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시간 에세이] 플랫폼 노동시대, 크로노토프는 누가 쓰는가 /2017.7

플랫폼[각주:1] 노동시대, 크로노토프는 누가 쓰는가



정글 노동시간센터 회원


“아버지께서 들판을 가로질러 익사한 소년의 시신을 운반해오셨다.”

앨리스 먼로의 단편 <몬태나주, 마일즈시티>의 첫 문장이다. 이 문장을 읽은 우리는 많은 의문을 던질 수 있다. 이 소년은 누구이며 어쩌다 익사했나? 도대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이것은 과거와 미래, 즉 ‘시간’에 관한 질문이다. 또 우리는 저 짤막한 문장에서 들판이 만들어지는 것을 본다. 문장 바깥에서는 소년이 익사한 물웅덩이도 보인다. 러시아의 문예이론가 바흐친은 이렇게 문학 속에서 나타나는 시간(chronos)과 공간(topos)이 응축된 내적 연관을 ‘크로노토프(Chronotope)’라 불렀다. 문학은 현실을 모두 담을 수 없다. 대신 시간과 공간을 지시하는 문장을 통해 읽는 이에게 인식되고 재구성되어 가시화된다. 그래서 크로노토프는 진리가 아니라, ‘누군가’의 시선과 입장을 통해 그려지는 현실, ‘해석되고 구성된 동시대성’이라 바흐친은 말했다.


현실을 비추는 문학의 용어를 다시 현실로 가져와보자. 개인은 서사로 이루어져 있다. 수많은 개개의 크로노토프들은 서로 갈등하고 포용하면서 공존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개개의 크로노토프를 통해 사회 전체를 꿰뚫는 하나의 크로노토프도 생각해볼 수 있다. 이 지면에서 주목하는 거대한 크로노토프는 ‘플랫폼’이며, 개개의 서사들은 바로 ‘플랫폼 노동자’다.


오늘날 플랫폼은 주로 스마트폰 앱으로 매개된다. 앱을 통해 남는 방, 자동차, 장비를 빌려줬다. 이것은 일종의 공간이었다. 그리고 노동력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시간성이 더해졌다. 플랫폼 안으로 서사의 주체인 개인이 대거 들어왔다. 에어비앤비, 우버, 메카니컬터크까지 가지 않더라도 카카오 드라이버, 배달의민족은 이제 일상이 되었다.


현실화된 미래의 노동중개 형태인 플랫폼은 다음과 같은 희망을 제시한다. 미래를 스스로 일구고 싶은 기업가 정신으로 무장한 이들에게 창업의 무한한 대지가 디지털 공간에 펼쳐진다. 이런 형태의 독립고용노동은 최고의 임금을 찾아 자유롭게 이동하게 한다. 분초, 비트 단위로 일할 있다. ‘원하는 만큼 일하고 원하는 만큼 번다.’ 어느 배달업체가 (실제로는 자영업자 지위를 가진) 배달원을 구인하며 쓴 문구다. 플랫폼 안으로 수많은 개인들이 모인다. 그리고 그 주체는 각자라고 선전한다. 하지만 이 서사들이 모인 전체 크로노토프의 주체는 과연 누구일까?


매사추세츠대 제럴드 프리드먼에 따르면 플랫폼 노동의 확산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한시적 고용형태는 1970년대 말, 1980년대 초, 2008년 등 경제적으로 열악한 시기에 급속도로 증가했다. 특히 2006년 이후 미국 내 고용의 순증가는 모두 대체근로의 형태였다. 즉, 이런 고용관계의 변화는 노동자의 선호 때문이 아닌 사용자의 선호 때문이며 플랫폼 노동의 증가는 이런 현상의 연장선상에 있다.


플랫폼 노동이 이전의 한시적 고용과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 있다면 ‘속도’다. 이전에는 십분 만에 고용하고, 십분 만에 해고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디지털 플랫폼은 이를 가능케 한다. 이럴 때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게 필연적으로 생긴다. 느린 사회적 합의과정을 요하는 법제도가 그렇고 느린 진화과정을 수반하는 노동자의 신체가 그렇다.


법제도를 먼저 생각해보자. 이미 한국에서도 배달업을 중심으로 플랫폼 노동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우리와 같은) 비판자들은 말한다. 고용의 파편화는 사회계약의 폐지다. 사회보장제도의 기원은 노동력 재생산이며 이를 위해 노동자의 신체 보호가 제도화 되었다. 따라서 사회권이 보장되고 노동은 건강, 안전, 존엄이 보장되는 틀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총론은 그럴듯하게 쓸 수 있다. 하지만 효과적일까? 렌느1대학 조세파 디링제는 이런 식의 접근은 도급인에게 합당한 책임을 묻겠다는 사회법의 입법 목적을 약화시키며, 보편성으로 특수성을 희석시킴으로써 오히려 개별 법 적용의 필요성을 약화시킨다고 주장한다. 프랑스보다 삭막한 우리 현실에서는 플랫폼 노동이 단순히 특수형태근로종사자(특고)의 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말하자면 ‘디지털 특고’다. 그러나 단순히 ‘디지털 특고’라는 틀로 본다면 플랫폼 노동 안에 있는 여러 고용관계의 차이가 은폐된다. (이 논의는 이 지면에서는 논외로 한다.)


영국의 우버(uber)[각주:2] 노동자들의 경우를 보자. 영국일반노조는 우버를 상대로 소를 제기했고 이에 승소해 우버 노동자들이 노동자성을 인정받았다. 최저임금 보장, 유급연가 사용권과 노동시간 제한에 대한 통제권을 획득했다. 하지만 이는 우버라는 플랫폼의 특성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버 노동자들은 실질적으로 인격권이 종속됐으며, 이는 우버에 사용자성을 부과하는 주요한 논거가 되었다. 반면, 프랑스는 우버가 사용자인가 대한 판단을 보류했다. 노동자의 노동은 고객을 향한다. 노동제공의 조건은 플랫폼이 정한다. 노동자의 급여는 고객이 지불한다. 플랫폼과 고객 모두 별점을 통해 노동자를 감독한다. 누가 사용자인가? 과연 한국의 법체계는 이런 상황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을까?


우버 노동자의 소송이 시사하는 또 다른 면은 플랫폼 노동의 대표적 문제가 긴 노동시간과 낮은 소득수준이라는 것이다. 우버는 택시기사에 비해 우버 노동자의 소득수준이 높다고 선전했지만 이는 총매출이다. 연료비, 보험료, 차량유지비를 제하면 소위 남는 게 없다. 하지만 노동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최저시급을 보장받지 못한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더 일해야 하는 것이다. 한국의 플랫폼 배달노동자들도 다르지 않다. ‘원하는 만큼 일하고 원하는 만큼 번다.’는 선전은 살아갈 정도로 벌려면 죽을 만큼 일하라는 말이나 진배없다.


여기에서 비롯되는 신체의 문제, 즉 산업보건의 문제는 어떤가? 하트퍼드셔대 오슐러 휴스와 사이먼 조이스는 이렇게 정리한다. 플랫폼 노동자는 부실한 장비를 가지고 부적절한 근무환경에서 장기간 일한다. 직업적인 건강악화는 개인이 책임진다. 부적절한 도구나 안전장비, 독성 화학물질, 위험한 근무환경, 훈련 및 감독 부족 등에 의한 사고에 무방비로 노출된다. 이뿐만 아니다. 일의 불안정성 및 예측 불가능성은 스트레스를 증대시킨다. 일과 생활이 분리되지 못해 심리 사회적 위기에 빠진다. 마감은 분 단위며, 임금도 그에 못지않게 초저가다. 그런데 쉴 수 없다. 쉬는 순간 무한한 경쟁자가 제 몫을 빼앗아 가기 때문이다. 플랫폼 노동에서 평판 관리는 노무 관리의 핵심이며, 한 두 개의 플랫폼이 시장에서 독점적 입지를 강화할수록 플랫폼의 노동자 지배력을 더욱 커진다. 동시에 그런 지배적 플랫폼 안에서 평판 관리는 노동자 내면의 욕망도 부추긴다. 대규모 시장 안에서 평판만 잘 관리하면 슈퍼스타가 될 수 있다는 환상을 안겨준다.


지난 세기 동안 나타난 기술의 급격한 변화는 늘 인간의 불안을 드높였다. 기술 격변의 시대가 지나고 나면 우려와 달리 노동자는 다른 일자리를 찾았다. 문제는 어느 시점부터 질도 낮고, 보상도 낮은 일자리로 유휴노동력이 옮겨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노동시간이 큰 폭으로 짧아지면서 고용이 유지된 것은 두 말할 나위 없다.


플랫폼 시대의 크로노토프가 누구에 의해 쓰이는 지 눈여겨보아야 하는 이유는 결국 노동이 누구에게 어떻게 배분되는가가 문제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개개의 사람들이 쓰는 크로노토프는 자기 주체적 서사를 가지게 된다. 하지만 지금가지 살펴본 바에 따르면 사회전체의 크로노토프는 특정자본가가 주체가 된다. 사회 보장은 사회계약이었고 그것은 근로계약을 근간으로 했다. 그렇다면 국가 권력은 대안이 될 수 있는가?


디링제는 법제적 대안으로 두 가지를 제시한다. 하나는 플랫폼 노동자에게 임노동자의 지위를 부여하는 것. 다른 하나는 통합적인 일반노동법을 구성하는 것이다. 프랑스의 경우에는 모르겠으나 한국의 경우 임노동자와 유사한 사회권을 플랫폼 노동자에게 인정하는 것은 아직은 실효성이 낮아 보인다. 노동조건에 순응해버리면 임노동자 지위를 받아들이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가령 최근 산재보상법 개정 이후 개별 배달원이 산재 적용을 받도록 수정되었지만 보험료의 절반을 자부담해야하는 등 장벽으로 인해 실제 가입률은 형편없이 낮은 것이한 예이다. 그냥 안 하고 마는 것이다. 디링제 역시 노동자성 여부에 상관없는 일반노동법에 더 힘을싣지만 이것도 실효성이 있을 지 미지수다. 새로운 특수법의 입법이 늘 마법의 탄환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근본적인 문제는 ‘속도’다. 이들 법이 위키피디아가 아닌 이상 따라갈 수 없다. 그렇다면 반대로 생각해 일종의 위키라면 당면한 문제에 대응할 수 있지 않을까? 따라서 시민사회는 독일 금속노조에서 만든 대안 플랫폼인 Faircrowd.Work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플랫폼 노동자들을 위한 플랫폼이다. 열 두 개의 대표적인 플랫폼을 리뷰하고 있다. 해당 사업체의 약관에 노동권 침해 요소가 있는지 ‘좋아요’로 보여주고, 실제 노동자는 플랫폼을 ‘별점’으로 평가할 수 있다. 플랫폼 시대에 플랫폼으로 대응하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국가는 공적 플랫폼의 도입도 고려해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한국형 알파고’가 농담취급 받는 현실에서 시장주의자들의 거센 반발과 냉소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플랫폼이 21세기에 부활한 노동중개업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공적 플랫폼으로 시장에서 독점적 지위를 가지는 플랫폼과 경쟁하는 방안도 열어두어야 한다.


한시적이고 불안정한 노동은 시장에 진입하기 전 일시적인 시기를 목적으로 했다. 그러나 ‘한시적’이라는 단어는 ‘영구적’과 차이가 없어지고 있다. 그 결과 사회보장과 소득보장의 권리는 일상에서 지워진다. 휘황찬란한 기술의 향연에 쉽게 압도될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이 오래된 미래임을 직시해야 한다. 과거의 노동 중개상들은 디지털로 무장하고 제도의 빈틈을 파고든다. 달라진 속도 앞에서 보이지 않는 곳으로 밀려난 플랫폼 노동자에게 사회는 무감하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것. 이것은 현 정부의 노동정책이 어떻게 펼쳐질지에 대한 가늠자가 될 지도 모른다.


  1.  국어사전에서 플랫폼은 ‘역에서 기차를 타고 내리는 곳’으로 정의함. 즉 승강장, 정거장을 뜻함. 기술의 발달을 통해 플랫폼이란 뜻도 다양해짐. 원래 플랫폼은 ‘plat(경계를 정한 공간)’과 ‘form(형태)’의 합성어이다. 즉 ‘용도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활용할 수 있는 공간’을 의미함. 최근 가장 일반적으로 쓰는 플랫폼의 의미는 ‘인터넷 정거장’임. ‘스마트 시대’에서 인터넷 사업자·콘텐츠 제공자·고객 등 다양한 주체들이 만나는 약속 장소가 바로 플랫폼. (참고: http://news.jtbc.joins.com/article/article.aspx?news_id=NB11123159) [본문으로]
  2. 우버는 애플리케이션(앱)으로 승객과 차량을 이어주는 서비스 [본문으로]

[노동시간 에세이] 야간노동, 교대제를 줄이려는 정책적 접근 /2017.6

야간노동, 교대제를 줄이려는 정책적 접근



김재광 소장



새 정부 들어서 연장과 휴일을 포함한 최대 허용 노동시간이 68시간에서 52시간으로 조정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이전에도 강조했지만, 이는 '법규성'도 없는 고용노동부의 잘못된 행정지침을 제대로 돌려놓는 것으로 박근혜 정부가 강조했으나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던 그야말로 '비정상의 정상화'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방향은 법정 노동시간 단축에 대한 논의가 없는 것은 실망스러운 일이나 실 노동시간의 단축이라는 점에서 긍정적인 것만은 틀림없다. 그러나 노동시간 관련하여 현 정부의 공약이나 현재의 논의에서 야간노동과 이를 동반한 교대제에 대한 논의가 거의 없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크다. 현 정부의 공약에서는 이른 바 '칼퇴근법'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교대제 노동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보이지는 않는다.


교대제는 대부분 야간(오후 10시부터 상오 6시까지, 노동법에서는 이를 야간근로라고 지칭함)노동을 포함하여 운영되고 있다는 점에서 노동시간의 양뿐 만 아니라 질적인 측면에서 대단히 중요한 지점이다. 고용노동부는 교대제를 "근로자가 일정한 기일마다 근무시간이 다른 근무로 바뀌는 근무 상태 혹은 제도"라고 규정하고 있다.


유럽에서는 "정상적인 낮 시간(오전7시에서 오후7시 사이) 이외에 이루어지는 노동시간"으로 확장하여 정의하고 있기도 하다. 아무튼, 고용노동부의 정의에 따르면 한국의 전체 기업체의 15%, 30인 이상 기업체의 경우 33.6%, 300인 이상 기업체의 46.1%가 교대제를 운영(2013년 현재)하고 있어 노동시간의 양과 질의 문제를 언급하는 데 있어 상당한 고려가 필요한 영역임에 분명한 것이다.


현재 한국에서 교대제의 문제에 접근하는 것은 다음의 몇 가지 이유로 쉽지 않다. 우선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법정 노동시간 단축은 고사하고, 초과노동시간에 대한 기준과 규제도 잘 이루어지지 않아 다른 문제를 접근하는데 엄두를 낼 수 없다 점이고, 둘째, 교대제는 고용과 연관되어 있어 이를 개선하려 할 때 복합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는 점이며, 셋째, 24시간 돌아가는 생산과 서비스를 한국의 역동성인, 심지어 자랑스러워하는, 문화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여전하기 때문이다.


사실 낮에 이루어지는 교대제는 실 노동시간의 단축과 고용 증진에 긍정적 효과를 가질 수 있는 방안이기도 한데, 오히려 이를 이유로 고용상황이 악화할 수 있는 점이 없지 않아, 이를 논의하기에 한국 사회의 상황이 녹록지 않는 것이 사실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적어도 인간의 생명유지에 필요한 필수적인 영역을 제외한 생산과 서비스의 전 분야에서 24시간 노동이 무엇 때문에 필요한 것인지에 대한 성찰과 이를 근거로 한 야간노동의 폐지를 방향으로 삼아야 하며, 불가피한 야간노동에 대한 최대한 보호와 규제를 새 정부는 모색하여야 할 것이다.


이미 야간노동에 대한 특수건강검진이 도입될 정도로 야간노동은 종사하는 노동자는 수면장애, 위장장애, 우울감, 만성피로, 뇌심혈관 질병의 위험의 중가 암 발생 위험 증가, 안전사고의 위험증가, 가정 및 사회생활의 유대 약화 및 단절 등등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위험을 실질적으로 잠재적으로 안고 있다. 이에 국제노동기구, 세계보건기구 등은 이를 방지하기 위한 최소의 원칙을 제시하고 있다. 한국도 하루 빨리 노동시간의 양과 질의 변화를 위한 사회적 논의와 정책 마련이 필요하다.


불가피한 분야의 교대제, 개선의 원칙


<야간노동>

- 가능한 야간노동을 안하거나, 최소화하는 방안을 찾는다.

- 야간 연속근무는 3일 연속하지 않도록 한다.

- 고정된 야간노동을 용역, 파견, 하청화하는 것을 금지한다.

- 야간노동 교대조에서 상시 주간노동조로 전환될 때 반드시 휴일(24시간)를 가지도록 한다.

- 40세 이후는 가능한 주간노동으로 전환한다.


<노동시간, 노동 인력>

- 야간노동의 횟수를 최소화한다. 이를 위한 충분한 인력을 확보한다.

- 야간노동일수가 늘어날수록 더 많은 휴일을 부여한다.

- 주 단위 노동시간과 최대노동시간을 미리 확정한다.

- 야간노동의 노동 강도를 완화한다.


<교대가 이루어지는 시간>

- 오전 6시 이전이나, 심야에 교대하지 않는다,

- 교대시간에 교통의 편의를 제공한다.

- 교대시간에 안전의 문제를 보장한다.


<야간수면>

- 야간노동이 이루어지는 동안 안정적인 가면(假眠)을 보장한다.   


<교대주기>

- 24시간 격일제(맞교대)를 금지한다.

- 짧은 주기 교대 방식을 선택한다.

- 교대근무와 주간 고정 근무를 일정한 시기를 두고 번갈아 실시한다.

- 정교대(오전-낮근무-밤근무 순) 순서를 지킨다.


<휴식시간>

- 야간노동 시 주간노동 시에 비해 2배 이상, 식사시간을 제외한 1시간 이상의 절대적 휴식시간을 보장한다.

- 3교대 근무 시 연속 2개의 교대근무를 해서는 안된다.


<휴일>

- 교대근무 시, 최소 1일주일에 1일이상의 유급휴일이 보장되어야 한다,

- 월 1회 이상 주말에 유급휴일이 보장되어야 한다.(사회적 휴일 보장)


< 예측 가능한 일정>

교대 일정은 최대한 간단해야 하고, 예측가능 하여야 한다.


<업무내용과 형태>

야간노동 시 정밀한 작업이나, 안전 위험이 있는 작업은 금지하거나 최소화하여야 한다.


<작업환경>

- 야간노동 시 적절한 조명과 환기, 고립최소화, 적절한 구급시설 등의 요건을 확보한다.

- 야간노동 시 가면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한다.


<임금>

- 주간 노동만으로도 생활임금이 달성되도록 한다.

- 야간노동에 대한 부가 수당은 당연한 것이나, 이를 위한 노동이 되어서는 안된다.


<고령, 임산부 등 민감 집단에 대한 배려>

- 임신 중에는 야간노동을 금한다.

- 40세 이후 야간노동을 최소화 한다.

- 심혈관 질환, 위장장애, 수면장애, 간질, 야맹증 등이 있는 경우 야간근무를 금한다.

[노동시간 에세이] 법정 노동시간을 무색케 하는 노동시간 특례제도 /2017.5

법정 노동시간을 무색케 하는 노동시간 특례제도 




이혜은 노동시간센터회원



한국 노동시간의 가장 큰 문제점을 꼽으라고 하면 모두 첫 번째로 장시간 노동을 들 것이다. 2004년부터 한국의 법정노동시간은 주 40시간이다. 그러나 하루 8시간, 주 5일은 사실 매우 상식적인 기준임에도 매년 OECD에서 장시간 노동으로 2~3등이라는 발표를 접한다. 이러한 괴리는 주 40시간의 노동시간을 정하는 근로기준법에 커다란 두 가지 함정 '허용되는 연장 근로시간'과 '노동시간 특례업종 제도'가 있기 때문이다.


노동시간 문제에 있어 핫 이슈로 등장한 이 제도에 대해 대선후보마다 개선하겠다는 공약을 걸기도 했다. 현행 근로기준법에 의하면 1주간의 근로시간은 40시간을 초과할 수 없으나, '당사자 간의 합의에 의해' 1주간 12시간 한도 내에 연장근로를 할 수 있다. 마치 일주일의 최대 노동시간은 52시간인 것처럼 보이나 휴일 근로는 연장근로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기괴한 행정해석 덕택에 토, 일요일 각각 8시간을 근무할 경우 1주 최대 노동시간이 68시간에 달하게 되고 이 관행이 암묵적으로 묵인됐다. 


이를 바로잡아 "1주"를 휴일을 포함한 7일로 명시하여 1주간의 최대 노동시간을 기존의 68시간에서 52시간으로 줄이겠다는 내용이 지난 3월 국회에서 다루어졌으나 개정 방향은 합의가 되었으나 단계적 시행의 범위에서 합의를 이루지 못해 여전히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


노동시간 특례업종 제도 역시 개선 필요성을 주장한 지는 오래되었으나 그 해결이 쉽지 않다. 이 '특례업종'에 해당하는 노동자는 약 4백만 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되고 있어서 노동시간에 대한 근로기준법이 얼마나 유명무실한지를 보여준다. 그나마 최근의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회의에서 어느 정도 공감대를 형성한 개선방안이 현행 근로시간 특례업종을 표준산업분류에 따라 26개로 재분류하면서 이 중 10개 업종은 특례업종으로 유지하고 16개 업종은 제외하는 내용이다.


<특례 유지 업종>

1. 육상운송 및 파이프라인 운송업

2. 수상운송업

3. 항공운송업

4. 그 밖에 운송 관련 서비스업

5. 영상ㆍ오디오 기록물 제작 및 배급업

6. 방송업

7. 전기통신업

8. 보건업

9. 하수ㆍ폐수 및 분뇨처리업

10. 그 밖에 공중의 편의 또는 업무의 특성상 필요한 경우로서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사업

<특례 제외 업종>

1. 보관 및 창고업

2. 자동차 부품 판매업

3. 도매 및 상품 중개업

4. 소매업

5. 금융업

6. 보험 및 연금업

7. 금융 및 보험관련 서비스업

8. 우편업

9. 교육서비스업

10. 연구개발업

11. 시장조사 및 여론조사업

12. 광고업

13. 숙박업

14. 음식점 및 주점업

15. 건물, 산업설비 청소 및 방제서비스업

16. 미용, 옥탕 및 유사서비스업 


과연 이대로 언제쯤 처리가 될 것인지도 불투명하지만 제안된 상당히 많은 대상이 특례에서 제외된 것처럼 보이긴 하나 가장 실망스러운 점은 운송업을 특례업종으로 유지한다는 점이다. 노동자의 건강뿐 아니라 국민의 안전과도 직결되어 해외 대부분 국가에서 대중교통 운전자의 운전시간을 제한하는 것과도 거꾸로 간다. 몇년 째 해결하지 못하고 끌어오고 있는 문제이지만 새로운 정권에서는 운송업까지 특례업종에서 제외하는 법 개정이 통과되길 바란다. 또한, 특례업종이 일부 남게 되더라도 주당 60시간 등 초장시간 노동의 제한은 반드시 필요하다.


과로와 관련된 업무상질병 평가와 판단의 문제

한국의 산재보상보험법에서 과로와 관련하여 뇌심혈관질환을 업무상질병으로 인정하고 있다. 보통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라는 말을 흔히 접할 수 있으나 많은 의학연구에서 장시간노동과 직무스트레스가 뇌심혈관질환의 사망률 혹은 발병률을 높였다고 관찰한 결과에 근거한 것이다. 산업재해 인정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근로복지공단은 다음과 같은 고용노동부 고시에 따라 과로를 평가하고 있다.


뇌혈관 질병 또는 심장 질병 및 근골격계 질병의 업무상 질병 인정 여부 결정에 필요한 사항]

[고용노동부고시 제2016-25호, 2016.7.1., 일부개정]

Ⅰ. 뇌혈관 질병 또는 심장 질병 및 근골격계 질병의 업무상 질병 인정 여부 결정에 필요한 사항

 

1. 뇌혈관 질병 또는 심장 질병

가.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시행령」(이하 “영”이라 한다) 별표 3 제1호 가목 1)에서 “업무와 관련한 돌발적이고 예측 곤란한 정도의 긴장·흥분·공포·놀람 등과 급격한 업무 환경의 변화로 뚜렷한 생리적 변화가 생긴 경우”란 발병 전 24시간 이내에 업무와 관련된 돌발적이고 예측 곤란한 사건의 발생과 급격한 업무 환경의 변화로 뇌혈관 또는 심장혈관의 병변 등이 그 자연경과를 넘어 급격하고 뚜렷하게 악화된 경우를 말한다.

 

나. 영 별표 3 제1호 가목 2)에서 “업무의 양·시간·강도·책임 및 업무 환경의 변화 등으로 발병 전 단기간 동안 업무상 부담이 증가하여 뇌혈관 또는 심장혈관의 정상적인 기능에 뚜렷한 영향을 줄 수 있는 육체적 · 정신적으로 과로를 유발한 경우”란 발병 전 1주일 이내의 업무의 양이나 시간이 일상 업무보다 30퍼센트 이상 증가되거나 업무 강도·책임 및 업무 환경 등이 유사한 업무를 수행하는 동종의 근로자라도 적응하기 어려운 정도로 바뀐 경우를 말하며, 해당 근로자의 업무가 “단기간 동안 업무상 부담”에 해당하는지 여부는 업무의 양ㆍ시간ㆍ강도ㆍ책임, 휴일ㆍ휴가 등 휴무시간, 근무형태ㆍ업무환경의 변화 및 적응기간, 그 밖에 그 근로자의 연령, 성별, 건강상태 등을 종합하여 판단한다.

 

다. 영 별표 3 제1호 가목 3)에서 “업무의 양·시간·강도·책임 및 업무 환경의 변화 등에 따른 만성적인 과중한 업무로 뇌혈관 또는 심장혈관의 정상적인 기능에 뚜렷한 영향을 줄 수 있는 육체적·정신적인 부담을 유발한 경우”란 발병 전 3개월 이상 연속적으로 과중한 육체적·정신적 부담을 발생시켰다고 인정되는 업무적 요인이 객관적으로 확인되는 상태를 말한다. 이 경우 해당 근로자의 업무가 “만성적인 과중한 업무”에 해당하는지 여부는 업무의 양·시간·강도·책임, 휴일·휴가 등 휴무시간, 교대제 및 야간근로 등 근무형태, 정신적 긴장의 정도, 수면시간, 작업 환경, 그 밖에 그 근로자의 연령, 성별, 건강상태 등을 종합하여 판단하되, 업무시간에 관하여는 다음의 사항을 고려한다.

 

1) 발병 전 12주 동안 업무시간이 1주 평균 60시간(발병 전 4주 동안 1주 평균 64시간)을 초과하는 경우에는 업무와 발병과의 관련성이 강하다.

2) 발병 전 12주 동안 업무시간이 1주 평균 60시간(발병 전 4주 동안 1주 평균 64시간)을 초과하지 않는 경우라도 업무시간이 길어질수록 업무와 발병과의 관련성이 서서히 증가하며, 야간근무(야간근무를 포함하는 교대근무도 해당)의 경우는 주간근무에 비하여 더 많은 육체적·정신적인 부담을 발생시킬 수 있다. 


이처럼 크게 급성과로, 단기과로, 만성과로를 평가하며 노동시간은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된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만성과로의 기준이 주당노동시간 60시간 혹은 64시간에 달하는 점이다. 역시나 법정노동시간 40시간은 현실과 괴리가 있음을 느끼게 된다. 또한, 더 큰 문제점은 이 기준을 적용할 때에 이리 떼고 저리 떼어서 굉장히 협소한 평가를 한다는 점이다. 2016년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노동시간센터에서는 뇌심혈관질환으로 근로복지공단과 재해자 사이의 행정소송 판례를 검토하여 여러 문제점을 찾아냈다. 


예를 들면, 업무범위를 매우 편협하게 해석하여 노동시간을 줄인다. 영업직원이 접대를 위해 주말 산행을 했다면 이를 노동시간으로 보지 않는다. 그뿐만 아니라 업무 특성상 어쩔 수 없는 대기시간과 휴게시간 역시 노동시간으로 보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마땅한 휴게실도 없이 한밤중에 3~4시간 주어지는 휴게시간이 노동시간에서 완전히 제외되기도 한다. 또 다른 문제점은 규정에 제시된 노동시간에만 몰두하여 과로를 보여주는 여러 상황을 제대로 고려하지 못하고 있는 점이다. 야간노동과 교대노동은 규칙적인 주간노동에 비해 강도가 높다는 것이 고용노동부 고시에도 명시되어 있지만 이에 대해 제대로 고려되지 않는다. 업무량 증가나 인원 감축, 휴일 없는 연속근무 역시 과로의 증거로 고려되지 못했다. 고용노동부 고시에도 급성과로에 대한 인정기준이 있으나 이를 인정하는 기준이 매우 높은 것인지 심한 육체활동이나 큰 심리적 스트레스 사건 직후에 발생한 뇌심혈관질환 역시 스트레스 요인을 찾을 수 없다며 인정되지 못하였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먼저 현재의 규정을 산재보험의 취지에 맞도록 폭넓게 적용이 되도록 노력이 필요하다. 과로의 평가 및 판정 지침의 개발이 다시 이루어져야 하고 업무관련성의 판단에 참여하는 질병판정위원, 근로복지공단 자문의, 직원 등에게 지속적인 교육 및 소통이 이루어져야 한다. 과로에 의한 업무상질병 인정은 장시간 노동의 예방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으므로 새로운 정부에서는 특히 이 문제에 대해 재해자, 노동단체와 노동조합 등 관련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 필요하다.

 

[노동시간 에세이] 누구를, 무엇을 위한 노동시간 단축인가/2017.4

누구를, 무엇을 위한 노동시간 단축인가



신경아 노동시간센터



주당 노동시간을 52시간으로 제한하는 법이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언론에 따르면, 주말과 휴일의 초과근로수당이 실질적으로 인상될 수 있다는 우려로 인한 중소기업 등의 반발 때문이라고 한다. 중소기업만일까? 대기업 역시 정면으로 나서진 않지만 같은 심정일 것이다. 더 부정적인 해석은 노동시간 단축 개정안이 초과근로수당의 인상을 노린 노조의 꼼수라는 견해다. 많은 기업이 초과근로시간을 줄이기보다 수당 지급을 선택할 가능성이 크고 이는 결과적으로 초과근로수당 인상을 통한 임금 인상을 초래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됐을까? 임금을 삭감하더라도 노동시간을 단축하자는 공공운수노조의 자기희생적 타협안까지 발표되었지만, ‘노동시간 단축’ 의제는 늘 그래왔듯이 ‘임금 인상’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임금 인상 이슈 앞에서 노동시간 단축 주장은 힘을 잃고 왜소해진다. 이런 현상은 노동자나 사용자 모두에게서 발견된다. ‘먹고 살기도 힘든 임금인데, 더 높이기는커녕 노동시간까지 줄여선 안 된다’는 주장이나, ‘생산성을 높여도 경쟁에서 살아남기 어려운 시장에서 노동시간까지 줄이면 기업은 망하고 말 것’이라는 위협까지 노동시간은 늘 임금의 종속 변수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동시에 노동시간 단축 주장은 더욱 주요한 사회적 의제로 제기되어 온 것도 사실이다.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 손학규 후보의 ‘저녁이 있는 삶’이란 구호가 세간에 큰 반향을 일으킨 이래 2017년 19대 대선에서는 후보들 모두 비슷한 정책을 제시하고 있다. 잠시 살펴보면, 바른정당 유승민 후보는 ‘칼퇴근법’이란 이름으로 야근 금지를 통한 정시 퇴근을 보장하고, SNS를 이용한 업무지시 등 돌발노동을 금지하며, 최소 휴식시간과 최대 근로시간, 근로시간 공시제 등을 제도화하겠다고 한다. 정의당 심상정 후보는 연간 노동시간 1,800시간, 주당 노동시간 40시간 완전 정착, 노동시간단축특별위원회 설치와 수퍼우먼방지법 등을 제시했다.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는 연간근로시간 1,800시간, 포괄임금제와 고정초과근무제 관행 개선, 최소휴식시간, 휴가 저축제, 교대제 개선 등을 주장했다. 더불어 민주당 문재인 후보는 연차휴가 사용을 의무화하고, 육아기 부모의 노동시간을 임금삭감 없이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로 제한하며, 노동시간 단축과 일자리 창출을 연계하겠다고 한다. (정책 소개는 노동시간 단축과 관련한 내용이 충실한 후보부터 제시한 것이다.)


후보들의 공약에서 노동시간 단축이 두드러지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19대 대선이 치러지고 새 대통령이 취임하면 우리의 긴 노동시간에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날까? 저녁 6시가 되면 칼같이 컴퓨터를 끄고 상사의 카톡 걱정 없이 저녁식사를 즐길 수 있을까? 포괄임금제라는 두루뭉술한 임금 대신 일한 시간만큼 보상받는 임금체계를 누릴 수 있을까? ‘수퍼우먼’이란 말이 사라진, ‘워킹맘’의 희생이 필요하지 않은 사회에서 우리의 아이들이 자라날 수 있을까? 생산성과 노동시간을 등치시키는 후진(後進) 자본주의, 인간의 삶에서 노동 이외에 그 어떤 것의 가치 부여에도 인색한 야만(野蠻)의 시대를 끝내고 말 그대로 ‘휴머니즘’, 인간으로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시간의 질서를 만들어 갈 수 있을까?


선뜻 긍정적인 답을 내놓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의 삶이 지속가능해지려면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데 반대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정당의 이념적 스펙트럼과 관계없이 대선후보들이 한결 같이 노동시간 단축을 외치는 모습이 이런 주장을 뒷받침한다. 한국인들은 그동안 너무 오래 일해 왔고 많이 지쳤다. 청년 취업 빙하기 사회에서 취업을 위해 몇 년씩 고생한 신입사원들이 정작 입사 후 1년을 못 넘기고 직장을 떠나는 데에는 긴 노동시간이 원인인 경우가 적지 않다. 긴 노동시간과 무거운 업무부담을 이기지 못해 자살하거나 죽음에 이르고 심각한 질병에 걸린 노동자들이 늘어가고 있다. 최근 발생한 게임 산업 노동자의 자살, 세 아이의 엄마인 여성공무원의 죽음, IT산업 개발자로 폐질환에 걸려 8년여 간의 법정 투쟁 끝에 산재 판결을 받은 양도수씨의 사례는 언제든 우리사회에서 재발할 수 있는 사건들이다. 또 ‘경력단절’ 여성을 돕겠다고 정부가 법까지 만들었지만, 여성의 노동시장 경력을 불연속적인 것으로 만드는 구조는 지속되고 있으며, 긴 노동시간이야말로 그 핵심이다. ‘당당한 직업인’을 꿈꿨지만, 일과 아이 사이에서 갈등과 고민으로 일할 에너지도 정신적 의지도 잃어가는 지친 모습들이 우리사회 ‘워킹맘’의 얼굴이다.


노동시간을 줄여야 한다는 주장이 계속됐지만, 한국사회에서 장시간 노동으로 인한 폐해가 줄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와 관련해 나는 좀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싶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누구를 위해서 노동시간을 줄여야 하는가?'


노동시간을 줄여야 한다는 목소리만큼 왜 줄여야 하는지에 대한 성찰은 충분치 않은 것 같다. 어떤 대답들이 있을까? 쉬기 위해서?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저녁엔 집밥을 해먹기 위해서? 주말엔 1박 2일 여행을 다녀오기 위해서? 친구도 만나고 책도 읽고 공부도 하는 나만의 시간을 가지기 위해서? 수없이 많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많을수록 좋을 것이다. 현실을 넘어 우리의 사고(思考)의 한계를 넘어 상상을 계속해 나갈 필요가 있을 것이다.


나는 그런 상상(想像)의 한 가운데, 구심(求心)에 놓인 인간의 성향을 ‘돌봄(care)'이라고 부르고 싶다. 사실 ‘돌봄’이나 ‘케어’라는 단어는 우리사회에서 너무 ‘범람’해서 전혀 신선하지 않다. 어떤 노동자를 ‘OO돌보미’라고 부를 때 우리는 쉽게 그(또는 그녀)의 임금이 그리 많지 않으리라고 추측한다. 전문적인 기술이나 지식보다는 기본적인 능력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을 그(또는 그녀)가 하리라고 짐작한다. ‘케어’라는 말 역시 의료 현장과 일상에서 많이 사용하지만, 특수한 숙련(special skill)보다는 일반적 숙련(general skill)에 가깝다. 케어는 인간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행위이고 그 앞에 다른 단어가 붙어 ‘OO케어’라고 해도 그리 높은 수준의 기술을 필요로 하는 일은 아니기 쉽다.


그러나 여성학적 관점에서 보면, 돌봄이야말로 노동만큼 가치 있는 인간의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노동이란 것을 하기 전에, 태아(胎兒)에서부터 돌봄을 필요로 하는 것이 인간의 존재 조건이기 때문이다. 또 노인이 되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누군가의 돌봄을 받는다. 인간의 삶은 돌봄에서 시작해서 돌봄으로 끝난다. 어쩌면 사회는 이런 생존과 유지에 필요한 돌봄이란 활동을 적절히 수행하기 위해 만들어낸 인간의 발명품일지도 모른다. 돌봄연구의 대표적 학자인 트론토(Tronto)는 “돌봄이란 우리의 세계를 유지하고 지속하고 보수해 나가기 위해 수행하는 모든 활동"이며 돌봄의 대상은 “우리의 몸과 자아, 환경 등 삶을 지속하는 데 관련된 모든 것”이라고 정의한다. 따라서 돌봄이란 아동이나 노인, 장애인과 같은 특정한 인간 집단이나 시기에 국한된 것이라 아니라 인간의 생애 전반에 걸쳐 지속되는 과정이자 활동이다. 또 육체적 활동이자 정신적인 활동이고, 의식주를 충족시키는 행위는 물론 관심과 배려, 친밀감 등 정서적 차원을 포함한다.


트론토 등 돌봄연구자들은 우리는 태어나서 누군가의 돌봄을 받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고, 그러므로 누군가를 돌보아야 하는 책임 역시 갖는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흔히 ‘인간은 상호의존적인 존재’라고 할 때 여기서 상호의존성(interdependency)은 돌봄을 주고받는 관계를 의미한다. 인간은 태어나서 성인으로 독립할 때까지 부모 등 타인에게 의존하며, 노인이 되어 역시 타인의 돌봄을 받는다. 또 성인의 시기에도 아프거나 장애를 갖게 되었을 때는 물론, 일상생활에서 의식주를 위해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경우가 많다. 결국, 인간은 혼자서만 살 수 없으며, 먹고 마시고 입고 생활하기 위해 필요한 물질과 서비스 대부분을 누군가로부터 받아야 한다.


때문에 돌봄연구자를 포함한 여성학자들은 인간사회의 도덕성 원리로 돌봄의 윤리(the ethic of care)를 제시한다. 지금까지 사회관계의 도덕성을 판단하는 기본적인 원리는 정의의 윤리(the ethic of justice)였다. 이것은 ‘자율적이고 합리적인 개인’을 기초로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원칙에 기초한 공적 영역의 도덕성 원리다. 그러나 여성학자들은 ‘인간이 근본적으로 분리된 개인인가’ 하는 질문을 제기한다. 오히려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의식하든 하지 못하든,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서로 의존하는 존재라는 것이 여성학적 인간관이다. 이런 돌봄의 윤리는 분리되고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관심과 친밀성, 인간관계와 유대, 상호관심, 반응성의 가치를 중심에 두는 가치관이다. 


미국의 법 철학자이자 페미니스트인 누스바움(Noussbaum)은 돌봄의 윤리를 중심으로 사회의 정의를 다시 구성했다. 진정한 의미에서 정의로운 사회는 돌봄이 필요한 사람(돌봄수혜자)이 시민으로서 정당하게 돌봄을 받을 수 있고, 돌보는 사람(돌봄제공자)이 타인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착취되지 않는 사회를 가리킨다. 지난 역사 동안 인간의 사회에서는 타인을 돌보고 타인으로부터 돌봄을 받으려는 욕구가 지닌 보편성을 폄하하고 돌봄을 주변화해 왔다. 돌봄을 ‘비정상적’이고 ‘일시적인’, 따라서 극복해야 하는 바람직하지 않은 상태로 전제하고 사회와 제도를 조직화해 온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인간의 사회가 노동중심적인 것은 아니었다.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이 인간 활동에서 가장 높은 가치를 지니는 것으로 부상했고, '임금노동'이나 '경제활동'이 인간의 지위를 평가하는 최우선적인 규준이 되었다. 그리하여 맞게 된 일 중독 사회에서 우리는 더 많이 생산하기 위해, 과잉 생산 된 상품을 팔기 위해 일생을 바친다. 그리고 과잉 생산 사회에서 아이를 낳아 키우고, 아픈 이를 돌보고, 노인을 보살피는 일은 저평가되고 누구도 하기 싫어하는 일이 되었다. 그뿐이랴? 이런 사회에서 인간은 자신을 돌보는 시간도 빼앗겨 왔다. 총체적인 돌봄의 위기, 돌봄의 공백상황이다.


세 아이의 엄마인 여성공무원이 직장에서 쓰러진 후 정부는 뒤늦게 매월 1회 금요일 4시 퇴근을 제도화하겠다고 발표했다. 노동시간 단축인가? 아니다. 일찍 퇴근하는 만큼 빠지는 근무시간을 다른 날에 덧붙이겠단다. 이것은 좋은 제도인가? 돌봄 윤리의 관점에서 보면, 결론은 부정적이다. 우리의 일상적 돌봄은 1일 단위로 이루어지며, 매일 일상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밥을 지어 먹고, 아이들을 돌보고, 쉬어야 하는 것은 매일 치러야 하는 재생산 노동이다. 한 달에 한번 몰아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평일 근무시간이 늘어나고 그만큼 퇴근이 늦어지면 돌봄은 더 힘든 일이 될 것이다. 일하는 부모들은 더 늦어진 퇴근에 발을 동동 굴러야 하고, 아이들은 엄마 아빠의 귀가시간을 더 오래 기다려야 할 것이다.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노동시간 조정인가? 노동시간 단축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노동시간 에세이] 대선 이후, 우리의 시간은 어떻게 바뀌어야 하나? /2017.3

노동시간의 문제를 공론의 장으로


김형렬 노동시간센터장


칼퇴근법, 저녁이 있는 삶,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창출, 연간 노동시간 상한제 등, 벌써 노동시간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다. 그러나 장시간노동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최소한의 기본적인 제도조차 오랫동안 국회에서 통과되지 못하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는 지난 2월 주당 최대 근로시간을 현행 68시간에서 52시간으로 낮추는 내용을 담고 있는 근로기준법 개정안을 처리하지 못했다. 주당 노동시간에는 주말근무는 포함되지 않는다는, 잘 이해되지 않는 셈법이 지금까지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적 입장이다.


최근 정부에서 내놓은 또 하나의 분노 자극 패키지가 있었다. "금요일에는 4시에 퇴근하자". 이런 정부의 정책안에 대해 시민들은 "집에 가서 일하라는 거냐?" "탁상공론이다" "그동안 사내 소등제, PC 셧다운제, 수요일 가정의 날. 모두 해봤지만, 결국 바뀌는 건 없었다." 등의 의견을 드러냈다. 정책이 실제로 작동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이 마련되지 않는다면 이런 논의구호는 분노만을 가져올 뿐이다.


그런데도 노동시간 문제가 사회적 논의의 장으로 들어온 것은 분명하다. 그것도 우선순위가 비교적 높은 문제로 인식되고 있다. 최근 스웨덴의 요양병원 간호사를 대상으로 하루 6시간 노동을 하는 실험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간호사들의 병가가 줄어들고, 건강상태가 좋아지고, 서비스의 질이 높아졌다는 결과가 보고되었다. 이 연구는 추가비용의 발생 등으로 지속하지 못하고, 당장은 실험으로 그치긴 했지만, 노동시간 단축과 삶의 질 향상이라는 사회적 논의를 촉발하는 효과가 있었다. 


모든 집단에서 이루어지는 이러한 노동시간 관련 논의는 그 자체로 긍정적이다. 다만, 노동시간 단축에 대해 어떤 관점으로 접근해야 하는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노동시간 유연화를 통해, 노동시간의 양극화가 발생하고 파트타임, 비정규직이 증가하는 방향으로 노동시간 단축이 이루어지는 것도 노동시간 단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노동시간을 어떻게 단축할 것인가

유럽에서 진행된 노동시간 단축의 유형을 네 가지로 구분해 놓은 연구가 있다. 첫째는 장시간노동 단축유형이다. 극단적인 노동시간을 줄이는 것이 당연히 필요해서 생겨난 유형이다. 산업화가 진전되면, 장시간노동은 기업의 경쟁력에 효과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노동자들의 건강권을 위해서, 혹은 소비 주체로서의 노동자를 만들어 내기 위해 장시간 노동을 줄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장시간 노동을 줄이기 위해 노동조합이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여러 정치적 캠페인이 진행되었고, 하루 8시간, 주 40시간 쟁취를 위한 대사용자 투쟁이 이어졌다. 


이러한 19세기-20세기 초에 벌어졌던 극단적인 장시간 노동을 줄이기 위한 전략은 여전히 한국사회에 유효하게 남아있다. 특정 산업이나 직종에서 초과근무를 당연시하거나, 생활임금 확보를 위해 자발적인 장시간 노동을 수행하는 경우가 많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노동법 개정을 통해 표준 노동시간을 규정하거나, 노동시간의 최고한도를 설정하는 방식 등이 유효할 수 있다. 민주노총은 최근 연간 1,800시간 노동시간 상한제를 주장한 바 있다. 이러한 정치적 캠페인이 노동법 개정 등을 통해 반영되는 방식이다.


둘째는 진보적 노동시간 단축 유형이다. 자본주의의 생산성 향상과 잉여 가치를 노동자들도 함께 나누는 것에 대한 요구이다. 노동시간 단축을 통해 가족과 공동체 활동의 증가, 삶의 질 향상을 요구하는 것이다. 


셋째는 일자리 나누기 유형이다. 대부분의 대선 주자들이 노동시간 단축을 꺼낼 때 일자리 창출과 연관하여 주장한다. 특히 이러한 일자리 나누기 유형은 경제불황기에 고용유지, 정리해고 회피 목적으로 주장된다. 우리나라 민주노총, 한국노총에서도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창출을 주된 정책 방향으로 주장하고 있다. 


넷째는 노동시간 유연화 유형이다. 이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일하고 주말에는 쉬는 소위 표준노동시간의 개념을 바꾸는 전략이다. 노동자 입장에서는 자신의 시간을 잘 활용하기 위해 자신이 원하는 시간에 노동하고자 하는 것이고, 사업주는 노동시간과 영업시간을 일치시키지 않아도 되는, 24시간 이윤을 창출하는 구조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유연화를 통한 노동시간 단축은 주말노동과 다양한 형태의 파트타임 증가를 낳고 있다. 돌봄노동을 위한 목적과 삶의 시간에 대한 재량적 사용이라는 노동자의 목적이 온전히 고려되기보다는 노동에 대한 효과적 사용이라는 사용자의 목적에 맞게 활용되는 양상이다. 그래서 비정규직의 증가, 교대제 확대, 노동시간의 양극화 발생 등의 문제가 드러나기도 한다.


노동시간의 문제는 노동법 개정이나 단체협약을 통해 노동시간을 단축하는 것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개별 기업 수준의 이행 과정은 업종이나 기업별 특성, 노동자들의 요구에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또한, 사회보장 수준, 교육, 주거 등의 사회 문제와도 연결되며, 직접적으로 임금 수준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 생활임금이 확보되지 않은 노동시간 단축은 있을 수 없으며, 사회보장 수준이 부족한 상황에서 임금확보를 위해 자발적인 노동시간을 늘리는 현상을 막아내기 어렵다.


대선 이후, 우리의 노동시간은 어떻게 바뀌어야 하나

대선을 준비하는 것이 꼭 대선후보들만의 몫은 아니다. 대선 시기에 우리 사회의 주요한 사회적 의제를 만들고 논의를 통해 정책적 대안을 만들어 내는 것은 우리 모두의 역할일 수 있다. 노동시간센터에서는 "대선 이후, 우리의 노동시간은 어떻게 바뀌어야 하나?" 라는 기획연재를 준비했다. 이 기획의 첫 번째 주제로, 사회 정책 차원에서 육아를 비롯한 돌봄노동에 대한 노동시간 문제를 다룰 예정이다. 육아휴직에 대한 다양한 정책 제안이 쏟아져 나오고 있고, 이는 저출산 예방대책으로도 논의되고 있다. 육아를 위한 단시간 노동도 이미 많은 논의와 비판이 있었다. 돌봄 노동을 위한 우리의 시간은 어떻게 사회적으로 확보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담길 것이다. 두 번째 주제로는 "노동시간 특례제도와 과로의 기준"을 다룰 예정이다.


이미 과로사의 문제가 우리 사회에서 심각한 쟁점이 되고 있고, 극단적인 장시간 노동의 문제가 여전히 중요한 해결과제로 남아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노동자 절반이 노동시간 특례제도에 의해 주당 12시간까지만 연장근무를 허용하는 현재근로기준법의 예외 업종에서 일하고 있다. 주요 서비스 노동자, 운전노동자, 경비 업무 등 다양한 분야의 노동자들은 52시간, 68시간을 넘어 주 80시간 노동도 불법이 아닌 상태에 놓여 있다. 이런 법 규정에서는 장시간노동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직업병으로 인정되는 과로의 기준을 고찰하는 글이 될 것이다. 


세 번째 주제는 야간노동과 교대근무를 줄이기 위한 정책적 방안을 다룰 것이다. 야간노동이 암 발생을 유발한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병원, 소방, 경찰 등의 공공서비스 영역에서 야간노동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그 외 영역에서 수많은 야간노동과 교대근무는 우리 사회에서 꼭 필요한 것일까 고민해야 한다. 이를 최소화할 수 있는 정책적 방안에 대한 고민을 담을 예정이다. 


네 번째 글은 과연 노동시간만 줄이면 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노동시간은 줄였으나, 노동하는 시간 '동안'의 문제가 여전히 남아있다면? 단위 노동시간 동안 노동강도가 증가하거나, 감정노동, 직무 스트레스 등의 문제가 있다면, 이는 노동시간을 줄이는 것만의 문제로 해결될 수 없는 또 다른 논의를 만들어 낼 수 있다.


노동시간을 둘러싼 사회적 논의는 이번 기획에서 다루는 주제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앞서 언급 했던 임금, 교육, 주거의 문제 등 다양한 사회 문제들과의 연결고리를 다루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하다. 관행화되어 있는 야근 구조, 조직 내 권위적인 문화, 심야 공공 교통 서비스 정책, 시간제 임금 구조, 관행적인 기한 압박으로 인한 몰아치기 노동 등도 지속적인 고민이 필요한 주제들이다. 


이제 곧 선거를 앞두고 있다. 선거가 끝나도 이 고민이 중단되지 않기를 바란다. 세상을 바꾸기 위한 고민과 과제가 많지만, 당장 먼저 해야 할 것도 있으니까.

[노동시간 에세이] 노동시간 줄이겠다는 노동부, 행정해석이나 우선 변경하길 /2017.2

노동시간 줄이겠다는 노동부, 행정해석이나 우선 변경하길 



김재광 노동시간센터

 


벚꽃 대선이 유력해지자 대선주자들이 다양한 정치 정책 구상을 적극적으로 내놓고 있다. 이 중에는 노동시간에 대한 것도 빠지지 않는데, 주로 장시간 노동의 제약, 노동시간의 실제적인 단축을 거론하고 있다. 그 진의와 실효성에 대한 논란은 있을 수 있으나, 어찌 되었든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한국의 경우 수년간 세계적으로도 긴 노동시간을 자랑(?)하고 있고, IT 발달로 인한 숨겨진 노동시간의 연속이 문제가 되는 와중에 대선후보들이 이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리라.

 

한편, 노동시간 단축과 관련하여 버스광고, 영화광고 등에 열을 올리는 정부부처가 있다. 바로 고용노동부이다. 노동시간과 직접 관련된 부서이므로 노동시간 단축에 열을 올리는 것이 당연하기는 한데, 어쩐지 미덥지 않아 가만히 살펴보니 ‘아니나 다를까’이다. 현행 근로기준법은 주 40시간 이상의 연장근로에 대하여 주 12시간 이상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 즉, 40시간+12시간, 52시간을 주 최대 노동시간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고용노동부의 해석은 전혀 다르다. 요약하면 이렇다.

 

근로기준법에서 노동시간 조항이 말하는 1주는 7일이 아니라 5일이다. 주 40시간과 연장근로 12시간을 합친 최대 52시간의 노동시간은 7일이 아니라 5일에 해당한다. ‘나머지 2일’ 동안엔 법 조항을 적용할 수 없다. 따라서 ‘나머지 2일’에 하루 8시간씩 총 16시간 추가로 일하는 건 위법이 아니다. 고로 현행 근로기준법이 허용하는 최대 노동시간은 52시간이 아니라 68시간이다. 정말 해괴한 논리가 아닐 수 없다. 1주가 7일이 아니라 5일이라니, 연장근로시간과 별도의 휴일근로시간이 존재해서 최장 근로시간이 68시간이라니. 이 같은 고용노동부의 해석으로 인하여 여야 국회의원들은 일주일을 7일로 본다는 사족이 달린 법안을 제출하고 있다. 이러한 고용노동부의 해석은 법정 노동시간 주 44시간인 시절에 나온 자신의 행정해석을 해괴하게 변형하여 따르고 있다. 바로 이것이다.

 

근로기준법 제49조의 규정에 의한 1주 44시간, 1일 8시간의 근로시간 한도는 원칙적으로 1주간 또는 1일의 법정기준 근로시간을 의미함. 동법 제52조의 '1주간에 12시간을 한도로 제49조의 근로시간을 연장할 수 있다'는 규정에서의 연장근로시간에는 휴일근로시간이 포함되지 아니함. 따라서 1주 6일 근무체제하에서 일요일을 근로기준법 제54조의 휴일로 규정하였고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10시간 연장근로를 하고 주휴일인 일요일에 9시간 근로를 하였다면 근로기준법 위반문제는 발생하지 않는다고 사료됨. 근로기준법의 규정에 의한 1주간은 7일간을 의미함. 7일간의 의미는 주휴일부터 기산하여 7일간(일요일∼토요일)으로 하거나 또는 일정한 요일을 시기(始期)로 하여 7일간(수요일∼화요일)으로 하는 등 사업장 형편에 맞게 정하여 운용할 수 있다고 사료됨. 질의회시: 근기 68207-2855, 2000. 9. 19

 

위 행정해석에 따르면 주 44시간제 시절에는 최대노동시간이 64시간(주 44시간 +연장허용시간 12+휴일 8시간)인데, 오히려 주 40시간제에서는 최대노동시간이 68시간이 되는 어처구니없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심지어 1주는 7일이라는 자신의 이전 행정해석조차 따르지 않는 기형적인 왜곡해석을 하고 있다. 이런데도 고용노동부는 잘못된 행정해석을 버리지 않아 노동현장의 혼란과 국회에서의 쓸데없는 법안발의를 양산하고 있다.

 

고용노동부가 최근 열을 올리고 있는 ‘근로시간을 단축합시다.’ 캠페인은 ‘실상 최대 주 68시간 할 수 있는데, 여러 문제 제기도 있으니 이를 최대 52시간을 줄이되, 한시적으로 최대 60시간을 주 허용노동시간으로 하자’는 것이다. 이는 기존의 노동시간을 단축하는 것과 전혀 관계가 없다. 이는 자신의 잘못된 행정해석을 합리화하고 있는 것이며, 노동시간을 줄이려 노력하는 것처럼 선전하며 국민 혼란스럽게 하고 결국 기만하는 것이다. 고용노동부는 현재의 법령에서 충분히 주당 최장노동시간을 52시간이라고 행정해석을 변경할 수 있으며, 이는 굳이 국회의 법안 통과를 기다릴 필요도 없다. 그런데도 고용노동부는 자신들의 주장과 다를 바 없는 새누리당의 입법안이 개혁입법인 것처럼 진실을 오도하고 있다. 새누리당의 법안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기업 규모에 따라 2020년까지 4단계로 나눠 52시간 상한제를 시행한다. 노사합의가 있으면 2023년 말까지 휴일에 1주 8시간의 특별연장근로를 허용한다. 고용노동부 장관은 2023년 이후까지 특별연장근로를 허용할 수 있다.” 현행 법률에 따라 당장 최장 주 52시간을 강제하는 것이 당연하고 시급한데, 2023년까지 연장하고, 이 시한의 연장마저 고용노동부 장관이 허용할 수 있다니, 이것이 어떤 점에서 개혁입법이고, 노동시간 단축의 안이란 말인가. 앞서 누누이 강조한 바와 같이, 지금이라도 고용노동부가 주 최대허용 노동시간은 52시간으로 행정해석을 변경하면 된다. 지금 논의할 연장시간의 문제는 주 12시간까지 허용된 시간을 어떻게 더 줄일까가 되어야 한다.

 

고용노동부의 행정해석은 국민에게 법규성을 가지지는 않는다. 즉, 행정해석은 법이 아니며 부처 내부의 지침일 뿐이다. 국민에게는 효력이나 강제성도 없다. 그러나 노동현장에서는 법과 판결보다 더 큰 위력을 행사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노동자 측이건 사용자 측이건 현장에서는 고용노동부의 행정해석이 실무적으로 중요한 근거와 명분이 되고 있고 이것이 노사기준으로 왕왕 통용되고 있다. 노사 양측 모두 이견이 있을 때 매번 실력행사나 소송을 할 수는 없으므로 행정해석은 서로의 논리를 강화하고, 설득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이때문에 법규성도 없는 고용노동부의 가이드라인이, 지침, 행정해석이 현장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주당 최대허용 노동시간에 대한 행정해석 역시 마찬가지 지경이다. 고용노동부의 잘못된 행정해석으로 인하여 노사분쟁이 확대 되고, 일부는 소송을 진행하여 사회적 비용을 낭비하고, 국회는 노동시간에 있어 쓸데없는 것에 신경을 쓰다 보니 정작 해야 할 것을 간과하게 되었다. 진정 노동시간 단축을 원한다면 고용노동부는 지금이라도 국회 법안 탓하지 말고, 국민 정서 핑계 대지 말고, 잘못된 행정해석을 바꾸어 주 최장 허용노동시간을 52시간으로 해석하면 된다. 


버스광고, 영화광고한다고 쓸데없이 예산 낭비 하지 말고 개정된 행정명령에 따라 현장을 지도하고 단속하는 것이 고용노동부가 시급히 할 일이다. 대선주자나 여야 정당 역시 이왕 노동시간 단축 법안을 만든다면 ‘주당 허용 노동시간이 52시간이냐 60시간이냐’로 다툴 것이 아니라, 주당 법정 노동시간인 40시간 자체의 단축, 휴일을 포함한 허용 연장근로시간 12시간 자체의 단축을 논의해야 할 것이다.

[노동시간 에세이] ‘꿈 같은 휴가’의 꿈 /2016.12

‘꿈 같은 휴가’의 꿈



권종호 선전위원



2011년 독일 여성가족부 장관이었던 크리스티나 슈뢰더는 휴가를 짧게 썼다는 이유로 여론의 질타를 받았다. 법에서 보장하는 14주의 출산 휴가를 채우지 않고 10주 만에 조기 출근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여성 단체에서는 ‘여성가족부 장관으로서 저출산 시대에 바람직한 가족 모델을 제시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또, 한 방송인은 ‘엄마와 충분한 시간을 보내지 못하면 아이는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할 수 없다’며 공개서한을 보내 지적하기도 했다. 일부 정치인들은 ‘아이를 낳고도 업무를 포기하지 않은 것은 야망이 너무 큰 것’이라고까지 이야기했다.


보장된 휴가도 못쓰는 노동자들

한국이라면 어땠을까. ‘바람직한 가족 모델’, ‘아이의 기본적인 욕구 충족’, ‘지나친 야망’… 짧게 쓴 휴가에 대해서 이러한 이야기를 꺼낼 수 있을까? 오히려 ‘바람직한 공직자’, ‘자기희생’, ‘근면성의 표상’… 이런 말들을 꺼내기가 쉬울 것이다. 그만큼 한국 사회는 휴가에 인색하다. 법적으로 보장된 연차는 1년 이상 근속 시 최소 15일, 근속 2년마다 1일씩 추가하게 되어 있지만, 이를 모두 사용하기가 쉽지 않다. 한국에서는 휴가를 쓰는 것이 동료에게 부담을 주거나 업무에 지장을 초래하게 되기 때문이다. 결국, 법적으로 보장된 휴가를 쓰는데도 동료와 상사의 눈치를 보고, 휴가는 남게 된다.


실제로 고용노동부의 2013년 ‘근로자 연차휴가 사용실태‘ 결과를 보면 근로자는 평균 연차휴가일(14.2일) 가운데 8.6일을 평균적으로 쓰고 5.6일을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온라인 여행 사이트 익스피디아가 전 세계 주요 28개국 직장인 9,424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실제 사용 휴가는 8일로 6년 연속 전 세계 꼴찌를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보장된 휴가임에도 사용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휴가 보상금이라는 기형적인 형태가 생겨났다. 사용하지 못한 휴가만큼 금전적인 보상이라도 받겠다는 것인데, 현재 한국에서는 어찌 보면 당연히 받아야 할 보상이다. 그렇다면 앞서 사례를 들어 이야기한 독일도 이러한 휴가 보상금이 있을까? 휴가를 못 가면 금전적 보상이 당연하니 있을 법도 하지만 독일이나 대다수의 유럽 국가들에는 휴가 보상금이 없다

출처_익스피디아 트래블 블로그 https://travelblog.expedia.co.kr/9720


꿈만 같은 다른 나라 이야기

법적으로 보장된 휴가는 노동자에게 휴식과 행복을 충족시킬 기회이고 정당한 노동에 대한 대체할 수 없는 보상이다. 이러한 법적 강제와 휴가에 대한 배타적인 정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침해받지 않는 독일의 법정 휴가를 1년에 최소 20일로 보장해주었다. 또한, 법에서는 이에 더해 근무일 10일을 연속해서 휴가로 사용하는 것을 권장하고 있다. 주 5일 근무자가 주말까지 사용하면 한 번에 14일을 휴가로 보낼 수 있다. 하물며 이것은 최소한으로 보장된 휴가이며 독일 회사들의 통상적인 휴가 수준은 연 30일이다.


한국이라면 이렇게 휴가를 많이 보장하면 일은 누가 하나 걱정부터 앞설 것이다. 인력을 채용하고 업무를 맡기는 데 있어서 법정 휴가는 크게 고려되지 않기 때문이다. 법정 휴가는 일이 많아지면 자연스레 반납할 수도 있는 것, 남은 휴가는 금전으로라도 보상받으면 되는 것으로 의례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독일 등 유럽의 법정 휴가는 불가침의 영역이기 때문에 인력 규모를 정하고 업무량을 정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고려 사항이다. 직원들의 휴가가 업무 공백으로 이어지지 않게 하려면 그만큼 충분한 인력을 배치하고 적절한 업무분담과 효율적인 인수인계 방법을 만들어 관리하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전 세계 휴양지에 넘쳐나는 독일인을 비롯한 유럽인들과 그들이 휴가를 즐기는 여유로운 모습은 경제 수준의 차이라기보다 보장된 휴가 수준의 차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해 보인다.


노동자에게 휴가를 장려한다고 하지만

한국도 이를 개선하기 위한 제도적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03년 개정된 근로기준법에는 연차휴가 사용촉진 조치가 명시되어 있다. 제정 당시 이 제도의 취지는 ‘그릇된 연차휴가 이용 관행을 바로잡아 연차휴가를 이용한 근로자의 건강과 문화적 생활을 확보하고 다른 한편, 연차휴가 금전보상에 따른 사용자의 경비부담을 낮추는 데 있는 것’이었다.


내용을 간단히 설명하면 사측은 지속해서 노동자에게 연차 사용을 장려해야 하고 그런데도 불구하고 노동자가 7월 20일까지도 모든 연차 일수에 대한 사용 계획을 제출하지 않으면 사측이 임의로 정해서라도 연차를 준다는 것이다. 2003년부터 이런 제도가 시행 중이었다는데 아직도 노동자들의 실사용 휴가는 60% 수준에 불과하다. 어떻게 된 일일까.


이제도는 강제성이 전혀 없다. 사측이 제도에 맞춰 시행하면 효력이 발생하는 것이고 시행하지 않으면 종전대로 휴가 보상금으로 대체하면 된다. 현재 연차사용 촉진제 실시율은 33.3% 정도로 조사되고 있다. 강제성이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차라리 휴가 보상금으로 받는 것이 낫다는 노조측의 생각이 반영되어서 그렇기도 하다. 실제로 연차사용 촉진제는 매우 악의적인 제도이다. 경총이 나서서 제도를 시행하라고 촉구할 정도이니 얼마나 악의적인 것일지 짐작이 간다.


예를 들어보자. 얼마 전 회사에 다니는 친구에게 겨울 휴가 계획을 물었다. 친구는 겨울엔 바빠서 휴가를 낼 수 없다고 했다. 그럼 휴가 보상금이라도 받느냐고 물었더니 몇 년 전부터는 그것도 못 받게 되었다고 했다. 회사에서 연차일수에 해당하는 휴가 계획서를 일단 다 받아 가는데, 일이 바빠서 결국 그 일정에 못 쓰게 되더라도 회사에서는 연차 사용을 권했으나 본인이 사용하지 않았다는 내용의 서명을 강요한다는 것이다. 절대적 약자인 노동자는 상사의 눈치, 인사상 불이익, 업무 차질 등을 모두 감수하면서 연차를 편하게 쓸 수 없을 뿐 아니라 회사가 일정을 정해주는데도 못 쓰고 결국 본인 의지로 사용하지 않았다는 서명까지 하는 상황이었다. 연차사용 촉진제도는 이렇게 회사가 연차사용을 촉구한 근거가 있는 경우 휴가 보상금을 주지 않도록 해주어 연차를 반납하고도 휴가 보상금조차 받을 수 없게 된다.


마음껏 휴가를 누리는 꿈을 현실로

이러한 여러 가지 상황들을 보면 이름만 그럴싸한 연차사용 촉진제도는 현실적으로 연차 사용을 전혀 보장해 주지 못하고 있고 오히려 휴가를 갈 테면 가보라는 식의 강요 후에 사측의 휴가 보상금 지급을 면제해주는 용도로 악용되고 있다. 노동자의 연차 사용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연차사용 촉진제도처럼 강제성도 없고 오히려 악용될 소지가 많은 제도가 시급히 폐기되어야 한다. 그 대신 연차가 휴가 보상금과 같은 형태로 대체될 수 없는, 노동자의 휴식과 건강, 행복 추구를 위한 불가침의 권리로 보장되는 강력한 제도가 만들어져야 한다. 휴가 보상금을 통한 노동자의 수입 증가는 사라지겠지만 울며 겨자 먹기로 일하지 않아도 되고 보장된 휴식의 시간을 마음껏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일이 바빠서 휴가를 반납해야 하는 상황은 인력 충원, 업무 감소가 이루어지지 않고는 해결될 수 없다. 하지만 사측에서 휴가 사용을 위해 자발적으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 하진 않을 것이다. 휴가가 먼저 강력하게 보장되어야 이로 인한 업무 차질을 걱정해 사측에서는 인력 충원과 적절한 업무 분담을 할 것이다. 한국에서 꿈같은 휴가를 죄책감 없이 확실하게 보장받는 것, 노동자가 휴가를 통해 삶의 여유와 행복을 누릴 시간을 갖는 것, 이것이 더는 꿈이 아닌 꿈같은 휴가의 현실이 되도록 만들어 가야 한다.


[노동시간 에세이] 상식이 된 비정상성을 해체한다는 건! /2016.11

상식이 된 비정상성을 해체한다는 건!

 


김영선 노동시간센터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냐!”

 

4일제가 미디어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4일제를 도입하면 연평균 2,000시간이 넘는 장시간 노동의 벽을 허물어 일자리 창출, -가정 균형, 출산율 제고가 가능해진다는 이야기가 반복된다. 시기적으로 수상쩍은 것은 차치하고라도 제도와 현실 간 격차가 한국사회의 극심한 시간 불평등 문제를 전혀 건드리지도 않고 있어 미디어상의 주4일제는 포퓰리즘적 정책에 지나지 않는 일종의 판타지일 가능성이 높다. 제도 만능주의식 제도 도입만으로는 시간권리의 구현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 길은 장시간 노동을 당연함으로 여기는 구조적인 비정상성을 해체하는 데 있다.

 

장면1: “그래도 우리는 평균이에요!” 한 부품업체의 지회장과 인터뷰 때 들었던 답변이다. 여기서 말하는 평균은 월 초과노동시간만 60시간을 넘는데 이는 수요일 빼고 매일 2시간 잔업에 매주 특근을 포 함한 수치다. 평균이란 표현 속에는 장시간 노동이 감내할만한 것으로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정도라는 인식이 깔려있다. 물론 그것이 문제라는 점을 잘알고 있지만 어디인들 안 그렇겠어!”라는 자조가 장시간 노동을 문제 제기의 대상이 아니라 견딜만한 것으로 용인하게 한다.

 

장면2: “그래도 이게 어디야!”라는 아쉬움 속 만족감, “숨 좀 쉴 수 있게 됐다는 안도감, 심지어 이제야 인간다운 삶을 사는 것 같다는 행복감까지 뜻밖의 답변이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한 공사와의 인터뷰 시 직원들이 내놓은 답변이다. 만족감과 안도감, 감사함과 자긍심 또는 성취감이나 우월감도 엿볼 수 있던 인터뷰였다. 직원들이 입이 닳도록 칭찬한 것은 리프레시 휴가제, 연차휴가 일부의 앞뒤로 주말을 더 해 10일 가량을 연속해서쉴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당연한 권리임에도 휴가의 연속 사용을 감사와 자긍심으로 언어화하는 것은 우리의 무효화된권리 상태를 반증하는 양상이라고 본다.

 

특정한 양상이 반복되면 하나의 패턴이 생겨나고 나아가 그것은 자연스러운 질서로 구축된다는 앙리 르페브르의 표현대로 당연하지 않은 것임에도 그것이 반복되면 하나의 상식으로 여겨지고 일종의 자연 상태를 구축하게 마련이다. 장면1과 장면2는 비상식적인 장시간 노동이 자연화된 사회의 일면들이다. 또한, 제도와 현실간의 격차가 상당히 큼에도 그 격차 자체가 일상이 된 사회, 비당연함이 아무렇지 않게 여겨지는 사회의 일상 풍경일 것이다.

 

사회 구조와 감정 구조는 긴밀하게 연동된다. 장시간 노동이 일상이 된 사회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표현들은 그 사회의 감정 상태를 드러낼 것이다. “다 그래, 당연한 거 아냐!”, “다들 그러는데 어쩌겠어!”라는 냉소 섞인 탄식, “어쩔 수 없다는 무기력,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냐!”라는 비관적인 태도 또는 유별나게 왜 그래!”라는 핀잔을 듣지 않는 수준에서 장시간 노동을 회피하는 전략, 역설적으로 자유시간을 스스로 포기하고 다시 일터로 회귀하는 모습까지! 시간의 권리가 온전히 작동하지 못하는 사회의 웃픈 감정 상태들 아닐까 싶다.

 

이런 상태에서는 자유 시간의 가능성과 희망을 최대화하는 방향의 삶을 선택하고 실천하려는 표현들보다는 바람과 기대를 스스로 낮춤으로써 차라리 제약의 테두리(장시간 노동 체제)적응하는 게 낫다는 순응주의적 표현들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그래도 이게 평균이에요라는 표현은 장시간 노동의 박탈 효과가 얼마나 고약한지 인지하지 못하는 저인지 상태 또는 자유 시간이 박탈됐다는 감각이 무뎌진 상태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장시간 노동에 따른 박탈 효과는 굳이 여기서 언급하지 않아도 주변에서 흔하게 발견할 수 있다. 장시간 노동은 자유 시간의 폭을 현저히 축소시켜 골병과 과로사의 위험성을 높이는 것은 물론 세계와의 교류 가능성과 상상의 가능성을 떨어트려 다르게존재할 가능성을 박탈한다. 건강을 챙기고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가족을 챙기는 일련의 방식들이 유독 상품 집약적인 서비스에 의존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도 시간 박탈감을 최대한 보상받으려는 몸부림 또는 박탈을 최소화하려는 회피 전략의 결과들이다.

 

낡은 질서에 덧대진 새로운 테크닉들

시대나 사회마다 상식의 범주들이 있다. 상식의 범주들은 특정한 맥락 속에서 다양한 장치들을 통해 생산된다. 이를테면 발전국가 시기의 인간형인 근면 주체는 조국 근대화의 기치 아래 잘살아 보세와 같은 구호, 공장 새마을운동의 깃발, 근면 정신 교육, 모범 근로자 상, 사회정화프레임 등을 통해 만들어졌다. 이런 근면 주체는 희생(저임금-장시간 노동)을 감내하고도 내달릴 수 있도록 동원된 주체 상이었다. 그런데 상식의 범주는 시대나 사회의 변동에 따라 마찬가지로 변화한다.

 

그렇지만 장시간 노동이라는 낡은 사물의 질서, 낡은 존재의 질서, 낡은 사회의 질서가 해체되지 않은 채 비정상 상태는 더욱 고착되고 있다. 저임금-장시간 노동은 과거 발전주의의 유물만은 아니다. 새로운 신자유주의 장치들은 비가시적인 방식으로 또는 자기 통치의 방식으로 장시간 노동이라는 비정상성을 재생산하고 있다. 현재의 과로사는 발전주의적 폭력과 신자유주의적 폭력이 중첩된 필연적 산물이다.

 

지난 한 해 직장인의 공감을 얻은 신조어 1위인 메신저 감옥이라는 표현처럼, 스마트폰 이후 사람들은 퇴근하더라도 일상이 일의 요소에 의해 간섭받을 가능성에 항상 노출되고 있다. 레이그 램버트는 이를 정보 시대의 그림자 노동이라 일컫는다. 일상에의 업무 간섭정도가 높아진 만큼 스트레스가 증가했음은 물론 개인의 자유 시간이나 여가가 더욱 단절적이고 파편화되리라 예측 할 수 있다. 이는 길이의 관점을 넘어 배치의 관점에서 시간의 문제를 고민해야 할 지점이자 기술의 자본주의적(신자유주의적) 사용을 공동선의 관점에서 문제 삼아야 하는 지점이다.

 

한편, 성과 장치는 사람들 스스로 자기개발에 더욱 신경쓰고, 자기평가에 엄격하고, 자기책임을 다하도록 내몰고 있다. 일명 자기계발하는 주체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인간형이다. 자기계발하는 주체는 규율화된 근면 주체처럼 일터를 벗어난다고 해서 성과평가로부터 자유로워지진 않는다. 일터 밖 일상에서도 자기분석-자기개발-자기평가-자기책임을 더욱 경쟁적으로 알아서 수행해야 할 운명에 놓여있는 존재다. 자기계발이란 이름의 주술은 한 톨의 자유시간까지도 경쟁력을 드높이는 연료로 태워져야함을 주문한다. 우리는 신기술의 파괴적 효과와 모든 문제를 개인 내부의 문제로 환원하는 자기 통치 장치들의 문제가 있는 요소들이 어떠한 태클 없이 일터와 일상에 파고들어 장시간 노동을 재생산하는 지점을 가시화하고 그 연결고리를 적극적으로 차단할 필요가 있다.

 

비정상 상태에서 다른 삶을 발명한다는 건!

장시간 노동에 대한 개인의 해법은 다양하다. 누구는 시간 관리를 더욱 효율화하는 방식을, 누구는 시간 절약 상품을 구매하는 방식을, 누구는 가사·육아·간병 등을 외주화하는 방식을 취한다. 그렇지만 이 모두는 상품 서비스에의 의존성을 높일 뿐이다. 시간 권리의 촉진과 관련된 것은 아니다. ‘상품 서비스에 기댄개별적 해법들은 소비자본주의의 자장에서 맴돌게 할 뿐 장시간 노동이라는 비정상의 테두리를 문제 삼지 못한다.

 

공동선의 관점에서 시간 권리를 지향하는 언어들이 어느 사회, 어느 시기보다 더욱 요구되는 상황이다. 상품소비에 기댄 개별화된 방식이나 제도 만능주의식 제도 도입은 비정상성의 덩어리를 해체하는 데 한계가 자명하다. 물론 비정상성을 떠받치는 얽힌 고리들을 끊어내는 게 만만치만은 않다. 비정상성은 초자연적 힘으로 저절로 해체되는 것이 아니다. 할리우드식 영웅이 나타나 악의 요소를 모조리 제거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문제 해결의 만능열쇠가 있는 것도 아니다. 비정상의 해체가 내재한 필연도 아니다. 비정상성의 얽힌 고리들의 배치를 하나씩 전환하는 작업이 필요할 텐데, 여기에는 1) 앞서 언급했던 신기술의 자본주의적 사용을 제한하는 조치와 경쟁적 성과 장치의 반인권적 요소들을 제거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2)뿌리 깊게 베어 일상 속 알게 모르게 관통하고 있는 기존의 노동 규범들은 일상의 언어, 관계의 방식, 성공의 재현, 문화적 형태로 유통·소비되면서 삶의 폭, 삶의 방식, 상상의 가능성을 옥죈다. 장기적으로는 기존 규범, 기존 판단 기준, 기존 인식 틀의 당연함을 낯설게 하고 비틀 필요가 있다. 3) 다른 상상/기획을 희석하고 포위해 버리는 담론들은 형태를 달리하면서 반복 출몰해 장시간 노동을 자연화한다. 이에 대항하는 언어를 발명하는 작업 또한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 여기에는 자본주의 노예제살인으로 간주되지 않는 살인같은 공격 화법을 동원해 사회 구조적인 자유 시간의 박탈을 폭력으로 간주해 그 폭력 양상을 드러내는 작업에 서부터 게으를 권리저녁 있는 삶같이 다른 삶의 선택 가능성을 높이는 작업이 유용할 것이다. 4) 장시간 노동을 존속시키고 있는 큰기둥인 임금 체계의 부적절함을 개혁하는 것을 포함해 새로운 소득 구조를 요구하는 작업도 병행되어야 한다. 5) 이와 함께 제도 차원에서는 장시간 노동을 대놓고조장하는 고질적인 제도들을 제거하고 제도의 현실성을 높이는 작업도 요구된다. 그렇지 않는다면 장시간 노동이라는 비정상성을 방기한다는 혐의에서 벗어나지 못할뿐더러 하루가 멀다고 발생하는 과로사의 행렬을 막을 수 없다.

 

상식으로 굳어진 비정상성을 해체한다는 건 아마도 혹자의 말처럼 이교도가 되어야 할 각오” 를 요구할지도 모른다. 다른 기획, 다른 욕망, 다른 실천, 다른 삶을 발명한다는 것은 아마도밟아 본 적 없는 고향, 가나안 땅으로 달려가려는 파라오 체제의 히브리인들이 품은 열망만큼이나 두려움을 수반하고 믿음을 요구할지도 모른다. 물론 이게 사는 건가?”, “이렇게 살아야 하나처럼 현재의 비정상 상태를 상대화하는 목소리들이 이곳저곳에서 꿈틀대고 있다. 이는 그 자체로 새로운 가능성의 조건일 수 있다. 일종의 자기에 대한 자유의 가능성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비정상성의 당연함을 비 당연시하는 목소리들이 이어지도록 연결할 차례다.

 

제도 차원의 시간 단축이 시간 권리를 반드시 보장하지는 않는다. 시간 단축은 자유 시간 그 자체가 아니라 실질적인 자유를 누리기 위한 조건 중 하나다. 단순히 시간 단축을 위한 노력뿐만 아니라 쉼을 적극적으로 실천할 필요가 있다. 윌터 브루그만의 표현을 빌자면, 쉼은 그 자체로 자유 시간을 송두리째 앗아가 버리는 신자유주의적 장시간 노동체제에 맞선 저항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제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주체를 발명하기 위해서는 쉼을 향한 감각과 역량을 자극·교육해야 한다. ‘개미와 베짱이류의 근면 이데올로기만을 반복한다면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상상/욕망/경험/실천/존재할 가능성을 발명하기란 어렵기 때문이다.

 

 

[노동시간 에세이] 일과 개인적 삶의 균형을 위해 /2016.10

일과 개인적 삶의 균형을 위해

 

 

 

송한수 직업환경의학 전문의, 조선대 직업환경의학 교수

 

 


1. 일과 개인적 삶의 갈등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결국 ‘역할’을 갖는 것이다. ‘역할’은 어떤 책임을 부여받는 것이며, 살아가는 방식이기도 하다. 사람은 나이에 따라 새로운 역할을 부여받는다. 자녀이면서 학생이기도 한 청소년기를 거쳐, 성인이 되어 남편 또는 아내이기도 하고 엄마 또는 아빠가 될 수 있다. 직장에서는 구성원으로서 어떤 업무를 책임진다. 친구의 역할도 소중하고, 할아버지 또는 할머니의 역할도 갖게 될 수 있다. 우리는 인생에서 맞이하는 새로운 역할들을 잘 해내기 위해 노력하고 그 과정에서 성장한다. 감당해야 할 다양한 역할들은 성장 속에서 균형과 조화를 찾아가지만, 때로는 충돌하거나 갈등을 일으킬 때도 있다. 이 글은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사례인 일과 개인적인 삶, 또는 일과 가정 사이의 갈등에 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여기 두 가지 질문이 있다. 첫 번째 질문은 다음과 같다. ‘당신은 직장에서의 역할 때문에, 가정에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기 어려운 상황이 얼마나 자주 있습니까?’ 당신은 이 질문에 어떤 상황을 떠올렸나? 몇 가지 예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A씨는 직장에서 상사의 부탁으로 어떤 일을 오늘 내로 완결지어야 했다. 이 일은 회사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라, 결국 정시 퇴근을 포기하고 회사에 남았다.
B씨는 회사를 옮기기 전까지 퇴근 후 정기적으로 배드민턴 동호회 활동을 했다. 새 직장은 이전 직장보다 급여는 더 높았다. 그러나 퇴근이 늦어지는 경우가 빈번했다. 결국, 불규칙한 연장근무로 퇴근 이후의 시간이 안정적이지 못하여 동호회 활동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C씨는 자동차 공장의 조립공정에서 일하고 있다. 어깨와 팔을 반복적으로 움직이는 근골격계 부담 작업을 수행한다. 최근에 공정이 변경되어 어깨 부담이 가중되면서 통증이 생기기 시작했다. 퇴근 후 통증 때문에 집에서 아무 일도 하지 못했고, 병원에 가야 했다.
D씨는 올해 다른 지역으로 발령을 받았다. 자녀의 교육문제로 가족이 함께 이사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 D씨는 회사 근처의 원룸을 구해 혼자 생활하고 있다. 그는 가족과의 단절로 인해 고립감을 느끼고 있다. 퇴근 후의 시간은 주로 비슷한 처지의 동료들과 술을 마시면서 보내고 있다.

어떤 경우는 A씨처럼 역할의 갈등이 일시적일 수 있다. 그러나 직장에서의 역할로 인해 개인적 삶은 지속적으로 또는 크게 방해받을 수 있다. 당신은 어떠한가?

 

두 번째 질문은 다음과 같다. ‘당신은 가정에서의 역할 때문에, 직장에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기 어려운 상황이 얼마나 자주 있습니까?’ 당신은 이 질문에 대해 어떤 상황을 떠올렸나? 예를 들어 보자면 다음과 같다.

E씨는 맞벌이 부부의 직장맘이다. 남편보다 출근이 늦어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는 일을 맡고 있다. 어느 날 아침, 아이가 감기에 걸렸다. 유치원에 보낼 수 없는 상황이고 부탁할 사람도 없다. 그래서 아이를 병원에 데려가느라 늦게 출근하게 되었다.
F씨는 입시를 앞둔 자녀가 있다. 다른 사람들은 수십만 원의 입시컨설팅을 받는다고 하지만 F씨는 그럴 형편이 못되었다. 그래서 업무시간 중 입시 관련 정보를 찾기 위해 웹서핑을 하는 시간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G씨는 임신 8개월 직장맘이다. 원래 교대근무를 하고 있었는데, 임신 이후 야간근무는 하지 않고 있다. 최근에 배가 무거워지면서 예전처럼 활발하게 일을 하기 어려워졌고, 동료들에게 자신의 업무를 부탁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 경우도 F씨처럼 역할의 갈등이 일시적일 수도 있다. 하지만 가정에서의 역할 때문에 직장의 역할이 방해받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역할의 갈등은 남성보다 여성들이 크게 느낄 것이다. 당신은 어떠한가?

 

 

2. 개인적인 삶의 가치
‘일이 중요한가? 개인적인 삶이 중요한가?’ 만약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당신은 주로 어느 쪽을 선택하게 되는가? 개인적인 삶의 가치는 일의 가치보다 낮게 평가되는 경향이 있다. 일은 직장 공동체가 공동으로 가치를 만들어 내기 때문에 더 크게 느껴질 수 있다. 황우석 박사가 말해서 유명해진 ‘월화수목금금금’에 대해 생각해보자. 줄기세포 연구로 불치병 환자들에게 새로운 삶을 선사하는 일은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가? 그래서 연구 성과를 앞당기는 것과 주말의 개인적 삶 중에, 전자가 선택되었고 후자는 희생되었다. 또한, 이러한 결정은 책임자가 주도하는 경우가 많지만, 당사자 스스로 선택하기도 한다. 왜냐면 일의 가치는 나의 삶의 중요한 가치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인적 삶의 가치에 대해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일은 삶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지만, 나의 전부는 아니다. 누구나 일 이외의 개인적 삶이 있다. 그리고 개인적 삶 중에서 상당한 시간은 가족과 함께 보낸다. 예를 들어, 가족과 함께 식사하고, 쇼핑한다. 자녀가 어떤 학원에 갈지 결정하거나, 다음 주 부모님 생신 때 무엇을 할지 이야기한다. 가족이라는 단위를 통해 미래의 사회구성원을 교육하고, 성장시키고, 돌본다. 그리고 노동자들에게 다음 날 다시 일하기 위한 휴식과 수면의 공간을 제공한다. 이러한 기능은 물질적 요소뿐만 아니라, 성장 과정의 갈등과 어려움을 나누고 상호지지해주는 심리적 요소를 포함한다. 따라서 가족은 한 사회를 재생산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너무나 일상적이고 소소한 개인적인 삶은 마치 물이나 공기와 같아서 평소에는 소중함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다가 이러한 평화가 갑자기 사라져버렸을 때,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

 


3. 일과 개인적 삶의 균형에 찾아온 변화
개인적 삶의 가치가 하찮게 여겨지고 일의 가치만 중요하게 여겨서, 삶 대부분을 일로 보내는 현상을 흔히 일 중독(workaholism)이라고 한다. 우리나라는 일 중독의 경향이 사회적으로 지지가 되고 있는 사회다. 이 경향은 전체주의, 장시간 노동, 남성생계부양자 모델이라는 토대 위에서 강화됐다. 전체주의는 전체를 위하는 것이 개인을 위하는 것이고, 전체를 위한 개인의 희생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인다. 장시간 노동은 주변국의 자본(capital)이 최대의 이윤을 얻는 방법이다. 남성생계부양자 모델은 고정된 성 역할에 근거하여 남성이 생계부양자로 가계수입을 책임지고, 여성은 가정에서 재생산을 담당하는 모델이다. 이는 남성이 가정에서의 역할을 포기하는 것에 알리바이를 제공해주면서, 여성이 남성보다 낮은 임금을 받게 만드는 근거가 된다. 그러나 상황은 달라지고 있다. 전체주의는 민주화를 통해, 장시간 노동은 노동시간 단축을 통해, 남성생계부양자 모델은 여성의 사회적 진출을 통해 도전받고 있다.

이러한 역동적인 변화 속에서 우리는 일과 개인적 삶의 균형을 어떻게 찾아가고 있을까? 한 가지 사례를 이야기해보자. 국내의 모 완성차 제조사는 주야교대근무제에서 주간연속 2교대제로 전환했고, 모기업의 변화에 맞추어 하청회사들도 비슷하게 교대제를 전환하여 수십만 명의 노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이 변화의 핵심은 심야시간대의 노동시간을 줄이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노사 간의 협상이 있었고, 노동조합 내부에서도 의견대립이 있었다. 사업주는 생산성의 하락을 우려했으며. 조합원들은 노동강도의 강화나 임금삭감에 대해 우려했다. 결국, 이 제도는 합의를 이루어 시행되었다.

이후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여가의 증가와 수면 문제의 개선이었다. 여가의 증가는 가족과 보낼 수 있는 더 많은 시간, 나를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더 많은 시간을 의미했다. 제도 시행 전후를 분석한 연구에서 앞서 이야기했던 ‘직장의 역할로 인한 가정 역할의 방해’가 크게 완화되었고, 이 때문에 노동자들의 정신건강 수준이 크게 향상되었음이 확인되었다. 반면에 이혼율이 증가하거나, 가족 간의 갈등이 심해지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새롭게 생긴 시간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경우도 있었다. 토대가 달라지면 큰 변화가 생기지만, 그 변화가 올바른 방향으로 전환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측면에서의 노력이 필요한 것 같다.

 

 

4. 일과 개인적 삶의 균형을 어떻게 지원할 것인가?
종합병원 간호사들의 ‘임신순번제’가 사회적 논란이 되었다. 여성이 다수인 종합병원의 간호사 중 여러명이 같은 시기에 출산휴가를 가면 인력 공백이 발생한다. 이는 모든 종합병원이 공통으로 겪는 문제다.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만약 중간관리자들이 전체주의적인 사고를 하고 있었다면, 전체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인권적 가치를 무시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병원만의 일일까? 많은 여성이 회사를 선택하는 대신 결혼 또는 출산을 포기하거나, 회사를 포기하고 출산과 육아를 선택한다. 상황은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생계임금에 미치지 못하는 최저임금과 초과노동 임금할증제도로 인해, 주 40시간만으로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운 저소득 노동자들은 자발적으로 장시간노동이나 야간노동을 선택한다. 그래서 노동시간의 단축을 시도하면, 장시간 저임금 노동자에게 임금하락이라는 역설적인 상황이 초래된다. 장시간 노동은 ‘일을 위해 개인적 삶의 상당 부분을 포기한 삶’이라는 사실을 전제에 놓지 않으면 문제 해결이 어려워진다.

일과 개인적 삶의 균형은 인간의 보편적 권리이며, 임금, 노동시간, 노동 건강, 복지를 아우르는 상위개념이다. ‘출산율을 높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인간다운 삶을 위해 임금을 인상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사회적 의제를 생각할 때 ‘일과 개인적 삶의 균형’은 먼저 고려되어야 한다. 과거에는 직장을 위해 개인의 삶을 희생시키는 것을 당연시했다면, 이제는 개인의 삶을 위해 직장과 사회가 더 많은 기여와 지원을 해야 한다는 인식이 퍼지고 있다.

래서 우리는 ‘일과 개인의 삶이 조화를 이루는 사회’라는 지향을 좀 더 분명하게 밝힐 필요가 있다. 이런 변화가 어려워 보이는가? 이미 현대사회는 사회보장제도를 통해 재생산영역의 지원을 공적 의무로 이양하고 있다. 더 많은 공적 육아, 공적 교육, 공적보건의료제도를 만들어가고 있다. 남성생계부양자 모델이 해체되면서 남성이 육아와 가사노동을 담당하는 비중도 증가하고 있다. 몇 해 전부터 남성이 육아휴직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는데, 벌써 여성 육아 휴직자의 10%에 근접하고 있다. 미래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그려보자. 직장에서 무재해나 안전제일과 같은 표어처럼 이제는 ‘가정 친화적 직장’이라는 의제 하에 정시퇴근, 모성보호, 가정지원이라는 표어를 확산시키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거스를 수 없다. 그러나 그 변화를 앞당기고 성공적으로 정착시키기 위해 의식적 변화를 촉진할 수 있는 자원(resource)도 필요하다. 과거의 관념은 관성처럼 남아 있어, 직장인 여성에게 가사노동의 의무를 지우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남성들이 여전히 있기 마련이다. 가족과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더 많아졌음에도 자녀와의 대화가 어려워서 상황이 더 악화할 수도 있다. 그래서 페미니즘교육이나 부모학교와 같은 프로그램이 더 필요하다. 무엇보다 자신을 돌보고, 일과 삶의 균형을 위해 스스로 성찰하고 성장할 수 있는 마음 교육이 모든 직장인에게 일반화되어야 한다

 

[노동시간에세이] 노동자가 아닌 노동자들, 그들의 노동시간 /2016.9

노동시간, 가치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콜라비 운영집행위원



울 집값이 비싸다고 익히 들어오긴 했지만, 20년 넘게 서울에 살았어도 잘 몰랐다. 집값이 계속 오르고 있다는 뉴스나 고시원에 사는 청년들, 쪽방에 사는 노인들 이야기를 언론에서 접하며 심각한 사회적 문제라고 인식하고 있었지만 부모님과 함께 살다보니 와 닿지 않았나 보다. 


그러다 올해 초, 살 집을 직접 찾아보면서 그제야 집값이 '비인간적으로' 비싸다는 것을 '체감'했다. 은행의 도움(?)으로 비싼 전세금을 치르고 서울 모처의 작은 아파트를 얻었다.

그 후로는 한동안 거리를 다니며 아파트 건물이 눈에 띌 때마다 '저 수많은 집들도 많이 비싸겠지?', '저 집에 사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다들 나처럼 은행 대출을 받아서 사는 걸까' 따위의 생각이 절로 들었다.(참고로 필자는 현실 경제에 밝은 편이 아니다.) 


매달 얼마씩 갚아나가야 대출금을 모두 상환할 수 있을지 계산해보니 어이가 없어서 한숨이 나왔다. 게다가 아이를 낳아 키우는 상황은 계산에 고려하지도 않은 것이다. 또 대출금을 갚는 동안 큰 병에 걸려 예상치 못한 병원비가 많이 들 수도 있다.


한편, 올해부터 새롭게 일하게 된 직장에서는 운 좋게도 하고 싶던 분야의 일을 하고 있다. 일의 특성상 스트레스가 꽤 있긴 하지만, 특별한 상황이 아니면 대부분 주말 이틀과 공휴일에 쉴 수 있다. 실적에 대한 압박이나 칼 퇴근을 한다고 눈치 주는 사람도 없다. 

같은 업계의 다른 사람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급여를 받는다는 점을 제외하고 (아직까지는) 상당히 만족스러운 직장이다. 퇴근 후에는 집에서 저녁을 먹으며 그날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남편과 이야기 나누고, 운동을 하거나 책을 읽는다. 

두 달 전부터는 우쿨렐레를 연습하고 있다. 다가오는 주말에 전시회 구경을 갈지, 어떤 영화를 볼지 고민한다. 일-가정 균형(work-life balance)이라는 것이 이런 거구나, 하고 몸소 느끼고 있달까. 

앞으로 다른 어떤 일을 하게 되더라도 이런 균형이 유지되는 삶을 살고 싶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런 생활이 지속될지는 알 수 없다.(아이가 없는 부부라서 이런 여유가 가능한 것이겠지만 육아는 또 다른 문제이니 차치해둔다.)

이런 기분 좋게 균형 잡힌 일상을 누리고 있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생활을 유보하고 가능한 좀 더 급여를 많이 받을 수 있는 직장으로 옮겨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이따금씩 드는 것이 사실이다. 

좀 더 아침 일찍 출근해 늦게까지 일하고, 주말이나 공휴일에도 출근해야 하는 직장으로 옮겨서 일한다면 지금처럼 여유롭지는 않을 것이다. 대출금도 빨리 갚을 수 있을 것이고 더 빨리 집을 사거나 넓은 집으로 이사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늘상 이런 고민에 빠져 괴로워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필자는 전문직(전문의) 종사자이다. 같은 업계의 다른 곳에 비해 급여가 적다고는 하지만, 잘 모르긴 해도 대다수 직장인들과 비교하면 적지 않은 월급을 받고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앞서 구구절절 늘어놓은 고민은, (적어도 내게는) 결국 어떠한 가치를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전문직 종사자인 나조차도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데 다른 노동자들은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더 나은 가치를 선택하는' 상황이 다른 사회구성원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가. 

그렇다면, 더 많은 임금 대신,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적절한 여가를 즐기는 것이 당신의 행복에 이롭다는 캠페인을 열심히 하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상당히 건강한 사회라고 할 수 있겠지만 현재로서는 불가능해 보인다.

2016년 최저임금은 6030원으로 주 40시간 노동시간 기준 월 126만270원이다(주휴수당 포함). 이는 1인가구 월 가계지출 160여만원에 훨씬 미치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법으로 규정된 최저임금 기준조차 잘 지켜지지 않는 듯하다. 

이러한 임금환경에서 노동자가 노동시간에 대한 선택권이 있다고 한들 더 나은 '가치'를 선택하는 상황이 일반적인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경제적 여유와 일-가정 균형 사이에서 어떤 것을 택할 수 있겠는가. 스스로 중요하다고 여기는 가치가 무엇인지와는 상관없이 더욱 긴 노동시간에 내몰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장시간 노동을 강력하게 규제하는 법적·제도적 장치가 마련된다고 하더라도, 낮은 임금수준에서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시간을 일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최저임금 수준의 획기적인 상승 없이 노동시간을 단축하려고 한다면,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을 받는 일부(대기업 정규직, 전문직) 노동자들에게만 가능한 반쪽짜리 구호에 그친다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임금 수준이 어느 정도 담보된다고 해도, 주거비 문제와 의료, 노후 문제를 뒷받침하는 사회 복지체계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장시간 노동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울 것이다

[노동시간에세이] 노동자가 아닌 노동자들, 그들의 노동시간 /2016.8

노동자가 아닌 노동자들, 그들의 노동시간



신경아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 노동시간센터



대학 연구실의 조교, 병원의 인턴과 레지던트, 기업의 인턴사원.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직업을 얻기 위해 수련과정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대학이나 기업의 훈련과정에서 일정 기간 실무 경험을 쌓고 더 높은 수준의 직업적 역량을 갖추기 위해 현장에서 일하며 배우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대개 20대부터 30대 초중반의 젊은이들이고 연구원이나 교수, 의사나 기업의 사원이 되리라는 희망을 품고 노동배움사이에서 분투하고 있다. 보통 장시간 노동이라고 하면 생산직 노동자를 연상하기 쉽지만, 그들만 그런 것은 아니다.


한국에서 노동시간 조사 자체가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지도 의문이지만, 장시간 노동은 특정 산업이나 직업에 한정되지 않는다. 통계적으로 노동시간이 가장 긴 집단은 자영업자이다. 영세사업장의 자영업자들 은 노동시간의 규제를 받지 않아 낮은 수익구조 속에서 장시간 노동을 하는 경향이 있다. 때문에 한국의 장시간 노동은 자영업자의 낮은 소득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법적으로 노동시간 규제를 받지 않는 소위 특례업종의 노동자들도 있다. <근로기준법> 59조에는 운수, 물품 판매 및 보관, 금융보험, 영화, 통신,교육 및 조사연구, 광고, 의료 및 위생, 접객, 소각및 청소, 이용등의 업종에서 사용자가 근로자와 서면합의를 한 경우 근로시간 규제의 대상이 되지 않으며 그밖에 공중의 편의 또는 업무의 특성상 필요에 따라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사업도 여기에 포함된다. 얼핏 보아도 일상생활에 필요한 서비스 제공 업무와 주요 전문적 업무들이 노동시간 규제에서 벗어나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자영업자든 특례업종 노동자든 하루 24시간을 일터에서 보내지는 않을 것이다. 장시간 노동체제라고 해도 먹고 자고 쉬고 이동하는 일상 활동에 필요한 기본 시간은 주어지기 마련이다. 현대 사회는 노예제나 봉건제가 아니라 자유로운임금노동자들의 사회이며 개인은 노동자이자 동시에 시민으로서 그의 고용주와 동등한 시민권을 갖기 때문이다. 그러나 20168월 지금 여기, 하루 6시간 수면도 없이 일을 해야 하는 이들도 있다. 바로 수련노동자들이다. 대한민국의 법과 각급 기관의 인사규칙, 심지어 이 들이 작성한 고용계약서에도 있지만, 정작 현실에서는 없는 것. 그것들 중 하나가 수련생의 노동시간 규제다. 정부는 201410<대학원생 권리장전>(대통령직속 청년위원회)을 발표하고 대학원생 이 조교로 일할 경우 근로시간과 근로내용, 임금기준의 정보를 제공하고 준수할 것을 명시했지만, 이 규정이 대학에서 얼마나 지켜지는지는 알 수 없다. 어떤 효과적인 처벌 규정도, 현실 점검을 위한 후속 절차도 명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자는 지금까지 대학의 어떤 연구실에서 노동시간 규정이 엄격하게 준수되고 시간을 넘겨 일할 때는 조교의 동의를 얻으며 초과근무 수당이 지급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없다.


필자의 과문한 탓과, 조교를 노동자이기보다는 학생으로 생각하는 교수들의 입장, 대학의 형식적 관리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조교들의 노동시간이 대학사회의 중요한 '노동문제로 제기되고 있다는 소식은 아직 들리지 않는다. 더 이상 참을 수없게 된 그들이 스스로 조직화해서 문제를 제기하고 있지만, 여전히 조교 노동자’(조교로 일하는 대학원생들을 연구 노동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조교 업무에는 연구 지원뿐만 아니라, 교육과 행정 업무를 전담하는 경우도 있어 이 글에서는 조교 노동자로 부르기로 한다.) 는 노동자이기보단 학생며 교수의 제자이다. 따라서 이들 수련생들에게는 노사관계보다 사제관계가 더 우선한다. 대학병원 인턴의 경우 그들의 관리 책임을 맡은 부서는 고용노동부가 아니라 교육부라는 사실이 이를 보여준다. 일을 시키기보다 가르치는 데 목적을 두고 학생들을 지원하기 위해 힘들게 프로젝트를 따와 연구실을 운영하는 교수들이 더 많겠지만, 대학사회의 조교나 수련의들을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은 사제관계가 앞서기 쉽다. 때문에 이들 수련생들이 처한 현실은 법적 테두리를 넘어 도덕과 인습의 경계에까지 걸쳐 있다. 따라서 문제를 드러내기도 해결하기도 어려워, 많은 경우 수련생들은 스스로 감내하는 상황에 있다. P는 대학원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하는 박사과정생이다. 대학 입학 후 자신이 원하는 일이 무엇인지 몰라 방황했던 그는 컴퓨터를 전공하기로 결심한 후 대학 입시를 다시 치러 컴퓨터 학과를 졸업했다.


선배의 소개로 컴퓨터 전공 교수의 연구실에서 대학원 생활을 시작한 그는 실리콘밸리의 입성을 꿈꾸며 프로젝트에 열심히 참여했다. 그러나 3년이 지난 지금 연구실 조교 생활을 계속할지 아니면 그만 둘지 고민하고 있다. 일주일 내내 주말도 없이 연구실에서 하루를 보내고 가끔 밤을 새워야 하는 생활에서 몸과 마음이 지쳐버렸다. 지도교수의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만으로도 하루 24시간이 부족한 상황에서 자신의 연구를 시작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이제 P는 왜 자신이 대학 입시를 두 번이나 가치르며 대학원까지 왔는지, 대학원에서 자신이 원래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잘 기억나지 않기 때문이다.


K는 의류디자인을 전공하고 4학년이 되던 해 의류회사에 인턴으로 입사했다. 디자인 팀에서 인턴사원으로 월화수목금금금밤낮없이 일하던 그녀는 월급날 누구에게 말하기조차 부끄러울 만큼 적은 급여를 받고 고민에 빠졌다. 그렇게 몇 달을 일한 후다른 회사에 들어갔지만, 역시 인턴은 시키는 대로 일하고 주는 대로 받아야 하는 존재였다. 그들은 노동자가 아니라 일을 배우는수습생이었기 때문이다. 졸업 후 K는 취업 대신 창업을 선택했다. 혼자서 작은 작업실을 얻어 옷을 만들고 인터넷에서 판다. 여전히 그녀는 일요일에도 가끔씩 일을 하지만, 불만은 없다. 그 댓가가 자신에게 돌아온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Y는 대학병원 소아과 병동에서 근무하는 레지던트 1년차 의사다. 대학 재학 시절을 늘 수석 장학금을받을 만큼 명민하고 성실했던 그는 인턴과정을 거치며 자신이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 행복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소아과를 선택하고 악명 높은 레지던트 1년차를 시작한 후 그는 혼란에 빠졌다. 24시간, 48시간, 심지어 72시간 동안 깊이 잠을 자지도, 편히 음식을 먹기도 어려울 정도로 바쁜일과에서 자신의 체력이 점점 소진되어 갔고, 진료중에 잠시 의식을 잃는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잘못하면 어린 환자의 치료를 그르칠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에 빠진 그는 병원을 그만둘 생각을 하고 있다. 곧장 군대에 끌려가야 하지만, 군의관에게는 잠 잘 시간은 주어질 거라고 생각하면 그리 나쁜 선택은아닐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출처_ SBS 카드뉴스 갈무리

P, K,  Y는 모두 고용계약을 맺고 일하고 급여를 받는 노동자이지만, 노동자만은 아니다. 수련과정에 있는 사람들이므로 피교육생(수련생)이기도 하며, 교육기관이나 교수, 상사의 지시를 따라야 할 의무가 있다. 또 교수와 상사의 평가에 따라 채용이 결정되고 자신이 원하는 길을 갈 수 있다. 일반 노동자들처럼 평가가 나쁘면 다른 직장으로 이동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교수와 상사의 인정을 얻지 못하면 자신이 원하는 길을 가기 위한 기본 조건, 자격 자체가 주어지지 않는다. 20대 초반부터 짧게는 4년 길게는 10년 이상 준비해 온 길을 수련기간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포기한다면 낙오자로 낙인찍히기 쉽다. 또 다른 길을 가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두려움으로 대부분의 수련생들은 무제한적인 노동시간 앞에서 속수무책이다. 수면 부족, 불규칙한 식사, 무거운 스트레스로 몸과 마음이 피폐해진 이들을 바라보는 기성세대의 시선은 어떤 것인가?

 

우리 때는 더 했는데, 그걸 무슨 고생이라고 하냐? 요즘 애들은 헝그리 정신이 없다.”


필자가 만난 주류사회의 영향력 있는 인사들의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1960년대 개발 시대도 아닌 21세기에 웬 헝그리 정신인가?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의 수련생들은 매우 헝그리(hungry)하다’. 배가 고프고 잠이 고프고 따뜻한 격려가 고프고 생활을 꾸려가기 위한 임금이 고프다. 노동자에 대한 존중이 고프고 노동자의 인권이 고프다. ‘헝그리하지만, ‘헝그리하다고 말할 수 있는 권리, 노동현장의 정치적 권리가 이들에게는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고달픈 몸과 마음을 간신히 지탱하며 미소를 짓는다. 괜찮다고. 견딜만하다고. 필자는 두렵다. 이들이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간신히 버텨낸 이들에게 정말 장밋빛 미래가 있을것인지. 소수이나마 장밋빛 미래를 움켜쥔 이들이 40대가 되면 청년들에게 또 얼마나 헝그리 정신을 강요할 것인지. 우리는 20대들의 땀과 눈물을 팔아 얼마나 더 우리의 탐욕을 채워갈 것인지.


출처_jtbc 뉴스 갈무리

 

2014년 고려대학교 일반대학원 총학생회가 발표한 <대학원생 실태조사보고서>에 따르면, 대학원생들이 조교업무를 수행하는 데 가장 어려웠던 경험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 학업 및 연구시간의 감소59%(183)로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다. 조교 업무로 인해 자신의 학업에 사용할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병원의 인턴이나 레지던트 역시 같을 것이다. 환자 진료에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면 의사로서 자기 공부를 할 시간이 그만큼 줄어들 것이다. 이런 환경 속에서 그들의 연구 성과나 진료 행위가 얼마나 높은 질을 지닐 수 있을지, 그들이 제대로 성장할 수 있을지 걱정스럽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 한 가지 소식이 들려왔다. 보건복지부가 레지던트의 연속근무 시 10시간의 휴식시간을 보장하는 <전문의의 수련 및 자격 인정 등에 관한 규정 시행령 및 시행규칙 개정안>을 발표한 것이다. 이제 내년부터는 Y와 같은 불행한 사례가 더 나오지 않을 수 있을까? 그 기대가 긍정보다는 부정 쪽으로 기우는 것은 필자의 지나친 기우일지 모르지만, 법이 만들어졌으니 반드시 그 효과를 거둘 수 있기 바란다. 이제 더 이상 우리 사회가 실적경쟁이라는 목표를 위해 젊은이들의 눈물을 외면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기도한다.

 

 

 

[노동시간에세이] 시간의 두 결: 시간 적대에 대하여 /2016.7

시간의 두 결: 시간 적대에 대하여

 


강수돌 노동시간센터 회원, 고려대 세종캠퍼스 경영학부 교수

 


하루 24시간. 일 년 365.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공평한 시간이다. 오늘날 우리는 평균 80년 산다. 물론 최근 서울 지하철 스크린도어 노동자나 공고 실습생처럼 10대에 억울하게 죽어가는 이도 많고, 90~100세를 넘기며 장수하는 노인도 있다. 그러나 살아 있는 모든 이에게 하루 24시간은 동일하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에게 시간이 다 같은가? 다르다. 시간의 결이 다르다.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에는 크게 두 가지 결이 있다. 하나는 돈의 시간이고 다른 하나는 삶의 시간이다.

 

시간은 돈이라는 규율 

시간은 돈이다(Time is money)!” 벤자민 프랭클린(1706~1790)의 말이다. 그는 1776년 미국 독립선언문을 작성한 이다. 그는 정치가이자 발명가이기도 했으며 사상가였다. 프랭클린의 사상은 미국 건국 초기부터 오늘날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실용주의적으로 살아가게 영향을 주었다. 그는 어느 젊은 상인에게 주는 충고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은 명언을 남겼다.

 

시간이 돈임을 명심하라. 하루 종일 일해서 10실링을 벌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만일 그가 한 나절 동안 밖에서 놀거나 그냥 빈둥거리며 시간을 보낸다 하자. 그러면서 설사 그가 6펜스만 썼다 하더라도 그는 그것만이 비용의 전부라 생각해선 안 된다. 왜냐하면 그는 그 외도 5실링을 낭비하거나 포기한 거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1848년에 끌로드 F. 바스티아의 에세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서 보다 발전 되었고, 마침내 1914년 오스트리아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폰 뷔저(von Wieser)에 의해 기회비용 (opportunity cost)’ 개념으로 각인되었다. 시간이 돈이므로, 돈 버는 일에 시간을 쓰지 않고 엉뚱한일만 하면 그 엉뚱한 일을 하느라 든 직접비용 (explicit costs)만이 아니라 원래 그 시간에 벌어야할 돈까지 벌지 못한 간접비용(implicit costs)이니, 이중의 손해(기회비용)를 본 셈이다. 이런 논리다. 어디, 많이 듣던 소리 아닌가? 그렇다. 오늘날 수 많은 우리 노동자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돈의 시간이 아닌 삶의 시간으로 

그러나 또 다른 시간의 결도 있다. 돈의 시간이 아니라 삶의 시간이다. 이것을 잘 표현하는 소설이 있는데, 독일 작가 미햐엘 엔데가 1973년에 쓴 <모모>.


꼬마 모모는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재주를 갖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주는 재주였다. 그게 무슨 특별한 재주람. 남의 말을 듣는 건 누구나 할수 있지. 이렇게 생각하는 독자도 많으리라. 하지만 그 생각은 틀린 것이다. 진정으로 귀를 기울여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 줄 줄 아는 사람은 아무 드물다. 더욱이 모모만큼 남의 말을 잘 들어 줄 줄 아는 사람도 없었다. 모모는 어리석은 사람이 갑자기 아주 사려 깊은 생각을 할 수 있게끔 귀 기울여 들을 줄 알았다. 상대방이 그런 생각을 하게끔 무슨 말이나 질문을 해서가 아니었다. 모모는 가만히 앉아서 따뜻한 관심을 갖고 온 마음으로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다. () 모모는 이 세상 모든 것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 고양이, 귀뚜라미, 두꺼비, 심지어는 빗줄기와 나뭇가지 사이를 스쳐 지나가는 바람에도 귀를 기울였다. 그러면 그들은 각각 자기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모모에게 이야기를 했다.”

 

주인공 모모는 시간을 돈으로 보지 않았다. 사람이나 자연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생명의 흐름에 참여하는 것이다. 여기서 시간은 생명의 흐름, 한마디로 삶이다. 현재 우리는 여기서 존재하며 살고() 있다. 존재한다는 게 무엇인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라는, 연속적인 시간 속에 생명의 에너지로 함께 흘러가는 것이다. 느끼고 생각하고 관계하고 행동하는 그 모든 에너지의 흐름 속에 존재할 때 비로소 우리는 사회적 존재가 되고 의미 있는 존재가 된다.

 

시간을 재기 위해서 달력과 시계가 있지만, 그것은 그다지 의미가 없다. 사실 누구나 잘 알고 있듯이 한 시간은 한없이 계속되는 영겁과 같을 수고 있고, 한 순간의 찰나와 같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 한 시간 동안 우리가 무슨 일을 겪는가에 달려 있다. 시간은 삶이며, 삶은 우리 마음 속에 있는 것이니까.”

 

<모모>에 나오는 다른 등장인물을 이야기를 들어보자. 모모의 이웃인 청소하는 노인 베포는 천천히, 한 호흡씩 즐기며 나아가는 삶의 방식에 대해 이야기 했다.

 

얘 모모야. 때론 우리 앞에 아주 긴 도로가 있어. 너무 길어. 도저히 해낼 수 없을 것 같아. 이런 생각이 들지. 그러면 서두르게 되지. 그리고 점점 더 빨리 서두르는 거야. 허리를 펴고 앞을 보면 조금도 줄어들지 않을 것 같지. 그러면 더욱 긴장되고 불안한 거야. 나중에는 숨이 탁탁 막혀서 더 이상 비질을 할 수가 없어. 앞에는 여전히 길이 아득하고 말이야.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거야. 한꺼번에 도로 전체를 생각해서는 안 돼. 알겠니? 다음에 딛게될 걸음, 다음에 쉬게 될 호흡, 다음에 하게 될 비질만 생각해야 하는 거야. 계속해서 바로 다음 일만 생각해야 하는 거야. 그러면 일을 하는 게 즐겁지. 그게 중요한 거야.”

 

이 모든 구절은 모모의 말, 베포의 말이기도 하지만, 바로 작가 M. 엔데이 현대인들에게 들려주고픈 말일 것이다. 그는 아무리 긴 시간, 많은 일이 쌓여 있어도, 한 걸음씩 한 호흡씩 즐기면서 천천히 해나가면 어느 새 모두 할 수 있다고 했다. 시간의 흐름속에서도 특히 현재에 집중해 즐기는 것이다. 여기서는 효율이 아니라 호흡이 중요하다. 효율이 돈이라면 호흡은 삶이다. 효율이 죽음이라면 호흡은 생명인 것이다.

 

<모모>에서도 효율과 이윤의 시간을 따르는 이가 등장한다. 바로 시간저축 은행에서 일하는 회색신사들이 그렇다. 그들은 죽음을 뜻하는 효율이 생명을 뜻하는 호흡을 망가뜨리는 장면의 극치를 보여준다.


시간을 어떻게 아끼셔야 하는지는 잘 아시잖습니까! 예컨대 일을 더 빨리 하시고 불필요한 부분은 모두 생략하세요. 지금까지 손님 한 명당 30분이 걸렸다면 이제 15분으로 줄이세요. 시간 낭비를 가져오는 잡담은 피하세요. 나이 드신 어머니 곁에서 보내는 시간을 절반으로 단축할 수도 있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어머니를, 좋지만 값이 싼 양로원에 보내는 겁니다. 그러면 어머니를 돌볼 필요가 없으니까 고스란히 한 시간을 아낄 수 있지요. 아무 짝에도 쓸데없는 앵무새는 내다 버리세요! 다리아 양을 만나야 한다면 두 주에 한 번만 찾아가세요! 15분 간의 저녁 명상은 집어 치우세요. 무엇보다 노래를 하고, 책을 읽고, 소위 친구들을 만나느라고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지 마세요. 얘기가 나온 김에 한 가지 충고하는데, 잘 맞는 커다란 시계를 하나 이발소에 걸어 놓으세요. 견습생이 일을 잘 하고 있나 감시할 수 있게 말이지요.”

 

이 모든 충고는 다시 18세기 B. 프랭클린의 말로 돌아간다. “시간은 바로 돈이니, 시간 낭비는 죄악이다!” “일하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말라!” 그리하여, 무노동 무임금. 같은 맥락에서 파업 시 임금 지불은 불법이다. 이제, 일하는 시간, 돈 버는 시간만이 바르게 사용된 시간이다. 일하지 않는 시간, 공부하지 않은 시간, 돈 벌지 못하는 시간은 인생 낭비다. 오죽하면 고등학교 교실에 이런 급훈이 나왔겠는가? “네가 잠든 사이 경쟁자의 책장 넘기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강남엔 내 집 마련, 주차장엔 페라리.” 이런식이다. 이 모든 이야기는 미래의 돈(성공)을 위해 현재의 삶(행복)을 포기하게 만든다.

 

돈의 시간에 되어 있지 않은가?

오늘날 우리 삶은 이 두 결의 시간이 대립한다. 시간 적대다. 생명의 논리와 자본의 논리가 대립한다. 물론, 생명의 논리가 자본의 논리에 저항을 하기도 하지만 자본의 논리는 권력의 힘을 업고 생명의 논리를 무참히 박살내려 한다. 이제, 계급 적대는 시간 적대로 현상한다.

 

자본은 시간을 압축하고 밀도를 높여 이윤율을 높이려 발버둥 친다. 하지만 자본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무덤을 파고있다. 세계시장이 급속도로 포화 상태로 치달았고, 원료나 에너지도 급속히 고갈된다. 실업자와 비정규직을 대량 생산하면서 구매력을 급속히 떨어뜨렸다. 은행 이자가 제로로 치닫고 재벌들이 수백 조의 사내유보금을 쌓아두는 배경이다. 효율(축적)의 논리가 자가당착이 되어 호흡(흐름)을 방해한다. 하지만 자본은 자성하지 않고, 오히려 허튼 소리만 무한 반복한다. “조금만 더 일하면 선진국 된다. 조금만 더 !”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덤 앞에 선 좀비 시스템을 구덩이 속으로 살짝 떠미는 일이다.

 

비록 생명의 논리가 자본의 논리를 압도적으로 굴복시킬 힘은 없지만, 생명의 논리가 자본의 논리에 자발적 복종을 하지 않고 스스로 꿈틀거리며 더불어 어깨를 거는 한, 좀비가 되어버린 시스템을 구덩이로 떠밀어 넣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이제 생명의 시간이 빛을 발할 때가 다가온다. 우리 자신이 생명의 철학, 삶의 철학으로 무장하는 만큼 가까워지는 법!

 

최근 UCLA 앤더슨 경영대학원이 미국 사람 1,226명을 대상으로 질문을 던졌다. “여가 없이 돈을 벌 것인가, 아니면 돈을 포기하고 여가를 선택할 것인가?” 이것이 문제였다. 그 중 60.9%는 돈을 선택 했고 30.1%는 시간을 선택했다. 이들의 삶의 만족도를 분석한 결과, 돈을 선택한 이들보다 시간을 선택한 이들이 행복했다. 돈을 선택한 이들이 많이 버는 것에 집중한다면, 시간을 선택한 이들은 어떻게 쓸 것인가에 집중했다. 그런데, 돈이 충분히 있어도 쉬지 못하고 놀지 못하는 이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결론은, ‘중독이 문제다. 돈 중독, 일중독, 출세중독, 권력중독이 그것이다. ‘충분함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면 중독은 왜 생기는가? 내면의 공허함 때문이다. 속이 허하니 외부로부터 뭔가 채우려는 것이 모든 중독의 핵심이다. 내면의 느낌으로 표현되는 인간적 필요욕구’, 즉 진심으로 원하는 것을 모르거나 억압하고 있다는 말이다.

 

생명의 시간으로 나아가기 위하여 

이제 우리는 우리의 공허한 내면을 삶의 시간으로, 생명의 시간으로 채워나가야 한다. 내면의 느낌과 필요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진심으로 원하는 것을 존중하고 경청하고 신뢰하면 된다. ‘자기 해방이다. 그러나 이게 어디 쉬운 일인가? 우리의 오래된 마음의 습관이 큰 장벽이 된다. 일단 뒤틀린 현재의 모습을 직시하고 스스로 자유로워지는 것(자기 해방)이 출발점이요, 그 다음은 생명의 시간이 옳다고 생각하는 이들부터 먼저 생명의 시간을 온전히 음미하고 향유하는 연습을 함께 해나가야 한다(상호연대). 나아가, 그렇게 삶의 시간을 알차게 누리는 실천을 하면서도, 우리 사회 구성원 누구나 삶의 시간을 온전히 누릴 수 있끔 사회 구조를 바꿔내야 한다(사회 해방). 사회적 실천과 운동, 이것이 절실하다. 구체적으로, 노동시간 단축과 여가시간 증대, 삶의 시간 계획과 신바람 나는 프로그램 만들기 등을 가능케 할 노동 및 경제 시스템, 돈을 많이 벌지 않아도 인간답게 살 수 있게 하는 복지 시스템, 점수 따기 식 공부가 아닌 꿈과 개성을 살리는 공부를 돕는 교육 시스템 등을 패키지로 구축해야 한다. 이를 위한 사회운동이 성장하는 만큼 자본의 시간도 쉬이 사라질 것이고 좀비 같은 시스템을 땅 속에 파묻는 일도 쉬이 가능 할 것이다. 자기 해방에서 상호 연대로, 또 사회 해방으로 진전해야 한다. 바로 그 길 위에서, 시간은 더 이상 돈이 아니라 삶이 될 것이다.

[노동시간에세이] 얼마나 일해야 행복할 만큼 벌 수 있을까? / 2016.6

얼마나 일해야 행복할 만큼 벌 수 있을까?



김재광 노동시간센터 회원



고대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은 가장 좋은 것, 최고선이다, 최고선은 다른 것을 위한 것이 아닌 그 자체로 목적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물론 그가 말한 '행복'은 현대 우리 일상에서 상용하는 행복과는 다른 개념이기는 하다. 그래도 말 자체에 별다른 이견을 달고픈 생각은 없다. 세상에서 딱 두 종류의 사람만을 구분한다면 '죽지 못해 사는 사람'과 '안 죽으니까 사는 사람'일 것이다. 


전자는 비참한 삶이 분명하고, 후자라고 해도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후자인 경우 죽지 못해 사는 것은 아니므로 나름의 목적 또는 삶의 방향이 있을 것인데, 이것을 어떻게 표현하든 '행복한 삶'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불행하기 위해 사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은 세계 GDP순위 11위로 경제대국 이지만 사회통합실태조사(2014년)에 따르면 '한국인의 행복도'는 10점 만점에 5.7점으로 낮은 수준이며, OECD의 '2015년 삶'에서 5.8점으로 35개국 중 28번째를 차지하고 있으며, UN의 '세계행복보고서(2015)'에서는 5.98점으로 158개국 중 47위로 경제규모에 비하면 그에 상응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뿐 아니라 다른 여러 국가 역시 국제적 수준에서 국가의 경제력이 행복지수와 상관관계를 가지지 못하는 것을 종종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국내적 수준에서는 일정한 경제적량 즉 소득 수준은 행복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여러 연구나 조사를 통해 알 수 있다. 이러한 이유는 경제력 규모가 큰 국가라 하더라도 국내의 소득 분배 구조와 사회적 지원의 정도가 취약할 경우 경제적 규모와 행복지수간의 간극을 발생시키는 것임을 추정할 수 있다.


아무튼, 행복한 삶의 기준과 요건에 있어 절대적 기준이 있을 수 없고, 각자의 주관적 요소를 무시할 수 없다 하여도 행복한 삶의 전제 조건 중 경제적 여건의 중요성을 무시하기는 어려운 것임은 분명하다. 영화 <웰컴 투 동막골>에서 이장의 '영도력'의 시작은 "잘 멕이는"것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소득이 행복에 영향을 미칠까


미국 과학학술원지(PNAS)의 논문에 따르면 소득이 높아질수록 삶에 대한 만족도는 계속 높아지지만, 행복감은 연봉 7만5000달러(약 9000만 원)에서 더 이상 높아지지 않았다. 다시 말해 소득이 9000만 원 까지는 연봉이 높아지면 행복감도 높아 지다가, 연봉이 9000만 원이 넘어 1억 원이 돼도 더 이상 행복감이 증가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월급으로 따지면 약 700만 원 정도다.


이 연구 결과는 몇 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우선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소득은 행복에 영향을 준다. 그러나 한계는 있다. 그러나 그 전까지는 참 많이 벌어야 한다. 한편 이 연구에 대한 추가 해석이 있다. 행복도는 멈추지만 만족도는 줄어들지 않아 일정 정도 소득 이상이면 소득의 영향력이 줄어든다는 것이지, 더 행복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라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어떨까? <매경이코노미> 조사(2009)에 의하면 '행복을 결정하는 요소는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관련 가장 많은 표를 얻은 응답은 단연 '경제적 안정'이다. 36%가 1순위로 경제적 안정을 꼽았다. 다음이 개인의 신체적 건강과 가족의 화목이다. 23%와 19%다. 이는 1순위로 답한 응답만 고려했을 때 결과다. 


'소득이 많은 사람들이 소득이 적은 사람보다 더 행복하다'는 문장에 어느 정도 동의하는지를 물었다('0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에서 10점: 매우 동의한다' 까지의 구간). 무려 65%가 6점부터 10점으로 대답했다. 더 많은 소득이 행복에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행복하기 위해 최소한 어느 정도 소득이 있으면 될까?'라는 질문에는 '4인 가족 기준 월 401만원에서 500만원이 최소한 필요한 소득'이라고 답한 응답자가 28%로 제일 많았다. 다음으로는 301만원에서 400만원(25%), 501만원에서 600만원(22%) 순이었다.


'서울시민 행복도 조사'(2010년)에서 소득이 증가 할수록 행복도도 증가하지만 400만 원이 넘어가면서부터는 소득이 늘어도 행복도는 오히려 낮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의 연구결과와 달리 400만 원이 넘어가면 더 많은 소득을 만들어 내기 위해 감수해야 할 희생도 그만큼 늘어나기 때문에 오히려 행복도가 떨어졌다고 하니, 업무강도 강화나 노동의 시간 증가가 영향을 준 것이라 추측된다. 


업무강도의 부가나 노동시간의 부가가 없다면 더 상승된 임금이 측정될 수 도 있었을 것이다. 앞의 두 조사를 고려하면 한국인에게 월 400만 원, 일 년에 4800만 원 정도가 행복을 전제하는 최소 또는 한계 소득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얼마나 일해야 행복할까


소득과 행복의 중요한 관계를 언급한 것은 이것을 통해 행복한 삶을 위한 노동시간의 문제를 추론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대다수 노동자의 소득은 노동시간의 길이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2016년 3월 '경제활동인구 근로형태별 부가조사'(통계청)에 의하면 정규직의 경우 283만 원, 비정규직은 151만 원이었다.


2015년 하반기 '지역별 고용조사'(통계청)에 의하면 200만 원 월급 미만인 노동자가 50%(47.4%)가까이 되었다. 2014년도 '소득분위별 근로자 임금 분석'(전경련)에 의하면 임금노동자의 평균 연봉은 3240만 원. 중간순위는 2465만 원 이었다. 9분위(상위 20%)의 최저연봉이 4586만 원이었다. 이 같은 통계수치를 보면 한국인이 행복을 위한 최소 또는 한계 소득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는 월 400만 원에 딱 절반인 200만 원조차 벌지 못하는 임금 노동자가 절반 가까이 되고, 월 400만 원에 미치지 못하는 임금근로자가 전체의 80%이상이 된다.


2015년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노동시간센터가 조사한 경기지역 중소제조업 사업장의 평균 1일 노동시간은 10.4시간이며, 평균 임금은 236.4만 원이었다. 잔업과 특근을 하지 않았다면 평균 200미만의 임금을 받는 셈이다. 다른 통계와 크게 다르지 않다. 거칠게 보면, 300명 미만 사업장이 98% 이상이고, 고용인원 역시 80%이니, 대부분의 한국 노동자는 경제 외적인 다른 행복의 전제들을 갖추고 있어도, 긍정적 마음을 아무리 다져 먹어도 행복하기에는 경제적으로 불안하고 궁핍하다.


적정 노동시간과 임금, 그리고 적정한 사회적 지원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한국의 노동시간은 길다. 전체 취업자 1인 평균 노동시간이 2124시간(2014년)이다. 이를 단순히 계산해도 월 177시간으로, 법정노동시간인 주 40시간에 17시간 넘기는 것인데, 연차 휴가 등 법정휴가와 공휴일 등을 고려하면 그 이상의 추가 노동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전경련의 통계에서 근거한 월평균 임금은 270만 원으로, 월 400만 원을 벌기 위해서는 평균 노동시간을 기준으로 약 월 85시간을 더 일해 일해야 하여 월 262시간을, 연단위로는 1020시간을 더하여 3144시간을 일해야 하는 것이다. 하루에 10시간을 일한다 치면 한 달에 27일 가까이 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월 400만 원을 번다한들 살인적인 노동시간으로 건강을 해치고 사회생활이 파괴되어 행복한 삶을 살 수는 없는 것이다. 만일, 주 40시간 일하는 최저임금 노동자라면, 월 507시간을 일해야 가능하고, 하루 10시간을 일한다 해도 한 달 51일 가까이 일해야 하므로 불가능한 것이다. 법정 노동시간을 준수하고는 사실상 대부분의 노동자가 행복을 전제할 경제적 조건을 형성하기에 버거운 것이다.


세계경제 11대 대국, 한국은 상위 10%가 소득의 45%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니까 "얼마나 일해야 행복할 만큼 벌 수 있을까"라고 질문한다면, 다시 말해 "적정한 노동시간이 얼마냐"고 묻는다면, 현재의 대답은 "도저히 가늠할 수 없다, 가능하지 않다"이다. 


노동시간을 늘리기에는 달력의 날수가 턱없이 부족하고, 어거지로 늘려본들 건강과 관계가 파괴되니 행복할 리가 없다. 반대로 노동시간을 줄이면 대부분 노동자는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필요소득이 줄어든다. 시급을 받는 대부분의 노동자들에게 시간당 임금의 상승이 적정한 노동시간을 가늠하는 출발이다.


양극화된 소득구조의 해소가 행복을 위한 적정한 노동시간을 보장한다. 교육, 주거, 노후의 사회적 지원이 적정한 노동시간을 보장한다. 아무리 노동시간을 줄이자고 해도 이것이 병행되지 않으면, 노동시간은 인간적이고 적정할 수 없으며, 노동자는 빈곤이 도사리는 노동시간의 덫에서 헤어나올 수 없다.



[노동시간에세이] 문제는 노동이야 /2016.5

문제는 노동이야
- 경제민주화와 최저임금

 

 

 

전주희 노동시간센터, 수유너머N

 

 

여소야대 총선이후, 첫 번째 선물이 도착하다

 

‘새누리당 참패’로 귀결된 총선 직후 야권에서는 총선 내내 제기해온 ‘경제민주화’가 아니라 ‘부실기업 구조조정’ 문제를 꺼내 들었다. 정확히 야권이 아니라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가 그랬다. 그는 총선 내내 ‘문제는 경제’라며 배신의 경제를 이번 총선에서 심판할 것을 유권자들에게 호소했다. 그리고 선거 후 그는 ‘불쑥’ 구조조정 문제를 들고 나왔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 중심으로 제기된 ‘선제적 구조조정’은 본격적 구조조정에 앞서 실업대책 등 사회안전망이 전제되어야 한다며 IMF 위기 이후 진행되어왔던 구조조정과는 다른 구조조정을 제시하는 듯한 모양새다. 이에 대해 은수미 전 의원은 ‘어제는 경제민주화, 오늘은 구조조정’이라며 비판하고 나섰다. 총선 시기의 ‘배신의 경제’ 심판론과 총선 후의 구조조정의 중심에는 더불어 민주당의 김종인 비대위 대표가 있다. 그에게 구조조정과 경제민주화는 총선 민심에 대한 배신인가, 아니면 김종인표 경제의 동전의 양면인가?

다른 한편, 총선 전으로 돌아가 지난 4월 6일 민주노총을 비롯한 노동계는 2017년 최저임금 투쟁 선포식을 가졌다. 매년 이뤄진 ‘노동계’만의 최저임금투쟁은 20대 국회의원 선거 과정에서 이슈가 되면서 각 정당이 경쟁적으로 최저임금 인상안에 대한 총선 공약이 쏟아져 나왔다. 세부안은 다르지만 모든 정당이 9천 원~1만 원 가량의 인상안을 제시했고, 정의당과 더민주당 등은 노동계와 함께 기존에 주장해왔던 최저임금 1만원 안을 제시했다.

 

* 지난 5월1일 노동절, 알바데이 집회에서 맥도날드 알바 노동자가 봉투를 쓴 채 발언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난 4월 28일 박근혜 대통령은 비정규직을 늘리는 파견법 등의 처리를 거듭 강조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구조조정 과정에서는 불가피하게 일자리를 잃는 근로자들이 발생할 수 밖에 없다”며 그에 대한 대책으로 파견법이 포함된 ‘노동개혁 4법’의 국회 처리를 또 한번 힘을 주어 말했다. 최저임금과 ‘노동개혁 4법’, 더불어민주당의 구조조정과 박근혜 대통령의 구조조정이 총선 이후 국민들에게 각기 다른 포장을 하고 국민들 앞에 도착했다. 어느 선물 포장지를 풀 것인가를 고민하기 전에 가장 허망한 것은 어느 포장지를 풀어도 모두 같은 내용물이 나오게 되는 경우이다.

 

지금 어떠한 경제민주화인가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현행 헌법 119조 2항에 ‘경제의 민주화’라는 말을 넣었다고 해서 ‘경제민주화의 아버지’로 대접받는 인물이다. 법제정 이전에 법을 가능케 했던 것은 87년 민주항쟁이었다.당시 민주화 운동의 바람은 경제 영역에서도 시장 혹은 자본에 대한 민주주의적 통제의 요구로 나아갔다. 자유주의적 입장에서는 경제민주화는 시장원리가 제대로 작동하도록 하는 데 있었다. 반면 민족경제론의 입장에서는 노동자계급이 주도하는 국가권력의 민중화였고, 정경유착과 매판적 독점자본의 거부는 사회주의를 전망한 것이었다. 법제정 이전에 민주주의에 대한 대중적인 의미화가 서로 각축을 벌였다. 민주주의를 둘러싼 대중적인 의미화의 과정 자체가 헌법 119조 2항의 표면을 구성했다.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87년 이후 민주화 10년은 IMF 협약으로 매듭지어졌고, 그 뒤 10년은 사회 양극화로 귀결되었다. 민주주의를 요구했던 민중들은 일자리를 요구하는 불안정노동자가 되었거나, 대출을 끼고서라도 집을 사야 안심이 되는 불안정소유자가 되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경제민주화의 실제 내용을 들여다보면 재벌개혁이 중심이 되었던 경제민주화의 방향은 자본에 대한 규제와 노동의 권리 실현이라기 보다는 시장의 효율성 제고에 있었다. 시장의 흐름에 방해가 되는 독점을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제한했고, 시장의 효율성을 가로막는 노동이 유연화되었으며, 강경한 노동조합이 후진적이라는 이름으로 철퇴 되었다.


자본에 대한 규제의 효과가 노동자들에게 여전히 돌아가지 않았다. 경제민주화는 신한국, 세계화, 신자유주의의 이름으로 노동자들의 몫을 체계적으로 강탈해갔다. 배신의 경제에 대한 심판은 박근혜 대통령뿐 아니라, 87년 당시 경제민주화의 요구를 가장 약한 수준으로 관철시킨 김종인에게도 해당된다. 김종인 대표가 2012년 출판한 제목이기도 한 ‘지금 왜 경제민주화인가’는 다시 물어져야 한다. 지금 어떠한 경제민주화인가?

그런 의미에서 김종인 대표의 경제민주화와 구조조정은 선거 이전과 이후의 말 바꿈의 처세가 아니다. 그에게는 87년 이후 일관된 하나의 이념에 대한 두 표현이다. 지난 4월 25일 한국경제 인터뷰에서 김종인 대표는 그동안 지녀온 경제민주화 이념과 현실의 구조조정에 대한 자신의 구상을 피력했다. “경제민주화는 시장의 공정한 경쟁룰을 만들자는 게 핵심” 이라며 “재벌개혁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나는 한 번도 재벌개혁을 입에 올린 적이 없다”고 선을 그었다.

국가는 과도한 복지정책으로 인해 시장의 질서를 침해해서는 안 되고, 시장의 룰이 잘 지켜지도록 관리하는 ‘정원사’의 역할을 가질 뿐이라는 주장은 정확하게 신자유주의의 이념이다. 김종인 대표가 젊은 시절, 독일로 건너가 배워온 것은 신자유주의의 조상 격인 독일 질서자유주의의 이념이었다. 김종인 대표의 경제민주화의 핵심은 어려운 중소기업 보호라는 온정적인 태도가 아니라 경제 전반의 틀을 다시 짜는 것이다. 시장의 경쟁의 룰을 다시 짜는 것, 곧 구조조정의 다름 아니다.

 

“문제는 노동이야” 최저임금을 둘러싼 ‘공정한 룰’의 의미

 

시장의 공정한 룰을 다시 구성하기 위해서 문제가 되는 것은 87년 이래 체계적으로 배제된 노동의 몫이다. 경제적인 몫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몫을 둘러싼 싸움, 그것은 권리를 둘러싼 정치다. 최저임금을 둘러싼 싸움은 이 문제의 한가운데에 있다. 9천 원이냐 1만 원이냐 흥정의 문제가 아니고, 2020년까지냐 2019년까지냐 조정할 문제가 아니다. 김종인 대표를 비롯해 정치권에서 이야기하는 구조조정이 또다시 노동자들의 정치적 배제와 경제적 희생으로 점철되는 것인지, 아니면 공정한 룰을 재구성하기 위한 노동의 권리가 이제야말로 경제민주화의 전면에 등장할 것인지는 지금, 경제민주화를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가에 달려있다.


우리나라 최저임금법에 상응하는 법으로 미국에는 공정근로기준법이 있다. 미국 사회는 ‘공정함’이 어떤 의미인지 오랜 시간 사회적 논쟁을 벌여왔으며, 그 의미는 시대적 요구에 따라 변화하고 있다. 공정함의 의미가 생활임금으로 정의되기도 하고 자본과의 관계에서 불평등한 교섭력의 대등성으로 정의되기도 하였다. 그중 “공정성은 공정경쟁”이라는 의미가 있다. 노동과 자본 간의 공정한 계약이 이뤄지려면 자본 간의 공정한 경쟁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논리다. 즉 자본 간의 경쟁 격화와 불공정한 경쟁의 피해는 고스란히 노동자들의 장시간 저임금으로 귀결될 뿐만 아니라 대자본의 횡포는 시장의 불균형을 초래해 경제성장에 해악을 끼친다는 것이다. 더불어 장시간 저임금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의 건강과 삶의 유지의 비용은 자본이 사회적으로 전가시킨 것-노동손실의 사회화!-이므로 이에 대해 사회가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의미다.

김종인 대표와 더민주당, 국민의 당은 구조조정의 선결 전제로 실업수당 등, 사회안전망의 보완을 들었다. 하지만 이 역시 자본의 손실을 국민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에 불과하다. 물론 복지정책의 전면적인 확대는 필수적이다. 하지만 구조조정의 비용을 국민에게 전가하는 것은 복지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주사위를 던져도 이길 수밖에 없는 자본불패의 불공정한 게임의 룰이다. 때문에 공정한 시장의 룰을 바꾸고 경제민주화를 실현하고자 한다면 구조조정에서 자본의 경영과 주주들의 부당한 이익을 사회적으로 환수하고 법적 처벌을 하는 것이 먼저 전제 되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노동의 정치적 목소리를 배제한다는 것은 이율배반이다.

그동안의 구조조정을 구조조정 하겠다는 김종인표 구조조정에 여전히 노동의 자리는 없다. 배신의 경제는 다시 각색되어 재상영할 준비를 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래서 노동의 권리로 재구성되는 경제민주화는 총선 이후 지금의 문제다. 최저임금과 노동시간 단축, 그리고 고용보장을 둘러싼 노동의 정치는 구조조정 시기에 공세적으로 제기해야 한다. 더불어 민주당과 국민의당이 공세적 구조조정을 선포했듯이.

 

 

[노동시간에세이] 나쁜 노동시간 단축도 있다? /2016.4

나쁜 노동시간 단축도 있다?


김형렬 노동시간센터 회원, 직업환경의학 전문의



하루 8시간 노동을 부르짖던 노동자들의 노동시간 단축 투쟁은 노동운동 역사의 핵심 주제였고, 현재도 가장 중요한 과제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보수정당들도, 심지어 경총에서도 노동시간 단축을 이야기한다. 여전히 우리는 장시간 노동을 하고 있다. 우리는 노동시간 단축을 원하는가? 어떤 노동시간 단축을 말하고 있는가?


여전히 장시간노동, 하지만 노동시간은 줄어들고 있다

2014년 기준 OECD 회원국 평균 노동시간은 연 1770시간인데 한국인의 연평균 노동시간은 이보다 300시간 가량 많은 2057시간을 기록했다. 멕시코(2327시간), 칠레(2067시간)에 이어 세 번째로 길다. 독일(1302시간), 네덜란드(1347시간), 프랑스(1387시간)와 비교하면 무려 절반을 더 일한다. 우리가 12개월 일하는 사이, 유럽 노동자는 8개월만 일한다는 이야기다.

이렇듯 한국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은 전 세계에서 손꼽히게 길지만, 노동시간이 줄어드는 속도 역시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 2000년엔 1년 평균 노동시간이 2512시간이었으니, 14년 동안 500시간 가까이 감소한 것이다. 주5일 근무제가 상당히 보편화된 것이 그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또한, 노동시간을 줄여야 한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있는 것도 어느 정도의 역할을 했으리라 본다. 지난 대선 때 나왔던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슬로건은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남아있다.

그러나 정확한 통계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주 40시간보다 짧은 노동을 하는 단시간 근무 노동자의 증가 추세로 인해 평균노동시간이 단축되었을 가능성도 크다. 장시간 근무 노동자의 줄어든 노동시간뿐만 아니라, 늘어난 단시간 근무 노동자들의 비율도 OECD에서 이야기하는 연평균 노동시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유럽 국가들처럼 고용이 안정화되어 있고, 사회보장이 잘된 상태에서 일하는 단시간 노동과는 사뭇 다른 단시간 노동자의 확대는 우리가 바라는 노동시간 단축이 될 수는 없다. 우리는 노동시간 단축을 원한다. 하지만 노동시간 단축과 연동되는 다음의 문제들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원하는 노동시간 단축이 아닐 수 있다.


노동강도 문제, 노동시간은 줄어들었는데 일을 끝내고 나면 '녹초'

자동차 공장에서 노동시간이 줄어들면 생산되는 자동차 대수도 줄어들 것이다. 당연히 둘 중 하나의 선택을 해야 한다. 동일한 생산량을 유지하기 위해 생산 속도를 높이거나, 줄어든 물량만큼 임금을 줄이려 할 것이다. 노동자 입장에선 임금이 줄어드는 선택을 하지는 않을 것이므로, 결국 생산량 유지를 선택하게 되고 생산 속도는 이전보다 빨라질 것이다. 노동시간은 줄었는데 이전보다 훨씬 힘들게 일해야 한다면 이건 우리가 원하는 노동시간 단축이 아니다.


노동시간 배치의 문제, 교대제

야간에 일하면 1시간 적게 일할 수 있거나 하루 적게 일해도 된다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까? 하루 24시간 생산을 유지하기 위해 교대제를 운영하고 있는 회사에서 야간노동을 하려는 노동자가 없다면, 야간노동을 하면 높은 임금을 주거나 노동시간을 줄여주어 야간노동을 하도록 만들 것이다. 야간노동은 우리 몸의 생체시계의 혼란을 가져와 호르몬 불균형을 가져오고, 이로 인해 수면장애, 심장질환, 위장장애 등을 발생시키며 유방암을 일으키기도 하는 발암물질과 같다고 알려져 있다. 노동 시간이 줄어든다 하더라도 야간노동을 해야만 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원하는 노동시간 단축이 아니다.


비공식적 노동시간의 연장, 집에서도 일하는 사람 늘어

"오늘 회사에 안 나와도 돼. 그 일만 끝내서 내일 보고해." 

"차라리 하루 10시간 일해서 회사에서 일 끝내고 나머지 시간을 마음 편하게 보내고 싶어요." 

집에 와서도, 친구를 만나고 있을 때도 해야 하는 회사 일 걱정. 쉬고 있을 때도 울리는 카톡, 문자, 이메일. 쉬어도 쉬는 것 같지 않은 우리의 휴식 시간. 집에 와서도 끝나지 않은, 회사에 있는 시간만 단축되는 노동시간 단축은 우리가 원하는 노동시간 단축이 아니다.


업무시간 종료 후 상사가 휴대전화 메시지로 황급히 업무지시를 하는 한 통신사의 광고 장면이다. 한편, 프랑스에서는 '연결되지 않을 권리'라는 생소한 개념이 입법 예고돼 화제가 되었다. (출처 : 올레광고 캡쳐)


임금과 연동되어 있는 노동시간 문제, 돈을 벌기 위해 노동시간 단축에 반대하는 현실

노동시간 단축에 대한 사회적 의제가 만들어지고 노동조합과 여러 사회단체에서 노동시간을 줄이기 위한 노력을 하지만, 막상 이를 가장 반대하는 것은 현장의 노동자들이다. 시간제 임금을 받는 대다수의 제조업 노동자들은 노동시간 감소가 결국 임금의 감소를 의미하기 때문에 노동시간 단축은 생활 임금의 위협이 될 수도 있는 문제다. 기본급이 매우 낮거나 없는 임금구조는 장시간 노동을 해야만 생활임금이 유지되는 구조이다. 생활임금이 위협받는 노동시간 단축은 우리가 원하는 노동시간 단축이 아니다.


제조업 노동자들이 잔업과 특근을 하는 이유 (출처 : K전기,I콘트럴스 장시간 노동의 주요원인 조사 결과,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노동시간센터. 2015)


인력확보가 먼저다, 노동시간을 줄일 수 없는 노동자

운전노동자는 이들의 건강이 시민의 안전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므로 대부분 나라에서 법적으로 장시간 운전을 금지하고 있다(유럽, ILO, 일본 등 하루 9시간 이상 운전금지). 하지만 우리나라는 하루 운전시간을 제한하는 법이 없다. 그래서 경기도 버스를 운전하는 노동자들은 하루 17시간씩 운전을 한다. 그리고 다음 날 하루를 쉬고, 그 다음 날 또 하루 17시간을 운전한다.

만약 이 회사 차량이 30대라면 이런 방식의 교대를 하려면 최소 60명의 운전노동자가 필요하다(아무도 개인 경조사가 없어야 하고, 아프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회사에서 50명 정도만 고용한다. 그러면 휴일 없이 3일 연속 17시간씩 운전해야 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10명의 노동자를, 실제로는 20명 정도의 노동자를 더 뽑아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다. 

시민의 세금으로 준공영제를 시행하고 있는 서울의 버스는 그렇게 하고 있다. 더 많은 운전기사를 채용해서 하루에 9시간씩만 운전한다. 경기도 버스를 타고 다니는 우리는 3일 연속 하루 3시간만 자며 17시간씩 운전하고 있는 운전노동자들의 버스를 타고 있다. 인력확보가 없는 노동시간단축은 우리가 원하는 노동시간 단축이 아니다. 아니, 노동시간 단축은 불가능하다.


노동시간단축은 근본적인 사회변화를 만들어 내는 과정

노동시간 단축의 문제는 여러 복잡한 고려 요인들이 얽혀 있어서 이것만을 주장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노동시간 단축을 주장하는 정책은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우리사회의 임금구조, 퇴근 후 문화, 작업현장의 노동 구조, 우리 사회의 사회보장체계, 소비와 생산 그리고 고용으로 이어지는 자본주의 성장논리에 대한 반성과 대안, 교육과 복지의 사회적 책임 등. 끊임없이 이어지는 문제 제기에 대한 답을 해야 한다.

그래도 이렇게 연동되는 문제들에 대해 고민하고 정책을 만드는 곳들이 있다. 기본소득의 문제를 이야기하고(정의당은 연봉 3천만 원 보장, 노동당은 월 30만원 기본소득 보장), 교육, 복지의 확장을 노동시간 단축과 연동하여 설명하고 대안을 논의하는 사람들이다. 좀 더 나아가면 근본적인 우리 사회의 변화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다.

임금삭감도 없고(혹은 조금 벌어도 기본소득이 보장되는), 교대·야간 근무도 안 하고, 노동시간을 줄일 만큼 인력도 충분하고, 집에서는 진짜 푹 쉴 수 있고, 내 몸과 마음이 감당할 만큼의 일을 하는, 그러면서도 짧은 시간 일하는 것이 진짜 내가 원하는 노동시간 단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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