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평] 잘 아플 권리 / 2021. 04

[직업환경의사가 만난 노동자 건강 이야기] 반증의 삶 그리고 일 / 2021. 04

[직업환경의사가 만난 노동자 건강 이야기]

반증의 삶 그리고 일 

송윤희 회원, 직업환경의학 전문의

본 글은 영화 현장 노동자의 이야기를 담았으나 비교적 꾸준한 작업이 가능했던 숙련된 경력자의 이야기로, 전체 영화 현장의 노동을 대변할 수 없음을 밝힌다. 현장 노동의 문제와 노동자의 건강을 객관적이고 포괄적으로 들여다보는 것이 〈직환의가 만난 노동자 이야기〉 이지만, 필자는 이 글에서 매우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시각으로 한 동료의 이야기를 담았다. 이는 현재 의사이면서 영화 각본, 감독의 일을 계속 추구하는 사람으로서 노동자이자 ‘친구’ 인 사람의 이야기를 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일터 독자들의 양해를 미리 구한다.

아주 오랜만에 한 ‘영화 노동자’를 만났다. 9년 전 나와 함께 영화 학교에서 졸업작품으로 단편영화를 쥐어짜 만든 촬영감독이었다. 그는 매우 건강해 보였고 잘살고 있는 듯했 다. 그와 같이 양고기를 먹으며 근황을 나눴다. 이제 40대에 들어서는 우리는 영화업에 계속 발을 담을 것인가, 아니면 다른 살 궁리도 같이 강구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나이대가 됐다. 다행히도 그는 계속 촬영을 할 생각인 듯했다. 나는 이미 생계로써 의사로 일하고 있고, 다만 언제 과연 ‘감독 입봉’을 할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다. 그 말인즉슨, 우리 둘 다 아직 꿈의 ‘감독’ 직에 입봉하지 못 했다는 뜻이다. (이 짠한 문장에 침울하지 않아도 된다. 글을 끝까지 읽으면 그 이유를 알게 될 거다.)

우리가 흔히 아는 유명한 영화감독들과 A급 촬영·미술·조명·음악감독들을 영화계에서 는 ‘오야지’라고 부르는데, 그들은 이 분야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이들이다. 오야지 밑에서 노동과 기술을 제공하는 팀원들은 ‘언제까지 영화 일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비정규 노동자들이다. 즉 아직 자기 이름(브랜드)으로 자리 잡지 못한 영화계 노동자들이다. 여전히 꿈을 꾸고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지만 불안한 청년, 아니 중년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한 번 이야기 나누고자 한다.

한참 이야기가 무르익고 배도 불러오자 나는 솔직하게 궁금한 걸 물었다.

“K야 좀 실례일 수도 있는데, 궁금하다. 너 정도 경력이면 페이가 어떻게 돼?”
“회당 45~50만 원 정도요. 드라마랑 영화랑 비슷해요.”

나쁘지 않은 페이인 것 같았다. 그는 현재 제1 카메라맨이다. ‘퍼스트’라고도 하는 이 직무는 카메라 옆에서 계속 수동으로 초점을 맞추는 일이어서, 매우 숙련된 기술과 경력을 요구하는 업무다. 즉 가장 중요한 카메라 포커스 플레이어다. 얼핏 듣기에 일당이 꽤 괜찮은 것 같지만, 촬영이 보통 아침 7시에 집합하고 밤이 되어서야 끝나는 강행군인 걸 생각하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그래도 이제 하루 촬영시간이 딱 정해져 있잖아.”
“네. 영화는 14시간이고요, 드라마는 16시 간이에요.”

나는 조금 놀랐다. 식사 시간을 빼고는 하루 12시간, 14시간의 장시간 노동이었다. 몇몇 기사를 보면 아침에 시작해서 저녁 먹을 즈음에 끝난다던데, 아마 그런 사례는 드물고 아직은 최대 허용 촬영시간을 다 써야 하는 현장이 많은 듯했다. 고(古) 이한빛 PD의 사건 이후, 지난 몇 년간 촬영 현장이 매우 좋아졌다고 해도 간신히 수면시간 정도를 확보해준 데 불과한 것이다.

“그럼 밤에 끝나면 영화사에서 택시비는 다 챙겨주는 거야?”
“아, 다 포함이에요. 식대랑 교통비 다요. 그래서 다음 날 촬영 있으면 근처에서 잠만 자고, 다음 날이 쉬는 날이면 택시 타서 집에 가고 그래요.”

예전에 다른 동료가 한 말이 기억났다. 그도 촬영팀이었는데, 촬영에 들어가면 짧게 군대 가는 느낌이라고 했다. 주변 지인들과 연락도 두절되고, 작품 촬영 말고는 모든 개인적인 일들이 멈추기 때문이라고 그랬다. 힘든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었음에도 다행히 K는 좋아 보였다. 1년에 들어가는 대략 두 개의 작품을 하 는 7~8개월이 아닌 때에는 운동과 자기계발을 한다고 했다. 작품을 할 때도 재미없다고는 했지만, 그래도 살아있는 생생함을 맛보고 있는 것 같았다. 영화 작업의 특성상 주기적으로 실직 상태가 되기 때문에 불안정할 수 있지만, K는 나름대로 그 상황에서 최선의 적응을 한 듯 했다.

요새 그는 조금 시야를 넓힌 것 같았다.

“전에는 영화에만 올인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맞다고, 그래야 한다고. 근데 세상이 넓잖아요. 영화만으로 먹고 살기는 힘든 것 같고...”

나는 그의 생각에 동의했다. 40대 초반에는 영화 현장이 괜찮을 수 있다. 어쩌면 40대 중후반까지도 버틸 수 있겠다. 그러나 50대, 60대 초반까지 현장을 지키는 기술 스태프는 매우 드물다. 아니, 거의 없다. 다들 아마도 K와 같은 나이대에서 여타의 살길을 조금씩 도모하기 시작하는 것 같다.

게다가 코로나 때문에 영화 산업이 많이 죽었다. 영화계의 앞날은 어찌 될지 걱정이 들었다.

“영화계는 어떻게 될지 몰라도, 영상 산업은 앞으로 훨씬 더 커질 것 같아요.”
“그래. 꼭 영화만 해야지, 하는 건 아닌 것 같아. 웹드라마도 할 수 있고, 뭐, 유튜브도 있고, 여러 OTT 플랫폼들이 생겨나니까 계속 버티자.”

5년 뒤 K는 어떤 일을 하고 있을까? 그가 상업 영화 촬영감독으로 입봉하게 된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 그런데 만에 하나 아쉽게도 그 피라미드 오르기에 기회나 운이 닿지 않는다면, 제2의 바람은 그가 영화 현장에서든 어느 분야에서든 충분히 품위 있게 생계를 해결하면서, 동시에 이제껏 쌓은 영화 영상의 기술을 이용해 한 분야에서 자신의 이름(브랜드)을 지니는 것이다.

나는 그의 5년 뒤가 기대된다. 물론 불안정한 영화 노동자이기에 고민도 많을 것이다. 미래에 대한 고민을 10대, 20대를 넘어 40대까지 하는 건 살짝 서글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쩌면 그건 계속 내 인생을 도전하고 노력하고 있다는, 성장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러니 아직 입봉을 못 한 40대 촬영감독과 영화 감독 지망생들의 근황에 침울하지 마라. 우리는 계속 도전한다. 실패해도 또 일어난다. 좋아하고 사랑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

[여성노동건강상식] 생리, 아무도 소리 내어 말하고 싶지 않은 단어 / 2021. 04

[여성노동건강상식]

생리, 아무도 소리 내어 말하고 싶지 않은 단어

조이 산부인과 전문의, 여성노동건강권팀

산부인과 진료실에 내원하는 환자들은 산모를 제외하면 생리와 관련된 증상과 질환이 원인인 경우가 많다. 산부인과 의사로 살면서 남들보다 몇백 배, 몇천 배 많게 입 밖에 내게 되는 단어가 ‘생리’일 것이다. 생리 (Menstruation), 즉 월경이란 가임기 여성의 자궁에서 호르몬의 작용으로 임신을 준비하기 위해 자궁내막을 두껍게 만들었다가 그 달에 수정과 착상이 발생하지 않는 경우 황체 호르몬 분비의 감소와 함께 자궁내막이 탈락하여 자궁 밖으로 배출되는 현상이다.

이처럼 생리는 말 그대로 건강한 여성에서 한 달에 한 번 일어나는 생리현상일 뿐인데, 우리는 왜 ‘그 날’, ‘마법’ 등의 단어로 생리를 표현하며 아무도 소리 내어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일까? 생리라는 단어는 왜 터부시되어 왠지 부끄럽거나 떳떳하지 못한 단어가 된 것일까?

생리의 불편함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생리혈이 배출되는 느낌을 말로 표현하려고 해도 쉽지 않다. 생리혈은 자궁에서 질을 통해 신체 밖으로 배출되는데 혈액은 공기와 접촉하면 정상적으로 굳는 특성이 있어서 생리혈로 배출되는 혈액은 완전한 액체보다는 조금 더 젤 형태에 가깝다. 인터넷에 돌았던 유머 중에는 ‘뜨거운 굴을 낳는 느낌’이라고 묘사된 바 있으며, 요새 아이들이 많이 갖고 노는 슬라임이나 달걀 노른자의 느낌에 가까워서 그 느낌이 유쾌할 수 없다.

종종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생리는 대소변처럼 조금이라도 참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생리하고 싶은 날은 지정할 수 있는 것은 더욱 아니며, 주기가 매우 규칙적인 소수의 경우를 제외하자면 1~2일 정도의 주기 차이는 정상적으로 존재하기에 그 날짜를 완벽하게 예측하기도 어렵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중에는 이러한 자세한 묘사가 불편하거나 이 정도도 모르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을 수 없는 분들도 있겠으나 진료실에서 만나는 많은 수의 환자와 보호자들이 잘 모르거나 오해하고 있는 사실들임을 밝힌다. 더불어 궁금하더라도 입 밖으로 내어 묻기 어려워하는 환자와 보호자들도 많다.

출처 : Mashable India



월경과 관련된 질환들

월경은 매달 반복되는 생리현상이지만, 그 주기에 따른 여러 질환을 동반하는 경우도 있다. 생리통(Dysmenorrhea)은 생리 기간 중 다양한 경로와 강도로 느껴지는 통증을 말하는데, 이는 자궁내막이 탈락될 때 작용하는 프로 스타글란딘이라는 물질이 복부 혈관을 수축시키며 신경을 자극하여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생리통의 유무와 강도, 지속 기간은 개인차가 심하여 생리통이 없는 사람도 있고 생리 기간 내내 진통제 없이는 일상생활이 어려운 사람도 있다. 생리의 양과 생리 기간 역시 개인차가 크며, 이는 생리통과 관련이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다.

미국의 한 통계에 따르면, 여성의 20% 정도는 일상생활에 영향을 주는 정도의 생리통을 겪으며 유방통 및 두통, 설사 또는 변비, 몸살, 어지럼증, 구역감을 함께 겪는 경우도 있다. 흡연하거나 생리를 일찍 시작했거나 생리기간이 긴 경우 생리통의 정도와 관련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생리통이 심한 경우, 자궁내막증, 자궁선근증 등의 산부인과 기저질환을 의심할 수 있기에 진료가 필요하다.

규칙적인 생리주기란 28~30일을 의미하지만, 다수의 여성이 생리주기 자체의 불규칙함과 생리 기간이 아닐 때 발생하는 출혈을 호소한다. 이는 대부분 생리주기를 조절하는 에스트로겐과 프로게스테론, 난포자극호르몬, 황체 호르몬 등의 불균형 때문인데 이러한 호르몬 불균형의 원인은 스트레스, 저체중, 과체중, 극심한 다이어트, 영양 불균형, 불규칙한 생활, 야간 노동 등으로 매우 다양하다.

생리 기간뿐 아니라 생리 1주 전부터 생리 시작 직전까지 신체적, 정서적 증상으로 고통 받는 경우도 있는데, 이를 월경전증후군(PMS, Pre-Menstrual Syndrome)이라고 한다. 한 통계에 의하면,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월경을 하는 여성 중 75%가 월경전증후군을 호소하며 4~5% 정도는 일상생활에 어려움을 겪을 정의 증상을 호소한다고 한다. 월경전증후군의 증상은 집중력 저하, 건망증, 초조함, 예민함, 긴장감, 불안감, 급격한 기분변화, 분노조절 장애, 공격성 증가, 식욕 증가, 의욕 상실, 업무능력 감소, 유방통, 요통, 두통, 부종 및 체중증가, 과도한 수면, 불면증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원인은 명확히 밝혀져 있지 않으나 프로게스테론의 비정상적 박동적 분비, 지나치게 높은 에스트로겐 레벨, 도파민 감소에 따는 프로락틴 분비 증가와 엔도르핀 및 세로토닌의 감소 등 호르몬 변화 및 이상이 증상을 유발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피임약을 복용하여 호르몬 변화를 감소시키거나 우울증 약으로 쓰이는 세로토닌 재흡수 차단제 (SSRI)를 복용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생리휴가

근로기준법에 따르면 5인 이상의 노동자가 근무하는 사업장의 여성노동자에 대해 월 1일의 생리휴가를 주도록 되어 있으며 이를 어길 때에는 5백만원 이하의 벌금이 부과될 수 있다. 생리휴가는 노동자가 청구하는 날에 무조건 줘야 하는 휴일로, 당일 청구해도 부 여하도록 되어 있다. 즉, 회사 측에서 생리휴가 사용 며칠 전 휴가원 제출 요구, 생리휴가가 가능한 요일의 지정 등을 통해 사실상 근로자의 자유로운 생리휴가 사용을 제한하는 행위는 규정상 인정될 수 없다.

생리휴가는 1953년 제정된 근로기준법에서 월 1회의 유급휴가로 규정되었으나 거의 지켜지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여성노동자들이 생리휴가 보장을 요구하기 시작한 것은 70년대 중반이다. 노동시간 단축이나 모성보호법 등의 법률의 제개정이 논의될 때마다 사업주들은 그 전제조건의 하나로 생리휴가 제도 폐지를 주장해 왔다. 이는 생리휴가 제도가 여성을 육체적으로 취약한 존재임을 증명하여 오히려 차별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될 수 있다라든가, 여성을 재생산을 위한 도구로 취급함으로써 생리휴가가 여성비하에 해당한다는 식으로 그럴싸하게 포장되었지만, 실제로는 여성 노동자가 하루 동안 노동하지 않음에도 임금을 받으면, 그만큼 사업주의 이윤이 줄어들 것이라는 전근대적 경영관에 비롯된 주장이었다.

2004년 주 5일 근무제의 도입으로 1,000명 이상 사업장의 경우 생리휴가는 무급으로 전환되었으며 2012년부터는 20인 이상 사업장까지 확대되어, 실질적으로 한국의 생리휴가는 현재 무급휴가에 해당한다.

2014년에 시행된 한 조사(유한킴벌리&인 크루트 조사)에 따르면, 생리휴가가 무급휴가로 전환된 이후 76%의 여성이 생리휴가를 한 번도 쓴 적이 없으며 주변의 눈치 때문에 사용이 어렵다고 답했다. 당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생리휴가를 사용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42%가 “상사에게 눈치가 보여서”를 꼽았으며 36%는 “주위에서 아무도 안 써서”라고 응답했다. 이에 대해 남성들은 “생리휴가는 다 꼼수”라고 응답했다.

생리휴가, 모두에게 온전히 보장되어야

생리는 말 그대로 생리적인 현상으로 많은 신체적 증상과 불편함을 유발한다. 생리휴가의 무급화 당시 경영계가 생리휴가 폐지를 주장하며 펼친 근거 중에는 “선진국에는 생리휴가가 없다”는 것이었는데, 이는 선진국에서는 생리 휴가를 특별히 제도화하지 않아도 노동자가 몸이 불편할 때 언제든지 쉴 수 있는 권리가 보장 되어 있으며, 그건 근무평가에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임을 간과한 것이다. 즉, 생리휴가를 없애려면 생리휴가가 적극적으로 보장되고 그에 따른 비용을 기꺼이 부담할 수 있어야 한다.

2021년의 한국 사회에서 생리 중인 모든 여성 노동자들에겐 생리휴가라는 ‘사회적 배려’ 가 정당하게 보장되어야 한다.

[알아보자, Law동건강] 직장 내 성희롱을 바라보는 시선 / 2021. 04

[알아보자, Law동건강]

직장 내 성희롱을 바라보는 시선

임혜인 회원, 노무사

직장 내 성희롱(이하 “성희롱”이라고 함)으로부터 안전한 일터를 조성하는 것. 성희롱 피해자를 보호하고 가해자에 대한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 이는 현대사회에서 너무나도 당연한 상식이다. 성희롱 가해자는 절대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한 나쁜 사람이며, 성희롱이 발생할 때까지 방관한 회사는 더 나쁘다는 점에 대해서 부정하는 사람 또한 없을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성희롱이 발생하면 우리가 너무나도 당연하게 생각하던 상식이 단숨에 무너져버리고 만다. “문제를 키워 봤자 너만 손해다”, “당신이 참아야지 어쩌겠냐”는 식으로 피해자의 고통을 무시하는 언동은 2차 가해 유형 중 아주 귀여운 축에 속한다. “라떼는 이런 거 다 감수하면서 직장생활 했다.”며 피해자가 경험한 성적 굴욕감 등이 사회통념에 어긋나는 것임을 계몽하려는 노력은 아주 보편적인 반응이다. 심지어 피해자가 피해 사실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밝히려고 애쓸수록, 이러한 노력은 피해자에 대한 공격으로 변모한다.

성희롱의 당사자는 가해자와 피해자이지만, 실제로 성희롱이 발생하면 가해자는 지워지고 오로지 피해자만이 당사자로 남는다. 법률 및 사회적으로 금지된 행동을 한 가해자보다 피해자에 대한 시선이 뜨겁다 못해 따갑기까지 하다.

성희롱 피해자를 바라보는 시선은 법원의 판단을 통해 재확인되기도 한다. 한 대학교수(이하 “원고”라고 함)가 제자를 수 차례 성희롱하여 징계 해임되자 본인의 행동이 성희롱이 아님을 주장하며 해임처분의 취소를 구하는 소송을 제기하였다. 이때 대학이 징계사유로 삼은 성희롱 사실은 다음과 같다. 

징계사유 1
1) 원고가 학과사무실에서 남자친구와 함께있던 피해자에게 “여기서 뭐하냐?”라며 뺨을 때리고, 이어서 “왜 남자랑 붙어서 있냐?”라며피해자의 뺨을 총 4대 때림

2) 피해자가 봉사활동을 위한 추천서를 받기 위해 친구들과 함께 원고의 연구실을 방문을 때 원고가 뽀뽀해 주면 추천서를 만들어 주겠다고 함

3) 수업 중 질문을 하면 원고는 피해자를 뒤에서 안는 듯한 포즈로 지도함

4) 원고는 피해자가 연구실을 찾아가면 “남자친구와 왜 사귀냐, 나랑 사귀자.”, “나랑 손잡고 밥 먹으러 가고 데이트 가자.”, “엄마를 소개시켜 달라.”고 하는 등 불쾌한 말을 많이 함.
... (중략)
징계사유 2

1) 원고는 피해자의 1학년 학기 초 수업시간에 피해자의 손을 겹쳐서 마우스를 잡고 피해자가 앉아 있는 의자에 같이 앉거나 자신의 무릎에 피해자를 앉히려 하였음. (중략)

2) 원고는 피해자를 연구실로 자주 불러 연애하자, 어머니를 소개시켜 달라.”고 하였으며, 또한 의자에 앉아 있을 때에는 원고의 다리 사이에 피해자의 다리를 끼워 움직이지 못하게 한 경우도 있었음

3) 피해자가 입고 있던 가슴부분의 남방 단추가 떨어지려 할 때 원고가 불필요하게 단추를 만짐

징계사유 3

1) 원고는 수업시간에 피해자를 뒤에서 안는 식으로 지도하고 불필요하게 피해자와 한 의자에 앉아 가르쳐주며 신체적 접촉을 많이 함

... (중략)

4) 학과 MT에서 원고가 아침에 자고 있던 피해자의 볼에 뽀뽀를 2차례 하여 피해자에게 정신적 충격을 줌

5) 원고는 장애인 교육 신청서를 제출하러 간 피해자에게 자신의 볼에 뽀뽀를 하면 신청서를 받아 주겠다고 하고, 다른 학생들도 자신의 볼에 뽀뽀를 하고 신청서를 제출하였다고 거짓말을 하여 피해자가 어쩔 수 없이 원고의 볼에 뽀뽀를 하였으며, 그 상황에서 원고가 피해자의 엉덩이에 손을 대려고 하자, 피해자가 자신의 가방을 이용하여 원고의 행위를 막음

원심 재판부는 원고에 대한 징계사유 중 대부분이 성희롱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하며, 원고에 대한 해임처분이 부당하다고 판단하였다. 원심이 상기 징계사유를 부정한 요지는 다음과 같다.

징계사유 1-3을 부정한 이유

- 원고의 언동은 원고의 적극적인 교수방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의심되고, 이 부분 사건에서 드러난 정도의 접촉만으로는 이를 일반적이고도 평균적인 사람으로 하여금 성적 굴욕감이나 혐오감을 느낄 수 있는 행위에 이르렀다고 보기는 매우 곤란하다.

- 교수인 원고가 (중략) 소위 백허그 자세를 취하여 그와 밀착된 자세에서 어색한 타이핑을 시도하였다는 것은 쉽게 상상하기 어렵다. (중략) 익명으로 이루어진 강의평가에서 원고의 부적절한 신체접촉에 대한 언급이 없고 오히려 원고의 1:1 맨투맨 교육방식이 긍정적으로 평가된 점 및 나아가 소외 1조차 원고의 강의에 단점이 없다거나 재미있고 즐겁다고 평가한 점에 비추어 선뜻 납득하기 어렵다.

징계사유 1-2 및 1-4를 부정한 이유

- 원고는 강의뿐만 아니라 동아리 지도를 통하여 학생들과 격의 없고 친한 관계를 유지하였는데, 학생들과 식사를 함께 하거나 원고의 연구실에서 찾아오는 학생들과 자주 농담을 나누었으며, 일상적인 이야기는 물론 가족에 관한 이야기나 연애상담도 나누었다.

징계사유 3-1부터 3-5를 부정한 이유

- 소외 2는 최초 소외 1의 부탁을 받고 이 사건을 신고하게 된 것인데, 자신의 피해사실에 대하여는 형사고소 이후 조사를 거부하는 한편 소외 1에 대한 피해사실에 대하여는 증인으로 출석하여 자유롭게 진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바, 과연 성희롱 내지 성추행 피해자로서의 대응이라고 볼 수 있을지 의문이다.

- 소외 2가 소외 1의 부탁을 받고 진술서를 작성한 것은 2014. 12. 17. 무렵인데 그 기재된 내용은 전부 2013년부터 2014년 전반기의 사실로서 소외 1의 권유 또는 부탁이 없었다면 소외 2에게 과연 한참 전의 원고 행위를 비난하거나 신고하려는 의사가 있었는지 의심스럽다.

- (중략) 자신의 신고로 인하여 원고가 해임까지 당하는 무거운 결과를 가져온 데 대한 책임추궁을 두려워하기 때문이 아닌가 의심된다.

- 소외 2는 소외 1, 소외 3과 함께 원고에 대한 형사고소를 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는 각서를 작성하여 주는 대신 원고에게 자신들에 대한 법적대응을 하지 아니할 것을 요구... (중략), 통상 피해자가 단순히 가해자를 용서하는 합의를 하여주는 행동이라고 보기에는 이례적이다.

즉, 원심은 설령 원고가 피해자와 신체적 접촉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는 적극적인 강의 의욕에서 비롯된 불상사일 뿐이고, 징계사유에 포함된 언동 또한 피해자와 친밀하게 지내는 와중에 성희롱에 대한 고의 없이 이루어진 것을 피해자가 민감하게 받아들인 것에 불과하며, 피해자가 오랜 시간이 경과한 후에야 비로소 성희롱 사실을 문제 삼은 사실이나 법원에서 피해 사실을 자유롭게 주장하고 있는 모습 등에 비추어 일반적인 성희롱 피해자로서의 면모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이유로 성희롱에 해당하지 않으며, 해임처분 또한 부당하다고 판단하였다. 이러한 원심의 판단은 성희롱에 대한 
전형적인 2차 가해 유형들과 상당히 유사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직장 내 성희롱을 어떠한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할까. 동일한 사건에 대하여 대법원은 성희롱 사건을 심리하는 방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며, 원심판결을 파기 환송하였다. 

대법원 2018. 4. 12. 선고 2017두7470 판결

법원이 성희롱 관련 소송의 심리를 할 때에는 그 사건이 발생한 맥락에서 성차별 문제를 이해하고 양성평등을 실현할 수 있도록 성인지 감수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양성평등기본법 제5조 제1항 참조). 그리하여 우리 사회의 가해자 중심적인 문화와 인식, 구조 등으로 인하여 피해자가 성희롱 사실을 알리고 문제를 삼는 과정에서 오히려 부정적 반응이나 여론, 불이익한 처우 또는 그로 인한 정신적 피해 등에 노출되는 이른바 ‘2차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하여야 한다. 피해자는 이러한 2차 피해에 대한 불안감이나 두려움으로 인하여 피해를 당한 후에도 가해자와 종전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는 경우도 있고, 피해사실을 즉시 신고하지 못하다가 다른 피해자 등 제3자가 문제를 제기하거나 신고를 권유한 것을 계기로 비로소 신고를 하는 경우도 있으며, 피해사실을 신고한 후에도 수사기관이나 법원에서 그에 관한 진술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와 같은 성희롱 피해자가 처하여 있는 특별한 사정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피해자 진술의 증명력을 가볍게 배척하는 것은 정의와 형평의 이념에 입각하여 논리와 경험의 법칙에 따른 증거판단이라고 볼 수 없다.

대법원은 성희롱 사건은 교통사고와 같이 한 순간에 촉발하는 것이 아니고 사회적 구조와 같은 맥락에서 발현된다는 특성이 있고, 그 맥락에 구속될 수 밖에 없는 피해자의 입장을 ‘피해자의 시각’에서 바라보아야 함을 강조한다.

성범죄 피해 사실을 대외적으로 고발하는 미투 운동이 확산되며, 자신의 피해 사실을 적극적으로 고발하는 피해자들 또한 많아지고 있다. 피해자들은 점점 더 크게 목소리를 내며 가해자에 대한 강력한 처벌과 제도 개선을 요구한다. 그런데 이들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은 어떠한가. 여전히 사업장에 성희롱이 발생하면 피해자는 피해자답게 처신해야 그나마 원하는 조치를 사업장으로부터 받을 수 있다.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객관적으로 입증하지 못하면 피해자를 예민한 사람이라 가스라이팅 한다.

피해자의 시각으로 성희롱 사건을 바라보는 것. 성희롱으로부터 안전한 일터를 만들기 위한 첫 걸음이지만 그 발을 내딛기가 어렵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