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환경의사가 만난 노동자 건강 이야기] 여전히 먼 50cm / 2019.07

[직업환경의사가 만난 노동자 건강 이야기] 

 

 

여전히 먼 50cm

 

 

이정엽 / 직업환경의학과 전문의, 후원회원 

 

 

어느 무더운 여름날, 당시 전공의였던 나는 보건관리 업무를 위해 한 휴게소를 방문하게 되었다. 건강 상담이 끝난 뒤 현장 순회를 위해 휴게소 내의 여러 시설을 둘러보던 중, 손님이 아무도 없는데도 서서 대기하고 있는 편의점 여직원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 전 상담을 할 때 허리 통증을 호소했던 분이었다. 나는 가까이 다가갔다.


“계속 서 있으시면 허리가 더 아프지 않으세요? 손님이 없으실 때만이라도 좀 앉아 있으시지요.”


그러자 그 여직원이 쓴웃음을 지으며 “여기는 의자가 없어요.”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계산대 뒤 쪽으로 건너가 보니 휴지통과 몇 가지 개인 짐만 놓여있을 뿐 정말로 의자는 없었다. 비록 아무런 동작 없이 가만히 서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몸을 똑바로 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신체에 상당한 부담을 준다. 따라서 장시간 서서 근무할 경우, 하지 근육의 피로도를 증가시키며 하지 정맥류, 족저근막염, 요통의 발생 위험을 증가시킬 수 있다. 직업병을 예방하기 위해서라도 근무 중 틈틈이 의자에 앉아있을 필요가 있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위에서 가끔 감사가 내려오기 때문에 앉아 있으면 안 된대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좀 더 확인이 필요할 것 같아 담당자를 찾았다. 마침 담당자는 편의점 옆 중앙계산대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심지어 그분 또한 계속 서서 근무를 하고 있었다. 담당자의 말로는 자신이 속한 사업장은 한국도로공사로부터 용역을 받아 이곳에서 일하고 있는 상황인데 가끔 도로공사에서 운영서비스평가를 하러 내려올 때가 있기 때문에 근무 태도 등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고 했다. 판매 직원이 앉아 있으면 평가 점수가 깎이는 거냐고 되묻자, 자신도 정확하게는 잘 모르겠다고 했다.

 

 

저자 이정엽님이 직접 그린 그림. 앉을 권리는 판매노동자의 건강권이다.  

 

노동자의 앉을 권리
산업안전보건기준에 관한 규칙 80조에는 ‘사업주는 지속적으로 서서 일하는 근로자가 때때로 앉을 기회가 있으면 해당 근로자가 이용할 수 있도록 의자를 갖추어 두어야 한다.’라고 노동자의 앉을 권리를 보장하고 있다. 또한 2년 전에 우리 기관에서 이 사업장을 대상으로 실시한 근골격계유해요인조사에서도 조리, 판매, 가판 등의 부서에서 근로자들이 장시간 서서 일하고 있어 허리 및 다리의 부하를 감소시키려는 조치가 필요함을 제기한 바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용역을 받는 입장에서 이 권리를 보장해 주었을 때 불이익을 받을 위험이 있는 한, 내가 아무리 작업 환경 개선을 요구하더라도 반영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 했다.


휴게시설 운영서비스 평가 시 고려 사항이 아님
우선은 정말로 도로공사 평가 시에 직원들의 앉아있는 자세가 점수에 반영되는지를 명확하게 확인하는 것이 급선무로 보였다. 나는 한국도로공사에서 실시하는 ‘휴게시설 운영서비스평가’의 담당자에게 연락을 취하여 해당 평가 시 직원이 앉아있다면 평가에 불이익을 받을 수 있는지 직접 확인해 보았다. 담당자는 비록 평가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직원이 고객을 응대할 때의 언행을 반영하기는 하나 직원이 서거나 앉아있는 자세는 평가 항목에 없다고 했고, 내가 여러 차례 되물었지만 앉은 자세가 점수에 반영되는 것은 절대 아니라는 답변은 변함이 없었다. 그렇다면 해당 사업주는 아마 정확한 확인 없이 막연하게 직원은 항상 서서 근무하는 것이 더 친절하고 공손해 보일 것으로 생각하여 그렇게 지시한 것이 아닐까? 나는 법적 근거, 의학적 소견, 한국도로공사로부터 받은 답변 등을 첨부하며 이들에게 잠시 앉거나 기댈 수 있는 입좌식 의자의 지급을 권고함과 동시에 이들이 고객을 응대하지 않을 때에는 틈틈이 앉을 수 있도록 지도해 주기 바란다는 소견서를 작성하여 담당자를 통해 사업주에게 전달했다.


판매노동자에게 여전히 먼 50cm
노동자 뒤쪽에 의자가 놓여 있을 경우, 보통 엉덩이와 의자 간의 거리는 50cm가 채 되지 않는다. 앉을 권리를 집단으로 요구하기 시작한 지 10년이 넘었지만, 그 짧은 간극을 메우는 일은 아직도 달성하지는 못한 듯 보인다. 판매직 노동자의 의자에 앉을 권리를 찾기 위한 노력은 지난 2008년 전국적인 캠페인을 통해 사업주의 법적 의무에 의자 비치가 추가되는 등 소기의 성과가 있었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2018년 김승섭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판매노동자의 27.5%가 일하는 곳에 직원용 의자가 없다고 응답했으며 의자가 있어도 사용할 수 없다는 답변 또한 37.4%나 되어 판매노동자의 3분의 2는 온종일 서서 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로 인해 판매노동자에서는 일반 여성에 비해 무려 하지정맥류가 25.5배, 족저근막염이 15.8배, 엄지발가락이 휘는 무지외반증이 67.0배나 더 발병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직업병을 예방하기 위한 다양한 개선방안은 큰 비용이라는 현실적인 벽에 부딪혀 현장에 반영되지 못하고 흐지부지되는 경우가 많다. 그럴수록 앉을 권리 보장과 같이 비용이 거의 들지 않으면서도 장기적인 효과가 있는 개선방안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필요가 있다. 노동자들의 지속적인 권리요구 및 고용노동부의 철저한 관리 감독이 있기를 기대해본다.

[노동안전보건활동가에게 듣는다] '새내기' 노안활동가의 좌충우돌기 / 2019.07

[노동안전보건활동가에게 듣는다]

 

 

 

'새내기' 노안활동가의 좌충우돌기

 

 

 

박기형 / 상임활동가 

 

 

누군가 돈보다 건강과 생명이 우선이라고 생각해 우리 사업장을 안전하게 만들어보겠다고 나선다. 하지만 노동안전보건활동의 벽은 높아 보인다. 근골격계유해요인조사, 위험성 평가, 작업환경측정 등 이름도 생소한 조사 사업들, 산업안전보건위원회와 같은 여러 회의, 용어부터 어려운 산업안전보건법과 산재보상보험법 등등. 이 모두를 알아야만 노안활동을 할 수 있는 것인지 막막할 따름이다. 다치고 아픈 사람이 있는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문제를 찾고 해결해야 할지 몰라 답답하다. 제대로 해보고 싶어도, 주변에서 지지를 받기는커녕 너도 모르는 걸 어떻게 하냐고 구박받기도 한다. 남을 설득하기 위해선 뭐라도 설명해야 하는데 나조차도 뭐가 뭔지 모르겠다. 골머리를 싸매다 몇 번이나 좌절하고 나면, 이젠 공상처리나 잘 해주자고, 조사는 외부 전문 업체에 맡겨서 구색만 맞추면 되지 않냐고 나를 다독이게 된다. 이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저도 솔직히 노안활동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시작했어요. 노조를 만들면서 간부를 뽑는데, 얼떨결에 직책을 맡게 되었죠. 노안은 별로 하는 일이 없다고 들었는데, 막상 업무를 해보니 할 일이 장난이 아니더라고요. 몇 번 포기할까 고민 많이 했어요(웃음).”

현대위아안산지회는 2017년 11월 18일 설립된 신생 노조다. 조광옥 노안부장도 지난 1년 8개월여의 기간 동안 노안을 담당한 새내기(?) 노안활동가다. 참 시작하기 어려운 노안활동. 높아보이기만 하는 벽을 그는 어떻게 뛰어넘어보려 했을까? 지난 6월 21일 안산에서 그를 만났다.

 

현대위아아산지회 조광욱 노안부장

 

노안활동가 양성학교, 빡센(?) 교육의 힘

“노안활동이 할 일이 많긴 하죠. 그렇지만 어렵고 힘들다고 느끼는 건, 모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활동 내용 전반과 구체적인 사항을 파악하려면, 정보가 필요한데 그걸 구하기가 어려운 거죠. 무슨 자료를 참고해야 할지, 인터넷에서 어떻게 찾아봐야할지 모르는 거죠. 정보만 구할 수 있어도 머리 싸매고 공부해서라도 해볼 수 있을 텐데 말이죠.”


대개 노안활동을 시작하면, 누구에게 물어봐야 할지, 어디서 정보를 찾아야 할지 알기가 쉽지 않다. 더욱이 신생 노조라면, 조합 내에서 도움을 얻을 사람도 거의 없다. 조광옥 노안부장 또한 조합에서 본인이 노안부장을 처음 역임한 만큼, 막
막함이 컸다고 토로했다.


“그런데 금속노조 노안활동가 양성학교에서 많이 달라졌죠. 머리털 나고 그런 교육은 처음 받아봤어요. 노안활동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다가, 거기 가서 빡세게(?) 배웠죠. 매월 1박 2일 일정으로 6회 차 교육을 받았어요. 단체협약 체결부터 각종 조사방법들, 사고 시 대응체계까지 노안활동 전반에 대해 다뤘죠. 물론 다 소화할 순 없었죠. 자료집도 받아왔지만, 활동하면서 다시 들춰보지도 못했어요. 그렇지만 활동하면서 교육 내용이 반복 학습되더라고요. 그러다 어느 날 산보위를 열었는데, 자기도 모르게 배운 대로 노안 사업에 대해 요구하고 회사에 반박도 하게 되더라고요. 그때부터 자신감을 얻었죠.”

2007년 금속노조가 처음으로 실시한 노동안전보건 실태조사 결과에서 당시 조합원들은 비정규 영세지회들에서 노동자의 건강과 안전을 증진하기 위해선 활동가 양성프로그램이 필요하다고 요구했었다. 이에 금속노조는 2008년 산별교섭을 통해 100인 이하 사업장의 노동안전보건 활동가들에게 월 16시간의 활동시간을 보장하는 합의를 이뤄냈다. 각 사업장에서 노안 활동을 시작하거나 더 잘 해낼 수 있는 역량을 갖추기 위한 토대를 마련한 것이다. 조광옥 노안부장의 경험은 체계적인 교육, 조직 차원에서 체계적으로 활동가를 양성하기 위한 노력이 중요하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우리에게 중요한 일, 할 수 있는 일부터 차근차근

자동차 모듈을 생산하는 현대위아 안산공장의 노동자들은 생산라인에서 장시간 서서 일한다. 이 때문에 근골격계질환이 흔히 발생한다. 조합원들의 부담을 낮추고자, 조광옥 노안부장은 생산라인 변경, 휴식시간 보장 등의 조치를 검토하다, 우선 의자 놓기 사업부터 시작해보기로 했다고 말했다.


“처음엔 노안사업이 잘 이뤄지는 기존 사업장들처럼 되고 싶다는 마음이 컸어요. 욕심이 막 나니 조급했죠. 뱁새가 황새 쫓아가는 격이었어요. 하지만 차츰 깨달았죠. 거창한 일부터 하기보다는 우리 조합의 상황과 조건에 맞는 것부터 우선순위를 두고 차근히 해가야 한다는 것을요. 조합원들에게 가장 급한 것부터 또는 조합이 할 수 있는 것부터 시도해보기로 했어요. 2018년 초에 산보위를 설치 및 운영해야 한다고 회사에 요청했어요. 

그런데 회사는 계속 조합의 요구를 묵살했습니다. 그러다 안전교육 미실시로 회사를 고발했고, 그걸 계기로 회사에서 조합의 요구를 받아들여 그해 6월쯤에 처음 산보위를 시작하게 되었죠. 그때부터 의자 비치 사업을 제안했어요. 하지만 마음대로 되진 않더라고요. 회사는 1년이 지난 지금까지 사업장 기초질서를 운운하거나 앉았다섰다를 반복하면 허리에 더 부담된다는 핑계를 대면서, 의자를 비치하지 않았어요. 결국 지회에서 사서 놓기로 했어요. 이전에는 바닥에 박스를 깔고 쉬었거든요. 그때와 비교하면, 편하게 쉴 수 있게 되었다고 조합원들이 만족하고 있어요. 점차 의자 비치 늘리고 휴게실도 제대로 확보해야죠.”

 

2018년 파업 당시 집회 모습. 조합원들의 열기가 뜨거웠다. 


실천은 곧 끊임없는 연습이다


이 외에도 조광옥 노안부장은 교육을 통해서 알게 된 것, 다른 노안활동가가 알려준 것을 하나씩 실천해봤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여러 에피소드가 있었다고 너털웃음을 지었다. 노안 활동에 대해 알게 되니 일단 해보자는 마음으로 이것저것 시도했다가, 노동청에 욕도 먹고 사측과 다투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런 우여곡절을 통해 점차 활동도 익숙해지고 자신만의 노하우도 쌓아갈 수 있었다.


“작업중지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눈이 번쩍 뜨이는 거에요. 위험을 우리가 스스로 통제할 수 있음을 깨달은 거죠. 그런데 문제는 말만 하면, 다 작업중지가 되는 줄 알았던 거예요(웃음). 노조 설립하고 얼마 안 되었을 때, 지게차 밧데리가 노후되어 황산 냄새가 퍼져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힘들어했어요. 그래서 사장한테 가서 지게차 작업을 중지하겠다고 말했죠. 그걸로 사측과 갈등이 있었지만, 이러저러해서 다행히 지게차 밧데리 교체를 하게 되었죠.


작업중지뿐만 아니라 1588-3088 위험상황 신고 전화도 해봤죠. 그때 전화로 별 얘기 다 들었어요. 진짜 신고 전화 받는 곳 맞나 싶었다니까요. 어느 날 야간작업하는데, 기름 냄새가 진동하는 거예요. 기계설비 문제 때문이었죠. 작업자들 여럿에게 구토 증상이 나타났어요. 위험하다고 판단해서, 배운 대로 1588-3088에 전화했죠. 그런데 도로 이런  갖고 전화했냐고 퉁명스럽게 얘기하더라고요.

기분도 상하고 제대로 신고받지 않는 것 같아 항의 하기로 마음먹었죠. 그러다 잠깐 후에 지청의 과장한테 전화가 왔어요. 지금 나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고, 다음날 나가겠다고 하더라고요. 다음 날 아침에 2~3명 근로감독관이 나왔어요. 사측과 협의해서 기계설비 점검해서 기름이 누출되었을 때 조치방안을 마련하고, 해당 설비에 MSDS를 게시하기로 했죠.”


공장의 담을 넘은 노안활동가 네트워크


조광옥 노안부장은 한 문제에 대해 집요하게 파고들며 배우고, 좌충우돌하며 배운 것을 써먹어 보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물론 사업장에서 노안활동가들이 고군분투하다 보니 여러모로 힘이 들 때도 많았다. 이때 가장 큰 힘이 되어준 것이 다른 노안 활동가들의 조언과 도움이었다. 근골격계질환으로 산재신청을 하려고 할 때, 다른 지회의 노안활동가들이 도움을 주지 않았다면 자기 힘만으론 해내지 못했을 것이라며, 공장의 담을 넘어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른 지회 노안활동가나 안산노동안전센터의 도움이 컸죠. 최근에 근골격계질환으로 조합원들이 병원에 진단받으러 갈 때, 업무관련성을 제대로 입증받기 위해서 간호사이기도 한 조합의 노안차장과 동행하도록 했어요. 진단에서부터 산재신청의 성패가 갈릴 수 있다는 사실을 다른 노안활동가에게 배웠거든요. 노안담당자의 동행 조치도 다른 지회를 참고한 것이에요. 앞으로 건강검진기관과 보건관리자도 조합원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방향으로 변경하고자 산보위에서 논의 중입니다. 어느 기관이 좋은지 다른 노안활동가에게 조언받아보려 해요.”


이렇게 노안활동의 경험을 서로 나눌 수 있는 장이 중요하다. 누군가 벽에 부딪혔을 때, 함께 벽을 무너뜨리거나 벽을 넘을 수 있도록 힘을 보태줄 수 있는 이들이 있어야 한다. 조광옥 노안 부장은 금속노조 노안활동가 양성학교에서 배운 지식만큼 값진 것은 바로 노안활동가 간의 네트워크라고 말했다. 노안활동가들끼리 모인 SNS 소통창구에서 여러 사업장의 노안활동 소식 및 정보를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위험성 평가를 예로 들면, 각 사업장의 결과보고서나 조사 준비 과정에 대해 공유함으로써, 신생 사업장에서도 위험성 평가를 스스로 수행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이다.


노안활동, 어렵지 않아요~~


“사업장의 담을 넘어서서 서로의 경험을 나누고 배울 수 있다면, 노안활동의 벽이 많이 낮아질 것 같아요. 건강과 생명이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 어딨겠어요. 모두가 안전한 일터를 함께 만들어갈 수 있도록, 소통할 수 있는 창구가 더 늘어나길 바랍니다. 저도 아직 배우는 단계지만, 나중에는 다른 활동가들에게도 저의 경험을 나눠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