈까지 벌지 못한 간접비용(implicit costs)이니, 이중의 손해(기회비용)를 본 셈이다. 이런 논리다. 어디, 많이 듣던 소리 아닌가? 그렇다. 오늘날 수 많은 우리 노동자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돈의 시간이 아닌 삶의 시간으로 

그러나 또 다른 시간의 결도 있다. 돈의 시간이 아니라 삶의 시간이다. 이것을 잘 표현하는 소설이 있는데, 독일 작가 미햐엘 엔데가 1973년에 쓴 <모모>.


꼬마 모모는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재주를 갖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주는 재주였다. 그게 무슨 특별한 재주람. 남의 말을 듣는 건 누구나 할수 있지. 이렇게 생각하는 독자도 많으리라. 하지만 그 생각은 틀린 것이다. 진정으로 귀를 기울여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 줄 줄 아는 사람은 아무 드물다. 더욱이 모모만큼 남의 말을 잘 들어 줄 줄 아는 사람도 없었다. 모모는 어리석은 사람이 갑자기 아주 사려 깊은 생각을 할 수 있게끔 귀 기울여 들을 줄 알았다. 상대방이 그런 생각을 하게끔 무슨 말이나 질문을 해서가 아니었다. 모모는 가만히 앉아서 따뜻한 관심을 갖고 온 마음으로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다. () 모모는 이 세상 모든 것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 고양이, 귀뚜라미, 두꺼비, 심지어는 빗줄기와 나뭇가지 사이를 스쳐 지나가는 바람에도 귀를 기울였다. 그러면 그들은 각각 자기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모모에게 이야기를 했다.”

 

주인공 모모는 시간을 돈으로 보지 않았다. 사람이나 자연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생명의 흐름에 참여하는 것이다. 여기서 시간은 생명의 흐름, 한마디로 삶이다. 현재 우리는 여기서 존재하며 살고() 있다. 존재한다는 게 무엇인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라는, 연속적인 시간 속에 생명의 에너지로 함께 흘러가는 것이다. 느끼고 생각하고 관계하고 행동하는 그 모든 에너지의 흐름 속에 존재할 때 비로소 우리는 사회적 존재가 되고 의미 있는 존재가 된다.

 

시간을 재기 위해서 달력과 시계가 있지만, 그것은 그다지 의미가 없다. 사실 누구나 잘 알고 있듯이 한 시간은 한없이 계속되는 영겁과 같을 수고 있고, 한 순간의 찰나와 같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 한 시간 동안 우리가 무슨 일을 겪는가에 달려 있다. 시간은 삶이며, 삶은 우리 마음 속에 있는 것이니까.”

 

<모모>에 나오는 다른 등장인물을 이야기를 들어보자. 모모의 이웃인 청소하는 노인 베포는 천천히, 한 호흡씩 즐기며 나아가는 삶의 방식에 대해 이야기 했다.

 

얘 모모야. 때론 우리 앞에 아주 긴 도로가 있어. 너무 길어. 도저히 해낼 수 없을 것 같아. 이런 생각이 들지. 그러면 서두르게 되지. 그리고 점점 더 빨리 서두르는 거야. 허리를 펴고 앞을 보면 조금도 줄어들지 않을 것 같지. 그러면 더욱 긴장되고 불안한 거야. 나중에는 숨이 탁탁 막혀서 더 이상 비질을 할 수가 없어. 앞에는 여전히 길이 아득하고 말이야.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거야. 한꺼번에 도로 전체를 생각해서는 안 돼. 알겠니? 다음에 딛게될 걸음, 다음에 쉬게 될 호흡, 다음에 하게 될 비질만 생각해야 하는 거야. 계속해서 바로 다음 일만 생각해야 하는 거야. 그러면 일을 하는 게 즐겁지. 그게 중요한 거야.”

 

이 모든 구절은 모모의 말, 베포의 말이기도 하지만, 바로 작가 M. 엔데이 현대인들에게 들려주고픈 말일 것이다. 그는 아무리 긴 시간, 많은 일이 쌓여 있어도, 한 걸음씩 한 호흡씩 즐기면서 천천히 해나가면 어느 새 모두 할 수 있다고 했다. 시간의 흐름속에서도 특히 현재에 집중해 즐기는 것이다. 여기서는 효율이 아니라 호흡이 중요하다. 효율이 돈이라면 호흡은 삶이다. 효율이 죽음이라면 호흡은 생명인 것이다.

 

<모모>에서도 효율과 이윤의 시간을 따르는 이가 등장한다. 바로 시간저축 은행에서 일하는 회색신사들이 그렇다. 그들은 죽음을 뜻하는 효율이 생명을 뜻하는 호흡을 망가뜨리는 장면의 극치를 보여준다.


시간을 어떻게 아끼셔야 하는지는 잘 아시잖습니까! 예컨대 일을 더 빨리 하시고 불필요한 부분은 모두 생략하세요. 지금까지 손님 한 명당 30분이 걸렸다면 이제 15분으로 줄이세요. 시간 낭비를 가져오는 잡담은 피하세요. 나이 드신 어머니 곁에서 보내는 시간을 절반으로 단축할 수도 있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어머니를, 좋지만 값이 싼 양로원에 보내는 겁니다. 그러면 어머니를 돌볼 필요가 없으니까 고스란히 한 시간을 아낄 수 있지요. 아무 짝에도 쓸데없는 앵무새는 내다 버리세요! 다리아 양을 만나야 한다면 두 주에 한 번만 찾아가세요! 15분 간의 저녁 명상은 집어 치우세요. 무엇보다 노래를 하고, 책을 읽고, 소위 친구들을 만나느라고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지 마세요. 얘기가 나온 김에 한 가지 충고하는데, 잘 맞는 커다란 시계를 하나 이발소에 걸어 놓으세요. 견습생이 일을 잘 하고 있나 감시할 수 있게 말이지요.”

 

이 모든 충고는 다시 18세기 B. 프랭클린의 말로 돌아간다. “시간은 바로 돈이니, 시간 낭비는 죄악이다!” “일하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말라!” 그리하여, 무노동 무임금. 같은 맥락에서 파업 시 임금 지불은 불법이다. 이제, 일하는 시간, 돈 버는 시간만이 바르게 사용된 시간이다. 일하지 않는 시간, 공부하지 않은 시간, 돈 벌지 못하는 시간은 인생 낭비다. 오죽하면 고등학교 교실에 이런 급훈이 나왔겠는가? “네가 잠든 사이 경쟁자의 책장 넘기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강남엔 내 집 마련, 주차장엔 페라리.” 이런식이다. 이 모든 이야기는 미래의 돈(성공)을 위해 현재의 삶(행복)을 포기하게 만든다.

 

돈의 시간에 되어 있지 않은가?

오늘날 우리 삶은 이 두 결의 시간이 대립한다. 시간 적대다. 생명의 논리와 자본의 논리가 대립한다. 물론, 생명의 논리가 자본의 논리에 저항을 하기도 하지만 자본의 논리는 권력의 힘을 업고 생명의 논리를 무참히 박살내려 한다. 이제, 계급 적대는 시간 적대로 현상한다.

 

자본은 시간을 압축하고 밀도를 높여 이윤율을 높이려 발버둥 친다. 하지만 자본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무덤을 파고있다. 세계시장이 급속도로 포화 상태로 치달았고, 원료나 에너지도 급속히 고갈된다. 실업자와 비정규직을 대량 생산하면서 구매력을 급속히 떨어뜨렸다. 은행 이자가 제로로 치닫고 재벌들이 수백 조의 사내유보금을 쌓아두는 배경이다. 효율(축적)의 논리가 자가당착이 되어 호흡(흐름)을 방해한다. 하지만 자본은 자성하지 않고, 오히려 허튼 소리만 무한 반복한다. “조금만 더 일하면 선진국 된다. 조금만 더 !”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덤 앞에 선 좀비 시스템을 구덩이 속으로 살짝 떠미는 일이다.

 

비록 생명의 논리가 자본의 논리를 압도적으로 굴복시킬 힘은 없지만, 생명의 논리가 자본의 논리에 자발적 복종을 하지 않고 스스로 꿈틀거리며 더불어 어깨를 거는 한, 좀비가 되어버린 시스템을 구덩이로 떠밀어 넣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이제 생명의 시간이 빛을 발할 때가 다가온다. 우리 자신이 생명의 철학, 삶의 철학으로 무장하는 만큼 가까워지는 법!

 

최근 UCLA 앤더슨 경영대학원이 미국 사람 1,226명을 대상으로 질문을 던졌다. “여가 없이 돈을 벌 것인가, 아니면 돈을 포기하고 여가를 선택할 것인가?” 이것이 문제였다. 그 중 60.9%는 돈을 선택 했고 30.1%는 시간을 선택했다. 이들의 삶의 만족도를 분석한 결과, 돈을 선택한 이들보다 시간을 선택한 이들이 행복했다. 돈을 선택한 이들이 많이 버는 것에 집중한다면, 시간을 선택한 이들은 어떻게 쓸 것인가에 집중했다. 그런데, 돈이 충분히 있어도 쉬지 못하고 놀지 못하는 이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결론은, ‘중독이 문제다. 돈 중독, 일중독, 출세중독, 권력중독이 그것이다. ‘충분함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면 중독은 왜 생기는가? 내면의 공허함 때문이다. 속이 허하니 외부로부터 뭔가 채우려는 것이 모든 중독의 핵심이다. 내면의 느낌으로 표현되는 인간적 필요욕구’, 즉 진심으로 원하는 것을 모르거나 억압하고 있다는 말이다.

 

생명의 시간으로 나아가기 위하여 

이제 우리는 우리의 공허한 내면을 삶의 시간으로, 생명의 시간으로 채워나가야 한다. 내면의 느낌과 필요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진심으로 원하는 것을 존중하고 경청하고 신뢰하면 된다. ‘자기 해방이다. 그러나 이게 어디 쉬운 일인가? 우리의 오래된 마음의 습관이 큰 장벽이 된다. 일단 뒤틀린 현재의 모습을 직시하고 스스로 자유로워지는 것(자기 해방)이 출발점이요, 그 다음은 생명의 시간이 옳다고 생각하는 이들부터 먼저 생명의 시간을 온전히 음미하고 향유하는 연습을 함께 해나가야 한다(상호연대). 나아가, 그렇게 삶의 시간을 알차게 누리는 실천을 하면서도, 우리 사회 구성원 누구나 삶의 시간을 온전히 누릴 수 있끔 사회 구조를 바꿔내야 한다(사회 해방). 사회적 실천과 운동, 이것이 절실하다. 구체적으로, 노동시간 단축과 여가시간 증대, 삶의 시간 계획과 신바람 나는 프로그램 만들기 등을 가능케 할 노동 및 경제 시스템, 돈을 많이 벌지 않아도 인간답게 살 수 있게 하는 복지 시스템, 점수 따기 식 공부가 아닌 꿈과 개성을 살리는 공부를 돕는 교육 시스템 등을 패키지로 구축해야 한다. 이를 위한 사회운동이 성장하는 만큼 자본의 시간도 쉬이 사라질 것이고 좀비 같은 시스템을 땅 속에 파묻는 일도 쉬이 가능 할 것이다. 자기 해방에서 상호 연대로, 또 사회 해방으로 진전해야 한다. 바로 그 길 위에서, 시간은 더 이상 돈이 아니라 삶이 될 것이다.

[노동시간에세이] 얼마나 일해야 행복할 만큼 벌 수 있을까? / 2016.6

얼마나 일해야 행복할 만큼 벌 수 있을까?



김재광 노동시간센터 회원



고대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은 가장 좋은 것, 최고선이다, 최고선은 다른 것을 위한 것이 아닌 그 자체로 목적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물론 그가 말한 '행복'은 현대 우리 일상에서 상용하는 행복과는 다른 개념이기는 하다. 그래도 말 자체에 별다른 이견을 달고픈 생각은 없다. 세상에서 딱 두 종류의 사람만을 구분한다면 '죽지 못해 사는 사람'과 '안 죽으니까 사는 사람'일 것이다. 


전자는 비참한 삶이 분명하고, 후자라고 해도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후자인 경우 죽지 못해 사는 것은 아니므로 나름의 목적 또는 삶의 방향이 있을 것인데, 이것을 어떻게 표현하든 '행복한 삶'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불행하기 위해 사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은 세계 GDP순위 11위로 경제대국 이지만 사회통합실태조사(2014년)에 따르면 '한국인의 행복도'는 10점 만점에 5.7점으로 낮은 수준이며, OECD의 '2015년 삶'에서 5.8점으로 35개국 중 28번째를 차지하고 있으며, UN의 '세계행복보고서(2015)'에서는 5.98점으로 158개국 중 47위로 경제규모에 비하면 그에 상응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뿐 아니라 다른 여러 국가 역시 국제적 수준에서 국가의 경제력이 행복지수와 상관관계를 가지지 못하는 것을 종종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국내적 수준에서는 일정한 경제적량 즉 소득 수준은 행복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여러 연구나 조사를 통해 알 수 있다. 이러한 이유는 경제력 규모가 큰 국가라 하더라도 국내의 소득 분배 구조와 사회적 지원의 정도가 취약할 경우 경제적 규모와 행복지수간의 간극을 발생시키는 것임을 추정할 수 있다.


아무튼, 행복한 삶의 기준과 요건에 있어 절대적 기준이 있을 수 없고, 각자의 주관적 요소를 무시할 수 없다 하여도 행복한 삶의 전제 조건 중 경제적 여건의 중요성을 무시하기는 어려운 것임은 분명하다. 영화 <웰컴 투 동막골>에서 이장의 '영도력'의 시작은 "잘 멕이는"것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소득이 행복에 영향을 미칠까


미국 과학학술원지(PNAS)의 논문에 따르면 소득이 높아질수록 삶에 대한 만족도는 계속 높아지지만, 행복감은 연봉 7만5000달러(약 9000만 원)에서 더 이상 높아지지 않았다. 다시 말해 소득이 9000만 원 까지는 연봉이 높아지면 행복감도 높아 지다가, 연봉이 9000만 원이 넘어 1억 원이 돼도 더 이상 행복감이 증가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월급으로 따지면 약 700만 원 정도다.


이 연구 결과는 몇 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우선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소득은 행복에 영향을 준다. 그러나 한계는 있다. 그러나 그 전까지는 참 많이 벌어야 한다. 한편 이 연구에 대한 추가 해석이 있다. 행복도는 멈추지만 만족도는 줄어들지 않아 일정 정도 소득 이상이면 소득의 영향력이 줄어든다는 것이지, 더 행복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라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어떨까? <매경이코노미> 조사(2009)에 의하면 '행복을 결정하는 요소는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관련 가장 많은 표를 얻은 응답은 단연 '경제적 안정'이다. 36%가 1순위로 경제적 안정을 꼽았다. 다음이 개인의 신체적 건강과 가족의 화목이다. 23%와 19%다. 이는 1순위로 답한 응답만 고려했을 때 결과다. 


'소득이 많은 사람들이 소득이 적은 사람보다 더 행복하다'는 문장에 어느 정도 동의하는지를 물었다('0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에서 10점: 매우 동의한다' 까지의 구간). 무려 65%가 6점부터 10점으로 대답했다. 더 많은 소득이 행복에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행복하기 위해 최소한 어느 정도 소득이 있으면 될까?'라는 질문에는 '4인 가족 기준 월 401만원에서 500만원이 최소한 필요한 소득'이라고 답한 응답자가 28%로 제일 많았다. 다음으로는 301만원에서 400만원(25%), 501만원에서 600만원(22%) 순이었다.


'서울시민 행복도 조사'(2010년)에서 소득이 증가 할수록 행복도도 증가하지만 400만 원이 넘어가면서부터는 소득이 늘어도 행복도는 오히려 낮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의 연구결과와 달리 400만 원이 넘어가면 더 많은 소득을 만들어 내기 위해 감수해야 할 희생도 그만큼 늘어나기 때문에 오히려 행복도가 떨어졌다고 하니, 업무강도 강화나 노동의 시간 증가가 영향을 준 것이라 추측된다. 


업무강도의 부가나 노동시간의 부가가 없다면 더 상승된 임금이 측정될 수 도 있었을 것이다. 앞의 두 조사를 고려하면 한국인에게 월 400만 원, 일 년에 4800만 원 정도가 행복을 전제하는 최소 또는 한계 소득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얼마나 일해야 행복할까


소득과 행복의 중요한 관계를 언급한 것은 이것을 통해 행복한 삶을 위한 노동시간의 문제를 추론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대다수 노동자의 소득은 노동시간의 길이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2016년 3월 '경제활동인구 근로형태별 부가조사'(통계청)에 의하면 정규직의 경우 283만 원, 비정규직은 151만 원이었다.


2015년 하반기 '지역별 고용조사'(통계청)에 의하면 200만 원 월급 미만인 노동자가 50%(47.4%)가까이 되었다. 2014년도 '소득분위별 근로자 임금 분석'(전경련)에 의하면 임금노동자의 평균 연봉은 3240만 원. 중간순위는 2465만 원 이었다. 9분위(상위 20%)의 최저연봉이 4586만 원이었다. 이 같은 통계수치를 보면 한국인이 행복을 위한 최소 또는 한계 소득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는 월 400만 원에 딱 절반인 200만 원조차 벌지 못하는 임금 노동자가 절반 가까이 되고, 월 400만 원에 미치지 못하는 임금근로자가 전체의 80%이상이 된다.


2015년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노동시간센터가 조사한 경기지역 중소제조업 사업장의 평균 1일 노동시간은 10.4시간이며, 평균 임금은 236.4만 원이었다. 잔업과 특근을 하지 않았다면 평균 200미만의 임금을 받는 셈이다. 다른 통계와 크게 다르지 않다. 거칠게 보면, 300명 미만 사업장이 98% 이상이고, 고용인원 역시 80%이니, 대부분의 한국 노동자는 경제 외적인 다른 행복의 전제들을 갖추고 있어도, 긍정적 마음을 아무리 다져 먹어도 행복하기에는 경제적으로 불안하고 궁핍하다.


적정 노동시간과 임금, 그리고 적정한 사회적 지원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한국의 노동시간은 길다. 전체 취업자 1인 평균 노동시간이 2124시간(2014년)이다. 이를 단순히 계산해도 월 177시간으로, 법정노동시간인 주 40시간에 17시간 넘기는 것인데, 연차 휴가 등 법정휴가와 공휴일 등을 고려하면 그 이상의 추가 노동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전경련의 통계에서 근거한 월평균 임금은 270만 원으로, 월 400만 원을 벌기 위해서는 평균 노동시간을 기준으로 약 월 85시간을 더 일해 일해야 하여 월 262시간을, 연단위로는 1020시간을 더하여 3144시간을 일해야 하는 것이다. 하루에 10시간을 일한다 치면 한 달에 27일 가까이 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월 400만 원을 번다한들 살인적인 노동시간으로 건강을 해치고 사회생활이 파괴되어 행복한 삶을 살 수는 없는 것이다. 만일, 주 40시간 일하는 최저임금 노동자라면, 월 507시간을 일해야 가능하고, 하루 10시간을 일한다 해도 한 달 51일 가까이 일해야 하므로 불가능한 것이다. 법정 노동시간을 준수하고는 사실상 대부분의 노동자가 행복을 전제할 경제적 조건을 형성하기에 버거운 것이다.


세계경제 11대 대국, 한국은 상위 10%가 소득의 45%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니까 "얼마나 일해야 행복할 만큼 벌 수 있을까"라고 질문한다면, 다시 말해 "적정한 노동시간이 얼마냐"고 묻는다면, 현재의 대답은 "도저히 가늠할 수 없다, 가능하지 않다"이다. 


노동시간을 늘리기에는 달력의 날수가 턱없이 부족하고, 어거지로 늘려본들 건강과 관계가 파괴되니 행복할 리가 없다. 반대로 노동시간을 줄이면 대부분 노동자는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필요소득이 줄어든다. 시급을 받는 대부분의 노동자들에게 시간당 임금의 상승이 적정한 노동시간을 가늠하는 출발이다.


양극화된 소득구조의 해소가 행복을 위한 적정한 노동시간을 보장한다. 교육, 주거, 노후의 사회적 지원이 적정한 노동시간을 보장한다. 아무리 노동시간을 줄이자고 해도 이것이 병행되지 않으면, 노동시간은 인간적이고 적정할 수 없으며, 노동자는 빈곤이 도사리는 노동시간의 덫에서 헤어나올 수 없다.



[노동시간에세이] 문제는 노동이야 /2016.5

문제는 노동이야
- 경제민주화와 최저임금

 

 

 

전주희 노동시간센터, 수유너머N

 

 

여소야대 총선이후, 첫 번째 선물이 도착하다

 

‘새누리당 참패’로 귀결된 총선 직후 야권에서는 총선 내내 제기해온 ‘경제민주화’가 아니라 ‘부실기업 구조조정’ 문제를 꺼내 들었다. 정확히 야권이 아니라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가 그랬다. 그는 총선 내내 ‘문제는 경제’라며 배신의 경제를 이번 총선에서 심판할 것을 유권자들에게 호소했다. 그리고 선거 후 그는 ‘불쑥’ 구조조정 문제를 들고 나왔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 중심으로 제기된 ‘선제적 구조조정’은 본격적 구조조정에 앞서 실업대책 등 사회안전망이 전제되어야 한다며 IMF 위기 이후 진행되어왔던 구조조정과는 다른 구조조정을 제시하는 듯한 모양새다. 이에 대해 은수미 전 의원은 ‘어제는 경제민주화, 오늘은 구조조정’이라며 비판하고 나섰다. 총선 시기의 ‘배신의 경제’ 심판론과 총선 후의 구조조정의 중심에는 더불어 민주당의 김종인 비대위 대표가 있다. 그에게 구조조정과 경제민주화는 총선 민심에 대한 배신인가, 아니면 김종인표 경제의 동전의 양면인가?

다른 한편, 총선 전으로 돌아가 지난 4월 6일 민주노총을 비롯한 노동계는 2017년 최저임금 투쟁 선포식을 가졌다. 매년 이뤄진 ‘노동계’만의 최저임금투쟁은 20대 국회의원 선거 과정에서 이슈가 되면서 각 정당이 경쟁적으로 최저임금 인상안에 대한 총선 공약이 쏟아져 나왔다. 세부안은 다르지만 모든 정당이 9천 원~1만 원 가량의 인상안을 제시했고, 정의당과 더민주당 등은 노동계와 함께 기존에 주장해왔던 최저임금 1만원 안을 제시했다.

 

* 지난 5월1일 노동절, 알바데이 집회에서 맥도날드 알바 노동자가 봉투를 쓴 채 발언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난 4월 28일 박근혜 대통령은 비정규직을 늘리는 파견법 등의 처리를 거듭 강조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구조조정 과정에서는 불가피하게 일자리를 잃는 근로자들이 발생할 수 밖에 없다”며 그에 대한 대책으로 파견법이 포함된 ‘노동개혁 4법’의 국회 처리를 또 한번 힘을 주어 말했다. 최저임금과 ‘노동개혁 4법’, 더불어민주당의 구조조정과 박근혜 대통령의 구조조정이 총선 이후 국민들에게 각기 다른 포장을 하고 국민들 앞에 도착했다. 어느 선물 포장지를 풀 것인가를 고민하기 전에 가장 허망한 것은 어느 포장지를 풀어도 모두 같은 내용물이 나오게 되는 경우이다.

 

지금 어떠한 경제민주화인가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현행 헌법 119조 2항에 ‘경제의 민주화’라는 말을 넣었다고 해서 ‘경제민주화의 아버지’로 대접받는 인물이다. 법제정 이전에 법을 가능케 했던 것은 87년 민주항쟁이었다.당시 민주화 운동의 바람은 경제 영역에서도 시장 혹은 자본에 대한 민주주의적 통제의 요구로 나아갔다. 자유주의적 입장에서는 경제민주화는 시장원리가 제대로 작동하도록 하는 데 있었다. 반면 민족경제론의 입장에서는 노동자계급이 주도하는 국가권력의 민중화였고, 정경유착과 매판적 독점자본의 거부는 사회주의를 전망한 것이었다. 법제정 이전에 민주주의에 대한 대중적인 의미화가 서로 각축을 벌였다. 민주주의를 둘러싼 대중적인 의미화의 과정 자체가 헌법 119조 2항의 표면을 구성했다.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87년 이후 민주화 10년은 IMF 협약으로 매듭지어졌고, 그 뒤 10년은 사회 양극화로 귀결되었다. 민주주의를 요구했던 민중들은 일자리를 요구하는 불안정노동자가 되었거나, 대출을 끼고서라도 집을 사야 안심이 되는 불안정소유자가 되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경제민주화의 실제 내용을 들여다보면 재벌개혁이 중심이 되었던 경제민주화의 방향은 자본에 대한 규제와 노동의 권리 실현이라기 보다는 시장의 효율성 제고에 있었다. 시장의 흐름에 방해가 되는 독점을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제한했고, 시장의 효율성을 가로막는 노동이 유연화되었으며, 강경한 노동조합이 후진적이라는 이름으로 철퇴 되었다.


자본에 대한 규제의 효과가 노동자들에게 여전히 돌아가지 않았다. 경제민주화는 신한국, 세계화, 신자유주의의 이름으로 노동자들의 몫을 체계적으로 강탈해갔다. 배신의 경제에 대한 심판은 박근혜 대통령뿐 아니라, 87년 당시 경제민주화의 요구를 가장 약한 수준으로 관철시킨 김종인에게도 해당된다. 김종인 대표가 2012년 출판한 제목이기도 한 ‘지금 왜 경제민주화인가’는 다시 물어져야 한다. 지금 어떠한 경제민주화인가?

그런 의미에서 김종인 대표의 경제민주화와 구조조정은 선거 이전과 이후의 말 바꿈의 처세가 아니다. 그에게는 87년 이후 일관된 하나의 이념에 대한 두 표현이다. 지난 4월 25일 한국경제 인터뷰에서 김종인 대표는 그동안 지녀온 경제민주화 이념과 현실의 구조조정에 대한 자신의 구상을 피력했다. “경제민주화는 시장의 공정한 경쟁룰을 만들자는 게 핵심” 이라며 “재벌개혁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나는 한 번도 재벌개혁을 입에 올린 적이 없다”고 선을 그었다.

국가는 과도한 복지정책으로 인해 시장의 질서를 침해해서는 안 되고, 시장의 룰이 잘 지켜지도록 관리하는 ‘정원사’의 역할을 가질 뿐이라는 주장은 정확하게 신자유주의의 이념이다. 김종인 대표가 젊은 시절, 독일로 건너가 배워온 것은 신자유주의의 조상 격인 독일 질서자유주의의 이념이었다. 김종인 대표의 경제민주화의 핵심은 어려운 중소기업 보호라는 온정적인 태도가 아니라 경제 전반의 틀을 다시 짜는 것이다. 시장의 경쟁의 룰을 다시 짜는 것, 곧 구조조정의 다름 아니다.

 

“문제는 노동이야” 최저임금을 둘러싼 ‘공정한 룰’의 의미

 

시장의 공정한 룰을 다시 구성하기 위해서 문제가 되는 것은 87년 이래 체계적으로 배제된 노동의 몫이다. 경제적인 몫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몫을 둘러싼 싸움, 그것은 권리를 둘러싼 정치다. 최저임금을 둘러싼 싸움은 이 문제의 한가운데에 있다. 9천 원이냐 1만 원이냐 흥정의 문제가 아니고, 2020년까지냐 2019년까지냐 조정할 문제가 아니다. 김종인 대표를 비롯해 정치권에서 이야기하는 구조조정이 또다시 노동자들의 정치적 배제와 경제적 희생으로 점철되는 것인지, 아니면 공정한 룰을 재구성하기 위한 노동의 권리가 이제야말로 경제민주화의 전면에 등장할 것인지는 지금, 경제민주화를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가에 달려있다.


우리나라 최저임금법에 상응하는 법으로 미국에는 공정근로기준법이 있다. 미국 사회는 ‘공정함’이 어떤 의미인지 오랜 시간 사회적 논쟁을 벌여왔으며, 그 의미는 시대적 요구에 따라 변화하고 있다. 공정함의 의미가 생활임금으로 정의되기도 하고 자본과의 관계에서 불평등한 교섭력의 대등성으로 정의되기도 하였다. 그중 “공정성은 공정경쟁”이라는 의미가 있다. 노동과 자본 간의 공정한 계약이 이뤄지려면 자본 간의 공정한 경쟁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논리다. 즉 자본 간의 경쟁 격화와 불공정한 경쟁의 피해는 고스란히 노동자들의 장시간 저임금으로 귀결될 뿐만 아니라 대자본의 횡포는 시장의 불균형을 초래해 경제성장에 해악을 끼친다는 것이다. 더불어 장시간 저임금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의 건강과 삶의 유지의 비용은 자본이 사회적으로 전가시킨 것-노동손실의 사회화!-이므로 이에 대해 사회가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의미다.

김종인 대표와 더민주당, 국민의 당은 구조조정의 선결 전제로 실업수당 등, 사회안전망의 보완을 들었다. 하지만 이 역시 자본의 손실을 국민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에 불과하다. 물론 복지정책의 전면적인 확대는 필수적이다. 하지만 구조조정의 비용을 국민에게 전가하는 것은 복지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주사위를 던져도 이길 수밖에 없는 자본불패의 불공정한 게임의 룰이다. 때문에 공정한 시장의 룰을 바꾸고 경제민주화를 실현하고자 한다면 구조조정에서 자본의 경영과 주주들의 부당한 이익을 사회적으로 환수하고 법적 처벌을 하는 것이 먼저 전제 되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노동의 정치적 목소리를 배제한다는 것은 이율배반이다.

그동안의 구조조정을 구조조정 하겠다는 김종인표 구조조정에 여전히 노동의 자리는 없다. 배신의 경제는 다시 각색되어 재상영할 준비를 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래서 노동의 권리로 재구성되는 경제민주화는 총선 이후 지금의 문제다. 최저임금과 노동시간 단축, 그리고 고용보장을 둘러싼 노동의 정치는 구조조정 시기에 공세적으로 제기해야 한다. 더불어 민주당과 국민의당이 공세적 구조조정을 선포했듯이.

 

 

[노동시간에세이] 나쁜 노동시간 단축도 있다? /2016.4

나쁜 노동시간 단축도 있다?


김형렬 노동시간센터 회원, 직업환경의학 전문의



하루 8시간 노동을 부르짖던 노동자들의 노동시간 단축 투쟁은 노동운동 역사의 핵심 주제였고, 현재도 가장 중요한 과제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보수정당들도, 심지어 경총에서도 노동시간 단축을 이야기한다. 여전히 우리는 장시간 노동을 하고 있다. 우리는 노동시간 단축을 원하는가? 어떤 노동시간 단축을 말하고 있는가?


여전히 장시간노동, 하지만 노동시간은 줄어들고 있다

2014년 기준 OECD 회원국 평균 노동시간은 연 1770시간인데 한국인의 연평균 노동시간은 이보다 300시간 가량 많은 2057시간을 기록했다. 멕시코(2327시간), 칠레(2067시간)에 이어 세 번째로 길다. 독일(1302시간), 네덜란드(1347시간), 프랑스(1387시간)와 비교하면 무려 절반을 더 일한다. 우리가 12개월 일하는 사이, 유럽 노동자는 8개월만 일한다는 이야기다.

이렇듯 한국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은 전 세계에서 손꼽히게 길지만, 노동시간이 줄어드는 속도 역시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 2000년엔 1년 평균 노동시간이 2512시간이었으니, 14년 동안 500시간 가까이 감소한 것이다. 주5일 근무제가 상당히 보편화된 것이 그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또한, 노동시간을 줄여야 한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있는 것도 어느 정도의 역할을 했으리라 본다. 지난 대선 때 나왔던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슬로건은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남아있다.

그러나 정확한 통계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주 40시간보다 짧은 노동을 하는 단시간 근무 노동자의 증가 추세로 인해 평균노동시간이 단축되었을 가능성도 크다. 장시간 근무 노동자의 줄어든 노동시간뿐만 아니라, 늘어난 단시간 근무 노동자들의 비율도 OECD에서 이야기하는 연평균 노동시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유럽 국가들처럼 고용이 안정화되어 있고, 사회보장이 잘된 상태에서 일하는 단시간 노동과는 사뭇 다른 단시간 노동자의 확대는 우리가 바라는 노동시간 단축이 될 수는 없다. 우리는 노동시간 단축을 원한다. 하지만 노동시간 단축과 연동되는 다음의 문제들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원하는 노동시간 단축이 아닐 수 있다.


노동강도 문제, 노동시간은 줄어들었는데 일을 끝내고 나면 '녹초'

자동차 공장에서 노동시간이 줄어들면 생산되는 자동차 대수도 줄어들 것이다. 당연히 둘 중 하나의 선택을 해야 한다. 동일한 생산량을 유지하기 위해 생산 속도를 높이거나, 줄어든 물량만큼 임금을 줄이려 할 것이다. 노동자 입장에선 임금이 줄어드는 선택을 하지는 않을 것이므로, 결국 생산량 유지를 선택하게 되고 생산 속도는 이전보다 빨라질 것이다. 노동시간은 줄었는데 이전보다 훨씬 힘들게 일해야 한다면 이건 우리가 원하는 노동시간 단축이 아니다.


노동시간 배치의 문제, 교대제

야간에 일하면 1시간 적게 일할 수 있거나 하루 적게 일해도 된다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까? 하루 24시간 생산을 유지하기 위해 교대제를 운영하고 있는 회사에서 야간노동을 하려는 노동자가 없다면, 야간노동을 하면 높은 임금을 주거나 노동시간을 줄여주어 야간노동을 하도록 만들 것이다. 야간노동은 우리 몸의 생체시계의 혼란을 가져와 호르몬 불균형을 가져오고, 이로 인해 수면장애, 심장질환, 위장장애 등을 발생시키며 유방암을 일으키기도 하는 발암물질과 같다고 알려져 있다. 노동 시간이 줄어든다 하더라도 야간노동을 해야만 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원하는 노동시간 단축이 아니다.


비공식적 노동시간의 연장, 집에서도 일하는 사람 늘어

"오늘 회사에 안 나와도 돼. 그 일만 끝내서 내일 보고해." 

"차라리 하루 10시간 일해서 회사에서 일 끝내고 나머지 시간을 마음 편하게 보내고 싶어요." 

집에 와서도, 친구를 만나고 있을 때도 해야 하는 회사 일 걱정. 쉬고 있을 때도 울리는 카톡, 문자, 이메일. 쉬어도 쉬는 것 같지 않은 우리의 휴식 시간. 집에 와서도 끝나지 않은, 회사에 있는 시간만 단축되는 노동시간 단축은 우리가 원하는 노동시간 단축이 아니다.


업무시간 종료 후 상사가 휴대전화 메시지로 황급히 업무지시를 하는 한 통신사의 광고 장면이다. 한편, 프랑스에서는 '연결되지 않을 권리'라는 생소한 개념이 입법 예고돼 화제가 되었다. (출처 : 올레광고 캡쳐)


임금과 연동되어 있는 노동시간 문제, 돈을 벌기 위해 노동시간 단축에 반대하는 현실

노동시간 단축에 대한 사회적 의제가 만들어지고 노동조합과 여러 사회단체에서 노동시간을 줄이기 위한 노력을 하지만, 막상 이를 가장 반대하는 것은 현장의 노동자들이다. 시간제 임금을 받는 대다수의 제조업 노동자들은 노동시간 감소가 결국 임금의 감소를 의미하기 때문에 노동시간 단축은 생활 임금의 위협이 될 수도 있는 문제다. 기본급이 매우 낮거나 없는 임금구조는 장시간 노동을 해야만 생활임금이 유지되는 구조이다. 생활임금이 위협받는 노동시간 단축은 우리가 원하는 노동시간 단축이 아니다.


제조업 노동자들이 잔업과 특근을 하는 이유 (출처 : K전기,I콘트럴스 장시간 노동의 주요원인 조사 결과,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노동시간센터. 2015)


인력확보가 먼저다, 노동시간을 줄일 수 없는 노동자

운전노동자는 이들의 건강이 시민의 안전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므로 대부분 나라에서 법적으로 장시간 운전을 금지하고 있다(유럽, ILO, 일본 등 하루 9시간 이상 운전금지). 하지만 우리나라는 하루 운전시간을 제한하는 법이 없다. 그래서 경기도 버스를 운전하는 노동자들은 하루 17시간씩 운전을 한다. 그리고 다음 날 하루를 쉬고, 그 다음 날 또 하루 17시간을 운전한다.

만약 이 회사 차량이 30대라면 이런 방식의 교대를 하려면 최소 60명의 운전노동자가 필요하다(아무도 개인 경조사가 없어야 하고, 아프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회사에서 50명 정도만 고용한다. 그러면 휴일 없이 3일 연속 17시간씩 운전해야 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10명의 노동자를, 실제로는 20명 정도의 노동자를 더 뽑아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다. 

시민의 세금으로 준공영제를 시행하고 있는 서울의 버스는 그렇게 하고 있다. 더 많은 운전기사를 채용해서 하루에 9시간씩만 운전한다. 경기도 버스를 타고 다니는 우리는 3일 연속 하루 3시간만 자며 17시간씩 운전하고 있는 운전노동자들의 버스를 타고 있다. 인력확보가 없는 노동시간단축은 우리가 원하는 노동시간 단축이 아니다. 아니, 노동시간 단축은 불가능하다.


노동시간단축은 근본적인 사회변화를 만들어 내는 과정

노동시간 단축의 문제는 여러 복잡한 고려 요인들이 얽혀 있어서 이것만을 주장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노동시간 단축을 주장하는 정책은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우리사회의 임금구조, 퇴근 후 문화, 작업현장의 노동 구조, 우리 사회의 사회보장체계, 소비와 생산 그리고 고용으로 이어지는 자본주의 성장논리에 대한 반성과 대안, 교육과 복지의 사회적 책임 등. 끊임없이 이어지는 문제 제기에 대한 답을 해야 한다.

그래도 이렇게 연동되는 문제들에 대해 고민하고 정책을 만드는 곳들이 있다. 기본소득의 문제를 이야기하고(정의당은 연봉 3천만 원 보장, 노동당은 월 30만원 기본소득 보장), 교육, 복지의 확장을 노동시간 단축과 연동하여 설명하고 대안을 논의하는 사람들이다. 좀 더 나아가면 근본적인 우리 사회의 변화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다.

임금삭감도 없고(혹은 조금 벌어도 기본소득이 보장되는), 교대·야간 근무도 안 하고, 노동시간을 줄일 만큼 인력도 충분하고, 집에서는 진짜 푹 쉴 수 있고, 내 몸과 마음이 감당할 만큼의 일을 하는, 그러면서도 짧은 시간 일하는 것이 진짜 내가 원하는 노동시간 단축이다.




[노동시간에세이] 은퇴 좀 하자!! /2016.3

은퇴 좀 하자!! 

- 일 없는 노년에 대한 오해

 


권종호 노동시간센터 회원, 직업환경의학전문의

 

 

올해 명절에도 어김없이 고향집에 내려가서 볼멘소리를 한바탕 하고 왔다. 작년 부로 칠순을 넘기신 어머님께 농사일 좀 줄이시라고 매년 말씀드리는데 전혀 먹히질 않는다. 칠십 평생 농사일, 식당일 가릴 것 없이 해오신 어머님은 이미 성한 곳이 하나 없는데도, 일 그만두면 병난다며 한사코 하던 대로 하시겠단다.

"일 그만두면 병난다." 흔히 하는 이 말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할 수 있는 한 끝까지 일하며 평생을 보내야 한다는 무서운 결론에 도달한다. 그럼에도 묘한 설득력을 갖는 말이다. 왜 그럴까?


그만두면병난다?

은퇴 후 흔히 선택하는 아파트 경비직의 예를 들어보자. 뭐라도 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혹은 일이 없으면 생계가 어려워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경비직을 시작하게 된다. 일 하게 된 이유야 어찌 되었건, “놀면 뭐해 일이라도 해야지, 이렇게라도 나오니 활동이라도 하지 안 그럼 병나뭐 이런 말씀을 하신다. 하지만 맞는 말일까? 교대 작업은 뇌심혈관계 질환의 위험인자로 잘 알려져 있다. 게다가 고령자들은 이미 고혈압, 당뇨, 이상지질혈증 등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아 되도록 교대 작업은 피하는 것이 좋다. 실제로 교대 작업으로 인해 뇌심혈관계 질환이 악화되어 경비근무 도중 사망하는 경우도 빈번히 발생하고 있다. 말 그대로 죽는 날까지 일하는 것이다.


반면, 유럽의 여러 국가에서는 정년 연장을 반대하는 총파업이 성사되기도 했다. 고령 노동자라고 차별받지 않도록 정년 연장을 통해 일자리를 보장해주겠다는데도 총파업을 하다니,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유럽의 경우 정년과 연금 수령 연령은 대부분 65세로 맞춰져 있다. 또한 연금을 통한 보장액도 OECD 국가에서 평균적으로 은퇴직전 소득의 63% 수준을 보장해주고 있다. , 은퇴를 해도 상당한 수준의 소득이 사망 시까지 보장되는 것이다. 때문에 유럽의 몇몇 국가에서는 정년 연장은 곧 연금 수령 연령이 올라가는 것을 뜻하므로 일방적인 국가의 긴축재정에 맞서 총파업까지 이끌어내는 것이다. 유럽에 비하면 한국에서 퇴직 이후의 삶은 암담한 수준이다. 한국의 정년퇴직은 54세에서 60세 사이로 정해져 있고 연금 수령은 65세 이후부터 받을 수 있다. 국민연금의 보장성도 은퇴 직전 소득의 25~30% 수준에 그치고 있다. 당장 직장을 잃으면 연금 수령까지 10년 가까이의 공백이 있고 그 이후 연금을 받는다 해도 평균적으로 직전 소득의 25~30% 수준으로 생계조차 꾸려나가기 힘들다.

 

노년에 일을 가장 많이 하는데, 가장 가난한 현실


2015년 포브스 지는 한국의 노년 빈곤에 대한 OECD 통계 관련 보도를 실었다. 한국의 65세 이상 노년 인구의 빈곤율이 50%에 가까운 수준으로 OECD 평균 11.0%에 비해 5배 정도의 차이를 보이고, 바로 다음의 노년 빈곤율을 보이는 호주와도 15% 가까운 차이를 보인다는 것이다. 포브스 지는 이를 연금 제도의 미성숙 때문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이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이 있다. 한국이 OECD 국가 중 노년 소득에서 근로 소득 비중이 가장 큰 국가라는 점이다. , 일은 가장 많이 하면서도 가장 가난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노인의 소득원 구성> 그래프를 자세히 보면, 한국 다음으로 노년 빈곤율이 높았던 호주의 경우 가난함에도 노년에 일을 통해 얻는 수익은 많지 않다. 다시 말해 일반 인구에 비해 상대적으로 빈곤한 노년이라 할지라도 일을 안하고 버틸만한 수준이라는 것이다. 결국, 노년에 일을 가장 많이 하면서도 엄청난 빈곤율을 보이는 한국의 노년은 미성숙한 연금에만 그 원인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실제로 한국의 노년층 노동은 저임금, 비정규직, 고용불안정의 요소를 모두 갖고 있다. <유럽연합, OECD와 비교한 한국 고령근로자의 고용관련 점수표>를 보면, 한국의 노년층은 EUOECD의 국가들에 비해 상당히 높은 수준의 고용률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65~69세의 고용률은 43.8%로 다른 나라 평균 11.2%, 19.6%와 비교해 매우 높은 수준이다. 그리고 일자리의 질을 살펴보면 임시직 비율이 36.7%로 다른 나라 평균인 6.7%, 8.7%에 비해 엄청나게 높고, 그러한 일자리의 월평균 소득은 청장년층의 82% 수준으로 다른 나라에 비해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 은퇴 연령 역시 한국 남성의 경우 71.1세로이다. 62.4세나 64.2세에 보장된 정년보다 오히려 빨리 은퇴하는 다른 국가에 비해 상당히 늦다. 종합하여 해석하면, 한국의 노동자는 노후를 보장받을 수 있는 연금과 사회적 안전망의 부재로 인해 일반적 퇴직 연령인 55세 전후부터 실제 은퇴 연령인 70세까지 꾸준히 일을 하고 있으며, 그들의 일자리는 임시직, 저임금의 질 나쁜 일자리들로 빈곤을 해소하지 못하는 상태라는 결론이 나온다.

 

결국 노인자살률 1위로로 이어지는 연쇄고리.


결국 이렇게 늙고 병든 몸으로도 일을 놓지 못하는 현실은 일 그만두면 병난다는 억지스러운 자조를 낳았다. 질 낮은 일자리로 인해, 일을 하면서도 해소되지 않는 경제적 빈곤은 OECD 국가 중 노인 자살률 1위라는 참담한 결과를 가져왔다. 이렇게 자살하는 한국의 노년층은 실제로는 한국의 경제 성장을 중추적으로 이끌어온 세대였다. 근면함을 미덕으로 알고 열심히 살았고 노후는 생각도 못 하고 기업과 직장, 나아가 국가의 발전을 위해 낮은 임금과 장시간 근로를 버텨왔던 세대인 것이다. 하지만 그 결과는 어떠한가? 재벌 기업의 사내유보금은 710조로 천문학적인 숫자로 불어났지만 국가의 재정은 부채만 늘어가고 연금과 복지는 전혀 노년의 삶을 보장해주지 못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평균 수명이 늘고 노년 인구 비율이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기에, 정년 및 연금 수령 연령이 늦춰지는 것은 불가항력적인 일로 보인다. 이과정을 먼저 겪은 유럽은 기존의 정년 연령에 맞춰 퇴직하고 연금 생활을 하려는 경향을 무마하기 위해, 오래 일 할수록 인센티브를 주거나 고용을 보장해주고 노년의 신체 능력에 맞는 일자리로의 이직을 유도해 지속적인 근로를 이끌어왔다. 하지만 한국은 앞서 보다시피 출발점이 다르다. 일찍 퇴직하면 편안한 연금생활이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저임금의 비정규직 혹은 적은 연금 수입에 의존하는 장기 실업 상태인 진정한 헬조선이 펼쳐지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이 일 그만두면 병난다라는 말은 누구라도 수긍하게 만든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노년의 근로는 정책적으로 유도할 필요도 없고, 임금 피크제로 임금을 줄인대도 일만 하게 해주면 고마운 상황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임금 피크제와 같은 말도 안 되는 제안이 힘을 얻어서는 안된다.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은 아무런 준비 없이 발생한 엄청난 규모의 노년층 빈곤이지, ‘정년의 연장그 자체가 아니다. 다시 말해 현재 한국에 필요한 제도는, 임금을 삭감해 노년층을 더 활용고자 하는 질 나쁜 고용연장이 아니라, ‘노년층의 빈곤을 실질임금을 통해 해결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한국에서는 오히려 생소한 이야기가 있다. 일을 그만두면 건강을 더 잘 챙길 수 있고 은퇴 후 남는 시간은 편안하게 삶을 즐길 수 있다는 것. 당연히 그렇다. 그래서 유럽의 여러나라에서는 그렇게 일찍 은퇴하고 싶어 한다. 한국의 현실은 그 당연한 이야기를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암담하다. 한 번뿐인 삶에서 노동의 시간은 정년 기간만으로 충분하고 그것만으로도 노후가 보장되는 정책이 필요하다. 당연히 그러한 정책은 이미 가난할 대로 가난한 노동자를 쥐어짜서는 나올 수 없다. 그 동안 한 번도 하지 않은 기업과 정부의 고통 분담을 이제라도 이끌어내야 한다


이제 나이 들면 우리도 은퇴 좀 하자

 

 

 

[노동시간에세이] 우리는 왜 이런 시간을 견디는가? /2016.2

우리는 왜 이런 시간을 견디는가?

- 사람을 사람취급 안하는 교대제에 관한 단상



김보성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노동시간센터

 


24시간 생산이나 서비스가 지속되어야만 하는 사업장이 있다고 하자. 둘러보면 그런 사업장은 주변에 많다. 전기, 가스, 수도, 통신 사업장이나 병원은 24시간 국민에게 공공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 생산기술이나 업무의 특성상 24시간 가동을 해야 하는 사업장도 있다. 철강, 석유화학 사업장에서는 기계와 설비의 특성상 사업장을 24시간 가동해야한다. 이런 사업장의 노동자들은 교대제 근무를 피할 수 없다.

 

일하는 사람의 몸과 삶을 위하는 교대제가 상식인데...

24시간 운영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기업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교대제를 활용하는 경우도 있다. 이미 설치된 설비를 많이 가동할수록 더 많은 제품과 서비스를 생산하고 더 많은 수익을 올릴 수 있다고 믿을 경우, 사업주와 경영진은 24시간 조업을 지향한다. 24시간 연속이 아니더라도 조업시간을 최대한 늘리고자 한다. 자동차산업이나 유통서비스업이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 이 경우에도 노동자들은 교대제 근무를 하게 된다.

이러한 곳의 교대제도는 어떻게 짜야할까? 노동자들의 건강과 생활상 해악이 최소화돼야 할 것이다. 그것이 상식적인 판단일 것이다. <교대제 분류표>에서 볼 수 있듯, 교대제 근무는 심야근무, 순환근무, 전일근무 등의 특성으로 인해 노동자들의 건강과 생활에 수많은 해악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교대제도 설계에서 노동자들의 건강과 삶의 질은 1순위 고려대상이 되지 않는다. 노동자들의 건강과 삶의 질을 조금이라도 더 배려하려면 휴식과 휴일을 충분히 제공하는 근무시간표를 짜야 하는데, 그러자면 근무조를 추가 편성하고 인원을 늘려야 한다. 그러나 기업은 이로 인해 발생하는 비용의 증대를 원치 않는다. 결국 교대조와 인력은 최소화되고, 노동자들은 공익기업의 이익을 위해 교대제 근무의 고충을 맨몸으로 감당해야 하는 상황에 던져진다.


교대근무가 불러 일으키는 착각

교대제와 관련된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국내의 몇몇 제철공장에 방문하여 노동자들을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다. 제철소. 생산기술의 특성상 24시간 365일 조업을 이어가야 하는 사업장이다. 제철소의 교대제는 <교대제 분류표>에 따르면 순환형-심야교대-전일교대-연속조업교대에 해당한다. 방문한 제철소들은 43교대제를 실시하고 있었다. 하루 24시간을 3개 조가 8시간씩 나눠 일하고 한 조는 휴무를 갖는 것이다.

인터뷰를 하면서 두 가지 점에 놀랐다. 하나는 인터뷰한 공장들에 43교대제가 도입된 것이 1990년대 후반 이후였다는 것. 이것은 이전까지 노동자들이 연속조업 사업장에서 이론상 휴무조가 없는 33교대제로 근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1365일 달력에 빨간 날이 하루도 없는 셈이다. 끔찍한 일이다. 예컨대 현대제철 인천공장의 경우, 1997년 말에 43교대제가 도입됐다. 그 이전에는 33교대제가 유지됐다. 1989년 이후 1987년의 효과로 그나마 월 3~4회의 휴무가 보장되었으나, 33교대제가 유지되고 인원이 부족한 현실 속에서 노동자들은 흔히 근무를 하고 휴일근무수당을 지급받는 것을 선택했다. 내가 출근을 하지 않으면 그 노동 부담이 동료에게 고스란히 전가될 수밖에 없는 근무 환경 때문이다.

한보철강 처음 시작할 때는 22교대 맞교대로 계속 일하던 시절도 있었어요. 하루에 열두 시간씩. 교대 바뀌려면 토요일은 24시간 일해야 하고. 그렇다고 달에 쉬는 날이 있느냐. 그것도 없어요. 그냥 계속 그렇게 가는 거예요. 그때 어떻게 근무를 했는지, . 지금 생각해보면 끔찍해요. 그러다가 33교대로 넘어오니까, 시간이 많이 남는 것 같더라고요. 맞교대를 하다 보니까. (웃음) 주말에도 막 쉬는 것 같고. 사실 달에 두 번밖에 안 쉬는 건데. 43교대가 이제 7~8년 정도 됐나 그런 것 같은데, 아직도 사실 쉬는데도 적응이 잘 안 되는 게 있어요. 이게 한국사람 근성인지도 모르겠는데.” - 현대제철 당진공장 근무 노동자 인터뷰 (금속노조, 2014)


비인간적 교대제, 자본의 욕심만 채운다

위의 현대제철 당진공장 노동자 인터뷰에도 비슷한 상황이 그려진다. 36522교대제로 근무하다 33교대제로 바뀌니 시간이 많이 남는 것 같더란다. 하긴 1365일 휴일 없이 일하는 건 똑같아도 하루 노동시간이 12시간인 거랑 8시간인 건 차이가 많다. 그렇게 평생을 일하다 보니 43교대제가 도입되어 휴무조가 생기자 적응이 잘 안 되는지경에 이르게 됐다.

또 한 가지 놀란 건, 비인간적인 노동환경의 대표격인 33교대제가 지금까지도 많은 제철소의 사내하청 노동자들에게 여전히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인터뷰한 모든 공장의 사내하청 노동자들에게는 예외 없이 33교대제가 적용되고 있었다. 43교대제로의 전환은 제철 대기업의 정규직 노동자들에게만 해당된 변화였다. 정규직 노동자들은 노조를 조직해 교대제 전환을 요구하며 싸웠고 그래서 결국 43교대제를 쟁취했지만, 사내하청 노동자들은 여전히 그 바깥에서 휴무조 없는 교대노동을 행하고 있다. 여전히 많은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33교대제 하에서 정규직에 비해 턱없이 적은 월급을 받으며 더 어렵고 위험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비인간적 노동환경은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얼마 전 귀가하는 길에 아파트 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벽에 붙어있는 광고전단들을 멍하니 보고 있을 때였다. 맞교대근무를 하는 경비노동자들의 근무시간 조정 건에 관련된 공고문에 눈이 꽂혔다. 공고문의 요지는 ‘2016년도 최저시급 인상으로 아파트 경비노동자들의 근무/휴게 시간을 조정한다는 것이었다. 퉁명스러운 공고였지만, 내막은 금세 읽혔다. 최저시급이 인상되어 경비 노동자의 급여를 인상해야 하겠지만 입주민들의 반대 등 현실적인 어려움이 따르니, 동결되는 급여폭만큼 경비노동자의 휴게시간을 늘린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내가 사는 아파트의 경비 노동자들은 아파트 단지 안에서작년보다 더 긴 휴식시간을 갖게됐다!‘2016년에 6,030원으로 인상된 최저시급 적용도 놓치지 않고 받으며말이다. 그리고 그 덕분에나는 관리비를 조금 덜 부담하게 되려나 보다.


우리는 왜 이런 시간을 두고 보고 있는가

제철공장 노동자 교대근무실태를 조사하면서 느꼈던 화와 모욕감이 되살아남을 느꼈다. 이놈의 사회는 도무지 노동자를 사람으로 대우해 줄 생각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노동자의 시간과 급여 따위는 비용절감과 이익창출을 위해서라면 아무렇게나 주물러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1365일 휴일도 없이 일해야 하는 근무환경에서 휴무조도 없이 교대근무를 하게 하고, 최저시급 인상분을 휴게시간 연장이라는 장난질로 때워 먹는 현실. 일터에선 야근에 주말근무에 시달리면서도 집에선 또 다른 노동자의 시간을 쥐어짜고 유린하여 얻는 편리와 이익을 취하게 만드는 현실. 나도 당하면서 또다시 그런 현실을 직조하는데 공모자가 되게 하는 잔인한 현실. 우리는 왜 이런 시간을 견디고 있는가? 우리는 왜 이런 현실을 두고 보고 있는가! 노동자를 일하는 기계쯤으로나 여기는, 그래서 쓰다 보면 망가지고 망가지면 갈아치우면 된다는 생각, 그리고 그 생각에 기반해 만들어진 제도와 관행을 물어뜯듯 파헤치고 바꿔내야 한다. 일하는 우리는 모두 인간이기 때문이다. 

 

[노동시간에세이] 적정 소득, 적정 시간 그리고 건강한 삶 /2015.12

적정 소득, 노동 시간 그리고 건강한 삶

 

 

 

조성식 노동시간센터 회원, 직업환경의학 전문의

 

 

'40세 미만, 주야 맞교대, 근무 월 250만 원 이상 지급.'

 

직장 근처 인력 파견 업체의 네온사인에 이렇게 쓰여 있다. 이 인력 파견업체에서 광고하는 곳에서 일하고 250만 원을 월급으로 받으려면 일주일에 몇 시간을 일해야 할까? 대부분의 경우, 법정 노동시간인 40시간을 일해서 250만 원이 월급이 노동자들에게는 주어지지 않는다. 250만 원의 월급을 받으려면 보통 주 6일 하루 12시간의 노동을 해야 한다. 일주일은 주간에 12시간 일해야 하고 다른 일주일은 밤에 12시간을 일해야 250만 원의 임금이 노동자들에게 주어진다결국 250만 원의 돈은 최저 임금에 해당하는 기본급에, 연장 노동에 대한 가산, 야간 노동에 대해 가산을 해야만 받을 수 있는 금액이다. 한국에선 많은 노동자가 저임금의 노동을 보충하기 위해서 극단적으로 노동시간을 늘리고 거기에 심야 근무까지 하는 현실이다. 그런데 주당 72시간에 달하는 장시간 노동은 법에 맞는 내용일까?

 

노동시간 관련 근로기준법 조항, 얼마나 지켜질까

 

국제노동기구에 의하면 한국은 노동자의 안전과 건강을 지킬 법적 기준이 존재하지만 실제로는 잘 준수되지 않아서 노동자들의 건강과 안전이 보장되지 못하는 나라에 해당한다. 물론 근로기준법이나 산업안전보건법과 같은 형식적인 법조차도 없는 나라들보다는 낫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 같은 법이 거의 있으나 마나 한 상태이다. 산업안전보건법이 있지만 한 해에만 산업재해와 업무상 질병으로 한 해에 2000명의 노동자가 죽어 나가는 것이 한국의 현실이다그렇다면 노동시간에 대한 근로기준법 조항을 살펴보자. 근로기준법 50조와 53조가 노동시간과 직접 관련된 조항이고 59조는 예외 조항이다. 이 법 조항들을 보면 한국의 정규 노동시간은 40시간을 초과할 수 없으며, 근로자 대표와 서면 합의를 할 경우에는 52시간까지 연장 노동을 할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하였던 인력사무소의 광고 내용 '주야 맞교대, 250만 원'은 근로기준법 위반을 조장하는 광고인 셈이다.

 

한편 평소 노동부에서 정기적으로 사업장에서 노동시간에 대한 근로감독을 정기적으로 실시하는지, 특례 업종이 아닌 산업에서 근로시간이 52시간을 초과한 경우 처벌을 하는지, 만약 처벌을 한다면 어떠한 처벌을 하는지 잘 알려진 바가 없다. 실제로 언론 기사나 노동자들의 경험을 살펴본다면, 노동 시간에 대한 근로감독을 시행한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아마도 드물 것이다. 또 사업주가 노동자에게 장시간 노동을 시켜서 어떤 처벌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사람도 많지 않을 것이다. 어느 정도의 사업장이 노동시간과 관련한 근로기준법을 위반했는지에 대해서도 현실적으로 알기 어렵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노동부에서 2012년에 발표한 자료를 겨우 찾을 수 있었다. 표는 2012년도 일부 사업장에 대해 노동시간과 관련해서 수시로 감독한 결과이다. 140개 사업장 중에서 124개의 사업장에서 노동시간 관련 근로기준법을 지키지 않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감독 결과에서 80%가 넘는 사업장이 근로기준법을 위반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근로기준법을 위반한 사업장에는 대부분 가벼운 벌금조차도 부과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이처럼 한국에서의 근로기준법 적용은 선명한 법 조항에도 불구하고, 다른 산업안전보건과 관련한 법 조항이 있으나 마나 한 것처럼 대부분 사업장에서 무시하고 지키지 않고 있다.

 

 

<업종별 근로기준법 53조 위반 사업장 비율> (2012년 수시감독 결과)

 

그렇다면 한국 사회에 만연한 장시간 노동의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그중에서 가장 심각한 것이 저임금 체계라고 본다. 2012년을 기준으로 우리나라 노동자 중 저임금 노동자(전일제 노동자 중위임금 3분의 2 이하) 비율은 25.1%OECD 평균은 16.3%인 훨씬 높은 비율이고 이는 OECD 국가에서 2위에 해당한다또 최저 임금도 매우 낮은 수준이다. 만일 2015년도의 최저임금인 5580원으로 주 40시간 일하고, 하루의 유급 휴일을 받는다고 가정해서 주 6일의 임금을 받는다고 계산하면 월 107만 원 정도의 매우 낮은 소득으로 살아야 한다만일 부부가 맞벌이한다고 하더라도 215만 원 내외의 낮은 소득으로 생활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또 많은 노동자가 최저임금 수준의 임금을 받는 상황에서 연장근무 추가 50% 가산, 야간노동 50% 가산은 노동자들에게 매우 큰 유혹이 될 수밖에 없다. 물질적 생활을 유지하기 위하여 표준노동 시간의 거의 두 배에 달하는 72시간의 주야 맞교대 노동을 감내해야만 하는 현실이 한국사회 저임금 노동자들의 비극이다. 그러면서 장시간·야간 노동으로 노동자의 건강은 지속해서 손상당하고 있다건강해지려면 적절한 소득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영양을 섭취해야 하고, 적절한 주거 공간에서 거주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계절에 따른 여러 종류의 의복도 필요하고, 적당한 강도의 운동도 해야 한다. 적절하게 여가를 보내야 하고, 경조사를 비롯한 사회적 활동에도 참여해야 하는데, 이 같은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이상의 소득이 필요하다.

 

 이처럼 모든 사람이 건강할 수 있도록 사회가 최저 소득을 보장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개념을 '건강 최저소득'이라고 하는데, '건강 최저 소득'을 개념을 주장한 사람은 영국의 의사이자 보건학자인 '제리 모리스'이다. 한국에서도 이 개념에 따라 건강생활을 위한 최저 생계비가 계산된 바 있다. 계산된 금액은 2009년을 기준으로, 건강한 생활을 유지하려면 한 가구에 최소 약 250만 원의 돈이 매달 필요하다고 조사되었다2009년에 조사된 결과이므로 그간의 물가를 상승을 반영하면 2015년 현재는 조금 더 많은 돈이 필요할 거로 판단된다. 6년간의 물가 상승률이 10%라면, 건강을 유지하려면 최소한 한 가족의 월 275만 원 정도의 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 사회가 사회 구성원들의 건강을 보장하려면, 최저 임금으로 표준 노동시간인 주 40시간 이상 일했을 때 '건강 최저 소득' 이상의 소득을 받도록 해야 한다. 이는 매우 시급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올려야 한다. 최저임금 1만원! 살려야 한다. 경제민주화!" 노동자, 중소상공인, 청년, 학생, 시민사회 공동 기자회견 (출처 : 참여연대)

 

2013년 멕시코에 빼앗긴 'OECD 국가 중 평균 노동시간 1'2014년에 다시 되찾았다는 반갑지 않은 기사를 보았다. 또 유럽의 여러 국가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연구 논문에서는 주당 노동시간이 길어질수록 뇌졸중이 증가하며, 주당 노동시간이 55시간이 넘을 경우 뇌졸중의 위협이 30% 이상 증가하는 것으로 발표되었다(이 연구는 한국 사회와는 좀 맥락이 다른 면이 존재한다. 서유럽과 북유럽 국가의 노동자들이 주된 연구 집단인데 서유럽은 장시간 노동을 하는 사람들은 저임금 노동자보다는 전문직이나 고위직의 사람들이 성과를 높이고자 장시간 노동을 하는 경우가 더 많고, 근로 감독의 수준도 한국보다는 양호한 편이다). 또 근로기준법을 강화해서 장시간 노동을 금지하면 많은 일자리가 생길 수 있다는 보고서도 한국노동사회 연구소에서 발간되었다. 한국 사회의 장시간 노동은 저임금 체계, 부실한 근로감독 시스템과 맞물려 노동자들의 건강을 계속 위협하고 있다. 노동자들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는 장시간 노동·저임금 체계·제 역할을 못 하는 근로감독 체계가 맞물린 문제를 동시에 해결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이런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노동자를 비롯한 대중의 정치·사회적 요구와 투쟁이 시급하다.

 

근로기준법 중 노동시간과 관련한 조항
제50조(근로시간)
① 1주 간의 근로시간은 휴게시간을 제외하고 40시간을 초과할 수 없다.
② 1일의 근로시간은 휴게시간을 제외하고 8시간을 초과할 수 없다.
③ 제1항 및 제2항에 따른 근로시간을 산정함에 있어 작업을 위하여 근로자가 사용자의 지휘·감독 아래에 있는 대기시간 등은 근로시간으로 본다

제53조(연장 근로의 제한)
① 당사자 간에 합의하면 1주 간에 12시간을 한도로 제50조의 근로시간을 연장할 수 있다.
② 당사자 간에 합의하면 1주 간에 12시간을 한도로 제51조의 근로시간을 연장할 수 있고, 제52조제2호의 정산기간을 평균하여 1주 간에 12시간을 초과하지 아니하는 범위에서 제52조의 근로시간을 연장할 수 있다.
③ 사용자는 특별한 사정이 있으면 고용노동부장관의 인가와 근로자의 동의를 받아 제1항과 제2항의 근로시간을 연장할 수 있다. 다만, 사태가 급박하여 고용노동부장관의 인가를 받을 시간이 없는 경우에는 사후에 지체 없이 승인을 받아야 한다. <개정 2010.6.4.>
④ 고용노동부장관은 제3항에 따른 근로시간의 연장이 부적당하다고 인정하면 그 후 연장시간에 상당하는 휴게시간이나 휴일을 줄 것을 명할 수 있다.

제59조(근로시간 및 휴게시간의 특례)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사업에 대하여 사용자가 근로자대표와 서면 합의를 한 경우에는 제53조제1항에 따른 주(週) 12시간을 초과하여 연장근로를 하게 하거나 제54조에 따른 휴게시간을 변경할 수 있다.
1. 운수업, 물품 판매 및 보관업, 금융보험업
2. 영화 제작 및 흥행업, 통신업, 교육연구 및 조사 사업, 광고업
3. 의료 및 위생 사업, 접객업, 소각 및 청소업, 이용업
4. 그 밖에 공중의 편의 또는 업무의 특성상 필요한 경우로서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사업 

[노동시간에세이] 밤을 잊은 그대가 놓치고 있는 밝은 시간들 /2015.11

밤을 잊은 그대가 놓치고 있는 밝은 시간들

 

 

 

정하나 상임활동가, 노동시간센터 회원

 

 

 

심야 라디오와 함께 시작된 올빼미형 습관

 

수면패턴에 따라 흔히, 아침형 인간과 올빼미형 인간으로 나눈다. 나는 주로 올빼미형 인간으로 살아왔다. 더듬어보면 초등학교 때에는 깨우지 않아도 7시에 바로 일어나 아침 어린이 프로그램도 보고, 밥도 먹고, 씻고도 시간이 남아 심지어 아이 걸음으로 30분은 넘게 걸리는 학교까지 걸어가기까지 했던 거 같다. 생각해 보면, 라디오를 듣기 시작한 다음부터 올빼미스러움이 내 안에 배양되기 시작했던거 같다. 고등학교 시절, 이제는 고인이 된 신해철의 음악도시는 자정부터 새벽 2시까지 하던 프로그램이었는데 거의 매일 빼놓지 않고 듣고 잤던 기억이 있다. 종종 새벽 2시 음악도시가 끝난 후 ‘***의 영화음악을 듣고 3시에 잤다. 왜인지 모르게 컨디션이 좋은 날이나 다음날 학교 안 가는 토요일 같은 날에는 영화음악 프로그램이 끝나고 난 후 하는 밤을 잊은 그대에게라는 방송까지 들었다.

 

당시 대한민국 고등학생들이 모두 그랬듯, 9시 정식 1교시가 시작되기 전 아침 자율학습이 우리 학교에도 있었다. 아침 7시 반까지 등교를 해야 했는데 매일 새벽까지 라디오를 듣고 잠드니 아침에 일어나는 게 죽을 맛이었다. 다행히 고등학교는 집에서 뛰어가면 10분이면 주파할 수 있었다.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 아침 7시에 엄마의 등짝 스매싱을 맞고 일어나서 세수만 겨우 하고 교복 챙겨 입고 넘어질 듯 뛰며 겨우 등교했다. 학교에 가서도 정신이 차려질리 만무했고, 남들 다 긴장하고 공부하는 고3 때에도 나는 새벽 라디오 청취를 끊지 못해 2교시까지는 거의 비몽사몽 공부 포기 모드의 학생이었다.

 

유흥가에 접근성이 커진 성인이 된 후에는 말할 것도 없었다. 물론 아르바이트나 직장 생활을 시작하면서 출근 시간이 정해져 있고, 밤의 자유를 즐기는 것은 나름의 조절을 해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올빼미형 인간이라고 스스로 생각한다. 그 근거는 첫째, 전날 일찍 잔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아침에 일어나는 것은 힘들다는 것. 물론 (아직 젊다고는 해도) 20대 후반을 지나 30대를 지나면서 나도 몸이 아프지 않은 이상 예전처럼 하루 12시간씩 자거나 하지 않게 되고, 피곤해도 아침 8시면 눈이 떠지긴 한다. 그렇지만 아침은 늘 피곤한 시간이고 그리 생산적인 일을 할 수가 없다. 둘째, 하루 중 집중력이 제일 발휘되는 시간은 오후 3~4시 정도, 그리고 밤 10시 경이다. 읽히지 않던 자료, 안 써지던 글도 이 시간에는 속도가 휙휙 잘 나간다. 비교적 시간 활용이 자유롭던 대학원에 다니던 시절, 수면시간에 변화를 줘보면서 집중력 폭발시간을 바꿔보려고 해봤는데 결과는 별로 변화가 없었다. 고딩시절부터 단련한 올빼미 스타일이 이미 몸에 각인되었나 보다.

 

심야에만 운영하는 N버스 생긴 서울, 한 블로그에는 올빼미족들에게 심야버스 퇴근노선도를 제공하고 있다 (출처 : 한화생명 블로그)

 

노는 것도 밤이 편한 올빼미? 실은 시간이 없다

 

이런 몸이다 보니, 노는 것도 밤에 노는 게 좋다. 일없는 주말에 영화를 한 편 보려고 해도 4시 이후 저녁 타임 걸 예약하게 된다. 가격도 싼 조조할인도 있는데도, 영화는 날 밝을 때 보는 게 왠지 이상하다. 도리어 새벽에야 끝나는 심야영화를 선택하는 판이다. 하루 일과 중 을 하는 시간이 늦게 종료가 되는 탓도, 습관이 그렇게 배긴 탓도 있을 것이다.

 

사실, 나뿐 만 아니라 임노동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주 중에 여가를 갖기란 어려운 일이다. 최소한 퇴근 시간인 6시 이후부터야 가능하다. 9시 출근 전에 수영을 하러 다니거나 외국어 공부학원을 다니는 직장인 친구들을 본 적이 있긴 하지만, 대부분 1~2달 하다가 퇴근 시간 이후로 시간을 변경하였다. 하지만 퇴근 이후에도 그리 넉넉한 여가는 가질 수 없다. 출근 시간 지옥철부터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다 보면, 빨리 집에 들어가 드러눕고 싶은 마음이 더 많이 든다. 게다가 칼퇴근하는 날이 뭐 얼마나 많으랴. 체력의 잔여량 정도로나, 하루 중 남은 시간의 양으로나 그리 넉넉하지는 않을 것이다.

 

예전에 방송작가를 하던 지인이 이 일을 시작한 이래, 늘 피곤하고 시간이 없다라는 불평을 하는 걸 들었다. 시사라디오 방송의 대본작가였던 그녀는, 매일매일 새로운 대본을 써야 했다. 당일 방송 녹음이 끝나면 다음 날 아이템회의를 하면서 대본을 쓰고 퇴근 후 잠들기 전까지 계속 실시간으로 뉴스검색 등을 하면서 대본을 완성해 간다고 했다. 녹음과 회의를 마치면 반드시 방송국에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대본 초고를 잡아놓고 퇴근해 친구도 만나고 문화생활도 즐기긴 하지만 집에 들어가서 완성해야할 일이 있으니 언제나 여유가 없고 뒷 꼭지가 늘 당긴다는 것이었다. 그때 위로랍시고 나는 이런 말을 해주었다. “언니, 일반 직장인들 대부분이 그렇긴 해요. 다음날 출근이 부담스러워서 주중에 약속을 잘 안 잡더라고요.” 물론 그녀에게 전혀 위로가 안 되었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소중한 밝은 시간의 여유

 

아무리 내가 올빼미이다 손, 요즘 같이 하늘이 높고맑은 날이 많은 이 계절을 이렇듯 스치듯 나가야 하는 게 아쉽다. 나뭇잎의 색깔이 변해가고, 그것이 파란 하늘과 콜라보레이션되어 함께 그려내는 운치는 해 떠 있는 시간에야 감상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풍경이 그려내는 시간의 의미를 음미할 시간이 출근 시간 45분 남짓에 불과하다는 게 슬프다. 물론, 사회단체는 일반 기업처럼 엄격한 출퇴근 근태관리가 없으니 커피 한잔을 사서 가느라 늦게 간다 해도 크게 염려할 게 없긴 하다. 그래도 아쉬우면 사무실 옥상에 괜히 더 자주 나가 허리도 펼 겸 가을 공기를 마신다. 건물 앞쪽에서 예쁘게 물들어가는 관악산이 훤하게 보이지만 아쉽게도 옥상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물론, 사무실 안쪽에 있는 큰 유리창으로는 관악산이 훤히 보이긴 하지만, 정작 실내에 있을 땐 창문 쪽으로 고개를 잘 안 들게 된다.

 

그리고 퇴근길에는 시간이 좀 늦었더라도 생각나는 친구에게 전화한다. 언제 만나자거나 특별히 상의할게 있다거나 하는, 그런 전화는 아니다. 그야말로 안부 전화. 약속을 잡아 실제로 면대면으로 보는 건 좀 미루게 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 지금 바로 생각날 때 전화라도 안 하면 점점 더 관계가 소원해질 거 같아 안부로 마음을 전한다. 평일이든, 주말이든 관계에 공들이는 시간이나 에너지가 넉넉지 않으니 이렇게라도 한다.

 

하는 활동이 노동안전보건이다 보니, 장시간노동과 심야노동이 건강에 끼치는 악영향을 많이 알게 된다. 생체리듬을 교란하고 수면장애를 유발한다, 오래 앉아 있으면 뇌심혈관계 질환 발생률을 높인다, 과로사의 원인이 된다, 면역력을 떨어뜨린다는 얘기들이다. 국제암연구소(IARC)가 야간노동을 암을 유발할 가능성이 있는 유해요인’(Group 2A)으로 분류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런 과학적인이야기를 마치 증명이라 하듯, 내 몸이 이미 변해가는 것을 본다. 성인이 된 후 알게된 심야까지 이어지는유흥과 공부, 노동은 무엇보다 먼저, 야식습관을 일상화했고 살이 어마어마하게 쪘다. 수면이 부족하고 스트레스가 없으면 코티솔 (코티솔은 혈액 속 지방과 당 수치를 일시적으로 높이기 때문에 코티솔 수치가 높은 상태가 지속되면 비만, 고혈압, 당뇨, 피로, 우울증, 기분저하 등이 생길 수 있다고 한다.)이라는 호르몬이 과다 분비되고, 비만하게 된 다더니 내가 딱 그렇구나 하고 몸소 보여주고 있다. 감기 따위 잘 걸리지 않았는데, 요즘 보면 1년에 한 두 번은 꼭 감기몸살을 앓고 지나간다. 면역력이 확실히 떨어진 것이다. 확실히 나이도 좀 더 들었지만 면역력을 보강할 다른 방도를 취하지 않았으니, 계속 이런 식이면 더 안 좋아질지도 모른다.

 

인생이 하나 쥐면 하나 놓아주는 것이라 그런가. 올빼미형 인간이 밤을 쥐고, 낮을 놓아주며잃고 놓치고 있는 것이 있다. 특히나 건강영향은 인류로 태어난 이상 누구든 피해가기 어렵다. 올빼미로 살기로 그렇게 태어난 것인지, 아니면 여러 사회 구조적 맥락 속에서 그리 택해진 것인지부터 잘 따져봐야 할 노릇이다. 어느새 놓치고 있는 풍경과 관계, 잃어버린 몸과 정신의 건강 중에서 내가 붙잡고 싶었던 것은 없었는지부터 살펴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 같다. 여전히 나는 올빼미처럼 해가 뉘엿한 시간부터 에너지가 더 나는 사람일 수 있겠지만, ‘올빼미로만 살고 싶지는 않다. 아침형 인간으로 개조할 필요도 능력도 없긴 하지만, 날 밝은 시간에 가질 수 있는 삶의 소중함도 느끼고 싶기 때문이다.

 

 

[노동시간에세이] 헬조선에 부는 '공정해고' 바람 /2015.10

헬조선에 부는 '공정해고' 바람



전주희 한노보연 노동시간센터 회원, 수유너머N회원



"이제는 우리의 딸과 아들을 위해서, 국가의 미래를 위해서 결단을 내릴 때가 되었다."

지난 8월 6일 박근혜 대통령의 다짐이다. 한 달이 조금 더 지나고 노사정위는 <노동시장 구조개선을 위한 사회적 대타협>을 이뤄냈다고 발표했다. 이 합의안의 백미는 무엇보다 '일반해고'의 도입이다. 계약과 계약해지가 일상이 된 불안정노동자들에게는 별 관심을 못 끄는 '일반해고'는 과연 철밥통 정규직들만을 정조준하고 있는 것일까? 계약기간과 무관하게 저성과자가 되면 언제든 퇴출할 수 있다는 것은 계약과 계약해지라는 제도적 약속마저 무화시킨다. 퇴출이란 쌍방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을 가진 자의 명령권이다. 따라서 이번 노사정합의는 IMF로 시작된 노동에 대한 집요한 공격이 마침내 정점을 찍은 모양새다.


헬조선의 딸과 아들

대통령이 결단하고 실천할 때마다 재앙이 되는 이 나라를 두고 언젠가부터 '헬(hell=지옥) 조선'이라는 신조어가 유행이다. 한국사회는 가난이 대물림 되어 역병처럼 퍼져나가는 조선으로 퇴행 중이다. 헬조선은 좀처럼 벗어나기 힘든 무형의 족쇄와 굴레의 촘촘한 망에 청년들을 가두는 감옥 사회다. 이러한 상황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결단은 "우리의 딸과 아들을 위한" 것이라고 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들을 대신해 결단을 내린 것이다.


이는 얼마 전 상영한 <국제시장>에서 주인공 덕수(황정민)의 대사를 떠올리게 한다. "내는 생각한다. 힘든 세월에 태어나가 이 힘든 세상 풍파를 우리 자식이 아니라 우리가 겪은 게 참 다행이라꼬." 덕수의 가슴 벅찬 헌신과 선한 호의에는 오만한 비수가 숨겨져 있다. '내가 이 나라를 일으켜 세웠다'는 독기 가득한 독단 말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부부싸움을 하다가도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느라 왼쪽 가슴에 오른 손이 자동으로 올라가던' 시대를 추켜 세웠을 때, 그것은 아버지 시대에 대해 딸이 가질 수 있는 존중의 감성이 아니었다. 그녀는 한 번도 아버지의 딸인 적이 없었다. 언제나 나라를 일으켜 세운 아버지였고, 국가였다. 그래서 박근혜 대통령은 무능력한 딸과 아들들을 대신해 결단한다. '국가의 이름으로'


한 번도 국가의 미래를 젊은 세대들에게 맡긴 적이 없으므로, 그들에게 국가의 미래를 넘기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건국신화는 아버지 세대의 몫이다. 파독 광부로, 베트남 전사로, 사우디 수출 역군으로 세운 한국은 그들이 수출한 청춘에 대한 보상물이 된 지 오래다. 그들의 딸 아들은 아버지의 국가에서 시민이 될 자격이 없다. 박근혜 대통령이 국가의 미래를 위해, 딸 아들을 대신해 결단을 내리면 내릴수록 그들은 무능력하고 패기 없는 조국의 루저들이 된다. 



한 게임 유저가 그린‘헬조선 지옥불반도’지도 [출처: www. inven.co.kr]


헬조선은 자신들을 그렇게 만든 '아버지=국가'에 대한 조롱이다. 국가로부터 배제되었지만 청년세대들은 허리띠를 졸라매고,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사랑'을 맹세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배제된 장소에서 오늘날 한국사회가 그려내는 지옥도를 증언하고 있는 셈이다. 냉소와 조롱으로 뒤범벅되어 있지만 그 이면에는 국가에 대한 분노가 자리한다.


괴로우나 괴로우나 나라사랑?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은 다시 아들, 딸들을 국가로 호출했다. 청년들의 일자리를 위해 기득권을 챙기던 아버지들을 정리하겠다고 나섰다. 임금피크제를 도입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채 밥만 축내고 있는 무능력한 아버지들을 정리하겠다고 했다. "노동개혁의 목표는 청년들의 능력에 맞는 일자리를 보다 쉽게 구하고 더 많은 청년들이 정규직으로 채용될 수 있는 공정하고 유연한 노동시장을 만드는 것이다." "임금피크제와 공정해고에 대한 해결 없이는 불가능하다." - 9월 7일 새누리당 최고위원회회의, 김무성 대표의 발언 중


박근혜 대통령이 말하는 국가에 청년의 자리는 없다. 더불어 아버지의 자리도 사라지고 있다. 그들은 국가에서 추방되어 헬조선의 난민이 되고 있다. 그렇다면 박근혜 대통령이 말하는 국가에는 대체 누가 있는가. 누구를 위하여 대통령은 입술을 앙다물며 다짐을 했을까? 그것은 바로 국가 자신이다. OECD 회원국으로서의 국가, 수출 대국으로서의 국가, 경제 대국으로서의 국가. 화폐가 24시간 막힘없이 흐를 수 있는 국가 말이다. 


화폐가 흐르는 자리에 아버지의 장시간 노동이 있었고, 청년세대들의 '노오력'이 있다. 아무리 노력해도, 허리띠를 졸라매도 즐거운 나라사랑은 불가능하다. 노오력은 '괴로우나 괴로우나 나라사랑'하라는 국가의 명령이다. 헬조선 사이트 대문에는 태극기와 함께 이 문구가 박혀있다. '각자도생'이란 각자 노력해서 살아남으라는 뜻이 아니다. 오늘날 유행어가 된 '각자도생'에는 각자 살아남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밟고 일어서라는 폭력이 포함된다. 여성혐오와 이주노동자에 대한 혐오, 동성애자 혐오, 세월호 유족들에 대한 혐오가 일어나는 이유다. 


박근혜 대통령은 '무능력한 꼰대'라는 새로운 기준을 마련했다. 공정한 기준이란 기준에 대한 합리적인 척도를 마련한다는 뜻도 있지만, 기준선의 이하를 처리하겠다는 의도가 숨겨져있다. 그리고 이는 종종 현실에서 역전된다. 공정한 해고의 기준이란 특정한 집단을 기준선 이하의 사람들로 지목하고, 여론은 이들을 주목한다. 이들의 무능력함은 불공정한 무임승차의 파렴치함이 되어 대중들의 분노를 산다. 그렇게 되면 공정한 기준에 따라 기준선 이하의 사람들을 '처리'하는 것에 대해 공감대가 형성된다. 다시 말해 공정한 기준 다음에 기준선의 위와 아래가 분할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집단들에 대한 분노와 혐오가 공정한 기준의 정당성을 입증한다. 


고용노동부에서 만든 노동개혁 영상을 비판한 포스터 [출처: 공공운수서울지하철노조 / 5678 도시철도노조]


박근혜식 평등주의, 그 잔혹함

임금피크제를 도입해 청년들의 일자리를 확보하겠다는 것이 말도 안 되는 말인 줄 알면서도 그들, 나와는 다른 그들의 '기득권'은 불공정하다는 정서를 박근혜 정부는 간파했다. 노사정합의까지 박근혜 정부가 집요하게 공격한 것은 '무능력하지만 시대 잘 만나 밥만 축내고 있는 꼰대들'에 대한 불만이었고, 이 최전선에 국가의 아들, 딸들을 불러낸 것이다. 


영화 <국제시장>을 찬양하던 대통령은 이제 헬조선의 딸과 아들이 들고 있는 죽창으로, 오늘의 새로운 적으로 지목된 무능력한 노동자들을 겨누고 있다(헬조선 사이트 대문에는 '죽창 앞에 모두가 평등하다'는 구호가 박혀있다). 대통령이 감복한 것은 국기에 대한 경례를 했던 덕수와 덕수의 처가 아니라, 국가 그 자체였던 것이다. 


이렇게 박근혜 대통령은 국가 앞에 모두가 평등하다는 것을 다시금 입증했다. 세월호와 메르스 사태 때 국가는 사건의 피해자였던 세월호 유족들과 메르스 감염자들을 사회의 질서를 헤치는 가해자로 역전시켰다. 보상금을 타 먹으려는 불공정한 사람들, 안전한 사회를 위협하는 '슈퍼전파자들'이 된 피해자들은 비난과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각자도생하기 위해 서로가 서로에게 가해자라는 낙인을 찍는 게임의 법칙 앞에 정작 국가는 제외된다. 


박근혜 정부의 평등주의는 잔혹하다. '공정해고'라는 말은 잔혹한 진실을 보여준다. 나도 정규직이 되고 싶다는 열망의 불가능함이 너도 나처럼 같이 잘려야 공정하다는 자기 파괴적 욕망으로 전화되고 있다. 노동시장 양극화를 해소하는 방법은 격차를 줄이는 방법도 있지만, 한쪽의 극을 없애는 길도 있다. 정규직은 시대에 뒤처진 공룡으로, 모두의 어깨에 짊어질 짐으로, 염치없는 기득권을 지닌 특수한 인종이 되었다. 공정해고는 그 극을 없앨 것이므로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은 더욱 기우뚱해졌다. 기울어진 운동장의 귀퉁이에 헬조선이 모두를 향해 평등하게 입 벌리고 있다. 

한 줄 요약 헬조선 한국

[노동시간에세이] '나인 투 나인 9 to 9'의 사회 - 일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 /2015.9

‘나인 투 나인 9 to 9’의 사회 일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

 

 

신경아 노동시간센터 회원,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

 

 

 

인간은 하루에 몇 시간 일하는 것이 가장 좋을까? 이 질문에 대한 여러분의 답변은 무엇일까? 내 상상엔 이렇게들 답할 것 같다.

 

초등학생 : “하루 종일 열심히 일한다.”
중학생 : “일하기 싫다.”
고등학생 : “글쎄 안 하면 좋겠지만, 조금만 하고 놀고 싶다.”
대학생 : “나도 일할 수 있을까?”
취업준비생 : “일만 하게 해준다면 24시간 한다.”
직장인 : “퇴근이라도 정해진 시간에 하면 소원이 없겠다.”

 

이 질문은 그리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미 수 세기 전 ‘노동’에 관심을 가졌던 사상가들은 이 문제에 대해 거의 일치된 답변을 했다. 태양의 도시』의 저자인 16세기 사상가 캄파넬라는 인간에게 적당한 노동시간은 하루 5시간 노동이라고 썼다. 15세기 철학자·정치가이자 신학자였던 토마스 모어는 『유토피아』에서 인간에게 적당한 노동은 오전 3시간과 오후 3시간, 합해서 하루 6시간 노동이라고 보았다. 당신은 하루에 몇 시간 일하고 싶은가? 그리고 실제로 몇 시간 일하는가? 시간제 근무자가 아니라면 대부분 하루 8시간 이상, 10시간에서 12시간 일하지 않을까? 물론 그 이상 일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내가 최근 인터뷰한 여러 기업에서 실제 근무시간은 ‘나인 투 나인(9 to 9)', 아침 9시부터 저녁 9시까지 12시간이 가장 많았다. 하루 중 깨어 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일하는 데 바치는 셈이다.‘나인 투 나인’이 왜 나쁜가? 열심히 오래 일해서 승진하고 월급도 많아져 아파트 평수를 늘리고 낡은 차도 바꾸면 좋은 삶이 아닌가? 그럴 수도 있겠다. 허나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 긴 시간 노동으로 잃어버리는 것은 없을까? 건강, 가족과의 저녁식사, 아이들의 웃음소리, 친구, 영화, 산책, 운동, 여행, 늦은 밤 스탠드 불빛 아래서 책 읽기, 광화문 집회 가기... 생각해 보니 잃어버린 것이 너무 많은 것 같다.

 

노동의식의 역사

 

인간의 역사에서 ‘노동’이 오늘날처럼 사랑을 받게 된 것은 불과 2~3백 년에 지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본주의 시대의 도래’ 이후부터다. 그 이전에는 어땠을까? 기독교 신화에 따르면. 신이 인간에게 내려준 낙원, 에덴동산에서 인간은 아무 일 하지 않아도 행복하게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신의 노여움을  사 에덴에서 쫓겨나게 된 아담과 이브는 “땀 흘리는 수고를 하지 않고는 먹을 수 없으리라”는 저주의 메시지를 받는다. 이처럼 서구인들의 의식을 지배하는 기독교 사상에서 노동은 신의 처벌이었다. 중세시대까지 서구에서 노동은 사회적 하층계급의 의무였다. 노동은 안 하면 안 할수록 좋은 것이었다. 오죽하면 중세의 귀족들이 글씨 못 쓰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고 글씨를 쓰느라 모양이 망가진 손을 가진 이를 경멸했을까. 생계를 위해 글씨를 써야했던 사람들은 낮은 계급이었기 때문이다. 노동의 의무에서 자유로운 자. 그들이야말로 선택받은 계급이었다.

 

동양도 마찬가지다. 조선시대 양반 남성들은 농사나 수공업에서 면제되었고 글을 읽을 자유와 책임이 주어졌다. 노동은 노비와 농민, 여성의 몫이었다. 한 예로, 『구운몽』, 『사씨남정기』의 저자 서포 김만중은 양반 가문이었지만 벼슬을 그만둔 아버지를 대신해 어머니의 바느질로 가족의 생계를 꾸렸다. 과거에 급제한 양반들은 관직을 얻어 가족을 부양할 수 있었지만, 대다수의 양반계급 남성들은 과거 준비를 하며 일생을 보냈고 먹고 살기 위한 농사와 길쌈, 수공업은 농민과 여성과 수공업자 그리고 노비들이 수행했다.

 

노동이 모든 사람들의 의무이자 권리가 된 것은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서이다. 잘 알려진 대로, 서구의 프로테스탄트혁명을 거치며 직업은 신이 내려준 소명(calling)이 되었고 부(富)는 근면의 표식으로 신의 선택을 예고하는 기호(a sign)가 되었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구호는 고아나 가난뱅이, 알콜 중독자들을 가둬 강제노동을 시키는 구빈원(救貧院)에서부터 사회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사람들은 노동자가 될 권리를 부여받으며 노동자가 될 의무를 지게 되었다.

 

우리 안의 일중독 DNA, 다른 욕구를 억압한다

 

한국인들은 오래 일한다. 세 가지 의미에서 그렇다. 휴가가 적어 연간 노동일수가 많고 1일 노동시간도 길다. 또 노동을 그만두는 시점, 최종 은퇴연령도 높다. 지난 세기말 유럽에서는 노동자들의 퇴직 연령을 높여 연금 수급시점을 늦추려는 법안이 통과 되면서 노조를 중심으로 강한 저항이 있었던 데 비해, 한국에서는 노동자들 스스로 퇴직을 늦추고 싶어 한다. 70살까지는 일하고 싶다는 것이 내가 만나본 중고령 노동자들의 희망이었다.

 

한국인들이 장시간 노동지향의 DNA를 갖게 된 것은 20세기 산업화의 산물이다.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압축적 성장기를 거치면서 한국인들은 언제까지가 될지 모르는 길고 긴 레이스에서 쉼 없이 뛰고 또 뛰었다. 그 결과 식민지와 전쟁을 경험한 빈곤국에서 아시아의 용(龍)이 되었고 세계적인 대기업도 몇 개 등장했다. 인터뷰하며 만난 많은 노동자들이 일하는 시간이 길고 늘 피곤하며, 가족과 함께하거나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그들 중 노동시간을 줄이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임금이나 승진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노동시간을 줄이는 데 찬성하는 사람보다는 반대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사실 노동시간을 줄이면 남는 시간에 무엇을 할지도 걱정스럽다. 얼마 전 노르웨이에서 만난 한 여교사는 자신들은 오후 4시면 퇴근해 집으로 간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순간 궁금했다. ‘4시에 퇴근해서 뭘 하지?’ 반대로 그녀는 한국에서는 7~8시에 퇴근한다는 나의 말(더 늦게 퇴근하는 곳도 많지만 말하기가 창피했다)을 듣고 물었다. “그 시간까지 회사에서 뭘 하나?” 일과 가족을 양립하기 위해 노동시간을 줄이고 부모휴가 등 가족돌봄 시간을 넉넉히 준다는 스웨덴과 핀란드, 노르웨이에서 내 눈에 띄었던 것은 수많은 공원, 산책 나온 아이들과 부모들, 집에서 즐길 수 있는 여러 놀잇감이었다. 더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은 시민들이 참여하는 수많은 결사체들이었다. 스웨덴에서는 은퇴한 노인들도 서너 개의 사회적·정치적 모임에 소속해 있으며 토론과 정치참여를 위한 활동에 적극적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웨덴을 비롯한 EU 국가들에서 실시된 여론조사를 보면, 사회적 참여를 위한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은 것으로 나타난다.

 

몇 해 전 서울시민을 대상으로 EU와 같은 설문조사를 했는데, ‘노동시간이 너무 길고 가족생활시간이 부족하다’는 응답은 많았지만, ‘사회 참여를 위한 시간이 부족하다’는 응답은 매우 적었다. 사회 참여에 대한 욕구 자체가 형성되기 어려운 조건에 있기 때문이다. 기본적인 휴식과 가족생활조차 영위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사회적 관심을 가지고 정치적 활동에 관여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기가 힘들 것이다. 너무 긴 노동시간은 인간의 내면에서 다양한 욕구가 형성되는 것을 막는다.

 

짧아진 노동시간이 가져다 준 삶의 변화

 

노동시간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후 나는 남성노동자들의 삶에 대한 연구를 수행해 왔다. 산업화 시대를 살아온 남성들의 구술 생애사를 통해 한국사회의 남성들이 어떻게 일중심적인 삶을 살게 되었고 그것이 한국의 남성성과 가족, 젠더관계에 가져온 변화는 어떤 것인지 살펴보려는 목적에서였다. 그때 인터뷰한 내용을 잠시 소개한다.

 

Q. (과거에) 선생님은 일요일 날 쉬실 때에 보통 뭐하셨습니까?

박영수(가명) : 쉴 때 그때는 주로 자는 경우가 많았었어요... 그 전에는 주로 잠을 많이 잤어요. 피곤하니까... 주야간 하고 오면. 그것도 야근, 며칠씩 일주일 내내 야근할 때가 있어요. 그리되면 그 다음 일요일 날은 꼼짝을 못해요. 그냥 하루 죙-일 잤어요.

 

Q. 직장을 바꾸신 후, 좋은 점이랄까요, 그런 게 있으십니까?

박영수(가명) : 시간이 많아서 좋아요. 내가 책을 볼수도 있고, 운동을 할 수도 있고, 시간이 많아서 좋아요. 금요일 날 5일 근무인데도, 우리는 한 십 년전부터 5일 근무를 했어요. 저는 금요일 한, 세시 되면 와요, 집에. 한가하니까. 그 대신 그 전에 일은 다해놓고 오죠. 시간이 많은 게 제일 좋아요. 근데 저 사람(부인) 같은 경우 토요일 오전근무까지 하거든요. 그러니까 저하고 시간이 안 맞아요. 어딜 갈라면 금요일 날 오후에 가면 딱 좋은데, 그럼 한 이삼일 쉬잖아요. 저 사람은 토요일 날 오전까지 근무를 하니까 오후 돼야 시간이 나거든요. 저 는 시간이 많은 게 제일 좋아요. 책도 볼 수 있고 밭에 정원에 쑥도 캘 수 있고, 나물도 있으니까. 가을 같은 때 밤도 딸 수 있고. 그게 한 가지가 제일 좋아요.

 

일요일만 되면 피곤에 지친 몸을 누이고 밀린 잠을자는 일상과, 주 5일제 근무로 책을 읽고 운동하고 들로 나가는 삶에 대한 진술은 한 사람의 이야기이지만 매우 다른 정서를 담고 있다. 때로 일주일 내내 야근을 해야 하는 지치고 피곤한 모습과 금요일 오후부터 주말을 쉬는 덕분에 책도 읽고 자연도 즐기는 서정적인 인간의 모습, 두 가지 이야기가 담겨있다. 인터뷰에 응한 박영수 씨는 "시간이 많은 게 제일 좋다"고 되풀이했다. 일에서 벗어난 ‘시간’이 자기 삶에서 어떤 다른 의미를 갖는지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일중독’은 일이 곧 자아의 중심이며 일 이외의 다른 삶은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상태, 일이 없어지면 자신의 삶도 끝난다고 느끼는 의식상의 특징을 말한다. 1960년대 박정희 정부는 산업화 역군이라는 이름 아래 일중독을 보편적 정서로 만들었다. 50여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여전히 일중독은 좋은 삶이라는 20세기적 신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500여 년전 토마스 모어나 캄파넬라는 어떻게 5~6 시간 노동을 주장했을까? 생산과 배분이 적절히 통제되는 사회에서는 부의 지나친 불균형을 막을 수 있고 덕분에 사람들은 너무 오래 일하지 않아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노동시간은 사회적 불평등과 깊은 관련이 있다. 우리 속의 일중독 DNA가 지워지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우리 사회의 불평등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노동시간 단축요구는 한국사회의 불평등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함께 가야 한다.

[노동시간에세이] 영화 <인타임>과 비슷한 우리네 자화상 /2015.8

영화 <인타임>과 비슷한 우리네 자화상



김영선 노동시간센터(준) 회원


우리는 자주 "시간이 없다"고 되뇌곤 한다. 시간 빈곤, 시간 기근, 시간 박탈, 시간 소외, 시간 강박 등. 그것을 무엇이라 표현하든 핵심은 절대적인 시간 부족에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시간이 부족할까? 이에 대한 여러 가지 설명이 있을 텐데, 이번엔 영화에서 설명을 찾아보자. 영화를 보면 가끔은 정말 그런 거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영화 속 가상세계가 우리의 현실을 진짜보다 더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영화의 초 현실이 꼭 비현실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말을 실감 나게 하는 영화가 있다. 


영화 <매트릭스>를 만들었던 워쇼스키 남매의 신작 <주피터 어센딩>은 상당히 섬뜩한 영화다. 세계적인 감독의 작품에 배두나가 비중 있는 역할로 출연한다며 한국에서는 그녀의 출연분을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뚜껑을 열어보니 대사도 거의 없고 존재감이 미미한 배역에 그쳤다. 전체적으로 평점도 높지 않았고 관객도 많지 않았다. 다른 건 그렇다 하더라도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영화에서 우주의 모든 행성은 여러 왕족이 지배하고 있다. 그 가운데 아브라삭스 왕족의 권력이 가장 막강하다. 지구 또한 아브라삭스 왕족이 지배하는 농장 가운데 하나다. 지구의 인간들은 '농장의 수확물'로 그려진다. 아브라삭스 왕족은 우주 행성들을 지배하면서 거기서 나오는 수확물을 에너지 삼아 영원을 구가한다. 여기서 핵심은 '시간'인데 시간 에너지는 수확물인 인간 생체에서 추출한 것이다. 아브라삭스 왕족은 인간 100명의 목숨이 담겨 있는 유리병을 이용한다. 유리병에 담긴 시간 에너지로 몇 번이고 세포를 교체하면서 10만 년을 살아간다. 이는 <매트릭스>에서 인체를 기계에 필요한 '배터리'에 비유했던 장면과 닮았다. 


영화 <주피터 어센딩>은 말미까지도 흐름이 다소 산만하고 늘어지기는 하지만 마지막 장면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외계 왕족의 인간 수탈이라는 이야기를 자본의 노동 착취라는 관점에서 읽는다면 메시지는 더욱 명쾌해진다. 왕족은 자본을, 아브라삭스 왕족은 독점자본을, 행성은 공장을, 왕족들의 행성 쟁탈전은 자본들의 경쟁을, 지구의 인간은 노동자를, 수확된 인체는 잉여와 축적을, 유리병에 담긴 인체 에너지는 착취의 결과물을 상징한다. 우리의 시간 빈곤의 이유가 이런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면 섬뜩할 정도다.


모든 비용을 시간으로 차감하는 세계


▲  시간을 소재로 한 영화 <인타임>


시간을 소재로 다룬 영화들은 꽤 많다. 대부분은 시간 여행을 소재로 다룬다. 기억에 선명한 <백 투 더 퓨쳐>부터 최근작 <어바웃 타임>이나 <타임 패러독스>, <엣지 오브 투모로우>까지. 그런 걸 보면 시간 여행을 통해 과거와 미래를 바꾸고 싶은 욕망은 보편적인가 보다.이외에 산업화의 문제점을 누구보다 재치있게 그려낸 찰리 채플린의 <모던타임즈>도 있다. 나이를 역행하는 한 남자의 순애보를 연대기적인 구성으로 그려낸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도 있다. 이 영화 또한 많은 사람이 회자하는 시간에 관한 영화일 것이다. 상상력 넘치는 여러 영화 가운데 <인타임>은 시간 그 자체라 생명인 가상 세계를 그려낸 영화다. 그야말로 획기적인 영화이고, 여러 면에서 다시 볼만하다.


<인타임>의 핵심 역시 '시간'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시간에 대한 착취, 불평등한 시간의 분배가 핵심이다. 시나리오상 사람들은 25세가 되면 노화를 멈추고 왼쪽 팔뚝에 새겨진 '카운트 바디 시계'에 1년을 제공 받는다. 팔뚝에는 년, 주, 일, 시, 분, 초 단위로 남은 시간이 표시된다. 이 시간으로 음식을 사고, 버스를 타고, 집세를 낸다. 이를테면, 커피 1잔은 4분, 버스 요금은 2시간, 권총 1정은 3년, 스포츠카 1대는 59년의 시간으로 구매할 수 있다. 시간(생명)과 재화의 교환은 전자화폐와 같은 역할을 한다. 모든 비용은 자신의 시간으로 차감된다. 마이너스는 없다. 시간을 나타내는 숫자 13자리가 0이 되는 순간 그 사람은 즉시 사망한다. 시간을 다 쓴다는 것은 생명이 다함을 의미한다. 영화는 이렇게 모든 비용이 시간으로 계산되는 가상의 미래 사회를 표현하고 있다.


한 장면을 보자. 주인공의 엄마 역 올리비아 와일 드는 은행에서 버스요금(1시간)과 약간의 여유 시간을 남겨 두고 밀린 이틀 치의 대출금을 갚는다. 집으로 가기 위해 버스에 오르려는데 버스 기사는 버스 요금이 올라서 2시간을 내야 탈 수 있다고 한다. 1시간 30분밖에 없었던 그녀는 '30분이 부족해' 버스를 탈 수 없었다. 그녀는 결국 2시간 거리를 필사적으로 뛰어야 했다. 그래야 일당을 받은 아들 저스틴 팀버레이크가 기다리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죽을힘을 다해 뛰었지만, 아들을 몇 미터 앞에 두고 시간을 다 써버린 그녀는 생을 마감하고 만다. 시간이 생명 자체이기 때문에 시간 낭비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더군다나 매일매일 노동을 해도 시간이 빠듯하게 주어지니 항상 시간 부족인 사람들은 부산스럽고 걸음걸이는 빠를 수 밖에 없다. '시간이 생명인 세계'를 보여주는 <인타임>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간 낭비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재치 있게 그린다.


데이톤 사람의 모습은 우리네 자화상 


▲ 타임푸어란


<인타임>은 시간이 불평등하게 분배되는 양상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데이톤'이라 불리는 구역의 사람들은 고작해야 하루 이틀 치의 시간(생명)을 가지고 살아간다. 일종의 시간 빈곤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표상한다. 남자 주인공인 윌 살라스(저스틴 팀버레이크)는 데이톤 출신이다. 


이에 반해 '뉴 그리니치'라 불리는 구역의 사람들은 몇백 년, 몇천 년에 해당하는 시간을 가지고 살아간다. 일종의 '시간을 독점한 사람들'인 셈이다. 여자 주인공 실비아 와이스(아만다 사이프리드)는 뉴 그리니치 출신이다. 예상할 수 있듯이 데이톤의 일상적 풍경과 뉴그리니치의 그것은 많이 다르다. 


의식주를 비롯한 모든 것을 시간의 소비로 해결해야 하는 상황. 이런 처지에서 데이톤 사람들은 시간을 벌기 위해 매일 노동에 시달려야 한다. 벌어도 벌어도 시간 부족에 허덕인다. 데이톤 사람들에게 매일의 고된 노동은 '생명 연장을 위한 최후의 수단'이라고 표현하는 게 적절할 것이다. 이들에게 쉼과 여유란 고려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데이톤 출신인 윌 살라스가 뉴 그리니치 지역으로 넘어가 어느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는 장면이 나온다. 윌 살라스가 식당에 들어서면서부터 식사 하는 내내 레스토랑에 있던 사람들은 그를 힐끗힐끗 쳐다본다. 윌이 잘 생겼기 때문도 아니고 그가 주인공이기 때문에 쳐다보는 것도 아니다. 걷는 속도나 먹는 속도가 이상하리만치 빨랐기 때문이다. 시간이 넘쳐나는 뉴 그리니치 사람들에게 바쁨과 서두름이란 굉장히 낯선 것이었다.


타임푸어의 세계에서 '시간 권리'란

쉼과 여유 부리기가 불가능한 데이톤 사람들! 그것은 영화 속 가상세계의 이야기가 아니라 장시간 노동에 휩싸인 우리네 삶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듯하다. 지하철에서 빠른 걸음으로 달리듯 걷는 사람들. 뛰면서도 스마트폰으로 가장 빠른 환승 칸을 찾는 사람들. "지난 석 달 중 한번 쉰 게 고작"이라고 하소연하는 사람들. 느릿느릿 가는 자동차를 보면 숨 막혀 하는 사람들. 신호대기에서 조금이라도 늦게 출발이라도 하면 경적을 울려대는 사람들. 이런 모습은 수도 없이 많고 흔하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모두 시간에 쫓기는 사람들이다. 시간 박탈, 시간 빈곤, 시간 기근, 시간 압박, 시간 강박 등 어떠한 것으로 표현해도 핵심은 여유 시간의 부족에 있다. 시간이 빈곤한 세계에서 주체적인 시간을 어떻게 확보할까? 이를 위한 시간 권리란 가능한 것일까? 


정말 가능한 문제설정일까? <주피터 어센딩>이나 <인타임>은 이것이 애초부터 불가능한 문제설정이라고 말한다. 영화가 보여주듯 시간 빈곤의 세계에서 자유시간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모든 것들은 허구에 불과하다. 자유시간이 가능한 세계, 그것은 비현실이다. 아브라삭스 가문이 지배하는 착취 시스템을 해체하지 못하는 한 그렇다는 말이다. 두 영화의 결말은 나름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인타임>의 윌은 '시간 은행'을 폭파해 그곳에 꼭꼭 쌓아 둔 수억 년의 시간-생명을 데이톤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다. 그들의 노동 시간 차이와는 별개로 말이다. <주피터 어센딩>의 주인공은 시간 착취의 근원인 아브라삭스 가문을 처단한다. 물론 두 영화의 초현실적인 결말은 작금의 현실과는 판이하다.

[노동시간에세이] 일상이 '일'로만 채워진다면 /2015.7

일상이 '일'로만 채워진다면

 

 

김세은 노동시간센터(준), 직업환경의학 전문의

 

 

3년 전인가, 한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됐다. 어쩌다 보니 마무리 단계 작업이 내게 몰렸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분명히 나 혼자 하기에는 벅찬 작업이었다. 결국 그 일은 내게 떨어졌고 혼자서 마무리를 감당했다. 기한이 촉박하게 정해졌던 일이라, 아침에 출근해 새벽 2~3시에 퇴근하는 생활을 며칠간 지속했다.

 

그 기간 동안, 집에 가서는 정말 최소한의 잠만 자고 다시 출근했다. 생애 처음으로(!) 식욕 저하를 겪으며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지냈다. 몸은 피곤했지만 밤늦게 누워도 쉬이 잠이 오지 않았다.

 

주말을 포함해 며칠간, 나는 '그 일'을 하는 것 외에는 다른 일을 전혀 할 수 없었다. 그 상황을 피해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도 있었다. 괴로운 나날들이었다. 내 마음을 살필 여유 따위는 없었다. 지금까지도 그 날의 순간들이 여전히 마음에 남아 있는 것은 한 가지 강렬한 기억 때문이다.

 

그 시기의 어느 날 새벽 퇴근길, 병원을 나와 택시를 잡기 위해 도로변을 향해 걷고 있을 때였다. 30m 정도의 거리를 그저 걸어가고 있을 뿐이었는데, 갑자기 숨이 턱 막혔다(물론 실제로 숨이 막힌 것은 아니었지만 처음 겪어본, 숨이 막힐 듯한 느낌이었다). 심장이 갑자기 멈춰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 순간, 과로사 하는 사람들이 사망하기 전 어떤 상태일지 짐작할 수 있었고, 건강에 별다른 문제가 없더라도 계속 이렇게 살다가는 나도 갑자기 죽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별 탈 없이 그 일을 곧 마무리할 수 있었고, 결국 지나간 일이 되었다. 나는 원래의 적절한 출퇴근 패턴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 후로도 이따금 하루 이틀씩 밤늦게 퇴근하는 일이 있긴 했지만, 휴식 없이 며칠을 연이어 밤늦도록 일한 적은 다시 없었고, 숨이 턱 막히는 일도 없었다. 다행이었다.

 

 

 

 

▲ 뉴욕 마천루 꼭대기에서 낮잠자는 노동자들

 

 

일에서 벗어날 수 없는 '여가' 없는 며칠

 

이전에도, 장시간 노동이 우리의 삶과 건강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 그리고 많은 이가 장시간 노동을 하도록 내몰리는 여러 가지 사회적 환경과 여건에 대해 늘 관심을 놓지 않으려 나름대로 애써 왔다. 장시간 노동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며, 세상에서 사라져야 할 것 중 한 가지라고 생각해왔다.

 

그 숨 막히던, 죽을 것 같은 느낌을 경험한 후 나는 장시간 노동이 개개인의 삶과 일상을 얼마나 피폐하고 괴롭게 만드는지 이전보다 더욱 생생하게 짐작할 수 있었다. 강연이나 수업, 문헌 등을 통해 알아왔던 장시간 노동의 영향에 관한 여러 연구 결과들을 일부나마 몸소 체험했다고나 할까. 그 체험은 괴로움 투성이었는데 그 중 한 가지는, 그 일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 그 일 외에는 다른 것을 전혀 할 수 없다는 그 자체였다. '느긋하게 밥 먹으며 이야기하고 싶다', '소설책이나 주간지를 읽고 싶다'와 같은 소박하고 사소한 바람조차 이루기 힘들었다. 원래의 적절한 노동 시간을 유지할 때는 늘상 하던 일인데도 말이다.

 

또한, 다른 이와 대면해서 이야기를 나눌 여유조차 없었으므로 그런 어려움에 대한 공감이나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도움을 얻는 것도 힘들었다. 같은 공간에서 동료 여럿이 함께 일하고 있었지만, 그 중 해당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것은 나 혼자였던지라, 나는 혼자 일하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필연적으로 찾아온 외로움과 고립감도 나를 더욱 힘들게 했다.

 

다행히 사려 깊은 나의 동료들은 내 어려움을 먼저 알아채고 어떻게든 도움을 주려고 시도했다(하지만 그러한 시도가 실질적인 도움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가까이서 지낸 동료에게서도 도움을 얻기 어려웠으니, 당연히 친구나 가족에게 하소연조차 하기 어려웠다. 정신 없이 시간에 쫓기는 동안 나 자신이 '일하는 기계'처럼 느껴지는 순간도 있었다.

 

 

 

 

▲  자료 출처 : 2014 국민여가활동조사보고서  
 

세상에서 하나뿐인 '나'라는 인간이 지극히 자연스럽게 일상에서 누릴 수 있는 크고 작은 사건이나 감정들은 완전히 배제된 채, 그저 최소한의 잠을 자고 최소한의 음식을 먹으며 그 외 대부분의 시간 동안 정해진 목표대로 일하는 생활. 단 며칠뿐이었지만 그 동안 내 삶은 전혀 내 것이 아니었다.

 

꼭 필요하고 옳은 일을 하고 있다거나 경제적 대가를 충분히 받을 수 있을 테니 괜찮다고 스스로 위로하며 그런 상황을 견디는 것이 정말 괜찮은 것일까?

 

아무리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소중한 가치를 지닌 일이라고 해도, 그 노동으로 평범하고도 소중한 일상을 무너뜨리게 된다면 바람직한 상황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참여했던 프로젝트 역시 분명히 사회적으로 좋은 목적을 가진 일이었지만, 프로젝트를 마무리하기 위해 시달리며 일상을 빼앗긴 나는 어느새 그 일이 지닌 훌륭한 가치 나 목적은 이미 잊어버렸던 것 같다.

 

'일'을 마무리하기 위해 그저 내달려야 했을 뿐이었다. 그렇게 괴롭도록 일에 내몰렸던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음에도 상황이 종료된 후에도 나는 한동안 자존감이 낮아진 상태가 지속돼 꽤 힘든 시간을 보냈다. 일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고, 어느 정도 의욕을 회복하기까지 생각보다 긴 시간이 걸렸다. 약 일주일,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내겐 제법 깊은 생채기를 남긴 셈이었다.

 

일상이 무너진 노동, 그 삶의 주인은?

 

그 후로는 어떤 일을 시작할 때, 또다시 이전과 같은 괴로운 상황에 놓이지 않도록 주어진 시간에 대해 좀 더 신중히 고려하게 됐다. 그나마 이러한 고려와 선택이 가능한 것은 내게 일에 대한 선택권이 있고 시간에 대한 통제가 어느 정도 허락된 덕분이다. 그 사실만으로도 이 팍팍한 사회에서는 비교적 운이 좋은 축에 속한다는 점을 알고 있다.

 

그저 며칠이 아니라 그 이후로도 그렇게 긴 시간 동안 일에서 벗어날 수 없는 생활을 오래 지속해야했다면 내 삶은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해본다. 어쩌면 지금과는 좀 달라졌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루가 멀다 하고 울면서 어떻게든 견뎌냈을 수도 있다. 견뎌냈더라도 그 후 더 오랫동안 무력감과 회의감으로 괴로워하지 않았을까.

결국 참다 못해 사표를 쓰고는 일터를 박차고 나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실제로 직장 생활을 하는 거의 내내 장시간 일하도록 내몰리는 많은 이를 생각하게 된다. 개인이

 

처한 상황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특정 업무를 약속한 기한에 맞춰 마무리하기 위해 단기간 동안 내몰리는 정도가 아니라, 낮은 임금 때문에 먹고 살기 위해서 선택의 여지없이 훨씬 절박한 이유로 긴 시간동안 쉼 없이 일을 해야만 한다면, 과연 그 삶이 어떨지...

 

내가 단지 며칠간 겪었던 여러 괴로움을 오래도록 감내해야 한다면, 그가 과연 그 삶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오랜 시간동안 일에 얽매여 일상이 무너진 삶, 그 삶의 주인은 누구인가.
 

[노동시간에세이] 표준적으로 혹은 비표준적으로 일한다는 것 /2015.6

 표준적으로 혹은 비표준적으로 일한다는 것 


송한수

노동시간센터(준), 광주근로자건강센터 부센터장, 조선대 직업환경의학과 교수


노동자 대상으로 건강검진·상담 업무를 하다보니, 노동시간의 특성에 따라 건강수준이 패턴화되어 있다는 점을 느끼곤 한다. 예를 들어 하루 12시간 정도 연장근무를 하는 제조업 노동자들에게서 콜레스테롤 수치들이 비정상적으로 크게 나빠져 있는 경우를 흔히 본다. 그 이유에 대해 면담하다보면, 과도한 음주, 피로의 누적, 영양의 불균형이 있었고, 그 이면에는 장시간노동이 있었다.


시내버스 운전자들의 노동시간을 보자. 그들은 오전근무조와 오후근무조로 나뉘어 1주일 단위로 근무를 순환한다. 오전근무조의 경우 새벽 5시에 업무를 시작하려고 새벽 4시에 기상하여 출근한다. 이른 새벽에 일어나다 보니 아침식사를 거르는 경우가 많다. 아침근무를 마치고 오전 10시경에 30분 간의 휴식시간 동안 버스 기종점에 있는 식당에서 늦은 아침식사를 먹는다. 그리고 낮 근무를 마친 후 오후 3~4시쯤 식사를 하게 된다. 그들이 집에 귀가하면 가족들의 저녁식사시간과 엇갈린다. 그래서 늦은 밤 시간에 식사하게 될 가능성이 높고, 이 때문에 아침식사를 하지 않게 될 가능성도 높아진다.


짧은 기간 동안 빠르게 건강이 나빠지는 경우는 아이러니하게도 의사들에게서 발견하였다. 병원에서 근무하는 전공의를 대상으로 야간작업 특수건강진단을 하였는데, 100kg이 넘는 고도비만자가 여럿 생겼다. 이들은 병원근무를 시작하면서 체중이 급격히 증가하였다. 빈번한 야간당직과 과중한 노동이 일상화된 전공의들에게 차분하게 식사를 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없었고, 밤늦게 과식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그 시간대에 먹을 수 있는 식사는 고열량의 배달음식뿐이었다.


소방공무원, 경찰공무원, 응급구조사, 장례지도사와 같은 야간작업 종사자들은 언제 일이 발생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대기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긴장도가 매우 높은 업무를 수행하게 된다. 업무가 갑자기 많아지면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한계에 이를 정도의 혹독한 노동을 감당하기도 한다. 과도한 스트레스로 음주와 흡연과 같은 나쁜 생활습관을 갖고 있고, 식사를 제때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밤에 일해도 야간 특수건강진단 못받는, 이상한 기준


2014년부터 야간작업 종사자에 대한 특수건강진단이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다. 그리고 2016년부터는 50인 미만 사업장의 야간작업 종사자들도 특수건강진단을 받게 된다. 야간작업으로 인한 생체리듬의 교란이 건강악화의 주요 원인으로 인정받게 되면서 취해진 조치다. 고용노동부는 오후 10시부터 다음날 오전 6시까지 연속되는 작업을 월 평균 4회 이상 수행하는 경우를 특수건강진단 대상 야간작업으로 보았다. 이 기준에 따르면 야간작업을 32시간 이상 수행하면 특수건강진단 대상에 해당된다.


그러나 교대근무 중 야간작업을 밤 10시가 아닌 밤11시나 12시에 시작하는 경우도 있고, 새벽에 몇 시간의 수면을 취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는 10시부터 다음날 오전 6시까지 시간대의 작업을 월 평균 60시간 이상 수행했을 때 야간작업 특수건강진단 대상이 된다. 야간근무의 시작 시간이 오후 10시가 아니라 오후 11시라면 적용기준이 크게 달라진다. 예를 들어, 3교대 간호사들의 한 달에 4~8회, 보통 40~60시간 정도 야간근로를 수행한다. 월평균 야간작업 시간이 60시간 이상이어야 한다는 규정에 따르게 되면 상당수의 3교대 간호사들이 야간근로 특수건강검진 대상에 해당되지 않는다. 아파트경비원은 일반적으로 격일제로 근무하면서 하루15~17시간을 근무한다. 그리고 밤 12시부터 다음날 오전 6시 사이에 약 4~5시간 정도 수면시간이 주어진다. 한 달에 15일을 근무한다고 하면 야간작업시간은 약 45시간 정도여서 야간작업 특수건강진단대상에 해당되지 않는다.


당신의 생각은 어떠한가? 간호사나 아파트 경비원은 특수건강진단을 받아야 할 야간작업 종사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는가?


비표준적 노동시간의 폐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야간작업이 건강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수많은 근거들 때문에 야간작업 특수건강진단이 시행되었다. 그런데 더 엄밀하게 말하면 비표준적 노동시간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더 합당한 것 같다. 낮근무, 저녁근무, 야간근무를 교대로 순환하는 경우는 단순히 야간작업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주어진 노동시간에 따라 수면시간, 식사시간, 여가시간, 가사노동시간이 달라지고 이로 인해 일상생활의 규칙성이 훼손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아침에 출근해서 저녁식사 전에 퇴근하는 것을 ‘표준적인 노동시간’이라고 하자. 그런데 우리 주변에는 ‘표준적인 노동시간’에서 벗어난 다양한 형태의 ‘비표준적 노동시간’ 종사자들이 있다. 여기에는 규칙적으로 노동시간이 변화되는 순환교대근무도 있으나, 노동시간이 과도하게 연장된 경우도 있고, 통상적인 노동시간대에서 벗어나 일하는 경우도 있다. 비표준적 노동시간은 노동자에게 ‘적응’이라는 과제를 부여한다. 잘 적응하는 경우도 있지만, 어떤 경우는 잘 적응하지 못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교대근무 부적응증후군’이라는 용어가 나왔다. 이 증후군은 교대근무자가 수면을 적절하게 취하지 못하여 주간졸림증이나 업무효율저하를 경험하거나, 소화불량, 속쓰림, 위산역류와 같은 위장증상을 빈번하게 경험하거나, 혈압이나 혈당이 잘 조절되지 않는 등의 건강상의 문제가 발생한 경우를 일컫는다.


비표준적 노동시간 종사자의 규모는 어느 정도일까? 비표준적 노동시간이라는 개념이 정착되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한 통계는 없다. 그러나 김현주 등의 연구에 따르면 우리나라 야간작업 종사자의 규모는 약 127만 명∼197만 명으로 전체 임금근로자의 10.2∼14.5%에 해당하였다. 그리고 주당 52시간 이상의 장시간 근로자의 수는 약 170만∼410만 명으로 추정되었는데, 이는 전체 임금근로자의 15.0∼31.9%에 해당한다. 이들 중 야간 및 장시간 근로에 동시에 노출되는 노동자들은 약 49만 명∼약 76만 명 정도로 추정되었는데, 이는 전체 임금근로자의 3.3∼5.8%에 해당한다.


비표준적 노동시간 종사자들의 상당수는 산업보건 관리의 사각지대에 있다. 가령 50∼60대 고령노동자들이 가장 쉽게 얻을 수 있는 일자리는 아파트 경비원과 요양보호사다. 이들의 대부분은 산업보건 관리 역량이 부족한 50인 미만 사업장에 속해 있다. 고령 노동자들은 뇌심혈관계질환이나 수면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청장년층보다 더 높다. 게다가 격일제 장시간 노동과 야간작업에 종사하게 됨으로써 건강에 더 나쁜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비표준적 노동시간에 주목하자



비표준적 노동시간은 일부 노동자들에게 노동시간 선택의 자유일 수 있지만, 대다수 노동자에게는 일상생활의 안정성을 교란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야간작업은 이제 건강을 악화시킬 수 있는 요인으로 주목받으며, 산업보건관리의 주요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그러나 앞으로는 야간작업에만 머무르지 않고, ‘비표준적 노동시간’ 이라는 개념을 적극적으로 사용할 필요가 있다.


모든 노동자들에게 보다 안정적인 노동시간에 일할 수 있고, 불가피하게 비표준적 노동시간에 종사하게 할 경우에는 적응을 돕는 실질적인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이와는 별도로 지금 바로 할 수 있는 것으로 제시하고 싶은 것이 있다. 첫 번째는 퇴근시간을 지키는 것, 두 번째는 제시간에 좋은 질의 식사를 보장하는 것, 세 번째는 업무에 의해 방해받지 않는 편안한 휴식시간을 보장하는 것이다.

[노동시간에세이] 심야노동과 서비스 정신 / 2015.4

[시간의 재발견] 노동시간 에세이

심야노동과 서비스 정신



노동시간센터(준) 이혜은

가톨릭대 직업환경의학과 교수


한국은 세계굴지의 장시간 노동의 나라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초 단시간, 단기간 일할 수 밖에 없는 불안한 노동시간의 나라이기도 합니다. 노동시간의 길이와 불안정성은 비단 일터에서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일상의 시간에 까지 막대한 영향을 끼칩니다. 

노동시간센터(준)은 지난 기획 [노동시간에 대해 말해야 하는 것들]을 마치고, 일상에서  느낀 시간과 노동을 에세이로 풀어나가는 [시간의 재구성] 연재를 시작합니다. ‘노동시간’에 방점을 두고 재구성하는 삶의 이야기에 많은 관심 바랍니다.



내가 하고 있는 업무 중에 직접 간호사나 의사를 고용하지 않은 사업장들에게 위탁받아 사업장의 보건관리를 수행하는 일이 있다. 주기적으로 계약을 맺은 사업장들을 방문해야 하기 때문에 서울의 다양한 지역으로 출장을 다니게 되는데 시간도 절약하고 편하게 다니고자 주로 택시를 이용하여 이동한다. 



한 달쯤 전 역시 낮에 택시를 타고 출장을 가던 중이었다. 택시 안에서 조용히 흘러나오던 라디오를 갑자기 기사님께서 음량을 높이셨다. 가만히 들어보니 서울시에서 택시 운행과 관련된 새로운 계획을 발표했었나 보다. 그 중 특히 개인택시에게 밤 12시부터 2시까지의 시간에 대해 의무적으로 운행하도록 한다는 내용에 대한 서울시 관계자와의 인터뷰였다. 



인터뷰가 끝나자 집중해서 듣고 있던 기사님은 이내 “이런 탁상머리들!” 이라며 분통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마침 차에 타고 있던 내게 하소연하신 내용은, 몸도 힘들고 취객들 상대하는 것도 스트레스 받아서 수입을 좀 포기하더라도 주간에 주로 운행을 하고 있는데 강제로 밤에 운행하라고 하는 것은 정말 너무하다, 밤에 택시 잡기 힘들다고들 하지만 특정지역에, 주로 주말에 쏠린 문제인데 이렇게 해서 해결이 되겠느냐는 것이었다.



노동시간 문제에 항상 관심을 가져야 함에도 이런 뉴스를 모르고 있었다는 것에 살짝 부끄러움을 느끼며 인터넷 검색을 해봤다. 2월에 발표된 <서울형 택시 발전모델>에 포함된 사업이었다. 아마도 서울시가 택시와 관련된 민원 때문에 꽤나 골치가 아팠던 모양이다. 민원의 두 축은 ‘승차거부’와 ‘불친절’이었는데 이번 개인택시 심야 의무운행은 승차거부를 해결하겠다고 제시한 방법이다. 



서울시 발표자료에 의하면 개인택시가 서울 택시의 67%로 법인택시의 두 배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나 심야시간대 영업이 매우 저조하다고 한다. 서울시가 작년 12월 한 달간 24시~02시의 개인택시 결제실적을 분석해 본 결과 심야시간대에 한 번도 운행하지 않은 개인택시가 15,261대(30.9%)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 달에 20일 운행하고 있는 개인택시들에게 의무적으로 24시~2시 운행을 하도록 하고 6일 미만으로 운행 시에는 120만 원의 과징금을 부과하고 10일 미만으로 운행할 때는 카드결제 수수료와 관련된 보조금 지원을 중단하겠다는 것이 요지이다. 불이익이 없으려면 일하는 날의 절반은 새벽 2시까지 운행을 해야 하다니 평소 야간 운행을 안 하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부담이 될 것이 쉽게 예상된다. 


이후 다른 기사님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여 택시를 탈 때 시간이 있으면 노동시간과 서울시 정책에 대해 여쭤보았다. 한번은 꽤 젊은 기사님의 차를 타게 되었는데 “전 어차피 회사택시라 상관없어요. 2교대로 일하니까 절반은 야간에 일하고 있으니까요. 만약에 돈 벌고 나이 들어서 개인택시 하게 되었는데 강제로 밤에 운전시키면 당연히 싫겠죠” 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말투에서 살짝 체념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긴 법인택시 노동자의 심야노동과 장시간 노동은 훨씬 심각한 문제인 게 틀림없다. 또 다른 기사님께 자세히 들어보니 보통 2인 1차, 즉 2교대로 운행하기 때문에 거의 하루 12시간씩 일을 하고 교대를 하지 않는 ‘1인 1차’의 경우 노동시간은 더 길어서 보통 15시간 많게는 17시간까지 일을 한다고 한다. 



물론 우리나라 근로기준법에 노동시간에 대한 제한이 있지만, 택시의 경우 ‘공익성 사업의 근로시간 특례’라는 제도에 따라 연장근로에 대한 제한 규정에서 벗어날 수가 있어 이런 장시간 노동이 가능하게 된다. 만났던 분 중 한 분은 장시간 노동에 대해 “사납금이란 게 있어서 12시간씩 하고 야간을 안 할래야 안 할 수 없어요” 라고 하기도 하고 “실제로는 12시간씩 일하는데 근로계약에는 왜 6시간 반 일하는 거로 하는지 모르겠어요.” 라는 하소연을 하기도 했다. 이는 서울시에서 노사합의로 결정된 임금지급 시간이 6시간 40분이기 때문이다. 2012년도 서울시 조사에 의하면 법인택시 노동자의 평균 수입은 월 187만 원에 불과했다.[각주:1]

 


심야의 택시수급 문제에 대해 여쭤봤던 기사님들께 공통으로 들을 수 있었던 얘기는 심야의 택시 수요는 종로와 강남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이고 90% 이상의 손님들이 유흥을 즐기고 귀가하는 시민들이라는 것이다. 택시를 타는 곳은 몰려있는데 내리는 곳은 서울 전 지역으로 흩어지니 손님을 내려주고 다시 강남이나 종로로 돌아가기에 시간이 걸린다는 해석을 하기도 했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역시 강제 택시 운행보다는 심야시간대에만 합승을 할 수 있게 해주거나, 수요 분석을 더 자세히 해서 심야버스를 충원하는 게 낫지 않겠냐는 의견도 들을 수 있었다.   

  


운수업에서의 장시간노동과 심야노동은 노동자 자신뿐만 아니라 국민의 안전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서울시 조사결과, 택시 관련 교통사고 건수는 2011년 기준 전체 교통사고의 23.8%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고 특히 법인택시 교통사고가 개인택시 교통사고의 5.7배 수준으로, 전체 택시 교통사고의 80.9%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만대당 교통사고 건수를 비교하자면 법인택시는 2,092건이었던 것에 비해 개인택시는 366건에 그쳤다. 사납금을 채우기 위한 무리한 운전과 장시간 노동이 개인택시와 확실히 비교되는 부분으로 이러한 법인택시의 높은 교통사고율 원인으로 추정된다. 2006년에 출판되었던 우리나라 법인택시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연구에 의하면 한 달 중 야간운행 비율과 수면시간은 교통사고 건수와 통계적으로 유의한 관련성이 있었다.[각주:2] 



공익성 사업의 근로시간 특례’라는 말처럼 공공성을 내세워서 심한 노동강도를 강요하는 일은 종종 있었다. 법인택시에서도 장시간노동과 심야노동을 줄여야 할 텐데 이것으로 모자라니 개인택시에도 심야 운행을 의무화하자는 서울시의 발상은 참으로 폭력적이다. 더욱이 개인택시 운전자들은 현재 60대 이상이 절반을 넘는다. 고령자는 야간노동에 더욱 민감한 집단으로 건강에 대한 영향이 더욱 클 수 있다. 



이 문제에 대해 찾아보면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은 모 인터넷 신문에서 뽑은 기사 제목으로 “서울 심야택시, 서비스정신이란 이런 것” 이다. “서울은 전 세계에서 몇 안되는 밤의 도시이다”로 시작되는 기사는 “서울 심야택시, 말 안 들으면 면허 취소를 해서라도 관철해야 한다” 와 같은 이를 지지하는 일부 과격한 누리꾼들의 반응으로 끝을 맺고 있었다. 밤의 도시인 것이 별로 그리 자랑스럽지 않고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밤에 일하지 않고 잘 수 있는 서울이 되길 바란다. 그리고 정말 필요한 사람들을 위한 심야의 교통 서비스는 누군가의 희생으로 제공되는 게 아니라 착취당하지 않고 존중받는 노동을 통해서 제공되어야 할 것이다.






  1. https://traffic.seoul.go.kr/archives/11838 [본문으로]
  2. 윤간우 등. 일부 법인 택시노동자의 교통사고와 불안전운전행동에 미치는 인적요인. 대한산업의학회지 제 18 권 제 4 호 2006년 ; 307-317.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