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로 읽는 노동] 이 치열한 무기력을 / 2021. 03

[문화로 읽는 노동]

이 치열한 무기력을 - 제니퍼 M. 실바의 책 <커밍 업 쇼트>

채은 선전위원

세대를 구분하는 단어들이 있다. 그 시절을 특징짓는 '공통적인 것'들을 추상화시켜 만들고는 입으로 전하고 온갖 얘기에 널리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X세대, IMF세대 뭐 이런 것들 아니던가. 참 명쾌하다. 단어 하나로 상당히 많은 것들을 이야기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 단어만 떠올려도, 그 시절의 정치, 사회, 문화, 경제를 한 순간에 군더더기 없이 느끼게 된다. 나도 이젠 옛날 사람이 되어서 내 시절을 구분 짓는 그 단어를 들을 때마다 '아~ 나 때는 말이지~'가 저절로 나오려고 한다. 아! 당연히 '라떼'를 시전하지는 않는다. 볼품없어 보여서 말이다.

'라떼'는 그래도 괜찮았던 걸까?

나는 IMF 사태 때 학창 시절을 보냈고, Y2K가 세상을 다 혼란스럽게 만들 것이라는 공포 속에서 '대학을 어디로 가느니, 마느니' 고민했었다. 97년 외환위기가 터졌을 때는 어느 날 같은 반 친구가 더이상 학교에 나오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꽤 있었다. 아버지의 사업이 부도가 나서 몰래 다른 곳으로 도망을 가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생기곤 했다.

우리집은 불행인지 다행인지 IMF 사태가 오기 전, 이미 어른들의 사업 실패로 가세가 기울었던 터라 마땅히 더 망해서 도망갈 곳도 없었다. 뭔가 실패에 있어서, 좀 더 앞선 일종의 선배가 된 것 같았다. "그래, 그래도 어쨌든 살아남기를..." 어제는 친구의 자리였지만 오늘은 주인을 잃은 그곳을 향해 마음속으로 말했을 뿐이었다. 그렇게 담담히 받아들였던 듯하다.

당시 함께 떠오로는 기억은 교대의 입시 점수 상향이었다. 그 당시 각광받는 직업은 '안정'을 담보하는 선생님이었다. 그래서 그 당시에 갑자기! 교대와 사범대의 인기가 하늘로 치솟았었다. 학생들 반 이상이 선생님이 되는 게 '꿈'이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돌이켜보면, 그래도 나름 치열하게 열심히 하면, '살 수는' 있었던 시절 같았다. 그러니까 그때는 어떻게든 대학을 가면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고 - 물론 내 앞 세대(90년대 초중반 학번인 이들)보다 취업은 녹록지 않았고 대학 생활의 낭만, 소위 운동이니, 사랑이니, 이런 것보다 조금은 더 취업 걱정을 하던 시대였지만 - 그래도 꿈은 가져 볼 수는 있었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대학을 나름의 낭만을 간직하고서 다녔던 것 같다. 학점 따윈 상관없고, 고시라는 것도 준비해보고, 하고 싶은 활동도 하고. 그렇게 좌충우돌하는 가운데, '취업'의 초조함이라는 것은 없었던 것 같다.

불확실한 시대, 부유하는 노동자들

다시 돌아와 현재를 바라보자니 답답함부터 몰려온다. 자신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온갖 노력에 비해 돌아오는 결과는 참담하다. 안정적 일자리라고 불리는 것들에는 더는 여유가 없다. 거기에 가기 위한 경쟁은 날이 갈수록 치열해진다. 우리 사회의 중심에 닿지 못한 사람들이 주변부를 채운다.

불안정한 주변부에 놓인 사람들에겐 온전한 자리를 찾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항상 들뜬 상태로 존재하는 화학원소의 전자들처럼 말이다. 둥둥 떠다니는 전자들이 다른 것과 결합하여 안정적 상태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은 오직 화학물질의 세계에서나 가능한 일일뿐. 우리가 사는 세계에선 끊임없이 주변으로 밀려나며, 언제나 부유하는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은 갈수록 점점 늘어만 간다.

<커밍업 쇼트 : 불확실한 시대 성인이 되지 못하는 청년들 이야기>라는 책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이 사회에서 살아갈 자리를 찾지 못해 부유하는 청년들의 모습을 연구 대상자들의 삶을 때론 멀리 때론 곁에서 조명하는 여러 인터뷰를 통해 치밀하고 꼼꼼하게 보여주고 있다.

부제처럼 불확실성이 날로 증대하는 시대에서 우리가 '어른'이라고 부르는 사회적 지위를 성취하지 못하는 실태를 담아낸다. 나아가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문제의 원인을 들춰내고 대안의 방향을 모색해보려 한다.

각자도생, 이 치열한 무기력을

작가는 이 책에 담긴 인터뷰 내용은 '평생 일터', 즉 생활 임금을 지급하고 차로 출퇴근 할 수 있으며 일상적 삶에 의미를 부여해주는 안정되고 예측 가능한 일자리를 찾고 유지하는 수많은 노력들로 가득 차 있다고 이야기한다. 노동계급 청년들은 증대하는 불확실성 앞에서 막중한 리스크를 감내하길 요구받는다.

하지만 노동계급 청년들은 무기력 상태에 직면한다. 질병, 가족 해체, 장애, 부상 등 예기치 못한 사회경제적 충격을 겪으며, 그때마다 휘청거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회의 안전망은 무너졌고, 연대의 끈은 사라졌다. 지금 여기서 살아남기 위한 해결책들은 각자의 몫으로 남겨질 뿐이다.

각자도생의 시대랄까. 물론 동시에 그 외 대부분의 경우엔 '정당한' 리스크만 감수하면, - 등록금을 마련하고 대출을 받거나 투자 목적으로 집을 사는 등의 - 안정된 삶을 누릴 수 있다고, 그렇게 계층 상승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가 치르고자 하는 '정당한 리스크'는 분명 존재한다. 비록 각자마다 다르게 정의되고 경험될지라도 말이다. 내 미래를 위해 당연히 투자되어야 하는 비용이라고 '여겨야 마땅한 어떤 것'을 공정하게 지출했을 때, 충분한 대가나 보상이 돌아올 것이라는 기대가 우리 모두에게 있다.

그런데 바로 그 공정함이 무너지는 순간, 균열이 생긴다. 더 놀라운 것은 그럴 때 각자도생의 사회를 떠받치는 공정함이 흔들리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역설적이게도 균열은 '너와 나의 편가르기'로 형상화된다.

"내가 너보다 더 많이 노력하고 더 많은 비용을 지출했는데. 너는 그렇게 안 하지 않았느냐.", "운이 좋아서냐. 아니면, 인맥, 혈연, 학력 덕분 아니냐. 여자라서 더 혜택받는 거 아니냐.", "시험을 보든 면접을 보든 경쟁을 치르고 거기서 승리해 자격을 획득하지도 않은 사람들에게 우리와 동등한 보상과 자격을 주는 게 말이 되냐." 등등. 자신이 들인 노력과 비용이 부정당했다며 화를 낸다.

물론 이런 반응이 이해가 안 될 일은 아니다. 여기서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지 말고 사회구조적 문제로 해결해야 하니 서로 싸우지 말자는 식의 윤리적 수사는 잠시 접어두자. 오히려 직시해야 할 것은 억울하다 못해 치밀어 오르는 이 분노가 어디로, 어떻게, 왜 향하는가 하는 문제다. 우리의 감정은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는 곳이 아니라, 바로 눈에 들어오고 손아귀로 움켜쥘 수 있는 사람을 향해 움직이는 경향이 있다.

곁에 있는 이들에게 손쉽게 온갖 공격과 비난을 가하게 되는 게 사람의 인지구조가 아닌가. 결국, 우리는 리스크 그 자체뿐만 아니라, 리스크를 감당할 때 겪는 박탈감과도 싸워야 하는 세대다. 성실하게 하루를 보내면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시대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며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친다.

진창에 내팽겨쳐진 '공정'

"노동계급 청년들은 고등 교육 기관 같은 조직이 사회 통합과 계층 상승에 이바지하리라 기대하지만, 상호작용 실패를 연달아 경험하고는 자신의 미래를 빚는 바로 그 제도들을 불신하고 경계하게 된다. 일자리를 구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고 가족 관계는 깨지기 쉬우며 사회 안전망이 축소되고 미래가 불확실한 시대에 성인이 되는 것은 선택지가 없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사회가 요구하는 정상적인 어른의 모습이 있다. 이쯤 되면 취업해야 하고, 다음에는 결혼해야 하고, 집을 마련하고 아이를 낳고 기르고, 노후를 챙기는 등등. 인생의 정답이랄까. 그게 정말 이 사회에서 어른이 되기 위한 조건이라면, 그걸 차근히 밟아갈 수 있게 도와주는 것도 사회의 공적 책임이 아니던가.

이토록 심각한 취업난을 야기한 것, 결혼·출산·육아를 꿈꿀 수 없게 하는 가장 큰 걸림돌이 바로 우리 사회의 불평등, 불확실성이 아니던가. 이곳에서 성인이 되는 순간은 끝이 언제인지 모른 채 끊임없이 지연될 뿐이다. 청년에 멈춰버린 사람들을 외면하고 있는 건 누구인가.